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14 1절로부터 3절까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아멘.

 

자각하지 못하는 배반과 하나님의 짝사랑

호세아서 전체는 고멜과 호세아라는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조명합니다. 사람은 언약으로 맺어진 헌신적인 관계였으나, 견고해야 결속은 결국 우리의 허물로 말미암아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행한 배반의 정점은 단순히 죄를 나열하는 있지 않습니다. 죄를 짓고 우상과 입을 맞추며 마음이 한없이 높아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태를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내게로 오라, 나를 보라”고 말씀하시며, 마치 애달픈 짝사랑과도 같은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거듭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스스로 주님을 열정적으로 섬기고 있다고 여기며 부지런히 제사를 드립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지 우리 자신의 실상을 스스로 깨닫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짐을 있는 지표: 자기 중심성

오늘 본문인 호세아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실상과 주님께서 “돌아오라”고 명하시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분별할 있겠습니까. 호세아서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모든 일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두거나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시작할 그것이 영적 위기의 징조임을 경고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자신에게만 머물고 있다면, 우리는 신앙의 태도를 엄중히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의 영혼에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부르지 않거나 예배를 거부하는 표면적인 이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멸하거나 아예 떠나버리는 극단적인 상황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듯, 우리 역시 입술로는 분명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에는 진정 무엇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내가 소유한 물질이나 재능, 혹은 내가 누리는 기쁨과 성공이 중심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반대로 나의 아픔이나 직면한 문제, 혹은 감정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진정한 관심사이며 삶의 중핵인가를 성경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삶의 중심에 놓인 것이 깊은 상처와 아픔일지라도, 하나님이 아닌 고통에 모든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취를 거두고 만사가 형통하였을지라도 결과에만 마음을 쏟고 있다면, 우리는 실질적으로 하나님과 소원해진 상태라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영적 상태를 가리켜 결국 우리가 ‘엎드러질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는 실족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데도 우리가 쓰러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잊을 찾아오는 영적 가난과 절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셨음에도 우리의 삶이 위태로운 이유는, 하나님을 잊은 홀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망각한 걷다 보면 작은 결핍 앞에서도 금세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 빈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가난해지기 시작하면 신앙의 열정이 식거나 봉사가 고단해지고, 성경 읽기가 귀찮아지는 사소한 일에도 우리의 심령은 너무나 쉽게 메말라 버립니다. 신앙의 뿌리가 말라가니 환란을 만날 속절없이 흔들리고 절망에 잠기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법을 잊은 결국 자신에게서 만족을 찾으려다 겪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주님을 잊을수록 우리는 깊은 좌절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넘어진 자의 입장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이는 “목사님, 넘어져 보십시오. 주위에 도와주는 하나 없이 혼자 힘으로 일어서는 것이 얼마나 막막한지 아십니까”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시 그러한 경험이 있고, 때로는 시련이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경제적인 위기나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 기도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 처절한 고통은 부정할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엄연한 사실인 동시에,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다른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며, 엎드러질지라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무릎이 흔들리고 쓰러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패배하여 무릎 꿇지 않는다는 또한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사실을 잊고 하나님이 곁에 계시며 함께하신다는 것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 삶은 몹시 황폐해집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어떤 거센 풍랑이 불어와 소유한 모든 것이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입니다.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보배로운 자녀입니다. 그렇기에 호세아 선지자는 오늘 우리를 향해 확신에 목소리로 선포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십시오. 오직 여호와만을 바라보십시오.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영광스러운 관계의 회복

주님의 부르심은 단순히 방향만을 바꾸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지금껏 세상을 향해 살았으니 이제는 하나님께로 가라”는 단편적인 권고를 넘어섭니다. 본문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하나님과 친밀해지라는 간절한 초청임을 있습니다. 멀리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단순히 발길을 돌리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과 가장 깊고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탕자와 아버지의 비유를 떠올려 보십시오. 탕자가 돌이켜 집으로 향할 , 아버지는 그저 가만히 서서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멀리서 아들을 발견하자마자 달려 나와 입을 맞추고, 안아 주며,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관계 속으로 완전히 함몰되는 , 그것이 진정으로 여호와께 돌아가는 의미입니다. 억지로 고개만 돌리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토록 영광스러운 관계의 회복을 허락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제 아버지의 집에 이르렀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이제 나를 다스려 주십시오. 내가 설계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삶을 통치하게 하소서. 내가 추구하던 기쁨이 아니라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삶의 원동력이 되게 하시고, 나를 바르게 인도하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이 나를 다스리게 하소서.

 

지난 2025 해를 돌아보며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빈틈이 없음을 절감합니다. 성도들에게 전할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정작 목사인 자신도 말씀의 칼날을 피해 없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인생의 중심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하나님보다 목회가 저를 많이 다스렸던 해가 아니었나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을 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목회라는 책임감이 때로는 기쁨을 주었고 때로는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목회적 상황에 일희일비하며 마치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 있는 것처럼 반응했습니다. 그토록 흔들리고 아파했으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즐거워했는지를 되짚어보니, 결국 목회의 성과나 설교 같은 것들에 매여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스스로 묻게 되었습니다. “과연 하나님만이 정말 나의 전부이셨는가.

 

역시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절망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했어야 했고, 사랑을 하더라도 복음의 능력으로 사랑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셔야 마땅함에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겉으로는 ‘목회’와 ‘주님의 나라’라는 경건한 수사로 치장했을지 모르나, 결국 하나님이 아닌 내가 원했던 결과물들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회개해야 본질적인 일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을 가지고 준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라

우리 각자가 처한 상황과 회개해야 제목은 모두 다르겠으나, 여러분의 지난 해는 어떠하셨습니까. 과연 2025 동안 여러분 삶의 중심에는 누가 계셨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감정과 생각을 주관하며 삶을 흔들어 놓았습니까. 만약 중심이 오직 하나님이셨고 은혜와 복음이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기쁘고 복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부족했을지라도 돌이키기에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주님을 소망하며 나아갈 있습니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촉구하며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시 구절을 처음 접했을 때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원론적인 뜻이나, 말씀을 통해 위로를 얻으라는 의미로 평이하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심층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그보다 훨씬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표현은 여호와께 돌아가려거든 자신이 누구인지, 그동안 어떠한 삶을 살아왔으며 현재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를 사려 깊게 성찰하고, 진실한 고백을 정제된 언어로 준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 ‘말씀을 가지고 오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깊이 성찰하고 삶의 목적을 진솔하게 정리하여 주님 앞에 서라는 엄중한 권면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문맥을 보면 표현이 뒤따르는 구체적인 고백들을 이끌어내기 위한 도입부임을 있습니다. 성경은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호세아 선지자가 우리에게 준비하라고 요청하는 구체적인 신앙의 고백들이 뒤따를 것임을 시사합니다. 선지자는 “내가 가르쳐 주는 고백들을 마음에 준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간절히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가르쳐 회개의 가지 고백

오늘 우리는 해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 나아가야 할지 고민할 , 호세아 선지자는 가지의 구체적인 고백을 제시합니다. 번째는 본문에 기록된 대로 “모든 불의를 제거해 주십시오”라는 간구입니다. 고백은 십자가의 은혜 없이는 결코 온전히 이해할 없는 신비입니다. 여기서 ‘모든’이라는 수식은 단순한 양적 의미를 넘어 질적인 완전함을 뜻합니다. , “나의 불의를 완전히 제거하여 주시고, 오직 주님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게 하소서”라는 절박한 고백이라 있습니다.

 

어느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롭게 있겠습니까.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주님 앞에 바르게 자가 없습니다. 호세아가 선포하는 의로움은 앞선 13장의 말씀과 긴밀히 맞닿아 있습니다. 호세아 13 1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눈앞에서 숨으리라.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울림을 줍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이 선포한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는 승전가가 바로 호세아서를 인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은 동일한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사망의 권세에서 속량하여 구속하였으니, 이제 사망과 죽음은 이상 너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선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당당히 나아가는 자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선포하십니다. “내가 너를 속량하여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였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의롭다 칭하였다. 너는 앞에서 의로운 자이며, 나와 함께 영원을 향유할 소중한 존재다. 호세아 선지자가 강조하는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진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확신 속에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주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자로서 주님 앞에 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여 아버지 앞에 나아가오니, 저를 의로운 자로 여겨 주시옵소서. 어찌 보면 지극히 송구하고 과분한 요청처럼 보일 있으나,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이토록 담대히 나아오라고 권면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모든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불의를 제거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기에, 우리는 이제 주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사망을 이기신 예수를 의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참소하는 사탄의 음성은 여전히 집요합니다. 우리는 거짓에 속아 흔들리기도 하며, 신앙의 진보 없이 매일 제자리를 맴도는 같은 자신을 보며 자책하곤 합니다. “나는 이다지도 부족할까,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까”라고 고민하는 나약한 모습이 우리 내면에 실재합니다.

 

사탄과 자아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가로막아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며, 오직 초라한 자신만을 응시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히 명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은총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라고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 그리고 가족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분열시키고 흩어지게 하려는 사망과 , 그리고 사탄의 기만 앞에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너희의 힘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의 쏘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오직 예수를 바라보며 십자가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다.

 

베드로후서 1 5절에서 7절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주님의 성품을 덧입어 가는 것이야말로 모든 불의를 제거하신 주님 앞에 의인으로서 나아가는 우리의 진정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여, 주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으니 내가 주님 앞에 의인으로서 담대히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인정하셨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자녀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있겠습니까. 때로는 보잘것없고 철없는 자녀의 모습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딸입니다. “내가 주님의 자녀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거룩한 담대함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우리는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바를 받으소서: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둘째로 호세아 선지자는 “선한 바를 받으소서”라고 고백하라고 가르칩니다. 고백에는 가지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자신을 받아 주시옵소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던 근원적인 선함을 기억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다시금 선한 존재로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주님, 주께서 선하다 하신 우리를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할 있습니다.

 

다른 의미는 우리의 고백, ‘우리의 말’을 받으시라는 간구입니다. 본질적으로 둘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불의가 제거되고 용납되었기에 우리는 비로소 입술을 열어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진실한 신앙의 고백을 하나님께서 선한 것으로 흠향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여, 저는 도저히 주님 앞에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머리를 숙입니다. 물론 자신을 성찰하는 귀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오직 자리에만 머물러 있다면 너무나 연약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기도 속에서 구원의 감격과 확신이 너무 메말라 있는 것은 아닙니까.

 

공동체 기도 자리에서 “주님, 우리의 모든 불의를 제거하셨으니 우리가 이제 주님 앞에 의인으로 서나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바를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선포하는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무척 드물 것입니다. 누군가는 우리의 주제에 어찌 그런 기도를 하느냐며 의아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분명히 그렇게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안에 무슨 선한 것이 있기에, 무엇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있기에 이러한 기도가 가능합니까.

 

우리 자신만을 본다면 하나님 앞에 내세울 선함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할 있는 ,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있는 것은 자체가 기적이요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복을 누리면서도 정작 가치를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는지를 너무나 쉽게 잊고 살아갑니다. 호세아는 바로 진실을 기억하라고 촉구합니다. “선한 바를 받으소서. 이는 내가 아니라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달라는 간구이며, 나를 덮고 있는 예수의 공로를 기억해 달라는 절박하고도 영광스러운 외침입니다.

 

수송아지 대신 드리는 입술의 재물: 상한 심령

번째로 호세아의 기도에서 주목해야 놀라운 표현은 “입술의 열매를 드린다”는 고백입니다. 선지자는 고백을 설명하기 위해 희생 제사를 언급합니다.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치는 전통적인 제사 대신, ‘입술의 열매’를 제단에 올리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실 구절은 해석과 번역이 매우 까다로운 대목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이를 ‘입술의 열매’로, 새번역은 ‘입술로 드리는 찬양’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원문의 의미를 조금 직설적으로 풀이하면 “수소, 우리의 입술을 화목하게 드린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짐승인 수송아지가 아니라 우리의 ‘입술’ 자체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잇는 화목 제물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입술이 수송아지를 대신하는 실질적인 제물이 된다는 파격적인 선언입니다.

 

이러한 맥락은 시편 51편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윗은 시를 통해 우리가 자칫 간과하기 쉬운 예배의 본질을 노래합니다. “주여 입술을 열어 주소서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어서 다윗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여기서도 입술의 고백이 제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송아지나 화려한 번제물을 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다윗은 기꺼이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찾으시는 제물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는 ‘상한 심령’입니다.

 

떼나 떼를 앞세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입술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 중심의 진실을 드리는 것입니다. 입술은 내면 깊은 곳에 가득 있는 본심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문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심에 있는 것이 입술을 통해 터져 나올 , 하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받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주님을 사랑합니다” 혹은 “주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와 같은 결연한 다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최선의 제물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중심이 주님으로 가득 자의 고백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시편 51편과 호세아서가 일깨워 주는 제물의 본질은 우리의 통념보다 훨씬 깊은 곳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이 제물이라면, 제물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어야 합니까.

 

상한 심령으로 나아가는 은혜의 자리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구하시는 제물은 바로 상한 심령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진실함을 점의 거짓도 없이 온전한 고백으로 증명해 보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지금 자리에 예배하는 이들 가운데, 마음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확언할 있는 이가 과연 존재하겠습니까. 아마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설교하는 자신 또한 말씀을 선포하는 순간에도,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아닌 자신과 욕심, 탐욕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말씀을 듣는 성도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온전하게 하나님께만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부정할 없는 우리 내면의 솔직한 초상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져오라”거나 “너희가 보기에 가장 깨끗한 것을 바쳐라”고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제물인 ‘상한 심령’이란, 내가 누구인지를 처절하게 자각하고 “하나님, 지치고 피곤하며 상처 입어 도저히 어찌할 없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갑니다”라고 엎드리는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바쳐야 창조주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기쁘시게 드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상한 심령 자체입니다. 주님께 돌이키려는 마음, 비천한 모습일지라도 주님 앞에 서고자 하는 간절함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세상의 우상을 끊어내는 단호한 고백

호세아 선지자가 제시하는 마지막 고백에는 참으로 놀라운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호세아서 전체의 흐름을 반전시키는 기도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앗수르는 우리의 구원자가 없나이다. 이는 세상이 결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처절하면서도 분명하게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과연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까. 실상 우리는 세상에 어느 정도 조공을 바치고 적당히 타협하며 안락하게 살기를 갈망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보다 이미 세상의 방식에 길들여진 것들에 기대고 싶어 하며, 그것이 나를 지켜줄 보호막이라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단호하게 “아니요”라고 말하라 명하십니다. 적당히 타협하여 조공을 바치며 안락함을 누리려 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러한 타협의 길은 결국 영적인 죽음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대충 세상과 어울려 사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길은 우리의 영적인 호흡을 멈추게 하는 길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종이 되어, 세상의 가치관에 삶의 주권을 내어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선포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할 것은 앗수르와 같은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선지자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결단에 이어 “다시는 말을 타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은 인간이 가진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 자신이 소유한 재능이나 어떤 자원도 나를 구원할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주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선용하기를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형제와 자매의 기쁨을 위하여 모든 것을 사용하겠다는 거룩한 다짐입니다.

 

고백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의 소유를 의지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힘이든, 성공이든, 보람이든, 혹은 화려한 경력이든 이상 그것을 인생의 근거로 삼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고통과 상처 또한 포함됩니다. 성도 여러분, 상처를 이상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우리의 구원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아무리 깊이 응시한들 그곳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아픔에 함몰되곤 하지만, 고통은 결코 인생의 주인이 없습니다. 시련이 아무리 가혹하여 여러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지라도, 그것에 삶의 주권을 내어주어서는 됩니다. 성공이든 고통이든 세상의 무엇도 우리를 구원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만이 우리를 다스릴 권세와 자격을 갖추고 계십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신을 이제는 이상 신이라 부르지 않겠습니다. 우리 손으로 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스스로 창조주가 되려 했다는 오만의 증거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본질적인 동기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함이며, 결국 내가 모든 위에 군림하는 신이 되겠다는 선포와 다름없습니다. 우상숭배가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나의 탐욕이며,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우상 숭배를 그치고 오직 하나님 앞에만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인생의 마지막 목적이 되는

이제 우리는 주님 앞에 진실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든 고백을 준비하여 나아갑니다. 저의 때문에 이상 주저하지 않고, 저를 용서하시며 의롭다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을 힘입어 나아갑니다. 단순히 의인이라 칭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를 보시며 심히 기뻐하시는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립니다. 주님, 인생의 모든 순간이 오직 주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는 고백과 돌이킴, 다시는 죄의 길로 행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과 회개가 신앙의 최종 목적지가 되어서는 됩니다. “앞으로는 정말 잘해 보겠다”거나 “새해에는 이전과 다르게 열심을 내어 보겠다”는 다짐 자체가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끝이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목적은 우리가 준비한 회개 자체도 아니며, 우리가 드리는 입술의 고백도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행위 자체가 본질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마지막에 남아야 , 우리가 진실로 갈망하고 추구해야 목적은 바로 하나님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의지하고 자랑하며, 때로는 그것 때문에 절망하던 수많은 힘과 재물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안에는 깊은 상처와 아픔도 있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러한 우리의 상태를 가리켜 ‘고아와 같았다’고 묘사합니다. 의지할 곳이 없어 고통과 아픔을 지팡이 삼아 살아온 인생입니다. 그것마저 없으면 소망이 사라질 같아 차마 놓지 못하고 붙잡고 살아온 세월입니다. 참으로 아버지가 없는 자처럼 외로운 길을 걸어왔음을 우리는 자복해야 합니다.

 

무엇을 의지해야 할지 모른 결국 사라질 것들에 마음을 두었으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고통과 상처라도 붙잡고 버텨보려 했던 우리에게 주님은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모든 상한 심령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꺼져가는 심지처럼 연약한 모습일지라도, 상한 마음 그대로 내게 나아오는 너를 나는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며, 모습 그대로를 주님께서는 기다려 오셨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입는 고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나의 상한 심령을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나를 보라”고 말씀하실 진정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완벽한 회개를 성취하여 당당하게 서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여, 나를 보시옵소서. 나는 여전히 아프고 힘겨운 상한 심령일 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주님께 가기를 원하며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외에는 곳이 없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담대히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망아, 너의 힘이 어디 있느냐. 나의 상처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나의 교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의 분노와 미움아, 너희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나는 나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니, 나의 승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이처럼 승리를 선포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맺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안에서 헛되지 않은 앎이라.

 

지난 동안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형제자매 중에는 아픈 마음을 안고 해를 보낸 분들도 있고, 오랜 시간 병상에서 혹은 말로 고통 가운데 시간을 보낸 사랑하는 교우들도 계십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을 견디기도 하고, 급작스럽게 닥친 경제적 위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홀로 고뇌하며 해를 보낸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모두에게 참으로 힘겨운 순간이었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괴로운 해였을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홀로 흘렸던 눈물과 아픔, 가슴을 부여잡고 견뎌낸 시간들, 병상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순간들을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소리 내어 찬양하지 못하고 속으로 읊조렸던 노래들, 성경을 읽으며 적신 눈물들, 말할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올렸던 모든 기도의 순간들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놀라운 사랑 앞에 상한 심령 그대로 나아가십시오. “주여, 우리를 보시옵소서”라고 고백하며 우리 곁을 지키시는 주님 앞에 서십시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은혜의 주님 앞으로, 오늘도 담대히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저희가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오니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친히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 몸을 버리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를 온전히 붙드시고, 친히 우리의 삶을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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