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1 1절 입니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아멘.

 

격동의 시대, 멸망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오늘부터 우리는 호세아서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 그가 말씀을 전했던 시대는 한마디로 격동의 세월이었습니다. 북쪽과 남쪽으로 이스라엘이 나뉘어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라 불렸는데, 호세아가 사역했던 시기는 북 이스라엘이 멸망을 향해 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호세아의 사역과 함께 이스라엘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는데, 이때 왕의 이름도 호세아였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선지자를 소개할 때 그 집안의 이름(브에리의 아들)을 언급하여, 이 호세아가 왕 호세아가 아님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격동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호세아서의 언어 자체도 매우 격동적입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잊겠느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와 같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상상하기 힘든 일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호세아서 1 1절은 흥미로운 대목을 담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인 호세아가 유다의 왕 네 명을 먼저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다시 보면 네 명의 왕, 곧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는 모두 유다 왕입니다. 이들은 호세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으며,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에 살았기 때문에 유다 왕들을 만난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왕은 단 한 명, 여로보암만 언급됩니다. 여로보암이 호세아의 사역 전체를 통치한 것은 아닙니다. 호세아는 여로보암이 죽기 직전에 사역을 시작하여 그 후로 25년 동안이나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는 여섯 명의 왕이 더 있었지만, 성경은 그들 중 단 한 명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섬겼던 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의아합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통해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베푸신 여로보암 시대

첫째, 과연 여로보암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가입니다. 여로보암 왕은 40년이 넘게 이스라엘을 통치한 장수 왕입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가장 강성하고 부요했으며,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였습니다. 솔로몬 시대 이후 북 이스라엘이 이토록 많은 땅과 재물을 가졌던 적은 없었습니다. 여로보암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로는 우리가 잘 아는 요나와 아모스가 있습니다.

 

순서상 아모스가 조금 먼저, 그다음이 요나, 그리고 호세아입니다. 이들은 같은 시대에 활동했지만, 각자의 선지서에 서로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활동 지역이 달랐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요나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촉구했고, 놀랍게도 그들이 회개했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선지자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백성 전체가 회개에 이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잠시 약해졌던 시기였는데, 큰 전염병과 함께 미신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불길한 징조로 여기던 일식이 일어났던 때였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요나는 니느웨에 나타나 "40일 안에 멸망할 것"이라 복음을 전했고 그들이 회개한 것입니다.

 

그 중간에 약해졌을 때 요나가 니느웨를 방문하게 되었고, 당시에는 큰 전염병도 돌았고 미신을 좋아하던 사람들이 일식이 일어나면 자기 나라에 큰 변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지역에 일식이 일어났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앗수르 사람들이 굉장히 혼란을 겪고 있었을 때 요나가 니느웨에 나타나서 40일 안에 너희가 멸망할 것이라고 복음을 전했고, 그때 그들이 회개했습니다. 물론 요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이스라엘은 어땠을까요? 그때 마침 애굽도 약했습니다. 그러니 그 중간에 끼어 있던 이스라엘이 여러 가지 조건상 강성해지기 시작했고 가장 큰 부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회개가 일어나고, 이쪽은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부요하고 가진 것이 많으면 신앙이 약해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선지자들이 '너희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역사적인 뿌리를 좀 다른 곳에 두고 있습니다. 그저 ‘우리가 뭔가를 가지게 되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도 소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여로보암 시대에 그들이 왜 이렇게 강성하고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대한 말씀만 주신 게 아닙니다. 다른 말씀도 주셨는데, 그게 열왕기하 14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요나가 니느웨만 간 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말씀했습니다. 즉 그 지역은 쉽게 말해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이 가졌던 땅을 거의 다 회복한 것입니다. 북쪽에서는 요단강 서쪽 해변가 땅뿐만 아니라 동쪽 땅까지도 다 회복을 한 것입니다.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땅을 회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굉장히 강성했고, 우리가 잘 아는 다메섹을 성경에서는 아람이라고 많이 부르는데, 그 아람이 조공을 바치고 그 나라를 거의 복속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렇게 강성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한 번 더 들어보십시오. 25절에 이어 26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이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을 어떻게 쓰신 겁니까? 구원자로 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구원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로보암에 대해 항상 부정적인 이야기만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가 정치는 잘했지만 신앙적으로는 탈락했다고만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뭐라고 합니까?

 

은혜를 잊은 백성의 탐심과 우상숭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잘해서도, 하나님께 돌아와서도 이런 구원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봉사를 많이 해서도, 갑자기 '하나님, 저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지금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들이 누렸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사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높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감사가 사라지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셨고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는 생각이 없으면, 모든 것은 결국 나의 것이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이는 곧 자기가 가진 것을 더 갖고 싶어 하고 자신을 더 치장하고 싶어 하는 욕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우상도 쉽게 받아들입니다. 이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고고학적인 발견에 따르면, 당시 수도였던 사마리아 성에서는 ‘하나님과 아세라’를 함께 표현한 유물이 나왔습니다.

 

이 사마리아의 비문은 사실은 사마리아 성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앗수르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 비문 속에는 “사마리아의 여호와와 아세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아세라를 표현할 때, 사마리아의 여호와와 함께 아세라를 같은 신으로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당시 이스라엘은 신을 섬기는 데 있어서 여호와나 아세라나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숭배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를 위한 신이기 때문입니다. 복만 주실 수 있다면, 내 생활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 수 있다면, 하나님이 되었건 어떤 다른 신이 되었건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다고 모두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도 이러한 함정에 아주 쉽게 빠지는 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신, 즉 우상을 섬기기 시작하면 결국 우상만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숭배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신에게 빌어 성공했다면, 그 신에게 무언가를 바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이 좋아서가 아니라, 신이 나에게 해준 것 때문에, 즉 내가 바친 행위 때문에 내가 받은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특징은 여기에 있습니다. 신을 부르지만 결국 진짜 배가 부른 것은 나 자신이며, 결국 자기를 높이는 행위로 나아가게 됩니다. 거짓 신을 만들어 숭배하지만, 그 끝은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과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이 문제 앞에서 가장 연약합니다.

 

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신 은혜

이러한 문제와 싸울 수 있는 가장 첫걸음은 지금 내가 가진 것, 내가 사는 인생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 아래서 보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에 나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합니까? 은혜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둘째,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은혜로 삽니다'라고 고백할 때, 단순히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는 이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고 계시는구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쉽게 놓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얼마나 많은 탐심과 우상숭배에 쉽게 빠져 있는지를 느꼈습니다.

 

제가 30년 가까이 한 교회에서 목회하며,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라 대학에 가고 졸업하는 것을 보면서 기쁨과 사랑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겠지만, 이 말씀을 준비하며 '내가 교회를 사랑한다는 말이 참 부끄럽구나' 깨달았습니다. 교회가 겪는 여러 어려움을 보며 목사로서 '어떻게 하면 이를 바로잡을 것인가'를 항상 생각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저도 모르게 '여러분은 지금 바른 길로 더 가야 합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옆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러분이 얼마나 귀한 존재이며, 얼마나 많은 어려움 속에 있는가'를 자주 잊어버렸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인들은 제게 "목사님, 얼마나 힘드시겠어요?"라고 말하며, 저 역시 "그래, 좀 속 안 썩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저로 하여금 기도하며 회개하게 만든 지점입니다. '나는 이러한 것들조차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근심이든, 어려움이든, 힘든 일이든, 혹은 사랑해야 할 힘든 사람이든, 나의 가족과 자녀까지도, 이 모든 것을 받고 누릴 자격이 있는지 되물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지은 죄로 인한 문제조차도 과연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정말 받을 자격이 없는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근심이든, 잠깐의 기쁨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없구나. 나는 사실 숨을 쉴 자격도, 근심과 아픔조차도 받을 자격이 없는, 하나님 앞에서 본다면 당장 사라져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사랑받는, 적어도 이 정도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셔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다'는 깨달음과 함께 제 마음속 감사는 점점 줄어들고 작아졌습니다. 좋은 의미로는 사명감, 나쁜 의미로는 책임감만 많아지는 제 모습을 보며 주님 앞에서 부끄러웠습니다. 어느 교회나 부족함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저희 교회는 참 보석 같은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갓 낳은 아이를 데리고 새벽 기도에 와서, 아이가 울까 봐 숨소리도 못 내고 뒤에 앉아 말씀을 듣던 형제자매들을 기억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말씀을 듣고 자기 인생 전체를 주님 앞에서 돌아보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가진 전 재산을 정리하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귀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인생 속에서 "내가 비록 이 일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번 살아보겠습니다"라고 했던 형제자매들을 저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귀한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제가 자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물론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받을 자격이 없는 제가 그 모든 것들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더 감사해야 하는가를 깨달으며 ', 감사가 점점 부족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 찬양 '바다 같은 주의 사랑'을 이번 주에 많이 불렀습니다. '어찌 우리 잊으리.' 하지만 자꾸 잊습니다. 일주일 내내 그 찬양을 불렀는데도 말입니다. 제 부족함이나 마음속 갈등, 조그마한 기쁨과 자부심이 전부가 되는 것을 보며 '아니지, 어찌 내가 주님을 잊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을 보기 때문에 멈추고 있는 것입니다. '물결치는 주의 사랑 한없이 쏟아지네.'

 

'하늘나라 평화, 정의, 죄악 세상. 죄악된 내 마음 여전히 교만이 꿈틀거리는 내 마음을 적시네.' 우리 마음을 적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여러분은 어떻게 잊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다루는 호세아서는 바로 그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감사를 잊은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연약하여 잊기 쉽고 흔들리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면서도 마음에는 걱정과 근심이 가득하고 불안과 분노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죄에 빠지면서도 죄를 잘 보지 못하고, 때로는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호세아는 기가 막힌 표현을 씁니다.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지금 부요를 누리고 있지만, 사실은 저울을 속여 부자가 된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계속 저울을 속이고 거짓말을 해서 부요를 누리려 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에브라임아, 너는 이렇게 나한테 말하잖아. '나는 실로 부자가 되어 재물을 얻었다. 그런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고 부를 만한 불의를 행한 적은 나는 기억하지 않는다.'" 매일 저울을 속여 돈을 벌어놓고도 정말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무조건 속이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면, 예수님이 '내 눈 안에 있는 들보'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눈앞에 손을 가져다 대 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내 손이기에 아는 것이지, 가까이 있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눈 안에 들보가 있기에 죄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적하고 하나님이 그 죄를 찾게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죄의 무서운 점입니다. 내 눈 안에 있는 들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티는 쉽게 보지만, 바로 내 눈 속에 있는 것은 놓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눈을 그냥 뜨지 말고 너의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볼 수 있도록 해보라고요. 우리는 스스로 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야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끝없이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첫째, 감사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이며,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 왕들의 이름이 하나도 기록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명도 돌아간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호세아는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의 이름을 적지 않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말합니다.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고, 그들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세아서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끝끝내 그들이 물러가나니 그렇게 부르는데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호세아서 11)

 

성경은 '하나도 없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더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단순히 혼란을 일으키거나,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끝까지 물러서기만 할 뿐,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하나님께 엎드려 부르짖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 중에 아무도 돌아선 사람이 없었습니다. 앗수르와 애굽에게는 돌아섰습니다. 35톤에 달하는 조공을 바치고, 왕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께는 돌아와 무릎을 꿇거나 매달리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더욱 이상한 것은, 이렇게까지 되었다면 끝장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저는 '호세아서는 왜 썼을까?'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만약 그들이 망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호세아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고, 그래서 망했다'는 한 문장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호세아서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기에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의 진짜 주제입니다. 아무도 돌아오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끝없이 돌아오라 하십니다. 그들이 마음이 착해지거나 순종하고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내가 오히려 너와 혼인하여 너를 나의 아내로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왕과 예언자, 영들이 다 무너졌지만 오직 한 분, 성경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넘어지지 않으시고 여전히 우리를 향해 서 계십니다. 같은 시대를 보낸 유다의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증명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낳은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호세아서는 이렇게까지 표현합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찌 잊겠느냐. 너의 마음을 향하여 내 사랑이 불붙는 듯하도다.” 우리가 함께 찬양했던 '사랑은 절대 지지 않네'의 가사처럼, '내 백성이 나를 떠나 돌아섰지만 내 사랑이 내 백성을 포기 못하니. 내 모든 것 내어주고 나 그들을 얻으리라.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리는 돌아서도 그는 변치 않네.'

 

우리가 돌아섰기에 하나님이 돌아서신 것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우리가 돌이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설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꼿꼿하고, 얼마나 따지기 좋아하며, 얼마나 내 욕심에 잠겨 있는지를 아십니다. 심지어 자신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조차 흔들 수 있는 존재임을 아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견디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멸시하는 그 멸시를 내가 견딜 것이다. 너희가 나를 버리는 그 버림을 내가 견딜 것이다. 너희가 나를 돌아서 너희 마음대로 가는 그것조차도 내가 견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기다리겠다. 내가 너를 끝까지 사랑할 것이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너는 나와 함께할 것이다."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시고 증명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보게 되고 만난 이들은 돌이키게 됩니다. '그 주님이라면 나도 돌아가고 싶습니다. 내가 넘어져도, 고집을 부려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던 그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그 하나님께로 가겠습니다.' 집을 떠났던 탕자의 이야기는 모두 감동적이지만, 그가 '나는 여기서 죽는구나. 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도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언제나 제 마음을 흔듭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고 아꼈는지 깨닫는 순간, 그리고 자신을 분명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순간, 그때 비로소 돌이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나 그들을 얻으리라.'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섰기 때문에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부르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며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그분께 돌아갑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이나 굳어진 마음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겠습니까? 하나님 외에, 성령 하나님 외에 우리의 무릎을 꿇게 하시고 마음으로부터 '참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하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 지독하시지만 끈질기시고, 간절하시고, 너무나 사려 깊으시며, 겸손하신 그 사랑을 여러분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도, 환경도, 주위에 있는 어떤 것도 그다음입니다. 먼저 이분을 보셔야 합니다. 상처가 아프지만, 상처만 들여다본다고 치료되는 병은 없습니다. 의사에게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가지 않고 여러분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오늘 호세아와 함께 여러분을 부르고자 합니다. 이제 여호와께로 돌아갑시다. 함께 돌아갑시다.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같이 돌아갑시다. 우리 서로에게 아픔과 갈등이 있을 수 있고, 정과 사랑이 있을 수 있으며, 의리와 책임도 있습니다. 다 훌륭한 일들이지만, 우리가 함께 가려면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같이 치료하고 같이 치유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루를 이렇게 새롭게 맞이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바꾸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술에서 감사가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메마르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본훼퍼 목사님의 마지막 편지를 짧게 소개해 드린 적이 있지만, 그 편지 마지막에 쓴 시가 있습니다. 7개의 연으로 된 이 시는 독일 찬송가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 가사를 마지막으로 읽어드리며 오늘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이 시를 들으실 때, 교회란 무엇인가, 성도란, 그리고 우리는 왜 함께 걸어가야 하는가를 함께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본훼퍼 목사의 시

주님의 선한 손길에 고요히 감싸여

놀라운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형제여, 이제 우리 모두 함께

새날을 열어 같이 가세.

 

지나간 아픔 어두운 날들이

무겁게 우리를 짓눌러도

, 주님, 놀란 두려움에 떠는 우리 영혼에게

주님이 약속한 구원을 이루어 주소서.

 

고통의 잔이 비록 버거워도

주께서 내게 내미신다면

주님의 선하신 손에 담긴 그 잔을

떨림 없이 감사로 받겠나이다.

 

다시 우리가 가졌던 기쁨을 허락하신다면

찬란한 햇살을 맞이하며

지나간 날을 감사로 여기고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외치겠습니다.

 

주께서 밝히신 그 촛불들이

어둠을 헤치고 타오릅니다.

주의 빛이 밝히 밤을 비추니

그 주님의 빛 아래서

우리가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 고요함이 깊이 번져갈 때

그 벅찬 소리를 듣게 하소서.

주님의 자녀들이 외치는 그 함성,

주님의 자녀들이 외치는 그 찬양,

하늘의 사무침, 주님의 영광.

 

선한 손길에 놀랍게 감싸여

담대히 다가올 날들을 기다립니다.

주께서 밤낮으로 함께하시니

내일 우리가 맞는 그 날도

반드시 함께하시리.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에게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기도했던 그 기도를 주시옵소서. 주여,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시며 주의 영광을 우리 안에 부으소서. 주님의 빛을, 주님의 빛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우리 얼굴에 비춰 주옵소서. 조금만 더 주를 아는 그 지식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조금만 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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