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2 1절에서 4절까지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멘.

 

아브라함 언약: 하나님의 복음 -갈라디아서 3:8

아마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오늘 처음 교회에 오신 분이 아닌 이상은 한번 이상은 들으셨던 성경 말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유명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우리가 함께 살펴본 것처럼 갈라디아서 3 8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아주 분명하게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이처럼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는 본문이 복음이라는 것을 미리 생각하고 같이 접근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 '떠나라'

그리고 복음의 시작이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 1절은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땅으로 가라라는 말씀으로 복음을 시작하십니다. , 시작은 고향을 떠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고향' 의미: 내가 주인

흔히 고향을 떠올리면 마음에는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포근하며, 항상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한국에서 미국 땅으로 이민 우리들은 아마 모두 한국에 대한 향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이라 하면 이러한 모든 것들이 생각이 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고향을 성경의 문맥 안에서 이해한다면 이와는 조금 다른 의미라는 것을 있습니다. 고향이란 말을 히브리 원문을 직역해서 살펴보면, ‘나의 땅으로부터라는 뜻이 됩니다. ‘내가 살던 이므로 고향이라고 번역하게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고향은 우르가 것입니다. 하란이 수도 있겠지만, 땅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2 고향쯤 것이며, 사실 우르가 진짜 고향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고 있는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는 말씀일까요? 그런데 가라고 명령하신 장소는 어디였습니까? 하나님이 지시할 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고향이란 의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지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지시한 땅과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사용된 말이라는 것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장소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며 하나님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가나안과 대조되는 본문의 고향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아련한 고향, 다시 가고 싶었던 그곳이 아니라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되었던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고 노릇을 했던 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고향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장소를 말한다고 하기보다는, 내가 중심이 되며, 내가 왕이 되고,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내가 울타리를 쳤던 나의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험과 지식의 울타리를 넘어서

어떤 때는 나의 경험으로 울타리를 칩니다. 여러분의 세상을 30, 40, 혹은 50년을 살다 보면, 우리 모두는 우리만의 경험과 지식이 생기며, 어떤 것은 확고하게 안에서 것으로 자리를 잡기도 합니다.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경험과 지식과 신념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상식에 맞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옳지 않다거나 다르다거나 혹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내가 살아온 경험과 세계가 사실은 우리로서는 전부가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일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일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과 상식으로는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에 다다를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떠남

그렇다면 그것으로부터 떠난다는 말이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조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그냥 생각하고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조차 떠나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상처와 아픔, 그리고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 왔던 내가 살아왔던 모든 인생의 시간과 기억들이 나의 마음속에 항상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생 보기

그런데 성경은 그것들을 무시하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서 떠나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는 중심으로 인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야 하나님이 지시하는 하나님의 땅의 관점에서 이제 나의 인생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나의 중심으로 인생을 항상 판단하며, 감정, 혹은 경험, 지식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을 판단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우리 인생의 성공도 판단하며, 내가 땅에서 살았다고, 혹은 실패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상처에 대해서도 우리는 덮어 두거나, 혹은 그것으로 인해서 계속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의 성에서 벗어나기

우리는 불안해 하고 또한 두려워 합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사실은 굉장히 지지부진하다고, 엉망이 되었다고, 또는 실패했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에 대해 합리화를 해야지만 우리가 수가 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 삶을 정당화시킬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것이라는 성에, 내가 만든 땅에, 내가 울타리를 곳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실 우리들이 있는 곳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고작 우리가 있는 행동은 그것을 그저 참아내거나, 견뎌내는 것이 대부분일 경우가 허다합니다.

 

공격성의 뿌리: 내면의 불안과 상처

이러한 반응들은 어떻게 보면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경우에 이와는 정반대의 굉장히 공격적인 행동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경험해 왔습니다. 우리 인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불만이라는 단어로 이야기하기도 하고, 혹은 분노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우리에게 자주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별거 아닌 일에도 우리는 종종 분노하거나 공격적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집에서 아내가 특별한 레시피를 찾아내 저녁상에 맛있게 된장찌개를 끓였다고 봅시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남편이 특별한 찌개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행복한 저녁 식사가 끝났더라면 좋겠는데 항상 부인은 남편에게 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남편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오늘 된장찌개가 어땠어?’ 그러면 남편들이 대부분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오늘 된장찌개가 특별히 맛있었던 같네. 먹었소.’ 그런데 경험해 보신 분들도 계실 텐데, 보통 이렇게 끝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면 전에는 내가 만든 된장찌개가 맛이 없었나?’라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이상하지요. 남편은 별다른 뜻이 없는 칭찬과 감사였는데 아내는 상당히 공격적으로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의 말을 들은 남편은 역시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 시작하는 거야?’

 

우리는 이렇게 상대방의 말을 공격적으로 듣고 쉽게 공격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 우리 자신 속에 잠재되어 있는 불안감이나 두려움, 과거에 받았던 상처와 아픔들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 떠남과 자유

그런데 놀랍게도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을 가두고 있는 땅으로부터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거나 버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은 너무나 정확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향을 떠나서 본향으로 가라!’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인생을 진정한 인생으로 만들어 주신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는 바로 땅이 우리의 진정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고, 인생은 눈으로, 내가 판단하는 기준과 가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눈과 가치, 그리고 그리스도가 나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인생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땅을 떠난 사람이며, 비록 여전히 나의 과거 상처가 마음속에 남아 나를 여전히 힘들게 때도 있으나, 이제는 과거의 모든 순간들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위로하시고 회복시키셨고, 점점 하나님의 형상과 닮아가는 모습으로 나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아직 완전한 모습으로 성장하지도 않았고 온전히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 공격적일 필요가 없게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상처가 이상 우리를 아프게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것입니다.

 

삭개오 이야기: 나무 위의 열심과 도망

여러분, 복음서에 나오는 삭개오를 아실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그는 무척이나 예수님이 보고 싶었으나, 그가 키가 작았던 그는 없이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의 행렬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하는 갈망이 대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이러한 삭개오의 모습도 그가 가지고 있었던 자기 땅의 한계라는 것을 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이었으며, 세리였기에 오히려 같은 동포들로부터 미움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울타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가서 예수님을 보고 싶었으나, 아무에게도 자신을 앞으로 보내 달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생각에서 나온 이야기만이 아닌 것은, 예수님 당시에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던 장소에는 항상 어린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아이들이 당신 앞으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키가 작아서 뒤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어린 아이들도 주님 앞으로 나아갈 있었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아갈 없었으며, 그런 그의 진정한 문제는 앞으로 나아갈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고, 그것을 부탁할 만큼 긴밀하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못했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가 만든 울타리로 인해 삭개오는 그것을 넘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나무로 올라갔던 것은 그의 열심이었고, 열정이었으며, 갈망이었으나, 동시에 도망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올라가서 몰래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 "내려오라!"

그런데 삭개오에게 있어서 복음은 예수님이 그를 보신 사건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보고 삭개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나무로 올라간 삭개오의 열정을 높이 사서 그를 만나 주었더라면, 예수님은 나무로 가서 나무 위로 올라가서 그와 나뭇가지에 나란히 앉아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명령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라, 그것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여러분은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울타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서 가지시는 예수님의 관점과 가치를 알아야 하며, 예수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루시는 놀라운 영광이 여러분 속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여러분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을 보고 기뻐할 알아야 하고, 여러분의 믿음의 형제들을 보고도 기뻐할 알아야 합니다.

 

'친족' 떠나라: 새로운 가족 관계 (교회)

이것이 그다음 본문에 나오는 친족을 떠나라는 명령에 들어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껍질을 벗는다면 이제 여러분은 이상 여러분이 의지할 있는 언덕이라고 생각되는 친족, 혹은 가족 관계로부터도 떠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는 새로운 관계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 관계가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여러분은 물론 땅에서 하나님의 혈연으로 주신 자녀,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님과 굉장히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고, 성경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돌보아야 하는 중요한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가족과는 다른 다른 가족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은 아니나, 여러분의 중의 살이고 중에 뼈인 그러한 새로운 관계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몸의 일부분이 새로운 가족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가족의 손이고 발이고 눈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유기적인 관계에서 발이 지쳐서 어디를 가고 싶은데 가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고, 무언가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손이 다쳐서 일을 없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됨의 실천: 지체 의식과 사랑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들이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짊어지며 일을 시작합니다. 교회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진리를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우리의 삶에서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들은 어쩌면 이제까지 우리들이 이루지 못했던, 그리고 땅이 감당하지 못하고 그리고 우리조차 사실을 아직도 알지 못하는 신비한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중의 살이 무엇이며 중에 뼈가 무엇인지를 신앙 안에서 우리가 함께 인생을 나눌 의미를 알게 것입니다.

 

이산가족에서 가족으로

어려울 서로 어깨를 기대며 형제자매가 힘들 서로 도와주는 손길만 있을 아니라, 나의 모든 생명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우리가 알고, 가족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기억할 있다면 우리는 내가 진정으로 떠나야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떠한 관계로부터 빠져나온 자들인지, 내가 생각했던 나의 가까운 사람들로 만들어진 울타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눈 가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도움을 청할 알게 되고, 도움을 받는 것을 알게 되며, 이들과 함께 가는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됨의 의미: 함께 걷는 순례자

우리들은 모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고, 서로 있는 것도 각기 다릅니다. 어떤 분이 잘하는 일이 있을 있습니다. 여러분이 뛰어날 있습니다. 교회 내에는 영적으로 뛰어난 분이 있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육적인 능력이 뛰어납니다. 교회 모든 사람들은 각각 다른 은사와 달란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교회 내에서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일 때도 있으며, 교회 내에서 많은 약한 부분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약한 모습들을 발견했을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이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보았을 , 사람은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느냐는 말을 않을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을 ,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향해 함께 서로 도우며 이것을 하자는 말을 있게 됩니다. 내가 생각한 좋은 생각들,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혼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원하는 지체들에게 함께 일들을 나가자고 먼저 이야기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께 하는 일이 잘되지 않았을 우리는 서로 권면하고 회개하며 다시 한번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돌이킬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과 항상 함께 해야 합니다. 길들을 같이 걸어가야 하며 아무도 우리들을 나눌 없는 우리는 몸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교회 지체들이지만 서로의 얼굴도 모를 때도 있고, 같은 구역에 있는 식구들 외에는 다른 지체들의 사정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힘을 써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애쓰고 힘써서 지키라.’ 물리적으로 하나의 몸이 되라고 하시는 명령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바뀌면 우리는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정을 함께 나누고 무언가를 주고받은 경험이 있으며, 나의 인생에 어떠한 좋은 영향을 사람만을 나와 몸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교회에 오면 내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우리의 지체들은 비록 지금까지는 떨어져 살았지만, 사실은 이산가족인 셈입니다. 우리는 가족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서로 떨어져 살아온 서로 얼굴을 보지도 못했던 쌍둥이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서로 남으로 살았으나, 둘은 가족인 것처럼 여러분도 가족입니다. 그것을 애쓰고 힘써서 우리가 지키는 것입니다. 마땅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곳으로 지금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곳으로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처음 오셔서 신앙생활을 시작할 교회의 등록 교인이 되기 전에 많은 까다로운 과정들을 거치셨을 것입니다. 우선 가족 반에서 같이 공부했으며, 과정이 끝나면 장로님들이 만나서 같이 교제를 나누고, 서로의 신앙도 같이 나누고 하는 과정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를 가지는 지체이므로 우리 사람 사람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몸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몸이 아니신 분들에게 그리스도가 머리라는 것을 가르쳐 드리며,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도록 우리가 도와야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면, 여러분과 저는 떼어낼 없는 형제와 자매입니다. 물론 실망이 있을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할 때에도, 우리는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같이 걸어가기를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 친하고 오랜만에 보신 분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어색하고 친하지 않은 분들에게도 반갑게 인사해야 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웃는 얼굴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천국에서 영원히 가족들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어색해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과 기쁨과 즐거움은 물론, 어려움과 아픔도 같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목사인 저조차 이것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여러분에게, 그리고 저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같이 순례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하는, 세상이 놀랄 수밖에 없는 세상도 감당할 없는 하나님의 공동체로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 떠나라: 우상숭배와의 결별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살펴볼 말씀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에 관한 것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말은 부모를 떠나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를 떠난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혼자서 독립된 존재로 살아가라는 뜻일까요? 어느 정도는 그러한 뜻을 포함하는 말씀이 맞습니다. 성경에서도 그러한 의미의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혼인을 하게 되면 우리는 부모를 떠나야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부모와 떨어져 살라는 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여러 가지로 독립해야 하는데, 가장 것은 정신적인 독립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의존하는 존재에서 이제는 독립된 가정을 꾸려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명령도 이러한 의미로만 이해해야 할까요? 이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성경의 문맥과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호수아 24장에는 분명히 데라와 그의 집안 특징에 관한 말씀이 나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데라는 우상을 섬기던 집안이었습니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 받은 떠나라는 명령은 데라와 함께 살고 있었던 우르라는 나라였고, 다음이 가족 관계였으며, 번째로 떠나야 했던 것은 바로 신앙적인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삶을 향해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예배: 하나님 중심의

자신의 이전 삶을, 우상을 섬기며 살았던 삶을 잊어버리고 그냥 없는 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자신의 모든 인생과 삶을 가나안의 관점에서 보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을 하나님 백성의 눈으로 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떠나야 하는 마지막은 우상이었습니다. 우상을 떠나서 이제는 참다운 예배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예배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며, 우리가 시달려 왔던 모든 우상의 삶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 우상들

여러분과 저는 마음속에 계속해서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마음이 두려우면 우상을 만듭니다. 불안하거나 욕심이 생겨도 우상을 만들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상의 수는 한두 개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걱정과 욕심들로 가득하게 되면 개수만큼 쉽게 우상이 우리들의 마음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이 생기게 되면 그것을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들이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도 우리의 우상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달은 이미 정복했고 지금은 화성을 정복하려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는 걸음을 떼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존재입니다. 화성을 향해 가겠다는 우리들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서 머물러 있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움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며 약간의 오해가 있으면 그것을 붙잡고 오랜 시간을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떠남과 복의 약속: 회개와 믿음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서 떠나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칼빈은 창세기 강해에서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해석했습니다. ‘당신의 나라를 포기할 때까지, 당신이 하나님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때까지, 당신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가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 때까지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바로 이러한 떠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의 시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다음으로 넘어갑니다. 그것은 바로 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십니다.

 

회심: 단회적 방향 전환

신자의 표지가 회개라면 그다음 오는 하나님의 복은 신자인 우리가 누리게 되는 삶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삶의 내용을 우리는 회개와 함께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가지를 함께 보게 됩니다. 앞의 것이 회개라면, 그와 함께 오는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복이며 다른 말로 하면 믿음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의롭게 만들며, 우리들이 그토록 원하는 거룩을 살게 만들어 내는, 신자의 삶의 핵심입니다. 회개와 믿음입니다. 가지는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순간 과거에 있었던 것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로 돌이키게 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이를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회개: 지속적인 과정

신자의 일생에서 단번에 일어나는 일처럼 보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일생에서 일어나는 인생의 방향 전환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이 바뀌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회심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바로 우리의 구원의 열매들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 회개와 믿음의 동행

그러므로 신자인 우리들이 복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며 지금은 자리를 떠나 어떠한 곳으로 옮겨진 자인가를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전에 내가 어떤 죄에 빠져 있었으며, 주님을 몰랐던 삶이 어떠했는지, 나라와 왕국에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멸시했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해 드리지 않았고, 나의 삶의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부여하셨고 나를 창조하셨지만 나는 끊임없이 마음대로 살았고, 그러한 삶이 사는 삶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그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섬겼던 우상을 몰랐습니다.

 

우리의 우상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내가 바로 우상입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가 불러들이는 것이 바로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돈이 수도 있고, 성공이 수도 있고, 그리고 건강이 수도 있는 것입니다. 패배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불러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존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조차 우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이러한 많은 우상들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면서 불러들이면서,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떠날 있으며,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 민족과 창대한 이름

그런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에서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여기서 민족이라는 것은 크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위대하다라고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렇게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상이나 섬기고 없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여겨 주십니다.

 

회개 자체가 복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회개를 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 아파하며 하는 회개가 전부가 아니라 회개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기뻐할 일이며, 감사할 일이고, 찬양할 일입니다. 회개는 믿음과 함께 우리의 복입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시선

여러분은 하늘에 속했으며 여러분의 중심을 하늘로 옮기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상 땅에만 매여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반드시 누려야 하는 복이므로 여러분은 이상 여러분의 인생을 땅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성공이나 이러한 것들로 여러분의 인생을 가늠하지 마십시오.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여러분의 자녀를 바라보십시오. 아이가 땅에서 어떠한 성공이나 어떠한 실패를 경험하는 것보다 그가 하나님의 손길 아래서 얼마나 귀한 존재이며, 자신으로서 얼마나 아름다운 자이고, 그가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가는 존재인지 제발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자녀에게 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아내에게도, 여러분의 남편에게도,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를 향해 외치시는 사랑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뜨거운 마음을, 눈길을, 사랑의 숨결을 놓치지 마십시오.

 

마치는 기도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는 주님으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있기에 저희는 떠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발길은 끈적이(역청) 발바닥에 붙여 놓은 것처럼 자리로부터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듯하고, 우리를 둘러싼 많은 유혹들이 우리를 흔들어 같지만, 저희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요, 아버지 하나님이며, 성령 하나님이시므로, 주님, 주님을 향하여 오늘도 우리가 약하며 비틀거리며 흔들릴지라도 발걸음을 떼게 하여 주시며, 약해진 우리의 무릎을 강하게 세워 주시며, 비뚤어진 우리의 발걸음을 올바로 걷게 하셔서,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에 함께 함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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