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11장 1절로부터 11절까지 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아멘.
기억해야 할 이스라엘의 배반과 세 도시의 교훈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끊임없이 지적해 왔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실상을 엄중히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들을 대하며 과연 이러한 이스라엘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는 탄식 섞인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비참한 죄악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세 도시가 본문에 등장하는데, 바로 기브아와 베델, 그리고 길갈입니다.
먼저 기브아는 거룩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과 지도자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타락했는지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무시하는 죄악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 베델은 본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성소였으나, 도리어 우상을 숭배하는 ‘벳아벤’, 곧 허무의 집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주님을 떠나갔는지를 증명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길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셨던 경건한 추억이 깃든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곳은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반역의 현장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명들을 통해 과거 기브아에서 일어났던 죄악의 역사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탄식하십니다. 주님을 떠나 거역하는 일이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하나님을 등진 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마주할 결론은 결국 심판일 수밖에 없음을 말씀을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는 부르심과 인간의 본성
호세아 10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와 같이 권면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한 땅에서 계속하여 농사를 짓는 연작을 하게 되면 땅의 영양분이 고갈되고 병충해에 취약해집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땅을 깊이 뒤집어엎는 기경의 과정이나 윤작이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농사의 원리를 우리의 마음에 비유하셨습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고집과 교만함이라는 묵은 땅을 뒤집어엎고 새롭게 하라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라도 하나님을 찾고 주님께로 돌이키라는 간절한 부르심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반응은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은 악을 밭 갈 듯 갈아 죄를 거두고 거짓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여 하나님을 찾는 대신, 도리어 그 땅을 악으로 일구어 죄와 거짓의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들이 이토록 완악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기 자신의 길과 용사의 수를 더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힘과 수단을 신뢰한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할 때 우리는 흔히 그들이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홍해 바다가 마른 땅처럼 갈라지는 기적을 직접 통과했으며, 40년 동안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으며 생존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신앙과 삶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이토록 처절한 배반의 역사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과오를 들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근본적으로 누구이며, 얼마나 부패하기 쉬운 본성을 가졌는지를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환경의 탓이 아닌 우리 내면의 완악함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장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에서조차 죄를 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실상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허물을 환경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조금 더 여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더라면, 혹은 조금 더 온순한 성품이나 좋은 부모를 만났더라면 내 삶이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업을 할 때 더 좋은 기회를 잡았거나 귀인을 만났더라면 지금 같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주위의 조건들을 끊임없이 되뇌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환경을 갖추어 주어도 인간은 결국 그 풍요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고 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대면하기 고통스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참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인 호세아 11장 1절은 그래서 더욱 놀라운 은혜로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랑하는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다”라고 말씀하시며 출애굽의 사건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걷는 법을 가르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어 다닐 줄밖에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그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시고 따스한 품에 안아주셨습니다.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무섭고 두려운 존재로만 인식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늘 무언가를 요구하시고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는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데서 기인합니다. 하나님께서 걸음마를 가르치며 성장을 독려하실 때, 이스라엘은 도리어 누워 있고 싶다거나 기어 다니는 게 더 편한데 왜 굳이 걷는 법을 가르치느냐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우리의 거부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치셨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고친다’는 것은 치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이 그 치료하심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깊은 노예근성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는 애굽의 방식이 무조건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가나안에 입성한 뒤에도 반복되었습니다. 가나안의 문화와 문명이 자신들보다 월등히 낫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청동기를 사용하는데 그들은 철병기를 가진 것을 보며, 저들이 섬기는 신이 더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풍요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 채 두려워하며 도망치기에 급급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이스라엘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우리가 지난 시간 함께 살핀 창세기를 돌아보아도 능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그 후손들에게 이미 주어졌음에도, 그 약속을 온전히 누리며 산 이들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대다수의 자손은 항상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위태위태한 인생을 살았고, 내 인생은 왜 항상 이 모양인가라고 탄식하며 살아가기 일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제대로 누리는 사람이 의외로 너무나 적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본문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걷게 하시고 가르치셨다면 마땅히 감사하며 나아가야 하거늘,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 했습니다. 기어가는 것도 괜찮은데 왜 자꾸 서서 오라고 하느냐며 배우기를 싫어하고 귀찮아한 것입니다. 품에 안아주시면 사랑을 느끼기보다 숨이 막힌다며 자신을 놓아달라고 아우성치는 격이었습니다.
부모나 조부모가 사랑스러운 손주를 품에 꼭 안아줄 때, 아이가 몸부림치며 빠져나가려 하면 서운한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시지만, 그것을 받는 이들은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구속이라 여기며 귀찮아했습니다. 본문 하반절에는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줄로 그들을 신실하게 이끄셨지만, 이스라엘은 도리어 이를 거부했습니다. 애굽에서 자유하게 해주었으면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 두지, 왜 다시 사랑의 줄로 나를 묶으려 하느냐고 항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줄을 오해하는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을 목도하면서도, 자신들이 다시 노예가 되었다는 깊은 오해에 빠졌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자마자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종처럼 부리려 하신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붙드신 줄이 다름 아닌 '사랑의 줄'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데에는 분명 어떠한 목적이나 의도가 있을 것이라며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이후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지, 내가 주님께 무엇을 해 드려야 할지를 먼저 고민하며 부담을 느끼곤 합니다. 이스라엘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거운 희생을 요구하실까 봐 전전긍긍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주셨다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그들은 그 은혜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논리적 흐름은 단순히 내가 너희를 인도했음에도 너희가 나를 떠났다는 식의 평범한 탄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너희에게 선한 것을 베풀면 베풀수록 너희는 나로부터 더욱 멀어지는구나라는 역설적인 고발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한 것들을 경험했다면 마땅히 감사함으로 주님께 가까이 나아와야 하거늘, 그들은 도리어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간섭받는다고 여기며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단지 주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정서적 소외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요, 거룩함과 참된 사랑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인생이 머무는 곳은 결코 빈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리가 생길수록 우리는 필연적으로 죄와 밀착하게 됩니다. 내 욕망과 탐심에 더욱 깊이 경도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떠난 자리에는 불의와 죄악, 그리고 통제되지 않는 욕망만이 가득하게 들어차게 됩니다.
죄의 종이 아닌 참된 자유인으로의 부름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때로 바벨론의 포로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본래 예수를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죄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권세와 능력, 그리고 영적인 자유가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 결코 패배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거나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죄와 끊임없이 대적하며 싸울 수 있는 존재이며, 설령 연약하여 죄로 인해 넘어질지라도 결코 정죄받지 않습니다. 죄가 엄습하면 다시 싸우고, 실수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끝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그 어떤 죄라 할지라도 신자는 결코 굴복하지 않고 대항할 수 있으니, 죄가 어찌 우리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여전히 죄의 종인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죄의 위세에 눌려 무기력하게 비실거리거나 그 무게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합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도 늘 죄의 문제에만 사로잡혀, 마치 죄가 내 인생의 주인인 양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와 실패, 절망과 우울함이 내 인생을 결정짓는 전부인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은 자유인의 삶이 아닙니다. 이는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이며, 자기 문제라는 감옥에 갇힌 노예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명목상 신자일 뿐 사실상 자유자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러한 비참한 영적 상태를 가리켜 ‘바벨론의 포로’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바벨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나라의 포로로 끌려가 그 나라의 방식대로 살거나,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자유를 스스로 포기한 채 살아갑니다. 신자로서 가장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처럼 비굴하게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이는 마치 당당한 국적을 가지고서도 타국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모순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쁨과 자유,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시기에 주어지는 긍휼
호세아 11장은 두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층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우리 인간이 본질적으로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설명이며, 또 다른 한 층은 그러한 인간이기에 결국 심판을 받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엄중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르면 결론은 분명합니다. 사탄은 이 대목에서 기뻐하며 하나님께 항변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 인간들의 행태를 보십시오. 마땅히 법대로 처벌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 또한 삶의 자리에서 법과 원칙에 따른 처벌을 당연하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놀라운 반전을 일으킵니다. 9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은 논리적으로 변명할 여지가 없는 심판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나타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이유로 제시된 것이 바로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대개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시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래 하나님은 지극히 의로우신 분이기에, 죄를 묵인하는 듯한 이 말씀은 오히려 사람이라면 몰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에 하시기 어려운 말씀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더욱 깊은 신비는 그다음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라고 지칭하십니다. 여기서 ‘너희’는 죄악에 빠져 허덕이는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가득한 현장 속으로 들어오신다면, 공의의 법칙상 그곳의 모든 죄인은 소멸되어야 마땅합니다. 거룩과 죄가 충돌하면 폭발이 일어나 모두가 죽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내가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이기에 진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인간적인 상식과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룩한 역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참된 이스라엘의 임재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공의의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죄를 지나치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역사 속에 면면히 흐르는 메시아의 예표, 즉 구속의 역사를 깊이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구절을 온전히 깨닫기 위해 우리는 다시 1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대목은 마태복음 2장 15절에서 인용된 예수님의 탄생 기사와 긴밀히 맞닿아 있습니다. 헤롯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셨던 어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부르실 때, 성경은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증언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지금 과거의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고 있으나, 이 말씀은 단지 지나간 역사를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는 수백 년 후에 성취될 원대한 예언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이스라엘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모든 생애는 단순히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대속의 사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실패했던 그 자리에 주님이 대신 서셔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를 마침내 완전하게 성취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증언하듯이, 세례는 출애굽 당시 홍해를 건넌 사건과 영적으로 그 궤를 같이합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아갔던 이스라엘처럼,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의 유혹과 우상 숭배의 위협 등 이스라엘이 겪었던 모든 고난과 유혹을 예수님께서 친히 몸소 감당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완성된 영원한 언약
하나님께서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단순히 이스라엘이 가련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죄를 결코 묵인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어찌 잊으며 어찌 버리겠느냐, 너희 가운데 있는 이는 거룩한 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본래 죄인인 우리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는 없으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 곧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에 이 놀라운 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광야에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고, 친히 생명의 만나와 생수가 되어 주셨습니다. 또한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이 되어 그들을 보호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라보실 때, 그들 곁에 있는 참된 이스라엘인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보셨기에 “내가 너희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 내 마음이 긍휼로 불붙듯 하도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완성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참된 대표가 되셨습니다. 거룩한 아들이자 온전한 순종을 이루신 분으로서 지금 우리 가운데, 그리고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고, 성경은 이를 ‘언약의 피’라 증언합니다. 오래전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그 언약이 마침내 온전히 성취된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당시, 쪼갠 짐승 사이로 하나님을 상징하는 타오르는 횃불만이 지나갔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은 그 사이를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홀로 그 언약을 지키시겠다는 절대적인 의지의 표현이었으며, 동시에 쪼개진 고기처럼 피 흘려 죽으실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자리로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제 아브라함 언약의 실체가 우리 앞에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한 영원한 언약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코 잊히지 않는 언약,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고 완성하시겠다는 그 신실한 약속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온 세상에 선포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명확히 나타내는 날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예배하는 우리는 이 놀라운 선포를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습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나는 사람이 아니기에 나의 언약을 반드시 지킨다”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희가 계속해서 나를 멀리 떠나는구나. 내가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나를 버리는구나”라는 하나님의 아픈 탄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멀리 떠나버린 우리를 향해 다시금 약속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가 나를 멀리 떠날지라도, 내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내어 나의 언약을 이룰 것이다. 너희가 나를 거부해도 나는 끝내 너희 가운데 거하리라.” 이는 죄와 욕망으로 얼룩진 우리의 삶 한복판으로 주님이 직접 들어오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선언입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지옥과 같고 음부와 같을지라도, 주님은 그 처절한 곳까지 찾아오셔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친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를 위하여 사람이 되었고, 너의 죄와 절망, 아픔과 연약함, 그리고 깊은 상처 속으로 들어왔다.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거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분노와 아픔, 상처 입은 삶의 자리마다 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너는 의롭다, 너는 내 보배로운 백성이다”라고 불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짖음과 우리의 응답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엄중히 말씀하십니다. “너의 실패를 보지 말고, 너를 위하여 승리한 나를 보아라. 너의 죽음을 보지 말고, 너를 위해 부활한 나를 보아라. 너의 눈물과 한숨에 매여 그것만을 바라보지 말고, 너를 사랑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 나를 보아라. 너의 한숨 곁에서 함께 탄식하며 너를 붙들고 있는 나를 보아라.” 이 땅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그 어떤 탄식과 고통도 결코 우리를 영원히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그 탄식과 상처, 그리고 우리의 깊은 한숨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 울부짖으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라고 촉구합니다. 공의의 법대로라면 우리를 향해 진노하고 저주하실 수밖에 없으나, 도리어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용납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절절한 고뇌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향해 “내가 너희를 축복하며, 너희를 사랑하고 기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짖음입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해진 이유는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나 자신만을 의지하려 합니까? 왜 연약하고 상처 입은 자아를 붙잡은 채 놓아주지 못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상처를 대신 입으시고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왜 온전히 붙들지 못하고 계십니까?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지금도 나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그분의 가슴이 우리를 향해 외치는 이 고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서 너를 향한 사랑이 불처럼 타오르는구나.” 우리의 죄와 실수, 그리고 뼈아픈 실패마저도 모두 태워버리는 그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의 고백을 이 거룩한 아침에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고 주님의 길을 배우게 하옵소서. 내 인생은 이 고난의 순간이 전부가 아님을 믿습니다. 주님과 함께 걸어갈 소망의 길이 있음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가 나의 괴로움이나 연약함보다 훨씬 위대한 불같은 사랑임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합시다.
주님, 나의 공로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 저희가 담대히 주님 앞에 서나이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 예수로 말미암아 저희가 다시금 주를 찬송하나이다. 바라옵건대 저희 마음 가운데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능력을 더하여 주시고, 잃어버렸던 구원의 기쁨을 온전히 회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수많은 죄악과 아픔, 상처와 오해, 그리고 절망이 가득한 그 낮은 곳으로 친히 찾아오신 분,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저희가 다시 서로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참된 소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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