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5 21절에서 29 까지 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이스라엘이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아버지의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아멘.

 

족장 시대의 계시와 구원 역사

야곱의 가족들은 이제 벧엘에서 베들레헴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대목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벧엘 이후 이상 족장들에게 직접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후일 환상 중에 말씀하신 일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현현(顯現)하시어 계시하시는 일은 400년이 지나 모세가 가시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침묵하신 기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족장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12지파의 탄생과 갈등, 그리고 애굽으로 들어가 노예가 되는 모든 과정은 이스라엘이 점차 불신앙의 길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동시에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베푸시며, 마침내 구원자를 보내신다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어두운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찬란하게 빛나는 사건이라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 역사의 물줄기가 바로 12지파의 탄생으로 시작되며, 이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서막입니다.

 

장자 르우벤의 타락과 성경 기록의 진실성

그런데 기록의 서두가 12지파를 소개하는 대신 르우벤, 장자의 타락으로 시작된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책은 모세가 기록하였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먼저 듣고 읽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민족의 기틀을 다지고 위대한 나라가 되려는 시점에서, 하필 시작이 장자인 르우벤의 지극히 타락한 모습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우리 민족의 시조 설화와 비교해 보더라도, 고난이나 천재지변이 아닌, 시작부터 시조의 인격에 흠집을 내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박혁거세나 주몽의 이야기처럼, 시조의 시작은 마땅히 상서롭고 비범하며, 고난을 이겨내는 정의롭고 탁월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릅니다. 르우벤의 타락한 행위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기록을 굳이 남길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거짓이 없는 진리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증거가 됩니다. 또한 이면에서 도덕적 교훈도 발견할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본문은 르우벤을 직접적으로 징벌하는 말을 기록하지 않고, 야곱도 단지 “들었더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훗날 야곱에게서 축복이 아닌 저주와 같은 예언을 듣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49장의 기록입니다.

 

“르우벤아 너는 장자요 능력이요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의 행위: 성적 동기인가, 권력 쟁취인가?

르우벤의 문제가 ‘물의 끓음 같았’다고 언급되는데, 표현은 교만하고, 무모하며, 통제할 없이 넘쳐나는이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는 르우벤의 행동이 단순히 성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는 결국 탁월한 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의 행동에 성적 타락이 포함되어 있지만, 근본적인 초점은 그가 자신의 힘이 뛰어남을 과시하고 권력을 탐하려 했다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건을 깊이 통찰해 보면, 단순히 빌하와 르우벤 사이에 발생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르우벤이 상당한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사건을 성적인 문제보다는 사실 정치적인 문제로 해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다른 유사한 사건을 통해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윗과 압살롬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났을 ,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당신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차지하려면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후궁을 취하라”고 말했습니다.

 

행위는 단순히 육체적인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모든 것을 자신이 승계하여 차지했다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성경은 일이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음을 기록합니다. 이는 끔찍한 일이었으나, 의미는 명확합니다. “아버지 다윗의 모든 것을 내가 소유하겠다”라는 권력 쟁취의 표현인 것입니다. 르우벤도 이와 유사한 행위를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려 했습니다. 르우벤은 장자였기에 당연히 명분을 가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소유하려 했습니다.

 

결국 사건의 핵심에는 권력, 힘에 대한 야심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르우벤이 하려 했던 일은 모든 것을 자신이 차지하려는 시도였으며, 그것을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능력으로 관철시키려 것입니다.

 

에델 망대: 여호와 이레의 자리와 르우벤의 반대 행동

이제 조금 깊이 있게 들어가, 사건이 발생한 장소를 고찰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거기에 장막을 쳤다고 기록합니다.

 

에델 망대는 어디를 가리킬까요? 야곱의 일행은 베들레헴 방면으로 나아가다가 에델 망대 근처에 진을 쳤습니다. 에델 망대의 위치를 알려주는 성경 구절은 미가서 4 8절에서 찾아볼 있습니다.

 

“너 양떼의 망대요, 시온의 산이여…”

 

이는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동격 표현입니다. “너는 양떼의 망대이며, 시온의 산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양떼의 망대가 의미하는 것은 시온산입니다.

 

여러분, 시온산을 아시겠지만, 산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대에는 아직 “시온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이름은 후대에 등장했습니다. 시온산이 위치한 곳은 예루살렘이며, 다윗이 그곳에서 왕권을 확립했기에 다윗의 산이라고도 불렸고, 이후 시온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습니다.

 

하지만 시온산, 혹은 양떼의 망대라고 불린 곳에는 아브라함 시대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리아산입니다. 구약에서 모리아산과 시온산은 같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산으로 여겨졌습니다. (신약 시대 이후에는 모리아산은 솔로몬 성전 , 시온산은 서쪽 봉우리로 구분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모리아산이라는 사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인 야곱이 사실을 모를 없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바로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가장 사건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배운 유명한 선포가 나왔습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라는 바로 산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예비하신 자리에서 르우벤은 전혀 상반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방식과 자기 방법대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차지하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장소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하여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건만, 르우벤은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라헬의 여종이자 야곱의 자녀를 낳은 빌하를 범하는 행위를 통해, 아버지의 모든 것을 쟁취하기 위해 자기 힘으로 지위를 탈취하려 했습니다.

 

야곱의 모습과 르우벤의 행동: 대물림되는 죄악

1 설교를 마친 , 이철규 목사님께서 저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목이야말로 너무나 놀랍다. 왜냐하면 지금 르우벤이 하는 말과 행동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야곱이 걸었던 인생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야곱은 장자권을 탈취하려 했고,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이미 장자였고 장자의 명분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분을 발판 삼아 많은 것을 차지하려 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힘과 방법으로 이루려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가지를 추측해 있습니다. 르우벤이 그렇게 행동한 배경에는 어머니 레아의 영향도 있었을 것입니다. 레아는 여전히 야곱으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장자인 르우벤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은 르우벤보다 요셉을 훨씬 사랑했으며, 요셉이 장자가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라헬이 죽자, 르우벤은 라헬의 몸종인 빌하에게 야곱의 마음이 전부 쏠릴 것을 염려하여,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있습니다. 빌하를 범한 행위는 사실상 빌하를 '살아있는 과부' 같은 처지로 만들어, 야곱에게서 그녀가 이상 중요한 지위를 가질 없게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이제 레아에게로 돌아올 "이라는 기대나 의도가 르우벤에게 있었을 수도 있지만, 성경이 직접적으로 이를 기록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는 우리가 추론할 있는 범위에 머무릅니다. 르우벤이 어머니 레아의 지위를 회복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정치적인 목적, 아버지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부차적인 의도는 뒤에 덧붙여졌을 뿐입니다.

 

결국 르우벤은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를 자신의 힘과 권능을 과시하는 자리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양떼를 위한 망대”에서 망대는 (Tower)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양떼를 살피기 위한 탑을, 르우벤은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고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 흡사 바벨탑처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르우벤의 몰락과 이스라엘의 어두운 시작

여러분, 이스라엘이 앞으로 직면하게 어둠의 터널을 깊이 성찰해 보십시오. 그들이 겪어야 했던 형제들 간의 비인간적인 사건, 형제들이 요셉을 팔아넘긴 사건이 발생합니다. 결과 이스라엘은 마침내 애굽으로 내려가 400년간 종살이를 하게 되는 거대한 어둠의 터널이 시작된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야기를 기록하며, 르우벤이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려 했던 서사가 어두운 역사의 서막이었음을 밝힙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지위와 권능을 자신의 힘으로 차지하려 했습니다. 결국 그는 사건으로 인해 훗날 장자의 명분까지 잃게 됩니다.

 

역대상 5 1 말씀은 이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다.

 

, 그는 본래 당연히 누려야 장자의 명분까지 상실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12지파로 출발하며, 축하의 팡파르를 울려야 시점에, 처음부터 비틀거리기 시작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르우벤의 이야기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잃은 르우벤, 그리고 야곱은 명분을 얻으려 하다가 20 동안이나 험난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족장으로서도 참으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열두 지파가 탄생했으니, 우리는 “이 열두 지파는 야곱처럼 살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열두 지파의 출발인 르우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야곱보다 더욱 심각하고 두려운 죄를 보여주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자리, 감사와 감격이 넘쳐야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했습니다. 은혜로 받은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 자신의 영광, 자신의 복만을 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르우벤의 모습이었습니다. 야곱의 힘이 되고, 장자로서 모든 능력과 영광을 받을 있었으며, 야곱의 자랑이었던 장자 르우벤은 오히려 아버지의 자리를 강탈하기 위해 죄악의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성도에게 던지는 질문: 당신의 자리는 어디인가?

여러분, 열두 지파는 야곱과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할 사명을 지닌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었고,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는 동시에,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나누어 주어야 사명을 가진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복이 아닌 자신의 힘을 의지하였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죄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모든 일이 어디서 일어났습니까? 바로 여호와 이레의 자리에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며 르우벤이나 야곱을 대할 , “어찌하여 저들은 거기서 그렇게 했을까?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어도 장자의 명분을 얻을 있었을 터인데”라는 안타까움을 자주 느끼실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향한 여러분의 열정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저는 이삭도, 아브라함도, 야곱도, 그리고 오늘 르우벤도 참으로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안타까운 시선은 그들을 향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 자신에게 향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도대체 무엇을 찾고, 무엇을 추구해 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자리를 찾고 있습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 앞에 있다고 고백할 , 십자가의 자리에서 여러분이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배하러 왔습니다”라고 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위해 자리에 여러분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평안하다는 위로의 이야기를 들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지금까지 힘들었던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힘을 얻어 이제부터 풀릴 것이라는 성공담을 들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세상 속에서 사는 동안 나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안락한 인생으로 살고 싶어서 자리에 오셨습니까? 혹은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그저 중간이라도 가고 싶어서 오셨습니까? 여러분,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아마 속으로 “나는 저들과는 다르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솔직히 “나는 때문에 하나님을 버릴 정도로 탐욕을 부린 적도 없고, 나는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았다. 처음에는 욕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세상을 향해 때도 있었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잔인하게 들릴지라도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전에서 맺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의 자리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찾으셨습니까? 여러분은 그곳에서 성령의 열매를 찾으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육신의 열매를 찾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인내와 사랑과 같은 성령의 열매가 맺혀야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시기와 질투, 우상 숭배와 같은 육체의 열매가 자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여러분의 인생 속에 과연 무엇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성령의 전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습니다. 아마 구약의 르우벤이나 야곱이 우리를 보면서 “내가 당신처럼 성령이 함께하는 자였다면 이토록 비참하게 살지 않았을 텐데”라고 탄식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성령과 함께하는 성령의 전인데, 도대체 어떤 열매가 여러분 속에 맺혀 있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육체의 열매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심지어 성령의 열매를 구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많은 중요한 것을 그저 무심히 지나치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삭의 죽음과 에델 망대의 아이러니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있는 참된 아이러니는 무엇일까요? 바로 에델 망대, 떼의 망대와 관련된 인물인 이삭의 죽음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삭도 결국에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여러분, 이삭은 영적인 관점에서 부활을 번이나 경험한 것과 같은 인물입니다.

 

첫째, 그는 아이를 낳을 없었던, 죽은 자와 같았던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생명의 아들입니다.

 

둘째, 그가 모리아산에서 겪은 일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사건을 두고 “아브라함이 그를 죽은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표현합니다. , 이삭은 부활의 의미를 내포한 인물이자 생명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죽음에서 살아난 경험을 장소와 연결되는 모리아산(에델 망대)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성경은 이삭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소망의 자리와 인간의 실패

여러분, 에델 망대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아들은 자리와 연결된 시점에서 오히려 죽음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 이레의 장소는 르우벤의 수치가 되었고,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의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르우벤은 자신의 힘으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소유하려 했고, 때문에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신만의 바벨 망대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많은 것을 가진 자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우리의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열망인가, 세속의 야망인가

여러분, 우리가 선한 신앙의 열망을 가지고 있을 때조차, 우리는 열망의 근원과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깊이 성찰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신앙의 열망을 가지고 있다" 사실에 만족하며 머무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열망이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세속적인 열망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일에 점점 차가워지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괜찮은 것처럼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서 나의 전부가 되시는 시간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하시겠지”라는 막연한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현실을 넘어가려 합니다. 여러분, 가지 태도 모두 위험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오늘 르우벤의 이야기는 소망 없는 개인의 실패담일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참된 소망을 가진 자인가?

 

미가서의 소망: 영원한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질문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답변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방금 읽었던 미가서 4장의 말씀을 다시 한번 주목하고자 합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이들에게 내가 외치노라."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 날은 이스라엘의 종말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미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를 포함하는 궁극적인 종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 이방인과 이스라엘 모두가 외칠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율례로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요,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확증합니다.

 

“양 떼의 망대여, 시온의 산이요.

 

,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너희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이 너희에게 임하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가서가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말씀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라고 생각하셨다면, 관계는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르우벤의 상황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 속에서 피하고 싶은 르우벤의 모습을 매일 마주합니다. 야곱을 만나고, 때로는 심지어 유다의 모습까지 발견합니다. 우리가 회피하고 싶은 많은 일들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것이 과연 신자의 삶인가?"라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가는 우리에게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너희 모든 자들아, 그날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가 시작될 것이다."

 

이어지는 미가서 5장에서는 에델 망대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씀합니다. 말씀은 바로 우리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아, 대적이 너를 둘러쌌구나.

 

여러분의 속에 깊이 파고드는 수많은 시련의 칼날, 우리를 유혹하는 , 하나님에 대한 무디어지는 마음. 하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고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이라고 하였으나, 여전히 삶의 중심이 '' 되어버리는,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가는 삶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에게, 미가는 이렇게 위로를 건넵니다.

 

“그러나 떨지 말라. 너의 인생과 삶이 비록 흔들리는 보일지라도 떨지 말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자가 되려 했던 르우벤이 아니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작은 족속이지만, 너로부터 모든 것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다. 그는 영원한 왕으로 오실 것이다.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위엄으로 함께할 것이다. 그가 너희의 평강이 것이다.

 

죄와 어둠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리

여러분, 르우벤만이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요셉 또한 친형제들에게 팔려갔습니다. 만약 비극적인 사건에서 모든 것이 끝났다면, 여러분과 우리의 인생에서 과연 어디에서 소망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성경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게 암흑과 같은 통로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속에서도, 우리가 죄와 싸우다가 지치고 힘들어 “하나님,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십니까?”라고 절규하는 순간에도, 여러분, 어두운 통로 안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형제들이 요셉에게 와서 구원을 간청했을 , 요셉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여러분의 , 우리가 만든 우상들, 그것 때문에 너무나 괴로웠던 순간들, 심지어 죄로 인해 고통받았던 시간들, 때로는 하나님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주일에 교회나 가야지”라는 수준으로 살아간 우리의 속에서, 하나님은 과연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게 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죄를 해결하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다시금 깨닫게 하십니다. “너는 지금 여호와 이레의 땅에 있다. “너는 지금 여호와 닛시, 하나님의 승리의 깃발이 꽂힌 위에 있다. “너는 십자가 위에 함께 있다.

 

사탄의 패배와 하나님의 약속

여러분, 말씀의 확신을 더하기 위해 우리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나 나누고자 합니다. 바로 사탄의 이야기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았을 , 분명 자신이 승리했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며, “드디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무너뜨렸다!”라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 십자가에 매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것을 동원한 그의 최선의 노력이었고, 그가 발휘할 있는 능력의 극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있는 모든 행위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사탄이 결과를 알았을까요? 제자들이 알았을까요? 예수님을 그토록 따르고 사랑했던 여인들이 알았을까요? 전혀 일이 이렇게 전개될 , 누가 예측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성취될 , 누가 상상이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은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너희는 나를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은 선을 이루셨지. 요셉의 인생이지”라고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것조차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인생 속에는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데, 캄캄한데, 내가 어디서 사실을 확인할 있을까?”라고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분에게 다시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할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불완전한 판단과 죄의 결과를 신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십자가와 전능하신 능력을 믿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죄와 너의 실패와 너의 무관심까지도,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깨닫게 하고, 진심으로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에게는, 주님은 번도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습니다. “내가 너의 인생을 선으로 이루어 주겠다.

 

행위가 아닌 은혜

만약 하나님께서 르우벤에게 “이제부터 네가 행하는 것을 보겠다. 네가 잘하면 내가 복을 주겠다”라고 하셨다면, 어쩌면 우리에게는 삶이 쉬웠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헌금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선한 일을 행해야만 하나님께 점수를 얻는 ,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나를 버리지는 않으시겠지”라는 생각이 오히려 우리에게 안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수많은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은 누더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옷으로는 하나님 앞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헌신: 은혜로 얻는 구원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우리의 헌신이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앞으로도, 과거에도, 그리고 씻을 없는 여러 가지 죄악 때문에 도저히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를 구원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헌신입니다. 우리가 먼저 바라보아야 것은 우리가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가, 혹은 하나님께 얼마나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눈을 들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주셨고, 여러분에게 완전히 헌신하셨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나를 위해 생명까지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에 속한 어떤 것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한 헌신을 막을 없습니다. 모든 것을 거셨는데, 우리의 실패가 그것을 막을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죄가 어찌 그것을 막을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주님,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제가 어떤 것을 드릴 있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내놓을 있겠습니까?"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저 주님의 은혜를 바랄 뿐이며,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뿐이며,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정말 주님께로 여러분의 눈을 돌렸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 그분을 바라보는 , 그분께 의지하는 자를 향해 우리가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들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나를 찾는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 자도 없으며,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합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질문

여러분,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상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붙잡는 , 그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이제 내가 너에게 베푼 사랑과 은혜가 무엇이며, 도대체 모든 것을 받았다는 무슨 말인지 정말 알기 시작했는가? 여러분은 모든 것을 받았다는 말을 정말 이해하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은혜라는 말을 이해하십니까? 받을 하나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생명까지 받았다는 것을 정말 이해하십니까? 그래야 여러분은 주님의 다음 질문에 답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너는 어떻게 살겠느냐?

 

구원받은 자의 삶의 응답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렇게 대답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 저도 나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랑하겠습니다. 주님, 이제 여호와 이레의 자리를 알았으니, 저를 여호와 이레의 자리에 있는 자가 되게 주십시오. 내가 십자가 아래서 사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저를 고쳐주시옵소서. 주님, 하나님의 말씀으로 저를 훈련시켜 주십시오. 내가 누구인지, 어느 자리에 살고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성령 하나님의 전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곳에서 제가 살게 주십시오. 그곳에서 말하게 주십시오. 그곳에서 하나님이 저를 향하여 보여주신 사랑과 헌신처럼, 나도 주님을 향하여 살게 주십시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는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습니까?

 

여호와 이레의 복을 누리는 자리에서 육신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바라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 저희가 세운 우상을 처참하게 무너뜨려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가 여호와 이레의 자리에서, 내가 만든 것으로 나를 찾고, 나를 세우고, 나의 영광을 취하고 있음을 보게 주시고, 그것들을 무너뜨려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가 성령 하나님의 전으로 자리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자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시고, 훈련시켜 주시고, 그렇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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