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6장 1절로부터 8절 까지 입니다.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에서가 가난한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산에 거주하니라.” 아멘.
왜 에서의 족보가 기록되었는가
야곱 이야기가 거의 끝날 무렵, 우리는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었고 그들이 열두 지파를 이루게 될 것을 압니다. 그래서 야곱 이야기가 끝나면 당연히 르우벤, 유다, 요셉, 베냐민 등 야곱의 아들들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열두 족장의 이야기가 아니라 갑자기 에서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여러모로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주일학교에서 에서의 족보를 공부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설교나 성경 공부 시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창세기 36장 전체가 에서의 족보입니다. 한 장 전체를 할애한 것은 대단한 분량입니다. 오바댜서나 신약의 유다서도 단 한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굳이 에서의 족보를 언급하지 않아도 성경을 읽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성경은 에서의 족보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구태여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서의 족보가 왜 기록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에서에게 주신 약속
창세기 25장, 에서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예언하신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이삭과 리브가 둘 다 들었던 말씀입니다.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우리는 보통 이 말씀을 야곱 중심으로 해석하여 큰 자인 에서가 어린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맞는 말씀이지만, 자세히 보면 에서도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야곱뿐 아니라 에서도 민족을 이루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족보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를 통해서도 정말 큰 섭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알듯이 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 다소 멀어진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변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멀리 가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 가문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는 신앙적인 결단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결단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위로하고 앞으로 유산을 받을 때 더 좋은 위치에 서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보다 조금씩 더 멀어져 가고 있는 에서에게 "내가 너로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다"라는 약속을 잊지 않고 계속 지켜나가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이 본문에서도 우리가 에서를 추적할 수 있도록 족보를 남겨주셨습니다. 이 족보는 생각보다 훨씬 흥미로운 책입니다. 이 장에는 81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히브리어 이름에는 한국 이름처럼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의미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의 숫자나 그들이 어떻게 번성했는지 보는 것도 성경을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족보가 가진 세 가지 특징과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할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의 기준: 가나안 땅에 머물 것인가
첫 번째 특징은 에서가 야곱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말입니다. 야곱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외지에서 고생하며 빈털터리로 갔다가 겨우 재산을 모아 돌아왔습니다. 반면 에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살며 부를 이루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란 땅에서 태어났지만, 에서의 아들들은 가나안 땅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야곱은 나중에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야 했지만, 에서는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멀리 떨어져 살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같은 기근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에서의 자손들은 에돔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여덟 명의 왕을 배출합니다. 한 왕이 20년씩만 다스렸다고 해도 160년에서 2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왕으로서 다스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노예처럼 고생했습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누가 더 복을 받은 건가요? 겉으로 보기에는 당연히 에서입니다. 여러분, 너무 야곱만 사랑하지 말아주십시오. 성경을 많이 읽으셔서 생각할 필요도 없이 '왜 에서가 복을 받았어? 야곱이 복을 받았지? 하나님의 복은 야곱이 다 받았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본 바로는, 이 땅에서 모든 고생을 혼자 한 사람은 야곱이고, 고생 한 번 없이 모든 부요를 누린 사람은 에서처럼 보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결과가 어디서 나왔느냐입니다. 에서는 왜 그렇게 복을 받았을까요? 하나님께 얼마나 예뻐 보였기에 그런 복을 받았을까요? 우리가 말로는 '이건 진짜 복이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간증을 하거나 대화를 나눌 때 어떻게 말하나요? 결국 '하나님 나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진짜 복'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애가 좋은 직장에 들어갔어요'라고 말하죠. '우리 애는 안 좋은 직장에 들어갔는데 하나님의 복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저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준도 제가 말하는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사 하나님께 돌아왔더니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다'가 우리의 대부분의 간증이 아닌가요? 성경은 그렇지 않은데도 우리는 그 패턴을 따르곤 합니다. 세상에서는 '예수 믿는 이유가 복 받기 위해서지'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죠. 우리는 조금 더 고급스럽게 말할 뿐이지, 마음의 기준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자주 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에서가 그렇게 된 것을 우리가 정직하게 본다면, 우리 마음에는 잘 된 일입니다. 차라리 그렇게 되면 좋잖아요. 야곱처럼 쫓겨가 고생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에서처럼 살고 싶으십니까? 대답하기 곤란하시죠? 그렇다면 제가 에서처럼 사는 비결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두 사람의 소유가 풍성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더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에서가 그 땅을 떠납니다. 이 부분은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여기 보면 '두 사람의 소유가 풍성하다'고 했는데, 두 사람은 야곱과 에서입니다. 야곱도 하란에서 부를 가지고 왔으니 가난하지 않습니다. 야곱도 부자이지만, 성경은 에서는 더 큰 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한 가문에서 왕이 여덟 명이나 나오고 나라를 세웠으니 대단한 나라가 되었죠. 그는 가나안, 즉 약속의 땅을 떠났다고 일부러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부를 위해 세일 땅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 전에도 세일 땅에 살았지만, 이번에는 아예 그리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좋은 것을 만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점점 멀어져 가는 신앙의 길
이 부분이 우리에게는 다소 찔리는 부분입니다. 거기까지는 '그래, 에서가 잘됐지'라고 보는데 성경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에서에 대한 이삭의 예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아버지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살 땅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너에게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내 아우를 섬길 것이다.”
이것이 에서에 대한 예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하나도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기 분명히 '네가 살 곳은 기름진 곳으로부터 멀어져 척박하게 살 것이고, 하늘의 이슬도 없어 물도 나지 않고 양떼를 먹일 풀도 없는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찢어지게 가난해질 것이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오히려 힘도 생겼고, 권력과 나라도 얻었으며, 그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자손도 창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는 이 예언이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이 예언에서 말하는 '땅의 기름짐으로부터 떠났다', '하늘의 이슬로부터 떠났다'는 것은 가난해졌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에서가 진짜 부자가 된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떠난 것이 곧 기름진 곳과 하늘의 비를 맞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시각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세상에 대한 시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의 성공, 나의 성공, 내가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에 대한 생각, 조금 더 편안하고 나은 삶,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삶이 잘 되는 삶이라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잘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도리어 가난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재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야곱도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가지 기준, 즉 가나안 땅을 떠났느냐, 아니면 가나안 땅에 있느냐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6장의 결론은 36장 43절이 아니라 37장 1절에 있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야곱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가나안에 삽니다. 앞으로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가 화해했지만, 에서 이야기는 점점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반면, 야곱의 가족은 서로 싸우고 요셉을 팔아먹기까지 하지만, 결국 화해하게 됩니다.
복의 기준: 가나안 땅에 머물 것인가
여러분, 첫 번째 교훈을 기억하십시오. 겉으로 보기에 야곱이 에서보다 못한 삶을 산 듯하지만, 행복의 진정한 기준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이 그의 인생의 중심이 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판단할 때, “우리 아이가 착하고 공부를 잘합니다”라는 말이 하나님 중심에서 나온 고백인지, 아니면 “역시 내 자식은 달라”라는 세상적인 자랑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중심으로 보고 나아가느냐, 여러분의 생각과 사고, 고민과 근심이 변했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면 여러분이 보는 모든 것에 대한 생각과 내게 닥쳐오는 많은 일들에 대한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을 떠나는 것은 단순히 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과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세상을 향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장은 풍요로워 보일지라도, 그 결국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점점 멀어져가는 신앙의 길
그렇다면 첫 번째 특징을 통해 우리는 복과 행복의 기준이 하나님 중심의 삶, 곧 가나안 땅에 머무는 삶,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도 제목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와 아픔을 하나님 앞에 아뢰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까? 그 문제가 내가 원하는 대로 풀리거나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으니 복 주셔서 잘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습니까? 내 인생 전체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오늘 내가 말하는 한마디가 하나님 중심에서 나오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점입니다.
점점 멀어져가는 신앙의 길
두 번째 특징은 점점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한 번에 멀어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어쩌면 사탄이 신앙인들에게 사용하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전술 중 하나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미워져서 ‘하나님, 이제 끝입니다’라고 말하며 떠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점점 하나님에 대한 의식,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이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약해지고 희미해지는 삶을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슬픈 현실이 에서의 족보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서의 족보는 가나안에서 시작하여 세일로 옮겨갑니다. 처음에는 세일 원주민들과 혼인하며 생활하다가, 나중에는 유력한 가문들과 혼인하면서 심지어 원래 원주민이었던 호리족을 흡수하기에 이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아직 왕도 없을 때, 에돔의 왕 여덟 명이 등장하게 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광야를 떠돌던 이스라엘 앞에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 에돔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족보의 마지막을 보면 에돔의 주요 족장들이 얼마나 영향력 있고 번성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들은 더 큰 권력과 더 많은 것을 누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야곱과 화해했던 에서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질수록 이스라엘과도 멀어져 결국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를 통해 에돔에게 길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두 번이나 요청하였으나, 에돔은 거절하며 이스라엘을 두려운 적으로 여겼습니다.
에서의 족보를 보면 사람 이름 속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드러납니다. 81명의 이름 중 오직 두 명만이 신앙과 관련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의 르우엘과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뜻의 여우스입니다. 이 두 아들은 가나안에서 낳은 아들들입니다. 이 둘을 제외하고는 전부 세속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에돔 왕의 이름 중에는 ‘바알은 자비롭다’는 뜻의 ‘바알하난’도 있습니다. 그의 삶에서 하나님은 중심이 아니라 배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일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족보를 보면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에서가 이삭과 함께 살았으니 처음 세일로 갔을 때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았을 것입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혼자서라도 예배하고 찬양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 땅, 곧 성도의 공동체를 떠났고, 세상에 점점 둘러싸이게 되자 과연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역사는 그가 전혀 지키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여러분과 저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야곱처럼 가나안 땅에서 주님과 긴밀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나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예배하고 있다’,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도한다’는 이유로 우리의 신앙을 변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신앙은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는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역사하신 주님의 말씀과 은혜가 지금도 살아 역사하며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 삶의 중심에 있기에 어렵고 힘든 일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 바쁘고 힘든 일상 속에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잊거나 잃어버리고도 여전히 신자인 것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에서가 ‘나는 하나님과 끝이야’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는 결국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우리 중에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라고 결심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삶 속에서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못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이 중심이 되셨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포기해야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시간입니까, 소유입니까? 아니면 주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짊어져야 했던 그 십자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마지막 세 번째는, 이 족보가 우리에게 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이 무엇이냐, 야곱이 에서보다 복을 받지 못했느냐,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이 에서와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앞서 물었다면, 이제 마지막으로는 복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족보를 읽는 사람들은 에서 족속이 아닙니다. 누가 이 책을 읽습니까? 모세가 쓴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인 야곱의 자손들입니다. 에서의 족보는 야곱을 위해 남겨진 것입니다. 에돔 사람들은 모세오경을 읽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에서의 이야기를 들으며 ‘와, 우리 조상이 이렇게 훌륭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메시지가 전해지는 곳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과 에서의 관계, 곧 에돔과의 관계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 **‘너는 에서를 미워하지 말아라.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이니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내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모두를 사랑하라는 말씀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에는 어떤 민족은 ‘여호와의 회에 들어올 수 없다’라고 하는 말씀도 있지만, ‘이들은 삼 대가 지나면 여호와의 회에 들어오게 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돔에게 길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모세가 두 번이나 요청하였으나, 에돔은 이를 거절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막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뺑 돌아가게 됩니다. 육체적으로는 형제인데 적대 관계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끊임없는 전쟁이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민족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에돔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윗 때 이스라엘 군대가 에돔을 완전히 점령하고 주둔군을 배치하여 속국으로 삼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말미암아 솔로몬은 엄청 고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에돔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습니다.
그 절정은 바벨론 시대에 드러납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에돔은 그들과 함께 노략질에 가담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벨론에게 쫓겨 도망가는 이스라엘 포로들을 추노처럼 잡아 넘기는 역할을 에돔 사람들이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에돔에 대한 분노는 엄청났습니다. 오바댜 선지자는 그래서 ‘에돔은 멸망할 것이다’라고 예언했고, 결국 바벨론이 에돔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에돔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삭과 야곱이 살았던 이스라엘 땅 헤브론에 들어와 살게 됩니다. 이들을 ‘이두매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말라기부터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400년의 중간기를 보낼 때, 마카비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쟁취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헤브론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에돔 사람들에게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고 유대교로 개종시켰습니다. 반유대인처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 결과로 헤롯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복의 근원이 되기를 포기한 이스라엘
여러분, 에돔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에돔을 점령하고 속국으로 삼으려 했으며, 심지어 다윗은 에돔의 젊은 남자 1만 8천 명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셔서 에돔을 심판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말미암아 솔로몬의 통치에 결정적인 어려움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는 결코 이스라엘에게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저주의 근원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의 근원이 되기를 포기하고 자기들이 심판주가 되려 했던 것입니다. 원수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씀 대신 자기들이 칼을 쥐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칼을 쥐는 것은 에돔의 길이었습니다. 에돔은 하나님을 떠났으니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었고, 칼을 잘 다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너희는 군대와 병거를 가지지 말라. 내가 너희의 군대이고 내가 너희를 위해 싸운다. 너희의 싸움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결국 이스라엘도 어려움에 처했음을 역사가 보여줍니다. 헤롯까지 이어졌던 그 일로 말미암아 베들레헴에서 곡소리가 들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에돔이 그러한 길을 걸어 결국 헤롯이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 에돔을 미워했던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누가 더 잘했고 누가 더 잘못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모두가 죄인의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이런 불순종과 죄를 이겨내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내셨고,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참여했던 이스라엘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이었고,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까 내 삶이 어느 정도 이렇더라도 좋으신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 앞에 게으를 때,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살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슬퍼하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니까 내가 이렇더라도 받아주실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지, ‘하나님이 이런 분이니까 내가 돌아가면 해주시겠지’라고 그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는 것은 신자의 길이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어디를 향해 가는가
여러분, 만약 우리가 복의 근원이라면 이 세상에서 복의 근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친절해야 하고, 사랑을 베풀며 인내해야 합니다. ‘내 성격이 안 돼’라고 핑계 대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성격을 바꾸시지는 않을지 몰라도, 여러분의 성격을 선하게 쓰실 것입니다. 급한 분, 때로는 진노하는 분들도 주님께 가면 반드시 쉬게 하실 것입니다. 핑계 대지 말고 주님께 가십시오. 여러분은 세상에 복의 근원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복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복의 근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복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며, 삶 속에서 그것을 나누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성경은 여러분의 삶 자체가 복음의 영향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만나는 이들에게, 말하는 이들에게, 함께하는 이들에게 내가 예수의 입이고 귀이며 발이라는 것을 항상 이야기해야 합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단지 기독교인으로 보지 않고 예수로 봅니다. ‘나는 기독교는 싫지만 예수는 좋아’라고 말하는 그 배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 우리를 기독교인으로 보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기독’이라는 말은 물론 ‘그리스도’라는 뜻이지만, 여러분은 종교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에서를 통해 본 것처럼, 에서는 약속의 계열에 있었지만 점점 세상을 향해 나아가 하나님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가 더 복을 받고 있는가?’ 하나님을 떠나 멀리 가고 있는 자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중심에 있는 자인가?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는 야곱의 길인가, 아니면 편안한 삶 속에서 끊임없이 세상으로 나아갔던 에서의 길인가?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도 쉽지 않죠? 힘들고 빡빡해 보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조금만 더 나아지기를, 조금만 더 평안하기를, 조금만 더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합니다. ‘조금만 더’라는 마음,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것 아닙니까? 한국에서 19평 아파트를 산 사람이 13평으로 가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다음에는 22평을 꿈꾸고, 그다음에는 32평, 40평, 60평으로 가지, 누구도 만족하고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에서가 걸어간 길입니다. 여러분도 그 길을 같이 가려고 하십니까? 에서도 처음에는 세일에서만 살아남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의 평안을 위해 세일을 삼켜버리고, 에돔의 왕을 배출하게 됩니다. 조금씩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은 삶의 주변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만약 제가 여기서 “예수 믿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모든 것을 제발 내려놓고 다음 주부터 선교를 갑시다. 선교사로 다 헌신하십시오. 하나님께 구원을 받고 복음을 아는데 어떻게 이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까? 저쪽에서는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 같이 선교하러 갑시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드십니까?
맞습니다. 모두를 다 선교사로 부르시지는 않았으며, 여러분이 살던 집을 떠나 선교사로 가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고민이라도 하고 계십니까? 내가 받은 이 복음,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셨던 이 뜨거운 복음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어디에 매여 살고 있는지, 내가 정말 힘든 것인지 아니면 내 욕심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까?
많은 분이 “열심히 산 것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일한 것밖에 죄가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자들도 가끔 그렇게 말합니다. “저 미국 가서 열심히 산 죄밖에 없습니다.” 아닙니다. 신자에게 그것은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 없이 열심히 일했다면 그것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면서 열심히 살고 무언가를 했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여러분의 생각, 여러분이 하는 일, 여러분이 계획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부끄러워하고 돌이켜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하루를 살고 자녀를 생각할 때,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고 오직 여러분이 누려야 할 것과 가져야 할 것, 여러분의 평안만을 추구해 왔다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내가 에서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족보는 지금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고민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 여러분이 무엇을 향해 가야 할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부르심의 소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가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히신 주님께서 그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구합니다.
여러분의 나이가 어떠하든, 남자든 여자든, 상전이든 종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아무것도 없어 홀로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든, 외로운 상황에 처해 삶의 방향조차 고민하고 있든, 혹은 너무나 많은 것을 갖고 있어 매일매일이 즐겁든, 그 모든 것 속에서 저는 여러분이 한 가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사랑과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저희에게 알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저희와 함께 걸어가시는 그 순간마다, 우리로 하여금 내가 받고 있는 복이 무엇인지, 내가 점점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 복의 근원으로서 나는 무엇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고민하고 생각하며 결정하고 주님께 의지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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