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과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24절부터 31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아멘.
창조의 목적: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
여섯째 날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3일 동안 만드셨던 것들을 나머지 3일 동안 채우셨습니다. 오늘은 셋째 날 만드셨던 땅을 생명체로 채우시기 시작합니다. 함께 살펴보았듯이, 3일 동안 그릇을 만들고, 3일 동안은 그 그릇을 채우는 모습입니다. 그 중간에 반복되는 어구인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과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씀을 저희가 지난 설교 시간에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은 완벽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창조의 목적을 이루고 계신다는 의미에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그런 표현을 쓰셨습니다.
창조는 완성을 뜻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어 모든 것이 완성되고 완료되었다면 인간의 타락이나 혹은 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은 기록될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천국에서 즐겁게 살았더라” 하고 그 내용이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는 완료가 아닌,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이 결국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 자체는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그 창조로 모든 것을 끝내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서 보이는 세계와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하는 이 모든 세계와 우주 만물을 통일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를 계시록에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내려온다”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이 땅과 하늘이 만나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이 창조의 목적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함한 온 우주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을 통하여 그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통일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름이 아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마지막 아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창조의 중심에는 누가 오게 되는 것일까요? 네, 사람이 오게 됩니다.
인간 중심과 하나님 중심
사람이 사람을 중심으로 자기의 영광을 좇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본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은 인간 중심, 혹은 사람 중심이라는 말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이것은 신본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똑같이 사람이 중심이나 의미가 조금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중심에 사람을 세우셨지만,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높이고, 그리고 사람을 복되게 하시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 중심이 되고 그것을 우리가 신본주의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개념 속에는 모두 사람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반복 어구 복습: "그대로 되니라"와 성막
저희가 2주 전에 살폈던 또 하나의 특징인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과 결합된 말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그대로 되니라.’ 그랬더니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연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창조의 과정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성막과 이 창조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성막이 되어 오셨고, 성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재물이 되어 단번에 우리를 위해서 드려 지셨으며, 또 휘장을 찢으시고, 떡상이 되어 주시고, 물두멍이 되어 주시고, 생수가 되어 주셨던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그 성막을 통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즉 이 창조 때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과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는 정말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리스도에게 이루어진 일이 결국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이신 것처럼 우리도 성전이라고 불리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맺으신 언약, 그리고 우리와 맺으신 언약, 그 약속이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것, 말씀이 약속하신 대로 신자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 이러한 것들이 바로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의 모습입니다.
여섯째 날: 사람 창조와 "우리"
오늘 본문은 26절부터 시작합니다. 26절에서 드디어 하나님의 창조에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지난주까지 보았던 구절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이 구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주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표현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전에 무언가를 만드실 때 사용하셨던 단어와 굉장히 다른 것입니다. 살펴보았던 것처럼, “Let there be!” 즉 ‘무엇 무엇이 있게 하라!’는 식의 명령을 통해 하늘과 물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만들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있게 하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혹은, “흙에게 명하사 사람을 내라” 라고 명령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직접 누군가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굉장히 인격적인 언어가 시작된 것입니다. 우선 이 구절에서 사용된 단어들 중에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당연히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이 ‘우리’라는 단어는 사실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모세를 비롯한 모든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항상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쓴 이 창세기의 첫 문장에 ‘우리’라는 단어를 넣었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왜 여기서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라는 복수형 단어는 가끔은 장엄 복수 (Majestic plural, 혹은 Royal plural) 라고 불리는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아주 위대한 존재를 칭할 때 그것을 단수로 표현하지 않고 복수의 형태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그리고 이런 언어에 영향을 받은 라틴어나 영어에도 남아있는 독특한 표현 방식입니다. 그래서 옛날 서방의 왕들은 자신을 칭할 때 “I”라고 하지 않고 “We”라는 말을 썼습니다. 영국의 여왕인 빅토리아는 즐거운 일이 있을 때 “I was amused.” 라고 하지 않고, “We were amused.”라고 표현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표현은 영국을 위시한 셈족 언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한국말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옛날 조선의 왕들은 자신을 “나”라고 칭하지 않고 ‘짐’이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높여 부르는 표현 방법입니다. 오늘 이 ‘우리’ 표현도 분명히 장엄 복수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말할 때, 그냥 단수로 “나”라고 표현하지 않고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대한 존엄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좀 문제가 될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16절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표현된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신 후, 이어진 2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라고 쓰였는데 그 단어는 또 단수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26절에는 ‘우리’라는 복수형을 사용했는데 27절에는 하나님을 단수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칭할 때, 장엄 복수형을 사용할 의도였다면 계속해서 복수로 쓰는 것이 맞겠으나, 그 다음 절에 다시 단수형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지 위대함 만을 강조하는 장엄 복수로만 이 구절이 사용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다신론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라는 말 속에는 복수 개념이 분명히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라는 말이 숫자로 3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은 또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삼위일체에 대한 아주 그림자 적인 모습, 마치 시와 같은 그런 상징적인 모습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이 “우리”라는 말이 삼위일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고 보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확실한 숫자의 개념이 표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특정 숫자의 개념보다는 복수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합니다. 왜 복수를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이 복수 개념 안에 들어있는 연합의 의미 때문인 듯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인간의 독특성
이 구절에서 유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 땅과 흙으로부터 나온 것은 같으나, 여기에는 굉장히 뚜렷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이와 대비되어, 짐승과 동물들은 그 종류를 따라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영어로는 “after their kinds” 라고 표현됩니다. 이전에 설명 드렸던 것처럼, 생물학적 종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생물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즉 코끼리는 코끼리의 종류대로 만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동물들은 그 종류대로 종류를 따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와는 달랐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동물과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만드셨으나, 인간만은 거기에 덧붙어져서 특이한 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늘로부터 온 개념입니다. 땅에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하늘의 존재와 이 땅이라는 이 세상의 피조물로서의 땅의 존재, 이 두 가지 특징을 함께 가지게 된 아주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고, 그리고 이 인간이 땅과 하늘 사이에 있다는 존재라는 것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인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게 됨으로써 이 땅에 속한 것으로서의 특징은 물론, 동시에 하나님의 특징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그 종류대로 나온 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종(種)에 속해 있는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차이는 굉장히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독특한 점입니다.
이전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인간과 동물의 창조는 생물학적인 방법으로 혹은 창조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방식으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인간이 지금 시간과 같은 여섯째 날에 지어진 존재이고, 35억 년 짜리 우주를 6일 만에 만드셨듯이 인간도 완성된 존재로 만들었 졌다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이 창조를 생물학이나 과학으로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 성경이 단지 생물학, 혹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창조를 증명하기 위해 쓰인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성경에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어떠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창세기 속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중요한 창조의 의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이 땅과 흙, 혹은 이 세상에 속한 존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인간은 하늘에도 속한 존재입니다. 그 부분은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과학이 아무리 발전을 한다 해도, 그리고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칙과 법칙들을 다 발견해 낸다고 할지라도, 하늘에 속한 조그만 한 부분조차도 이 세상의 과학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이 과학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눈으로 볼 수 있거나, 실험으로 증명이 가능하며, 또 그러한 것을 반복해서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하나, 인간에게는 하늘에 속한 것들에 대한 과학적 증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창조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과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는 지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에는 당연히 모순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 설명할 수는 없는 부분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창조의 과정에서 발생한 모순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창세기의 내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종류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류대로 라는 말에서 짐승들이나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우리" 그리고 남자와 여자
그럼 첫 부분에서 말씀드리려고 했던 복수 개념과 이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이 말씀은 우리들이 이미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어진 말씀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사건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칭할 때는 단수를 사용하시고,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서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하시며 이를 복수로 이야기하신 것입니다. 비슷한 구절이 16절에도 나옵니다.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할 때 그 “사람”은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할 때, “다스리게 하자”라는 동사가 받고 있는 주어는 “그들”입니다. 복수로 사용되었습니다. 단수로 창조해 놓으시고, 복수형으로 “만물을 다스리게 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단수의 사람이 복수로 나타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다음에 볼 2장에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아담을 재우신 다음에 하와를 만드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근데 그것이 그렇게 시간 순서로 이루어진 것처럼 설명되고 있지만, 실제로 이 모든 과정이 보여 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은 인간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라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짧은 말 한마디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성경은 지금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지어질 때 분명한 과정이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마술사들이 마술을 하듯이 어떤 주문을 통해 나온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지으실 때,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로 공간과 시간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해 나가시려고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완료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로봇으로 찍어내듯이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 즉 하나님의 백성들 혹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를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인격적으로 이루어 가시고, 인격적으로 완성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그렇게 큰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태어나서, 어떻게 시간이 지나고, 그러다 예수를 믿게 되어서 그렇게 천국에 가겠지’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계획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이 창세기에서 하신 계획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도 버리지도 않고, 결국은 계시록에서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과 저는 짧은 순간의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 속에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지어져 가는 존재라면,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정성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제가 옛날에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 답답하고 속상해서 그냥 기도에 전념하고 싶었습니다. 너무 힘든 시간을 잊고자, 그리고 천국의 기쁨을 맛보고 누리기 위해 기도원으로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통성으로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좀 풍성해진 마음으로 달라진 내 모습을 기대하며 다시 세상으로 오려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 믿었는데, 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데, 아직도 죄 때문에 고민을 하며 죄와의 싸움에서 날마다 지는 우리의 모습에 속상하실 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성령이 내재하시는데도, 여전히 죄 때문에 넘어지는 우리 모습에 답답하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해 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조차 없는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개개인의 개성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그 순간 죄 없이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면 거기에 무슨 개성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냥 다 비슷비슷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다릅니다. 그리고 모두 다른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이루어 내시겠다는 그 생각이 창조 때부터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그 창조 속에서 아담과 하와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에덴이라는 동산 안에서 일하시며, 그리고 동산 안에서 살아가는 아담과 하와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개념에서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남자와 여자가 있듯이, 짐승에게도 똑같이 암컷과 수컷이 존재하므로, 짐승이나 동물도 사람과 같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짐승도 암수가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으니 똑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생명체로서 인간은 분명히 남자와 여자로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됩니다. 다른 생명체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고 했을 때, 이는 그런 생물학적인 생육과 번성만을 위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으며, 하나님은 생육과 번성을 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는 말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의미가 단순한 생물학적 개체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생명체로서 그 생육하고 번성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창조의 클라이맥스와 하나님의 형상
27절의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이 창세기 27절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시가 불린 절입니다. 시적인 구문으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세 줄로 되어 있는 이 짧은 시에, 창조했다는 말이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이 구절은 사실상 창조에 있어서 가장 그 클라이맥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부분을 조금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는 그를 창조하셨고,”. 재미있지요? 그는 그를 창조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이렇게 세 줄로 된 짧은 시입니다.
그런데 왜 모세가 이 부분을 이러한 형식으로 묘사했을까요? 신약성경에서 바울이 서신서를 기록하다, 갑자기 찬양이나 기쁨을 표현하는 시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갑자기 뜬금없이 그 전후의 문맥과도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적인 찬양이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기록하는 저자가 비록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27절을 기록하면서, 그냥 단순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도 창조하셨다”라고 밋밋한 표현으로 마무리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때 모세는 아마 최고의 흥분 상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창조 기사를 기록하는데 드디어 여섯째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섯째 날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옛날 신문에 났던 기사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 개의 고성능 전파 망원경을 연결시켜 우주 공간에서 오는 모든 전파를 다 모은 후, 그것을 분석하여 별들이 탄생하는 과정을 컴퓨터 이미지로 변형시켜 방송해준 사진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거대한 별들의 탄생 과정에 감탄하며 놀랐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우주선을 타고 직접 그 별 근처에 가서 그 별들이 탄생하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장관일 것입니다. 그 은하계의 모습을 직접 가까이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울까요? 그런데 성경에서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신 것을 광명체를 지으셨다고 말씀하는데,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을 지금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 별들도 대단하겠으나, 이 성경에서의 모든 클라이맥스는 그 우주의 탄생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관심이었다면, 아마 우리는 우주 천체 물리학의 관점에서 이 창조를 재정의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오직 관심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엄청났던지, 모세가 이 창세기를 쓰다가 너무 놀라고 너무 영광스러워서 시가 흘러나온 것입니다. 감탄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그런 식의 풍류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여흥이 올라오면 시를 쓰고 낭독하며 즐기던 풍습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옛날로 돌아가도, 사람들이 시흥이 일어나면 시를 짓고 그것을 노래하는 것이 흔한 풍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가 시를 짓고 노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지어졌다라는 사실을 기술하려고 하니 너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과 조금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간 하나님과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모세가 이 시를 노래로 불렀을 때, 천사들도 아마도 잠잠히 이 노래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에 하나님의 형상,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는 바로 인간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도 하나님의 형상과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피조물도 이 장엄한 묘사 앞에서는 숨소리를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창조주를 따라 지음 받은 존재가 탄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극상으로 표현하는, 하나님을 최대한 담은 존재가 이 우주에 우뚝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아이를 보면서 느꼈던 그 경탄입니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너무 너무 신비로운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경이로움! 자랄수록 나의 얼굴을 닮아가는 그 예쁜 아기를 볼 때 느꼈던 신기함! 그 느낌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나으셨다 라고 표현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은 것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담고 있는 그 내용은 그래서 너무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관계와 사랑
하나씩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이 구절은 “우리”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 이런 것이다라고 자세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고 표현해 이 형상이라는 단어가 복수형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살폈듯이 생육이나 번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 누리시는 그 친밀함을 따라서 우리도 함께 그 관계 속에서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복수 개념 속에 함께 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한 분 하나님이시면서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완전히 연합을 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도 들어서 알고 있지만,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일컫는 때가 물론 많습니다. 이때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적으로 성경 속에서 보여지거나 나타난 적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사용된 복수의 개념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연합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성부와 성령이 서로 같지 않은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본질은 같지만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리고, 성부 하나님은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그 두 하나님은 같은 본질을 지니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를 세상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기가 막힌 모습이 바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분명히 같지 않은 존재입니다. 각각 서로 다른 Identity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을 같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둘이 연합하면 한 몸을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 신비를 우리가 다 알 수도 없다고 까지 성경은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정말 사랑하여 그 둘이 결혼을 통하여 한 몸이 됐다는 말은 그냥 단순한 언어적 표현 이상을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성경은 그것이 실질적인 하나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굉장히 난해하며 신비한 개념인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가 둘이 하나가 되는 존재로 표현하는 이유는 바로 이 둘이 하나님의 복수성,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합하여 신비롭게 한 몸에 이룬다는 말은 하나님의 관계를 사람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잘 설명해 준 성경 구절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성부 하나님과 연합되어 계신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함께 거하시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에는 굉장히 놀라운 표현이 계속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원을 설명할 때, 악한 세상에서 건져진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물론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그 구원의 깊이를 다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 구원은 우리를 지으신 그 하나님의 형상의 목적을 우리가 다시 회복하고 완성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라는 개념입니다. 이 “우리”에서 보여지는 관계의 힘은 어떠한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표현은 그 “우리”라는 관계의 형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어느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라는 것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이 땅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비유하시려는 것입니다. 결혼 주례사에서 흔히 듣는 말로,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말이 자주 사용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서약한 결혼의 관계를 나누면 안 된다는 권면의 말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좀 더 깊은 핵심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창조의 원리에 더 강조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남자와 여자의 존재를 통해 하나님을 표현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는 이 관계의 핵심이 사랑이라는 것이 강조되는 것이며, 그 사랑이 회복되고 완성된다는 것에 그 구원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과 형상의 왜곡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 뒤틀려 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가지고 있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이고,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떠나 버린 후에는 이제 하나님의 형상이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운영이 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계를 생각하시면 이해하시기 편하실 것입니다. 기계가 돌아가려면 그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나, 그 사람이 떠나가 버리면 그 기계는 더 이상 돌아가지도 않고, 잘못 사용하여 고장이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떠나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도 뒤틀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명령을 복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러나 조금 부족한 설명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우리에게 제일 먼저 하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제일 먼저 하셨습니까? 네, 짐승들에게 먼저 말씀하셨죠? 그들에게도 복을 주셨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고 것 자체는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바로 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실 때 비로소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면 그 모든 명령은 기쁨과 안식이 될 수 없고, 고통과 슬픔으로 변하여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을 떠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사람들은 여전히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는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가장 상위의 포식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호랑이보다 약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호랑이 고기도 먹을 수 있고, 물고기처럼 수영도 잘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생선 요리를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우리가 제대로 다스리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점점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되어갈 수밖에 없이 되었고, 남자와 여자 조차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지 못하며 서로 위에 서려고 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투쟁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계급 투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 격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은 가정에서 매일 부딪치게 되는 자녀와의, 그리고 부부간의 전쟁이고, 이 사회 속에서 그 우리들이 살면서 겪는 전쟁이 더 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비참한 역사 속에는 항상 우리의 욕망이 함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이기적 사랑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는 그 사랑의 모습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랑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기적인 사랑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많은 무신론적인 베스트셀러 책들 중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국의 진화론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쓴 책입니다. 물론 내용은 신자들에게 권할 만한 것은 아니나, 그 책의 제목만큼이나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인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떤가요? 세상이 지옥과 방불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원: 형상의 회복과 완성
그러므로 구원이란 것은 바로 우리가 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완성해 나간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관계 회복이 먼저라는 뜻입니다. “우리”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죄인인 우리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어떻게요?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데리고 좋은 곳으로 가서 그냥 같이 살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우리들을 영광스럽고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회복시키시기 위함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자신이 너무 마음에 드시는 분이 계십니까? 혹시 그런 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자신에 대해 100% 온전히 만족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문득 문득 자신이 너무 싫어질 때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까지도 온전히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조차도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를 마음에 드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에서 죽으신 분이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냥 우리를 그대로 두기 위해서, 맘에 들지 않는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영광 중의 영광으로 이끌기 위해서, 죄인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지으심을 받는다는 말이 조금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다르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우리가 나타난다는 말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존재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다른 표현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좀더 차근차근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릴 테니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에만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무엇을 이룬다고 하셨습니까?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지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 즉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누리시고 있는 그 “우리의 사랑”을 우리가 누리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그러니까 우리가 그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던 하나님과의 사랑, 우리와의 사랑을 회복하는 것, 그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동의가 되셨나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은 먼저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로 우리끼리 사랑이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으실 때, 물론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를 가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교를 가야 할까요? 사명이라서일까요? 그것만은 아닙니다. 이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불쌍히 여길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이 선교는 사실은 하나님을 위한 비즈니스일 뿐입니다. 선교도 충분히 비즈니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에서 성공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선교가 얼마나 잘 진행되었는 지가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커졌는지,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선교비가 얼마나 모였는지, 그리고 선교의 업적이 얼마인지, 이러한 것을 따진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으로 한다는 것을 잊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진정한 선교, 진정한 구제, 진정한 교회라면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까요? 바로 이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이 모든 일을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과 우선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일입니다.
여러분, 혹시 아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대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또, 혼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돈을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합니다. 자식들이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뭐 그래서 혼도 나고 매를 맞기도 합니다. 좀 더 심한 경우에는 자식들을 내어 쫓으려는 시늉을 하기도 하십니다. 그러시면서도 너 같은 자식을 낳고 내가 미역국을 먹었다고 속상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혼나는 경우는 집에서 쫓아 냈다고 진짜 집을 나가는 경우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모와 자녀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식은 부모에게 잘못을 하기도 하고 나쁜 짓들도 많이 하지만, 그러나 자식이 아버지에게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아버지와 자식으로 그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관계 회복의 능력: 세상 속에서의 평안
이것이 여러분과 하나님 안에 있는 가장 귀한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기억하고 이 의미를 아신다면, 여러분 인생에서 더 이상 여러분을 흔들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실패와 좌절, 내가 겪고 있는 하루의 일과,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해하는 모든 일들, 내가 이 땅에서 이룬 모든 것들도, 이제는 여러분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 이런 것들 모두가 다 별것이 아닌 것들이구나!’ 왜냐하면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있다면, 이 회복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너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혼이 나고 매를 맞은 아이도 돌아갈 집이 없는 고아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직장 생활에서 여기 저기서 치이고 힘들고, 사업장에서 장사가 잘 되지 않으며 종업원이나 손님들에게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받더라도, 그 가장을 맞이하는 친절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자녀가 있는 집을 가졌다면, 우리는 견딜 수 있습니다.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무수히 많이 세상에서 무너집니다. 지난주에도 우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무너졌습니다. 속도 상했으며, 화도 났고, 신경질도 부렸습니다. 물론 겉으로 표시는 내지 않고 잘 숨기기는 하지요, 이제 고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희 집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속으로는 화를 내곤 합니다. 어떤 때는 짜증도 나지만, 이를 애써 참아내지만, 속으로는 벌써 짜증이 났습니다. 화도 났습니다. 그리고 속으로는 별 생각을 다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무너지기는 하지만, 저는 제가 어디서 무너지는 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품 속입니다. 저는 집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은 푸른 초장이 항상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쉴 만한 물가”는 항상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왜 일까요?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결국은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이 만족이 하나님의 품 속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주 설교에서 이 만족이 하나님의 품에서 시작되어서 어디까지 가게 되는지를 함께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는 정말로 놀라운 책입니다. 창세기 1장의 설교에서 요한복음 17장 외에는 다른 신약 구절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오는 이 설교에서 수많은 신약의 내용들을 만났음을 확신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여러분과 저는 지금 새롭게 창조되는 중이며, 회복되는 중입니다. 원상 복구가 아닙니다.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완성을 우리가 보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를 통해서 이 영광의 길을 우리가 함께 갈 것입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합시다! 하나님, 저희가 무너진 그곳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한다는, 그래서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고백을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저희가 깨닫기를 원합니다. 저희의 답답했던 심령, 저희가 너무나 부족했고 항상 모자란 것 같아, 저희의 욕심대로 되지 않는 인생 때문에 속상했던 그 시간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고 있으며 내가 그 집에 영원히 거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진리 앞에서, 주님, 저희의 인생이 무너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님의 사랑 때문에 저희가 무너져 무릎 꿇게 하시고, 그 안에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을 찬송하게 하여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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