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장 15절부터 17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시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동산의 나무들
오늘 본문은 아마 여러분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일 것입니다. 창세기 2장을 읽게 되면, 우리는 제일 처음 나무에 관한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창세기 2장은 1장의 내용과 아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장에서는 혼돈과 공허라는 두 가지 문제가 먼저 나오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채우시는 가에 대한 것이 기록하셨다면, 2장에서는 다른 문제로 이야기를 시작하시는데, 첫째로 비가 내리지 않은 것과, 그 다음은 식물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초목이 없었으며, 열매 맺는 실과도 없었고, 밭에는 채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풀어 가시는 하나님의 기사에 대하여 기술합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는 안개를 올라오게 하시어 땅을 적셨습니다. 지난 설교 시간에 우리는 그것이 관해 살펴볼 때, 원어의 의미를 통해 이 안개를 통해 땅을 적신 것이, 비가 내린 것과 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 사람을 지으셨던 내용을 2장에서는 좀 더 중요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의 하나님, 인애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사랑의 언약에 대한 것을 설명하려고 하시는구나 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조의 관심: 먹거리와 인간의 의존성
이렇게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고 사람을 지으신 다음, 지으신 사람을 에덴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에덴의 특징도 역시 나무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2장 9절 내용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그러니까 그 에덴 동산에 나무를 많이 자라게 하셨는데, 그 나무들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먹기에도 좋은 식물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창세기의 기술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모든 관심을 사람을 먹이시는 문제로 끌고 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뭔가 좀 고차원적인 전 우주적인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실 줄 알았는데,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지금 하나님께서 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이 양식이라는 것, 먹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봐도, 이 먹는 문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간을 지으셨을 때 그들을 영원한 존재로 불멸하는 존재로 지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거하는 것을 보시고, 참 보기 좋았더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한 존재로 처음에는 만들어졌다고 가르치거나 주장할 수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거기에도 약간의 일리는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아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미 그때부터 온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온전한 존재가 영원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약간의 상상력이 들어간 것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먹거리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다고 기록합니다. 그 말은 다르게 말하면 무슨 뜻일까요?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가지고 이 창조를 설명하고 있으십니까? 인간이 먹을 것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은 인간은 의존을 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의존하는 그 먹을 것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에덴: 하나님 임재의 성소
에덴이라는 곳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저희가 지난번에 함께 살펴본 바, 이 에덴 동산은 하나님의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중에서도 이 작은 행성의 하나인 지구, 그 중에서도 에덴이라는 곳을 택하셔서, 그 곳에 임하시고, 그 곳에 아담과 하와, 즉 사람을 두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물질 세계에 갇힐 수도 없으시고, 우주 조차도 그 분의 발등상이 되지 못하는 하나님께서 그 에덴에 사람을 두시고 함께 거하시며 기뻐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에덴 동산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우리는 성막이나 성전 형태를 에덴동산에 비교하여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같이 필요해서 봤잖아요. 성막 안에 존재하는 지성소의 구조, 그 지성소를 가로 막고 있는 휘장에 그룹이라고 부르는 천사가 새겨져 있는 모습, 솔로몬의 성전에서 온 성소의 둘레를 나뭇잎 모양으로 장식을 하는 모습, 그리고 성소 안에 있는 촛대가 나무의 모양을 하고 있다는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이 성막과 성소가 뜻하는 바가 에덴 동산과 아주 밀접함을 잘 보여줍니다.
지상의 에덴과 하늘 성전의 관계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에덴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사람과 만나시고, 동행하시고, 소통하시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함께 함으로써 인간들이 복을 누리게 해 주시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이 땅에 있는 그 에덴 동산은 그것만으로서는 완전한 동산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에덴 동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늘의 성전,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그 성전을 이 땅에서 모형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에덴 동산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첫 번째로는 이 지상에서의 에덴 동산은 완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에덴 동산의 창조가 완성된 것은 맞습니다.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에덴동산을 더 만드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완벽하고 무결하게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끝내신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이 에덴 동산은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지상의 에덴은 종말을 향해 가야하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
그 목적을 우리가 이해하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에덴을 지으실 때에 하늘의 성전 모양을 그대로 모형 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에베소서 1장 10절 말씀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은 구원의 완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자리: 하나님 나라 이야기 속의 인생
우리는 구원의 완성을 너무 쉽게 다음의 찬송가 가사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물론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100점짜리 구원관 입니다. 하지만 한 방면에서 보았을 때만 100점인 구원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의 영혼을 봤을 때 분명히 100점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젠 여러분이 그렇게 구원을 받으셨으면 우리가 그 구원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더 역사적으로 전 우주적으로 넓혀 보는 것도 좋다는 말입니다.
나의 인생의 목적, 혹은 내가 가야할 곳이 이런 곳이구나 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과, 그저 하루 하루 살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의 세상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아 볼까 기대하면서 사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삶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인생에서 과연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어떤 것이었는지 아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구원이 죄짐 벗은 고통의 절감만이 아니라, 그 구원의 결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며, 그 나라에서의 영광을 하나님과 함께 누리고, 그 나라에서 그 기쁨을 함께 누리며, 이를 위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누리는 인생, 그것이 구원의 목적임을 아는 인생 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삶입니다. 내 인생이 그저 이렇게 태어나서 한 순간 살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명을 깨닫는 것은 다른 삶일 것입니다. 에덴 동산을 지으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통일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물론 인류의 타락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 하늘과 땅, 이 우주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통합, 통일되게 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에덴을 통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함으로써 온 우주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이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역할: 섬기고 지키는 제사장
그러므로 에덴 동산은 종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종말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창조로서는 완성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이 안식을 시작하면서, 창조는 이때 완성되었죠. 그러나 그 안식의 시작은 곧 종말, 즉 마지막 날을 위한 시작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가 사실상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하나님의 그 어마 어마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그래서 사람에게 에덴 동산을 섬기고 지켜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경작하고 지킨다”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이 단어의 원 뜻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섬기고 지킨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스리는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벌써 그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무너뜨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고, 만물들을 괴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것들이 우리로 부터 기인된 많은 오염과 더러움으로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역할은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입니다. 우리에게 에덴을 지키는 역할을 주신 것입니다.
성소 안의 나무들: 생명나무와 선악과
그리고 이 에덴 동산의 중앙에다가 두 개 나무를 두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셔서 그 곳에 이 나무를 두셨을까요? 이전에 살폈듯이 이 나무는 바로 성전에 있는 나무인 것입니다. 에덴 동산이 바로 성전, 즉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그 성전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 것이므로, 이 나무는 악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많은 이단 교회에서는 사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탄이 그 나무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성전에 하나님께서 나무를 두셨다면 그 나무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만드신 것일 뿐, 그것이 다른 이유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에 대한 집중
오늘 설교에서는 시간의 제약으로 인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의 실과까지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내용의 설명은 다음 시간으로 미루겠습니다. 오늘은 이 생명나무에 대해서만 함께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 열매의 의미가 궁금하시다면 다음 주에도 예배를 빠지지 않는 방법밖에 없을 것입니다.
생명나무와 인간의 불멸성
오늘 본문은 가끔은 우리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생명 나무라는 단어의 의미 때문입니다. 자,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 에덴동산의 많은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많은 나무를 통해서 모든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위해서는 이미 충분한 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또 생명나무가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영적 생명입니다.
생명나무란 말은 물론 단순히 우리의 영적 생명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영과 육을 모두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나무가 창세기에서 사용된 의미는 주로 영적인 생명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너희들은 이 실과를 먹은 후에도 죽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이 실과를 먹은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사탄이 맞았고, 하나님께서 틀린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겠지요. 네, 이들은 영적으로 죽은 죄인이 된 것입니다. 이 영적 죽음은 계시록에서도 언급된 둘째 사망의 개념과도 비슷한 것입니다. 그 의미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나 이 생명 나무를 언급하심으로써 그 영적 죽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한다는 관점에서는 이 둘째 사망과 비슷한 의미로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생명나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두 나무 중에서 이 생명 나무는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걸쳐 계속해서 나오는 나무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할 뿐 아니라, 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까 설명 드린 것처럼 이 생명나무의 존재 자체를 보면서 우리 인간은 스스로 불멸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한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성경에서 가장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바로 디모데전서 6장의 내용입니다. “오직 그(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이처럼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고 불멸하는 존재이십니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인간을 포함하여 모두 하나님께 힘입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2절 말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 노라.” 이 말씀을 읽으시면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생명나무의 열매를 한번 따 먹게 되면 인간이 영생을 누리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되십니까?
생명나무의 지속성: 계시록의 증거
그런데 과연 성경이 그런 의미로 기록되었다면, 이는 성경의 여러 다른 부분과 모순되어 보이는 부분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계시록입니다. 계시록 22장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시고 새 예루살렘이 우리에게 오고, 하나님께서 빛이 되셔서 그 때는 해와 달도 없고, 성전도 없고, 생명수가 흐르는 강이 있고, 그곳에서 우리는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미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므로, 생명나무가 필요가 없어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22장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다름 아니라, 생명나무입니다. 생명 강가에 생명나무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열매를 우리가 시시때때로 따 먹는다고 기록합니다. 이 계시록 말씀은 이 생명나무의 열매가 한 번만 먹으면 그걸로 모든 영상을 얻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생명나무의 의미: 계속적 의존의 상징
이해가 되시지요? 우리는 흔히 생명 나무의 열매를 한 번만 먹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나무의 실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와는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안식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종말의 시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안식의 시작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이 생명 나무야 말로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존재임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끊임없이 이 사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그 지식을 통해 힘을 얻고, 끊임없이 그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살게 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표시입니다.
성경이 정확하게 얘기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아담이 타락하게 전까지 그 생명나무 실과를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는 아담이 만들어지고 죄를 범할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유추해 보았습니다. 즉 6일째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하루로 보게 되면 굉장히 여러 가지 시간적 해석상의 어려움이 생긴다고 말씀드렸지요? 즉,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시에 다 지으신 게 아니라,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혼자 있게 하셨고, 그 동안 아담은 모든 짐승들에게 이름을 비어주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혼자 있을 때입니다. 이 일은 아주 거대한 사명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생물의 종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아마도 많은 종들이 멸종한 지금에 비교해 훨씬 많은 종들이 존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물들에게 모두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떻게 하나 보시려고 짐승들을 다 풀어 오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짓게 만드셨습니다. 한 2시간 정도 걸려 다 마무리했을까요? 우리가 시간을 정확하게 잴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것이 짧은 순간에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일 후에 이브를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그리고 그들이 타락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죄를 범하는 그 일이 여섯째 날 다음 날인 7일째에 일어났을까요?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왜냐면 그 동안에 아주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설명하시는 일들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추측해 보아도 이것이 24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이 물리적 시간이 아니며, 좀 더 긴 시간 동안 일어난 일들이고, 또 이 시간 동안 아담과 이브는 생명나무 실과를 이미 먹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창세기 전체의 흐름에 더 타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범죄 후에 그것을 더 이상 아담과 이브에게 먹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 더 맞는 설명일 것입니다. 만약에 그 때까지 한 번도 그 실과를 먹지 않았다면 아담은 사실은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어겼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포함한 이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으라고 명령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계속 그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으며 지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히려 실과만 의도적으로 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이상할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성례적 의미
따라서 창세기의 이 생명나무 실과가 우리 모두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째는 이 생명 나무 실과는 우리의 생명이 내 것이 아니며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매 순간마다 확인하게 해 줍니다. 다른 말로는 이것을 성례적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Sacraments가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희는 세례를 받습니다. 그 세례식에서 목사가 세례자의 머리에 물을 뿌려서 세례를 행합니다. 그러면 그 때에 물이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아멘이 나오면 큰일 날 것입니다. 절대로 아니죠? 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인가요? 믿음에 대해서 그 물로 인을 친다고 말합니다. 즉, 도장을 찍는 것과 비슷한 의미의 행위인 것 입니다. 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 생명 나무도 그 실과에 특별하게 어떠한 마술적인 요소가 들어 있어서 그것을 먹고 영원히 사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아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종종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먹는다고 표현하는 대신, 생명 나무를 먹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과일 이란 말이 포함되지 않는 구절도 많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이 생명 나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을 의지하여 산다는 믿음에 대해 도장을 찍는, 즉 인을 치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성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을 성례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거나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의 믿음 속에서 그 의미를 확증하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은혜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 나무는 그런 성례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일 자체가 손오공이 먹고 천수를 누리게 해 준 천도 복숭아처럼 특별한 능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러한 단순한 상상력으로 이해하시면 안 되며,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통해서 무엇을 의도하시는지 잘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것,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나무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이 그 때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생명 나무의 실과를 먹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성전으로서 짓고 계시다면 그러면 우리 안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요? 네, 생명 나무입니다. 생명 나무가 우리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런 의문도 드실 것입니다. 그럼 내 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같이 들어있는 것일까 하고요. 그럼 이 의문은 언제 풀릴까요? 네, 이것도 다음 주 예배 시간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 생명나무가 여러분 안에 있다는 말은 이 성전 안의 생명 나무를 통해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만나: 그리스도와 생명나무
두 번째 이 생명 나무의 특징은 아까 설명 드린 것처럼 단회적으로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 연속적이며 끊임없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열매라는 점 입니다. 이 에덴 동산의 모습이 계속해서 구약의 등장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쉽게 발견합니다. 그 중에서 모세의 시대, 즉 구약 성경이 쓰이고 이 창세기의 내용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읽히는 그 때에, 이 생명나무의 특징과 아주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려 주셨던 만나입니다. 만나는 매일 내려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를 매일 공급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이 백성들이 떡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날마다 내려지는 그 만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식이었고, 이들은 그것으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주셨습니다. “너희들의 조상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떡을 먹었으나, 그것은 땅에 속한 것이었으므로 그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다. 그래서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 내용은 우리가 성찬식을 행할 때에도 매번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영원한 만나이시고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나무를 한 번의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생명나무의 깊은 의미를 너무나 좁고 가난하게 해석하는 일이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일용할 양식: 매일 구하는 생명의 공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생명을 매일, 순간 순간마다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한 번 먹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필요로 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은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다가, 그 다음날은 바로 지옥에서 헤매는 죄인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천국에 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매 순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매일 확인시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 나무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매일의 양식으로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한걸음만 더 나가 보겠습니다. 오늘의 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과연 이 내용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꼬박꼬박 먹을 밥을 구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요즘처럼 먹는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서 세 끼를 굶는 사람이 많겠습니까? 건강을 위해 일부러 두 끼만 먹는 사람도 많은 시대입니다. 물론, 옛날 같으면 세 끼를 건너뛰지 않고 먹는 것이 큰일이었겠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귀했던 그 때에는 이 구절이 조금 이해가 되겠지만, 요즘의 우리들에게는 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깊게 와 닫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께서 이런 것을 기도하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그 에덴으로부터 나왔던 그리고 영원히 지속될 그 생명 나무에서 오는 그 생명의 실과, 즉 영원한 말씀과 영원한 양식이 우리에게 매일 공급되기를 기도하신 것이었고, 그 기도가 지금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순간 순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리고, 우리의 힘으로 잘 살아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죄를 범하기 쉬운 사람들인 듯합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졸업 학점을 다 채운 백성들로 벌써 하나님과 함께 천국에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계속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매일을 양식을 구하지 않는 한,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죄에서 빠져나올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순해 보이는 밥 한 끼를 놓고서도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양식을 위해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며, 우리의 수고를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일생 동안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고백하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영생의 질: 생명나무와 치유
세 번째로 생명나무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이 구절을 읽게 되면 조금은 단순히 그 의미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즉, 이 생명을 준다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으니 이것을 날마다 먹으며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겠구나 라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런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구절에는 좀 더 웅숭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과연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요? 우리가 이 영원한 삶으로부터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시간의 양이 아니라, 그 삶의 질이 어떠한 것인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는 이 행위야 말로 지극히 인격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에서 성경이 말씀해 주시고 있는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은 어떠한 것일까요? 이 질문의 내용을 성경에서 찾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에스겔서와 요한 계시록에 같은 내용을 이렇게 말씀하신, 부분을 찾아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성전에서 물이 막 뿜어져 나오는 것을 에스겔의 환상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그 강의 좌우에는 각종 먹을 실과의 나무가 자라, 그 잎이 시들지 않고, 실과가 끊이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의 실과는 먹을 만할 뿐 아니라, 그 잎사귀는 약의 재료가 되어 우리를 치료한다고 말씀합니다. 생명나무는 단지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치유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위로
이 치유를 위하여 저와 여러분은 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실과를 먹고 죽지 않고, 끝까지 참고 참아 마지막에 올 그 영생을 받아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아픈 상처와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 나무의 실과가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 실과를 주실 때,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것을 주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면서 그 실과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는 슬프지 않게 보듬어 주시고, 우리를 위로 하시면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천국의 삶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TV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는 천국에 도착하여 어떤 약 같은 것을 받아서 먹고 과거의 나는 모두 잊어버리고 새로운 모습의 나로 새로 태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왜냐하면 우리들의 과거의 기억 중 우리가 천국에서도 기억하고 싶어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천국에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잊는다면, 그곳에서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우리의 자식과 부모님들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까요? 그렇지 않죠? 성경에서도 분명히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즐겁고 기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참으로 신묘막측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오히려 더 나의 과거로 인하여 승리와 기쁨을 알게 되고, 내 인생의 무엇인지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 온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알게 되는,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기쁘고, 즐겁고, 그 모든 것이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현제는 우리에게 얼마나 억울한 일들이 많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인생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사실은 조금씩은 우리에게 원망과 아픔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완전한 지식이 아직까지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 속에 들어가게 됐을 때 우리는 완벽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당연히 감사하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들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일이 지금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바로 이 시간에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위로에 동참한다면 우리도 역시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혀: 생명나무의 현재적 적용
그래서 성경에서는 생명나무를 다른 단어로 바꾸어서 표현할 때, 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표현으로 “온순한 혀가 생명나무이다” 라고도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즉, 여러분의 언어가, 그리고 여러분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생명 나무가 되는 것이고 그 위로를 통하여 우리는 그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확실하고 구체적인 말씀입니까? 이것은 저와 여러분이 지금 누릴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것일까요? 그 말씀 공부해서 시험을 본 점수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해서 모르면 낙제를 당합니까? 그렇지는 않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열심히 성경을 읽고 구절들을 외우고 묵상합니다. 그 이유는 그 성경을 모든 말씀들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들은 나를 바꾸고 나를 위로하고 나를 격려해 주시고, 내가 살아서 움직이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입으로부터 나오는 그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적용들이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고 또 그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귀한 것이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소홀하게 여길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우리의 혀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혀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바로 구원의 현장인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자리로 부르심을 받고 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탄과 한숨으로 가득했던 과거의 인생에서, 비록 지금은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모든 일에 감사하며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저의 막내동생에게는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저도 아주 좋아했던 아이였는데, 아주 어릴 때, 하나님께서 일찍 데리고 가셨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너무 험한 질병이 찾아왔고, 그 병과 싸우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와 저의 동생은 이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모두 이해했다고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제대로 자랐다면, 정말 아름다운 청년으로 훌륭한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 인해 감사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하고 놀라우신 그 공평하심을 우리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으며, 우리를 이 땅에 태어 나게 하셨고,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 가운데 우리들을 인도하셨는 지를 조금씩 배우고 알게 됨에 따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은혜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 속에 내려지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입술로 그 사랑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심령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과 교제: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통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일용할 양식을 매일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 이를 항상 기억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설교를 들으신 후에도 과연 어떻게 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구하고 먹어야 하는 지에 대해 제대로 감이 오지 않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무엇을 언제 주실 지, 잘 알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힘든 일이 조금만 계속되면, 저에게 인내를 가르치시려고 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저의 고집을 꺾으시려는 것 같기도 하고, 저에게 부족한 사랑을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때 그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쉼없이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그 생명 나무의 실과를 오늘도 내려 주실 것을 계속해서 주님께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용할 양식으로 우리가 이 현실을 이겨내게 해 주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약의 나무: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
마지막 네 번째로, 이 생명 나무는 언약의 나무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같이 공부해 보면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생명나무는 출애굽에서 나타났던 그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과도 같은 의미이며, 성전 안에 두셨던 촛대의 촛불과 향단의 향 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바로 빛과 향기로 성전 안을 가득 채우며, 밝음과 따뜻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항상 함께 계셨던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그 복을 의미하는 것이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생명 나무와 그 나무의 열매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먹는 삶
그렇다면 성전이신 여러분 안에 그 생명 나무가 동행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이며, 성령 하나님과 그 인생을 같이 살아가는 자들 인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하나님의 그 열매를 날마다 먹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뜻은, 그 성령 하나님의 열매인 사랑과 자비, 인내와 긍휼, 온유와 겸손을 여러분이 먹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열매, 즉 성령님께서 맺게 하시는 그 열매가 우리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 항상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항상 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쥐어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갈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 나무가 심기어진 성전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는 더이상 성전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 처럼 계시록에서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더 이상 성전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나무만이 그 계시록의 마지막 장에 등장합니다. 이 나무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영생 불멸의 몸을 주는 특별한 약효를 가진 신비한 식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처럼 우리를 치료하고 우리를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약입니다. 그러면 그 약은 무엇을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될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여러분이 깨닫게 해 주시고, 믿음의 형제들과 교제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 바로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시는 그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우리에게 공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형제와 자매는 아주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와 함께 그 식탁이 앉게 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 교제 속에 우리가 속상할 수 도 있고, 어떤 때는 격려 받고 치유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여러 도전을 겪게 되기도 할 것 이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더욱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 더 그 생명 나무의 열매를 갈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제를 소홀히 여기지 말고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우리들이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을 때, 그때가 우리가 그 생명나무의 열매를 만나는 때입니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위로할 때, 또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대할 때, 그때도 우리들은 그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한분 한분이 그 열매를 정말 풍성하게 누리셔서 매일 매일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생명 나무의 열매를 영원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함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더 구체적으로 밝히 알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등 뒤에서 그냥 서 계신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라, 성전 된 우리 가운데에 생명을 주시는 열매로써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를 먹이시는 하나님,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과 함께 생명을 나누게 하시는 하나님, 저희가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 오니, 어리석은 자처럼 그 열매를 그냥 지나치지 말게 하시고, 오늘도 그 열매를 우리의 입안 가득히, 우리의 몸과 심령 가득히 채워 주시고,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가 나의 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그 깨끗하고 정의로우신 옷이 나의 옷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는 이 놀라운 생명 나무의 열매를 저희가 오늘도 함께 누리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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