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2장 14절로부터 23절까지 입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호세아와 고멜을 통해 본 구원의 길
호세아와 고멜이라는 두 사람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시는지 보여주는 이 장면들은, 사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 삶 속에서 겪어내시며 그 모든 것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비록 호세아와 고멜은 실패했고,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못해 결국 멸망의 길로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길이 아닌 우리를 살리는 길로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호세아서를 읽으며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호세아서 2장의 뒷부분을 포함한 2장 전체는 구조적으로 ‘그러므로’라는 말이 세 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그러므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응답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고멜이 어떻게 행동했고 그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가를 세 단계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여정
사실 이 전체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난 후, ‘내가 다시 요한복음을 읽고 싶다’, ‘로마서를 다시 읽어야겠다’, ‘갈라디아서를 읽어야겠구나’와 같은 마음이 여러분 안에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어떻게 대우하시고 무엇을 행하셨으며, 그분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분은 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하리니.” 이 말씀은 고멜과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멜이 대체 무엇을 했기에 이러시는 걸까요? 성경은 “너는 나를 사랑하는 자를 따르겠다고 말하는구나”라고 그 이유를 말합니다. 왜 나를 사랑해 주는 자를 따르겠다는 것일까요?
풍요 속에서 잊혀진 하나님
고멜은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얻고, 입을 것과 기름과 술을 얻었기 때문에 그들을 따르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의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여로보암 시대에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지금 마치 고멜이 이스라엘로서 모든 풍요를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고멜은,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준 것이다”라고요. 그리고는 단순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를 따를 것이다.” 이 말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삶
어떻게 저렇게 눈이 멀 수 있을까, 어떻게 저 진리를 놓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선한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고멜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고 무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이 모든 것을 주시고 허락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이 모든 것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지금 고멜, 즉 이스라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 생각에도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왜 이렇게 모를까?” 고멜과 이스라엘이 정말 하나님이 이 모든 것 뒤에 계시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운 나라이고,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며, 이제까지 하나님이 세우신 왕들에 의해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 그가 지금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를 먹게 하고, 입게 하고, 마시게 해주는 세상의 모든 것들입니다. 그는 그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처음부터 부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게 자기의 모든 관심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것들이 커 보이게 되고, 가까이 보기 시작하니까 그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여러분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한번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정말 어떠십니까?
신앙 속에서 잊혀지는 하나님의 존재
여러분이 매일 신경 쓰고 고민하고 시간을 투자하며 생각하는 그 많은 것들 안에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사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하며 감사하는 말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을 정말로 빼앗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만약 하나님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다른 것들이 더 커 보인다면, 감사하기가 어려워질 것입니다. 기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만약 나의 신앙생활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여러분과 저는 무언가를 주고 있는 다른 것에 마음을 쉽게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공기와 햇볕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열심히 일해서 버는 돈은 어떨까요?
소유에 대한 집착
여러분의 직장이 지금 여러분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고객들이 물건을 팔아주어 이익을 남겨서 여러분이 먹고사는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이 입는 옷은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옷을 산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것 자체가 왜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 무엇이 보이지 않기 시작할까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으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아끼고 노력한 내 은행 통장에 있는 돈 때문에 사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들은 귀중한 것이고, 여러분이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얻은 소유임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잘 관리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것인가는 중요한 일이지만, 주객이 전도되는 일도 너무 쉽습니다. 그것이 더 커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를 먹여 살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결국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나 우리 모두에게 적용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것을 주셨는데 그것을 받은 우리는 “아,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하고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일반적으로 누군가 여러분에게 선물을 주면, 선물을 받고 나서 그냥 뒤에다 놓고 집으로 가십니까? 어떻게 하십니까? 사람이라면 고개를 들어 “누가 주는 거지?” 하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뭐만 봅니까? 내가 받은 선물이 제일 중요해요. 그것만 보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셨구나”라고 말합니다. 축복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이렇게 축복하셨구나’라는 사실에서 끝인 것입니다. 선물을 받으면 이제 이것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살까만 고민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과 무엇이 크게 다르겠습니까? 손에 들려 있는 물건만을 볼 뿐, 그 손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평안과 행복과 소유에 온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재물이나 직장, 혹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예로 들었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무서운 것들도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내 욕심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교묘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심지어 나의 믿음조차도, 어떤 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나의 마음조차도, 탐심은 그것을 어떻게든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타락한 믿음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고 있고, 내가 알고 있고, 내가 가진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며, ‘어떻게 내가 이 큰 은혜를 가지고 제사장의 나라가 되어 다른 민족과 모든 이방인에게 전하며 그들을 구원할까’를 고민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눈을 “나는 선택받은 사람, 선택받은 우리”라는 것에만 팔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마음이 거기에 쏠린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이스라엘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고멜과 이스라엘이 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랑의 배신과 하나님의 응답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자녀나 친구에게 모든 것을 주었는데, 그들이 전화 한 통이나 카카오톡 메시지 하나 남기지 않는다면 어떠시겠습니까? 집에서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받은 척도 하지 않고 자기 방에 들어가 혼자 논다면, 마음속으로 섭섭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도록 가르칩니다. 친구에게는 더욱 서운한 마음이 들겠죠. 그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시는 안 준다”고 하거나, “이런 사람은 안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자기 아내가 다른 애인을 만나서 자기 집에 있는 물건까지 가져다가 퍼주며 “나 저 사람 따라갈래”라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므로’라고 말하며 기가 막힌 남편을 소개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까 읽었던 6절 말씀입니다.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 길로 가지 못하게 한다.”
남편의 ‘사랑’과 ‘징벌’
오늘날의 관점으로 말하면, 이 부정한 아내에게 “그래, 네가 좋다면 그에게 가서 살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야, 차 키 내놔. 너 앞으로 자동차 못 몰아” 하며 차 키를 빼앗는 것입니다.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문에 못을 박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이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조금 더 나아가면 더 신기합니다. 사실 이 호세아서 2장은 법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판사 앞에서 “아내가 이런 여자이니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판결은 “차 키를 제가 가지게 해주세요. 운전 못하게요. 집에 문을 못 박게 할 테니 그것만 허락해주세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되찾으심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이 또 한 번 나옵니다. 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맞을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삼’은 삼베, 즉 옷감을 말합니다. 이 옷감을 빼앗는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귀걸이, 장신구, 옷, 용돈 등 많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택배가 왔는데, 분명 보낸 사람 이름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보더니 “이건 김 아무개가 보냈네”라고 말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라며 기분 좋아하고 앉아 있다면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 마음속에서 칼이나 총이 왔다 갔다 하겠죠. 내가 일부러 시킨 것을 받은 사람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나 그 사람한테 갈 거야”라며 금과 은을 싸 가지고 가서 바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바알을 숭배하는 모습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 내놔. 내가 너한테 사준 것 다 도로 내놔, 도로 제자리에 갖다 놔. 나는 너한테 이것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받을 가치가 없어”라고 말씀하시며 모든 것을 빼앗으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처럼, 자기 딸이나 아내의 머리를 깎아버리고, 집에 가두며, 창피해서 밖에 못 나가게 옷을 다 벗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정신 차릴 때까지 집에 가두는 것이죠.
이 이야기는 흥미진진해 보이지만 사실 그 배후에는 ‘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고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를 살리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쫓아내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슴 아픈 사랑, 그리고 집착
이 이야기는 이상합니다. 쫓아내야 마땅한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사랑 이야기가 되니 정말 신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가 막힌 남편입니다. 우리는 상실감 때문에 먼저 분노하고 속상해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감내하고서라도 그녀가 나가지 못하게 열쇠를 빼앗아서라도 자기 곁에 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녀를 붙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일은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도망가려 하고, 사랑을 오해하며,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사랑하는 것이니, 정말 가슴 아픈 사랑입니다.
멸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내 가슴이 아프더라도 내가 너를 놓지 않겠다. 내 백성을 위해서 나는 눈물을 흘리겠다. 나는 간절히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내가 모든 일을 하겠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 나는 너희를 버릴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하나님이 이것을 사랑으로 끝맺으려고 지금 그 일을 계속해서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은 이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이라면 더욱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한심하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다른 남자에게 금과 은까지 갖다 바치면서 남편을 버리려 하고 떠나려고 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에게 헌신하려는 남편이 있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조언하시겠습니까? 오히려 “그냥 놔줘. 진짜로 사랑한다면 놔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우리 인지상정 아닌가요? “야, 그렇게까지 당신을 오해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모르는데, 그냥 나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살게 해줘”라고 하지 않나요? 여러분이 조언한다면 세상에서 어느 쪽이 더 맞는 이야기인가요?
그것을 끝까지 끌어안고 있으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당신 이거 사랑이 아니라 집착 아니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그렇게 행복해하고 있는데 행복하게 해줘. 그게 진짜 사랑이야”라고 하지 않으신가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요? 그런데 세 번째 ‘그러므로’가 나오거든요. 이 ‘그러므로’를 읽은 다음에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세 번째 ‘그러므로’를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첫사랑의 장소, 광야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인 1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이 남편이 제정신이 있는 남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집에 가두는 것은 어쩌면 벌을 주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두고서 괴롭히고 욕하며 “너 진짜 정신 있냐?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을 앞에 앉혀놓고 그 옆에 자신도 앉아, ‘타일러’ 말하고 있습니다. 이 ‘타이르다’라는 단어는 번역이 참 잘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설득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원어적으로 좀 더 풀어 말하면, 말하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마음을 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자신을 배반하고, 자신이 베풀어준 모든 것을 가지고 원수에게 갖다 주는 이 여인에게 마음을 열고 설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하며, 내가 너에게 어떤 것을 행하고 있으며, 나의 마음이 어떤지”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서 이야기하시나요? 그녀를 거친 들, 즉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데리고 갑니다. 호세아서를 읽을 때는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호세아가 말하는 사랑 이야기는 출애굽기와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후 어디로 갔습니까? 바로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이 처음 대면하고, 처음 사랑을 시작하며, 첫사랑을 나눈 곳이 어디입니까? 첫사랑의 장소, 첫 키스의 추억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로 그곳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되어서 너를 지켜주었다. 낮의 뜨거울 때는 내가 에어컨이 되어주었고, 밤에 어둡고 추울 때는 내가 너를 위해 불이 되어 타올랐다. 네가 길을 잃고 헤맬 것 같을 때 내가 너와 함께했으며, 대적이 너를 죽이려 할 때 내가 너를 위해 싸웠다. 내가 여기서 너를 사랑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신명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0년 동안 너의 의복이 헤어지지 아니하였고, 내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신명기 8장) 40년을 지났는데 옷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과 발도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매일 먹을 것이 없고 물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 먹이고 마시게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신혼일 때를 기억하느냐? 그때의 그 사랑을 기억하느냐? 그때 씨앗도 뿌릴 수 없는 광야에서 너희가 나를 따랐다.”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되셨을 때, “이것만이 내가 살 길이다”라고 하며 하나님을 따라왔고, 만나를 주셨을 때 찬양하며 감사했습니다. 홍해를 건넜을 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광야 40년 동안 신혼 때의 그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로맨틱한 사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아내에 대해 판사에게 가서 “나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접근 금지가 아닌 접근 허용을 명령해 주십시오. 차 키도 빼앗을 수 있게 해주시고, 문에 못을 박아도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내가 그녀를 집에 가두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앉혀놓고 “우리 함께 가자”라며 첫사랑의 장소로 간 것입니다. “기억하냐, 우리가 처음 만난 날? 기억하냐, 내가 너에게 첫 선물을 주었던 날? 기억하냐, 우리가 그렇게 큰 은혜를 함께 나누었던 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었고 하나님의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로했습니다. 화를 내고 꾸짖고 분노하며 심판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그들을 앉혀 놓고 하나님의 마음을 여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하며,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나에게 너는 어떤 의미인지.” 이 우주가 하나님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것도 주님의 눈을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소망의 문, 아골 골짜기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그 시선이 다른 어떤 곳으로도 향할 수 없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여러분을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놀라운 계획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아는 아골 골짜기는 주로 찬송가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를 통해 듣기 때문에 어둡고 음침하며 힘든 곳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골’이라는 말은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처음 들어갔을 때 등장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처음으로 무너뜨린 성은 여리고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작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이 무너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교만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보다 훨씬 작은 아이 성을 쳐들어갈 때는 자신만만하게 군대를 이끌고 갔다가 대패했습니다. 그 패배의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의 것을 너희가 도둑질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아간입니다. 아간은 하나님께서 여리고에서 취하지 말라고 하신 물건을 몰래 훔쳤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신의 욕심을 취하며,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아간은 돌에 맞아 죽게 되는데, 그곳의 이름을 아골 골짜기라고 붙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다음 아이 성을 공격했을 때 승리하게 됩니다.
그래도 가는 고멜, 그래도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간을 벌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을 성결하게 하셨고, 그로 인해 다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골 골짜기는 한편으로는 고통의 장소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망의 장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호세아는 말하는 것입니다. “이 아골 골짜기를 고통과 죽음과 멸망의 자리가 아니라, 소망과 승리의 자리로 만들겠다.” 하나님의 거룩과 승리가 그곳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너희는 애굽에서 올라온 나의 백성들이 노래했던 것처럼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호세아서를 읽다 보면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마음을 열고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으면, 고멜도 양심이 있다면 최소한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멜은 결국 끝까지 돌이키지 않습니다. 가던 죄의 길을 계속해서 가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박영선 목사님이 호세아서 강의를 하시면서 “호세아서를 읽고 나니 딱 한 가지 단어만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바로 ‘무시무시한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끝까지 쫓아다니시나. 이런 하나님이 나를 쫓아오시니 나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라고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저는 여기서 벌써 너무나 다른 단어가 생각납니다. ‘무시무시한 고멜!’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의 고백을 받고, 첫사랑의 장소에 가서 “우리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지?”라고 설득하고 위로하는데도 결국 고멜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떠나 죄를 향해 달려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아시겠지만, 이 이야기는 고멜과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멜은 호세아를 만나 아이 셋을 낳고 길게 잡아 5~7년 정도 죄를 짓다가, 하나님께서 그녀를 다시 불러 용서하고 설득하셨지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30년, 40년씩 자신의 길을 스스로 헤쳐나가지 않으셨습니까? “나의 길을 가련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랑에 여러분이 굴복하십니까? 아니면 종교에 굴복하고 있습니까? 언제나 똑같아 보이는 이 교회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혹시 신앙이라는 것에 굴복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믿음과 세상의 유혹
아니면 내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곳,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곳, 그래도 교회니까 내 말을 할 수 있는 곳이라 여기고 있습니까? 그래서 교회라는 곳에서 “아, 내가 그래도 좀 살아 있는 것 같고, 내 말이 좀 통하는 것 같고,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수도 있고 욕도 먹지만 칭찬도 받을 수 있으니, 여기에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첫사랑 이야기를 정말로 듣고 있습니까? 매주, 아니 어쩌면 매일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실 텐데, 과연 우리는 그때 어디에 있습니까?
고멜을 한번 보십시오. 좋게 말하면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오해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좀 그만해, 지겨워. 피곤해. 왜 이렇게 나를 얽매이는 거야? 왜 이렇게 내 자유를 빼앗는 거야?”라고 그녀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지독해 보일 수도 있고, 솔직히 보통이 아닌 사랑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좀 더 자유를 달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이해는 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호세아서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멜의 행동은 핑계일 뿐이고, 사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소유, 즉 자신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즐겁게 해주는 모든 것과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세상적인 것, 우리 식으로 말하면 돈과 같은 것을 하나님보다 더 바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못 믿어, 언제 변심할지 몰라. 하지만 돈은 나를 배반하지 않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돈을 믿고 그것을 신앙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붙들고 있습니까? 지금 이 여인이 갈 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멸망의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멸망의 길로 함께 오신 하나님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저쪽에 가서 행복하게 산다는데 그냥 가거라,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구나”라고 말하는 것이 더 대범하고 넓은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붙잡아 놓고 문에 못질을 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사랑은 요즘 말로 ‘집착’이라고 부릅니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이건 집착이고 그를 내 손아귀에 두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지. 이게 무슨 사랑이야?”라고 우리가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위해 죽음으로 나갈 때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시니, 혹은 호세아가 고멜을 보았을 때, 그쪽으로 가면 죽음뿐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멸망의 길인 것입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으며 그곳으로 가면 죽음뿐입니다. 죽을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이것은 죽는 정도가 아니라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아니야, 안 돼! 그건 절대로 내가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때부터는 집착이 아니라 그 사랑의 강도의 문제가 됩니다. 얼마나 큰 사랑인가 하는 것이죠.
사람들이 “저건 사랑이 아니야,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라고 욕할지라도, “내가 그 욕을 먹더라도 사람을 살리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멸시를 받더라도, “아주 정신이 이상한 사람 아니야?”라는 말을 듣더라도 그 길을 가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말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미친 자라는 말을 들으셨고, 이단이라는 말도 들으셨으며, 정신없는 자라는 말도 들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 네가 메시아냐? 너부터 챙겨, 너부터 살려라. 너 거기서 내려오면 내가 믿어줄게”라는 멸시와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멸망의 길로 달려간 그 고멜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결국 문을 뜯고 어떻게든 그 길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나가니까 “아휴, 그래 나도 여기까지 했으면 됐지, 나도 할 만큼 했어”라고 하셨습니까?
남편의 죽음, 아내의 생명
자동차 키까지 훔쳐서 도망간 이스라엘을 향해 “더 이상 네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 방법도 없고, 이제는 너를 따라갈 차도 없구나”라고 절망하신 것이 아니라, “차가 없으면 자전거라도 끌고 내가 너를 반드시 쫓아가겠다”라고 외치시며 나가십니다. 어느 길로요? 네, 멸망의 길로 따라가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가면 교통사고로 다 죽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길로 내가 먼저 가겠다고 하시며 가시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멸망으로 가고 있는데,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럼 내가 그 멸망으로 함께 가겠다”라고 나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멸망을 당하셨습니다.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아프고 아픈 이야기는 남편의 죽음으로, 그래서 아내가 사는 것으로, 그래서 우리 모두가 놀라는 이야기로 흐르게 됩니다. 남편은 멸망의 길로 그녀를 따라갔고 결국 자신이 멸망을 당하게 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생명까지도 내어줍니다.
얼마나 감동적이긴 하지만 비참하고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만약 하나님이 이 날을 이렇게 표현하신다면,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날’이나 ‘하나님의 어둠의 날’이라고 표현하실 수도 있겠죠. 그런데 호세아가 뭐라고 표현하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저주가 쏟아진 그날, 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날, 그 어둠이 세상을 가린 그날,’ 그날을 뭐라고 부르시는 줄 아십니까? “내가 너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 것이다.”
“너는 나의 영원한 아내가 될 것이며, 나는 너의 모든 죽음과 멸망을 내가 대신 받을 것이며, 그 대신 너는 나의 영원한 아내가 되어 나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나는 그날 공의로 너를 아내로 삼을 것이다.” “맞다, 벌을 받아 죽는 것이 마땅하지. 남편을 배반하고 부정한 여인이니 너는 그렇게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너를 나는 아내로 맞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끝없이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고, 끝없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얘기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우리들. 우리가 고집 부리는 대로 가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공의로, 정의로, 너희는 죽는 것이 마땅하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런 너를 위해 내가 죽는다.”
그것이 바로 뒤에 나오는 두 가지 단어, ‘은혜와 긍휼’로 내가 너와 혼인할 것이며, ‘진실함’으로 너에게 장가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날, 너희가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구와 혼인한 사람인지, 내 남편이 누구인지. 성경은 호세아서의 가장 중요한 주제를 너무나 멋있게 표현합니다. ‘네가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마음을 열고 너희 앞에 앉아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너희는 그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그날 보게 될 것이고 알게 될 것입니다. 너를 사랑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그분의 지독한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너를 위해서 어디까지 쫓아왔는지를, 네 앞에 그 낭떠러지에서 죽어 시체가 되어 피를 흘리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그날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내가 산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내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내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고통과 처참함으로 얼룩진 그 자리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어두운 그날, 나는 너를 나의 영원한 신부로 삼을 것이다. 너는 비로소 내 마음을, 내 사랑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호세아서에 처음으로 나오는 그 긴 하나님의 고백, ‘루함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에서 루함마로,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한 그곳에서 너를 내 백성이라고 부르겠다. 내가 너를 위해 멸망의 길까지 쫓아가겠다. 내가 너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는 그 모든 이야기가 있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었던 이스라엘의 고백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드디어 응답하는 자가 있을 것이며, 그때 비로소 너희가 고백하게 될 것이고, 너는 비로소 나를 알고 내 마음과 내 사랑을 알고, 그리고 너는 나에게 말할 것이며, 너는 드디어 나에게 응답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때 고멜은, 이 백성들은, 그리고 우리는 “주님은 나의 영원한 사랑이시며,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시며, 나를 죽음보다 사랑하신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입에서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날 우리는 이 복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이 말을 듣고야 말리라. 시간이 아무리 걸리더라도 너희가 나를 배반하고 거부하며, 심지어 나를 떠난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너의 입으로부터, 너의 삶으로부터, 너의 인생으로부터 이 말을 들을 것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사랑이십니다. 나를 사랑하신 주님, 내가 주께 고백하나이다.’ 그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며, 여러분을 살릴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삯꾼들은 저희를 지키지 않고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는 저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을 믿습니다. 거짓된 남편들과 거짓된 애인들은 저희에게서 빼앗을 것만 생각하고 잘해줄 줄 몰랐지만, 참된 남편 되신 주님께서는 죽음의 자리에까지 가서 저희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진정한 신랑이 되신 주님께서 그렇게 저희를 위하여 멸망의 자리까지 따라와 주셨습니다.
저희가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선하신 주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빛을 쫓아가야 하는데, 저희는 누구도 그 빛을 따라가지 않고 어둠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둠 속으로, 자기연민 속으로, 제 죄 속으로만 더욱 깊이 빠져드는 저희를 쫓아오셨습니다. 따라오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주님께서 “그러므로”라고 저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저희도 “그러므로”라는 고백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는 저의 기쁨이요, 저의 생명이요, 저의 사랑이요, 저의 구원이시며,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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