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2 21절에서 3 5절까지 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열다섯 개와 보리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아멘.

 

흩으시고 다시 심으시는 하나님

저희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호세아서 2장은 흥미로운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는 번의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연결되는 사건의 전개가 있었습니다.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므로 앞부분에는 원인이, 뒷부분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가령 '너희가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음대로 살았으며, 하나님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삶을 살았으니 "그러므로" 내가 너를 이제 포기하겠다. 내가 너와 이상 함께하지 않을 것이고, 너희는 이제 이방인의 손에 넘겨 끝내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논리적인 전개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러므로'라는 인과 접속사 후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소 의아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이들을 책망하고 벌을 주시는 듯한데, 내용이 이상합니다. ' 가는 길을 가시로 막아 가게 것이고, 담을 쌓아 나가지도 못하게 것이다', '그리고 네가 가졌던 것들도 내가 도로 찾아올 것이며, 너를 데리고 광야로 함께 나가 마주 앉아 대화하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쫓겠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같이 있겠다는 뜻입니까? 바로 같이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네가 그처럼 앞에서 나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품에 안아야겠다'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죄를 지었지만 나는 없이는 없다'라는 고백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 말하며,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끝까지 너를 사랑할 것이다'라는 사실을 '아골 골짜기, 죽음과 고통의 골짜기가 소망의 문이 것이다. 너희가 소망을 품고 살게 것이다'라는 약속으로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호세아서 2장의 전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에는 우리가 지나칠 없는 하나의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 '응답하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말씀을 단순히 '이렇게 응답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말씀은 이해하기 쉬운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이 땅에 응답한다는 것은 비가 내린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바알 신에게 가서 우상 숭배하며 비를 구했지만, 이제는 내가 너희에게 비를 주는 하나님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땅이 소산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곡식이 자라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리며, 올리브를 통해 기름을 짜게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말씀은 실상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단순히 먹고 잘살게 것이라는 차원을 넘어 '내가 너희를 이처럼 풍성하게 구원할 것이다'라는 우주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우리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가 완성될 구원의 날까지 숨죽여 고통하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주가 우리의 구원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구원이 얼마나 거대한 우주적 사건인지를 하나님께서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이 누구에게서 끝나는지를 구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살펴보면 조금 특별합니다.

 

곡물과 포도, 기름과 같은 모든 소산이 결국 '이스르엘'에게 응답할 것이라는 대목입니다. 이스르엘은 언제 등장했습니까? 바로 호세아의 번째 아이의 이름입니다. 그의 뒤를 이어 태어난 둘째 딸의 이름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 (로루하마)'였고, 셋째 아들의 이름은 ' 백성이 아니다(로암미)'였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하나님이 너희를 이처럼 심판하고 있다'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작이 바로 첫째 아이 '이스르엘'이었습니다. 이스르엘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해 아합 왕조를 심판하여 피의 숙청이 벌어진 장소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피가 흐르던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회복이 시작되어 그곳까지 이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이 시작되었던 이스르엘이 회복으로 끝맺는다는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심판이 일어난 바로 장소에서 회복을 일으키겠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르엘'이라는 단어는 '흩어버리다'라는 뜻과 동시에 '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전부 흩어버릴 것이다. 너희가 심판을 받아 모두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라는 말씀의 이면에는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불러 모아 심을 것이다'라는 약속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심는다' 것은 죽음 이후에 새롭게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는 '부활' 의미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단순히 너희를 죄에서 구원하리라'에서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다시 심어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것이다' 연결하십니다. 구원에는 이처럼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천국에 가는 것이 목적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말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너희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시켜, 모습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을 누리게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냥 건져 내시고 '세상에서 살다가 나중에 천국에서 보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구원받은 순간부터 하나님께 심긴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며, 열매를 맺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고 붙드시며 끝까지 함께 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말을 듣고 '그럼 땅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천국에 가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회복시키시는 날은 바로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는 그날입니다.

 

그러나 그날까지 여러분은 하나님의 훈련장 안에 머물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이렇게 일찍 시작해서 이토록 힘든 길을 가야 하나?'라고 불평하는 분이 계십니까? '이럴 알았으면 마음껏 재미있게 살다가 죽기 직전에 침상에서 '이제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 되었을 텐데, 너무 일찍 예수를 믿어서 하지 못하는 것도 많고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해야 한다'라며 불만을 품으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이렇게 힘든 신앙의 길을 걷게 하실까? 세상도 쉽지 않은데,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시는 걸까?' 하는 의문을 마음속에 품고 계실지 모릅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심기어졌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열매 맺는 자리까지 이르게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번째 중요한 핵심입니다.

 

응답하리라: 절망 속의 회복

오늘 본문은 크게 가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번째는 바로 이스르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주와 심판으로 시작하셨던 바로 그곳에서 오히려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부활시키시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머리를 깎아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너는 이제부터 나의 사랑하는 딸로서 계속해서 자라게 것이며, 너를 깨끗하게 하고 순결한 신부가 되게 것이고, 너는 나와 함께 영원히 나의 신부로 살게 거야. 그래서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정말 상상할 없는 놀라운 약속을 우리가 갖게 것입니다.

 

긍휼과 사랑을 입을 없는 자리에 있던 우리가 로루하마에서 루하마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긍휼과 사랑을 받는 자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들을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그저 그런 일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해서는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인 우리가 누리게 되는 놀라운 영광과 구원의 기쁨이라는 것에 놀라야 합니다.

 

혹시 자리에 오셨을 나는 정말 모든 것을 잃은 자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절망했을 수도 있고, 혹은 반복되는 똑같은 생활에 지쳐 힘을 잃고 ' 인생에 과연 기쁨이 있는가', 기쁨이 사라져가는 인생을 보며 '결국 나는 나이가 들고, 힘을 잃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인생은 끝을 맞이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끝을 내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일을 우리 안에서 이루고 시작하신 분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더글라스 스튜어드는 호세아서에 나오는 '응답하리라' 말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 선언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이제부터 너희를 불러들여 나의 교향곡으로 만들겠다'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단순히 소절 소절 나오는 노래가 아니라, 모든 악기가 동원되는 하나님의 교향곡으로 우리의 인생을 만드시겠다는, 그래서 아름답고 조화로운 교향곡을 연주하시겠다는 선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하늘에 응답하리라. 내가 땅에 응답하리라. 내가 너희의 인생에 응답하리라.' 위대한 선언 속에서도 우리는 그저 '나는 소리가 나지 않는 트럼펫인가? 나는 찢어져 버린 북인가? 그래서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나는 찢어진 북처럼 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고장난 트럼펫처럼 소리도 내지 못하는 그런 인생인가?'라는 절망 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 인생에서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인가'라고 탄식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 모든 악기가 비록 불완전해 보이며 연약해 보이며 소리를 제대로 낼까 의심되지만, 악기 하나하나에, 심지어는 불협화음을 만드는 악기들일지라도 내가 모든 것을 지휘하여 교향곡으로 만들어낼 것이며, 너희들은 그런 인생을 살게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악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악기가 함께 어우러져 소리를 내게 됩니다. 물론 소리, 곡을 우리가 이해할 없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악보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만든 그런 화성학의 정점에 있는 화려한 악보는 아닐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명곡인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악기들이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며 우리 인생에 구멍이 났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교향곡, 아름다운 노래를 만드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응답하리라. 내가 너희를 나의 노래로 만들 것이다.' 하늘의 음악이 되었다는 표현을 2장에 나오는 마지막 '응답하리라'라는 표현을 이어받아 3장에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내용을 설명합니다.

 

최고의 가격, 구속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중요한 번째 주제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찢어졌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낡았는데, 어떻게 줄이 끊어졌는데,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음악이 나올까?'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유하시고, 하나님이 나라는 악기의 주인이시며 그것을 고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본문 3 2절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열다섯 개와 보리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구절은 고멜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사기 위해 노예 시장에 것입니다. 노예가 되는 경우는 전쟁터에서 포로가 되거나 빚을 크게 져서 팔려가는 경우입니다. 아마 후자였을 것입니다. 고대 근동사회의 노예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참했습니다. 이들은 노예 시장에서 팔리는 순간부터 물건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발가벗겨져 경매에 붙여졌으며,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일이 지금 고멜에게 벌어지는 것이고, 호세아는 여인을 사러 것입니다.

 

값을 주고 샀다는 , 이것이 바로 번째 주제의 핵심입니다. 번째 주제가 이스르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회복하고 부활시키는 것이었다면, 내용에는 바로 '구속', '대속', '속량'이라고 말하는 '내가 너를 위하여 값을 지불했다'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경매가 벌어졌다고 상상해 보세요. 처음 어떤 사람은 냥을 외쳤고, 어떤 사람은 냥을 외치며 점점 흥정이 올라갔을 것입니다. 결국 호세아가 ' 15' 외쳤고, 사방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 15냥에다가 보리 호멜 !'라고 외쳐 호세아에게 낙찰되었습니다. 과정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수는 없지만, 가지 확실한 것은 가격이 최고의 가격이었다는 점입니다. 고멜을 사기 위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제시했던 최고의 가격이 고멜에게 지불되어 데려올 있었던 것입니다. , 단순히 값을 지불한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가격을 지불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멜을 통해 이스라엘을 '내가 왔다', '내가 그렇게 이스라엘을 구했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값을 치르셨을까요? 바로 최고의 가격을 치르신 것입니다. 최고의 가격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은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같이 없어질 것으로 것이 아니요 오직 없고 없는 어린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것이니라”

 

가장 최고의 가격이 우리를 위해 지불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해 많이 들었고, 우리가 그것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쩌면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놀라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고의 가격을 받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상처투성이이고,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더해도 그러한 값어치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냥이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평범한 노예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모든 것에서 빼내기 위해 최고의 가격을 하나님이 지불하신 것입니다. 말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최고의 가격으로 쳐주신다는 것입니다. 은이나 금으로 우리를 사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정도의 가치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과 우리의 정체성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기서 건져오신 것입니다. 고멜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올 것입니다. 그녀는 쾌락을 위해 떠났을지 모르지만, 결국 죽음과 같은 노예의 자리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빚진 자가 되었고, 노예로서 평생을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 가격을 지불하며 고멜을 데려와야 했을까요? 호세아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별의별 행동을 했습니다. 2장에서 하나님께서 길을 가시로 막으시고, 담을 쌓아 나가게 했지만 고멜은 나갔습니다. 그런데 나가서 행복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노예가 되어 발가벗겨진 팔리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여인을 데려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하나님은 1절에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이스라엘을 사랑했으니 너도 나가서 그녀를 사랑하여 데리고 오라' 것입니다. 그녀가 대단한 일을 저질렀다면 모를까, 그녀가 저지른 죄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겼고, 심지어 '건포도 과자를 즐겼'습니다. 고멜이 남편을 버리고 나가서 했던 일이 건포도 과자를 먹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과자는 상류층이 먹는 고급 간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멜은 집을 나가서 그것을 탐했습니다. 허무하기가 이를 없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좇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걸음 나아가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무엇을 먹고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따라 나라는 인간이 누구인지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이스라엘이나 고멜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금방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결국 사라지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로 내가 누구인지를 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지금 건포도 과자를 먹는 사람이야. 내가 누구냐,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여러 모습으로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고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단순히 욕심 때문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려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 때문에만 부자가 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보다 , 부를 통해 자신이 남들과 다르게 대우받기를 원합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 앞에서 우리 모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너무나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로 나를 판단합니다. 우리가 거기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특히 비교 의식이 심하여, 끊임없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려 합니다. 어려서부터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서 그것이 몸에 배었을지도 모릅니다. 대표적인 예가 흔히 하는 '호구조사'입니다. 당신은 년생인지 묻고, 다음으로 어느 직장에 다니는지로 대화가 이어집니다. 미국 사람들은 거의 나누지 않는 대화를 우리는 당연하게 합니다. 심지어는 연봉이 얼마인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야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느 학교를 나왔고 회사에서 어떤 직책이 있었는지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야 사람은 그에 맞는 대우를 받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것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척도가 있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런 것들로 설명하는 매우 익숙할 뿐만 아니라, 거의 뼛속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모든 것이 사라질 우리는 누구인가

모든 것이 없어졌을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을 덮어주고, 장식하고, 여러분이 있는 모든 훈장을 떼어버리고, 입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당신은 누구입니까?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또한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1981년부터 전도사로 교회를 섬겼고, 후로 지금까지 거의 45년을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디 가서 누군가와 교제하는 중에 '목사님, 헛목회를 하셨군요. 목사님은 목회를 통해 아무것도 이루신 것이 없는 같습니다. 도대체 무슨 인생을 어떻게 사셨습니까?'라는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같습니다.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하다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라고 자조할지는 몰라도, 말을 듣는 순간은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저에게 내일 당장 돌볼 교회가 없으며, 다음 주에 설교할 강단이 없고, 함께 이야기하고 교제 나누는 모든 성도들이 곁을 떠났다면, 아니 차라리 교회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저는 자신을 설명할 방법을 찾아내기가 어려울 같습니다.

 

우리 모두 많은 세월을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그리고 그때 우리는 우리가 즐겼던 건포도 과자 하나씩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 그래도 나는 이게 있으니까'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이것이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살았으니까'라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살았던 시간조차 사라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 믿고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인생, 하루하루 그렇게 열심히 헌신했던 모든 것이, 그리고 평생 노력하며 추구했던 어떤 것조차도 없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벗겨진다면 여러분은 누구이십니까? 그런 면에서 , 우리가 살고 있는 어떤 것도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나를 나타내는 방식을 그런 것들로 설명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며, 만약 우리가 그러고 있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거기에 노예가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모를 우리는 절망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 답답함밖에 남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실은 직장의 노예가 되고 있거나, 경력의 노예가 되고 있거나, 혹은 자신이 이룬 성취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가지려고 애쓰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으로 자신이 누군지를 그래도 증명할 있으니까, 자식을 통해서 나를 증명할 있으니까, 내가 이루었던 이것을 가지고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할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아골 골짜기까지 내려가는 우리들에게, 이스라엘의 자리까지 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주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을 모르실까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실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너무나 아십니다. 주님은 정말로 발가벗겨지셨습니다. 3 동안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았던 제자들로부터 거부당하셨고, 3년간 양육한 12명의 제자들은 명도 남지 않고 그분을 떠나 도망갔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실패한 인생처럼 보였습니다.

 

만약 십자가 밑에서 사람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다면 예수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하셨을까요? 모든 것이 끝났고,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으며, 그가 가르쳤던 가르침도 전부 무시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며 '십자가에 박아 죽여라, 저자는 저주받은 자다'라고 외치며 그를 박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을 , 모든 것이 그분을 떠났을 , 그분은 누구였을까요? 주님은 아십니다. 적어도 우리가 닥친 문제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그것을 직접 당하신 분이고, 여러분과 저는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누구도 여러분을 발가벗겨 십자가에 매달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일을 당하셨기에 우리를 아시며, 우리가 아무것도 없어도 우리가 누구인가를, 주님이 누구인가를 아시는 것처럼 우리를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는 자임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속한 자인가를 깨닫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나의 나라에 속해 있기에 나라의 법칙과 나라의 것을 꾸준히 행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모든 것이 거기에 있으니 그것들이 없어져 버리면 나라는 존재조차 허물어집니다. 그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는 자이다.' 나라에 속해 있기에, 나라의 모든 것을 누릴 있는 사람이며, 어떤 경우에도 나라는 무너지지 않으며 나라에 속해 있는 우리는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왕을 찾아서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3 4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동안 왕도 없고 지도자도 없고 제사도 없고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지내다가”

 

이것은 자기들이 믿었던 모든 것들이 없어지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왕도 없어집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이전에는 자신이 왕이었지만, 이제 됨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이상 왕이 아니며, 내가 생각했던 멘토, 내가 추구했던 돈과 물질, 세상의 것들이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벗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도 없고, 우상인 주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 이런 해도 받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가지려고 애썼던 모든 , 자신의 나라에 속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마지막 번째 주제입니다. 속량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어떻게 그토록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인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속량받은 백성에게는 왕이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내가 왕이었는데 인생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세웠던 나라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나를 설명하는 모든 것들이 없어지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무것도 없을 , 그때 그들이 드디어 왕을 찾으리라!' 놀랍게도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다윗을 찾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호세아 시대에 다윗이 살아있었습니까? 호세아 시대가 기원전 700년경이라면 다윗은 이미 300 전에 존재했던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너의 왕이 누구인지를 찾게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거짓 왕들이 사라져 버리자, 우리는 드디어 진정한 왕에게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왕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이것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때 그들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진짜 구원이셨군요!' '우리는 그때까지 성전이 우리를 지켜주는 알았습니다. 내가 공부하고 외웠던 성경 암송 구절이 나를 지키는 알았습니다. 내가 했던 기도가 나를 지키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잊히고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억력이 한순간에 없어질 때가 온다면 어쩌시겠습니까? 그토록 열심히 공부했던 수많은 책을 통해 알았던 교리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경책을 줄줄 외우던 빛나던 지성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 우리는 비로소 고백하게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에게 성전이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다. 우리에게는 제사가 있다. 양과 염소가 있다. 성경이 있다. 율법이 있다'라고 했던 모든 것들이 없어졌을 , 그때 그들 모두를 지켜준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죄인 되었을 때부터 붙잡으셨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우리가 잘하고 있거나 많이 알고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 되었을 때부터 사랑하신 손길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건강도 사라질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것들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사라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져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과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유와 소속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인생 속에서 훈련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것입니다. 의지했던 에봇도, 우상도, 드라빔도 이상 우리 힘이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심지어는 성전도 우리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경험하면서 진정한 왕을 알게 되고, 왕을 배울 때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무슨 말이며, 하나님의 주권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신 것인지, 우리가 하나님을 왕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상 자신을 왕으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왕을 찾아가게 되었고, 땅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이 나를 진정 자유하게 하는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것입니다.

 

그전에는 우리가 만든 나라에서 뜻과 기준을 좇아, 혹은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인생을 평가하며 수밖에 없어 자유를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법은 우리를 끊임없이 얽어매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는 한순간도 나를 설명할 없으며, 내가 가진 직장과 돈이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성경에 의하면, 나를 다스리는 분이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그래서 나는 즐겁게 하나님 나라의 법을 사랑하게 되었고, 기쁘게 아버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사랑하는 것을 금지할 자가 없으며, 너희가 자비와 친절을 베푸는 것을 누를 있는 법이 없으며, 인내를 멈출 있는 방법이 없고, 온유와 절제를 막을 법이 없다.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무엇도 여러분의 사랑을 막을 없으며, 무엇도 여러분이 마음껏 드리는 친절과 감사와 격려를 막을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유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이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부활에 참여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노릇하며 우주를 함께 다스릴 자리에 것입니다. 세상이 없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여러분은 하나님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를 설명할 있는 분들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며, 나는 우주의 주인의 소속이고 나는 그분의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것이라. 내가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가운데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오.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구원자임이라. 너는 눈에 보배로우며 존귀하니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나는 누구인가?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주여, 저는 주를 사랑하는 주의 사랑을 입은 주님의 아들입니다. 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함께 누리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냐?'

 

하나님의 눈에 저는 보배롭고 존귀한 자입니다. 주님은 저의 보배이시며 저의 생명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진정한 소유는 무엇입니까? 진정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설명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모두 이렇게 고백할 있겠습니까? "저의 유일한 소유, 저의 진정한 재산, 저의 참된 분깃은 하나님이십니다. 저의 살이고 저의 피이시며 저의 부활의 영광이 되시고 저의 왕이시며 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분만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 무엇도 빼앗거나 없앨 없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여러분이 성공자인지를 말씀을 통해 다시 깨닫고, 오늘 우리가 함께 성찬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살과 피가 되셔서 우리에게 주시는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여러분을 채워 '나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안에 사신다'라고 고백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이제 주의 몸과 주의 피를 함께 받으려 합니다. 저희는 너무나 자주 잊어버립니다. 주님께서 저희의 살이요 피라는 것을. 주님께서는 그래서 저희의 살과 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시고 싶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살과 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살과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 저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깨닫게 하시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시며, 저를 자리까지 부르신 아버지의 은혜를 진정 찬양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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