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7장 2절로부터 4절까지 입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아멘.

 

변함없는 인간과 신실하신 하나님

창세기는 사실 열 개의 중요한 포인트를 가지고 구조를 만든 책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족보를 의미하는 ‘톨레도트’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써 내려갔습니다. 창세기 전체에는 총 열 개의 톨레도트가 등장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는 구절이 바로 창세기의 마지막 족보입니다. 이 마지막 족보는 굉장히 길어서 37장부터 50장까지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야곱의 족보’라고 하면 그다음부터는 야곱의 이야기가 아닌, 야곱의 후손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이 긴 기간 동안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진 인물은 두 명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로서 계속 등장하지만 바로 요셉과 유다입니다. 구약을 조금 더 읽은 분들은 아시겠지만,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 지파가, 남유다에서는 다윗 왕조의 후계자들이 계속 왕위를 이어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두 가문이 이미 이때부터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이 기록된 시점으로부터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렇게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유다와 요셉에게 집중된 역사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셉에게 역사하셨고, 유다는 왜 등장하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맺게 하는지를 놓치지 않고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의 족보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몇 가지 중요한 관점 중 두 가지를 다루려 합니다. 나머지 두 가지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다루겠습니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 야곱의 족보에 ‘변함없는 인간’과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특징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지나 12지파, 곧 4대째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이삭은 누구를 좋아했나요? 에서를 좋아했습니다. 리브가는요? 야곱을 좋아했죠. 이렇게 편애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보면 야곱이 누구를 좋아합니까? 열한 명의 아들을 놔두고 요셉을 더 사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편애가 똑같이 등장하며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모습도 예전과 너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는 분명히 신앙의 정신이 있었지만, 이 집안 전체를 놓고 보면 그 자녀들은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죄인이기에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래도 좀 달라지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을 숭배하던 데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건져내 가나안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여러분은 모두 엎드려 “주님 말씀만 하옵소서. 제가 어디든 가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음성을 듣고 약속을 받았는데도 두려워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용감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죠. 이삭은 어떻습니까? 그도 고집이 대단했습니다. 끝까지 에서를 붙잡다가 큰코다쳤습니다. 야곱은 말할 것도 없고요. 우리와 너무 비슷한 면이 많아 할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교만으로 이어진 아버지의 편애

열두 지파가 생겨 이제 좀 많아졌으니 달라졌을까 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부터 시작되는 이 열두 지파의 이야기를 보면,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야곱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편애했기 때문에 요셉이 삐뚤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 우리 모두는 자녀에게 사랑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심성이 따뜻하고 바를 수 있다고 생각하죠. 물론 그런 부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넘치는 사랑을 받은 요셉의 이야기를 보면, 따뜻한 마음을 갖기보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물론 야곱의 잘못된 사랑도 문제였지만, 그 사랑을 받은 요셉 역시 죄인이었습니다.

 

결과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 2절에서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쳤다’고 말합니다. 요셉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고, 야곱은 108세입니다. 형들은 40대에서 50대 사이였을 겁니다. 형들과 나이 차이가 꽤 났기 때문에 아버지가 “네가 가서 좀 도와줘라”라고 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에서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알렸더라”라고 이야기합니다. 형들에게 문제가 많았기에 야곱이 “네 형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와서 나에게 보고해라”라고 생각했고, 요셉이 잘못을 아버지께 알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알린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단 한 번도 긍정적으로 쓰인 적이 없습니다. 이 단어는 항상 거짓 보고를 하거나, 과장하거나, 혹은 악의를 가지고 보고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가나안 정탐꾼이 돌아와 “악평하였더라”라고 번역된 부분에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요셉이 형들의 이야기를 정직하게 보고한 것이 아니라,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거짓으로 고자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번역하면, ‘요셉이 형들에 대한 진실하지 않은 악의적인 보고를 아버지에게 하였더라’가 됩니다.

 

지금 누구의 잘못입니까? 요셉은 아버지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모든 일에 있어서 자신에게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형들에 대한 험담을 해서 그들을 깎아내리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이 돋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요셉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기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내 자랑을 하기가 힘들 때면 상대방을 깎아내리곤 합니다. “우리 애가 이번에 하버드에 들어갔어”라고 하면, “요새 하버드 별로 인기 없던데”라고 말하는 식이죠. 물론, 그렇더라도 하버드에 들어갔으면 좋겠죠?

 

여러분은 요셉이 꿈을 꾸는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요셉이 첫 번째 꿈을 꾸고 자기 곡식단에 다른 모든 곡식단들이 절을 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에는 순진하게 자기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얘기를 듣더니 형들이 “야, 그럼 네가 왕이고 우리는 너의 신하란 말이냐?”라며 화를 내고 요셉을 더 미워했습니다. 이쯤 되면 눈치라도 있으면 아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도 요셉은 두 번째 꿈을 꾸고 그 이야기를 또 합니다. 이번에는 해와 달과 열한 개의 별이 모두 자기에게 절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형들은 요셉을 “더 미워하였더라.”

 

요셉의 나중을 보면 그는 굉장히 똑똑한 사람입니다. 이쯤 되면 그가 어리석거나 순진해서 얘기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높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에게까지 꾸중을 듣는 것을 보면 상당히 의도적인 발언입니다. “야, 그러면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도 너한테 절한다는 뜻이냐?”라며 야곱에게 꾸중을 듣습니다. 요셉에게는 마치 ‘관심을 구하는 사람’의 면모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은 요셉을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기보다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데 훨씬 더 기여를 한 것 같습니다. 형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고, 그 결과 형들은 분노하게 됩니다.

 

미움이 불러온 파국

보통 막내 동생은 형들에게 사랑받는 게 일반적입니다. 웬만큼 까불어도 형들이 “막내니까 그렇지” 하며 넘어가기 마련이죠. 그런데 서른에서 오십 대에 이른 형들이 열일곱 살 동생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이 의견에 단 한 명도 반대하지 않고 모두가 찬성했습니다. 이 정도라면 형들이 나쁜 것이 아니라 요셉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형들이 너무 나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형제들이 모두 마음을 모아 요셉을 죽이려 했다는 것은 요셉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형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요셉은 가장 사랑을 받았지만 가장 자기밖에 몰랐던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사랑이 불러온 상처

요셉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은 이미 해온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겜 사건도 있었고, 르우벤의 일도 있었죠. 사실 야곱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들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그다지 기대할 만한 자식이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더 집착했을 수도 있고요, 요셉이 말을 잘 들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야곱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요셉이 형들과 함께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르우벤이 이랬어요. 시몬이 이랬어요. 레위가 이랬어요. 유다가 이랬어요’ 하며 고자질을 했을 겁니다. ‘일은 안 하고 저 구석 그늘에서 자고만 있더라’ 같은 거짓된 보고를 해서 아버지가 형들을 오해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말을 들었으면 “야, 형들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냐?”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일 텐데, 성경에서는 오히려 옷을 사주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옷은 채색옷이었는데, 구약에서 이 옷은 공주가 입었을 때도 등장합니다. 이는 당시 왕가에서 입던 옷이었죠. 이 시대 이스라엘에는 아직 왕이 없었으므로,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명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염색이 있는 옷은 웬만한 부자가 입기 어려운 옷이었고, 채색은 한 가지 색이 아닌 여러 색으로 물들인 옷을 뜻합니다. 고고학적으로는 손목과 발목까지 오는 화려한 옷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꾸짖기는커녕 이런 옷을 만들어 주어, 사실상 상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야곱 자신도 사실상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습니다. 형들도, 요셉도,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결과 형들은 ‘어떻게 아버지가 요셉만 싸고돌 수 있나?’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야곱은 요셉의 얼굴만 봐도 좋은 아들이었나 봅니다. 마치 “너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내 옆에 있어. 그러면 난 그냥 배가 부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그렇게 끼고 돌았기 때문에 누가 미움을 받겠습니까? 요셉이 더 미움을 받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결론이 담긴 4절 말씀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이 구절은 보통 ‘요셉에게 무슨 말만 하면 아버지에게 고자질한다’라고 이해하기 쉽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는 말은 ‘그에게 샬롬 할 수가 없었더라’라는 뜻입니다. ‘평강’을 의미하는 샬롬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와 평화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이제 열두 아들 사이에는 갈등이 들어왔고, 그 가정의 샬롬이 깨어져 평화를 잃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우리는 야곱의 가정을 보며 “저렇게 깨졌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의 가정도 어딘가 금이 가 있습니다. 자녀 문제로, 우리 자신의 마음 문제로, 경제적 문제로, 여러 가지 이유로 금이 갈 때가 있죠. 만약 금이 간 곳이 없다면 기도 제목도 없을 겁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깨져 있는지를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야곱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깨어졌을 때 어떻게 하십니까? 무엇으로 그것을 이겨내시나요? 그래서 이 요셉의 이야기는 결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깨어진 가정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요? 사실 이 이야기에서 정말 놀라운 것은 야곱의 집안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집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금도 계속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이 놀라운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창세기를 처음 들었을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상 이야기를 듣고 있죠. 솔직히 말해, 그 선조들은 정말 엉망입니다. 본받을 점이 하나도 없고,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일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열두 지파가 바로 우리의 조상이라니, "야, 하나님이 그 긴 기간을 어떻게 참으셨을까?"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하나의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라

여러분, 여러분이 너무 선하게 사셔서 감격이 없으시군요. 저는 고등학교 때 집에서 “너는 어차피 안 돼!”라며 포기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여자친구를 만나 정신 차리고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우리 때는 대학에 들어가면 사람 되었다고 했으니, 부모님이 학교에 찾아와 전교생에게 호빵을 사주셨는데, 자기 아이를 포기했다가 이런 일이 생기니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 민족은 지리멸렬한 민족이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망할 것 같았죠. 우리가 조선 왕조나 고려를 보며 “저러니 망했지!”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야곱의 열두 지파를 보면 “너희는 얼마 못 가겠다! 너희 대에서 끝이다!”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그런데 지금 400년이 지나 하나의 민족이 되어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이 자기 조상의 이야기를 읽을 때, 이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됐을까?’ 변함없이 그들을 붙잡은 것은 야곱의 핏줄도, 아브라함의 초라한 신앙도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변함없이 이들을 붙잡았던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루신 것을 모세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신명기에 있는 말씀인데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사 너희를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셨으니…”

 

그다음 이 말이 나옵니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모세는 이 진실을 아주 꿰뚫어 보았습니다. 모세가 훌륭한 신학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깊이 이해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우리는 수가 많아서 선택받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신다.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됐다. 나는 이래서 예수 믿게 됐다’라고 말하겠지만, 너는 알라.”

 

“그런 것으로 너희가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세 전에 너희와 하신 약속과 너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너는 알라”라는 말에 기분이 안 좋으신가요? “당신은 알라. 여러분은 알라. 제발 알라. 무엇이 여러분을 여기에 오게 했는지를 알라. 여러분의 발과 여러분의 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셨다.”

 

샬롬을 연결하신 하나님

요셉이 야곱과 함께 살았던 기간은 열일곱 살 때까지, 17년입니다. 야곱은 그때 대략 108세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야곱의 나이는 정확하게 130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39년간 있었다고 보고 계산하면 그렇습니다. 야곱은 그 후 147세에 죽으니, 요셉과 다시 만난 후 17년을 더 산 것입니다. 앞에 17년과 뒤에 17년, 아주 놀라운 대칭을 이룹니다.

 

왜 그럴까요? 앞의 17년은 형제들 간의 분열, 갈등, 미움의 이야기이고, 뒤의 17년은 화해와 용서, 샬롬의 이야기입니다. 앞에는 샬롬이 없었지만, 뒤에는 샬롬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완전히 다른 두 17년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셉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를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의 큰 구원으로 당신들을 보존하시고 후손을 살게 하셨나이다.” 우리 중에는 “이건 말도 안 돼. 형들이 팔았는데, 무슨 하나님이 보냈다는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제 믿음으로 요셉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자,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요셉이 야곱과 지냈던 처음 17년과 마지막 17년을 무엇이 연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사이를 연결하고 계십니다. 이 일의 변화를 이룬 것은 요셉도, 야곱도, 열두 지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요셉이 어떻게 변했다”를 추적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를 추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그 일을 이루셨음을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변화 없는 우리와 실망하지 않는 신앙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서 이 사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야곱의 집안도, 아브라함의 집안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열두 지파도, 심지어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이 사람들이 구원의 역사를 이룰 사람들인가?” 라고 생각하다가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아, 나도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어하고 걱정하는 것은 ‘변화가 없는 자기 자신’ 때문입니다. 저도 “설교를 20년 넘게 했는데 성도들이 변하지 않습니다”라며 고민하는 목사님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변하지 않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때문에 실망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내 노력이나 시간,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있으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는 반대로 나 자신을 갈고닦는 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만든 신앙의 틀에 갇히게 됩니다. 처음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점점 멀어지면서 우리가 염려하는 그런 신앙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일상 속의 비범한 기적

이 요셉과 유다의 이야기에는 기적이 없습니다. 기적적인 사건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도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은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일 속에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일하시지 않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감옥 문이 갑자기 열리거나 지진이 나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전혀 기적적인 사건이 없는데, 정말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통해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납니다. 감옥 속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를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어떤 관원을 도와주었을 때, 그는 “이 사람이 나가면 나의 억울함을 얘기해 줄 거야”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관원은 나가자마자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일들이 오히려 우리의 기대와 반대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향한 뜻을 이루어내셨습니다. 그야말로 ‘평범한 하루를 통해서 비범한 결과를’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그렇게 요셉을 건지셨고, 구원하셨고, 높이셨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놓치지 않는 삶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많이 놓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인 것 같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내 삶에 역사하시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내가 지금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는 감사하기 전에, 죽었다 살아나야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라며 찬양하죠. 죽는 일이 없으면 더 좋은 것 아닙니까?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오, 주님!”이라고 외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암이 나았대”라는 말을 듣고 간증하는 분들은 정말 많이 봤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매일 같은 일상처럼 보이는 그 시간을 통해 구원을 이루고 계시다는 것을 정말 모르십니까? 그것을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매 순간 일어납니다. 대화 속에서, 식탁에서,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예배에서, 성경을 읽다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설거지나 청소를 하다가도, 하나님이 매일 여러분을 거룩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소중해지지 않으면 기적이 일어나도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기보다, 그 일 자체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희가 나를 이렇게 쫓아오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일할 필요 없이 빵 한 조각만 구하면 예수님이 기도하여 오천 명을 먹이시니, 이런 왕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일어나는 이 기적을 놓치고 산다면, 그리고 거기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범한 일을 만들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영생을 만들어 가고 계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분 안에 세우고 계시며,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금 여러분의 매일 삶에서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물론 가끔 우리는 더 극적인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극적인 일은 일종의 충격과도 같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매일의 삶입니다. 이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죄인이기에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 대부분은 성공한 마지막 요셉을 좋아합니다. 그가 성공도 했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았기 때문이죠. 물론 감옥에 있던 요셉을 좋아하며 “어떻게 고난 중에 그 일들을 다 견뎌냈을까?”라며 존경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마지막 요셉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 훌륭한 청년 요셉의 삶을 보면, 그의 인생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단어는 “요셉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요셉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역사했는가’입니다. 간수는 “하나님의 은혜가 요셉과 함께 있음을 보았더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요셉은 자신도 몰랐을 수 있지만, 바로 그것이 그의 인생을 바꾼 것입니다.

 

제가 100% 확신하건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십자가에 매달리며 하나님께 인생을 드린 모든 이들은 바로 이 일을 경험하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그 어려운 환경을 이겨냈을까요? 아버지의 사랑 때문일까요? 어린 시절의 높은 자존심과 자존감 때문일까요? 물론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그가 팔려갔을 때 그의 마음에는 형들에 대한 미움과 갈등, 자존심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의 삐뚤어진 사랑을 받았으니 요셉도 그에 못지않게 삐뚤어진 마음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도 그의 삶에서는 죄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떤 특정 범죄에 대해 더 무거운 처벌을 내리는 ‘특정범죄가중처벌’이 있는 것처럼, 요셉은 ‘특정사랑가중처벌’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도 죄를 짓고 죄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부모의 무관심이나 악한 모습도 아이를 힘들게 합니다. 하지만 좋은 것만 보여준다고 해서 아이들이 잘 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좋은 것조차도 우리는 아름답게 꽃피우기가 어려운데, 이는 바로 우리 자신이 삐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으면 좋은 아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으라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누구나 올바른 신앙인이 되길 소망하고 올바른 사랑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고, 뜻대로 되지 않아 때로는 실망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 길을 얼마나 똑바로 잘 걷는가’를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 길을 똑바로 잘 걸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예수 믿는 사람이고 신앙인이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을 포함한 많은 신앙인이 항상 받는 가장 큰 유혹입니다. 이 생각으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이 길을 걸을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길은 나의 힘으로 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최선을 다하고, 모든 마음과 생명, 뜻을 다 바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내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수님의 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가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손을 잡는 것이지, 여러분이 독립해서 자신의 힘으로 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리를 저는 자들이고, 듣지 못하고, 눈 먼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는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을 가려면 하나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만이 보시며, 주님만이 걸으시며, 주님만이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이것이 당연히 먼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사랑하라”는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계속 “사랑하자”만을 외치고, 사랑을 잘하는 사람에게 박수를 치며 그 사람이 진짜라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신자는 자신이 사랑할 수 없음을 알기에 그리스도만을 붙잡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을 신(信)’을 쓰는 ‘신자’라는 단어를 고집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자, 곧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똑바르게 인생을 살았던 훌륭한 사람을 뜻하는 ‘군자’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신자의 고백

참된 신자가 되길 원한다면 먼저 신자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든 신자를 추구하고 그것을 신자라고 생각하기가 너무 쉽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경에 부지기수이며, 예수님께서도 가장 진노하셨던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냈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하고, 성경 공부를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자칫하면 가장 무서운 사탄의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정도면 훌륭한 신자가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신자답다는 것은 남들보다 똑바로 잘 걷고 있으며,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잘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저는 이 길을 걸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계속 깨닫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한순간이라도 필요합니다. 주님이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신자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을 성취하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걸어가는 것을 용감하게 해낼 수 있습니다. 내가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넘어져도 슬퍼할 일이 없으며, 다리를 절고 흔들려도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이 나를 붙잡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똑바로 걸으려고 할 것이고, 결국 기독교가 아닌 우리가 만든 종교를 믿고 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약속

하나님의 은혜로 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신자다운 것이고 주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할 수 있고, 절망하지 않으며,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만일 마지막 날 주님께서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라고 물으실 때, “저는 나성남포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봉사를 했고, 집사로서, 장로로서 성실하게 일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선교도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왔습니다”라고 대답할까 봐 정말 걱정입니다.

 

그때 우리는 누가복음에 있는 말씀처럼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옳습니다. “주님,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다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저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선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말일까요? 그 반대일 것입니다. 그는 그 주님을 알았기에, 은혜로 나를 이끄시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붙잡고 계신 주님을 알았기에, 버림받을 만한 자신의 인생조차도 버리지 않고 붙드셨던 그 주님의 은혜를 붙잡습니다. 야곱처럼 뭉개지고, 아브라함처럼 두려워하고, 이삭처럼 고집을 피우고, 열두 지파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그 인생까지도 버리지 않고 붙드셨던 주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 그가 바로 신자인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갈 때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아마 후회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분노했겠죠. 하나님이 보였을까요? 제 생각에는 보였더라도 아주 가물가물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셉의 꿈이 그를 지탱하게 하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은 좀 다르게 말합니다. 요셉이 낳은 첫아들의 이름은 므낫세인데, 이는 ‘내가 잊었다’는 뜻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이제야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집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도다”라고 말하며,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고 싶어 했습니다.

 

그렇다면 꿈은 언제 생각났을까요? 모든 형들이 와서 무릎 꿇고 절을 했을 때, 성경은 “그때 요셉이 그 꿈을 기억하고”라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꿈을 기억한 것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그 약속,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우리는 매일 잊고 홀로인 것처럼 살아가지만,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이루어주시는 분은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쉽게 절망하고 소망이 끊어진 것처럼 살 때도,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약속을 기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일을 이루십니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그래서 여러분의 매일의 일상을 기적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내 인생에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초대를 받으신 오늘의 하루는, 나를 구원하시는 오늘 하루이고, 나까지도 사랑하시는 바로 그 하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즐거움과 괴로움은 오늘에 족할 것입니다. 오늘은 그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잊지 않는 그 길에 서서 걸어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얼마나 쉽게 주님을 잊어버리고 내가 만든 주님께 절할 때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이 돈이든, 내 행복이든, 원하는 것이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헷갈릴 정도로 많은 것을 만들어 놓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한 우리를 이토록 참으시며, 부르시며, 품으시며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오 주님, 그 주님께로 나아갑니다. 주여, 그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슴 벅차게 느끼며, 알며, 배우며, 누리며, 기뻐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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