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11 29절에서 32절까지 말씀입니다.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아멘.

 

족보 이야기의 시작: 셈과 데라

오늘 읽은 본문은 11 10절부터 시작되는 족보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개의 족보가 나오는데 하나는 셈의 족보이며 하나는 데라의 족보입니다. 족보가 나올 때마다 우리에게 드는 생각은 나오는 이름들을 하나같이 외우기도 어렵다는 것과, 성경에는 이렇게 많은 족보가 나와야 하나라는 것입니다.

 

족보의 가치와 한국의 족보 문화

사실상 우리 한국도 족보에 관한 것이라면 세계에서 빠질 없는 나라 하나입니다. 많은 외국의 학자들이 우리나라의 족보를 보고 놀라는데 왜냐하면 거의 2 가까운 기간을 족보를 유지해온 그런 집안이나 왕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족보의 특징은 관직에 나가거나 이름을 떨친 그런 사람이 생기게 되면 거기에서 다른 파까지 생겨나 여러 가지 계보로 갈라지게 되기도 합니다. 조선 시대 당시에는 족보가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가지고 다닐 있는 휴대용 족보가 존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때나 혹은 여행을 , 혹은 딸을 시집보낼 손에 휴대용 족보를 딸려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한국 사람들은 족보를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셈의 족보: 아담 족보와의 연결성 ( 5)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혹은 데라의 족보는 어떤 면에서 보면 셈으로부터 시작하는 족보를 쓰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전에 있는 족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5장의 아담으로부터 노아에 이르는 족보입니다. 셈으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오늘 족보가 5장에 나오는 족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구조 때문에 입증됩니다.

 

구조적 유사성: 13, 아들

번째로는 족보가 모두 13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대가 정확히 13대가 아닐 가능성이 거의 확실함에도 족보가 모두 13대에 걸친 계보를 기술하고 있으며, 끝을 맺을 때에도 번째 족보가 노아의 아들로 끝이 나는 것처럼 번째 족보에서는 데라의 아들로 끝을 맺습니다.

 

형식적 유사성: '낳고 살았더라'

다음으로는 족보 구조입니다. 5장에서는자녀를 낳았으며 얼마큼 살다가 죽었더라라는 형식으로 기술됩니다. 그런데 셈의 족보에는 이와 비슷하게자녀를 낳고 얼마만큼 살았더라 기술됩니다. 구조상으로 아주 유사합니다. 그리고 족보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노아에게 아들이 있었고 그중에서 셈의 족보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10장의 족보를 뛰어넘어서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5장의 족보를 연결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족보의 결정적 차이: 죽음 vs. 생명 강조

그렇다면 유사한 족보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가장 다른 점을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족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려고 하시며, 우리가 사실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게 될지 확인할 있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번째 특징은, 이미 짐작하고 계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리기를 번째 족보의 특징은자녀를 낳았으며 세에 죽었더라라는 구조입니다. , 얼마만큼 살다가 죽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노아의 홍수로 끝나게 되는 죽음이 강조되는 족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장에 나오는 셈의 족보에서는 죽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분들이 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 년을 살면서 자녀를 낳았다라고 끝이 난다는 말씀입니다. , 이것은 번째 족보처럼 죽음에 강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낳는 , 생명에 강조가 있는 족보라는 사실입니다.

 

생명 족보의 위기: 사래의 불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족보의 특징은 말씀드린 것처럼, ‘낳았더라 반복하는 것이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우리가 함께 읽었던 것처럼 굉장히 중요한 말이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30절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사레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지금까지는 분명히 자녀를 낳았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열거하였는데, 갑자기 사래에게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물론 바벨탑도 굉장히 위기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스스로 탑을 쌓아 가는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되고 결국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그러한 일을 자초했습니다. 바로 이전의 11장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녀를 계속 낳아서 셈의 계보가 계속해서 연결될 것처럼 보였으나, 갑자기 사래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처음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오게 것입니다.

 

위기의 의미: 하나님의 개입과 인도하심 예고

정말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의 족보에서 나오는 이러한 위기들은 특별히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후로부터 어떠한 일을 전개해 나가실 것인지를 결정해 주는 위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기는 어떠한 면에서 본다면 족보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계보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성도인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그렇게 인도하시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핵심 주제: 약속의 아들

왜냐하면 앞으로 펼쳐질 12장부터의 모든 내용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나눈 이야기, 모든 언약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는 모두 가지 중요한 주제로 좁혀질 있다는 것을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아브라함에게 그를 통하여 아들(우리는 이가 이삭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올 것임을 약속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약속하신 아들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제 12장부터 계속 이어지는 구약 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이라고 창세기 설교의 처음부터 등장했던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자손이 지금낳지 못하더라라는 위기에 봉착했으며, 이후로부터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셔서 계보를 이어 나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이야기가 결국은 창세기 전체를 이끌어가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방식: 위기를 통한 믿음

그렇다면 이것은 어떠한 면에서는 위기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위기이자,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위기입니다. 위기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모든 족속들에게는 족보가 그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어야 완성될 있는 족보가 되는 것입니다. 위기이기는 하지만, 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오게 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역사하시는, 우리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손길과 역사가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위기입니다.

 

위기는 복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여호사밧, 아삽)

그러한 면에서 본다면 위기는 성경이 말하는 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는 위기입니다. 바다 수영을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웬만큼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면 먼바다까지 나가서 수영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약간은 깊더라도 모든 분이 수영하는 있어서 별로 크게 겁을 내지 않고 들어갈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실내 수영장입니다. 장소도 깊은 곳이 있으나, 거기에는 높이가 표시되어 있어서 그곳을 피하여 얕은 곳에서 수영을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 남산의 어린이 회관이라는 곳에서 수영하다가 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물을 얼마나 많이 마시며 물에서 허우적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런 저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동급생 여자 친구였는데, 친구는 그냥 물을 걸어 들어와서 저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곳이 사실은 얕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너무 놀라서 발이 닿을 있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했던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렸던 저에게는 그것이 위기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각각 다른 위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닥쳐오는 위기는 발이 닿는 수영장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은, 사실은 안전한 위기입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위기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유는, 이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때 무엇을 있습니까? 성도들의 모든 위기는 아주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며,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위기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라는 유다 왕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믿음이 없었던 왕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믿음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적군이 쳐들어왔을 그는 두려워했으며,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이것이 여호사밧이 했던 외침입니다. 여호사밧 왕보다 놀라운 사람은, 시편 기자 명인 아삽입니다. 여호사밧은 눈에 보이는 적들로 인해 놀라고 힘들어했지만, 아삽은 자기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절망 때문에 힘이 들었습니다. 자신은 속에서 무엇 하나 변변히 이루어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다른 많은 이들이 여전히 세상적으로 승승장구하는 동안 정작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아삽의 인생은 세상적으로 때는 어느 하나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너무나 답답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는 모든 위기를 통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이 진정한 복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 사람 사람도 언제나 예외 없이 위기 속에 있었으며, 그리고 위기 때문에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위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위기의 순간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것이 신자의 위기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름만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분에게 가까이 가고 있는 내가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것이 위기 속에 있는 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데라의 여정: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오늘 족보의 이야기를 통해서 번째로 생각해야 신자의 삶의 원리에 관한 내용은 바로 데라로부터 출발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데라가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가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이 부른 사람은 데라가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데라인가, 아브라함인가? (여호수아, 사도행전)

여호수아서에서도 오늘 본문의 내용이 나오는 것을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 조상들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에 두루 행하게 하였느니라.’” 여호수아의 말씀에 따르면 데라는 다른 신들,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가 살고 있었던 우르라는 땅은 시날 평지가 위치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곳이 지난주에 살폈던 바벨탑을 쌓았던 바벨론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라는 말은 사이에 위치하는 곳을 뜻하며 여기서 강이라 함은 바로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발흥하는 곳에서 조금 아래쪽에 위치하는 도시가 우르인 것입니다. 데라는 지금 장소에서 나온 것이며 그러므로 비옥한 시날 평지에서 나오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라는 지금 앞에 있었던 바벨탑의 이야기와 대조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풍요의 땅에서 탈출하여 생전 가본 적이 없었던 가나안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데라가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갔던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은 아브라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행전의 유명한 스데반의 설교 내용을 살펴볼까 합니다. 사도행전 7 2-4 말씀입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 하나님이 명령하신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서쪽으로의 이동: 하나님께 가까워짐

데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도 아브라함이 데라를 설득해서 함께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동이 특별한 점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서쪽으로 행하여진 일을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항상 동쪽으로 이동하는 모습만 보아왔고, 이는 하나님과는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형상화하는 표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아브라함과 데라의 드디어 서쪽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일이었습니다.

 

하란에서의 멈춤: 세상 유혹과 타협?

그런데 사건이 의외의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것은 데라가 하란 땅에서 정착하게 일이었습니다. 가나안을 목적지로 하여 우르를 떠났으나, 데라가 중간쯤 가다가 갑자기 하란 땅에서 멈추어 서게 됩니다. 데라라는 이름 자체가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단어이며, 하란은 당시에 달의 신을 가장 많이 섬기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땅은 당시에 무역이 굉장히 흥했던 상업 도시입니다.

 

데라 vs. 아브라함: 다른 목적지, 다른 마음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과 데라가 하란 땅에 도착한 것은, 비록 같은 가나안을 향해서 가는 것이나, 서로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는 것을 있습니다. 데라의 목적지는 아브라함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그로 하여금 가나안으로 이동을 명했으나, 데라에게 있어서는 가나안으로의 이동이 하나님의 인도라든지 혹은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가나안으로 떠났던 이유는 그가 그곳에서 누릴 있는 많은 세상적인 것에 있었다는 것을 그가 하란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통해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호화로웠던 도시의 문명이었던 것입니다. 땅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멈추었으며, 그곳에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처음에 데라는 가나안을 향해 떠났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이었고 천국입니다. 천국을 향해 간다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일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조차도 지옥보다는 천국을 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천국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하란에서 멈추어 수도 있거나, 혹은 아예 가는 길에서 돌아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된 가나안: 땅이 아닌 하나님

아브라함도 똑같이 가나안을 향해 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의 마음을 뛰게 했던 것은 가나안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란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나안으로 가려고 했던 것은 땅이 우르보다 좋았기 때문도 아니었고, 하란보다 좋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가나안으로 가라고 보여주셨던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가라고 명하신 가나안에 무엇인가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냐는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아브라함이 갔을 , 거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 준비해 두신 그의 소유의 땅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하여 예비해 두신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조금씩 자기의 땅을 늘려서 땅에서 행복하게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도 그곳에서 자신의 땅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사라가 죽었을 그를 장사하기 위하여 마련한 하나가 전부입니다. 실질적인 자기의 땅은 그러므로 가나안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나그네로서 영원한 도성을 바라봄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 있어서 가나안은 자기 땅을 얻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나그네처럼 살고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나안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으나, 그곳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안에서 살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하란 vs. 가나안)

이처럼 아브라함과 데라는 정말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똑같이 가나안을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을 보았던 눈과, 그들의 마음과 목적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으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며 천국으로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할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있는 곳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이 아니라 천국에서 누리게 무엇인가에만 있다면,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며 여러분과 동행하실 성령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나에게 무엇인가를 있는 그러한 아무런 신에게 있다면, 여러분과 저는 하란에 머물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데라의 길에 있습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의 길에 있습니까?

 

성경은 족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통렬하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과연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이며 이름을 창대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될 사람은 누구인가를 성경은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족보 이름들의 의미: 세상 vs. 하나님 나라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하여 마지막 가지 하나님의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족보를 대할 가장 힘든 점은 이름들이 흔하지 않다는 것과 이름들을 외우기가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족보 이름들의 95% 이상은 성경에 번만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름들이 읽기도 어려운 이름들이 대부분입니다.

 

기억되지 않는 세상의 이름 vs. 기억되는 언약의 이름

그리고 이름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다시 등장할 이름도 아니고, 어찌 보면 정말 보잘것없는 이름일 뿐입니다. 아무런 주의를 끌지 못하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구약의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이 모세였으며, 그는 이러한 이름들을 세세히 기록했으나 애굽의 바로의 이름에 대해서는 일절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살았던 궁정에 있었던 바로의 이름마저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냥 한번 스쳐 지나가듯이 등장한 이름들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을 소홀하게 여기지 않으시며, 이름들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름들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기록된 이름들은 비록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는 않으나 성경에 남아서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진 이름이 되었습니다. 바벨탑과 바벨 성의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으며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한 스토리입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 믿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와 반대로 성경에 나오는 족보의 기록은 읽을 때마다 힘이 들고 어떤 때는 지겹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하나님이 중요하게 의미를 두는 이름들은 어느 것인지 우리는 이제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저는 가끔 풀밭의 잡초를 보면서도 느낄 있습니다.

 

잡초의 비유: 이름 없는 자의 믿음

우리가 길을 가다 보면, 콘크리트 바닥의 좁은 사이를 가르고 자라고 있는 많은 잡초를 발견할 있습니다. 풀들을 보면 질기기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성껏 심은 작물들도 자라지 않으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풀들이 질기게 생명을 유지하며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고 기특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서 뿌리를 내리고 기어이 살아보겠다고 머리를 내미는 것이 잡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풀들을 잡초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유는 우리가 풀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혹시 한국에서 제일 많은 잡초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망초입니다. 개망초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자가 망할자입니다. 왜냐하면 풀이 조선이 망할 시점인 을사조약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철도를 깔기 위해서 캐나다에서 나무들을 들여올 나무들 사이에서 묻어서 한국으로 유입된 풀이므로, 나라가 망하기 시작했을 피어난 풀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풀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분도 보시면 아실 만큼 너무나 흔한 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망초라 불리는 잡초는 한방에서는 중요한 약재로도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잡초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풀입니다.

 

우리가 식용으로 사용하는 씨앗들인 , 보리, 등은 영양분이 안에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땅에 심으면 영양분으로 어린 식물이 싹을 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잡초는 대부분 속에 아무런 영양분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잡초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영양소가 풍부했다면 우리가 벌써 식용으로 사용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잡초들의 씨앗은 땅에 떨어진 후에 비가 내리지 않고 해가 비치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는 싹을 틔울 없습니다. 오로지 하늘만 바라보고 자라는 풀이 잡초입니다. , 그러면 어느 식물이 믿음이 좋을까요? 자기 힘으로 자라는 벼일까요? 하늘만 바라보며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망초일까요? 우리가 기억하기도 힘든 이름들을 가진 잡초들은 그러므로 믿음의 식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감추어진 이야기의 중심

바벨탑은 화려합니다. 니므롯도 근동 일대에서 대단한 위세를 떨친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읽은 족보의 사람들은 이야기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진짜 스토리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감추어진 진짜 이야기는 바로 이름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그들 이름 하나하나마다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바벨의 이름으로는 그리스도가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이름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들은 가장 빛나는 이름이며,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는 이름이고, 바벨탑보다 어떤 세상의 용사들의 이름보다도 성경이 귀하게 여기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름: 생명책에 기록됨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바벨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바벨처럼 이름을 내고 싶어하며, 세상에서 잊혀질까 보아, 아니면 누가 나를 무시할까 보아 항상 전전긍긍하며 자존심을 세우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모든 일에서 참아내며 살다가 나의 자아가 무시받는다고 느끼는 순간 우리는 핏대를 올리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기도 합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들은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님이 기록했습니다. 감추어진 이름들을 통해서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세상을 구하는 것은 바벨론도, 페르시아도 로마, 그리스도도 아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도 느부갓네살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구유에서 태어났던 어린 아기입니다. 끈질기게 여인의 후손의 계보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준비하신 족보를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어떤가요? 놀랍게도 여러분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이 낫게 하는 모든 기적을 보고 놀라지 말라. 너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성도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이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땅에 오십니다. 성도의 수가 차기까지,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을 유보하셨으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성도의 이름이 생명책의 마지막 잉크가 마르는 그때 땅에 오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족보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이며, 족보 속의 여러분의 이름은 바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족보가 됩니다. 여러분은 족보에 기록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여러분은 모든 일들에서 본인들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집을 사셨다면 계약할 여러분의 이름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세상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소유를 확정 짓는 표시인 것입니다. 이름이 쓰여 있는 이상 우리들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누구의 이름이 쓰여 있는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여러분에게 쓰여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의 소유인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족보인 같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교회 완성과 함께 예수님은 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이름이 여러분의 이름입니다.

 

성도의 역설적 정체성 (고후 6)

우리는 앞서서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찾게 하시는 것이 바로 족보 속에 들어있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번째로 가나안을 향하여 우리가 바라보아야 대상은 무엇인지, 우리가 향해야 곳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족보를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의 것이며,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자이고,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 8에서 10절까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바울이 기록한 때는 함께 복음을 전했던 모든 이들이 극심한 고난과 고생을 겪고 있을 때였습니다. 앞의 내용에서 수도 없이 매를 맞기도 하고 환난과 궁핍으로 가득 사도들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속이는 같으나 참되나, 무명한 같으나 유명한 자이며, 죽은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으며, 징계를 받는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며, 근심하는 같으나 항상 기뻐하며, 가난한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것이 여러분과 저입니다.

 

마치는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며, 무엇 때문에 힘을 얻고, 무엇으로 인해 팬데믹의 힘든 시기에서도 감사할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으며, 모든 것이 답답하며, 어떤 때는 속이 상하고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기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시며, 주님을 의지하여 아버지를 찾게 하시고 오히려 우리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를 알게 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며, 주님의 족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으므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가장 유명한 자이며, 모든 것을 가진 자이므로, 주님 감사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찬양하며, 즐거워하고 즐거워하나이다. , 주님 주님 앞에 왔으므로, 하늘의 복을 우리에게 풍성히 겪어서 알고 맛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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