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5 11절부터 32절까지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며칠이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나라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하더니 없앤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나라 백성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으니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않으므로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자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것이 것이로되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으므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멘.

 

비유의 배경과 목적: 잃어버린 자를 찾는

오늘 본문은 탕자와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 중에서 오늘 비유만큼 유명한 비유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시작된 상당히 중요한 배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비유를 여전히 탕자의 비유로만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비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비유에 걸맞은 진짜 이름을 찾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유가 처음 시작되는 계기는 오늘 본문 앞의 15 1절과 2절에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이르시되,” 본문 말씀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시작하게 동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시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무리 중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며 비난을 쏟아낸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말씀에는 가지의 비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번째 비유는 여러분이 아시는 잃어버린 양과 양을 찾으러 나가는 목자의 비유였습니다. 번째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드라크마는 데나리온, 노동자의 하루 품삯 해당하는 가치의 동전이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으려 여인의 비유였습니다. 그리고 번째 말씀하신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비유의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하셨던 주요 대상은 누구였을까요? 15 1절과 2절의 말씀에 의하면 세리와 죄인을 가까이하는 예수님을 비난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임을 우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의 특징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과 잃어버린 것을 찾은 후에 이를 기뻐하기 위해서 잔치를 벌이는 주인들의 공통적인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앞으로 천대받던 세리와 죄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기뻐하기는 커녕 이를 비난하고 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소유를 찾는 기쁨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비유에서는 상당히 많은 분량을 사용하여 앞에 나온 비유와 연관시켜 모든 비유의 말씀에 대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아들의 이야기: 시작과

그런데 번째 비유의 시작은 앞에 있는 비유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것을 있습니다. 이전의 비유들에서는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였지만 오늘의 비유에는 잃어버린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작이 아주 극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아버지였고 아들이 있었습니다. 명이 아니라 명의 아들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사실은 아들의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번째 아들인 탕자를 비유의 제목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럼 오늘 비유의 의미를 다루기 전에 이야기의 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탕자와 아버지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탕자가 자기 재산을 챙기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는 많은 부분을 탕자가 얼마나 방탕하게 살았는지, 그리고 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버지가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비유의 가장 중심 내용에 아버지가 등장하여 탕자 아들을 맞이해 그를 회복시켜 받아들이고 잔치를 벌이는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전개라면 대목에서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나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앞에 있었던 번의 비유와도 아주 구조적으로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잃었던 양을 찾고 잔치를 벌인 목자, 그리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잔치를 벌인 여인, 그에 이어서 잃었던 아들을 찾아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런데 비유의 끝에는 다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번째 비유의 처음에 잠깐 등장했던 맏아들인 장남의 이야기입니다. 맏아들과 아버지의 대화가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아버지: 이야기의 진정한

그럼 자세히 들어가기에 앞서 비유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잃어버렸던 양이나 드라크마가 주인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의 비유의 주인공은 양을 찾은 목자이며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쁨으로 잔치를 벌이는 것이 주제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번째 비유도 사실은 잃어버렸던 탕자가 아니라 아들을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푼 아버지가 중심입니다. 그리고 아들들의 비유를 통해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잔치를 완성시키시는 아버지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여러분이 머릿속에 기억하신 후에 우리가 둘째 아들의 이야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비유는 상당히 비유에 속하며, 주인공들의 캐릭터도 아주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비유는 정도의 설교를 통해 아주 자세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본문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번의 설교로 모든 비유의 의미에 대해 나눠 보려고 합니다.

 

둘째 아들 (탕자): 아버지께 등을 돌리

우선 비유의 탕자로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모든 유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한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분배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자체가 크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근동 지방이나 이스라엘에서 아버지에게 유산을 어떻게 아들들에게 분배할지를 묻는 것은 크게 이상할 것이 없었고 분배에 대한 율례도 존재했습니다. , 장자는 차남에 비해 배를 받을 있었고, 그러므로 장자는 아버지의 유산에서 3분의 2 가질 있었고 나머지 3분의 1 차남인 둘째 아들이 분배 받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배의 과정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유산으로 받아야 하는 것인데, 자신의 소유로 있는 유산을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둘째 아들의 소유로 인정해 모든 재산을 팔아서 지방으로 떠나는 일은 근동 어느 지방에도 찾아볼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도 정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 오늘부터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자기 소유가 있는 상속분을 미리 돈으로 바꿔 가져간다는 것은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요즘에는 부모들이 자녀들의 사업에 필요한 돈을 미리 증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당시의 근동 지방에서는 이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당당하게 요구한 아들보다 놀라운 사람은 그것을 허락해 아들에게 모두 물려준 아버지입니다. 왜냐하면 유산은 절대로 미리 증여할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유산을 주었다는 의미에는 나의 생명을 주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다면, 아들이 모든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떠나가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고 말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있게 주는 모든 소유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그것을 허락했다는 사실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놀라운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정신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둘째 아들은 나라로 가게 됩니다. 그곳이 얼마나 나라인지는 모르지만 돼지를 치고 있다는 것으로 아마도 이스라엘의 영토를 벗어난 이방 나라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땅은 아마도 당시에 가장 돼지를 주식으로 삼던 블레셋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블레셋에는 그리스 지역에서 이주한 해양 민족들이 거주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헬라 문화를 가지며 살고 있었고, 할례를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할례를 받지 않는 민족은 블레셋 사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할례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가나안 민족들이 행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시기 가나안의 많은 족속들은 서로가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모여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져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브라함도 갈데아 우르가 고향인 이방 출신의 아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브라함으로 부르셔서 할례를 행하시면서 그를 약속의 자손으로서 세우신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도 가나안 사람이 아니었으며, 예루살렘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그도 원래는 이방인이었지만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그를 이방의 빛으로 삼으시려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민족과 나라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실 번째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생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다른 이름이 바로 제사장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자체가 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제사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일까요? , 이들은 백성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시대의 말로 쉽게 설명하자면 무엇인가를 대표로 보여주기 위한 샘플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게 하나님은 다른 모든 나라와 민족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제사장의 역할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오해하여, 이런 하나님의 선택을 오히려 자기의 특권으로 생각하고 다른 민족들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제사장 국가로서의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린 , 자신들이 독특하고 뛰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땅에 오셔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셨던 중요한 근거이기도 합니다. 때에 유대인들은 자기들 만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들 만이 특별하게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하신 말씀인내가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고 복을 얻게 것이다라는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탕자의 상징: 죄인과 아담의

예수님은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린 언약의 말씀이 비유의 이야기 속에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약 둘째 아들이 지금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그는 자유를 추구하는 신세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집안에서 아버지의 말이나 듣고 조용하게 살기보다는 내가 돈을 가지고 그것을 나의 힘으로 삼아서 돈으로 있는 자유를 누리면서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뛰쳐나온 아들입니다. 그가 원래부터 방탕했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었는지는 없지만, 그는 돈을 추구하고 세상을 좇아 세상이 부여해 주는 최상의 가치인 쾌락과 욕심을 따라 사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그가 그것으로부터 나와서 자유를 추구했으나 결국은 돈과 쾌락과 욕심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죄의 , 죄의 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둘째 아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에 있었던 세리와 죄인들 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훨씬 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세리라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동족으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들을 멸시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 심지어는 그들을 개라고 부르기도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멸시 받는 죄인이었던 세리들이 대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실제로 그들이 추구하는 제물을 통해 하나님과 같아지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을 자기의 몫으로 챙겨 그것으로 자기의 나라를 세우고 자기가 곳에서 왕이 되어서 하나님처럼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런 삶을 살았던 최초의 인물이 누구였을까요? 세리는 바로 아담을, 아담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의 대표로 드러난 세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전체로 본다면 바로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아야만 했던,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소비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고통과 눈물과 아픔과 외로움과 그리고 수많은 고통들을 가지고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세리는 바로 아담의 후손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맏아들의 상징: 율법주의와 이스라

그렇다면 둘째 아들 다음으로 등장하는 맏아들은 누구를 상징할까요?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따랐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수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율법을 지키며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상징할 것입니다. 자신들은 스스로 경건한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으며, 약속 받은 민족이고 선택받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들 만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바리세인과 서기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비유 속에는 아담의 자손들로 대표되는 죄인들의 그룹과 하나님께서 가운데서 선택하여 불러내신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그룹으로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전반부,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창조를 이야기한다면, 후반부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애굽에서부터 건져 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삼아 제사장의 나라로서 세우신, 이방에게 복을 전하는 통로로 삼고 싶으셨던 이스라엘을 보여 준다고 있습니다.

 

탕자의 귀향: 스스로 돌이켰으나 여전히 부족

둘째 아들의 이야기에서는 이런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주려서 고통 중에 있는 둘째 아들은 돼지를 먹이는 쥐엄 열매라도 얻어서 주린 배를 채우려 했으나 사람들은 그를 경멸하며 그것조차도 주지 않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둘째 아들이 보인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그가 스스로 돌이켜’, 구절을 어떤 성경에서는 정신이 들어서라고 까지 번역했습니다. , 스스로 정신을 차렸다는 말입니다. 그런 후에 자기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하며, 종들조차도 풍성히 먹는데, 자신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게 것입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야 하는 상황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어려웠으므로 그가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에 말들을 미리 연습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겸손하고 괜찮은 표현인 같습니다. 그런 다음 나온 말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러므로 나를 품꾼으로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구절을 읽으면 그렇게 이상하지 않으며 둘째 아들이 진실로 반성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을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구절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신명기 21장을 읽어 드릴 텐데, 율법에는 방탕한 아들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지를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21 18절에서 21절까지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않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거하라 그리하면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자식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율법에 의하면 부모가 아니라 성읍의 사람들이 자식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10 때에 부모에게 번쯤 반항해 보지 않으신 분이 계십니까? 율법에 따르면 징계를 하였는데도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은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하면 아들은 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여겨 주셔서 목숨은 살려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는 알고 있으니 저를 품꾼의 하나로 여겨 주시면 제가 일을 해서 모든 죄를 반성하며 갚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갚을 있는 것이었을까요? 이것은 감당을 없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자신이 분명히 돌이켰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모든 죄값을 자신이 모두 갚아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환대: 율법을 넘는 파격적인

그런 아들이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그를 보자마자 그를 측은히 여겨서 나아갔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행동은 앞의 아들의 행동보다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아버지의 행동의 이유를 혹시나 아들을 먼저 발견한 동네 사람들이 그를 향해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상상력이 뛰어난 해석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터무니없는 억측 같지는 않습니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는 멀리서부터 오고 있는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너무나도 감동적인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아들에게 베풀었던 아버지의 모든 행동은 가지도 하나님의 율법에, 그리고 유대인들의 상식과 관습에 맞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아들은 당연히 끌려가서 죽어야 하고, 아들은 아들로서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하나의 사실로만 보았습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배반하고, 마음을 할퀴고, 찢어지게 만들고, 그를 정말 아프게 만들고 떠난 아들이 아니라 죽었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눈에는 죽었던 아들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죽었던 아들을 아버지는 다시 안아 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살아 돌아옴을 기뻐합니다.

 

맏아들의 분노: 자기 의와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다른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모범적인 아들의 전형이었습니다. 3분의 2 되는 재산을 아버지로부터 받았지만 재산을 돈으로 바꾸지도 않고, 아버지와 함께 같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명을 번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폐륜을 저지른 둘째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를 보고 첫째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께 어떻게 그럴 있냐고 따지듯이 묻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렇게 인색하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도 불평을 늘어 놓습니다. 그는 일단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잘못된 오해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에게서 아버지는 인색한 아버지였고 불공평한 아버지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수년 동안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그의 명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훌륭한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향해 이렇게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나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마리도 나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게 허락한 적이 없는데, 수년 동안이나 아버지를 버리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돌아온 자신의 동생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있으니 이것은 너무나 불공평하고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아들의 항변이 어찌 보면 나름 말이 되는 같기도 합니다. 큰아들에게는 억울한 일이 수도 있을 같습니다.

 

아들의 공통된 문제: 아버지 마음의 오해와 자기 중심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지금 아들은 맏아들의 자리로부터 품꾼의 자리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그렇게 열심히 아버지의 밭에 가서 일한 대가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품삯을 찾고 있는 품꾼의 하나로 자신을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으나 졸지에 주인과 종의 관계로 자신을 전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들이었는데 품꾼이 되겠다고 하고 있으며, 아들도 자신이 스스로 품꾼으로 행세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아들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건 아들에게 모두 말이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들은 분명히 다르게 행동했고 그들의 상황도 달라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속 아버지에 대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있습니다. 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버지의 재산을 돈으로 바꿔 그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살고 싶어 아버지를 떠난 자였으며, 다른 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순종을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아들은 얌전하고 착하고 효자인 도덕적인 아들이며, 다른 아들은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나 방탕하게 살아간 나쁜 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서 아들이 모두 똑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간 방탕한 둘째 아들도 부르실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는 착해 보이는 첫째 아들도 부르고 계십니다. 첫째 아들의 이야기는 집을 나가서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의 이야기처럼 극적이지는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맏아들도 역시 밖에서 일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허락한 옷과 신발과 가락지 대신 아버지가 소유한 모든 것을 첫째 아들에게는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아들은 단순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포함되어 있던 이스라엘을 의미하고 있다고 있습니다. 독사의 자식으로 예수님께 불렸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 전체를 이야기한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모든 이웃들을 불러서 벌이는 잔치에 맏아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 탕자인가, 맏아들인가?

아들의 삶을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오늘 비유 설교의 주제는 바로 아들에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을 통해 죄인인 우리가 드러난다면,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우리의 모습을 투영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아들은 분노로 가득 있음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합당한 공정함이 있으며 도덕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을 따라서 살았을 , 그것이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자신은 공중도덕을 지키며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새치기를 하는 것을 보았을 화를 냅니다. 사람에게 어떤 사정에 있었는지는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어찌 보면 정당합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질서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화가 나는 이유는 법이나 질서에 대한 존중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내가 입어야 손해나 누려야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분노가 훨씬 큽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그가 만약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법을 지키지 못하고 도덕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면 그는 자기 자신조차도 공격을 하게 됩니다. , 자기 혐오에 빠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증상 중에 하나입니다.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신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소위 말하는 신앙에 굴곡이 있고 정체성을 경험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항상 마음속에는 내가 제대로 신앙인인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이러한 모습이 신자인 우리들에게는 없다고 자신할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분을 믿으면서도 우리 신앙생활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가장 문제이고 우리의 신앙을 밑으로 잡아 끄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갚을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은혜를 갚아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은혜를 갚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합니다.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어 보기도 합니다. 분에 넘치는 선교 헌금과 연보를 해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어려운 이웃에게 하는 구제 활동을 통해서 은혜를 갚아 보려고 합니다. 누구보다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본문 속에 나오는 아들의 마음을 한번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들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죄책감으로 인해 시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딴에는 아버지의 종이 되어서 그가 아버지에게 빚을 갚음으로써 죄책감을 덜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들의 생각은 그가 어떠한 속에 있었는지를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것이고 죄의 심각성을 아직도 여전히 모르는 무지의 소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죄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힘과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의 행동에 대해서 켈러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선하게 살려고 하는 목적은 사실은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서운 지적이 아닐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양심대로 살려고 했으며 깨끗하게 그리고 남보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착하게 살려고 그렇게 애를 쓰십니까? 당신은 남보다 선한 인생을 살려고 그토록 매달리십니까? 당신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하십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성경의 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이유나 공로가 없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는 것을 견디기가 싫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힘으로 이것을 이루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의 공로를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임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둘째 아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앞으로 돌아올 그가 온전히 돌이켰으므로 아버지가 맞아 주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들도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들인 이유로 아들의 돌이킴을 이유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돌이켰기 때문에, 혹은 그가 회개를 하고 정신을 차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맞이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의 죄를 깨닫지 못했고 심지어는 죄를 자기의 노력으로 갚을 있다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의 죄가 용서가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는 이처럼 말도 되지 않는 생각을 하면서 아버지께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보자면 무척 겸손하고 낮아진 같습니다. 자신을 종처럼 여겨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마땅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품꾼의 하나 정도는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이야기에서 여러분과 저는 과연 어디에 해당할까요? 여러분은 아들에 가까운 신앙생활을 하셨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노력했으며, 만약에 조그만 하나라도 지키지 못했을 괴로워하고, 그것으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게 될까 걱정하고 가슴 떨려 하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에게 보여서 그분께 가까이 갈까를 항상 고민하면서 사셨습니까? 아니면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의 선하고 인자하심을 핑계 삼아 우리 마음대로 살면서 끊임없이 게으르고 끊임없이 아버지와는 무관한 삶을 사셨습니까? 여러분이 어떠한 삶과 신앙생활을 했든지 상관없이 여러분은 똑같은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초대하고 있으며 여러분을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목을 앉고 입을 맞추고 기뻐하시며, 모든 것을 주시려는 아버지 앞에 우리는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들이었든 작은 아들이었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들을 모두 맞으시는 동일한 아버지 앞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의 괴리: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지의 의문이 남습니다. 이쯤에서 설교를 마무리했으면 시간도 적당하고 결론도 아름다웠을 테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해결해야 가지의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나에게 일어나는, 내가 감당할 조차 없어 보이는 모든 어려움과 힘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있어서, 과정을 통해서 나의 인생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모든 어려움 속에서 함께 동행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인정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평안과 평강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시지만, 그리고 찬송을 부를 때는 항상 평화를 이야기하는데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고민이나 고통, 삶의 문제들이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삶의 짐들을 십자가 앞으로 가져오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주님 앞에 내려 놓은 적이 없는 같습니다. 설령 그것들을 예배당으로 가져오지만 댁으로 돌아가실 때는 짐들을 다시 등에 얹어서 가시는 같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처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삶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성경이 잘못 기록된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성경의 교훈을 잘못 이해한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이처럼 우리의 실제적인 삶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자의 삶이 이렇게 다른데도 아무런 의문이나 의심이 없이 살아가시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들은 아주 타협의 천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들은 그냥 쉽게 우리가 아무리 신자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살아갈 길을 하나 정도는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일도 한두 번이지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산다는 것은 진정한 신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삶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어떠한 풍파를 만나고 험난한 산과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곳을 평탄케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찬양을 부르며 걸어가게 하시는 주님의 약속이 우리들의 것이라면 우리가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로 염려와 슬픔 속에서 비참한 신앙생활에서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러한 삶을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아야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에 등장하는 맏아들도 이와 똑같은 모습을 가지고 선하게 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선함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기도 하며, 혹은 나에게서 만족스러운 삶이 나오지 않으면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계속해서 자책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격에 대한 의심을 가지면서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도 하고,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 주변에서 우리가 붙어있게 하지만 항상 주위만을 맴돌기만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은 구약 전체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과 아주 유사합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스스로가 구원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고, 하나님의 명령을 열심히 지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나올 있는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더욱 심해집니다. 인생에 걸쳐 40년에서 50 동안 예수를 믿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결론이 아직도 번도 주일 성수를 어긴 적이 없는 것이라면, 이것은 문제일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삶에서의 결론이 맞는 것입니까? 만약 이것이 신앙의 결론이라면 우리는 과연 정말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제대로 믿은 것일까요?

 

우리들의 속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쉽게 찾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힘든 상황에 닥쳤을 , 만약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나는 생각이 드신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할 때에는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인생 속에 함께하시며, 조그만 하나라도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안에서 지금도 역사하시어 이끌어 가신다라고 분명하게 밝히면서도, 무엇인가 어려운 일이 생기게 되면 또다시 우리는 나의 과거의 잘못들을 원인을 찾는 죄를 범합니다.

 

비유의 숨겨진 열쇠: 아들 예수 그리스

번째는 아무도 나간 둘째 아들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없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앞에 나왔던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애를 썼던 주인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번째 비유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을 좇아 나라까지 그를 찾으러 가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번째로 드는 의문은 맏아들의 이야기가 결론이 지어지지 않고 끝이 났다는 점입니다. 나가서 돌아온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서 그를 회복시켜 줍니다. 그런데 맏아들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권면으로 마무리되고 후에 그가 어떻게 하였는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돌이켜 잔치에 참석하여 함께 기뻐했다는 짧은 정도의 묘사로 훌륭하게 비유가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 텐데 성경은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맏아들의 이야기의 결말은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분이 바로 비유의 기가 막힌 중요한 요점입니다.

 

비유에는 다른 아들이 있습니다. 본문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는 아들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비유를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아담처럼 아버지를 버리고 자기 소유를 챙겨서 나갔던 아들도 아니었으며, 아버지를 떠난 아들을 위하여,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직접 종이 되고, 노예가 되고 품꾼과 일꾼이 되어서 땅으로 오신 아버지의 진정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순종과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칭호를 얻게 됩니다. 그는 바로 마지막 아담이고, 아담이 실패했던 아들로서의 인생을 땅에서 성취하여 내어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아들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 아버지의 음성으로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라는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비유의 완성

뿐만이 아닙니다. 맏아들이 실패한 이스라엘로서의 모든 모습을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신 진정한 하나님의 맏아들이셨습니다. 마지막 비유의 결론이 열려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야말로 이야기의 완성이며 마지막 줄의 결론임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아들이 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탕자가 되시어 모든 것을 이루신 후에 아버지의 잔치에 아들을 모두 초대하며, 아버지의 잔치에서 진정한 주인공이 되셨고, 아버지의 잔치에 그리스도의 안으로 우리 모두를 품고 나아가신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둘째 아들을 위해서 자신을 목숨을 버리셨으며, 자기의 공로만을 생각하고 아버지께 거역하는 맏아들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상속하여 주어 주님께서 누리시는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누리고, 못난 아들들과 같았던 우리 모두를 품으신 진정한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아바 아버지시다. 이제 이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너희도 곳에서 함께 아버지의 잔치를 즐기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은혜를 아는가?: 참된 이해와 적용의 중요

오늘 본문의 아들들은 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계심을 생각하십니까? 만약 우리들의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말씀이 원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혹시 우리가 은혜를 강조하다 보니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순종 대신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만을 생각하게 것이라고 변명하십니까? 그래서 우리의 삶이 20 혹은 30년을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여전히 복음적이지도 바른 신앙인의 모습도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에 많은 실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은혜 받은 자로서의 우리의 마땅한 신자로서의 삶에 대해서 강조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아주 흔히 봅니다. 이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우리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다른 신앙인들은 어떻게 하는지, 혹은 다른 교회는 어떤 신앙을 보여주는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에 앞서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바는 바로 우리가 아직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오용: 율법화와

여러분은 혹시나는 이제 복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알고 있으며, 이제는 이상 율법이나 행위로 구원받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라고 고백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이 고백하고 있는 은혜도 사실은 율법처럼 사용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은혜가 율법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하십니까? 우리는 가장 선한 것을 가지고도 가장 악한 것을 만들어 내는 아주 탁월한 능력을 지닌 죄인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교만해질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은혜를 받은 사람인데 너는 아직 은혜를 받지 못하였느냐라며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기도 합니다. 은혜라는 것을 칼로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휘두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전매 특허인 것처럼 말입니다. 은혜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마음대로 재단하는 사용합니다. 모든 것을 조건 없이 받아 주시는 진정한 은혜를 받았다면 일어날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그것을 율법으로 사용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은혜도 믿음도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율법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우리는 언제 받은 구원을 누리고 기뻐할 있겠습니까?

 

진정한 은혜의 결과: 기쁨, 감사, 참된

여러분, 우리는 은혜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심지도 않은 나무에서 포도와 사과와 배를 따서 먹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지도 않은 일들로 하나님께서 칭찬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속에는 기쁨이 없는 같습니다. 험한 세상을 그렇게 힘들게 살다가 겨우 예수를 믿어 천국만 가게 되면 감사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처럼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같습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은혜를 아십니까? 은혜를 아는데 우리에게 어떻게 인내가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을 사랑하셨는지, 어떻게 맞아 주셨는지, 어떻게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서 회복시켜 주셨는지 아십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이 하나님께 저희를 품꾼이라도 시켜 달라고 부탁하면서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만 쏟아내는 우리들을 보고 뛰쳐나와 안아 주시고 의복과 신발을 준비해 주시고,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 돌아왔다고 잔치를 베푸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부어진 복음의 은혜입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를 안다면 여러분과 제가 모여 있는 자리에서 찬양 곡과 짧은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부르는 만으로도 예배당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로 감사할 있고 감격으로 우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은 그렇게 되지 못한 같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전적으로 알고 감사하지는 못하고 있는 같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을 믿으

사랑하는 여러분! 잔치를 잔치 되게 하고 아버지의 기쁨을 기쁨 되게 것은 우리들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이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분의 마음을 모르고 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으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지 않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인하여 잔치를 벌이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지 않고 계십니다. 대신 여러분은 매일 땅만 열심히 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께 와서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 저는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었는데 염소 새끼 마리도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그러한 삶을 반복하고 있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오늘 은혜를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때문에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좋아하시며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그리고 탕자 조차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오늘 시간 조금 깊이 묵상하시고, 그것으로 기인한 가슴 벅참과 감사와 참다운 기쁨을 누리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멀리 있는 아들을 보고 달려가셨던 아버지의 기쁨, 옷을 입혀 주고, 가락지를 끼워 주시고, 나를 안아 주셨던 아버지의 기쁨, 발에 신발을 신기시면서 발을 만지시며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기쁨, 때문에 잔치를 벌이시면서 그것을 즐기셨던 아버지의 기쁨, 주님 예수 안에서 우리가 기쁨을 누리게 하여 하소서. 아버지의 기쁨을 알게 하여 주소서. 아버지의 기쁜 얼굴을 보게 하여 하소서. 아버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여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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