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장 8절에서 17절까지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내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서론: 특별한 공간, 에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혼돈과 공허 가운데 질서를 세우시고 그 안을 풍성히 채우심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저 세상 아무 곳에나 두어 살게 하지 않으시고, 오늘 본문에 따르면 아주 특별한 지역 하나를 창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이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밖의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지으실 때 이미 모든 사람이 충분히 거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에덴'이라 부르는 그 특별한 지역을 따로 조성하셨습니다.
에덴의 목적: 하나님 나라의 시작점
하나님의 본래 목적은 단순히 사람들이 특정 구역에 모여 안락하게 지내는 것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으며, 세상을 충만하게 하고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류를 지으실 때부터 온 세상에 당신의 뜻과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이라는 특별한 처소를 만드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단순히 인간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거나 살기 좋은 곳을 만들어 주시려는 편의적 의도가 아닙니다. 그곳에 담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즉, 에덴은 불편한 지구 환경을 피해 조금 더 쾌적한 곳에서 살게 하시려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동산": 소유와 임재의 의미
에덴이라는 특정 구역을 설정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깊이 살피는 것은 우리의 신앙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이 장소는 흔히 '에덴동산'이라 불리지만, 실제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하나님의 동산"입니다. 에덴은 아담이 거주한 곳이었으나 아담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동산이며 여호와의 동산이라 불렸습니다. 에스겔 28장 13절은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라고 기록하며 각종 보석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에스겔 31장, 이사야 51장, 그리고 창세기의 여러 대목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성경이 의도적으로 에덴을 '하나님의 동산'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동산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사람을 위하여 지어진 곳일지라도 그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또한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즉 하나님의 집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그곳에 사람을 두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친밀히 소통하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와 온전한 조화를 이루게 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을 통치하게 하시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거룩한 장소를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입니다.
에덴과 하늘 성소의 연결
이 사실을 조금 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보여주려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늘과 땅(천지)'을 말할 때 '하늘'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기권(Sky)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의 성소'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늘 성소의 임재가 이 지상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곳이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물질세계에 거주하시는 첫 번째 양식으로 에덴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 겨자씨와 누룩처럼
이러한 맥락에서 에덴동산은 우리에게 성전과 같은 곳입니다. 성전이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특별한 구역으로 구별하심으로써 그곳을 당신의 임재가 머무는 하나님의 동산이자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담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실질적으로 경험하며 그분의 변치 않는 사랑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더불어 이 땅에서 실질적인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실 때 사용하신 누룩과 겨자씨의 비유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루고 새들이 그 깃들게 되듯, 하나님 나라 또한 작게 시작되어 전체로 확장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창조의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사람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에덴동산은 그 장대한 역사의 출발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만물이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셨고, 그 목적을 에덴에서부터 실행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이 인간의 생각과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 지구를 완벽히 셋업하신 뒤에 정복하라고 하실 것 같지만, 하나님은 한 곳을 택하여 구역을 정하시고 그곳에 임재하셔서 사람과 함께 거니시며 온 우주를 향한 그 나라의 행진을 시작하셨습니다.
"에덴"의 의미: 풍요 너머의 기쁨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에덴동산'이라는 명칭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비가 오지 않고 경작할 사람이 없어 식물이 자라지 못했던 세 가지 결핍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를 내리시고 사람을 창조하심으로 이 부재를 해결하셨고, 그 해결의 장소로 에덴을 정하셨습니다.
창조의 문제 해결: 식물, 사람, 물
에덴동산은 먹기 좋은 실과가 풍성하고, 그것을 관리할 아담이 있으며, 생명의 근원인 강물이 흘러나오는 곳입니다. 이 모든 것이 충만한 형태를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장엄하고 역동적인 장면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먹거리인 식물과 이를 경작할 사람, 그리고 생명력의 원천인 물의 문제를 에덴에서 완벽히 해결하셨습니다. 따라서 에덴은 외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에덴'이라는 단어 자체에 풍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사실 에덴은 '기쁨'이라는 의미를 더 강하게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에덴은 '기쁨의 동산'입니다. 물론 모든 것이 풍족하기에 누리는 기쁨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할 식물을 경작하고 풍부한 물을 공급받아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곳이니, 인간으로서 즐거워할 조건이 완벽히 갖추어진 곳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 구조적 유사성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에덴을 정의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에덴동산이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전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에덴동산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해 좀 더 깊이 보겠습니다. 이 에덴동산은 잘 알다시피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닫히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동산이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 성막을 방문한다고 가정하면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우선 “Holy”라고 표현할 수 있는 성소가 있고, “Holy of Holies”라고 일컬어지는 지성소가 붙어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커다란 휘장 하나가 위로부터 아래로 펼쳐져 있어서 이 두 장소를 나누고 있으며, 그것으로 지성소 안으로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막아 놓은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로막힌 휘장 앞에는 ‘그룹’이라고도 부르는 천사의 모양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즉, 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도록 지키고 있는 형상입니다.
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께서 그 동산 입구에 불 칼을 두시고 그룹들을 세워서 그들이 다시 들어올 수 없도록 하신 장면과 아주 유사합니다. 이처럼 지성소에도 아무도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에덴동산 자체가 하나님의 성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 지성소는 바로 하나님의 “시은좌”, 즉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므로, 에덴이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라는 뜻이 됩니다. 즉 이 지성소가 바로 에덴동산이라는 말씀입니다.
찢어진 휘장: 에덴으로의 회복된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의 일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주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단번에 찢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휘장이 찢어져서 지성소로 가는 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로 우리가 들어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늘 시민권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기에 이 사실이 마음에 크게 와닿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유대인으로 살아본 적이 있었다면 이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대제사장 한 명뿐이며, 그것도 일 년에 단 한 번,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도 대제사장의 발에 방울을 달고 들어가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들어갔다가 조금만 잘못되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 휘장이 찢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사실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느니라.” 이것이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으나, 성경에서 바울은 아주 놀랍게도 우리가 지금 하늘에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찬송가의 고백처럼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고난이 가득 찬 삶을 살더라도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험하고, 우리는 약해서 병에 시달리기도 하며, 아픔과 고통에 신음합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많은 고난으로 마음이 너무 힘들고 지쳐 이 땅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다고 생각할 때에도,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그곳이 바로 하늘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 하늘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존전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여러분은 감추어져 있는 하늘에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와 영원한 소유
이렇게 말씀드리면 좀 이해하기가 쉬우실 것입니다. 미국이 지금 강대국이라고 우길 수 있겠으나 역사를 보면 로마 같은 나라도 망했습니다. 미국도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이 나라도 여러 민족이 얽혀 있는 합중국인 하나의 나라일 뿐입니다. 앞으로 이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확신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입니다. 역사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흔들릴 수 있고 결국은 다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을 유일한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늘은 흔들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곳에 속해 있으므로, 여러분은 망하지 않는 나라에 속해 있는 백성인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항상 말씀을 드려도, 여러분은 이 땅에서 망할 것 같아 매일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걱정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지요? 그래서 바울이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집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너희는 하늘에 속해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이 하늘의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 한 너희는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것과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한, 우리는 흔들리고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가진 것을 모두 잃어버리거나 모든 소유가 없어지면 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순간에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조금 속되게 표현하면, 우리에게는 최소한 ‘본전’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어도 항상 본전은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살아볼 만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본전은 남는데, 그까짓 거 한번 해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잃어봤자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고 항상 가지고 가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에덴의 참된 기쁨: 하나님과의 동행
그러므로 하늘 성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성경은 아담이 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복을 참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풍성한 것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직접 아담과 함께 계시는 것, 즉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 있으므로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보통 우리의 소유로 인하여 즐거움을 느끼지만, 성경은 하나님 당신이 우리의 소유라면 어떠할 것 같은지를 우리에게 물어보고 계십니다. 하나님 당신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면 그때 우리의 기쁨은 어떤 것일까요? 매일 하나님과 거닐 수 있고, 매일 그분을 알아갈 수 있으며, 매일 그분의 선하심을 본받고 그 선하신 뜻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크나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에덴에서 누릴 수 있었던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본질: 사랑의 성취
여러분과 저도 이 기쁨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과연 기쁨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기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우리 속에서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디에 가장 관심을 가지며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가장 기쁩니까? 계획했던 일들을 이루어 내었을 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평소의 취미 생활을 하거나, 원했던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이루어졌을 때, 성취했을 때 우리는 기쁩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았을 때도 기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기쁨이라는 것은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우리가 어렵게 살았던 때에 손주를 키우시는 할머니가 계셨다면, 어느 날 저녁 귀한 고기를 구울 때 할머니 입으로 들어가는 고기는 아마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모두 다 손주들의 입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손주들에게는 할머니는 이미 많이 먹었다고 둘러대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할머니는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랬습니까? 고기를 싫어해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손주들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주가 먹는 것만 봐도 그것이 진정으로 기쁘신 것이며,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대상 전환: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기쁨이란 사랑이 이루어질 때, 즉 사랑이 그 목적을 성취할 때 우리에게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어떤 일이 여러분의 삶에서 실현되면 여러분은 기뻐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관심을 두고 좋아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하기 위해서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도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다면,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잘되는 것만이 여러분 기쁨의 전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쁨은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그 어디에도 항상 좋은 일만 생기는 인생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두렵고 힘든 일들이 다시 찾아오면 또다시 슬퍼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의 기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우리의 기쁨이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되돌아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구주라 믿으며 그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과연 여러분의 인생에서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이 우리 속에서 성취된다면, 그것이 우리 인생에 무엇이 되겠습니까? 네, 바로 우리에게 가장 기쁜 일이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 자체가 기쁨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고난 속에서의 기쁨: 바울의 역설
이것이 인생의 모든 여정이 그저 순탄하게 흘러가거나 항상 잘 풀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때로는 괴로울 수도 있고, 아주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분명한 확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붙들고 계시며,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비록 현실은 힘들고 고통이 따를지라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성경에서 고백했던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의 본질입니다. 바울이 아무런 생각 없이 무턱대고 기뻐했거나, 삶의 고통과 슬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 역시 성경을 통해 죽을 지경에 이를 만큼 힘들었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는 “나는 항상 기쁘다”라고 말했습니다. 실로 놀라운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습니까? 그의 기쁨의 근원과 방향, 그리고 그 이유가 자기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록 고통을 당할지라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이 그의 인생에서 터져 나올 때, 그는 그것을 기쁨이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힘들더라도 여러분이 죄와 싸울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죄와 싸우다 조금 흔들릴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버티며 조금이나마 그 죄에 저항해 보았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특하게 보셨다는 믿음과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능력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셨다는 사실이 깨달아져 기쁨이 샘솟는 것입니다. 화가 나지만 나를 힘들게 한 상대를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비록 속은 조금 쓰라릴지라도 그것이 내 인생의 진정한 기쁨이 됩니다. 짜증스러운 상황 속에서 모든 것을 뒤엎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예수님을 기억하고 참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오늘 하루 겨우 참아냈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신자인 우리에게 주어진 실재적인 기쁨이며 참으로 복된 인생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어떨 때는 내가 예수를 믿었는데 복은 정작 옆 사람이 받는 것처럼 보일 때가 참 많습니다. 내가 인내함으로 상대방이 영문도 모른 채 즐거움을 누리기도 합니다. 나의 양보로 상대방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기쁜 인생’이라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에서 산다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주님 안에서, 하늘의 성소에서 살아가고 있는 고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구별된 공간, 안식의 시작
이제 에덴동산에서의 “동산”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동산 (Gan)의 의미: 구별과 거룩
동산은 히브리어로 ‘간(Ga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을 히브리어로는 ‘간 에덴(Gan Eden)’이라 부릅니다. 참고로 ‘집’은 히브리어로 ‘베드(Bayith)’라고 합니다. 베들레헴이 ‘떡의 집’이라는 뜻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간 에덴’은 말 그대로 에덴의 동산 혹은 정원을 의미하며 영어로는 가든(Garden)이 됩니다.
영어 성경에서 이 단어를 ‘Garden’으로 번역한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단순히 조그마한 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역이 정해져 있고 울타리나 경계가 있으며 문을 통해 출입하는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훗날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쫓겨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그 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즉, 경계와 울타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에덴동산의 특징입니다. 왜 에덴을 이렇게 만드셨을까요? 외부의 적으로부터 아담과 하와를 보호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이유는 울타리를 통해 이 장소가 ‘구별’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동산 밖에서는 식물들이 야생의 상태로 자라지만, 이 울타리 안에서는 아담이 식물들을 경작하며 작물을 가꾸게 됩니다. 이것은 무언가가 구별되었음을 나타내며, 성경에서 이 구별을 일컬어 ‘거룩’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에 안식하시며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시간을 구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시간을 넘어 공간을 구별하시고 거룩하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에덴에 '두심': 안식(누아흐)의 시작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이끌어 이 에덴동산에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두다’라는 표현은 매우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전에 안식이라는 뜻의 ‘샤바트(Sabbath)’와 같은 의미를 지닌 ‘누아흐(Nuach)’라는 단어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이끌어 이곳에 두셨을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누아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하나님의 안식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안식이 시작되는 장소이며,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 그 안식을 펼쳐가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중단 없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역할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안식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몸소 시작하시고 친히 이루어 나가시겠다는 사실이 오늘 본문에 드러나 있습니다. 아담을 이끌어 에덴에 두셨다는 말씀 속에는, 이 장소로부터 창조의 목적을 시작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작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시작하신 이 창조의 목적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지겠습니까? 반드시 성취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곧 사탄이 등장하고 인간의 죄가 나타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덴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멈추지는 않습니다. 그 목적은 중단 없이 전진하여 반드시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고 놀라운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결정적인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기록합니다. “믿음의 주여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말씀을 더 정확히 번역하면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셔서 안식을 시작하셨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일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성경은 이어 말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안식을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이 동원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한 기쁨이 성취될 것이며,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모든 사역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은 에덴동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결국 에덴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사명: 에덴 성전의 제사장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어 안식하게 하신 것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함께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이를 우리 식으로 깊이 있게 번역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서 안식하게 하시고, 그곳을 섬기며 지키게 하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경작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바드(Abad)’인데, 주로 ‘일하다’ 혹은 ‘섬기다’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또한 ‘지키다’라는 뜻의 ‘샤마르(Samar)’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두 단어가 한 문장에서 함께 쓰이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이 함께 등장하는 중요한 대목이 바로 민수기 3장입니다. 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사역을 설명할 때 “시무하되(아바드)”와 “맡아 지키며(샤마르)”라는 단어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즉, 성전 안에서 제사장이 하는 일이 바로 ‘섬기고(경작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에덴은 하나님의 성전이었으며, 아담은 그 성전의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하늘 성소가 이 땅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지가 여기서 명확해집니다. 에덴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과 에스겔서의 환상을 보면,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성소, 곧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 강가에 위치합니다. 아담은 바로 그 하나님의 성전 한복판에 세워져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안식을 누렸던 것입니다.
참된 제사: 하나님과의 교제와 영적 예배
즉, 아담은 지금 하나님의 성전에 두어져서 하나님의 안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안식이 바로 제사장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안식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내용 중 일부를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이 창세기의 내용처럼 안식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성소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성소에 무슨 일을 하러 들어가는 것입니까? 아담을 지금 이끌어서 에덴에 두셔서 무엇을 하게 하신다고요? 네, 바로 제사장의 일을 아담과 저희들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는 제사장의 일을 하기 위해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
이 말씀은 단순히 베드로 사도가 여러분과 저를 조금 띄워주려고 우리에게 과장하여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디어 이루어지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가 바로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것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제사장인 줄을 모르고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면, 이것처럼 우리의 인생에서 엄청난 손실은 없을 것입니다.
아담이 제사장이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일 중에는 동물과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일도 있고, 아내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이들을 찾으실 때 일어난 일들일 것입니다. 창세기 3장 8절의 내용입니다.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여기에 사용된 “거니신다”라는 말은 ‘할라크(Halak)’라는 히브리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할라크’라는 단어가 이 구절에서는 ‘얄라크(yālaḵ)’라는 동사의 분사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동사를 분사형으로 사용함으로써, 이 일이 한 번에 그친 일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된 일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거니시다”라는 말이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기 위해 한 번 동산에 내려오신 게 아니라, 꾸준하게 항상 그렇게 에덴을 찾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아담이 꾸준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가 그곳에서 거니시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다는 뜻입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면 우리는 주로 희생 제사를 지내며 짐승들을 잡고 불태우는 직분을 맡은 자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제사장의 역할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에덴동산에서 처음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된 이 아담에게 있어서는 죄를 속하는 제사가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한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전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동행하고,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삼는 바로 그 제사를 드리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죄가 없는 때였으니까요. 그러므로 그 제사장의 최고의 일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일, 그분과 함께 거니는 일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그는 에덴의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기쁨의 제사장, 하나님과 동행하고 경배하며 감사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살아가며, 그 모든 것으로 만족하고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지금 드리고 있는 제사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에서 설명하는 바로 그 제사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 말씀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이 신령한 제사는 짐승을 희생시키는 제사가 아닙니다. 이 신령한 제사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이야기했던 그 “영적 예배”, 즉 우리 자신을 모두 드리는 예배, 우리 모두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온전히 드리는 바로 그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에덴의 아담은 우리가 무엇을 다시 찾아야 하고 무엇을 회복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에덴의 아담과 우리 사이에는 굉장히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아담과 하나님 사이의 죄라는 장벽이 우리들에게는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죄조차도 이겨 버린 그 회복을 우리가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아담이 마땅히 드려야 했던 기쁨의 제사, 사랑의 제사, 그의 모든 것을 드리는 신령한 제사를 지금 우리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드렸던 그 죽음의 제사, 피의 제사로 완성하신 그 은혜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처음 창조된 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같이 되어, 더 이상 피의 제사가 필요 없는 신령한 제사를 바로 드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드려서 단번에 속죄 제사를 마치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저는 이제 ‘또 죄를 지어서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어떻게 내 인생 전부를 주님 앞에 드릴 것인가, 나의 인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의미가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살 것인가 하는 것들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아담은 실패할 수 있었고 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의 제사, 사랑의 제사를 위해서 피의 제사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드리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은 실패할 수 없는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전을 지키고 섬기는 제사장의 삶
여러분, 아담은 성전을 지키는 자이기도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과의 말할 수 없는 그 사랑의 관계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을 깨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성전을 지키는 자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성전을 지키는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된 것은 물론 감사한 일이지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 생각에는 단순히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그런 쉽고 간단한 일처럼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기도라는 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창세기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까지 실로 아주 많고 어마어마한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 기도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실로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을 열어서 주님만 부르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니까, 그 하나님이 마치 우리 기도를 당연히 들으시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의 기도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 친밀함을 방해하는 것, 그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죽이는 일을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계속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서 그 성전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것, 이것은 어찌 보면 꽤 거창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성전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는 것들은 참으로 소소한 것들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게으름과 싸웁니다. 성경을 결심하고 읽으려고 하면 꼭 전화가 걸려옵니다. 오늘 저녁에는 가족들이 모여서 가정 예배를 드리기로 작정을 했지만, 저녁을 먹고 좀 쉬다 보면 꼭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에야 생각이 나지요. 저도 그렇게 생활할 때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갈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게으른 본성들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약간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가끔 설교할 때 제가 여러분께 “하나님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고 읽읍시다”라고 권면했을 때, 어떤 분은 그 말씀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성경 읽기 결심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것이지요. 내가 자발적으로 읽으려고 결심했는데 목사의 권유를 받으니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적당하면 회개하기보다는 주로 반발을 하게 됩니다. 지적당한 사실 자체가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비슷할 것입니다. 이런, 어떻게 보면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자존심이 바로 죄의 근본적인 모습일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이런 작은 것들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으로 등장할 때가 우리 일상에서는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에 힘을 내지 않는 것 역시도 게으름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의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일이라는 것은 정말 간단한 것입니다. 오셔서 예배하고 다시 집으로 가시면 됩니다. 뭐가 더 있겠습니까?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하고, 그리고 서로 교제하고 집으로 돌아가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예배당 구석구석마다 사실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오늘 편하게 앉아서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그러면 이 의자들은 누가 놓았을까요?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는 절대로 응답해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이 이 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동참하기를 항상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여러분과 저에게는 커다란 유익이니까요. 이 예배를 준비하기 위하여 누군가의 손길과 땀이 있었습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예배 후에 예배당에는 언제나 쓰레기가 생겨나고 청소할 일이 생깁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가르쳐야 할 자녀들이 있고, 여러분께서 기도해야 할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찾으려고 하면 아마 가장 일이 많은 곳일 것입니다. 성전을 섬긴다는 것은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가 소홀히 하게 되면 우리는 편하게 예수를 믿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이 그 일들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실 일들을 멈추실 분은 아니시지요. 그러나 여러분이 그 일에 동참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누릴 수 있는 그 하나님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위로와 영광과 거룩과 기쁨 또한 놓칠 수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교사가 필요한 곳에 나의 실력도 필요하지만 나의 격려도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수고에 감사하여 내가 한번 위로를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시면 그것을 억누르지 마세요. 그분들에게는 위로와 감사가 필요합니다. 교회를 위해 항상 수고하는 어떤 분들이나 구역장님들이 생각나신다면, 그 마음은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 감사의 마음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 격려와 칭칭과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사장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키고 돌보아야 합니다.
제사장의 기업: 하나님 자신
마지막으로 제사장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 여러분께 드리는 위로는 이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무엇으로 살았나요? 제사장이 속한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이 없었습니다.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사장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제사장인 우리에게도 약속하십니다. “너의 기업은, 너의 재산은, 너의 모든 것은 바로 나, 하나님이다.” 여러분의 힘은, 여러분의 모든 근원은, 여러분이 이 땅을 살 수 있는 모든 힘은, 곧 나의 기업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제사장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에게 허락하시는 그 은혜가 놀랍고 또 놀랍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의 자리에 서게 해주셨으니, 과연 우리가 제사장같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다시 한번 말씀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이 무엇이며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도 기억하게 해 주시옵소서. 내가 제사장이기에 나의 힘이 무엇인지도 놓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신 하나님이시여, 나의 생명보다 귀하신 주님이시여,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오니 우리가 늘 주님께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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