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 13절부터 15절까지 입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곳은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아멘.

 

야곱의 예언이 지닌 포괄적 의미와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방금 봉독한 본문은 아마 읽는 분이나 듣는 모두 도대체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운 구절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도 번역에 대한 부분들을 조금 다루게 되겠지만, 성경을 번역한다는 일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여러분, 이제까지 야곱의 예언과 유언을 바라보는 가지 시각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번째 사실은,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전체에게만 국한된 내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으나 에서는 약속의 자손에 포함되지 못하고 야곱만 선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열두 아들 모두가 약속의 자손으로서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있을 모든 성도가 어떠한 어려움을 겪으며 어떤 신앙적 목표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본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하자면 말씀은 바로 우리에게 주는 교훈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번째로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열두 아들에게 주시는 이야기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아주 깊은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에 말씀은 우리와 직접적인 상관이 있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가지 원리를 먼저 생각하시고 말씀을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스불론과 잇사갈의 등장 순서와 배경

오늘은 그중에서 서열로 본다면 아홉 번째 아들과 번째 아들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스불론과 잇사갈, 사람은 사실 순서상 뒤에 나와야 하지만 오늘 먼저 다루게 이유는 어머니가 같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레아의 아들들입니다. 앞서 르우벤부터 유다까지 레아의 아들이 먼저 언급되었고, 아들 역시 어머니가 같기에 순서와 상관없이 곧바로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불론과 잇사갈이 먼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들이 주는 교훈을 살펴보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말씀이 우리와 관계가 있으며 그리스도께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함께 확인해 보려 합니다.

 

스불론 이름의 의미와 지리적 예언의 묵시적 해석

성경을 보면 스불론이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났을 레아가 “하나님이 나에게 후한 선물을 주셨다”라고 고백하며 지은 이름입니다. 그래서 ‘스불론’이라는 이름 자체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야곱이 남긴 예언 중요한 대목은 스불론이 해변에 거주하며 경계가 시돈에까지 이를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특정 지파가 거주할 경계에 대해 언급하는 번째 예언에 해당합니다. 많은 학자는 예언이 훗날 모세가 가나안 땅을 분배할 스불론 지파가 받은 땅의 경계와 연관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 배분된 땅의 위치를 성경에서 확인해 보면 기대와 달라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스불론의 땅은 시돈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며, 해변이 아닌 완전히 내륙 지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갈릴리 해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어적인 관점에서 , 이는 ‘해변을 향해 있고 시돈을 향해 있다’는 방향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도리어 예언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듯 르우벤이나 유다의 경우처럼, 그들의 앞날을 이야기할 때는 대개 ‘묵시적 언어’를 사용합니다. 일종의 예언적 언어이자 은유법이라 있습니다. 가령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라고 했을 유다가 실제 사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스불론에 대한 예언 또한 지파가 지닌 독특한 특징과 성격을 묵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해변과 시돈이 상징하는 부와 하나님의

그동안 야곱의 예언이 칼과 같은 도구로 표현되다가 갑자기 스불론에 이르러 지명이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역시 묵시적 언어로 이해한다면, 스불론을 향해 ‘그는 해변과 같다’라고 부르는 의미를 찾을 있습니다. 해변이란 우리가 흔히 아는 바닷가를 뜻합니다. 여러분, 혹시 ‘시돈과 두로’라는 도시를 아시는지요? 이곳은 팔레스타인 지역과 소아시아, 그리고 훗날 알렉산더 대왕이 태어난 마케도니아 지역을 잇는 요충지였습니다. 모든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아주 중요한 항구 도시가 바로 시돈과 두로였습니다.

 

그러므로 ‘해변, 시돈, 두로’라는 표현은 배를 통한 ‘무역’을 상징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야곱은 스불론에게 “네가 부자가 것”이라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누리게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혹여 기복 신앙을 경계하는 마음 때문에 ‘세상의 부를 얻는 것이 무슨 축복인가’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재물이나 자녀와 같이 눈에 보이는 복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의미가 더욱 깊게 승화되었으나, 당시에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땅의 것으로 표현하시던 방식이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를 축적하려는 인간의 본성과 주객전도의 위험

스불론이 복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놓치기 쉬운 대목이 중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곳은 매는 해변이라”라고 예언합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할 있는데, 바로 He shall become a haven for ships”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haven’은 우리가 아는 해변이라는 뜻과 함께, ‘배를 위한 안식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스불론 자체가 배들이 머무는 해변, 항구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배를 위한 해변은 배들이 들락날락하는 항구를 의미합니다. 성경이 굳이 ‘항구’라는 단어 대신 ‘해변’이라는 표현을 이유는, 단어에 ‘피난처’나 ‘은신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스불론은 앞으로 수많은 배가 들어와 안식하며 자기에게 부를 가져다주기를 원하고, 부가 자기 곁에 머물기를 바라는 존재가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을 다스리거나 뜻에 맞게 사용하기보다, 자체가 목적이 되어 그것을 축적하는 몰두하는 성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예언 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더불어 스불론이 지닌 독특한 성격이 함께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부를 삶의 중심에 두고, 풍요가 자기에게만 머물게 하려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리는, 일종의 주객전도에 대한 암시인 셈입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과 신앙의 내적 갈등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부분은 무척 자명하면서도, 성경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대목입니다. 설교 시간에 비슷한 권면을 자주 들었음에도 우리는 문제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예수를 믿기 전은 물론이거니와, 믿고 하나님을 알게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갈등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리는 물질과 건강 같은 많은 복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고백 뒤에 "이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며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하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처음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스불론처럼 물질이 곁에 머무는 자체를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부를 소유하게 되면 부를 갈망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돈이 다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말에 동의하시나요? 돈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말의 이면에는, 사실 ‘더 많은 돈’을 끝으로 여기는 욕심이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스불론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무역을 통해 부를 누리는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었으나, 점차 풍요를 자기에게만 묶어두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이 해변이 되어 배가 실어 오는 부를 축적하는 것에만 마음을 쏟다 보니, 결국 주객전도의 상황에 이르게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려 했던 마음이 변질되어, 이제는 자신의 물질적 풍요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도구로 삼으려 하는 위험한 자리에 서게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이용하는 연약함

우리는 점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이용하면서도, 정작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예수를 믿으면서 설마 돈이나 건강만을 쫓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바로 '나는 그렇지 않다'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더욱 스스로에게 속기 쉽습니다. 무척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유혹은 단번에 이길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싸워나가야 하는 과제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존경하는 사도 바울과 모든 선지자도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바울은 사역 중에 성도들로부터 "자신의 배를 불리려 한다"거나 "사도를 사칭하여 헌금을 가로챈다" 모진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오죽 속이 상했으면 성경에 "내가 오해를 받지 않으려 너희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직접 벌어 썼다" 기록했겠습니까. 양을 먹이는 목자가 젖을 먹고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이 마땅함에도, 바울은 그런 비난을 참을 없어 스스로 권리를 포기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단호하게 행동해야 했을 만큼, 물질과 탐욕의 문제는 평생 우리를 시험하고 괴롭히는 난제입니다. 누구도 문제에서 자유롭다 확신할 없으며, 신앙의 연륜과 관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순간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하나님이 주인이신지 아니면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종으로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소한 욕심과 감정에 흔들리는 신앙의 현실

여러분, 우리 가운데 과연 누가 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있겠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항상 문제와 고민하며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이런 문제쯤은 이미 초월한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닥치는 진짜 어려운 문제는 깊고 오묘한 신학적 난제가 아닙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교리적으로 아주 미묘하고 힘든 문제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은 아주 사소한 욕심, 조그만 자존심, 혹은 타인에게 받은 작은 상처들입니다. 도리어 그런 사소한 것들이 우리 안에서 가장 풍랑을 일으키고, 우리의 신앙을 너무나도 쉽게 무너뜨리곤 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의 많은 성도가 기쁘고 즐겁게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누군가의 한마디에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쓰러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는 그토록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인물들이나 지금의 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문제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우스갯소리로 본인은 구약의 십계명보다 ‘돈의 십계명’이 와닿을 때가 많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돈 외에 다른 신을 앞에 두지 말라”거나 “돈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더군요. 제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도리어 그것이 솔직한 고백이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를 믿고는 있지만 정작 급할 때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지갑을 의지하며 기도하게 된다는 씁쓸한 이야기였습니다.

 

물질이 주인이 때의 위험성

여러분, 정확한 출처는 없으나 웨슬리의 말로 알려진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돈은 가끔 좋은 종이 때가 있지만, 돈이 주인이 때는 항상 나쁜 주인이 된다”라는 말입니다. 돈이 단지 나의 필요에 의해 쓰이는 수단이 아니라, 도리어 나의 모든 것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스불론 역시 물질을 위한 해변이 되고자 했습니다. 배가 들락날락하며 많은 것을 가져다주길 원했고, 특별한 욕심이 아니라고 여겼던 그것이 어느새 자신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었음을 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주인이 되시면 돈뿐만 아니라 영혼과 , 그리고 가족들까지도 마땅히 있어야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말로는 하나님을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내가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면, 사실은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 경우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기도할 때조차 우리는 하나님께 명령하듯 구할 때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떼쓰는 기도’라는 표현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떼를 쓰면 결국 들어주지 않으시겠느냐는 생각인 것이죠. 물론 자녀가 애타게 매달리는데 들어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편으로 저는 이러한 기도가 무조건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 수준이 그러한데 하나님 앞에 어찌 떼를 쓰지 못하겠습니까? 성장해가며 점차 성숙한 기도를 배우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수준에 맞지도 않게 지나치게 거룩하고 격식 있게만 기도하는 또한 어색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만났을 “아버지, 그동안 지내셨어요?”라고 친근하게 인사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평소 쓰지도 않는 극존칭을 써가며 어렵게 대화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본질과 하나님의 주권 인정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를 가끔 스스로 한번 기울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참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내가 멋있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느 순간 하나님을 향한 명령이 되어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기도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사실이 있습니다. 응답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만약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요구하고, 그것을 주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그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왕이 아니라 여러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스불론의 삶에서 가장 위험했던 경계선은 명확합니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망각한 , 오로지 물질만을 끌어들이는 해변이 되려 했던 마음이었습니다.

 

잇사갈의 이름과 나귀 비유의 번역 문제

잇사갈은 어떤가요? 잇사갈의 이름은 르우벤이 가져온 유명한 '합환채' 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합환채는 일종의 사랑의 묘약 같은 것인데, 레아가 그것을 라헬에게 주고 대신 야겁과 동침할 권리를 샀습니다. 결과로 태어난 아들이기에 '잇사갈'이라는 이름에는 ‘보상’, ‘내가 보상을 받았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잇사갈에 대해 야곱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라고 예언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본문은 원문 자체가 워낙 난해하여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롭습니다. 우리말 성경 <새번역> 보면, 이를 ‘건장한 나귀’가 아니라 오히려 ‘뼈만 남은 나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뼈와 가죽만 남았다는 뜻이니, 본래 의미와는 완전히 상반된 해석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이 갈리는 이유는 전체 문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단어의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원문에는 ‘뼈’를 뜻하는 ‘게렘’이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런데 단어는 가지 상반된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뼈가 튼튼하여 매우 건강하다는 뜻으로, 우리말로 치면 ‘통뼈’와 같은 강건함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너무 고생하고 수고하여 살은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는 상태를 일컫기도 합니다. 결국 ‘게렘’이라는 단어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가지 번역이 나오게 것입니다.

 

좋은 것을 좇아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는 잇사갈

그렇다면 여러 번역 우리는 어떤 해석을 택해야 할까요?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어지는 전체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는 잇사갈이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 평안과 기쁨을 주는 것을 얻기 위해 스스로 압제를 받고 노예가 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종이 될지라도 좋은 환경을 누리고자 스스로 멍에 아래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본문 15절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 좋은 것을 너무나 갖고 싶어서, 스스로 어깨를 내밀어 짐을 지고 종의 길을 선택했다. 종이 되더라도 나는 저것을 소유하고 싶다”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뼈만 남은 나귀’라는 번역을 택한다면, 이는 잇사갈이 압제를 받았기에 뼈만 앙상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서상 건장했던 나귀가 안락한 환경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처하며 고난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문맥적으로 매끄럽습니다. 충분히 힘이 있고 자유로운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달콤한 평안을 위해 스스로 자유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욕망을 위해 자유를 포기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중요한 핵심은 나귀가 건장했느냐 혹은 뼈만 남았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좋은 환경을 보자마자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서 스스로 노예가 되는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민수기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똑같은 만나만 먹는 현실에 지쳐 내뱉은 불평입니다. 사실 이해가 전혀 가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을 만나 요리로만 해결하며 40년을 버틴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양념 하나 없이 쌀밥만 먹는 듯한 곤욕스러움은 짐작이 가지만, 진짜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기를 주실 있겠느냐”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시험했습니다. 결과로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때 그들이 덧붙이던 말이 있습니다. 바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노예가 된다는 뜻입니다. 고기와 부추와 마늘을 먹을 수만 있다면, 다시 쇠사슬에 묶인 종이 되어도 좋다는 어처구니없는 선택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과연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설마 우리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도 내가 원하는 하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언가의 노예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어리석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금 바로 우리 내면에 숨겨진 집착과 욕망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락함과 소유를 위해 스스로 짊어지는 현대의 멍에

제가 언젠가 휴대전화를 사러 갔을 경험한 일입니다. 자리에 있던 판매원과 손님 모두 한국 분들이라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갔습니다. 저는 서비스를 받으러 갔었고, 다른 손님은 새로 출시된 기기를 사러 오셨더군요. 그분이 무척 예쁘게 만들어진 전화기를 한참 만지작거리다가 사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옆에 이런 안내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 가입하시면 평생 할부 혜택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거의 공짜로 주는 것처럼 느껴져 저렴하다는 생각이 법한 제안이었습니다. 손님이 “정말 평생 할부가 됩니까?”라고 묻자, 판매원은 “물론입니다. 24개월도 되고 평생 할부도 가능합니다”라고 친절히 답하더군요. 그때 손님이 판매원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평생 할부 혜택이라니요. 그거 좋은 아니네요. 무기징역이잖아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말이 틀린 하나도 없었습니다. 평생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가운데 고작 휴대전화 하나를 갖고 싶어서 그런 ‘무기징역’ 같은 할부를 고민할 분들이 의외로 많을 것입니다. 범위를 조금 넓혀볼까요? 지금 여러분이 사시는 집의 모기지(Mortgage) 어떻습니까? 30 동안 갚아야 한다면 그것 역시 30 유기징역이나 다름없지 않나요?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온전한 집도 아니요, 사실상 빌려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안에서 누릴 안락한 삶과 미래에 대한 확신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멍에 아래로 들어갑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삶에서 아주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쾌락과 집착의 노예가 인간의 실상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기 좋은 ,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것의 종이 되기를 자처하며 살아갑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매일같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공부해라”라는 독촉과 더불어 “게임 그만해라”라는 질책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처음부터 게임의 노예가 되려고 시작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저 재미있으니까 시작하는 것이지만, 부모의 눈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게임이 마치 하나님이라도 거기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깊은 걱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보는 부모님의 모습은 과연 다를까요?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나는 너와 다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있습니까? 아이들은 고작 게임에 빠져 있지만, 어른들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무엇인가에 붙잡힌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기에 우리는 반드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스불론과 잇사갈이 그러했듯,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때로는 돈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안락함이나 행복, 혹은 순간의 쾌락과 즐거움이 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무언가의 종이 되는 일을 우리는 지금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설탕 바른 쇠사슬과 우상 숭배의 위험

본문을 읽으며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것은 단지 설탕을 발라 놓았을 , 결국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구나!”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설탕을 묻힌 쇠사슬’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았는데, 놀랍게도 영어에 실제로 sugar-coated chains’라는 표현이 있더군요. 우리나라 말로 쉽게 풀이하자면 ‘꿀 바른 독약’과 같은 의미라 있습니다. 겉에 발린 꿀이 달콤해서 정신없이 먹다 보니, 안에 독약까지 삼키게 되는 꼴입니다.

 

우리 이러한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이 세상의 즐거움에 쏠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어느새 그것을 우상으로 섬기게 됩니다. 정작 자신이 무엇인가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말입니다.

 

세네카는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자신의 종이 된다”라는 통찰력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현인들이 지녔던 이러한 자기 성찰의 능력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울림을 줍니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갈릴리 지방의 역사적 배경과 수치

성도 여러분, 우리는 풍요를 갈망하는 해변이 되기도 하고 달콤한 쾌락을 쫓는 노예가 되기도 하는 스불론과 잇사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가 여기서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납달리 지파와 더불어 우리가 아는 ‘갈릴리’ 지역에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성경은 이곳을 바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지리적으로 보면 거대한 호수라 부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조금만 풍부해도 그것을 바다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성전에 비치된 물그릇인 ‘물두멍’조차 그들은 바다라고 칭하곤 했습니다. 사막 지형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토록 많은 물은 바다와 같은 경외감을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갈릴리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바다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스불론과 잇사갈은 갈릴리 해변 근처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습니다. 가나안 정복 초기나 사사 시대만 해도 지파들에서는 기라성 같은 영웅들과 사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흐를수록 상황은 나빠졌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 지역 백성들은 쫓겨났고 빈자리에 이방인들이 대거 유입되었습니다. 결국 이곳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는 수치스러운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의 예언과 갈릴리에 비친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지기 훨씬 ,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이를 예언한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도다 하였느니라”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북이스라엘이 멸망의 길을 걷던 기원전 722년경입니다. 당시 이방인들이 갈릴리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장차 그곳이 ‘이방의 갈릴리’라 불리게 것을 예언했습니다. 웃시야와 히스기야 같은 왕들이 남유다를 통치하며 북이스라엘의 몰락을 지켜보던 혼란의 시기에 선포된 예언은 결국 역사의 현장에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의 갈릴리’라는 별명은 견디기 힘든 수치였습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 자부하던 그들에게, 자신들의 거룩한 땅이 이방인의 땅으로 치부되는 것은 커다란 자존심의 상처이자 영적인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멸시와 나사렛 예수

이러한 수모는 역사가 흐를수록 더욱 깊어졌습니다. 기원전 100년경, 마카비 가문이 혁명을 일으켜 유대 땅을 수복하고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본래 유다 지파가 아닌 레위 지파였으나, 이스라엘의 독립을 부분적으로 회복하며 종교적 결속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당시 ‘하시딤’이라 불리는 경건 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그들은 이방의 땅이라 불리던 갈릴리 거주민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칼을 들이대며 유대교로의 개종을 압박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갈릴리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반강제적 할례를 받고 유대교인이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러니 정통을 자부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눈에 그들이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저들은 끝에 굴복한 가짜 유대인일 뿐이라며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훗날 예수님을 향해 던졌던 비수 같은 말들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예수님이 자라신 나사렛은 바로 잇사갈 지파의 땅에 속한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있겠느냐? 거기는 이방인의 갈릴리가 아니냐”라고 폄하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라는 지리적 한계에 갇혀, 그곳에서 비치기 시작한 생명의 빛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비친 창조의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예언의 실상은 참으로 냉정했습니다. 그는 갈릴리를 향해 “너희는 이방인의 갈릴리다”라고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사망의 그늘진 곳”이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이사야는 가감 없이 땅의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기왕이면 빛으로 오실 예수님을 생각해서 조금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수식어를 붙여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보통 우리는 훌륭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가 나고 자란 곳까지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 확실히 달랐다”라고 믿고 싶어 하며 이야기를 꾸며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미화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사망의 음침한 그늘이 있었던 곳”이라고 명확히 규정합니다. 스불론과 잇사갈을 향해 “너희는 죽은 자와 같지 않았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과 은사를 누리며 건장한 나귀처럼 강건하게 세워주셨음에도, 결국 세상 욕심의 노예가 되어 압제 아래 신음하던 그들의 실상을 낱낱이 고발합니다. 그리고 바로 죽음의 자리에서 놀라운 반전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곳에 빛이 비추었다”라고 말입니다.

 

빛은 단순히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와 절망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전혀 새로운 생명의 빛이 침투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셨을 , “빛이 있으라” 선포하셨던 창조의 역사가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기의 대목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우리를 향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갈릴리에 비친 빛은 절망뿐인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창조적 구원의 빛이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태초의 창조 때처럼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죄의 권세 아래 억눌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들을 자유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과거의 트라우마나 상처, 혹은 실패의 기억에 붙잡혀 인생을 허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현재의 삶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지금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에도 예배를 드리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하는 깊은 고민과 힘든 상황들로 인해 마음이 분산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일상의 사소한 걱정부터 중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과연 노후에 걱정 없이 있을까? 100 시대라는데 은퇴 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하는 염려들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 우리는 자신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의 굴레에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를 향해 선포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근심에 삶을 빼앗기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어둠에 매여 있는 자가 아닙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가진 소유와 생각, 인생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영원한 앞날까지 모두 영원하신 하나님께 드린 자요, 그분께 붙잡힌 자가 되었습니다.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과거를 변화시키고 상처를 치유하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내가 이상 세상의 근심과 과거의 어둠에 묶여 있을 이유가 없음을 깨닫는 , 그것이 바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짐을 안으시는 주님의 사랑

현재의 내가 결코 무너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비록 지금 눈앞의 현실이 막막하여 힘겨워 보이고, 인생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으며, 깊은 우울감이 나를 덮칠지라도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놀라운 빛이 이미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울함에 빠진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모습 그대로 안고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무거운 감정들을 하루빨리 털어버리고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의 방식은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아, 너희의 짐은 내버려 두고 몸만 오너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짐을 채로 내게 오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아픈 과거와 고단한 현실, 그리고 불안한 미래까지도 통째로 품에 안으시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예언의 힘이자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성경은 증언합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것임이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위해 땅에 오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상황은 끝난 것입니다.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시는 아버지이자 평강의 왕이신 그분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데, 이보다 놀랍고 든든한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시는 역사

이사야 예언의 대미를 장식하는 결정적인 대목이 나옵니다. “그가 나라 위에서 군림하여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모든 선포의 핵심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말씀을 주셨고, 이사야는 백성들에게 이를 공포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칠백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칠백 년이라니, 하나님의 스케일은 참으로 웅대합니다. 우리가 백세 시대를 말하며 조급해할 , 하나님께서는 수백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신실하게 일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은 이천 년이 지나 성취되었고, 아담과 노아에게 주셨던 약속은 가늠조차 없는 세월을 지나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완성되었습니다. 거대한 역사를 끊임없이 밀고 오신 동력은 오직 하나, 바로 ‘하나님의 열심’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선포된 이천칠백여 년이 지난 오늘, 하나님의 열심은 멈추지 않고 지금 우리에게까지 닿아 있습니다. 5 10 열두 , 가디나 나성 남포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이 성취되고 있는 현장입니다. 수천 갈릴리에 비치리라 약속하셨던 빛이, 오늘 여러분의 가운데 여전히 역사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인생을 맡길 있는 근거

여러분, 정도의 열심과 고집,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을 가진 분이라면 우리의 인생을 온전히 맡길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분과 함께 인생길을 걷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복된 일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런 압도적인 사랑을 경험해 적이 없기에 때로는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한 사랑에 조금도 아낌이 없으십니다. 우리 신앙의 시작도 하나님의 열심이었으며, 우리의 마지막을 장식할 완성 또한 하나님의 열심과 사랑일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나의 임금님이시며 나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역사 속의 왕들, 심지어 성군이라 칭송받는 세종대왕조차도 백성들을 오늘날의 민주주의 가치만큼 온전히 대우하지는 못했습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대에도 고국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소식은 우리를 근심하게 합니다. 겉으로는 좋은 말들을 내세우지만, 정작 사람보다 권력이 우선시되는 현실을 우리는 매일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발을 씻기시는 낮은 자의 임금님

그런데 우리가 믿는 임금님은 세상의 왕들과 전혀 다르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을 씻기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며,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고통과 외로움이 가득한 십자가, 오직 저주뿐인 참혹한 장소로 우리를 대신해 들어가신 분입니다. 또한 임금님은 우리가 땅에서 넉넉히 살아갈 있도록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돕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 성령님이 되어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땅에서 직접 살아보셨기에, 우리가 마주하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단한지 누구보다 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구절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한숨을 내쉬고, 아픔과 눈물을 삼켜야 하는지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땅에 머무는 동안 친히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결코 우리를 홀로 두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이길 없는 우리의 고통

여러분, 우리가 짊어진 무거운 짐도, 우리를 괴롭게 하는 어떤 일도 결코 하나님의 열심을 이길 없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는 감당하기 버거운 일들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속이 상해 ‘이런 상황에서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싶을 만큼 힘겨운 순간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일을 마주할 때마다 실망하고 좌절합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동체나 지도자, 혹은 곁에 있는 성도들에게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실망과 좌절, 답답함과 속상함,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절망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열심을 결코 꺾을 없습니다. 믿음을 가슴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열심과 지극한 사랑이 우리 인생의 시작이었으며, 또한 우리 인생의 마지막 완성일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스불론과 잇사갈의 이야기는 갈릴리에서 울려 퍼진 그리스도의 외침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주님께서는 마태의 입술을 빌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였고, 이제 우리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 우리의 진정한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우리의 시민권은 오직 주님의 나라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을 주님 앞에 엎드린 저희를 일으켜 세워 주시고, 주님의 열심과 사랑으로 통치하여 주옵소서. 거룩한 말씀으로 힘을 주시고, 능력 있는 역사로 저희를 온전히 세워 주옵소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I. 강해 설교집 > 창세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159-행복한 사람  (1) 2026.01.19
창세기-158-복 있는 자  (3) 2026.01.18
창세기-156-강하나 약한 자  (0) 2026.01.13
창세기-155-약하나 강한 자  (1) 2026.01.11
창세기-154-파워신앙  (0) 2026.01.08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