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8 21절과 22 까지 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형제보다 세겜 땅을 주었나니 이는 내가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아멘.

 

변하지 않는 약속과 야곱의 확신

창세기 48장과 49장은 야곱 생애의 마지막 여정을 보여줍니다. 임종을 앞둔 야곱은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나는 이제 죽으나 하나님은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며, 나는 사라질지라도 이제껏 나와 동행하셨던 하나님은 너희와도 함께하실 것이다. 이는 실로 대단한 확신입니다. 과거의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쳐야 했던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당시 그에게는 도망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홀로 떠나야 했던 길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함께할 없었으며 오직 그를 해하려는 형의 분노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막막한 위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와 말씀하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며, 너는 반드시 돌아오게 것이다. 그의 실패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처음 고향을 떠날 때만 해도 야곱은 기간이 길어야 정도일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리브가의 권유대로 잠시 몸을 피했다가 장가를 들어 돌아오면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망의 길은 무려 이십 년이라는 세월로 이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종과 같은 고된 삶을 보내야 했습니다.

 

성경은 인고의 세월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야곱이 마침내 부를 이루었을 , 이를 지켜보던 장인 라반과 사촌들의 태도는 급변했습니다.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힌 그들의 안색은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이때 야곱은 깊은 신앙의 고백을 드립니다. “가장 가까웠던 장인이나 사촌들은 내가 부유해지자 마음이 달라지고 안색이 변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도 여전히 나와 함께하셨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를 돌보셨으며, 이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오직 하나님만이 변치 않는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도, 그를 향한 목적과 사랑도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와 복을 여러분은 깊이 느끼고 계십니까? 임마누엘의 약속은 야곱이나 성경 인물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여러분과 저에게 주신 동일한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나를 떠나지 않으시겠지”라는 막연한 위로를 넘어섭니다. 야곱의 생애가 증명하듯,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저 땅에서 가장 강력한 신을 의지하여 조금 고생하고, 힘들 잠시 기댈 대상을 마련해 주시기 위함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단지 어려울 잠시 도와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너로 하여금 나와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며, 나를 즐거워하고 또한 너를 기뻐하며, 영원한 기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완성하겠다”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목적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자리에 나와 예배하고 계십니까? 그저 주일이면 습관처럼 교회에 나오고, 일주일을 열심히 살다가 세월이 흐르면 천국에 가는 정도로 신앙을 정의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게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변치 않는 목적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 곁을 지키시며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날마다 고민이 끊이지 않고, 때로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삶이 버겁게 느껴지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와 함께하는 나의 목적은 변하지 않으며, 너를 향한 나의 사랑 또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놀라운 복이 바로 우리가 누려야 특권이며, 야곱이 고백했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신비입니다.

 

고난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야곱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두려움과 떨림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가 거부가 되자 주변 친족들의 태도는 급격히 냉각되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안색이 변하고 사촌들의 말투와 행동에는 시기와 질투가 서렸습니다. 야곱은 자칫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깊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때까지도 야곱의 마음을 지배했던 가장 화두는 ' 땅의 부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가나안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어두운 밤에 비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그는 밤을 틈타 도주를 시작했으나, 라반의 추격은 매서웠습니다. 사흘 도주 사실을 알게 라반은 무서운 속도로 추격하여 불과 열흘 만에 야곱의 뒤를 따라잡았습니다.

 

퇴로가 막힌 절박한 상황에서 추격대와 마주하게 위기의 순간, 성경은 놀라운 사실을 기록합니다. 바로 순간에도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라반은 야곱을 해할 충분한 힘을 가진 자였고, 야곱은 모든 것을 잃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형편을 살피시고 라반에게 나타나 그를 해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결과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라반과 야곱이 서로 화해하고 함께 식사하며 기쁘게 작별하게 것입니다. 창세기 31 42절은 극적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냈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고난과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우리 삶에서 어떻게 구체화됩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과 수고를 아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눈물과 아픔을 하나님이 헤아리고 계신다는 ,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참된 의미입니다. 주님은 멀리 떨어져 방관하시며 막연하게 “나에게 기대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실체 없는 공수표를 남발하듯 허망한 위로를 건네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직접 보시고 우리의 고통을 깊이 체휼하십니다. 매일의 갈등과 고뇌, 세상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내밀한 아픔까지도 주님은 살피시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야곱과 라반의 화해는 야곱의 뛰어난 화술이나 재물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고난과 수고를 보셨고, 그를 불쌍히 여겨주셨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신뢰할 , 우리 삶의 현장에서도 이와 같은 용서와 화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숙제인 용서와 진정한 마음의 평안은,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모든 형편을 살피고 계신다는 확신 속에서만 시작될 있습니다.

 

얍복강의 씨름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재산을 지켜냈다는 안도감도 잠시, 야곱 앞에는 다른 거대한 벽이 등장합니다. 라반이 떠난 자리에 이번에는 에서가 나타난 것입니다. 가나안 지경에 들어서자마자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올라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과거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이 무장한 군사들과 함께 다가온다는 소식에, 어느 누가 반가운 재회를 상상할 있겠습니까? 야곱은 직감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것입니다. 절박한 상황에 직면해서야 야곱은 비로소 그토록 집착하던 재산마저 포기하게 됩니다. 이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야곱의 인생을 관통하던 키워드는 언제나 ‘소유’였습니다. 무엇을 가질 것인가, 얼마나 이룰 것인가, 어떻게 부를 쌓아 인정받을 것인가가 그의 삶을 지탱하는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얍복강의 위기는 그의 모든 관점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앞세워 보내며 오직 생명 구걸에 매달립니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라는 비굴한 태도로 강을 건너지 못한 홀로 남은 것입니다. 냉정하게 보면 그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가족과 재산을 방패막이 삼아 건너편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이 하나님을 찾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다고 기록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셔서 씨름을 거신 것입니다. 유명한 얍복강의 씨름을 통해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야곱을 위하여 다투셨음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여전히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그의 환도뼈를 치심으로 인간적인 힘의 근원을 꺾으셨습니다. “너의 힘으로 과연 있겠느냐? 모든 의지가 꺾인 후에 너는 무엇으로 서겠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간증 속에는 공통적인 고백이 흐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나의 힘인 알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두어가신 뒤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의지할 분이 누구인지 깨달았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중에 배로 복을 받았다”는 결과론적인 보상에만 집중하곤 하지만, 정작 본질적인 복은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어긋난 순간, 호세아 선지자의 기록처럼 그는 비로소 울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주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이것이 그가 이스라엘이 진정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를 위해 씨름해 주셨고, 그때 야곱을 붙들었던 은혜의 손길은 오늘날 우리의 또한 강하게 붙들고 계십니다.

 

만약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약속이 여전히 막연하게 느껴진다면, 어쩌면 여러분은 지금 인생의 얍복강 나루터에 계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힘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실제적인지를 배우는 학교입니다. 또한 자리는 진정한 평안을 얻고 두려운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 곳이기도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씨름 끝에 라반에 이어 에서와도 진정한 화해를 이룰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를 직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시며, 나의 주인이시고, 모든 존재의 소유자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학력이든, 실력이든, 혹은 도덕적 자부심이든 간에 필사적으로 그것을 의지하려 합니다. 뛰어난 수단가였던 야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려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함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네가 비로소 알게 것이다.

 

말씀에 붙들린 인생과 전능하신 하나님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지식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무수히 많겠지만, 그중 가장 고귀하며 실제적으로 중요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귀중한 지식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주시고,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신다는 사실은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지금 경이로운 사실을 함께 배워가고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와 헤어진 , 생애 처음으로 안전하고 평온한 여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는 세겜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고 그곳의 땅을 삽니다. 나그네 인생에 비로소 자기 소유의 땅이 생긴 것입니다. 그가 땅을 샀다는 사실은 요동치던 그의 내면이 얼마나 평안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야곱은 제단의 이름을 ‘엘 엘로헤이 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엘’은 하나님을, ‘엘로헤이’는 ~ 하나님’을 의미하므로,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엘로헤이’의 어원인 ‘엘로힘’은 대개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을 뜻합니다.

 

이름은 야곱이 평생을 걸쳐 길어 올린 절절한 신앙 고백입니다. 라반에게 모든 것을 빼앗길 뻔한 위기에서 건져주시고, 생명까지 위태로웠던 에서의 손길로부터 지켜주신 , 그분이 바로 ‘엘 엘로헤이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떨리는 선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세겜 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깁니다. “요셉아, 내가 네게 세겜 땅을 주겠다. 그것이 너의 기업이 것이다. 너는 반드시 땅으로 돌아오게 것이며, 하나님께서 땅을 너희에게 허락하시고 너를 그곳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야곱이 이토록 확신에 차서 말할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지금 단순히 막연한 미래를 추측하거나 아들에게 덕담을 건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습니다. 창세기 4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눈을 감기리라. 지금 야곱은 바로 약속의 말씀에 온전히 사로잡혀 요셉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의 상황을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젊은 가보았던 하란도 아니고, 익숙한 벧엘로 올라가라는 명령도 아닙니다. 인생의 황혼인 백삼십 세에 하나님께서는 낯선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평생을 일군 가나안을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가혹한 요구처럼 보일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과 함께 주신 약속은 하나였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약속에 야곱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하나님,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백삼십 세의 노구로 다시 험한 여정을 떠나 애굽 땅에서 살아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가신다면 저는 그것만으로 족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정말 주님 분만으로 충분하십니까?

 

실은 어젯밤 저는 잠을 설쳤습니다. 마음속에 생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목사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도 때로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단번에 이겨내야 마땅하나, 역시 연약한 인간인지라 여러 상념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그런 염려와 근심들, 개인적인 고민과 교회의 여러 상황이 한꺼번에 밀려와 잠이 달아나 버렸습니다.

 

한참을 뒤척이던 그때, 오늘 설교할 본문의 말씀이 자꾸만 심령을 파고들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냐? 만약 이런 세밀한 음성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려온다면 어떠실 같습니까? 저는 말씀을 묵상하며 마음이 금세 평안해져 깊은 잠에 있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음성은 점점 커졌고, 생각하면 할수록 오히려 눈은 더욱 또렷해졌습니다. 결국 도무지 잠을 이룰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아, 이것은 나를 편안히 재우려는 위로가 아니라, 나의 불신을 회개하라는 주님의 책망이구나!

 

자리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이토록 명확히 말씀하시는데, 어찌하여 약속이 제게 평안이 되어 잠을 부르지 못하고 오히려 눈을 뜨게 만듭니까? 주님, 저의 적은 믿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고백하고 나니 회개할 제목들이 줄지어 떠올랐습니다. 깊은 ,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만으로 인생은 이미 충분하며 참된 만족을 얻을 있다는 진리를 역설적으로 회개를 통해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 순간에도 실제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 진실한 고백을 듣기 원하십니다. “주님, 저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

야곱은 마침내 애굽에서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릅니다. 그는 “나는 이제 죽으나”라며 자신의 죽음을 담담히 수용합니다. 그러나 당시 야곱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품위 있게 죽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나의 마지막을 풍성하고 멋지게 장식할까’ 하는 인간적인 고민 또한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을 온전히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오직 마디, “내 주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고백이 머무는 곳에는 평생 그를 괴롭혔던 두려움이 이상 자리가 없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삶이 얼마나 안락했겠습니까? 아들은 제국의 이인자였고, 가족들은 가장 비옥한 땅에 거주했습니다. 그곳에서 보낸 십칠 년의 세월 동안 야곱이 고초를 겪었다거나 풍파를 만났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던 야곱의 인생에서 십칠 년은 유례없이 평온하고 달콤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안락함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번성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애굽을 정복하여 제국을 세우라는 야망의 언어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사 너희를 인도하여 본향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외침이었습니다. ,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주님이 친히 동행하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임종을 앞둔 노구의 야곱이 마지막으로 외친 진리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리라”는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과 동행하셨던 인생의 여정을 파노라마처럼 회상했을 것입니다. 벧엘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다시 얍복강으로 도주하던 긴박한 순간들, 그리고 얍복강에서 세겜으로, 다시 세겜에서 애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순간도 거르지 않고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신실하심을 알기에 그는 이제 죽음 앞에서도 주저함이 없습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의 심령에 평안이 깃들어 있다면, 야곱은 동일하게 말할 것입니다. 바로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며 경배합니다”라고 찬양하는 바로 순간, 이곳에 우리 하나님이 실재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야곱과 더불어 기쁘게 고백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가까이 계시는 주님

우리가 예배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여러분이 깊은 번민 속에 눈물을 흘릴 만큼 고통스러운 자리에 있을지라도, 그곳 역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처소입니다. 두려움에 압도되어 믿음조차 흔들리고,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조차 희미해지는 연약한 찰나일지라도 우리를 붙들고 계신 분이 누구인지 기억하십시오. 소망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가까이 다가와 계시는 때입니다.

 

베드로가 위를 걷다가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여 물에 빠졌던 사건을 떠올려 보십시오.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며 당당히 위를 걸을 때와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허우적거릴 , 과연 언제 주님과 가까웠겠습니까? 역설적이게도 그가 물에 빠져 비명을 지르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파도에 휩쓸려 무너질 , 우리가 인생의 가장 깊은 암흑기를 지나고 있다고 느끼는 바로 그때, 예수님은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생애 가장 찬양해야 장면이 떠오른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가장 어두웠던 순간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고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고, 우리의 고뇌와 아픔에 공감하시며, 우리의 모든 고난과 수고를 친히 담당하십니다.

 

백삼십 세의 노구로 애굽으로 향하던 야곱의 심정은 아마 캄캄한 어둠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련의 터널은 야곱에게 가장 찬란한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요셉과 형제들이 극적으로 화해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목격했고, 언약 백성을 보존하시는 위대한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끊어질 위태롭게 애굽으로 들어가던 순간에도 하나님은 속삭이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야곱은 후손들이 맞이할 미래가 결코 평탄치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사백 동안 괴롭힘을 당하리라”는 아브라함의 예언을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으며, 반드시 인도하여 약속을 성취하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나는 이제 죽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하다. 나는 사라지나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은 결단코 너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우리의 고백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방금 나눈 야곱의 이야기는 무려 4 전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대의 약속은 오늘 여러분의 속에서 실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고 우리 가운데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 중에서 모세를 세우시고 다윗을 일으키셨으며, 마침내 이스라엘을 약속의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가나안에 입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이 간절히 기다려온 안식의 실체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너희와 함께하리라” 말씀하신 임마누엘의 본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친히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셨고, 오늘 우리에게 다시금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여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너를 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인도하겠다. 죄악 중에 허우적거리는 너희를 건져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자리까지 반드시 데려가겠다. 주님은 여러분의 모든 고난과 영적 싸움의 현장에, 죄와 투쟁하는 순간에, 그리고 즐거움과 고통이 교차하는 인생의 모든 갈림길마다 변함없이 동행하실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순간에도 여러분을 세밀하게 살피며 인도하고 계시며,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하늘과 땅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비록 당장은 눈앞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4 전의 약속을 오늘 우리에게 이루신 하나님께서 어찌 여러분의 인생을 향한 그분의 계획을 완성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말씀이 오늘 여러분의 심령에 성취되어, 예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여러분을 하나님의 (殿) 삼아 길을 묵묵히 함께 걷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야곱과 같이 마디를 가슴 깊이 새기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와 함께하신다! 주님은 나의 왕이시며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를 부르신 그분의 소명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주님은 당신의 거룩한 목적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결코 마르지 않고 우리를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아멘, 예수여 일을 우리 가운데 이루어 주옵소서. 아멘, 예수여, 주님 분만으로 충분하나이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우리가 무엇으로 존귀한 고백을 주님 앞에 드릴 있겠습니까? 주여, 저의 연약함을 아시오니 부족한 고백과 입술조차도 기쁘게 받아주시고, 주님이 친히 저와 함께하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임마누엘의 약속을 믿고 담대히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으로 나아가오니, 주여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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