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51절 까지 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아멘.
 
하나님 나라의 장엄한 서곡과 제자들의 부르심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은 본서의 서두인 1장과 2장 초반부를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을 바탕으로 어떻게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역시 그 거대한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단순히 공생애 3년 동안 가르칠 사람들을 찾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 언약의 백성, 곧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위대한 선포입니다. 마치 장엄한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영화의 도입부처럼, 하나님 나라의 서막을 알리는 이 선언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이자 새로운 공동체로서 어떠한 면모를 지니며, 무엇을 증거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 날부터 시작된 여정은 이제 다섯째 날에 이르렀고, 예수님께서는 빌립을 부르십니다. 부름을 받은 빌립은 즉시 주님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지닌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장면이 본문의 첫 구절인 45절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즉시 반문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이 짧은 대답 속에서 우리는 나다나엘이 성경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갈릴리 지역 가나 출신의 사람입니다. 빌립의 고향인 벳새다와 그리 멀지 않은 동네입니다. 이제 곧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가 등장하겠지만, 나다나엘이 반문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구약 성경의 기록을 비추어 볼 때,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강림하신다면 그곳은 마땅히 베들레헴이어야지 나사렛일 수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히스기야 왕 시대의 선지자 미가를 통해 주신 예언, 곧 미가서 5장 2절에 근거한 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라는 유명한 예언입니다.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사실은 당시 유대 사회에 널리 알려진 지식이었고, 헤롯 왕이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학살한 것 역시 이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아는 이들에게 메시아의 고향이 나사렛이라는 주장은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의구심과 예수님의 뜻밖의 찬사
나다나엘은 "나사렛"이라는 말에 강한 의구심을 품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은 무척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이미 다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빌립의 권유에 못 이겨 이끌려온 나다나엘의 마음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성경적 예언과 현실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겠지요. 만약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나다나엘아, 사실은 내가 태어날 무렵 인구 조사가 있어 우리 부모님이 베들레헴에 가셨고, 내가 거기서 태어났단다. 이제 궁금증이 풀리느냐?"라고 설명해 주셨다면 어땠을까요? 우리 같은 부족한 생각에는 그것이 나다나엘을 이해시키기에도 빠르고, 빌립도 데려온 보람이 있으며, 설교하기에도 참 편한 전개였을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곧바로 "아, 그렇군요! 예수님은 과연 베들레헴 출신이셨군요!"라며 기뻐했을 테니까요.
 
그러나 주님은 그 쉬운 방법을 뒤로하신 채, "베들레헴"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으십니다. 나사렛에 대한 나다나엘의 편견을 반박하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것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나다나엘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환경으로부터 입은 깊은 상처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보자마자 그의 진실한 신앙을 인정해 주심으로써 위로와 평안을 주신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나다나엘의 처지에서 보면 이는 매우 감사하고 일리 있는 말씀이지만, 뒤이어 나오는 그의 대답은 어딘가 생소합니다. 48절에서 그는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질문합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극화해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제가 새로 부임하신 어느 목사님을 소개하며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말씀과 기도의 종입니다"라고 칭송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그 목사님이 "아니, 제가 그런 귀한 사람인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답한다면 상황이 얼마나 어색하겠습니까? 보통은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거나 자신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주님의 칭찬을 듣자마자 "아니, 내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인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묻는 격이니, 이 대화의 흐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의미와 얍복강의 씨름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 속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간사한 것이 없다”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기서 ‘간사하다’는 말은 ‘속인다’는 뜻입니다. 즉, 나다나엘은 속이는 자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그가 정직하게 살아가는지 뒤를 밟으며 지켜보셨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단순히 척 보고 알아맞히신 것일까요? 그보다는 상당히 중요한 대조를 통하여 나다나엘이 진정 누구인가를 보여주시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속이는 자’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입니까? 바로 야곱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나중에 이름이 무엇으로 바뀌었습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나다나엘을 보시며 “참 이스라엘이라, 속이는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의도적으로 야곱과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대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 여러분이 구약을 공부하거나 창세기를 읽을 때 접하게 되는 유명한 장면, 곧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다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던 그 사건을 예수님은 단 한 문장 안에 그대로 담아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결국 야곱이라는 인물은 본래 속이는 일에 능하여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을 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북쪽 하란 지방에 있는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가서 14년 동안 뼈가 빠지게 일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본인 또한 외삼촌에게 속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4년을 일한 끝에 마침내 재산을 모아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과거에 속였던 형 에서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이 있는 곳에 이르기 전, 강을 건너기에 앞서 먼저 양 떼를 선물로 보냅니다. 그 다음에는 하인들을 보내고, 부인들을 보내고, 자식들을 차례로 보냅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모든 소유를 앞서 보낸 뒤, 자기는 강을 건너지 않은 채 이쪽에 혼자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홀로 남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오셔서 시비를 거시는 장면이 바로 얍복강 나루터 사건입니다. 이제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때까지 야곱의 인생은 온통 속여서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여기서 속였다는 것은 무조건 거짓말을 했다는 뜻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며 살아왔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참으로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받으면 자신이 잘될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축복을 너무나 받고 싶어 한 나머지 머리를 써서 쟁취하려 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속이는 것’이라 말합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얻어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결국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비록 이삭에게 축복은 받았으나, 그 축복을 누려야 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부터는 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떻게든 이 땅으로 돌아오려 애를 썼고, 그 귀환의 결정적인 순간이 바로 얍복강이었습니다. 그 강에서 하나님은 드디어 ‘생사를 건 진검승부’를 하십니다. “네가 이제껏 너를 의지해 살아왔던 그 모든 인생 앞에서, 이제 나를 대면하여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쉽게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항복하라” 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 무릎을 꿇을 법도 한데, 결코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나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웬만해서는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야곱은 끝까지 씨름하며 버텼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의 환도뼈를 치셨고, 하나님을 이길 기세로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던 야곱은 비로소 이렇게 간구합니다. “하나님,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런 고백과 같습니다. “제가 이제껏 제 힘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려 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었고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자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려 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그곳에 결코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라 불러라.” 이스라엘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과 겨루었다’는 뜻이지만, 야곱의 맥락에서 보면 이는 “이제 나는 더 이상 속이는 자가 아니라,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자가 되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야곱은 당시 기준으로 보면 라반의 집에서 큰 부를 이루고 가족을 꾸린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야곱을 통해 두 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가 끝까지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갈망했다는 점입니다. 밖에서 모은 재산을 가지고 적당히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 성취를 소망했습니다. 또 하나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씨름과 제자의
그래서 하나님이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이요, 그리고 속이는 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그 뜻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너는 마치 야곱과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너는 너와 씨름한 자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너는 얍복강에서 씨름을 해보았구나.”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는 말은,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했던 것처럼 나다나엘 또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영적인 씨름을 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무화과나무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들, 예컨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거기서 단을 쌓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하는 장면들을 기억하신다면, 이 나무 아래라는 장소는 당시 경건한 이들이 묵상을 하며 하나님 앞에 그분의 예언과 말씀을 깊이 상고하던 곳이었음을 대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너를 보았다”는 말은, “야곱이 얍복강 앞에서 싸웠던 것처럼, 너에게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싸웠던 씨름이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점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은 자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던, 그리고 가나안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나다나엘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당시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씨름은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나안에만 들어가고 싶어 했던 것이 당시의 이스라엘입니다. 즉, 자기 힘으로 하나님 앞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율법을 의지한다”라고 표현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옳고 의롭게 살아서, 그 의를 공로 삼아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 당시의 사람들이라면, 나다나엘이 말하는 바는 다릅니다. 그 씨름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환도뼈가 부러지지 않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으며, 내 힘과 자랑과 술수, 그리고 속이는 힘을 버리지 않고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장면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마주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이며, 얍복강 앞에서 자기의 환도뼈가 부러진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그런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힘을 단 요만큼이라도 아직 의지하고 있는 한,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여러분은 먼저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신 “넌 참 이스라엘이고, 속이는 것이 없는 자다”라는 말은 칭찬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넌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진 자로구나”라는 뜻과 같습니다. “너는 너 자신의 힘으로는 별것 아니로구나” 하는 말씀이지요. 우리 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너는 죄인이다”라는 뜻입니다. 나다나엘은 자기를 이토록 뚫어지게 아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놀라는 것입니다. “나를 어찌 아십니까? 내가 바로 그 야곱이고, 내가 바로 그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만 하는 바로 그 사람임을 어찌 아셨습니까?”
 
나다나엘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메시아를 대망하며, 자기 자신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갈망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너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여.” 나다나엘이 묻습니다. “주여,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의 얍복강 나루터를 내가 보았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 그때 나다나엘은 항복합니다. “이분은 정말 메시아구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임금이십니다.”
 
야곱의 예언 성취와 이스라엘로의 부름
그런데 왜 베들레헴에 대해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서 누구에 대해 예언을 하느냐 하면, 바로 유다 지파와 다윗, 그리고 베들레헴에 대해 예언합니다. “유다 지파에서 홀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즉, 유다 지파를 통해 왕이 날 것이고 그 왕을 통해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예언한 사람이 바로 야곱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다나엘은 그 야곱의 언약을 몸소 이루시고 성취하신 분 앞에 서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거대한 뿌리가 풀렸는데, 그 나머지 지엽적인 문제가 무슨 걸림돌이 되겠습니까?
 
마치 사도 바울이 로마서나 히브리서에서 은혜와 율법에 대해, 혹은 아브라함과 모세를 대조하며 이야기할 때의 논리와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훨씬 먼저 은혜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나온 율법이 어찌 그 은혜를 폐하겠느냐”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베들레헴이라는 예언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야곱이 유다 지파에 대해 예언한 것을 어찌 능가할 수 있겠느냐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바꾸어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나다나엘은 내 앞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던 바로 그분임을 안 것입니다. 그분께서 지금 나에게도 “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음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옛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셨던 그분이 지금 나다나엘에게 “너의 이름은 참 이스라엘이다”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저 역시 나다나엘과 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 무엇이라 부르시겠습니까? “너희야말로 참 이스라엘이요, 내 안에 속이는 것이 없는 자로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거짓말을 전혀 안 했다거나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고 고백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에 있어 아주 중요한 원리로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나다나엘은 단번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분이 다윗의 언약을 이루신 분이다. 다윗을 통하여 오시기로 한 바로 그분이 이분이시다”라고 말입니다.
 
베델의 환상보다 일: 열린 하늘과 인자
이쯤 되면 이제 대화가 끝날 때가 되었는데, 사실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나다나엘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지 않으시고 아주 놀라운 단계로 한 번 더 업그레이드를 하십니다. 50절부터 51절 말씀을 한번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함으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 즉 ‘네가 얍복강 사건을 거쳤다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말씀하시니 네가 놀라며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인데, 그 큰 일이 5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아마 ‘이제 되었구나. 드디어 메시아를 만났으니 우리 유대인들은 이제 해방을 맞겠고 로마로부터 벗어나겠구나’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문제를 거기서 끝내지 않으시고 더 큰 일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인자 위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표현하십니다. 이 구절을 접하자마자 우리는 금방 야곱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야곱이 에서와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가다가 루스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하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가나안의 한 지점인데, 나중에 그 이름을 베델로 바꾸게 됩니다. 그곳에 도착해서 너무 피곤하니까 돌 하나를 베개 삼아 잠이 듭니다.
 
참으로 불쌍한 처지이지요. 돌베개를 베고 자야 하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신세입니다. 부모도 떠났고 자기를 돌봐줄 이 하나 없으며 주위는 온통 대적뿐입니다. 언제 목숨을 취하러 올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 누워 있을 때 꿈을 꿉니다.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땅에까지 쭉 내려와 있는데, 그곳을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입니다. 그리고 그 꿈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겠다.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에게 주겠다.” 이런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나님, 저를 지켜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면, 제가 이 자리에 제단을 쌓고 앞으로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하는 장면이 바로 야곱의 돌베개와 하늘 사닥다리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 본문과 아주 재미있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이 가장 힘든 가운데 누워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오셔서 “네 형과 아버지가 네 목숨을 노리고 쫓아올 텐데 어찌하려고 하느냐. 이제부터 내가 너를 지켜 보호하겠으니 걱정 말아라”라고 말씀하시거나, 그 힘든 처지를 위로해 주실 법도 한데 그러지 않으십니다. 대신 한 가지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너와 언약을 맺겠다.” 아브라함과 맺은 그 약속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지금 야곱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쫓겨나는 사람에게 “이 약속을 네게 이루어 주겠다”고 하시니, 도대체 약 올리시는 것도 아니고 왜 그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말은 “너는 여기서 쫓겨나가지만, 이 약속만큼은 내가 반드시 이루겠다”는 뜻입니다. 너로서는 도저히 약속을 이룰 수 있는 아무런 조건과 힘이 없어지겠지만, 내가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즉, 하나님 없이는 네가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약속대로 야곱은 돌아왔습니다. 얍복강을 건너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순서상 얍복강 사건이 결론이 아닙니까? 베델로 갔다가 14년 동안 고생한 끝에 다시 돌아와 얍복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니, 기승전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당연히 얍복강 사건이어야 합니다. 거기서 드디어 야곱이 몽땅 다 버리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제 뜻대로 살았으나 이제 정말 하나님께 돌아옵니다”라고 포기하며 가나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니까요.
 
하늘의 신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
그런데 왜 예수님은 “베델이 더 낫다”고 말씀을 하시느냐 말입니다. 베델 사건, 즉 사닥다리가 오르락내리락한 사건이 “더 큰 일이며 더 큰 것을 보리라”고 하시며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시면 야곱이 하란으로 갔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지만, 거기서 인생을 마치지 못합니다. 그는 애굽에 가서 죽습니다. 가나안이 약속의 땅이고 모든 기업이 있는 땅인데, 어떻게 야곱이 그 땅을 떠날 수 있었을까요?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게다가 먹을 것이 없어 쫓겨가서 사는 주제에,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바로 앞에 서서 그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야곱의 생애 마지막을 장식하는 너무나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거쳤던 베델이 그저 스쳐 지나갔던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야곱이 가나안을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베델 때문이었습니다. 베델에서 무엇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가나안보다 더 나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보다 더 큰 것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베델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사닥다리가 땅에 연결되어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내리며 하늘의 복을 보여주는 그 맛을 보았습니다. 비록 하룻밤 꿈이었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야곱에게는 너무나도 달콤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놀라 고백하기를, “이곳이야말로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며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바로 그곳이구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단을 쌓고 기름을 부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했습니다. 그 하룻밤의 강렬한 추억이 그로 하여금 가나안을 떠나게 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서도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렇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살고 있었으나 그곳을 마치 나그네처럼 여기며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야곱은 그 꿈속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것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길을 흔쾌히 받아들였을까요? 그리고 오히려 바로에게 축복했을까요?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했기에 하룻밤의 꿈인데도 인생을 바꾸어 놓았을까요?
 
그런데 오늘 여기 새로운 베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야곱의 이야기와는 다른 새로운 특징이 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에는 하늘부터 땅까지 ‘사닥다리’가 있었지만, 오늘 읽은 본문에는 사닥다리가 없습니다.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연결된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룻밤 꿈에 사닥다리로 하늘이 열린 것을 보았던 야곱도 평생 소중히 여겼던 가나안을 뒤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 알아 당대 가장 강성했던 왕을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하늘이 아예 열려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사닥다리가 되셔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일장춘몽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룻밤 왔다가 아침에 떠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린 하늘 아래 살아가는 성도의 확신과 기쁨
주님이 말씀하시듯이, 마태복음 28장의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바로 그분이 우리의 사닥다리가 되셔서 하늘과 땅을 이어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하늘이 열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환상을 보는 사람처럼 하늘에 무지개가 피고 보석이 보이는 그런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진정한 의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에 연결시키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오해하듯 예수님이 그저 위아래를 왔다 갔다 하게 도와주는 다리 역할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처럼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여러분이 땅에 있다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길만 놔주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하늘과 땅을 만나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하늘에 계셨던 분으로서 내려오셨고 그 내려오신 분이 곧 올라가 계신 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제 표현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려오셨다가 나중에 올라가실 분”이 아니라, “내려오신 그분이 바로 올라가 계신 분”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이 열리고 우리와 교제하기 시작했을 때, 하늘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쏟아 부어졌으며 동시에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늘에 올리셔서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도 쓰지 못했던, 그 누구도 그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었던 바로 그 이름, “세상에 다른 이름이 없다”고 하는 예수의 이름입니다. 하늘이 열려 있는 그 이름 안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하늘이 열려 있고 그 눈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면, 제자들과 성도들은 다른 곳을 볼 필요도 없고 의식할 필요도 없으며 남의 눈치를 보며 기죽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늘이 열려 있는 사람의 특징은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 더 이상 여러분을 불안하게 하거나 공포로 몰아넣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해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이 열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고백하고 알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들이 신비적인 부분이 있어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하늘이 열렸다는데 저는 아무리 봐도 천장밖에 안 보입니다”라고 하실 분들을 위해 조금 더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거룩과 사랑의 잔치
여러분,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물론 영적인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과 사랑과 풍성하심이 지금 열린 하늘을 통해 우리에게 쏟아 부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의 거룩이 우리의 거룩이 되고,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됩니다. 기독교인은 스스로 “의를 이루어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루어진 의를,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회복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회복이 필요하냐 하면, 우리 안에 하도 더덕더덕 붙인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옷을 입으려면 먼저 더러운 옷을 벗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따라갈 뿐입니다.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주님의 거룩함이 열린 하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내 안의 더러움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부인하게 됩니다. 죄된 나를 거듭 확인하며 “하나님, 이러한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이지요. 성경은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을 죄인이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거룩을 하늘로부터 보았기에 우리 자신을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그래서 창조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벗겨내는 일이고 회개하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일을 목표를 정해놓고 달려가는 일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거룩해질 거야” 결심하고 거룩을 향해 뛰어가는 것이 예수를 믿는 일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품에 안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분이 안아주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음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자랑으로 삼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기도하고 그분의 이름으로만 살아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신 그 기쁨이 우리에게 쏟아집니다. 주님은 무엇을 기뻐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자녀들이 구원받는 것,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그 기쁨과 사랑이 우리에게 쏟아집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사람들입니까? 하늘은 이미 열렸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비로소 열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열렸습니다. 그 하늘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고 있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걸음마다 고통과 답답함과 속상함으로 이 땅에 탄식을 쏟아내며 사십니까, 아니면 하늘을 보십니까? 하늘을 보며 나의 죄된 모습을 살피게 된다면 하늘에서 오는 거룩과 기쁨과 사랑을 만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을 받지 않고는 우리의 것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기쁨이 쏟아지는데 세상일이 좀 안 된다고 짜증을 부리는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가정의 일이 아무리 심각하고 힘들어도, 그것 때문에 내가 아등바등했다는 사실이 주님 앞에 서면 “아, 내가 또 잘못 생각했구나, 아직도 이것을 버리지 못했구나”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돌아보신 다음에는, 우리나라 성도들이 제일 못하는 것 하나를 좀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어릴 때 그랬는데, 아이스크림을 사주면 아까워서 먹지도 못하고 살짝 핥기만 하다가 결국 다 녹아서 버리곤 했지요. 왜 예수를 그렇게 믿으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두 번째 아이스크림도 주시고 세 번째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사랑을 마음껏 먹고 마시십시오.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먹고, 그분이 주시는 사랑과 거룩을 먹으십시오. 그것들이 우리의 것임을 주장하면서, “나는 실패한 인생 같으나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고, “이 땅에서는 버림받은 자 같으나 하나님의 품에 안긴 자”라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십시오. 세상이 나를 거꾸러뜨리려 우겨쌈을 당하고 모두가 나를 미워하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기쁨 가운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오늘 우리가 상고한 주의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다나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참 이스라엘이요 속이는 것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일진대, 이제 참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천국에 있는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는데 왜 우리는 이 땅에서 기뻐하지 못합니까? 하늘은 이미 열려 있고 하늘에 있는 이들은 영광을 돌리는데 왜 우리는 그러지 못합니까? 그들은 안전하기에 세상 어떤 것에도 끄떡하지 않음을 고백하는데, 우리 역시 그 고백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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