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49 5절로부터 7 까지 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아멘.

 

야곱의 유언과 축복의 의미

지금 야곱은 지상에서의 생을 마무리하는 최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47세였습니다. 임종의 자리에 모여든 열두 아들은 엄숙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기다립니다. 실제로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포함해 많은 자손이 모였겠으나, 성경은 이스라엘의 근간이 형제들이 아버지의 권위 있는 입술에 주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야곱의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반추하며 장면을 마주할 , 참으로 ‘감회가 무량하다’는 표현 외에는 숭고한 순간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야곱은 장자인 르우벤을 필두로 아들들에게 유언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말씀을 가리켜 '장차 당할 '이라 명명하며, 이것이 단순한 작별 인사가 아닌 신적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처음 말씀을 접하면 진의가 다소 모호하게 느껴질 있으나, 본문의 명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창세기 49 28절을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28절은 이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임을 명시하며,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기록된 야곱의 예언들은 축복입니까, 아니면 저주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이를 ‘축복’이라 확증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축복이라는 단어보다 저주에 가까운 엄중한 심판의 메시지가 주를 이룹니다. 시므온과 레위를 향한 야곱의 선포는 인간의 시각에서 결코 축복처럼 보이지 않지만, 성경은 이를 축복의 범주 안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설적인 지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록된 구절을 표면적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이면에 흐르는 영적 깊이를 통찰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맥 속의 교훈: 신자에게 주는 경고성 축복

야곱의 예언은 단순히 파괴적인 저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경 구절을 개별적으로 분리하여 해석하는 습관이 있어, 결론이 축복이라 할지라도 과정에 나타난 험한 수사들은 그저 저주로만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물론 구절을 짧게 나누어 묵상하더라도 나름의 유익과 배울 점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단편적인 교훈을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비록 말씀을 부분적으로 이해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 안에서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시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안일한 태도로 말씀을 대충 읽는 자리에 머물러서는 됩니다. 본문이 전체 문맥 속에서 어떠한 구속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므온과 레위를 단지 도덕적 결함이 있는 인물로 규정하고 '우리는 저들처럼 살지 말자' 식의 적용에 그친다면 본질을 놓치기 쉽습니다. 모든 선포가 결국 축복의 성취라면, 이는 오늘날 신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성 축복'이라 보아야 마땅합니다. , 성도가 삶의 여정 속에서 직면하게 실존적인 위협이 무엇인지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단순한 혈연 공동체를 넘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온 약속의 자녀라는 점에 본질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인 이스라엘이 겪는 갈등과 문제는 오늘날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과 매우 흡사합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 내면에 끈질기게 도사리고 있는 죄의 실체를 목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유언이라는 통로를 통해, 지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그러한 자아의 모습들을 다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세겜 사건과 은혜를 저버린 칼의 폭력

시므온과 레위라는 이름 뒤에는 ''이라는 수식어가 숙명처럼 따라다닙니다. 야곱은 본문에서 그들이 칼을 가졌으나, 칼은 '폭력의 도구' 뿐이라고 단언합니다. 문장에는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핵심 주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타인을 해하는 폭력의 칼이 있었습니다. 강렬한 묘사는 시므온과 레위가 자리에 소환되었는지, 그리고 칼이라는 상징이 등장해야만 했는지를 즉각 상기시킵니다. 이는 창세기 34, 세겜 땅에서 벌어졌던 비극적인 참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당시의 정황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되짚어보겠습니다. 야곱은 에서와의 오랜 갈등을 극적으로 해소하고 작별했습니다. 인생의 거대한 난제를 해결했기에, 당연히 하나님과 서원했던 벧엘로 향할 것이라 짐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발길이 닿은 곳은 벧엘이 아닌 세겜이었습니다. 아마도 세겜의 풍요로움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입니다. 그곳에 이르는 동안 야곱은 생애 처음으로 모든 환난이 종식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더는 쫓기거나 갈등하지 않아도 되는 평안이 찾아온 것입니다.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왔으니 이제 이곳에 정착하여 안식하면 되겠다는 안도감이 그를 지배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야곱이 그곳에서 비로소 '평안한 여정' 보냈다고 기록합니다. 세겜에 도착한 야곱은 정착에 대한 강한 의지를 투영하듯 그곳의 땅을 매입합니다. 낯선 지역에서 땅을 사고 터전을 마련한다는 것은 영구히 거주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세겜에서의 정착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세겜의 추장은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인 '세겜'이었으며, 무렵 야곱에게는 디나라는 외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야곱의 자녀를 열두 아들과 명의 딸로 기억합니다. 족보에서 여성이 생략되는 경우가 빈번하나, 이는 결코 하나님께서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게 여기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고대 사회의 문화적 맥락 안에서 성경을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서술 방식의 일환일 뿐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도처에서 여인이 얼마나 존귀하고 중요한 존재인지를 강조하며 세심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구수를 계수할 전쟁 수행 능력이 있는 남성을 중심으로 기록했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고대 사회의 어떤 기록보다도 여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존중을 담고 있는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가 정당화될 나타나는 위험성

불행하게도 야곱의 디나가 외출했다가 세겜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는 절대 권력을 추장이었고, 야곱 일가는 이제 이주해온 나그네에 불과했습니다. 사라나 리브가의 사례에서도 있듯, 당시 가나안 사회의 윤리관으로는 권력자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심지어 훗날의 다윗조차 권력의 정점에서 죄책감 없이 유사한 탈선을 범했을 만큼, '왕의 특권'이라는 명분 아래 정욕을 정당화하던 시대였습니다.

 

세겜 역시 정욕에 눈이 멀어 돌이킬 없는 죄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것은 이후의 반응입니다. 다윗의 아들 암논은 다말을 범한 그녀를 혐오하며 내쫓음으로써 위에 죄를 더했습니다. 반면, 이방인이었던 세겜은 디나를 진심으로 사모하게 되었고, 성경은 그가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기록합니다. 여기서 '위로'라는 단어는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세겜이 자신의 과오를 인지하고 디나가 입은 영혼의 상처를 깊이 헤아렸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책임을 지기 위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 하몰과 함께 야곱을 찾아가 혼인을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야곱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사이, 사건의 내막을 알게 아들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혼인의 조건으로 '할례' 제시합니다. 할례를 받아야만 자신들과 같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있다는 명분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흠잡을 없는 정당한 요구였고, 간절히 용서를 구하던 세겜은 기꺼이 제안을 수용하여 성안의 모든 남자와 함께 할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레위의 이면에는 잔혹한 계획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음모를 주도한 그들은 세겜 사람들이 할례의 고통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틈을 , 성안의 모든 남자를 학살합니다. 성경은 세겜이 야곱과 아들들에게 '은혜를 구했다' 증언합니다. 본래 할례는 피를 흘림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인치는 '은혜의 상징'입니다.

 

오늘날의 세례 역시 영적 의미를 같이합니다. 세례 자체가 구원의 물리적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니나, 믿음의 고백을 공적으로 표징하며 언약 백성으로 편입되는 성스러운 예식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거룩한 은혜의 도구인 할례를 살육의 수단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은혜를 갈구하는 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고는, 도리어 칼로써 죽음을 선사한 것입니다.

 

처음의 분노는 동생이 당한 수모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분노가 점차 그들의 영혼을 잠식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 '정당한 복수' 수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마음에 가득 차자, 그들은 잔인한 폭력마저 '정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노가 자기 (自義) 결합할 ,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괴물로 변할 있는지를 사건은 명확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정죄와 심판의 자리에 서지 말아야 이유

이러한 비극은 우리 모두의 삶에서도 가시처럼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대개 정당한 이유로 분노를 시작합니다. 상대가 명백한 잘못을 범했기에 그가 틀렸다고 확신하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문제는 분노가 다른 분노를 낳으며 세력을 키운다는 점입니다. 분노의 감정에 함몰되면, 우리는 어느덧 상대에게 복수할 정당성을 확보하려 듭니다. 스스로를 변호할 논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급기야 상대를 응징하는 모든 수단이 당연하다는 독단에 빠집니다. 오직 내가 분노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걸어간 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폭력을 정의로 둔갑시켰고, 끝내 성안의 모든 남자를 도륙했습니다. 본래 할례의 칼은 피를 흘려 생명을 살리는 은혜의 도구여야 했으나, 그들의 손에서 칼은 오직 죽음만을 부르는 파멸의 무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의 분노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성도는 분노해도 되는가? 분명 성경에는 '거룩한 분노' 존재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분노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표출하는 화와는 궤를 달리합니다. 거룩한 분노의 목적은 상대가 죄를 깨닫고 돌이켜 생명을 얻게 하는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나 분노의 조건은 세속적인 화와 비슷해 보일 있으나, 지향점은 판이합니다. 거룩한 분노가 '살리기 위한' 열정이라면, 자기를 정당화하는 분노는 오직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고 보복하는 것에 매몰됩니다. 후자는 결국 시므온과 레위처럼 상대의 파멸을 목격해야만 비로소 안식을 얻는 파괴적인 속성을 지닙니다.

 

이러한 분노에 사로잡힌 자는 상대가 무너져야만 마음이 편해집니다. 만약 상대가 진심으로 돌이키면 오히려 불쾌해하며 화를 내는데, 이것이 바로 선지자 요나가 보여준 뒤틀린 분노였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자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기는커녕, 저들이 은혜를 입어 멸망하지 않는 것을 도저히 없다며 항의했습니다. 상대가 쓰러지고 사라지기를 바라는 복수심이 그의 영혼을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엄히 꾸짖으시며, 당신의 분노는 오직 죄인을 살리기 위한 거룩한 사랑의 다른 이름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질책이나 분노가 진정 상대를 회개시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나의 억눌린 감정을 쏟아내는 분풀이인지는 냉철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칼은 은혜의 도구가 수도 있고, 상대를 짓누르는 폭력의 무기가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성도가 은혜의 길보다는 자신의 힘과 감정에 치우쳐 복수의 칼을 휘두르기 훨씬 쉽다는 사실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특히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이 훼손될 , 혹은 마땅히 누려야 유익을 빼앗겼을 터져 나오는 분노는 우리를 심판자의 자리로 이끄는 가장 위험한 유혹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발견하는 동일한 죄인

자존심이 상처 입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치명적이고 무서운 일입니다. 많은 이가 자존심이 꺾이는 문제만큼은 결코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토로하곤 합니다. 금전적인 손실은 다시 갚으면 그만이고, 때로는 "그까짓 , 차라리 가져가라" 잊어버리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저희 가족 중에도 큰돈을 빌려주었다가 돌려받지 못한 분이 계셨으나, 결국에는 "사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너그럽게 넘기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모멸감을 느껴 자존심이 훼손되었을 때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일지라도 상처가 평생을 가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던진 한마디가 화살이 되어 영혼을 계속해서 흔들고 아프게 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합니다.

 

우리의 분노가 맹렬히 타오를 , 분노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어떻게 인지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 앉게 때입니다. 분노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가장 명확한 지표는 내가 지금 '재판관' 시선으로 상대를 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죄를 확정하고 단죄하는 권한이 내게 있다고 믿으며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역시 동일한 죄인임을 고백하며 문제 앞에서 먼저 자신을 성찰하고 있습니까? 실족한 형제가 다시 바로 서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열망하는 마음인지 돌아보십시오. 겉보기엔 비슷할지 모르나, 중심의 지향점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결코 서지 말아야 자리가 있음을 분명히 경고합니다. 심판과 재판의 자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자리를 탐해서는 됩니다. 타인을 정죄하며 "나는 깨끗하고 사람은 불결하다" 식으로 접근하는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또한 같은 죄인이며 험난한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라는 의식 대신, "나는 이미 저런 단계를 넘어섰고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했다" 우월감이 고개를 든다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상대가 범한 잘못보다 무섭고 파멸적인 '교만'이라는 길로 걸어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심판자의 자리에 서려는 욕망도 문제지만, 그로부터 기인하는 보복의 심리 또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내가 고통받은 만큼 상대도 아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끊임없이 주입하는 보복의 논리 앞에서 그것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눈에는 , 이에는 '라는 법이 명시되어 있으니, 정당한 대가와 보복을 바라는 것이 당연한 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이를 완전히 새롭게 정의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눈에는 ' 보복 원리가 십자가 안에서 어떻게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는 순간, 어떤 인간도 타인과 차별될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지위에 따라 높고 낮음이 나뉘고, 재물에 따라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갈립니다. 인격의 고결함이나 학식의 유무, 성공과 실패의 여부에 따라 사람을 등급 매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아무리 훌륭한 성취를 이룬 사람일지라도 십자가 아래 서면 모두가 평등합니다. 누구도 특별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나는 사람보다는 낫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훌륭하게 키우셨는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부모님이 저를 정성껏 키워주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하나입니다. 부모님은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아마 제가 목사가 알았더라면 그토록 많은 투자를 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님들은 자녀가 소위 '' 들어가는 명예로운 직업을 갖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검사나 판사, 의사가 되어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며 힘을 다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적인 자랑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5대째 이어온 기독교 가문이라는 배경조차 십자가 앞에서는 내세울 것이 됩니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순간도 없는 무력한 죄인일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데도 우리는 이토록 쉽게 망각하는 것일까요? 신앙 공동체 안에서조차 끊임없이 '도토리 재기' 식의 비교를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까? 목사와 장로, 집사와 성도들 사이에서 누가 기도를 잘하는지, 누가 경건한지를 겨루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일입니다. 한국 교회가 존경하는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이라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 그것이 무슨 대단한 자랑이 되겠습니까? 만약 손양원 목사님께 직접 묻는다면 그분은 분명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저 마땅히 일을 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서 마땅히 해야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존경받는 선교사님이나 지도자를 우러러보는 것은 마땅한 예우이나, 정작 본인들은 "주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나는 그저 무익한 종으로서 일을 했을 "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태도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서는 모두가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누군가 위에 서서 재판관 노릇을 하려 하거나 보복의 기회를 노리는 것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분노에 휩싸여 만행을 저질렀던 시므온과 레위가 바로 반면교사입니다. 누이동생이 겪은 참상에 아파하는 마음은 인지상정이나, 성안의 모든 남자를 살육한 것은 결코 정당화될 없는 월권이었습니다. '눈에는 '이라는 법을 주신 본래의 의도는 인간의 끝없는 보복심을 억제하고 죄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하나를 잃으면 상대의 머리나 심장을 취해야 비로소 시원함을 느끼는 잔인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괴적인 본성이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 앞에 박아야 우리의 실체인 것입니다.

 

혈기가 아닌 '즐기는 폭력' 대한 경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일면입니다. 분노가 우리의 단면이라면, 본문에는 '혈기'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사실 창세기 49 전체 내용 '혈기'라는 번역은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 있습니다. 대개 혈기라고 하면 '젊은 혈기'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앞뒤 가리지 않고 쏟아붓는 상태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과거 기도원에서 밤새 기도하고 은혜 충만히 내려오는 이들에게 친구들이 "혈기 부리지 마라, 은혜 쏟아진다"라고 조언하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 혈기는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터뜨리는 기운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쓰인 단어는 우리가 흔히 쓰는 혈기와는 거리가 멉니다. 영어 성경 ESV 이를 'willfulness' 번역했는데, 이는 자기 의지를 가지고 행한다는 뜻입니다. 깊은 의미를 살피면 '마치 스포츠를 즐기듯' 혹은 '장난삼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이를 '장난삼아'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 소의 뒷발목 힘줄을 끊는 잔인한 가해를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유희처럼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통찰입니다. 대개 우리는 정당한 이유에 근거한 '정의로운 분노' 시작합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분노는 자체로 위태롭지만, 문제는 분노가 점차 '즐기는 대상' 되어간다는 점에 있습니다.

 

분노를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을 처음에는 정당하게 비판하지만, 점차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소위 사람을 '씹는' 행위에 탐닉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이나 불행을 소재로 삼아 대화를 나누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타인의 좋지 않은 사정을 옮기는 일에서 묘한 쾌락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후에도 이러한 일을 반복한다면, 이는 본래의 죄보다 죄를 짓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타인을 깎아내리거나 험담하는 '가십(gossiping)' 분명한 죄로 규정합니다. 이는 때로 당사자가 지은 잘못보다 파괴력을 가집니다. 세상의 윤리조차도 누군가 타인의 욕을 하러 오면 " 이야기를 내게 전달할 허락을 당사자에게 받았느냐"라고 묻고, 그렇지 않다면 " 이상 듣고 싶지 않다"라고 단호히 거절하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의 기준도 그러할진대, 교회가 세상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도리어 교회 안에서 이러한 험담을 '정의로운 분노' 포장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타인을 헐뜯는 말은 찰나의 쾌락을 뿐입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분노를 통해 자기 즐거움을 추구했음을 기억하십시오. 즐거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험담하는 순간, 우리는 영혼을 살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욕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한 것과 같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면서도 양심에 가책이 없다면,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다시금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유혹에 빠져 실수할 수는 있으나,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살아서는 됩니다. 본문의 경고처럼, 타인의 아픔은 결코 우리의 유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직분과 지식이 권력이 되지 않게 하라

자신의 정당함을 힘으로 믿고 힘을 즐기기 시작하면, 신앙의 자리에 권위주의라는 살이 붙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직분이 도리어 '섬김을 받는 권력'으로 변질되는 현상이 바로 그러합니다. 직분자가 교회의 섬김을 당연히 여기고, 대우받지 못할 불쾌함을 느낀다면 이미 위험한 신호입니다. "내가 목사인데"라는 마음이 고개를 드는 순간입니다.

 

특히 목회자를 성경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으로 신격화하여 대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세우신 봉사자이며, 말씀으로 섬기도록 보냄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목사를 마치 무속적인 경외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하나님께 나에 대해 나쁘게 고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성경적 존경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목사를 매개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분을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목사의 역할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깊이 있도록 돕는 조력자일 뿐입니다.

 

위계가 뒤바뀌면 목사는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소위 '간덩이가 부은' 목사는 거칠 것이 없습니다. "죽으면 천국 간다" 확신이 도리어 물불 가리지 않는 독선으로 변질되어 공동체에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문제는 목회자 개인뿐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매우 중대한 사안입니다. 목사를 하나님과 사이의 중개자나 특수한 제사장처럼 여기는 잘못된 인식을 속히 타파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목사에게 과도한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목사를 영적 취기에 빠지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목사는 장로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의논하며 함께 지어져 가는 지체여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경계해야 것은 자기가 가진 자원을 힘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재물, 실력, 경력, 혹은 세속적인 성공이 교회 안에서 힘이 , 성도는 무례해지기 시작합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성경 지식이나 기도 생활, 심지어 본인의 '믿음'조차도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있는 힘으로 변질될 있다는 점입니다. 나의 신앙적 열심이 타인을 정죄하거나 억압하는 수단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아래서 스스로를 성찰해야 합니다.

 

바른 신앙의 본질: 끊임없는 겸손과 회개

믿음이라는 단어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내가 무력하고 연약함을 인정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 안에는 정의와 정반대되는 모습이 불쑥 나타나곤 합니다. 내가 가진 믿음이 어느덧 자신의 ‘실력’으로 둔갑하는 현상입니다. 신앙의 연수가 실력이 되고, 타인보다 확고한 확신을 가졌다는 상태가 나의 훈장이 됩니다.

 

본래 성도는 "하나님, 동일한 말씀을 듣고도 제게 깨달음을 주시고 감동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마음의 변화를 갈망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조금 깊이 알게 하시니, 같은 죄인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라고 겸비하게 엎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시선이 하나님이 아닌 타인을 향하는 순간, "나는 주옥같은 말씀을 깨달았는데 저들은 어찌 이리도 무지한가"라는 교만한 탄식이 흐릅니다.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기에, 타인의 무지를 안타까워하는 듯한 마음 깊은 곳에는 사실 '나는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신앙을 소유했다' 자기의(自義)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러한 우월감이 보기 싫어 아예 신앙의 성장을 거부하며,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낮은 수준의 신앙에 머물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성숙에 무관심한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포기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처사입니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영적 손실은 이루 말할 없이 막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한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애썼던 뜨거운 시절을 기억합니다. 그때의 은혜를 놓쳤을 겪었던 상실감을 기억하면서도,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려 합니까? 우리는 마음의 동기를 세밀히 살펴야 합니다. 특히 ‘바른 신앙’을 모토로 삼는 공동체일수록 스스로에게 엄중히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바른 신앙을 갈구하는가? 지식으로 무엇을 하려 하며, 그것을 통해 진정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바른 지식과 신앙 인격이 별개인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목격합니다. 아는 것은 정확하나 정작 곁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평생토록 바른 신앙을 추구해 목적에 대한 참된 답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내가 끊임없이 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여전히 온전히 서지 못했음을 절감하고,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순간도 떠나지 않으시는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 그것이 바로 바른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저 바른 교리에 안주하며 자신의 상태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이미 바른 길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영적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의 핵심: 십자가의 긍휼과 낮아짐

신앙의 변질은 단순히 지식의 전수가 부족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완벽한 교리를 습득하고 성경을 암송한다고 해서 삶의 태도가 절로 거룩해진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지식의 축적이 신앙의 완성은 아님을 우리는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른 지식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한다면, 지식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처럼 낮아져 말구유까지 내려가는 겸손으로 우리를 이끌어야 합니다.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히 행하여 우월한 신앙을 증명하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산에 오를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삶의 작은 부분들을 간신히 수행해 뿐입니다. 타인을 돕는 일에 헌신하여 존경받는 이가 정작 자신의 가정에서는 자녀와 깊은 불화를 겪는 모순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는 만큼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진단은 절반만 맞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일 있습니다.

 

성경의 준엄한 명령은 ‘회개’입니다. 나의 죄악된 실존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십자가만이 유일한 생명줄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끝없이 겸손해지며 타인을 용납하고 용서하는 자가 되는 , 이것은 행위의 숙련도가 아니라 복음을 얼마나 명확히 이해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복음을 오해하면 우리는 본질이 아닌 껍데기를 지키는 급급해집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교리나 전통이 무너질까 전전긍긍하는 것은 주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전통을 사수하라고 명하신 적이 없습니다. 개혁 신앙의 진정한 가치는 인간의 전통이나 특정 신학자의 견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주관하게 하는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개혁하는 신앙: 말씀의 다스림에 순종하기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키시고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본질은 오직 말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수호하려는 가치가 그저 인간의 전통이나 유전에 불과하다면, 예수님 당시의 형식주의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이 강조했듯이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개혁을 멈춘 신앙은 이상 개혁 신앙이라 부를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지금 거룩한 도상(道上)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며, 때로는 위태로운 순간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목사나 장로의 개인적인 신념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성령님이 교회의 주인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심을 믿기에, 오직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는 삶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의 내면을 말씀으로 가득 채우는 ,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정수입니다.

 

우리는 동일하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이들을 목격합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 아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처절히 고백하며 타인을 용서하려 애쓰지만, 다른 이들은 십자가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타인을 공격하며 살아갑니다. 똑같은 십자가를 가졌음에도 여러분은 지금 어느 자리에 계십니까? 은혜의 표징인 할례를 살육의 도구로 삼았던 시므온과 레위를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평을 위해 주신 성스러운 할례를 사람을 죽이는 방편으로 악용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치명적인 유혹 앞에서 항상 영적 경고음을 울려야 합니다. 가장 선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장 잔혹한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속적인 힘을 과시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참혹한 범죄를 너무나 쉽게 저지르게 됩니다.

 

교회사는 이러한 비극을 수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의 타락과 십자군 전쟁, 그리고 광기 어린 마녀사냥에 이르기까지 사례는 끝이 없습니다. 가장 두려운 사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교리까지 조작해내는 인간의 부패함입니다. "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 주님의 지상 명령은 얼마나 위대하고 숭고합니까? 그러나 과거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점령할 , 그들은 총칼을 앞세운 군대와 함께 복음을 들고 갔습니다. 살육의 현장 앞에는 항상 성경을 신부가 있었습니다. 신부는 잉카 사람들에게 알아듣지도 못하는 스페인어로 십자가 복음을 선포한 , "내가 복음을 전했으나 너희가 회개하지 않았으니 이제 사살하라" 학살을 정당화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이토록 참혹한 방식으로 수행했던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참된 형제 됨과 배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진정으로 영혼이 바로 서고, 주님께 돌아와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우리끼리의 친목과 안락함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영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힘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한마디와 생각 하나하나가 교회 공동체라는 유기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 보셨습니까?

 

본문에서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가리켜 "저들은 형제라" 지칭합니다. 여기서 '형제' 단순한 혈연 관계를 넘어, 그들이 악한 도모를 위해 은밀하고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 자신들만의 세력을 형성하여 공모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계획도, 실행도 그들끼리만 함께했습니다. 이에 야곱은 "나는 저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않겠다" 단호히 선을 긋습니다. 이는 끼리끼리 편을 갈라 배타적인 자리를 만드는 행위가 신앙 공동체에 얼마나 해로운지를 경고하는 대목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교회 내에서 당을 짓고 편을 가르는 모습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고 싶어 합니다. 싫어하는 이와 함께 앉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저도 압니다. 그래서 저는 모르는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기를 자주 권면하곤 했습니다. 교회의 형제요 자매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용납하고 다가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신학적 견해가 비슷하거나 수준이 맞는 사람하고만 소통하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아볼로파, 바울파, 베드로파와 무엇이 다릅니까? 공동체 안에는 성숙한 이도 있지만, 여전히 젖을 먹는 아이와 같은 이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소외되거나 버려져도 좋은 영혼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선교 단체나 이익 집단과도 완전히 차별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간혹 자신의 신학적 식견이나 성경 지식에 미치지 못하는 지체들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거나 소원하게 여길 때가 있을 것입니다. 상대를 가르쳐야 대상 혹은 수준 낮은 이로 치부하며 끼리끼리 모이는 것은 공동체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형제와 나누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교회 되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에 '오십보백보'라는 말은 없으나,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서 도토리 재기와 같은 미약한 존재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기준을 가장 낮은 자에게 맞추십시오. 내가 잘하는 것이나 높은 수준에 맞추지 말고, 곁에 있는 가장 연약한 자의 보폭에 발을 맞추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많이 알아 지식을 드러내고 싶은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지 저도 압니다. 또한 목사로서 정답을 제시하고 지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기에, 말씀은 스스로를 향한 뼈아픈 성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타인이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가끔은 모르는 배려해 주십시오. "나는 아는데 당신은 모르는가"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신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구역 모임에서 혼자 지식을 독점하면, 다른 성도들이 자신의 삶을 나눌 시간은 사라지고 맙니다. 지식이 많음이 문제는 아니나, 그것이 자기 과시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류를 바로잡아 주는 또한 필요합니다. 다만, 내가 진리를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를 먼저 기억하십시오. 우리 누구도 단번에 모든 진리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 부르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무려 20년이 걸렸습니다. 이전에는 성전이라 믿고 헌금하며 열심을 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야 겨우 내가 성전임을 알게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신앙의 첫발을 이에게 "이곳은 성전이 아니라 예배당일 뿐이다"라며 면박을 주는 것이 가당합니까?

 

우리는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낮은 곳에 머무는 이에게 기꺼이 내려가고, 그를 배려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길입니다. 위에서 군림하며 "당신들은 아직 멀었다" 정죄한다면 누가 복음의 길을 따르겠습니까? 예수님도, 바울도 결코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배려의 신앙, 그것이 우리 공동체를 살리는 힘입니다.

 

약할 강함 주시는 십자가의 능력

이것이 진정한 능력, 내가 소유한 신앙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설교가 다소 길어져 우려하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이제 마지막 결론에 이르렀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평소보다 시간이 지체된 것은 오늘 나눈 말씀들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깊이 고민하다 보니 길어진 것이니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같이 하라”는 권면입니다. 말씀을 익히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지혜와 힘으로 일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향해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흩어버린다’는 것은 그들이 의지하던 사사로운 힘을 제거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혈기로 뭉쳐 기세를 떨치던 그들의 완력을 무력화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언대로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로 흩어졌으며, 시므온 지파는 어떠했습니까? 출애굽 당시 6 명에 육박하던 시므온 지파는 가나안 입성 직전 2 명으로 급감하며 세력이 60% 축소되었습니다. 훗날 기업을 분배받을 때조차 독자적인 영토를 차지하지 못하고 유다 지파의 경내에 얹혀살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그늘 속으로 편입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안목으로 보면 이는 비참한 몰락이며 가혹한 대가처럼 보일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덕분에 그들은 생존할 있었습니다. 유다가 보존될 그들도 함께 생명을 부지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소유를 잃고 자기 땅조차 갖지 못했던 레위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의 기업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에서 스스로 의지하던 거짓된 힘을 제하여 버리심으로써,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만을 붙들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약할 강함 주신다”는 찬양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를 전략적인 수단으로 삼아 약한 ‘흉내’를 내기도 합니다. “나는 무익하니 주님이 도와주셔야 한다”고 말해야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셔서 난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태도입니다.

 

부디 이러한 기복적 태도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제가 약하니 강한 주님께서 나타나 주십시오”라고 간구합니다. 그때 우리가 기대하는 ‘강한 주님’은 어떤 모습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자이시며, 우주의 질서를 뒤바꾸고 만물을 새롭게 하실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권능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위대하신 분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하셨는지 보십시오. 도망자 야곱을 통해 일하셨고, 보잘것없는 어린 다윗을 택하여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가장 찬란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를 굴복시키고 빌라도를 심판대에 세워 권위를 과시하셨습니까? 그것은 타락한 인간이 갈망하는 세속적인 힘의 논리일 뿐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은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이 미련하다고 조롱하는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약할 강해진다”는 고백은 어떻게 실현됩니까? 그것은 내가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속에 십자가의 정신을 아로새길 비로소 완성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 바로 그분이 우리의 영원한 왕이시며 우리의 참된 승리이십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는 여전히 기도하는 ‘나’, 거룩한 ‘나’, 성공하는 ‘나’를 신앙의 중심에 둡니다. 심지어 믿음이 좋은 ‘나’를 앞세워 자신을 증명하려 때가 많습니다. 약해져야 한다는 말씀 앞에서도 그저 약하고 힘없는 ‘나’를 내세우며, 결국 모든 신앙의 여정을 ‘나’라는 존재로 갈무리하는 한계에 머물러 있음을 고백합니다. 낮아지라 하시면 낮은 상태의 ‘나’를 붙들고, 믿음을 가지라 하시면 믿음을 소유한 ‘나’의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 보이고자 애썼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 간절히 구하오니 이제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지금도 친히 간구하시는 예수님, 나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나의 정제되지 못한 분노를 보며 탄식하시는 성령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이 ‘나’라는 이름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신 일하심으로 가득 채워지게 하옵소서. 나의 흔적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영광스럽게 남는 , 주님의 은혜로 아름답게 마침표를 찍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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