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1 1절부터 9절까지 말씀입니다.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서로 말하되,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했으며, 말하되,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무리가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없으리로다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지면에 흩으셨더라.” 아멘.

 

바벨탑 이야기의 시작: 하나의 언어, 동쪽으로의

본문 말씀 , 11 1절은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 땅의 언어가 하나이고 말이 하나였다라는 구절로 오늘 본문이 시작된 이유는 이제 다루게 인간들의 역사가 어떻게 혼잡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노아의 자손들이 처음으로 다시 인류의 역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인구가 늘고 이들은 점점 움직이면서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동쪽 이동의 의미: 하나님과 멀어

그런데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살펴보면 목적하는 방향을 통해서 이들 사이에서 무엇인가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챌 있습니다. 2 도입부에는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서 동방이라는 말은 창세기 초반에서도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후에 에덴동산의 동쪽으로 옮겨가는 이야기를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이들은 에덴동산에서 동쪽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토대로 유명한 제임스 주연의에덴의 동쪽이라는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 세상에 반항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의 극본을 작가도 아마도 창세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던 같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훌륭한 영화의 극본을 완성한 같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는 동쪽이라는 것은 구약 전체에 걸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의미로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힌트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이동한 방향은 동쪽입니다.

 

시날 평지: 바벨론의 발흥

이들은 아라랏 산이 위치한 터키 쪽에서 시작하여 시날 평지가 있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시날 평지는 후에 등장하는 바벨론 제국이 발흥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들은 동쪽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문제의 시작인 것입니다.

 

성읍과 건설: 바벨탑 이야기의

이들이 시날 평지에 머무르면서 제일 먼저 일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벨탑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내용을 모르시는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주일학교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내용입니다. 탑을 하늘까지 닿을 있게 높게 세우려고 사람들이 벽돌을 나르고 있으나, 하나님이 이들의 말을 혼잡하게 만들어, 벽돌은 제대로 운반하지 못하게 하여 탑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주일학교에서 많이 가르치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이 탑을 쌓는 일을 멈춘 것뿐 아니라, 성을 짓는 모든 과정을 멈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있습니다. , 탑과 성은 몸으로서 이들은 모든 과정을 멈추게 것입니다. 이야기는 바벨 성과 바벨탑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바벨탑의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경주에 여행을 갔다 와서는 불국사만을 기억하고 경주는 잊어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읽을 , 이들이 얼마나 높게 탑을 쌓았을까에 많은 관심을 두게 됩니다.

 

탑의 의미: 지구라트와 인간의

하늘까지 쌓으려면 얼마나 높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표현은 사실 이들이 얼마나 높게 탑을 쌓았느냐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서 인간의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수메르 사람들은 바벨 혹은 바벨 성을 '지구라트(ziggurat)'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계단이 있는 아주 높은 탑을 계속해서 높이 쌓은 계단을 통해서 탑이 하늘과 이어지게 만들어, 그곳을 신을 만날 있는 장소로 삼으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는 탑의 이름을 “Gate of God (신의 )’이라고도 불렀습니다. , 신의 문이라는 장소에서 신을 만날 있으며, 여기에서 그들을 위해서 제사나 예배를 하는 장소로 여겼던 것입니다.

 

탑을 통해서 인간은 신을 만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하늘 높이 쌓아 올린 탑에 자신을 위치시켜서 그들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의도도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장소는 그러한 종교적인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혹은 탑을 쌓았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장소로 지어졌다면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던 가장 높은 장소는 어디였는지 아시는 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장소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 바로 예루살렘이 있던 모리아 산이라고도 불리는 시온 산입니다. 그곳에는 성전이 있으며, 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 건물을 지은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수가 없습니다.

 

바벨탑의 문제 (1): 인간의 방법 (벽돌 vs. )

그럼 바벨탑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을까요?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탑으로 인하여 모든 노아의 후손들을 흩어 버리셨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번째 이유입니다. 본문 3절의 내용입니다. ‘서로 말하되 ,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벽돌을 만드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실질적으로 시날 평지가 있는 바벨론 지방에는 진흙이 워낙 많았기에, 그것으로 벽돌을 구워서 건물을 짓는 것이 아주 일반적인 건축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지역에서는 바벨탑처럼 생각되어지는 아주 어마어마한 탑들의 흔적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시대에 건설된 많은 도시 건축물들이나 신전들이 만들어진 과정들을 쉽게 상상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주일학교 이렇게 배웠던 같습니다. 이처럼 시대 사람들이 다듬은 돌이 아니라 벽돌을 만들 있는 기술을 이용하여 거기에 역청을 발라서 아주 완벽한 건물을 만들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성경이 이렇게 자세히 벽돌을 만드는 과정을 기술한 의미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같습니다. 결국 이들은 돌을 대신하기 위하여 벽돌을 만들었으며 진흙을 대신하기 위하여 역청을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벽돌을 만드는 기술에 대해 읽으면서 이것을 새로운 과학적인 발전으로 쉽게 해석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 vs. 인간의

그런데 여러분은 예루살렘 성전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혹시 기억하십니까? 벽돌을 사용했습니까? 아닙니다. 돌을 통째로 쪼아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예루살렘의 성전이 있는 곳이 너무 시끄러우면 되기 때문에, 밖에서 멀리 떨어져서 돌을 쪼아서 모양을 만든 후에, 이를 성전 터로 운반해서 만든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멸망할 때를 묘사하면서 위에 하나라도 남기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돌로 지은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탑보다 훨씬 나중에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돌로 짓게 하셨습니다. 물론 예루살렘이 위치하는 가나안 지방의 돌이 성전을 짓기에 나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방법대로 인간이 생각하는 최상의 기술인 벽돌을 구워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원하시는 방법대로 일을 하는 것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방법보다는,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모시며, 섬기고, 예배하려고 하였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대의 사람들이 돌보다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벽돌을 구워 내는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행위 종교의

오늘날의 이야기로 말하자면,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있어, 우리가 좋아하고 기뻐할 있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동원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 쉽게 우리는 하나님도 우리들처럼 이것들을 기뻐하실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경우가 우리에게 너무나 많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낸 것도 굉장히 많으며,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여서 기독교의 전통처럼 여기고 있는 중에서도 이러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굉장히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것들은 죽은 전통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실수를 쉽게 저지를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거나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모든 것은 실상 인간이 만든 모든 이방 신들과 종교의 근본적인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약적인 표현에서는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힘과 능력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라고 하며 이를행위의 종교라고 합니다. 결국은 자기가 만든 방법으로 자기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 하거나, 혹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이르려고 하는 것으로, 이는 결국 거짓 종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거짓 종교가 무서운 이유는 여기에 정성이 들어가 있고 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짓 종교는 나를 의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나 의지는 결국 예수님께서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는 말로 모든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못하게 됩니다.

 

신앙의 기준: 은혜 의존 (십자가)

사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실수를 합니다. 모든 것을 모르고 미숙해서 어떤 일들에 있어 잘못을 저지를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배당을 보고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 실수도 포함될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번쯤은 말실수를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를 결정하는 가지가 있습니다.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아야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무엇을 의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를 의지할 것인지, 아니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문제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오해: 행함 없는 믿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행위를은혜라고 표현할 있습니다. 은혜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단어이므로, 우리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주권적이며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100%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은혜를 이해하게 되면 어떠한 일이 생기게 되느냐 하면, 결국 우리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앞으로도 우리가 해내야 하는 것도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께서 나의 앞길을 책임져 주실 것이므로, 나는 이제 교회에 와서 입으로만 떠들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예수를 믿되 말로만 믿는 것입니다. 찬송하고, 감사하며, 그리고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지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얼마만큼 올바르게 알고 있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하는 것으로 나의 신앙 생활을 대체하려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개혁신앙과 기도 생활의 중요

여러분은 참된 개혁 신앙을 얘기한다면 어떠한 것이 생각이 나십니까?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한번 점검해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증이 있으십니까? 말씀을 듣지 않고는 나의 인생과 삶이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드신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 개혁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여러분은 얼마나 기도를 하십니까? 역사적으로 개혁 신앙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기도를 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전무후무하게 지금의 개혁교회는 기도의 소리가 줄어들었습니다.

 

어떻게 개혁 신앙을 올바른 믿음으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도에 소홀하여 그저 주일 예배 시간과 하루에 있는 식사 기도 외에 다른 기도의 생활을 가지지 않은 우리가 예수를 올바르게 믿고 있다고 있을까요? 어찌 보면 이렇게 기도에 자신의 시간을 드리지 않으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할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기도의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아서 주실 '이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열심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의미는 인생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미래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이 정말로 불쌍한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신앙을 올바르다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기도가 하고 싶지만 그러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기가 힘들고 기도가 되지 않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더욱더 기도하셔야 합니다. 조금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달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어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구원과 행위의 관계: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멋진 기도를 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가야만 하는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대로 깨닫는 것이 바로 올바른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의 인생 전체가 주님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더욱더 주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고, 나의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시며, 그분만이 나의 복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열심을 드리는 것은, 나의 구원에는 전혀 무익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모든 신앙 행위는 나의 구원을 이루어 내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러한 모든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에서는 분명한 일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어머니와 유리 반지 이야기 (하나님이 받으시는 )

제가 이전에도 한번 말씀드렸던 예화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일입니다. 제가 한참 철봉으로 놀고 있을 모래사장에서 반짝이는 사파이어 반지를 발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눈에는 그것이 분명히 사파이어였습니다. 2학년짜리 눈에서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며 푸른 빛을 내는 유리 반지는 틀림없이 사파이어 반지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급하게 주어서 어머님께 가져갔습니다. 어머니께 달려가서 주운 것을 드리며 예쁜 반지를 어머님께 끼워 드렸습니다. 기억이 맞다면 저희 어머님께서는 제가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반지를 항상 끼고 계셨습니다. 그때쯤엔 알았습니다. 그것이 흔한 유리알 반지라는 사실을요. 보석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아버님이 주셨던 결혼반지도 빼놓고, 제가 드린 유리 반지를 항상 끼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엄마를 생각하며 선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치는 10원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머니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가치의 보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의 '몸짓'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의지하며 외치는 신음 소리 하나는 하나님께는 너무나도 귀한 소리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프고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순간이 아버지께는 너무나 기쁜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하는 모든 일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지라도 모든 것은 하나님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행위들은 너무나 기쁨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닐 있는 일에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땅을 살면서 무슨 영화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되면 손해 보는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을 해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며, 주님 앞에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주님의 말씀을 읽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모든 몸짓은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가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이 아닌 성전을 짓는 사람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는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벨탑이 아닌 성전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서 예배할 여러분은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찬양할 여러분은 성전으로 지어져 가며,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에도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도 역시 우리는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성전을 여러분들이 짓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문제 (2): 자기 이름을 내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조심해야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을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 말하되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려고 해서는 되는 것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추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나온이름이라는 단어는 앞의 6장의 내용에서 나온 네피림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6장에서 네피림들을 설명할 그들은 용사라 고대의 명성이 있는 사람이었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때 사용된명성이 있는 에서의 명성이 이름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men of names’라고 표현했습니다. 직역하면이름의 사람 것입니다. 그들은 이름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름으로 모든 것이 좌지우지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름으로 자기의 모든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름을 낸다' 의미 (네피림, 니므롯)

물론 유명하고 알려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름들은 사실 신의 이름처럼 자신들을 대표하는 것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이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살폈듯이 홍수 이후에도 최초로 등장한 용사가 니므롯이었고, 이들이 주로 일이 바로 성을 쌓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성읍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였는지가 10 10-12절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성읍이라.’ 여기에 나오는 지명들은 도시의 이름들이며, 이것이 나중에 나라의 이름들로 사용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니므롯이 바로 바벨탑을 쌓았던 주인공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충분히 근거가 있는 해석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vs. 자신의

이름을 낸다는 , 유명해지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탑을 쌓아서 하나님과의 만나는 장소를 만들려고 하는 의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장소에 자기의 이름을 함께 새기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라트에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새겨 둠으로써,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놓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확대해서 해석해 보면 이상 장소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어지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바벨탑의 문제 (3): 흩어짐을 면하려 (하나님 명령 거역)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으로 사람들이 흩어짐을 면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은 여러분이 애굽이나 로마 제국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를 하실 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는 자신을 태양의 아들, 혹은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은 결국 자기가 신이 되는 존재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에서도 황제들은 자신을 신으로 불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며 자신이 가진 것들을 지킬 있었으며, 모든 나라들을 자기 마음대로 통치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흩어지지 않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첫째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끝난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복은 바로 노아와 아들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로는 ‘Fill the earth’, , 세상에서 퍼져 나아가서 땅들을 가득 채우라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명령이자 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번성하여 땅으로 퍼져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와는 정반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자신들이 함께 곳에서 뭉치겠다는 의미입니다.

 

흩어짐의 두려움: 깨어진 관계의

여러분, 이것은 지금 시날 평지에 있는 노아의 자손들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저희로 알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문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이들의 문제는 심각한 관계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있는 단서는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흩어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한민족이고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가족과 같았던 함과 셈과 야벳이 자꾸만 흩어지려고 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들은 그것이 불안하였던 것이며, 그래서 이들은 흩어지는 대신에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 살고 있었으면 탑을 쌓을 필요가 없었을 텐데, 지금 이들은 자꾸만 흩어지려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흩어지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할 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이상 하나님을 섬기고 여호와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서로 미워하게 되었고 싸우기를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결과, 가족과 같았던 민족 사이에서 서로 자기가 났다고 주장하는 여러 나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가족과도 같았던 민족 속에서 서로 자신이 진짜 노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소리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드디어 흩어지기를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이 처음 헤어지려고 했을 때는 말이 다르지 않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들의 말을 다르게 만들어서 흩어지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사실 그들이 흩어지려고 했었던 이유는 이들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흩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복을 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원래는 흩어짐이 좋은 의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 흩어져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이 정해 주셨던 경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며 살도록 되어 있던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상은 그것이 복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심판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멸망의 길을 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를 거부하고 여기저기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경계를 자기 마음대로 넓히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내려오심: 인간 노력의 무의미함과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내려오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보이지 않아서 가까이서 바벨탑을 짓고 있는 장소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는 지금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일이 자신들에게는 대단해 보일지는 모르나,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밝혀 주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길어, 우주 밖에서도 보인다는 말을 여러분은 아마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리장성은 절대로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실상 인간이 쌓은 아무리 구조물도 우주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바벨탑이라는 것이 아무리 높이 쌓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표현하는 식으로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서 보아야 정도로 보잘것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역사와 삶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언어를 쓰는 족속으로서 그들이 만들고 있는 것을 보시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언어 혼잡: 소통의 단절 (하나님의 심판)

그러면 이때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 등이 생겨났던 것일까요? 이렇게 생각하실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때 바로 모든 언어들의 근원이 되는 언어들이 생겨났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때 영어가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영어의 원조가 생긴 것입니다. 지금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7천여 개의 언어가 이때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서로 간에 소통이 되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저들이 서로 의논하고 소통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바벨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이제 그들은 이상 서로 소통할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아버지에게서 나온 민족입니다. 비록 노아에게서 시작하여 대가 흘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없으나, 이들 사이에서 통용하는 언어가 혼잡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이상은 성을 쌓을 수가 없게 것입니다. 탑을 세울 수가 없게 것입니다. 그리고 혼잡한 언어가 시작되면서 인간은 점점 흩어지면서 더욱더 혼잡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언어인 히브리어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의 많은 다양한 언어들이 탄생하게 것입니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인류의 모든 언어는 크게 가지 어군에서 파생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 말과 일본 말은 당연히 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을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간들이 흩어지면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처럼 소통이 혼잡해진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게는 어떠한 결과를 야기하게 되었을까요? 여러분과 저는 같은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한국어를 지금 쓰고 여러분 이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저의 설교를 지금은 모두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으로 답하나, 만약 제가 설교 후에 일대일로 다가가서 설교의 내용을 물으면, 아마 여러분은 조금씩 다른 대답을 하실 것입니다. 설교의 주제에 대해서는 모두 이해하시겠지만 세세한 부분에 대한 이해의 내용은 분명히 많이 다를 것입니다. 이런 일은 멀리 가지 않고, 부부간에서도 일어납니다. 부부간의 다툼의 대부분은 소통이 문제입니다. 서로의 말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 바벨탑의 역전 (성령 안의 소통 회복)

이처럼 소통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소통의 불완전성은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데도 우리는 정확히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통의 혼란, 바벨탑 사건의 심판으로 인한 인간의 삶은 불행으로 끝이 났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멋진 점은 바로 반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심판이 우리들의 잘못으로 주어지고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금요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 많은 고통과 아픔 속에 있으나, 우리의 인생과 삶이 여기서 끝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과 속에 직접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보여주시는 사건이 바로 신약의 오순절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날 다락방에 모였을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십니까? 불의 혀같이 성령님이 임했습니다. 그때 모습을불의 라는 단어로 묘사했습니다. 라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언어 됩니다. 성령님은불의 모습으로 소통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과의 벽이 존재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갈 없는 존재였으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존재가 것입니다. 놀라우신 은혜를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불의 같은 성령님이 나타나신 후에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방언의 사건이 일어나게 것입니다.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들이 일어나서 나라의 방언으로 설교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세계 각지로부터 왔던 이스라엘의 모든 디아스포라,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말로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이는 사도들이 헬라어, 영어, 라틴어 등을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말을 디아스포라들이 각기 자신들의 언어로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건은 언어의 혼잡으로 야기된 소통의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해결될지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소통이 드디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참된 방언의 의미: 깨끗한 입술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스바냐 3:9)

본문의 방언은 여러분과 제가 가끔 기도하다가 은혜를 깨달아, 우리가 미처 알지도 못하는 언어로 기도를 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방언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지금까지의 소통의 부재로 인해 하나님께로 나가지 못한 우리가 드디어 하나님과의 소통의 자리로 나가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소통이 되며, 드디어 하나가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것들을 내어 놓고 모두 유무상통, 서로가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으로 보여주신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그와 똑같은 일을 다시 이루려고 하다가는 한국에 있었던 신앙촌과 같이, 잘못된 쪽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을 똑같이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오순절 방언의 사건은 바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룰 하늘나라의 모습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서로서로 소통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부분을 구약 스바냐서에서 놀랍게 미리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드디어 바벨 사건을 뒤집는 일들을 보여주시는 예언입니다. 스바냐 3 9절의 말씀입니다. “그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말씀의 키워드는입술여호와의 이름’, 그리고부르며입니다. 우리가 앞서서 바벨탑 사건에서 있었던 일이 뒤집어지는 것이 오순절 사건에서 일어났다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스바냐서의 말씀에서는 방언의 사건이 단순히 사도들이 각양의 외국어로 설교를 했다든지, 혹은 우리가 기도를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말을 한다는 것과는 다른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진짜 방언 사건이라는 것은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바벨 사건이 완전히 뒤집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뒤집어져야 할까요? 번째로는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뒤집히고, 그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비로소 소통할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왕이 되셔야 하는 것이며, 그가 나의 진정한 구주요, 나의 모든 것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스바냐서의 말씀처럼 우리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언의 사건이 우리에게 완전하게 이루어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방언을 기적의 사건이나 단순한 상징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성경에서는 바벨탑의 사건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 방언의 사건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면서 범했던 모든 우리의 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뒤집어지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은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입처럼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먼저 하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이 단순한 도덕적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설명하는 귀중한 복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은 바로 바벨 사건이 뒤집어져서 진정한 방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기도를 하다가 너무 기도에 깊이 빠지거나, 혹은 깊은 신앙의 체험이 있을 , 우리도 알지 못하는 말이 여러분 입에서 튀어나올 있습니다. 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여러분의 기분이 좋을 수도 있겠으나, 이는 우리의 신앙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르는 말을 내가 하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 자라는 크게 영향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벨탑의 완전한 역전: 하나님 이름의 기록 (요한계시록 3)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방언은 바벨의 사건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내려는 노력에서 벗어나,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살게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게 , 그것이 바로 바벨의 사건이 뒤집어지는 것이며, 참다운 방언이 되는 것이고, 참다운 오순절이 되는 것이며, 참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이 열매를 향하여, 우리들이 생각하는 성령 하나님의 열매를 향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때를 계시록 3장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이 다시 모으셔서 결코 흩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계속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위에 기록하리라.”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바벨탑 사건의 끝이고 그리고 오순절 사건의 끝인 것입니다. “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찬송가: "비둘기 같이 온유한" (성령의 인도와 위로)

여러분,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우리를 바벨탑이 아니라 성전으로 지으십니다. 그래서 Simon Brown 목사님이 우리가 알고 있는 찬송가 187장을 만드셨습니다. 찬송은 기도송으로 제일 많이 쓰이는 찬양 하나이므로, 곡조는 여러분이 너무나 익숙하지만 이를 끝까지 예배 시간에 불러본 적이 없는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찬송을 예배 시간에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찬송 가사를 제가 잠시 살펴보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비둘기 같이 온유한 은혜의 성령 오셔서, 거친 어루만지사 위로와 평화 주소서.’ 번역이 훌륭하나, ‘거친 어루만지사 자세히 가사에 맞게 풀어보면 이렇게 노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발걸음에 내가 아니라, 바로 주님이 우리의 길이 되시고 인도자가 되어 주소서.’ 영어 본문은 이러합니다. ‘Be Thou our guardian, Thou our guide! O’er every thought and step preside.’ ‘그리고 그때 우리에게 위로와 평화가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은혜와 위로가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세상 아무도 가지지 못했던, 그리고 우리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진짜 위로자가 여러분과 함께 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심령 속에, 성전 여러분 속에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셔서 지금도 우리의 거칠어진 마음, 마음대로 흩어져서 닫혔던 마음, 바벨처럼 내가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마음, 마음대로 살려고 했던 마음속에 거친 어루만지셔서, 나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고, 나의 삶이 되어 주시고, 나의 길이 되어 주시고,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시는 성령님께 '나에게 평화와 위로가 되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진리의 비추사 주의 바로 걸으며, 주님을 옆에 모시고 경건히 살게 하소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심어 주셨으니, 그것으로부터 결코 떠나지 말게 하소서. 결코 안에 있는 평안과 위로의 성령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결코 떠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위로보다 위로가 있다면, 여러분은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면 여기에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어 가시는, 오늘도 짓고 계시는 위로와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마치는

기도합시다. 주님, 저희가 다른 길에 가게 하소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셔서 길을 가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위로의 길을 가게 하소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셔서, 팬데믹의 시간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우며, 나의 속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과 아픔이 심지어 그것이 우리의 목숨과 생명을 위협하는 순간일지라도 성령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위로와 평강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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