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장 4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아멘.
창조의 목적, 하나님의 안식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창조는 사람이 지음을 받은 여섯째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신 일곱째 날에 비로소 끝이 납니다. 이 말씀은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안식, 하나님의 안식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한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내 이웃을 영원히 아낀다”, 이런 내용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안식에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그 안식에 들어섰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이 새로운 창조를 완성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물론 구원은 여러 가지 이야기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로부터 나를 구원하였다”,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이러한 모든 고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 이상으로 창세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정말 중요한 구원의 의미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게 하셨다”라는 선언의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만 하는 일일까요. 정말 간절히 그 안식의 완성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아멘, 아멘!”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 일이 나에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뜻이죠. “이 세상은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라고 하는 연약한 고백의 찬송만을 계속해서 부를 것이 아니고, “내가 이제 주님의 안식에 들어갑니다”라고 하는 기쁨의 찬송으로 우리의 노래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의 주제: 창세기 2장의 의미
오늘의 본문은 이전 구절에 비해 말씀의 톤이 조금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앞에서 읽었듯이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다”라고 하시면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창조의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반복해서 말씀하시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옛날 개역 성경에서는 이를 “대략이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말씀이 의미하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구조에 대해서 조금 다룰 예정입니다. 그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칭하는 이름이 바뀐 부분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세 번째로는 왜 비가 오지 않았는지, 그리고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땅에 채소가 없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사람이 창조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주제: '톨레도트'와 창세기의 구조
첫 번째로 오늘 본문에 있는 “내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톨레도트”(תּוֹלְדָה, H8435)라는 단어입니다. 이 “톨레도트”는 창세기를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신 분들에게는 익숙한 단어일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만 열한 번이나 사용되었는데요, 그러나 한글 성경의 번역이 각각 다르게 되어있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담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할 때, 그 족보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가 바로 오늘 사용된 “톨레도트”입니다. 또, 이삭의 “족보”가 이렇다, 데라의 “후손”이 이러하다, 할 때의 “후손”이라는 단어도 “톨레도트”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장에서는 계보라고도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 단어의 뜻은 어원상으로 보면 “무엇인가를 낳았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의미에서 시작하여, 어떤 후손들이 태어났으며, 그들에게 후대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다는 뜻을 가진 단어로 의미가 확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여기서 말하는 톨레도트의 주어와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서로 관계가 없는 경우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11장에서 보시겠지만, 데라의 톨레도트에서 데라가 아니라 그의 후손인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톨레도트라는 단어가 사용된 문장의 주어와 그 서술하는 내용은 조금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문장 다음에는 누구의 이야기가 나올까요? 네, 바로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야기가 나오며, 그중에서도 요셉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삭의 톨레도트에서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실까요? 네 바로 야곱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톨레도트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그전에 있었던 것을 받아서 그 이름으로 인해 탄생한 그다음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 이유로 창세기 1장에서는 사용되지 못했던 이 단어가 이제 2장 4절에서 처음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2장 4절은 앞의 1장의 내용을 받으면서, 1장에서 나온 하늘과 땅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다음의 이야기로 넘어가겠다는 의미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톨레도트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그 안식, 그 마지막 창조의 과정에 나오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제: '여호와 하나님' - 언약적 관계의 이름
이것을 조금 더 확실하고 확연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 바로 이 장면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은 ‘엘로힘’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전체는 모두 엘로힘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능력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2장 4절로 넘어오면서부터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라는 구절에서 처음으로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성경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잘 발견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몇 번의 예외가 있지만 이 호칭을 4장 마지막 절까지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에 말씀드릴 내용에서 이 예외의 이유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하나님(엘로힘)이라고 불러도 될 것인데 구태여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는 관계성을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 기자가 의도적으로 사용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특히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특징지어 설명하는 호칭입니다.
'여호와' 이름의 의미: 언약의 하나님
이 이름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계성이 가장 잘 보여지는 구절이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구절이죠.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모세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에게 누가 너를 우리에게 보냈다고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이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가 너를 보냈다고 이야기해라”라고 하시죠. 그럼 그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하나님의 존재는 모든 만물로부터 독립하여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이 단어 자체에는 미래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자이시며, 영원히 있으실 분, 즉 알파와 오메가라는 해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에서 이야기하는 “스스로 있는 자”는 이 문맥을 통해서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앞에서 사용된 “스스로 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시는 설명입니다. 15절입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러니까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신 하나님이 바로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이시며, 이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삭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그리고 야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관계일까요? 바로 언약을 맺은 관계입니다. 약속을 주신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을 창대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관계입니다. 바로 그것을 지금 이 성경 본문에서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그 이름 속에는 바로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바로 이 여호와라는 칭호를 창세기 2장에서 의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지금부터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어떠한 언약을 맺으시고, 또 그 언약을 어떻게 지켜나가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것이 오늘 살펴볼 창세기 2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2장의 아담의 이야기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어떤 관계를 맺으시는지,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어떤 이야기를 하시고, 어떤 약속을 주시며, 어떻게 동행하고 동반자가 되어 주시는지에 관한 내용이 나올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이 혼자 모든 것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났지만, 지금 이 2장에서는 사람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나아가시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관계의 기적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
이 호칭의 변화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깜짝 놀라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계신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거든요.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알게 되고 그와 관계를 맺는 방법은 사실 한 가지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존재에게로 찾아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 세계는 유한한 세계입니다. 이것은 쉽게 사라지기도 하고 변하며 우리가 매일 눈으로 보는 세계입니다. 공산주의에서 주장하는 유물론에서처럼, 이 세상에는 영적인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보이는 물질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물질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 세계를 연구하여 그 속에 숨어 있는 많은 질서와 법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조차도 그 물질세계 밖에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를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벗어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스스로 보여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들을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불려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고, 그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을 내가 고백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기적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강력한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그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항상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나에게 모든 것을 계시하셨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으로는 이를 의심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어떤 때는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 그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나’라는 존재를 이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내 인생이 그리스도 예수가 없이 끝나게 된다면, 내 몸과 내 시간들이 그냥 단순한 물질의 조합이었다가 그 물질의 해체로 끝난다면, 인간의 존재가 가지는 가치는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열심히 살 이유도 없고, 도덕과 의무를 지키며 살 이유도 없겠죠. 많은 철학자는 인간에게 이러한 도덕적 의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있다는 증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 무한한 세계가 없다면 인간은 구태여 도덕이라는 것을 지키려고 노력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저는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막 낭비하거나 허비하여 우리의 영혼을 불쌍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는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이신 그분이 바로 우리들과 관계를 맺으시겠다는 약속이며, 그 언약의 관계가 지금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이름의 부재: 타락과 왜곡된 하나님 지식
자, 그러면, 아까 말씀드렸던, “여호와”라는 이름이 잠시 성경에서 사라진 구절들에 대해 한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창세기에서 여호와란 이름이 사용되다가 딱 그 이름이 사라진 적이 있는데 바로 창세기 3장 2절부터 5절까지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때가 바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이 구절 전까지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 자신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사랑을 부어주시고, 동행하시며,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분으로 알았는데, 이 구절에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하와를 꾐으로써 그들의 삶을 제한하시고, 그들에게 무언가를 숨기시는 분으로,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이라고 생각할 때, 그 하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가 빠져버린 ‘하나님’이라는 이름만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잘못되었을 때 타락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역시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저와 여러분의 삶은 흔들리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명확하게 알면 알수록 여러분과 저의 삶은 굳건히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면 어찌 우리가 놀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변덕스럽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만 무슨 일이든지 해 버리시고, 또한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오해하면 우리는 당장 불안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는 것이 바로 타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은 단순히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다 책임을 전가해서 그 타락의 원인을 모두 떠넘길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했으며, 그때 바로 우리의 타락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잊어버린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잊지 않으시고, 그 이름을 결국은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고 당신께서 손수 그 이름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던 그 하나님이 그 언약을 포기하거나 파괴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뜻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시며 우리의 위치를 알게 하시고, 우리의 존재 인식을 완전히 바꾸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지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한다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앎'의 참된 의미
그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셨던 한국 가수들 중에 조용필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저도 이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히트했던 노래가 어떤 것이 있으며, 나이와 지금 살고 있는 장소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며, 여러분과 이분에 대해 아는 바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젊은 친구들에게는 비교하지 못하겠지만, BTS라는 한국의 유명한 청년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러한 지식 정도로 그들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라는 말씀과 같은 수준일까요? 같을 수가 없겠지요.
성경 구절을 외우고, 찬송을 따라 부르는 정도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쩌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기에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그 하나님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깊은 영향을 받아야 하며, 그분과 실질적인 대화와 소통이 있어야 하며, 그분과 동행해야 하는 길을 참으로 우리가 걷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과 직결될 만큼 중요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단순 논리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하나님을 아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는 의미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연애를 해서 결혼을 약속한 신부의 이름을 모르는 신랑과 같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 번째 주제: 비와 식물의 부재 (창 2:5)
이러한 배경으로 오늘 본문을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5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 구절 전의 2장 4절에서 재미있는 점이 발견됩니다. 이 구절에서 천지 창조의 내용을 한 번 더 반복해서 말씀하셨는데,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선포하신 창세기 1장에서와는 달리 이 2장에서는 땅과 하늘로 순서를 바꾸어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제부터는 땅의 얘기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땅의 이야기 중 한 부분이 이 구절에서 시작됩니다.
우선, 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직 그 땅에 초목이 없었다고 하십니다. 초목이라 함은 야생에서 자라는 풀들을 일컫습니다. 즉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 자라나는 모든 나무나 식물들을 다 초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과 대조적인 것은 인간이 재배하여 음식물로 사용되는 식물을 밭에서 기른 채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다 없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식물들이 자라기 위해 필요한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채소를 재배해야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해석: 문자적 순서인가, 신학적 주제인가?
이 표현이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만, 우리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당연히 비로 물이 공급되지도 않았고, 그 식물을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니 식물이 자랄 수도 그 식물을 재배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는 천지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일째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 봅시다. 그날의 기록입니다.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대로라면 그날에 모든 채소와 식물은 땅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구절에서는 아직 그 식물들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구절의 시간순은 3일째 바로 전이라는 것이죠. 그렇죠? 3일째에 일어났다고 기록된 일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표현 방식입니다.
성경에서는 단순히 지금부터 풀과 채소를 내어라라고 하셨고 그대로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채소를 내어라라고 하셨을 때, 땅에서는 당근과 배추가 즉시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아서 그 채소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시사해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공부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기계적으로 이 창세기를 이해하려는 실수를 범하기 쉬운지를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처음 창세기를 읽으면, 그 6일의 창조 동안 하나님께서 정말로 엄청나고 많은 일들을 하셨는지, 그 기간 얼마나 수고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보다도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3일째에 땅이 채소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그냥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마술처럼 반응하여 땅이 이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한 것이 아니라, 이 속에 필요한 수많은 과정들을 거쳤음을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선 비가 내려야만 했습니다. 모든 자연 현상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에 명령하여 식물을 내라 하셨을 때, 그 식물이 나오는 과정 속에 자연 현상이 같이 역사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 의미들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의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George Kline)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로 말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6일 동안의 창조는 그 모든 과정을 요약해서 말씀하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시간의 순서대로 이야기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리고 그 요약한 과정 속에서는 이에 수반되어야 할 모든 자연 현상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식물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비만 내리면 나올까요? 아닙니다. 햇빛도 비추어져야 합니다. 그럼 그 햇빛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해가 만들어진 것은 넷째 날입니다. 시간 순서대로라면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이 창세기의 기록의 6일 동안의 창조는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주제들을 이 순서에 따라서 설명하려 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의 성경 이해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알게 해줍니다. 여러분과 저는 세상이 6일 동안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6일의 순서대로 창조의 일들을 나열하는 것은, 우리에게 과학적으로 이해 가능한 창조의 사건을 시간적으로 풀어내신 것이 아니라, 이 하루하루의 창조 사역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성,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 그리고 그 영광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어떻게 이 우주가 6일 만에 창조되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6일 동안에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넷째 날에 만들어진 해가 뜨고 지기 전인 그 이전 날에도 아침과 저녁이 반복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이야기 속에 시간적 사실관계가 아닌 중요한 주제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을 본다면, 그 속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은 각각의 날에 무엇이 무슨 순서대로 만들어졌느냐가 아니라, 그 만들어진 것들의 의미와 내용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광명체라고 이름을 부르시고 해와 달이라고 부르지 않으시는가, 왜 하나님은 궁창을 나누시는가, 또는 물이 생긴 후에 마지막에는 그 물이 다시 사라지고 바다는 있지 않은가 하는 여러 가지 의미와 그 관계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의 구조와 시간 문제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인 2장을 살펴보겠습니다. 2장의 내용 역시도 마치 순서대로 기록한 것 같아 보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그래서 비가 오고, 식물이 생기고, 그다음엔 사람을 만드셨고, 그 후에 에덴동산을 만드셨으며, 만드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셨다는 순서로 기록되었죠. 이것을 시간의 순서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 접속사, ‘와우(ו)’ 때문입니다. 이 단어가 히브리 성경에 사용될 때는 시간의 순서를 말하는 접속사이기 때문에 이 문장들을 모두 일어난 순서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볼 수 없는 구절 하나가 이 내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2장 19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여러분이 읽으시면 좀 순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7절에 만들어졌고, 19절에서 흙으로 들짐승과 새를 지으십니다. 그러면 사람이 먼저 만들어졌나요, 아니면 짐승이 먼저 만들어졌나요? 이 구절대로라면 사람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는 사람이 제일 나중에 창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순서를 따라 기록된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문자적으로만 성경을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렇게 창세기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는 깊은 의미,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도 우리에게 이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 아주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이 땅과 하늘로 바뀌어서 이야기하는 것에서 우리는 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없이는,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려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 그리고 마지막에 그것이 이루어지는 이 깊은 의미를 제대로 알 수는 없습니다.
비가 오지 않음의 신학적 의미: 하나님 의존성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본문도 시간의 순서대로 보면 맞지 않는 부분들이 두 군데서 발견됩니다. 우선, 땅에 비가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장 2절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1장 2절에서 땅은 혼돈과 공허 속에 있었다고 말씀하시며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즉, 처음부터 무언가 문제가 있고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2장 말씀에서도 비슷하게 시작하십니다. 여기에서는 무엇이 부족했습니까? 바로 비가 오지 않았고, 사람이 없었으므로 식물이 없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식물이 없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식물이 없으면 인간을 창조해도 인간이 굶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성경에서 이런 간단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려고 이렇게 표현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호하게 2장을 시작하시고, 그 답을 그다음 구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 그 당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창세기를 읽어 주었을 때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았을 감동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들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들어가 차지하려는 땅은” 가나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을 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나일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집트에서는 농사를 짓기 위하여 나일강 물을 발을 이용해서 자기의 밭으로 끌어와서 그 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며,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입니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내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습니다.”
왜 비의 이야기를 하실까요? 하나님이 그 많은 창조의 이야기 중에 왜 갑자기 2장 4절에서 비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 이야기를 하시는지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너희가 이 비가 없이는 살 수 없고, 애굽처럼 나일강 물을 끌어다가 농사를 지어서 살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오로지 하나님이 주시는 이 비로 사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창조의 역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신들이 경험하며 아는 역사였습니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구절을 통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먹는 이야기일 리는 없겠지요? 오늘 들려주신 이야기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에 중점이 있습니다. 왜 땅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말씀이 가리키는 초점입니다. 먹는 문제가 아닙니다. 먹거리가 문제였다면 애굽을 떠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가나안 땅이 애굽보다 조금 못하지만 참고 살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그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과 함께 살게 될 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나일강에서는 너희들이 더 잘 먹고 살았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 애굽에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지만, 이제 그들이 가게 될 그 땅에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먹었던 많은 먹거리와는 비교가 될 수 없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만족은 하나님 안에 있음 (시편 23편)
여러분, 땅은 항상 부족함이 있습니다. 시편 23편을 좀 바꾸어 표현해 보겠습니다. 그 시에는 “쉴 만한 물가”가 나옵니다. 그런데 쉴 만한 물가도 사실은 부족한 공간입니다. 푸른 초장이 나오지만, 그곳도 부족한 공간입니다. 왜냐하면 그 옆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함께 있으니까요. 다 부족합니다. 그런데 그 부족함이 어떻게 없어지게 되었나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이시므로 비로소 내게 부족함이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없으면, 내가 누리는 풍족함의 이유는 단순히 내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눈에 보이는 모든 소유나 자랑거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항상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눈에 보이는 소유는 우리의 마음을 채우지 못합니다.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덜 가져서가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건강을 지키며 장수하여도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900여 년을 건강하게 살았던 므두셀라도 만족이 없었습니다. 에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쉴 만한 물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언제입니까? 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심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이 말씀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만족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처럼 떨어져서 여러분을 만족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늘로부터 쏟아져서 여러분을 만족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여러분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만족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리는 비를 맞지 않고 피할 수 있지 않는 한 비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적시며, 그것으로 여러분이 살아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네 번째 주제: 사람 창조 ('안개'와 '흙')
다음으로 비를 내리신다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신 대상은 바로 사람입니다. 이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좀 혼돈을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안개에 관한 내용입니다. 안개가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안개는 비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자세히 다루면 아주 복잡한 내용이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안개라는 단어는 구름이라는 단어와 같이 사용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안개라고 번역해도 되고, 구름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전체 문맥에 어울릴 것입니다. “구름, 혹은 비구름만 땅에서 올라와”와 같이 말입니다. 그럼 구름이 어떻게 땅에서 올라올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성경 구절인 엘리야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 긴 기도 끝에 저 땅끝에서 손바닥만 한 구름이 올라왔습니다. 이때 사용된 표현이 오늘의 이 구절에 사용된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비구름이 땅에서 올라와서 지면을 적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 지면에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비가 없어서 식물이 나지 않는 것을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이 경작할 사람입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심으로써 해결하셨습니다. 이때 우리가 가장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은 흙이라는 단어입니다.
'티끌'(아파르)로 지음받은 인간
성경에서는 흙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이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티끌’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흙이나 땅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에레츠(אֶרֶץ, H776)’, 혹은 ‘아다마(אֲדָמָה, H127)’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티끌이라는 단어인 ‘아파르(עָפָר, H6083)’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흙 혹은 땅으로부터 나온 티끌, 혹은 먼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렇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짐승도 흙으로 빚어서 만드셨는데, 이때 사용된 흙은 ‘아다마’입니다. 그런데 왜 이 구절에서는 아파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이 표현을 통해 우리는 먼지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생기: 하나님의 숨결, 성령의 역사
먼지와 같은 우리를 빚으셔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하나님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짐승과 사람을 만드시는 데에 완전히 다른 점입니다. 이를 조금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다면, 우리의 코를 움켜 잡으시고 인공호흡을 하듯이 입술을 대시고 그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입맞춤을 하듯이 코에다가 숨을 확 내쉬시는 것입니다. 이 표현과 일맥상통하는 표현이 바로, 예수님께서 숨을 내쉬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실 때의 그 모습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숨이 우리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정말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바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유일하게 인간이 모든 다른 존재와 구별하여 만드신 것이고, 이 생기가 빠지게 되면 우리는 다름 아닌 먼지일 뿐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먼지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티끌에서 생령으로, 작은 창조자로
이거 하나만 생각해도 솔직히 우리 마음에 평안이 가득해집니다. 이전에 우리들은 가지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고, 그를 위해 부단히도 애썼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가 들어가고 가진 것이 늘어난다고 하여도 이 모든 것이 점점 더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것들도 다 지나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토록 대단하게 붙잡고 싶었던 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놓지 못하고 꼭 붙잡고 살 때가 많습니다. 티끌인 우리가 말입니다…
그러나 그 티끌인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하나님이 입맞춤하시면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그리고 생령이 되며, 세상을 살리는 자가 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서 땅을 경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경작이라는 말의 의미는 “섬긴다” 입니다. 즉, 우리가 땅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 “섬긴다”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모습을 흉내 낸 것이므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은 창조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지인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지면, 우리는 생령이 되고 작은 창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Little Creator라기보다는 Sub-Creator라는 말이 더 맞습니다. 즉 작은 예수가 된다는 것이지요. Little Jesus가 아니라 크리스천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즉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크리스천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놀라운 단어입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 창조에 참여하는 자이며, 하나님과 함께 그 창조를 완성시키는 자입니다.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갈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부어졌을 때, 우리의 이름이 그렇게 영광스럽게 변합니다.
새로운 피조물과 과거의 재해석
그러므로 우리가 티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수록,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광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알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났을 때,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제자들에게 안식과 평강을 선언하시며, 숨을 내어 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후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삶을 비로소 살았습니다.
성령이 임한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니까 창조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다는 말,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창조가 우리에게 일어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옛것이 지나갔다는 말은 나의 옛것에 하나님의 좋은 말씀을 더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모든 지식과 인생을 사는 지혜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것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과거가 새롭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각자의 옛날의 기억들을 이전의 눈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의 과거조차도 새로운 과거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온 손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실패의 경험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간증이 되었습니다.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으며, 이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티끌의 이중적 의미: 죽음과 복
성경에서 우리를 자주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티끌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숨어있는 의미입니다. 티끌은 먼지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무덤에 있는 흙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욥기에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내가 흙으로 흙에 묻힌다고 할 때의 그 무덤에 있는 흙을 티끌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생기가 없는 우리를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티끌이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다르게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이 티끌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복을 이야기할 때가 성경에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내가 너희 자손을 땅의 티끌같이 하리라”라고 말씀하실 때입니다. 이때 딱 한 번, 하나님이 티끌을 복의 근원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티끌을 하나님의 손안에 두시는 순간입니다. 이때야말로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는 순간입니다. 여호와의 손안에 내 인생이 붙들린 그 순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뜻과 역사를 우리가 발견하는 그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라는 것을 고백하는 그 순간, 그때 티끌인 우리가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이 티끌은 죽음이 아니라 복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생명이 있을 때 여러분과 저는 성령님이 거하시는 티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거하시는 먼지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찬양, 하나님의 노래가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인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 안에서의 만족과 새로운 창조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실 때, 바로 그때, 내가 가진 어떤 것으로도 누릴 수 없었던 나의 모든 부족함이 만족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안다는 말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그 창조의 아름다움을 다시 완성해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분이 우리의 목자가 되며, 우리의 생명이 된다는 그 약속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인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에게 충만해지며,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심으로써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티끌 같은 우리를 복으로 바꾸어 주신 그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언제나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믿습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합시다! 그 티끌과 같은 인생이 우리의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이루어진 생명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이 놀라운 창조의 역사를 저희가 누릴 수 있도록 저희 마음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생기가 불어넣어졌음을,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살리는 생명체이며, 섬기는 생명체가 되었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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