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서 1 2절로부터 11절까지 입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임신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루하마 하라. 너희는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백성이 아니라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것이라.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우두머리를 세우고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것임이로다.” 아멘.

 

호세아와 이스라엘의 비참한 현실

지난 시간에 호세아서를 시작하며 말씀드린 것처럼, 호세아가 속해 있던 북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명으로 끝났는지 의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자그마치 여섯 명의 왕이 있었던 시대를 살며 왕들을 모두 섬겼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도 없었더라”라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이들이 없었던 당시 이스라엘의 비참한 모습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역사를 보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그때가 이스라엘의 가장 전성기였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부유했으며, 가장 잘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호세아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잘되고 있는데 “너희가 망할 것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사람들은 얼마나 그를 비웃었겠습니까? 과연 그의 말을 듣기는 했을까요? 요나와 아모스를 보면 사실을 있습니다. 요나가 이스라엘이 아닌 니느웨에 가서 외쳤을 이방인들이 돌아왔지만, 정작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모스는 어떻습니까? 그의 언어들이 얼마나 강력하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말이 많습니까?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와 같이, 우리가 사회에서도 자주 쓰는 말이 아모스서에 있습니다. 이처럼 강하게 이야기했는데도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강악한 이스라엘을 향해 호세아가 이제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나가서 “너희들 돌아와라”라고 말씀을 전하는 알았는데, 여호와의 계시가 그에게 임하여 “너는 나가서 이렇게 전해라”가 아니라 “너는 네가 이렇게 하라”라는 말을 먼저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결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이렇게 하실 있는가”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율법적으로도 맞지 않는 부도덕한 일이라 여깁니다.

 

부정한 여인을 일부러 데려다가 모든 절차를 거쳐 결혼하고 혼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용에 대한 해석이 아주 다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은 상징이고 비유다. 실제로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시키실 리가 있겠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멜이 처음에는 순결한 신부였는데 나중에 음란하게 것이다. 호세아가 성경을 쓰면서 고멜을 음란한 여인이라고 것이지, 원래부터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 않느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음란하게 살았기 때문에 음란한 여인과 같이 대조된다고 하지 않느냐”라고 주장합니다. 처음에는 고멜도 깨끗한 여인이었지만 죄를 짓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까요? 첫째는 호세아의 인생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하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키셨을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런 모든 해석을 넘기 가장 어려운 부분은 고멜을 이야기할 “디블라임의 고멜”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여기에 쓰인 시제와 문맥 전체도 이것이 단지 상징이나 비유가 아님을 나타내며, 고멜이라는 여인이 처음과 나중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원래 이스라엘과 같은 음란한 여인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나라입니다. 마음이 높아져 하나님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나라의 모습을 여인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음란한 이스라엘이고 음란한 고멜이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껄끄럽고 답답한 마음이 남습니다.

 

자녀의 이름에 담긴 메시지

“꼭 이러셨어야 했는가” 하는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읽은 내용은 너무 유명합니다. 고멜이 자녀를 낳았는데 자녀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번째 아들은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일부러 설명을 달지 않았는데, 이름을 당연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뜻은 ‘흩어진다’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망하게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포로로 잡혀가서 흩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흩어 사라지게 하실 것을 말씀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리 말씀드리지만, 오늘 여러분이 전체 구조를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뒤에 나오는 명의 이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르엘입니다.

 

뒤에 나오는 이름은 우리가 너무나 아는 이름입니다. 번째는 로루하마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로’라는 말은 ‘노(no)’라는 뜻으로, 영어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루하마’라는 말은 ‘긍휼(mercy)’입니다. 우리가 가끔 ‘노 머시(no mercy)’라는 말을 듣는데, 바로 뜻입니다. “너에게는 긍휼을 베풀 없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없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 아십니까? “너에게는 이상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 너를 봐주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봐주지 않으시면 정말 한순간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생각이 얼마나 많이 오고 갑니까? 여러분이 예배 시간에 거룩해지려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씀을 들으려 애쓰는 순간에도 딴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애를 쓰면서도 금방 딴생각을 하잖아요. 설교를 듣다가 “어? 어디였지? 이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한순간도 힘든데, 오죽했으면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갔을 예수님이 “너희가 한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없더냐”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는 말은 정말 무서운 말이거든요. 지금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로루하마, 은혜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의 이름은 로암미라고 지었습니다. ‘로’는 무엇입니까? ‘노’입니다. ‘암미’는 ‘백성(people)’이라는 뜻입니다. ‘미’로 끝나면 대개 ‘나의’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의 접미사 ‘미’는 ‘나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암미’라는 말은 ‘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이 되는 거죠. “나의 백성 아니다. 그건 얼마나 충격적인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이스라엘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는데, “지금 너는 백성이 아니다”라고 얘기하십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사실 이스라엘에게 엄청나게 충격적인 것인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바로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르엘과 멸망의 역사

이후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아마 많이 들으셨고 결론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이 ‘너는 백성이 아니라’고 그곳에서 내가 너를 ‘내 백성이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여길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래서 “참 은혜로운 구절이다. 호세아는 역시 멋있어”라고 끝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은혜를 너무 성급하게 받아들이면 은혜가 차근차근 쌓여 이해되어야 것이 결론으로 갑자기 건너뛰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시고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가 애매해집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변덕을 부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암미’ 하다가 이제 ‘암미’라 하고, ‘로루하마’ 하다가 이제부터 ‘루하마’라 부르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앞에 나오는 이스르엘이 중요합니다. 이스르엘이라는 말을 생각하며 본문을 다시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4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여기서 어려운 부분은 첫째, 이스르엘이라는 단어입니다. 뜻은 제가 알려 드렸듯이, ‘흩어진다’입니다. 그런데 뒤에 이스르엘의 피가 나오고요, 그다음에는 예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예후는 이스라엘 역사를 알면 쉽지만, 모르면 매우 어려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후는 익숙하지 않아도 아합은 대부분 아실 것입니다. 그럼 이세벨은 아시나요? 그녀는 아합의 부인입니다. 역사상 매우 유명한 악녀 명으로, 열왕기뿐 아니라 계시록까지 따라다니는 이름입니다. 얼마나 문제가 있었던 인물인지 보여줍니다. 아합 시대에 나봇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가진 포도원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아합이 지나가다 보고 왕이니까 너무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돈을 테니 밭을 팔라”고 했지만, 나봇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라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세벨이 “왕이신데 빼앗아 오면 되는 아니냐”며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 옵니다. 소식을 들은 하나님께서 사건을 가지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합의 집이 멸망할 것이다. 너희가 의인의 피를 보았기 때문에 피가 내게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아합의 집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런데 아합의 집을 멸망시킨 사람이 바로 예후입니다. 예후를 설명하기 위해 여기까지 것입니다. 하필 아합이냐고요? 일이 모두 벌어졌던 나봇의 포도원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바로 이스르엘에 있었습니다. 이스르엘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원래는 지명이나 골짜기 이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부러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자녀에게 붙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르엘의 피를 갚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후는 그곳에서 엄청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아합과 관계된 모든 사람, 친척까지 죽였습니다.

 

심지어 유다 땅에서 놀러 유다 왕의 사람들까지 죽여버렸습니다. 궁정에 있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친척까지 쫓아가서 죽였습니다. 엄청난 피를 흘렸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바로 이스르엘 골짜기, 흘린 골짜기가 것입니다. 피의 골짜기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말씀하는 겁니까? “예후야, 네가 이스르엘의 피를 흘렸는데 피가 이제는 너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후도 똑같이 그렇게 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후의 왕조가 끝난다는 뜻입니다. 아합을 죽여서 예후가 왕이 되고 예후 왕조가 시작됐습니다. 사실은 쿠데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후, 잘하고 있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후가 아합만큼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너무 심각하잖아요. 예후의 후손이 여로보암이거든요. 여로보암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겉모습에 속지 않는 참된 기준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해 “너의 땅을 넓히고 부강하게 하겠다”는 복을 주셨는데, 여로보암은 그것을 가지고 우상을 섬기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있는 일입니다. 오랜 기도 끝에 하나님이 주신 복이 자녀, 물질, 건강일지라도, “주님, 제가 이를 위해 사용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잊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예후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예후야, 네가 아합을 멸하고 내가 너를 세운 이유를 까맣게 잊고 똑같이 행동하니 아합과 같은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 여로보암의 계승자인 그의 아들 스가랴는 6개월 만에 암살당하며 예후 왕조는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기억해야 것은 이스르엘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르엘의 피라는 , 그리고 이스르엘이 단순히 장소이며 그곳에서 피가 흘려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이므로, 잊지 않고 기억해야 나중에 모든 것이 연결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자녀가 갖게 되었고,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처럼 피의 장소에서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기 시작합니다. 앗수르가 다시 힘을 회복하여 북이스라엘을 침략할 준비를 하고, 결국 침략하게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북이스라엘은 그때부터 여섯 명의 왕이 쿠데타나 암살로 엎치락뒤치락하며 대부분 , 심지어는 6개월 만에 왕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호세아가 가장 평화롭고 부강한 시기에 “너희가 망할 것이다”라고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이는 평화와 풍요가 지속되면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상 필요하지 않은 삶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없이는 한순간도 없을 것처럼 매달리다가도, 편해지면 점점 하나님 없이 것처럼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이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상징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해 쉽게 보지 못합니다. 큰일이 없으면 괜찮다고,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새 우상이 우리 삶에 들어와도 깨닫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는 가지 문제만 보고 “뭐, 교회에 그런 일도 항상 있는 아닌가, 사람 모인 곳이 그렇지”라고 가볍게 넘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호세아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일 우리가 겉으로 보이는 가지 문제만 가볍게 여기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곳에 있는지를 이스라엘이 몰랐던 것처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는 잘못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지 않는 같다”거나 “말씀을 열심히 배우려 하지 않는 같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기준은 아닙니다. 진정한 기준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만으로 만족하는지를 구하며, 내가 가진 것이나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없으면 없다는 마음이 있는가입니다.

 

행위 예언과 그리스도의 그림자

여러분이 아무리 주일에 와서 편안하고 좋은 모습으로 예배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더라도, 우리 마음속에 성경이 말하는 '디자이어(desire)',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다면, 우리는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주님이 없이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나의 모든 본분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무너져도 주님 때문에 있지만, 만약 주님이 나를 붙잡지 않으신다면 내가 가진 어떤 것도 나를 지킬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경제적으로나 건강, 혹은 삶이 평안하고 감사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어느새 우리 중심적인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좋은 장소에서 좋은 말씀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예배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 중심을 버리지 못해 다른 이들을 배려할 모르고 성령의 열매에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위험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사람이고 가정이지만, 그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냐 하면, 아무리 작아 보이는 일이라도 “지금은 답답하고 마음이 상하게 하는구나” 하고 가볍게 것이 아니라, 소홀히 여겨서는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통해 예언을 드러냈습니다. 이사야는 3 동안 벌거벗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선지자였지만, 종이나 노예를 상징하는 맨발로 다닌 것입니다. 3년이나 그렇게 다녔습니다. 그랬겠습니까? 그의 삶을 통해 “이스라엘아, 너희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명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셨습니다.

 

에스겔도,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스겔은 390일은 왼쪽으로, 40일은 오른쪽으로 누웠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메시지였는데, “너희가 어떤 상황에 있고, 얼마나 길게 죄를 범했는지를 기억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멋있었던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아 불에 태우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조차 하나님의 명령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해서는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는데 “너는 슬퍼해서는 된다”고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소가 끄는 멍에를 목에 메고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너희가 지금 어떠한 멍에를 메고 있고, 어떠한 가운데 빠져 있으며, 너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행위 예언이라고도 합니다. 행동으로 예언을 하며 말씀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3년을 어떻게 벌거벗고 맨발로 다녔을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일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모두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실 것들을 미리 보여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아이가 땅에 오셨습니다. 어려서부터 죄를 몰랐고 죄를 지은 적도 없으며 율법을 완전하게 지켰습니다. 12 때는 율법학자보다도 정확하게 말씀을 알아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했습니다. 그대로 컸다면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나 율법학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30살이 되어 밖으로 나가겠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졌습니다. “나는 죽으러 갑니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박혀 죽었습니다. 죄를 알지 못했던 사나이가 33살의 나이에 십자가에 박혀 죽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졌겠지요. 우리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 익숙해져 버려서 이제는 놀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니까 놀라지 않습니까?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선지자로서 예수님이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을 완성하신 방법입니다.

 

선지자들이 그렇게 살았을까요? 호세아가 고멜을 아내로 맞은 것은 선지자 자신이 이스라엘과 함께 살고, 이스라엘의 속에 들어가며, 그들의 죄를 짊어진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시청각 교육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 오실 메시아의 모습 하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멀리서 “내가 너희를 위해 죽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멀리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시지 않고, 직접 우리의 몸을 입고 땅에 오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모습이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이므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여겨서는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우리는 우리의 죄를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역시 모태 신앙으로 60 넘게 교회를 다니고, 교역자로서 수많은 교회를 섬겨 보았지만, 자기 죄를 스스로 깨닫는 사람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합니다. 전부 하나님을 위해 마음을 다하는 것처럼 찬송하고 예배하며, 회의하고 심지어는 싸우기도 합니다.

 

본인들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절대 모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죄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 눈에는 확연히 보이는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토록 열심히 돈을 벌고 바알에게 바쳤겠습니까? 하나님께 많이 바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스스로 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중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조차도 언제든지 우리를 위해 끌어들일 있습니다. 제발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분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저를 포함해 누구든지 우리는 위험 앞에 있으며, 사탄은 언제든지 우리를 길로 끌고 가려 합니다. “나는 내가 중심이 몰라요.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하는 같으니까요.

 

우리는 항상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수많은 경고등을 켜두어야 합니다. 그중 하나만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이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가지를 반드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감사하고 있는가? 만약 여러분이 열심히 봉사하고 교회를 위해 애쓰고 있는데도 속에 감사가 없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힘으로 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데 감사를 하겠습니까? 내가 노력해서 돈을 벌고, 내가 노력해서 살고, 내가 열심히 해서 찬송하는데 감사를 하겠습니까? 감사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누군가 가르쳐주면 “그렇지, 하나님께 감사해야지”라고 말하지만, 진심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심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있고 참된 감사가 사라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중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심이 되면 언제든 잘못된 구덩이에 빠질 있습니다. 그렇기에 문제를 쉽게 여겨서는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 문제인지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십시오.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여 “이게 바로 너희들이다”라고 외쳤을 ,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화가 났을 것입니다. 여러분,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선지자가 나와서 “너희가 바로 창녀다”라고 하면 돌부터 들지, 누가 “아이고, 그렇군요”라고 하겠습니까? 여기까지는 이해가 가실 겁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내 백성이 아니라고 그곳에서 내가 너희를 백성이라고 하리라”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야말로 음란한 세대고, 음란한 사람들입니다”라고 하면 여러분이 얌전하게 앉아서 “그렇군요,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목사님, 제발 그런 얘기는 그만하세요. 말이 됩니까? 저희가 조금 죄인인 것은 알지만, 그렇게까지 몰아세울 필요는…”이라고 하겠죠.

 

여러분이 가장 업신여기고 경멸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성경이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무서운 책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모습을 너무나 진실되게 보여주기 때문에 속상하고 무섭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책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너무나 은혜를 베풀기 때문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책입니다. “도대체 이런 우리를 어떻게 이렇게 대우할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하며, 직분을 받아서 살고 있으니 “우리 괜찮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합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헌금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목사를 보내어 여러분을 흔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니다. 편안한 곳이 안전한 곳이 아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안전한 곳은 곳뿐입니다. 성경이 “이곳이야말로 안전한 곳이다”라고 말하는 곳이 어디일까요? 여러분이 열심히 성경 공부해서 은혜 많이 받는 그곳은 좋은 곳이지만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말씀을 듣고 공부하고, 은혜 받고 기뻐하는 곳은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그곳, 하나님께 사정을 아뢰는 곳은 좋은 곳이지만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배하는 장소 역시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기쁘고 좋은 곳은 있죠. 말씀대로 순종하는 순간, “아, 내가 오늘 말씀대로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안전한 곳은 아닙니다. 성경은 안전한 곳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그곳이 바로 안전한 곳입니다.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가장 안전한 곳은 마음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있을 때입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주님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주의 은혜 없이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 하나님의 은밀한 곳이라 표현되는 이곳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내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리라. 여러분이 지금 잘하고 있는 그곳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그곳”입니다. “주님, 나를 보시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주여, 주의 은혜의 얼굴의 빛을 저에게 비춰 주십시오. 주님, 저는 지금의 은혜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게 주시고, 부어주십시오. 저는 도저히 없습니다. 주님, 제가 겪고 있는 아픔을 보십시오. 눈물을 보십시오. 어떻게 제가 감당하겠습니까? 주님, 주님의 은혜가 저는 필요합니다. 은혜 없이는 없습니다. 거기가 바로 세상, 우주에서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그곳이 주님의 눈길이 머무르는 곳이며, 주님이 당신을 치료하고 승리했다고 말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그곳으로 달려가지 않으십니까?

 

이스르엘과 십자가의 의미

제가 이제 다시 이스르엘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스르엘은 피의 장소였고,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게 장소입니다. 피가 흘리는 장소라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생각하게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듣고 나면 모든 단추가 끼워지는 느낌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르엘은 ‘흩어진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는 단순히 흩어져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농경 언어입니다.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을 뜻합니다. 뿌리는 비유에서 보듯이,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고,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듯 말입니다.

 

그냥 뿌리기 때문에 이렇게 흩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르엘입니다. 뿌리는 , 뿌려서 떨어지는 , 흩어지는 . 흩어져서 죽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떨어져 심겨서 다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르엘이라는 단어에는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흩어진다’, 하나는 ‘심는다’는 뜻으로, 생명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가 흐르고 저주와 심판이 임하는 장소에서 생명이 일어나는 곳이 세상에 있는데,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죠. 사실 로암미와 로루하마는 고통스러운 이름입니다. 그런데 앞에 있던 ‘로’가 어떻게 떨어졌을까요? 성경은 “내가 너를 로암미라고 부르는 그곳에서”라고 말합니다. 이는 장소, ‘플레이스(place)’입니다. 로암미나 로루하마는 장소 이름이 아닙니다. 장소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르엘에서, 피가 흘려진 그곳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백성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서에 의하면 “내가 너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일이 일어납니까? 바로 장소, 이스르엘의 피가 흘려진 곳에서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로 피를 흘렸습니다. 죽음과 저주가 내려왔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숨겨집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없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자격이 없었던 우리들, 로암미와 로루하마였던 우리들 앞에 있던 ‘로’를 그리스도의 피가 떼어버리고 우리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십니다. 세상이 감당할 없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우리 인생에서 일어날 있는 모든 일보다 무서웠던 죽음의 장소,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이 십자가 안에서 “이제 너는 나의 백성이요, 너는 나의 아들이요, 너는 나의 딸이요. 너는 나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하십니다. 확신하건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건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 그의 사랑을 입은 자를 세상이 어찌하지 못하며, 누구도 그를 끊을 없습니다. 그리고 이름은 바로 여러분의 이름이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는 오늘 다시 한번 이스르엘의 골짜기로 걸어갑니다. 그곳에는 죽음과 심판과 저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셨고, 심판과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심판과 저주를 받으시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바로 저의 주님이십니다. 그렇게 일을 행하신 분이 저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 저희는 너무나 길게 방황했습니다. 행복을 찾아보려고, 인생에 조금이라도 의미를 느껴보려고 살아가는데, 매일 그저 일어나 일하고, 피곤하고 지치고 돌아오는 하루가 아니라, 하루가 의미 있기를 항상 바랐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도 해보고, 많은 것을 행하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저희가 이제 정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기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진정 안에서 복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주시옵소서. 저희가 그냥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저주와 절망과 죽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 로암미가 아니라 암미가 되고, 로루하마가 아니라 바로 루하마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하사, 사랑 입은 자가 사는 인생이 어떻게 빛이 나고,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닫고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저희의 마음이 항상 높아지지 않고 오히려 겸손하여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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