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마태복음 13 1-9 ( 뿌리는 자의 비유)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3 1절부터 9절까지 입니다.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무리는 해변에 있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 어떤 것은 육십 ,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아멘.

 

여러분과 함께 읽은 오늘 본문 말씀은 아마 뿌리는 자의 비유로 우리 모두가 너무나 알고, 설교로도 많이 들었던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렸을 주일학교에서도 자주 들었던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흔한 오해: 밭의 비유와 우리의 노력

비유를 여러분이 읽으시게 되면 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됩니다. 제일 먼저는씨는 옥토에 뿌려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옥토가 아닌 곳에 뿌리게 되면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씨를 뿌리는 자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이 씨를 뿌리시는 그곳이 어떤 밭인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만약 길가에 씨앗이 떨어지게 되면 새가 와서 먹어버리므로 되겠고, 돌짝밭에 떨어지면 씨앗이 말라 죽어버리므로 되겠고, 밭에 덤불이 있는 가시떨기만 있으면 싹이 나오다가 가시떨기로 인해 자라지 못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옥토가 되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우리는 씨앗이 반드시 옥토에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옥토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는 다르게 밭의 비유로 설명될 때가 많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밭이 것이며, 어떻게 해서 씨앗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씨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해석해 주셨기 때문에 이것이 더욱더 분명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옥토인지 아닌지에 모든 관심이 자연스럽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옥토가 아니면 열매를 맺을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다음 단계로 내가 어떻게 하면 옥토가 있을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쏠리게 됩니다. 이러한 설명은 오늘 본문에 대한 아주 자연스러운 해석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을 읽을 많이 겪는 일이지만, 온전히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아주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지셨던 적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가도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참으로 대단한 우리들의 능력이지요? 여러분은 눈치를 채지 못하시겠지만 제가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게 되면 여러분의 표정을 쉽게 읽을 있고,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신지도 있는데, 그렇게 다른 세계로 가셨다가도 다시 돌아오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우리들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지 않아서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결국은 말라서 죽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나중에 비유를 제자들에게 해석하실 때도 기쁨과 관련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비유는 우리를 굉장히 찌르는 비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비유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교훈을 얻을 있으며, 그래서 본문을 이렇게 밭의 비유로 이해하는 경우가 아주 많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숨겨진 의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하나가 뿌리는 자의 비유를 굉장히 다른 의미로 바꾸어 버립니다. 10절의 내용을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어봅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어떻게 보면 아주 뻔해 보이는 이야기를 기적을 행하실 있는 예수님께서 충분히 다른 방법으로도 가르칠 수도 있으실 텐데, 이런 농사에 관련된 비유로 설명을 하셨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이 많이 척박하기 때문에 옥토가 아닌 밭에서 많은 농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았습니다. 어떤 지역은 석회암과 같은 돌들이 밭의 아랫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경을 하고 식물을 심어도 자라나지 않는 지역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사막이 많은 곳이라 가시덤불이 있는 밭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비유를 들었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밭의 비유로, 옥토 밭에서만 열매가 제대로 맺힐 있는 것이라고 충분히 이해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런 비유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에 대해 물었을 , 대부분의 제자들은 우리가 옥토 밭이 되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고 말씀을 받아들이게 만들기 위함이었다는 대답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비유의 반전: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나?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저들이 비유를 듣고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셨지요. 그러므로 저와 이스라엘 민족이 비유를 듣고 알아들었다고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알아들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비유를 듣고아니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라고 생각이 드셨다면 그것이 예수님이 비유를 주신 진짜 이유가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지만 비유를 듣는 우리들은 우리가 옥토가 되어서 말씀의 씨앗에 대한 열매를 맺어야 하겠다는, 말씀을 듣는 태도에 굉장히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염려나 욕심들을 버리고 말씀을 듣고 묵상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맞는 말씀인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그렇게 이해하였다면 너는 비유를 제대로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유에는 반전이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 감추어졌으나 드러난 진리

어떤 부분에서 성경의 말씀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를 이야기하시며, 그래서 우리가 들으면서 충분히 이해할 있고, 그것이 어린아이일지라도 말씀의 의미와 교훈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 말씀이 있는 반면에, 어떤 부분에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진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비유를 설명하고 알려 주시나 그들에게는 감추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천국의 비밀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천국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비유를 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말씀을 듣는 태도를 올바르게 하기 위함도 아니고, 우리가 옥토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함도 아니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옥토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도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오늘 비유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를 듣고 여기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생각이 드신다면 여러분은 지금 말씀이 인도해 주시는 올바른 트랙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바울의 증언: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의문점이 드실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는 굉장히 정확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주십니다. 여러 말씀 중에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 구절은 바울의 서신서에 나오는 부분입니다. 골로새서 1 26절에서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영광의 소망이니라여기서 비밀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의미합니다.

 

만세와 만대로 감추어진 비밀의 의미

비밀은 옛적부터 감추어져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감추어졌다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숨겨놓았다는 뜻이 아니고, 누구나 있게 드러나 있으나 모든 사람이 알지를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과 앞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분이 쓰신 논문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읽는다면, 그것이 글자라는 사실은 있고 소리 내어서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저희로서는 논문의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비밀이 우리에게 환히 드러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기는 하지만 전혀 의미를 읽어낼 수가 없는 것이죠. 본문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일까요? 골로새서의 말씀에서는만세와 만대로 감춰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이제는 지금 바울의 고백이 있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들에게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신다고 밝혀 주시며, 비밀이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보여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비밀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하시나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며 영광의 소망입니다. 바로예수 그리스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만세와 만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보여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아담 때부터 예수님이 오신 신약의 시대까지 끊임없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만세와 만대라는 단어를 맞이하게 되면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창조 때부터 시작하여 놀라운 비밀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시고 알려 주시는 일을 만세와 만대에 걸쳐 끊임없이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시간인지 감이 잡히지 않으신가요? 100년이라고 하면, 아니면 1000년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정도면 길게 느껴지셨나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그보다 훨씬 시간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기 위해 사용하시고 우리를 기다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경건의 비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

그리스도의 비밀을 설명하는 말씀이 디모데 전서 3 16절에 등장합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여기 그는 물론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비밀이라고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까 골로새서에서도 바울은 예수님을 비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디모데 전서의 말씀에서는 비밀이 예수님을 지칭하는 이외에도 그분이 하신 모든 일들도 포함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땅에 성육신하신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 그리스도께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 그리고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칭의의 근거

본문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자체로 의로우신 분인데도 불구하고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설명하는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근거가 되는 구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칭의라고 말하는 의롭다 하심 친히 가장 먼저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만 칭의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의롭다 하심 친히 받으시고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이 되어서 그리스도가 받으신 의를 우리의 의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지키고, 나의 믿음이 아주 굳건하여서 예수님을 의심 없이 믿는다는 확신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분과 연합함으로써 여러분도 그리스도와 함께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디모데 전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모든 일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것입니다.

 

비유의 참된 의미: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

, 그러면 오늘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뿌리는 자의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이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뿌리는 자의 비유는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 예수님의 이야기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유를 만약 우리가 옥토가 되어야 한다는 밭의 비유로 듣게 되면 본문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잘못된 해석: '' 중심의 신앙

비유의 중심에 내가 있게 되고, 내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일에 염려도 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도 않으며 착하게 하나님 안에서 살게 되면 나에게도 30, 60, 100배의 열매가 맺히는 옥토가 있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열심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자는 도전으로 말씀을 받게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에게는 도전이 되겠지요. 설교를 하면서도 저도 마음에 찔리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듣는 여러분도 참으로 마음을 후벼 파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전혀 의미가 없는 말씀 해석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이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있을까요?

 

그것은 방금 바울 서신에서 살핀 비밀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에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비밀에 예수님과 그의 하신 일이 나오지 않으면 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에서는 중심에 내가 해야 일만 나오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옥토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있을까하는 생각들이 당시 바리새인들을 포함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있으며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가 구원에 있어서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것이지요.

 

구원의 : 인간의 노력인가, 하나님의 은혜인가?

이것은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관심과도 일치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있을까 하는 생각과 고민들을 모두 가집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스스로 고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있는지를 물어본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고, 무엇인가가 보태어져야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선교사가 되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일을 하거나, 혹은 성경 신구약에 있는 모든 법들과 예수님의 말씀들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를 한다면 구원을 받기에 충분할 것인가 하는 생각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방법을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그때 예수님의 답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우리들에게 방법이 있었나요? 우리들에게는 방법이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방법이 없고 그것을 온전히 은혜로 공짜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기도 힘들고 인정하기도 싫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의 가장 무서운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은혜에 대한 오해와 바울의 답변

그와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게 되지요. ‘믿기만 하면 된다면 지금부터 마음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된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반드시 생기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놈처럼 살아도 예수만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요. 그런데 이러한 똑같은 질문을 사람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질문을 합니다. ‘내가 죄를 많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도 커진다면, 그럼 내가 더욱더 죄를 짓는 것도 괜찮지 않는가?’ 이어서 질문의 답을 다시 바울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럴 없느니라!”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는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 나라의 비밀 요약: 그리스도의 모든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도 사실과 크게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는 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땅에 오신 , 십자가를 지신 , 우리를 위하여 율법을 지키신 ,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하신 ,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는 모든 일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것입니다. 씨가 뿌려졌고 우리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땅의 나라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

유대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로마로부터 식민 통치를 계속해서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었지요. 이스라엘과 유다가 앗수르와 바빌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이후로부터는 사실상 이스라엘은 나라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후로부터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다윗 왕국과 같은 나라를 회복하며 세계를 유대인 중심으로 다스리게 주시는 메시아가 오기를 지금까지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정통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관입니다. 땅의 모든 나라들의 중심에 이스라엘이 있고, 그들이 세계를 다스리는 때가 바로 메시아가 오는 날이라고 생각하는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유대인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땅에 속한 나라는 로마 제국을 포함한 어떤 나라도 영원할 없으며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으며 받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는 미국도 영원한 나라는 아닙니다. 후에는 어떤 나라가 세계를 주도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언제 없어질지도 모르는 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나라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예수님의 나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한 말씀이라면 우리는 조금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와 그가 하신 일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옳은 일이 것입니다.

 

길가 : 닫힌 마음과 사탄의 방해

번째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길가는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므로 땅은 단단하게 다져질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씨가 떨어져도 뿌리를 내릴 수가 없는 곳이지요. 그래서 땅에 떨어진 씨앗들은 새가 날아와서 먹어버리는데 예수님은 새를 사탄과 마귀라고 해석해 주십니다. , 길가 밭과 같이 딱딱한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열리지 않고 말씀은 사탄이 모두 빼앗아 가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역사: 반복되는 불신과 강퍅함

우리가 만약 우리의 마음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쉽게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 중에서 혹시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람을 5 후부터는 사랑해야지 하고 결심하고 그때부터 사람을 사랑할 있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반대로 우리가 아주 사랑하는 사람을 결심을 통해 미워할 있던가요? 우리는 아무도 우리의 마음을 마음대로 열었다 닫았다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비유를 보면서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몰라서 하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싶지만 우리의 속마음은 열리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의 의미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비밀,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서 찾는 것이 맞는 것이고, 이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제가 이전 설교에서도 살폈듯이 노아의 방주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의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에 땅과 맞닿아서 바라보기가 힘든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땅에서 그림자처럼 보일 뿐이었지만 그런데 나라가 노아의 방주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때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됐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때에 노아가 복음을 전했다고 증언하였고, 그러나 아무도 복음을 듣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단단한 것과 강퍅한 것은 이루 말로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의 죄가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이렇게 죄만이 관영한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현하여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방주 속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방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 주셨던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났던 그때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살펴보았고, 그때에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우리가 이해할 있는 모습으로 보여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드러난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땅을 뚫고 침노하시며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이와 동일하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역사를 발견할 있습니다.

 

모세의 시대로 한번 보시지요. 그때 그들은 여러 번이나 구원의 기쁨을 분명히 맛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은 아무나 경험할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민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께 불평을 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그런데 그때 이들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유를 기억하시지요. 고작 양파와 마늘이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 그들과 싸워 땅에서 몰아내고 애굽에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그런 야심이 아니었습니다. 고작 즐겨 먹었던 야채가 생각이 나서 노예 생활을 하던 땅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한계: 스스로 마음을 없음

저희들이 아무리 믿음이 적다고 하나 이스라엘 민족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드시지요? 그런데 정말 우리는 이런 유치한 믿음이 없다고 확신하시나요? 우리에게는 과연 이런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 없습니까? 오늘이 주일인데 만약 여러분의 마음에 속상한 일이 있거나, 혹은 마음속에서 미운 사람이 계속 생각이 난다거나, 아니면 아주 답답한 일이 생기게 되면 일단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당장 교회에 가기 싫어지시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비교해서 유치한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의 마음속에 교회 내에 있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다른 교회로 가야 하나 라고 생각이 드신다면 이것은 유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만나를 주셨습니다. 반석에서 물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이런 것을 주는 것은 너희가 이것을 먹고 단지 살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너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인간의 역사는 아담과 하와의 시대에서부터 계속 반복되어 왔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들을 향하여 이사야서를 인용하시며 말씀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저들이 들어도 듣지 못하며, 보아도 보지 못한다 말이지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중에서는 옥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옥토인가?: 말씀을 지키는 삶의 어려움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모두 옥토입니까? ‘우리들은 이스라엘 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자리에 와서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옥토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있으신가요? 이것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말입니다. 반쯤 맞는다는 말을 제가 지금부터 여러분에게 설명드릴 텐데요, 그렇지만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자면 우리 중에는 실질적인 옥토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옥토를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번째로 옥토는 말씀을 깨닫는 자라야만 합니다. 그런 후에는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옥토입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것을 지키며 살아가시나요? 그런 분이 있으시면 손을 한번 들어주세요. 아무도 없으시지요? 사실입니다. 우리 중에는 아무도 이런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며 사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생활 중에서 자연스럽게 행동되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답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옥토가 되어 열매를 맺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기적: 옥토 아닌 땅에서 맺히는 열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가능해집니다. 옥토가 아닌 그러한 땅에서 열매가 열렸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옥토가 아닌 땅에 심겨진 씨앗에서 열매가 나왔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를까요? 바로기적입니다. 옥토도 아닌 돌짝밭 가시덤불이나 딱딱한 길가에 떨어진 씨앗에서 싹이 나와서 열매를 맺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기적을 일으킨 열매를 맺은 식물도 놀랍지만, 그러한 씨앗을 통해 열매를 맺을 있게 만든 땅이 바로 기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을 옥토라고 부를 있는 것이지요. 이해가 가시나요?

 

참된 신앙의 핵심: 그리스도를 바라봄

비유가 제가 처음에 설명 드렸던 일반적인 해석 방법으로 이해했더라면 우리가 말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 묵상하기가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내가 자신을 돌아보며 말씀을 대했던 태도를 반성하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바로 바라보는 것도 아주 중요한 일이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인생을 짊어지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바라볼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고 있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사랑에서 비롯됨

우리는 종종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 자신을 제대로 깨닫고 진심 어린 반성을 함으로써 우리가 변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통해 우리가 조금 나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대부분의 우리들의 인생에 있어서 목표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우리 자신으로부터는 결코 나올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러한 모습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만을 의지하고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뜬금없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이것이 너무나 맞는 말이라는 것을 확인할 있습니다. 씻으라는 말을 죽어도 듣지 않던 꼬질꼬질 지저분했던 아들이 처음으로 샤워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방에 있던 스킨을 바르던 날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같습니다. 그때 녀석에게 보이고 싶었던 여자 친구가 생겼던 것입니다. 첫사랑을 시작하게 것이지요. 이처럼 인생에서 정말 사랑하는 것이 생겼을 우리들의 행동은 변하게 됩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따르고 싶은 대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말에 기대어 살아가고 싶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사실상 우리는 그러한 순종하는 행동이 나올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안의 자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자꾸만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랑을 받아 내려고 하는 자식들처럼 항상 거절당할까 두려워하고 절망하며 속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생이 항상 무언가 인정받지 못하는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되며,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쁨과 즐거움이 없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할 때에도 그것이 실패하면 어찌할까 염려하며 쉽게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에게 비록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있는 자신감이 있으며, 나의 잘못된 선택과 결과도 너그러이 받아 주시는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내가 살아가면서 빈번히 저지르게 되는 많은 실수에도 우리는 기뻐할 있습니다. 넘어지는 것이 대수가 아니며,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며 남들이 조롱할 있는 일을 내가 할지라도 만약 그것이 주님을 위한 일이며 주님께서 일에 나와 함께 하신다면 비록 일이 내가 원하는 열매로 나오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않을 있으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나오게 되는 것으로 만족할 있는 삶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아 내기에는 믿음이 너무나 부족하여 많은 일들을 시도조차 해보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의 변질: 하나님을 보험 취급하는 위험

그래서 우리의 봉사의 마음 자체가 너무나 이상한 쪽으로 쉽게 흘러가게 됩니다. 교회의 모습도 교회다움이 점점 희미해지며, 돈을 서로 주고받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세상의 많은 사업체와 비슷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점점 사라지게 되지요. 우리 남포 교회도 항상 이러한 점에 대해서 긴장하고 항상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습들이 언제 우리에게도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사탄은 이것을 목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되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비밀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한 삶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도 당연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일들을 많이 발견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행한 가장 무서운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 가나안의 이방신들을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방신을 섬겼을까요? , 이들은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풍년을 위해서 이방신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세상 복을 받고 싶어서였죠.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님을 버렸나요? 아니요, 절대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복을 원하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은 다른 여러 신과 마찬가지로 보험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버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여러 가지 보험을 가져서 손해될 것이 없다고 생각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험의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들은 이상 신앙인이 아닙니다. 여러 보험을 들고 있음으로 마음이 평안해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은 이상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많은 믿음의 영웅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들의 관심이 자꾸 자기가 받을 복과 누릴 일들, 그리고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에 쏠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럴수록 그들의 인생은 점점 힘들어지게 되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접할 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다룰 창세기 야곱의 이야기가 그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의 인생은 참으로 처참하였습니다. 노년에 애굽의 앞에서 자신이 스스로 험한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을 하는 장면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런 인생을 살았나요?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욕심과 평생을 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동원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고자 평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야곱만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우리에게는 과연 야곱의 모습이 없을까요? 우리도 야곱과 같은 사람입니다.

 

결론: 은혜로 계속 열매 맺는 기적의

우리들은 하나같이 좋은 땅이 아니며, 옥토의 반대쪽에 있는 가시덩굴이 있는 딱딱한 길가 밭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 씨앗이 싹이 터서 열매가 맺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우리에게서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이지요. 하나님께서 사탄을 포함한 모든 대적들이 우리들에게 떨어진 말씀을 세상의 유혹으로 덮어버리려고 하고, 염려로써 그것을 빼앗아 가려고 하고, 매일매일의 답답한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세상적인 즐거움을 탐닉하려고도 보지만, 결국은 우리를 오늘 예배의 자리로 이끄시어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통해 야단은 조금 맞지만,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고 찬송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과정 속에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조금이지만 깨닫고 돌이키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열매가 맺힌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맺어야 열매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내와 회개는 우리들이 맺어 내어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열매들이 되는 것입니다. 열매들은 아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기쁨과 사랑의 열매도 우리의 속에 맺히게 하십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의 삶에서 맺히는 것이 바로 기적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고백할 있게 됩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전적으로 만족할 수는 없고, 어떤 부분은 깨끗하게 지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때도 많지만, 그런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의 시간을 기억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시간조차도 하나님 안에서의 의와 참된 열매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놓치는 시간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기억조차 하기 싫어하는 모든 순간조차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을 통해서 결국은 열매를 맺어 내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전능하신 나의 왕이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시간들, 그분께 거역하고 그분의 뜻을 거슬렀던 인생의 모든 시간들을 하나로 뚫어 버리고,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열매를 맺어 내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여러분이 앉아 계신 것이 바로 증거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맺은 열매는 작아서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못할 때도 있고 내놓기도 부끄러울 때가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자리에서 여러분이 찬송을 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소리 내어 간구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힘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서 우리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주님을 부른다면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의 딱딱하고 거친 밭에서 열매가 맺혔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비유의 문장에 사용된 모든 동사들은 시제가 과거형입니다. 씨앗이 떨어지고 싹이 나고 시들고 하는 모든 문장의 시제들이 과거형으로 사용되었는데 문단에서만 다른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 있는결실을 맺는다에서 사용된 시제는 미완료형입니다. 100, 60, 30배의 결실을 맺는 구절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 계속해서 여러분의 속에서 열매를 끊임없이 맺어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무런 외부의 방해가 없으면 열매를 계속 맺어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비유에서는 반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예수를 조롱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냐고 물어보던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참으시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을 반드시 이루어 내고야 마셨습니다. 사탄을 포함한 어떤 것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걸어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을 없는 정말 도도한 흐름이었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멈추게 없는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주님을 고백하고 있다면서 자리에 있을 있게 되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함: 참된 안전과 능력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듣게 되었고, 그리고 말씀을 지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유일한 옥토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옥토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 대해서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근심들을 해결해 주시는 대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굳건히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모든 근심과 걱정 속에서도 안전할 있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거듭났다, 혹은 구원을 받았다 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평강을 누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사탄을 대적하게 됩니다.

 

주인만 섬기기: 타협 없는 믿음

여러분의 삶과 시간을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죄를 지을 상황에 처했을 여러분은 이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단순한 양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닌 것에 저의 마음을 뺏겼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그리고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라고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고 구원을 받은 신자의 속에는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세상에서는 선한 사람처럼 살면서 주님께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구하는 그러한 인생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으로 살았다고 생각하신다면 오늘부터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나는 신자는 아니었구나라고 말이지요.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십니다. ‘너희는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만약 주인이신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돌이켜서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회개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주인만을 섬기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인만 섬긴다는 것이 모든 것을 해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우리가 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만약 주인을 섬기고 있다면 우리는 항상 주인들 사이에서 타협점을 두고 협상을 하려고 것입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는, 그리고 그렇게 사는 모습에 대해서도 전혀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인생을 살고 계시다면 다시 한번 여러분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 알았고 신자인 알았는데 사실은 이것이 신자의 모습이 아니구나’, ‘내가 세상을 때에는 세상 사람으로 살고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처럼 살았구나하고 회개하셔야 합니다.

 

매일이 좋은 : 주님과 함께 걷는 기쁨

여러분, 우리의 열매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심은 것도 아니요, 우리도 모르고 있는 사이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열매들이 매일매일 우리들의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일어나게 됩니다. 사실을 깨달은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예수를 믿는 것을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골프를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골프를 즐기시는 분들을 보면 항상 신기합니다. 저렇게 조그만 공을 조그만 속에 집어넣으려고 애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쩔 때는 안쓰럽게 보일 지경입니다. 그런데 제가 일전에 골프를 즐기시는 집사님이 친구분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고 아주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집사님이 함께 골프를 치기로 약속한 분들을 만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은 골프 치기 정말 좋은 날씨입니다!’ 그런데 말을 받은 다른 집사님의 말씀이 정말 은혜로웠습니다. ‘아니요, 골프를 치는 날은 좋은 날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예수를 믿는 날이 좋은 날이십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모든 날들이 좋은 날이십니까? 오늘의 날씨가 좋아서 좋은 날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나의 옥토가 되시며 오늘도 열매를 맺어주시기에, 오늘도 좋은 날입니다.

 

마침 기도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잊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이시며,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하신 , 내가 누구였던가를, 나의 구원을 잊지 말게 하시고, 기적 같은 인생을 기쁘게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죽을 죄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나의 인생이 기쁘지 않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고 이야기했던 나의 삶들이 다시 살아났는데 내가 이것을 즐길 수도 없고, 내가 이것을 기뻐하지도 못한다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알게 주십시오, 깨닫게 주십시오. 기적의 생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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