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10 1절로부터 8절까지 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그들이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주상을 허시리라.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할 것이라.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송아지는 앗수르로 옮겨다가 예물로 야렙 왕에게 드리리니 에브라임은 수치를 받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계책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마리아 왕은 위에 있는 거품 같이 멸망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제단 위에 것이니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아멘.

 

여전히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 호세아서

호세아서는 계속해서 여전히 우리에게 참으로 불편한 진실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으며 가장 비참한 마음이 드는 것은, 호세아가 쓰였던, 이스라엘이 그토록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었던 시기와 오늘날 우리가 주님을 믿어가는 모습들이 크게 다르지 않은 면이 많이 발견된다는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주님을 알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호세아가 비추는 이스라엘의 죄악된 장소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걸쳐 호세아를 묵상할 , 사실 지명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중 하나는 기브아의 시대입니다. 기브아는 베냐민 지파가 살고 있던 동네였습니다. 시대는 레위인부터 시작하여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 부패했고, 심지어 지파끼리도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죄를 감추기 위해 죄를 짓고, 죄를 덮기 위해 다시 죄를 지었던 비극의 시대였습니다. 호세아는 바로 시대의 죄악이 여전히 너희에게도 남아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동시에 듣기 싫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길갈이었습니다. 길갈은 가장 거룩한 언약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이후 하나님이 주시는 수많은 승리의 표적들 가운데 번째 기념비가 되는 돌을 놓았던 곳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거룩한 장소가 이제는 가장 추잡하고 죄악이 넘치는 곳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번영 속에서 짓는 우상: 무성한 포도나무

거룩을 죄악으로 바꾸어 가는 시대, 오늘 호세아는 사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의 논점을 제기합니다. 사실 호세아는 11장부터 14장까지의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계속해서 준비하고 구축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14장에 가면 우리가 푸른 잣나무를 만나게 되고, 11장에는 애굽에서 우리를 부르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10장에서 하나의 도시를 만나게 것입니다.

 

번영이 낳은 다른 우상 숭배

우선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일컬어 “너희는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구절만 본다면 분명 칭찬처럼 들립니다. “이스라엘은 열매를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여기서 ‘무성한’이라는 단어는 번역하기에 따라 ‘파괴적인 포도나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단어는 뜻이 너무나 다르지만, 우리말에서도 단어에 여러 가지 뜻이 있듯이 히브리어에서는 가능한 표현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무성한 포도나무라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라는 말씀은,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게 되고 부흥하며 커질수록 제단도 많이 세우고, 제단에 있는 주상들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혹여 주상과 제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 교회가 그렇게 부흥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 나오는 주상이나 제단은 모두 우상을 섬기는 장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은 우상을 점점 많이 만들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교회를 점점 멋있고, 화려하고, 찬란하게 만들어 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타락할수록 교회는 점점 화려해지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타락하고 있다는 증거 하나이기도 합니다. 물론 나중에 교회를 지었던 나라들은 덕분에 관광 수입으로 먹고 살기도 합니다. 건축물로서 너무 아름다운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 문화적인 가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중세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힘썼던 것은 다름 아닌 성당을 어떻게 하면 더욱 아름답게 짓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열매를 맺는 무성한 가지가 되어 정말 잘되고 풍성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교만의 씨앗: 풍요 속에서 여호와를 잊어버림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도대체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은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모세가 예언했던 일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신명기 8 1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소와 양이 번성하며 은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풍부하게 때에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지금 이스라엘에게 모든 것이 풍성해졌습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앗수르가 이상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할 있는 상황을 맞이했고,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십여 동안 이스라엘은 우리가 보기에도,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부흥했다고 있으며, 실로 번성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이들이 다시 과거를 꿈꾸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라며 여로보암 시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먹고 살았는가, 그때 얼마나 재미있게 살았는가, 얼마나 많은 즐거운 일들이 있었는가, 우리 그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라는 마음과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나타나게 , 모세의 경고는 우리말로 아주 간단하게 요약할 있습니다. “너희가 등이 따뜻해지고 배가 불러지면, 너희는 교만해져서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잊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예 부르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가버렸다는 말도 분명히 아닙니다. 여전히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고 있었고, 일이 있을 때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아마 불러댔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명확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잊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교만이 잊게 만드는 가지 진실

여러분, 그렇다면 교만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쉽게 마음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었던 신명기 말씀, 특별히 신명기 8 15절에 이어서 이렇게 나옵니다.

 

“너를 인도하여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어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시고 함께하시며 사랑하셨던 일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교만해지니까 은혜를 잊어버리더라는 것이죠. 교만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데, 여기에는 크게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은혜의 과정과 목적을 잊음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가를 그들이 온전히 알지 못했거나, 그것을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끌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훈련시키시고 낮추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하시고, 그래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모든 시험과 유혹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시험은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내가 너희와 함께 어떻게 너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가’를 가르치시는 훈련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를 통해 받은 교훈과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셨던 시간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든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빨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저 거기에 들어가서 먹고 살고 싶은 것이었으며, 광야에서 힘들고 어렵게 살거나 지겨운 만나만 먹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가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고기도 먹고 싶었습니다. 또한, 매번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기만 하면 땅을 파서 우물에서 물이 솟아나는 삶을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한 갈망이 그들의 모든 관심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셨다면, 무엇 하러 광야를 지나가게 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무슨 심술이 많으셔서 사십 동안이나 고생시키셨겠습니까? 그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약속한 땅에 들어가면서도 오히려 현실을 두려워하고, 땅의 거주민들을 무서워하며 “하나님, 하나님께서 주신 앞에서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이러다가는 죽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들의 두려움을 보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기 때문에 너희가 누구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여기 있는 수많은 적들을 내가 데리고 다닐 테니 한번 보아라. 너희를 막을 있는 자가 누가 있으며, 너희를 패퇴시킬 있는 자가 누가 있고, 너희를 흔들 자가 누가 있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하니 너희가 사십 동안 걸었어도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고 옷이 해어지지 않았지 않더냐.

 

이것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이 배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이야기이며, 또한 우리에게도 사실로 다가오는 현실입니까?

 

둘째, 자신의 연약한 존재를 잊어버림

하나는 당연히 하나님의 손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광야로 데려가신 진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물도 마음대로 마실 없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우고 있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얼마나 연약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벌써 잊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잊어버리는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인생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보석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교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쩌면 “내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서 정도까지 왔다”라고 말하며, ‘왔다’라는 지점에 점을 찍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여러분의 인생 전체가 점이자 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는 귀한 것이고, 이것이 보석입니다. 바로 과정 속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게 것이며, 주님의 은혜를 알게 것입니다.

 

고난을 잊고 열매만 자랑하는 마음

그런데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사실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말의 뉘앙스로 말하면, 시간들은 그저 고생일 뿐입니다. 잊어버리고 싶은 고생 말입니다. “지금 나는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요즘 찬송할 맛도 나고, 교회 오는 맛도 나고, 하나님이 기도하면 척척 들어주시는 같고, 요새는 너무나 행복하고 좋아. 현재의 만족스러운 부분만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석이 보석되었던 순간은 바로 그곳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과의 시간, 하나님의 손길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고, “내가 얼마나 고생을 이겨냈는가, 고생 끝에 드디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구나”라고만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래도 내가 이만큼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오직 그것만 기억하게 하고, 그것만 보게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석처럼 다듬어 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 그것이 사실은 교만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그렇게 여기까지 오신 아닙니까? 여러분이 여기까지 오신 데에는 물론 번성도 있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은혜로 말미암아 기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걱정도 있었고 근심도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우리는 번성과 기쁨과 즐거움으로만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니고, 똑같이 걱정과 근심으로만 인생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머리카락 하나도 그것으로 희어지게 하거나 검게 없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여기까지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교만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저 “여기 왔다, 그래도 고생하다가 여기까지 왔구나”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은혜가 없었다면 나는 여기 없는 자였구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의 마음이 높아졌다는 것을 분명히 있습니다.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오직 열매만을 바라보는 모습은 결국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만의 가장 깊은 뿌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기보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셨기 때문에 내가 일을 결국 완성했다’라고 스스로 결론짓고 싶어 합니다. ‘나는 사실 무익한 종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시고 은혜를 베푸사 여기까지 왔습니다’라는 겸손한 고백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겸손을 가르치셨지만, 우리는 겸손을 배우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신앙의 도리를 가르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배우지 못하며, 우리가 가진 열매만 자꾸 바라봅니다. 그리고 열매만을 보게 되면, 교만한 모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드러나는데, 바로 열매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가 있고, 여러분과 우리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열매는 감나무에 맺힙니다. 이때 가지가 ‘여기 열매가 맺혔으니 열매는 거다. 내가 맺은 거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가지가 실제로 우리에게 그렇게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들이 영양분을 흡수하여 위로 올려준 것이며, 가지 자체는 영양분을 만들지 못합니다. 잎들이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통해 나온 양분을 열매에게 것입니다. 가지가 자기에게 열매가 맺혔다고 해서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을 너무나 쉽게 행합니다. 기도의 능력으로 응답이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의 기도가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일어나는 사랑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받으시고, 여러분의 소리를 들으시며, 사랑으로 응답하시기 때문에 귀중한 것이지, 내가 드리는 기도가 대단한 가치나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꼼짝 못하고 내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기도한 대로 모두 응답하시고,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면 아마 세상은 벌써 예전에 망했을 것입니다. 역시 그런 기도를 많이 드렸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살아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오히려 고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응답 속에는 우리의 욕심과 불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녹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순종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들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호세아가 아니라 모세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구절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네가 지금 재물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너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너의 것이 아닙니다. 교만과 반대되는 겸손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고통조차도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 거기에는 단지 여러분과 우리가 누리고 있는 우리의 소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능력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이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진 풍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는 여러분의 모든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눈물도, 여러분이 힘들었던 순간들도, 물이 없어 반석과 돌덩이만 보일 어떻게 물을 마셔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에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위험한 전갈이 나타나는 광야에서, 전갈이 언제 나를 물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여러분의 인생과 시간들은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처럼 힘들어 홀로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은 나의 고통조차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마음에 맞는 하나님: 벳아웬

이스라엘은 자기에게 열려 있는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보자마자, 그것을 자기가 만든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예수를 믿고 기도했더니 “와, 들어주시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감사해야 하지만, 우리는 수준에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신앙을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며 서로 간증하고 만족하며 끝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께서 이것도 주시더라, 역시 하나님이 다르시더라.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지만, 우리의 신앙은 여기서 걸음도 나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진짜 응답인 것처럼 쉽게 속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말을 들어주는 하나님, 그래서 마음에 드는 하나님이 좋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만들어냅니다. 마음에 드는 예수님을 부르고 그곳에서만 머물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불평을 쏟아냅니다. 불평만 하면 좋으련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조차 흔들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럴 있나', '나는 도대체 신앙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하는 회의적인 질문에 너무나 쉽게 빠져들게 됩니다.

 

베델이 변한 벳아웬, 허망한 우상의

하지만 이보다 위험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이렇게 편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너무 좋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나의 , 감정, 내가 편안하고 행복한 , 혹은 욕심까지도 지지해 주는 하나님을 찾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지명의 이름입니다. 도시의 이름은 벳아웬입니다.

 

‘벳아웬(Bet-Awen)’이라는 말에서 ‘벳(Bet)’은 집을 뜻합니다. ‘아웬(Awen)’이라는 말은 허무하다는 뜻이거나 죄를 뜻합니다. , 이는 정말 우상을 의미합니다. , 우상의 집인 것입니다.

 

벳아웬이라는 곳은 물론 실제 지명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선지자들은 단어를 다른 아주 유명한 도시 대신에 사용합니다. 여러분, ‘벳’으로 시작하는 도시 가장 아는 유명한 도시는 무엇입니까? 베들레헴, 그리고 베델(Bethel) 있습니다. ‘엘(El)’은 하나님이니, 베델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누가 불렀습니까? 야곱이 불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경험하고 그곳에서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베델의 이름을 벳아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도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델이 어떻게 되었다는 뜻입니까? 말할 없이 타락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본래 하나님의 집이었는데, 지금은 우상의 , 허망한 , 죄악의 집이 되었구나라고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아닌 그리스도의 뜻대로

거짓되고 헛된 , 바로 이러한 것들이 그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선지자는 그곳을 거짓의 장소라고도 부릅니다. 이곳은 여러분과 저의 마음에 맞는 곳일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심이 거기에 그대로 투영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대로 믿는 하나님이 바로 벳아웬의 하나님이며,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하나님이 바로 벳아웬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좋아하고, 신을 만들려고 하며, 만든 신을 경배하고 꾸며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제사를 드리며, 나에게 복을 달라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것이 마음에 맞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으로 신을 해석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을 지지하는 이야기는 성경에도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절을 근거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그것이 나에게 오기를 당연히 원합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여러분은 그것이 들어주지 않을 “아,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기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들어줬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잘못했습니까? “내가 기도에서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들어주시는구나, 내가 정성이 부족해서 들어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는 때때로 잘못된 생각이 함께 들어 있을 있습니다. “아, 내가 여기서 정성을 들일 , 내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 순종할 , 내가 성경을 조금 읽을 , 내가 기도를 열심히 , 새벽 기도를 빠지지 않고 나올 ,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들어주셨을 텐데.

 

바로 이것이 안타깝게도 사탄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의 기도는 이렇게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정말 찰떡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입혀 주시옵소서. 가르쳐 주시옵소서.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가르쳐 주옵소서”입니다.

 

여러분도 무엇이 정답인지는 너무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이, 정답을 안다고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답안지에 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는 이유는,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엄살을 떱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첨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마음에 맞출 있을까 해서 별짓을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혀 기뻐하지 않으셔도, 우리는 그것을 만들고 고안해내며 일을 행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 나를 돌아보게 하시옵소서”라고 했다면, 그것은 잘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것은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찾고, 길에 순종할 있도록 도와주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정말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조차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아주 쉽게 해석할 있습니다. 같은 구절을 놓고도 엉뚱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지를 압니다. 모든 기도가 나의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 마지막에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말은,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인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마음

여러분, 이제 오늘 본문을 돌아가 보면, 호세아는 10 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오.

 

이들은 자기들이 뭐가 것입니까? 스스로 왕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유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구절이 이스라엘 왕을 비웃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당신들이 왕이라고? 우습지도 않다. 우리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당신들을 두려워하겠느냐? 당신들이 우리에게 해줄 있느냐?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 왕들은 너무나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장의 전체 문맥을 보면, 단지 이스라엘 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인정하는 자체를 조소하고 거부하고 있음을 있습니다.

 

우리의 왕을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

여러분, 일은 가장 안타깝고도 눈에 보이게 일어난 사건이 바로 빌라도 앞에서의 사건 아니겠습니까? 빌라도가 “야, 자가 너희들의 왕이 아니냐?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했을 , 이스라엘 군중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말은 ‘없애버리소서, 저를 십자가에 박게 하소서’라는 말보다 무서운 말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박으랴? 이때 대제사장들이 대답합니다. 구절이 우리를 쭈뼛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뭐라고 하냐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사실 가이사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원수로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는 가이사조차도 왕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단순히 “아, 내가 주님을 몰라”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는 사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본성은 원래 이렇게 반응합니다. “내가 그것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내가 돈을 믿겠다, 주먹을 믿겠다, 내가 믿지도 않고 인정하지 않았던 , 심지어 원수조차도 편으로 삼겠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왕이 있는데도 왕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들의 원수를 왕으로 부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할 없는 것입니다. 이유는 가지, 자기들에게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이 되어 하나님을 부리는

여러분, 이처럼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을 극도로 비판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여러분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일들의 많은 부분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마음에 맞는 하나님, 그것이 벳아웬의 하나님입니다. 마음에 맞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들만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 매우 위험할 있는 일입니다.

 

이들은 “내가 왕이다. 다른 왕들은 하겠느냐”라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도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실 있습니까? 가만히 계십시오. 저희가 교회를 멋있게 지어드리고, 헌금 내드리고, 예배 드리고, 찬송 불러드릴 테니 하나님, 모르시면 가만히 계세요.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라고 우리가 하나님을 가르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종처럼 부립니다. “하나님, 이건 해주셔야 합니다. 결제는 하나님께 도장을 맞지만, 사실은 우리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겁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사실 “내 말대로 하라”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공허한 제사, 굽어진 판결

이스라엘의 마음이 이처럼 거짓스러워졌기 때문에, 그들의 중심지였던 베델이 거짓의 , 공허한 , 우상의 집인 벳아웬이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곳에서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려고 합니다. 거짓된 신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고 화려하고 위엄 있는 건축물과 성전을 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멸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울려 퍼지는 같으나, 사실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 관심이 있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기 위해 정말 힘을 다하려고 애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위에는 약하고 가난하며 힘이 없는 이들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억압받고 쫓겨나며, 성경은 우리의 판결이 굽어진다고 말합니다. 판사가 어느 쪽으로 판결을 굳게 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가진 자들에게 유리하도록 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근대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에, 시대와는 조금 다를 있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약하고 힘없고 우리보다 없는 이들에 대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가난하고 힘없고 어려운 노숙자들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르게 '' '' 정할 때가 많으며, 모르게 자신이 ''이라고 생각하거나 ''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게 누가 높은 자이고 낮은 자인지 생각할 때가 있고, 그러한 서열 의식이 이미 우리 안에 있어서, 모든 일들을 방식으로 생각하는 익숙해질 때가 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여러분, 이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은 이스라엘 시대, 신정왕국이라고 불리는 시대입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직접 율법을 통해 통치하셨습니다. 왕을 세우셨고, 왕을 통해 제사를 집행하며 다스림을 시행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다스렸기에, 율법을 어기면 율법대로 처리했습니다. 안식일을 어기면 반드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 시작된 왕국

지금은 어떠합니까? 지금은 구약의 나라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구약의 통치와 구약에 있었던 나라들의 통치가 없어졌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의 나라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말은 나라가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나의 나라는 너희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정정치이며,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시고, 여러분은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나라, 여러분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이 왕이 되어 여러분의 인생을 이끄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을 통치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나라는 땅에 속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땅에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마지막 날에는 모든 세상을 심판하게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의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당연히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니까요.

 

다윗이 우리에게 알려주었던 나라, 아브라함이 축복받았다고 말한 나라, 그리고 수많은 선지자들이 외쳤던 나라가 바로 지금 여러분 안에 있는 나라입니다.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서 우리에게 지금 주셨고, 나라가 우리 안에 시작된 것입니다. 나라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며, 나라가 우리가 받은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영원한 성전

다윗이 말했던 나라의 실체입니다. 다윗 왕국의 실체 말입니다. 왜냐하면 다윗 왕국은 영원할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의 위가 영원하리라.

 

지금 여러분에게는 영원한 자리,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 왕자와 공주라는 영원한 위가 주어져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왕자와 공주인 것입니다.

 

무너질 없는 하나님의 성전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했고, 유다도 망하게 됩니다. 그들을 호화롭게 장식했던 모든 산당들도 무너질 것입니다. 뭐가 무너집니까?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집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모든 것은 무너집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지금 지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함께 성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성전은 구약에서 지은 어떤 성전과도 비교할 없습니다. 구약의 성전들은 언제 적이 쳐들어와서 무너뜨릴지 모릅니다.

 

법궤들은 금으로 쌓았지만, 언제 누가 벗겨 갈지 모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얼마나 여러 약탈을 당했습니까? 금은 매번 벗겨졌습니다. 성막의 기구들은 얼마나 많이 뺏겼습니까? 법궤는 블레셋에게도 뺏기는 , 많은 것을 뺏겼습니다.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망해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어떠했습니까? 너희들이 망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망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부르심의 그림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드라마를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그리스도를 통해 여러분이 받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나라는 은혜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람의 손으로 망할 없습니다.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손으로 망하게 없습니다. 성전, 하나님의 나라는 타락할 없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영광을 나누시는 독특한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사실 훌륭한 시민은 아닙니다. 나라의 가치와 이름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나라에 맞는 참으로 온전하고 멋있는 시민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시민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통치 아래서, 나라와 나라의 왕이 누구인지를 알아나가는 시민인 것입니다.

 

나라의 왕은 정말 독특한 왕입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시는 분이고, 동시에 우리와 함께 웃기를 즐거워하시는 분이며, 우리를 즐거워하시고 우리가 즐거워해 주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왕이시지만,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왕이고, 모든 것을, 자기의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누리기를 원하실 아니라, 그분의 영광까지도 함께 누리려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고난은 나눌 있어도 영광은 나누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고생하고 힘들 때는 모두 열심히 같이 일하고, 사업을 같이 만들고, 나라를 같이 세웁니다. 하지만 누가 왕이 것인가 하는 문제 앞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배반과 죽임과 뒤에서 일어나는 권모술수가 난무합니다. 자리는 나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속담이며, 맞는 말입니다. 영광을 누가 나누겠습니까? 힘든 일들은 같이 나눌 있고, 같이 수도 있고, 같이 힘들어할 있지만, 정말 좋은 것은 나누기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우리의 상식과 생각을 완전히 부수시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와 나의 영광을 함께 나눌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말씀의 능력이자, 진정한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용납과 격려가 있는 교회

물론 우리는 의심도 많고 유혹도 많습니다. 은혜라고 외치면서도 우리는 금방 타인에게 율법의 잣대를 갖다 댑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귀한 법을 마음대로 무시하고 마음대로 살면서,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이다"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그렇게 판단할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행동을 합니다. 어떤 때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치고 피곤하여 마치 쓰러진 것처럼,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되지만 너무나 힘들어"라고 느낄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정죄가 없는 사랑의 공동체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성전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곳에는 정죄가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있으며, 그것 때문에 정죄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른 길로 인도받고 격려를 받으며 함께 서자는 말을 듣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누구를 깎아내리기 위해, 당신이 옳고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세상에서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진리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세상은 그것을 보여줄 있지만,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우리의 진리가 올바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우리가 무릎을 꿇고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화를 내고 잘라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곳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곳이고, 회개와 용서가 바다처럼 넓은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서로를 용납하는 곳입니다.

 

많은 오해가 있을 있습니다. 많은 아픔이 있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속이 상하고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납하는 길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십자가로 끝나는

하나님의 손이 너무나 안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사랑이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와 우리의 실수, 우리의 실패를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받아들일 있습니다.

 

"주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주님, 이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지혜를 주십시오. 저희가 이렇게 다시 가겠습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주님, 저희가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겠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 길을 가며, 실수와 실패와 어려움이 있더라도 길이 하나님의 단단한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 고백합니다. 우리가 만든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우신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우리의 잘못을 서로 고백할 있고, 부족함을 서로 채우며 그것을 위해 애쓸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상처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일이, 교회에서는 십자가로 끝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나의 심장을 주님께 제물로

저희가 종교개혁사를 공부하고 있는데요. 칼빈이 그렇게 어렵게 제네바에 들어가서 힘들게 개혁을 하려다가 쫓겨났습니다. 쫓겨났을 칼빈은 정말 상처를 입었습니다. 부활주일 예배에 총과 도끼, 농기구를 들고 사람들이 예배실에 들어왔으니, 이것이 칼빈의 입장에서는 평생 남는 상처가 아니었겠습니까?

 

여러분, 제가 설교하는데 여러분이 아무 없이, 눈만 감고 계셔도 설교자는 굉장히 많은 걱정을 합니다. ‘내 설교가 이렇게 재미가 없나? 이렇게 반응이 없지? 차라리 고개를 끄덕이시면 ‘아, 주무시는구나’ 생각할 있습니다. 잠은 있으니까요. 그런데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눈만 감고 계시면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가? 별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칼빈을 생각하면 저는 깜짝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예배하는 곳에 총을 들고 들어오거나, 언제든지 일어나 소란을 피워 설교를 하게 만드는 일들을 어떻게 참아냈을까요? 그래서 칼빈이 쫓겨나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감사하다고, 나를 쫓아내 주어서 감사하다고요.

 

나의 것이 아니오니, 나의 심장을 주께

그런데 만에 다시 그를 불렀습니다. 그때 칼빈이 뭐라고 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번을 죽어야 하는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번이라도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을 같다.

 

십자가를 지고 매일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주 잔인한 다른 방법으로 정도 죽는 것이 낫다, 절대 간다는 말입니다. 이는 파렐에게 편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이 참으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말씀입니다.

 

“만약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말이 놀랍습니다. 저도 말씀을 공부하고 준비하면서, 자신의 목회 사명,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만큼 싫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절대로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제네바로 돌아가는 , 제네바에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도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제네바가 두렵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저는 정도는 아니지만, 목회를 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때가 있습니다. ‘과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곳에 것이 맞을까? 이런 질문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칼빈은 이렇게 말하며 마지막 결론에 이릅니다. 우리 모두가 신앙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만큼 싫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나의 심장을 주님께 제물로 드립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도, 자신의 눈물도, 자신의 억울함도, 자신의 공포까지도 나의 것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받았던 수많은 멸시와 모욕, 자신을 무너뜨렸던 제네바 시민들의 시선과 답답함조차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인생, 내가 겪은 모든 , 나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오니 주님, 나의 심장을 주께 드리나이다.

 

후일 그의 제자들은 고백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Prompte et sincere(프롬프테 에트 신체레), 즉시, 신속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칼빈은 이후 제네바로 돌아온 , 심장 그림을 자신의 개인 편지 인봉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의 심장이 주님의 것임을, 인생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나는 나의 것이 아니오니 나의 심장을 주께 드리옵나이다.

 

평상시라면 어쩌면 쉽게 있는 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곳에 다른 멸시가 기다리고 있고, 다른 업신여김이 기다리고 있으며, 다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곳으로 가면서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모든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모든 인생을 주님께 드렸나이다.

 

여러분도 주님의 것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눈물도 주님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아픔도 주님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도 그렇게 주님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설교를 하며 떠오르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도 주님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것이 되었기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에서 고백하듯이, 세상에서 참으로, 참으로 행복하고 기쁘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 주님께 드리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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