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8절로부터 12절까지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아멘.
유다를 향한 축복과 반전의 역사
오늘 우리가 함께 상고할 본문은 야곱이 아들 유다에게 남긴 예언입니다. 앞서 르우벤과 시므온, 그리고 레위에게 선포되었던 말씀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온도 차이가 실로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즉각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너는 형제의 찬송이 될 것이요, 모든 형제가 네 앞에 절할 것이며, 네가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다”라는 이 선언은 누가 보아도 저주와는 거리가 먼, 명백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앞선 형제들에게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광경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깊은 의문을 품게 됩니다. 과연 유다가 르우벤보다 더 정결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혹은 그가 시므온이나 레위보다 하나님을 더욱 신실하게 섬겼기에 이러한 복을 받게 된 것입니까? 이와 같은 관점에서 유다의 삶을 조명해 본다면, 우리는 고개를 조금 갸우뚱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기심과 실패를 딛고 일어선 회개
우리는 유다의 과거 행적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기던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성경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요셉을 팔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시지요? 본래 요셉은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유다가 그를 살려내는 중재의 역할을 맡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죽여봤자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차라리 그를 팔자”라고 제안했습니다.
이처럼 유다가 요셉을 살려준 명분은 다름 아닌 ‘실리’였습니다. 형제를 죽여 없애는 것보다 팔아넘기는 편이 돈이라도 생기는, 경제적 이득이 된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물론 이 사건 하나만으로 유다라는 인물의 됨됨이를 전부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이후의 행보들을 종합해 볼 때 유다는 상당히 이기적일 뿐 아니라 계산이 빠르고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는 성향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의 생사가 오가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사사로운 이득을 먼저 고려할 정도였으니,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다면 세상에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는 자산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유다는 요셉을 팔자고 제안하여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전개되는 행보는 더욱 뜻밖입니다. 성경의 다음 장에 나타난 유다의 모습은 지극히 생경합니다. 그는 형제들과 결별하여 가문의 울타리를 벗어났고, 곧바로 이방 여인과 혼인합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 흐르던 갈등의 핵심을 기억해 보십시오.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가 에서를 보며 가장 근심했던 부분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가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실이었습니다. 에서는 뒤늦게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스마엘의 딸과 다시 혼인하며 그 서운함을 달래려 애쓰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가풍 속에서, 유다가 독단적으로 가출하여 이방 여인을 취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입니다. 믿음의 가정 내에서 어떻게 이러한 파행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 정도의 행보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잘못된 선택은 유다를 며느리 다말과의 사건이라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맙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의 중심에는 다시 한번 유다의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물론 자기 자식을 살리려는 부성애의 발로로 이해할 여지도 있겠으나, 이를 ‘이기심’이라 명명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약속이나 그분께서 맡기신 사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극히 가볍게 여기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약속의 소중함을 깨달은 유다의 변화
그러나 유다의 인생은 그저 실패의 자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훗날 요셉과 재회하는 현장에서 드러난 유다의 모습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그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간청하는 부분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는 요셉 앞에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라가게 하소서.”
지금 유다는 자기 자신을 종으로 삼아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경이로운 변화입니다. 이전까지 우리가 보아온 유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철저히 자신의 실리와 이익을 따지던 이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내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의 단초는 다말 사건의 끝자락에서 마련되었습니다. 유다는 그 비극적인 사건을 통과하며 자신의 잘못이 본질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깊이 자각하게 됩니다. 그의 과오란 단지 표면적인 부도덕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 데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직시한 유다는 즉시 삶의 방향을 돌이킵니다. 그는 다말을 향해 “그녀가 나보다 옳도다”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과오를 정직하게 시인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이후 다시는 다말을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회개란 단순히 외적인 행위를 수정하는 차원을 넘어, 그 행위를 유발한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깊이 통찰하는 일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행동이 단순히 아들을 지키려는 부성애의 발로가 아니라, 사실은 그 내면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르고 있었다는 실체를 정면으로 마주한 것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 자녀 교육의 원리와도 깊은 궤를 같이합니다. 자녀의 겉모양만을 보고 “싸우지 마라, 형이니 참아라”라고 훈계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행동의 이면에 자리 잡은 본질적인 이유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 너희가 ‘욕심’이라는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있구나”라고 본질을 짚어내어 다루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유다는 바로 그 지점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여겼음을 자복하고 철저히 돌이킨 것입니다.
과거의 행적만을 놓고 본다면, 유다가 르우벤이나 시므온, 혹은 레위보다 나을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다른 형제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단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진실한 ‘회개’가 있었고, 그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붙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유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실패와 수치 속에서 발견한 영원한 가치
여러분, 요셉을 판 장본인도 유다였으며, 이방 여인과 혼인하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출을 감행한 이도 유다였습니다. 다말과의 사건을 통해 집안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분란을 일으킨 장본인 역시 다름 아닌 유다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러한 처절한 실패와 수치의 심연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살아왔는지를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매일 고백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는 진리의 참된 의미를 그는 삶의 밑바닥에서 실존적으로 깨우쳤습니다. ‘정말이구나, 오직 이 말씀만이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구나’라는 고백이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서 역시 유다와 매우 유사한 궤적을 보인 인물입니다. 에서의 과오 또한 이방 여인과의 결혼이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부여받은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어버린 경거망동에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은 그가 음식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기록하며,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가벼이 여겼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장자의 명분을 팔아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여긴 적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다의 서사는 결코 타인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유다를 비롯한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받은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유다와 같은 모순에 빠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실상 우리 역시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가까이한다고 고백하지만, 정작 그 말씀이 지닌 진정한 권능과 그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반드시 성취된다는 사실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습니까? 그 말씀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면, 우리 역시 스스로의 연약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가 경험한 변화의 핵심은 그가 갑자기 도덕적으로 무결해졌거나 외형적으로 수려한 인물이 된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성읍을 파괴하는 일에 가담하는 등 여전히 죄성을 지닌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삶과 확실히 단절된 한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되며, 그 약속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영적 자각이었습니다.
찬송의 이름으로 선포된 영원한 왕권
이제 야곱이 유다를 향해 축복의 예언을 선포합니다. 유다의 부끄러운 과거 행적을 상기해 볼 때, 야곱을 통해 전해지는 이 메시지는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야곱은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찬송이 될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으나, 원문의 보다 정확한 함의는 ‘형제들이 너를 칭송할 것’이라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본래 ‘유다’라는 이름의 어원적 의미는 ‘찬송’입니다. 이 이름은 그의 어머니 레아가 명명한 것입니다. 그녀는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신앙적 고백을 담아 넷째 아들의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레아가 과연 어떠한 여인이었습니까? 그는 평생 남편 야곱의 사랑을 처절하리만큼 갈구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을 낳았을 때, 그녀는 “보라, 아들이다! 이제야 남편이 나를 돌아보겠구나”라며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둘째 시므온을 얻은 뒤에도 “하나님께서 나의 탄식을 들으셨으니, 이제는 남편도 내 진심을 알아주겠지”라고 기대했으나, 그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라헬만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셋째 레위를 낳으며 “이제야말로 남편과 연합하겠구나” 소망해보았지만, 야곱과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세 아들을 낳는 인고의 과정을 거치며 레아는 깊은 영적 깨달음에 도달한 듯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그저 불평과 불만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단한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선한 섭리가 있음을 직시하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넷째 아들을 낳으며 그녀는 위대한 신앙의 결단을 내립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양하리라.” 자신의 결핍과 욕망에 매몰되었던 시선을 돌려,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며 ‘유다’라는 이름을 지어 올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이 ‘유다’라는 이름의 의미를 사뭇 생경하게 바꾸어 선포합니다. 본래의 뜻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고백이었다면, 야곱은 이제 “형제들아, 유다를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 상식으로는 찬양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인데, 어떻게 찬송의 목적어가 하나님에서 유다로 치환될 수 있는 것입니까?
혹자는 유다가 훗날 그만큼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을 암시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물론 타당한 설명이겠으나, 단순히 인간 유다가 칭송받는 차원을 넘어 이 축복이 내포하고 있는 더 깊은 영적 신비가 무엇인지 우리는 겸허히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49장 8절 이후의 구절들은 앞서 제기한 의문을 해소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어떠한 사건이 예고됩니까? 유다의 형제들이 모두 그에게 절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 문맥에서 ‘절을 한다’는 것은 곧 그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일찍이 요셉에게 형제들이 절했던 것과 동일한 역사가 예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대신해 장자의 명분을 얻었으며, 실제로 그 에브라임 지파에서 북이스라엘의 왕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북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왕권의 상징적 명칭인 ‘에브라임’을 사용하곤 합니다. 요셉이 장자권을 얻고 그를 통해 왕권이 수립된 것처럼, 유다에게도 이와 같은 장엄한 역사가 허락된 것입니다. 유다가 모든 형제의 경배를 받게 됨으로써, 비로소 유다 지파의 왕권이 서막을 올리게 됩니다.
여러분, 유다의 자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 왕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다윗 왕이 유다 지파에서 탄생했습니다.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왕권은 그의 후손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갑니다. 어떻게 두 지파가 동시에 이러한 왕권의 축복을 향유할 수 있는지는 차후에 깊이 상고하기로 하고, 우선은 이것이 명백한 ‘왕권’에 관한 약속이라는 사실에 천착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다가 찬양을 받을 것이라는 선포 속에는 다윗의 인간적 왕권 그 이상의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의 왕권과 유다의 왕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별성이 존재합니다. 에브라임의 왕권은 이 세상의 질서 안에서 종결되는 한시적인 왕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지파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적은 사실상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요셉, 즉 에브라임을 통해 왕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 이 땅에서 실현되었고, 실제로 열두 지파 중 열 지파가 그에게 복종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한계 속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솔로몬 시대가 저물고 나라가 분열되었을 때, 유다와 베냐민 지파는 남유다로 남아 별도의 왕권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왕권은 에브라임의 그것과는 그 성격부터가 판이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예언을 주실 때 이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위해 성전을 건축하겠다는 열의를 보이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언제 성전을 지어달라 요청한 적이 있느냐고 반문하시며, 오히려 내가 나를 위하여, 그리고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과업을 아들 솔로몬에게 위임하시며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습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될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는 에브라임 지파에게 허락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영원’이라는 신적 속성이 부여된 예언입니다.
현실의 역사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이 약속은 마치 실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왕국이 분열된 후 에브라임 지파의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먼저 멸망의 길을 걸었고, 유다 지파의 남유다 역시 현재 국가로서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의 명칭은 유다가 아닌 이스라엘입니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칭할지라도 국가적 정체성은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영원히 보존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은 퇴색된 것입니까? 인간의 세속적인 기준만으로 판단한다면, 성취되지 않은 허언처럼 비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영원한 보존’은 지상의 정치적 왕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육신의 왕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만, 그 혈통을 통해 진정한 왕, 곧 영원한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혈과 육의 나라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고 계십니다. 유다는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통치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만왕의 왕 되심을 예표하는 거룩한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를 찬송하라”는 선포는 찬양의 대상과 목적어가 바뀐 파격적인 언어입니다. 유다라는 존재가 점유하는 영적 위치와 의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변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질의 적나라함과 하나님의 은혜
그렇다면 유다의 후손들은 과연 온전한 삶을 살아냈습니까? 성경의 위대한 인물인 다윗조차 그러하지 못했듯,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도 수많은 허물과 문제가 산재해 있었습니다. 물론 유다 지파의 왕통 중에는 참으로 훌륭한 군주들도 존재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히스기야 왕이나 요시야 왕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특히 성경은 요시야 왕에 대해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준행하며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요시야 이전에는 누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는 다윗 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보다도 요시야가 하나님께로 더 온전하게 돌아왔다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이토록 찬란한 칭송을 받았던 요시야조차도 완전한 존재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그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지 못함으로 인해, 결국 애굽과의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요시야와 같은 왕이 그토록 허망하게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당시 모두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단면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이 일, 곧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는 영광에 대해서는 다음 주 유다를 더 깊이 고찰하며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과연 ‘어떠한 상태에 있는’ 유다를 이토록 높이시는가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유다를 타자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상정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높아지기 위해 먼저 유다와 함께 낮아졌던 우리의 본연의 모습을 직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본래 어떠한 자였는지,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건져내셨으며 우리를 어느 영광의 자리까지 이끌고 가려 하시는지를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유다는 본래 어떠한 인물이었습니까? 우리가 이미 상고한 바와 같이, 그는 지독하리만큼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혈육인 요셉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비정한 형제였습니다.
제가 요셉의 서사를 강론하거나 신자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예수를 믿어 주의 자녀가 되었다고는 하나 사실 ‘죄인’이라는 명칭이나 ‘죄’의 실체에 대해 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를 포함하여 우리 중 그 누구도 죄가 무엇인지, 우리가 얼마나 깊은 죄인인지를 온전히 통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죄의 실상을 가장 명확하게 꿰뚫어 보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파괴력을 지니는지 아시는 분은 주님뿐이십니다. 죄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그토록 형언할 수 없이 무거운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피부로 실감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사실 그리 악한 분들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여러분 중에 스스로를 가리켜 ‘내 양심상 누구와도 눈을 맞출 수 없을 만큼 사악한 사람이다’라고 여기는 분은 드물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선하게 살기 위해 애써오신 분들입니다.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꺼리고, 어느 정도의 체면과 도리를 유지하며 살아오신 분들이기에, 내가 얼마나 참혹한 죄인인가를 자각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스스로를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죄인’이라고 여기며 안주하곤 합니다.
껍데기뿐인 교양과 흔들리지 않는 본성
언젠가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공중도덕을 경시하고 예의범절이 없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특정 민족을 거론하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인구가 너무 많아서 발생하는 문제인지 등 여러 추측을 하며 말을 보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화를 나누던 중 문득 저의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당시는 김포공항이 여전히 국제공항으로 운영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공항 밖에서 승객들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직접 마중을 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때였지요. 그 무렵 일간지 기사와 사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화제가 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께서는 국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며 매일 신문 사설을 오려 스크랩해 주셨는데, 그 덕분에 저는 해당 기사를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보도된 사진 속 풍경은 참으로 이채로웠습니다. 비행기가 연착되어 승객들이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기다리던 사람들이 가방을 열어 그 안에 있던 담요와 옷가지를 꺼내 공항 바닥에 깔았습니다. 그러고는 어디서 구했는지 소주병을 앞에 두고 그 위에서 고스톱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두 명의 돌출 행동이 아니라 공항 전체가 그런 모습으로 뒤덮였습니다. 그 광경이 사진에 포착되어 신문에 실렸고, 사설에는 도대체 양식이 있는 국민이냐는 통렬한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지금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무질서한 모습을 보며 혀를 차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가 그런 행태에서 벗어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근래 들어 유명 기념물에 이름을 새기거나 한글 낙서를 남기는 일이 드물어진 것을 보며, 겉으로 보기에 우리도 참 세련되어졌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내면까지 변화된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이 조금 더 윤택해지고 여유가 생겼으며, 예의를 지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을 뿐입니다.
여러분, 겉모습에 속지 마십시오. 제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미국인들의 질서 의식을 보고 무척이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디서든 줄을 어기는 법이 없고 차례를 잘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미국인들이 본성적으로 착해서라기보다, 법규 위반에 따르는 벌금이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작금의 LA를 보니 예전보다 훨씬 각박해졌음을 느낍니다. 삶의 여유가 사라지자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거친 모습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고 교양을 갖출 만한 환경이 뒷받침될 때는 누구나 타인에게 예의를 갖추며 점잖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 세대를 반추해 보십시오. 전쟁의 참화 속에서, 혹은 제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가는 학교에 지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 대가 넘는 버스를 그대로 보내야만 했지요. 그때는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인파 속으로 몸을 던져야 했습니다. 누구도 그런 치열함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행동을 한다면 엄청난 지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나아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기회와 환경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과거의 적나라한 모습으로 회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좋은 부모와 환경을 만나 시대의 혜택을 누리며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일 뿐, 우리의 근원적인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독일인들이 유독 잔인해서, 혹은 특정 민족이 유별나게 지독해서 전쟁 중에 그토록 참혹한 일을 자행했겠습니까? 우리 역시 타국의 전쟁터에 발을 들이게 되었을 때, 그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였으며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위들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인간 자체가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교육과 환경이라는 막이 우리를 덮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본질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감정적이며, 논리보다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려 애쓴다고는 하나, 실상은 타인의 치명적인 상처보다 내 새끼손가락의 작은 가시가 훨씬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숭고한 공감을 이야기해도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성경의 진단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여기서의 자기 사랑은 부정적인 의미의 집착을 뜻합니다. 그 어떤 가치보다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를 정확하고 정직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믿음의 안식
또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가볍게 여기며 살아갑니까? 앞서 살펴본 우리 본연의 실상을 직시한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진실로 마음 깊이 체득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까, 하지 않으셨습니까? 분명히 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통해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일단 놀라고 봅니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음에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 놀라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겁부터 먹는 것이 우리의 적나라한 실상입니다. 그러다 훗날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우리를 설득하시고, 재차 말씀하시며 가르쳐 주실 때에야 비로소 “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구나. 이 약속을 굳게 붙들어야 했는데, 이제야 근심을 내려놓는다”라며 반응하곤 합니다. 역시 진리라는 것은 때로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모양입니다. 제가 이토록 사실을 정교하게 지적하니 왜 다들 저를 매섭게 바라보시는지요. 사실 이것은 저 자신의 부끄러운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 유다는 ‘사자’로 묘사됩니다. 강인한 승리자의 형상입니다. 이는 유다 지파의 위엄을 드러내는 긍정적인 비유일 뿐만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유다가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라 예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사자처럼 용맹하게 일하시며 원수의 목을 제압하신다는 소식을 접할 때, “그래, 어디 한번 덤벼보아라! 주님의 은혜를 입은 내가 이제 그분의 능력으로 나아가니, 하나님의 말씀 앞에 너희는 모두 패배할 것이다”라는 기개 섞인 확신을 갖곤 합니다. 그리하여 그 누구라도 우리 앞에 무릎을 꿇리고 싶은 정복자적 열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선교 현장이나 전도의 자리, 심지어 성도 간의 대화 속에서도 투영됩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 혹은 상대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머리로는 인정하면서도, 정작 상대가 내 뜻에 따르지 않으면 이를 용납하기 어려워합니다. 여전히 ‘나’라는 존재의 자존심과 고집이 우선순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유다처럼, 혹은 사자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탄이나 그 어떠한 장애물도 내가 주도하여 다 파괴해 버릴 수 있을 것이라 자신만만하게 오해하곤 합니다.
누가 사자를 깨우랴, 흔들리지 않는 안식
여러분, 이 구절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대목이 오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본문 9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합독하겠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전반부의 의미는 비교적 명료합니다. 유다를 사자 새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용맹의 상징이자 맹수 중 가장 강력한 존재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호랑이가 아닌 사자를 가장 위엄 있고 능력 있는 짐승으로 간주했습니다. 즉, 유다에게 그와 같은 탁월한 역량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먹잇감을 움켜 찢고 올라갈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임을 시사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강인한 유다가 당연히 원수의 목을 제압할 것이라고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구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대개 이 대목을 사자가 적을 사냥하기 위해 매복하고 있는 긴장된 상태로 이해하곤 합니다. 어떤 적이나 짐승이 나타나든 숨어 있다가 단숨에 덮치려고 기회를 엿보는 형국이니, 감히 누가 그 서슬 퍼런 사자를 건드릴 수 있겠느냐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장을 읽어드릴 테니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엎드리고 웅크려 쉬고 있는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깨울 수 있으랴?”
의미가 완전히 전복되지 않습니까? 이 구절은 사자가 공격을 개시하기 위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평온하게 ‘휴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동물의 생태를 다룬 프로그램을 보면 사자가 온종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냥에 할애하는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대개의 시간을 누워서 쉽니다. 본문은 바로 그 평화로운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엎드리고 웅크려 지극히 평온하게 안식하고 있는데, 그 존재감이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감히 누가 그 사자의 잠을 깨울 수 있겠느냐는 역설입니다.
이 구절은 신약 마가복음에 기록된 한 장면과 매우 놀라운 병행을 이룹니다. 거센 광풍이 휘몰아쳐 물결이 배에 들이닥치고, 배가 침몰하기 직전의 급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단순히 누워 계신 것이 아니라, 베개까지 손수 챙겨 베고 깊은 잠에 드셨습니다. 집어삼킬 듯한 광풍이 몰아치는 그 한복판에서 말입니다.
당황한 제자들이 달려와 외칩니다. “주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이 극적인 장면이 오늘 본문이 가리키는 바와 궤를 같이합니다. 누가 이 예수의 안식을 깨울 수 있습니까? 성난 풍랑도, 거친 폭풍도, 배에 차오르는 바닷물도 그 어떠한 외부의 위협도 예수 그리스도의 잠을 깨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자연 만물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무엇도 주님이 누리시는 신적 안식을 침해할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오직 ‘사람’만이 그분을 깨울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절규할 때에야 주님은 비로소 일어나 풍랑을 꾸짖으며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아, 어찌하여 이토록 무서워하느냐.”
주님과 함께 누리는 참된 평안
어찌하여 그러합니까? 몰아치는 풍파와 폭풍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풍랑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친들, 그것이 본질적인 위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그 어떤 풍랑도 실상은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가장 안전한 처소, 곧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 머물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유다와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사자처럼 모든 대적을 물어뜯고 파괴하는 위력적인 모습만을 상상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수의 목을 제압하고 승리를 거두신 자리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곳은 다름 아닌 십자가입니다. 칼이나 총, 혹은 세상적인 권력을 휘두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맞이하신 그 십자가 위에서 최후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성경이 그분을 ‘사자’라 칭하는 이유는 단지 물리적 힘이 강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와 신적 안식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다면 그 누가 감히 여러분을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 무엇이 감히 여러분의 인생을 요동치게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염려하지 말라는 약속을 들으면서도, 눈앞의 파고가 조금만 높아지면 이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이에 저는 오늘 두 가지 권면으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첫 번째 권면은 이것입니다. 도저히 무서워 견딜 수 없고 두려움이 엄습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주님을 깨우십시오. 세상의 그 어떤 노도광풍도 주님의 안식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존재, 곧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만이 주님을 깨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나아가 간절히 부르짖으십시오. “주여, 저는 두렵습니다. 저를 긍휼히 여기시고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여러분이 주님께 나아가 직접 간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경이로운 특권인지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결코 세상의 요란함에 흔들리거나 주의를 빼앗기시는 분이 아니시지만, 사랑하는 자녀가 부를 때 그 깊은 안식에서 일어나 우리를 위해 풍랑을 꾸짖으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이것이 고통의 한복판에 있는 우리가 취해야 할 첫 번째 방책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 간곡한 마음으로 두 번째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그 어떠한 폭풍과 광풍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한낱 미미한 것에 불과함을 기억하십시오. 그것들은 결코 주님을 흔들 수 없습니다. 풍랑 속에서도 초연히 주무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이와 같이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저 또한 주님과 함께 이 안식 속에 거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굳이 일어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이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나의 인생은 결코 요동치도, 변하지도 않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나이다.”
우리의 인생은 세상의 어떤 풍랑으로도 결코 변질시킬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그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안식을 주님과 함께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가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그 깊고 오묘한 안식 속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이토록 쉽게 망각하며 살아가는지요.
도대체 누가 나의 주님을 깨울 수 있으며, 그 무엇이 감히 나의 주님을 흔들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자녀 된 저희 외에는, 그 어떠한 세상의 풍파도 주님 앞에 결코 문제가 될 수 없음을 이 시간 겸허히 고백합니다. 간절히 바라오니, 주님 안에 머무는 저희가 오직 주님으로 인하여 누리는 참된 안식의 신비를 체득하게 하옵소서.
주님, 그럼에도 혹여 저희 마음이 떨리고 불안하여, 두려움에 쫓기듯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깨운다 할지라도, 주여 저희의 가냘픈 목소리를 외면치 마시고 들어주옵소서. 주여 일어나셔서 믿음 없는 저희를 너그러이 품어주시고, 흔들리는 저희의 영혼을 붙들어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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