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18장 21절부터 35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 귀를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으므로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자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않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니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아뢰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기를,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아멘.
비유의 배경 1: 십자가로 가는 길
오늘 읽은 비유는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 ‘빚진 자의 비유’ 혹은 ‘용서하지 않는 자의 비유’ 입니다. 이 비유가 들어 있는 마태복음 18장은 이 복음서 전체의 흐름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 포함된 16장에서 20장까지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이 섹션의 시작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이제 내가 죽어 십자가를 질 것이며, 그런 후에 부활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하시는 16장 21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20장에 가면 그 마지막 구절에 이와 똑같은 말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그 유명한 히브리 문학의 구조상 괄호로 감쌌다고 말합니다. 이 문학 형식은 반복되는 양쪽 끝의 반복 구절을 괄호로 삼아 주제로 사용하고 그 양 문장 사이에 중요한 내용을 기록하는 히브리의 독특한 문학 표현 형태입니다. 그런데 괄호로 사용되는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며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후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일이 끝나 맞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게 되며, 그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읽은 오늘 이 비유나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은 십자가로 가는 길 위에 있는 내용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비유가 왜 이 주제 문장 사이에 놓여 이 전체 섹션의 가장 중요한 말씀으로 기록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배경 2: 제자 공동체와 용서의 문제
이런 사실을 우선 염두에 두고,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할 이 비유의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를 지셔야 함을 아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어, 그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때 제자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이 때 가르침은 이방인이나 바리새인 혹은 서기관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내용들이 제자들에게 집중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루셨던 그 주제도 상당히 우리 교회에도 적용이 되는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18장은 다른 주제가 아니라, 성도들 간에 서로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그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 용서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용서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간의 용서의 원리는 세상 사람들 간의 용서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는 않으나, 실제로 나타나는 모습에 있어서 약간은 달라집니다. 교회 내에서 성도들 간의 용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면 성경에서 요구하는 그 용서의 원리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나오는 이 용서의 이야기는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성도 간의 관계에 훨씬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의 권면(치리)과 어려움
교회 내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치리’ 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 치리에 대한 준수 서약을 하게 되는데, 이 치리라는 것은 영어로는 ‘discipline’인데, 즉 교회에서 그 사람을 바르게 하고, 죄로부터 그를 구분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치리는 권면이라는 말로도 사용될 수 있고, 개인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좀 더 공동체 적인 관계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교회 공동체 내에서 적용이 된다면, 복수의 교인들뿐만 아니라, 당회에서 다룰 수 있고, 그 다음 단계인 노회와 총회에 이르는 세상의 법정과도 비슷하게 여러 단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 내에서는 이렇게 노회가 총회가 연관된 치리까지 가는 일은 사실상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치리, 즉 성도들 간의 권면 즉, 믿음이 있는 자가 믿음이 약한 자를 권면하는 일들은 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며,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권면을 할 때는, 우리가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에게 ‘당신의 이러한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는 더욱 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며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치리나 권면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내가 하는 이런 행동을 너는 왜 못 하느냐?’ 혹은 ‘나는 이만큼 알고 있는데 너는 왜 이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느냐?’라는 식의 정죄하는 모습으로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기 쉽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으로 그 당사자는 속마음으로는 ‘당신은 얼마나 잘 났느냐?’ 또는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나에게 간섭을 하느냐?’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겸손과 온유가 있지 않으면 실제로 치리라는 것이 교회에서 올바르게 일어나기가 정말 힘이 듭니다. 우리가 만일 이러한 사랑과 온유와 겸손의 마음가짐으로 권면을 하고 그 권면을 받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 권면을 받음으로써 회개할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며, 그가 하는 말이 자신의 생각과 믿음과는 다르더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더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기회로 삼고, 우리의 삶 속에서 상대방과 더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애를 쓸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권면을 겸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주고받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상처와 오해: 관계의 현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이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을 통하여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한 단계씩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계십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는 물론이고 많은 미국 교회조차도 이 부분에 있어서 성경적인 원리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예수를 믿는 성도조차도 서로를 권면하거나 격려할 때, 심지어는 서로를 사랑하거나 칭찬하는 일에 있어서 그로 인해 많은 아픔을 겪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서로 상처를 쉽게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말을 그 사람이 없는 데서 제삼자와 주고받곤 합니다. 어떤 사람이 쳐다보는 것을 오해해서 나에게 눈을 흘기고 있다고 오해하기도 하며,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나를 지나치는 사람에게 나에게 고의적으로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쳤다고 기분 나빠합니다. 제가 일전에 중고등부 학생들과 같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깜짝 놀랐던 것은, 그 아이들도 어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인데도 이 아이들 사이에서도 나이 차이로 서열이 있어서 나이 어린 아이들이 자기를 모른 척하거나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가면 화를 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 똑같지요? 물론 어떤 때는 그것이 사실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오해로 생긴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편리한 대로 삶을 살 때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질문: 용서는 몇 번까지?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 역시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 뒤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서로를 권면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바로잡을 수도 있고, 또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애를 쓸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 사람들에게 가서 권면을 하고 그 사람이 회개를 하고 뉘우치더라도, 바로 똑같은 죄를 짓게 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그 사람을 용서를 해주어야 할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 두 번 정도는 내가 권면하고 그 사람이 바로 알아듣고 회개하면 감사한 마음이 들 텐데, 그런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계속해서 저지르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여쭈어 봅니다. ‘예수님, 그러면 일곱 번까지는 용서를 해 주시겠습니까?’. 이것은 베드로가 진짜 큰 마음을 먹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당시의 랍비들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세 번까지 용서해 주라고 가르쳤습니다. 세 번 정도는 같은 죄를 범하더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랍비들은 가르쳤는데 이보다 두 배도 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7이라는 완전수를 의도해서 사용하여 예수님에게 칭찬을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횟수가 아닌 마음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씩 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확하게 490번 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성경의 번역인데, 또 다른 번역은 77번이라고 이야기하는 성경도 있습니다. 영어 성경은 대부분이 77번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은 BC 200년경쯤에 헬라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때 창세기에 가인의 자손인 라멕에 대한 이야기를 번역했는데, 그 이야기 중에서 ‘가인의 벌은 일곱 배이겠으나, 라멕의 벌은 칠십칠 배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회개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는 그 정도로 죄를 지었으나 그래도 끄떡없다 라는 아주 교만한 고백의 이야기입니다. 이 때 사용된 ‘칠십칠 배’라고 하는 그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가 오늘 본문에 사용한 ‘일곱 번에 일흔 번’ 에 사용된 헬라어와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시대의 성경학자들은 77배 라고 이 구절을 번역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둘 다 맞다고 보더라도, 77 번이나 490 번을 용서한 후, 491 번째 잘못을 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이전에 전도사 시절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립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한 집사님께서 저에게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그 독실한 신자이던 집사님이 고등학교 때 한 친구와 다투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 친구가 그 집사님의 뺨을 큰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고 합니다. 그 때 그 분이 맞으면서 들었던 생각이 ‘이번까지는 내가 참는다만 만약 한 대만 더 때린다면 그 때는 내가 널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돌려 대라고 하셨으니, 이번 한 대만 더 맞아주고 그 후에 내가 너를 죽여 놓겠다는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웃긴 이야기일 수 있으나, 이것은 마치 내가 77번 까지는 용서했으니, 이제 네가 78번째 잘못을 또 다시 저지른다면 그 때는 내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정말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려 하는 것이 이런 것일까요? 아니라는 것을 다 아시지요? 네, 이 77번이나 490번은 무한대를 은유하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용서해 주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굉장히 어려운 구절 중 하나가 됩니다. 베드로도 아마 비슷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일곱 번 까지만 용서하고 그 다음엔 복수를 해도 정당한 것이겠지요?’. 우리의 마음도 베드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 내가 이번만은 참는다만, 네가 한 번만 더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면 너는 끝장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수는 달콤하지만, 이를 참고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본문에서의 주님의 용서는 그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이 본문에서 이렇게 끝을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즉 문제는 용서의 횟수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비유를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이만큼 네가 용서해 주면 그 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비유의 시작: 일만 달란트 빚진 종
자, 그러면 이 비유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한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왕이 때가 되어 나라의 재정을 결산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산 과정에서 왕은 어마어마한 큰 돈이 국고에서 비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재정의 양이 1만 달란트였는데, 그 재정을 특정인에게 빌려주었던 것입니다. 이 달란트라고 화폐 단위는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최고 높은 단위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저도 본 적이 없지만 은행에서 사용된다는 미화 1000불짜리 화폐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1 달란트가 그 당시에 얼마나 가치를 가지는지를 계산해 보면 그 당시 노동자가 하루를 꼬박 일해서 받는 임금이 1데나리온이었는데, 아마 오늘날로 따지면 최저임금으로만 따져도 100불에서 200불 정도가 되는 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의 가치를 지니는 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노동자가 꼬박 2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돈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진 1만 달란트는 한 사람이 20만 년을 일해서 벌어야 하는 금액인 것입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쓴 글에서 따르면, 헤롯이 죽고 난 후 아들 세 명이 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나누어서 다스리던 당시 이들이 전 이스라엘의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세금이 900 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만 달란트를 빚을 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돈에 대한 채무를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은 실로 엄청난 과장법을 사용한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이런 큰 돈을 빚지게 되는 일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이 어마어마한 돈을 왕에게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비유를 풀어나가기 위해 우선 알아야 할 전제는 바로 이 빚은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핵심 교훈 1: 갚을 수 없는 죄의 빚
이러한 전제를 두고,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이 비유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교훈에 대해 네 가지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이 비유가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는 일만 달란트를 빚진 이 사람은 도저히 그 돈을 갚을 수가 없는데, 왕이 이를 갚으라고 그 사람에게 명령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사람은 자신은 갚을 능력이 없다고 왕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왕은 그에게 그의 소유와 그 자신, 그리고 그의 전 가족을 종으로 팔아서라도 그 빚을 갚으라고 독촉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그 사람은 그 어마어마한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왕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왕에게 그 빚을 갚은 일자를 연기해서 라도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빚을 자기 평생에 걸쳐서라도 반드시 갚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엄청난 양의 빚은 성경의 전체 문맥으로 이해하면 우리가 왕에게 지은 죄, 즉 하나님께 지은 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죄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그 심각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워서 우리가 비록 주님 앞에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말은 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그 죄의 깊이를 도무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 죄는 너무나 무서운 것임과 동시에 무척이나 교묘하고 천재적이어서, 우리들은 그 죄에 쉽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죄로 인해 힘들게 되고, 그 유혹에 쓰러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죄의 문제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비유의 서두에서 알려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핵심 교훈 2: 조건 없는 탕감 - 왕의 불쌍히 여기심
그리고 그 빚이 왕에 의해 탕감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는 두 번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왕이 그의 빚을 탕감해 준 이유가 왕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어떤 조건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왕이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엄청난 빚을 모두 감해 주었습니다. 그 종은 스스로 어떤 일도 한 적이 없었으며 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였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반전: 용서받은 자의 무자비함
그런데 그가 그렇게 탕감을 받은 다음에 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가 그런 은혜를 왕으로부터 받은 후에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행동을 살펴보겠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 자가 자신에게 빚진 자를 만났다고 나오나 정확한 원문의 뜻은 빚진 자를 찾았다는 뜻입니다. 즉 그가 왕으로부터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후,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도 보통 사람의 약 4개월 치 임금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적은 금액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대하기로는 그가 그렇게 큰 용서를 받았으니까 자기한테 빚진 자의 채무도 없애 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 그 사람은 자신에게 빚을 진 채무자의 목을 조르면서 거칠게 그 백 데나리온의 빚을 갚도록 독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서로는 왕에게 일만 달란트나 되는 큰 돈을 탕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게 조그만 빚을 진 사람에게는 목을 흔들면서 그 빚을 받아내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괘씸한 감정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핵심 교훈 3: 빚 독촉의 정당성
그런데 여기서 제가 오늘 이 비유가 이야기하는 세 번째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이 자신에게 빚진 사람을 붙잡고 내 돈을 내어 놓으라고 한 행동은 정당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놓치면 이 비유를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려워집니다. 이 사람이 빚을 갚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을 한 것이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 상황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왕 앞에서 자신의 빚을 한 푼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당장 먹고 살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에게 자신의 돈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잘못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사람에게 순간적으로 화가 날 수는 있겠으나 그는 사실 정당하게 자신의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용서함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받았고 그가 여러분을 힘들게 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한테 그것에 대한 당연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신자라면 그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것은 신앙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핵심 교훈 4: 문제의 핵심 - 불쌍히 여기지 않음
그런데 이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으며 다른 곳을 향해 흘러가게 됩니다. 자신의 것을 정당하게 요구했다는 것이 세 번째 사실이라면 바로 그 다음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게 된 이유는 그가 정당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채무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빚진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열쇠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빨리 이해하신다면, 오늘 설교는 정말로 빨리 끝날 수가 있습니다. 이 네 번째 사실에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그가 정당한 일을 했다는 것은 알게 되었으나 그는 자신에게 빚 진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도 오늘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채무자를 독촉하고 심지어는 감옥으로 보냈다는 것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이 사람의 문제였습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용서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보라
즉 오늘 비유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예수님께서 이 용서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서 아픔을 겪는 경우를 흔히 경험합니다. 부모가 나의 아픔이 될 때가 있고, 자식이 나의 상처가 될 때도 있습니다. 부부간에서도 다툼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를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아픔과 상처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시간이 저절로 해결하게 하는 그런 방법을 주로 사용하곤 합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이니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고, 슬며시 용서를 구하고 얼떨결에 용서를 해주는 식으로 그냥 그렇게 아무 일 없었던 듯 지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갈등이나 상처를 해결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니나, 이런 식의 갈등 해결 방법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듭니다.
여러분이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한 말이 남의 마음에 칼을 꽂으며,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아프게 한 것은 그냥 사람이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죄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어떤 사람 뒤에서 그 사람을 향해 수근 수근거리며 욕을 한 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죄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넘겨 지나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수근거리며 이웃을 중상하는 것을 분명히 살인이나 다른 죄와 똑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자기도 모르게 판단하거나 정죄하게 되면, 우리는 그냥 지나가는 말이었거나 습관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할 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 문제 해결의 불가능성: 인간의 한계
이 말씀을 여러분께 드리는 것은 여러분을 정죄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만약 이러한 수근거림이나 비방이 죄가 된다면, 우리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을 우리가 죄라고 인정하게 된다면, 그 말은 우리가 스스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죄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세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 자신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런 죄를 가지고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된다면 이 모든 죄상들은 너무나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할지라도,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서 죽듯이, 우리의 무심코 던진 농담 한마디로도 상처를 받는 사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매주 설교를 하고 사적이던 공적이던 많은 성도님들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 목사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에게 본의가 아니게 상처를 주었던 때가 아주 빈번했고, 또 그럴 때마다 일일이 그 사람을 찾아가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고 용서를 빌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여러분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무척이나 힘들고 전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해결책: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런데 그것을 단순히 인간 관계 속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죄라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심으로써 우리는 이제 그 문제에 접근하는 모든 출발점이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우리는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인간 관계 속에서 생기는 갈등 정도를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저지른 단순한 실수를 한번 용서해 주시러 온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조금 더 우아하고 단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조금 더 괜찮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죄로 규정지었으며, 그 죄로 인해 우리는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내가 그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심리와 감정을 조절하는 우리들의 능력과 그러한 생각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성경이 밝히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가 이 문제의 주인이시며 그것을 위해 주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우리는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그 사실을 놓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용서의 어려움과 강요의 폭력성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는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 사람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어떤 일에 피해를 당해서 이를 용서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쉽게 그들에게 신자라는 이유로 용서를 당연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약간의 피해를 당하더라도 이를 참고 용납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교회 내에서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러한 용서는 아주 쉽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이는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도 어떤 피해자에게 맹목적인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에게 있어서 용서란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용서의 시작: 왕의 은혜를 아는 것
오늘 본문의 비유는 이처럼 어떻게 접근하면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인 것처럼 생각되고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그 용서의 문제를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용서의 문제를 죄와 연결해 생각하고 있고, 이것을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가 향해야 할 분은 누구이신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이 비유가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는 그 여정 안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이러한 행동은 그 당사자들 사이에서 좋게 좋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입술로 하는 범죄는 우리의 이웃의 등에 칼을 꽂는 행동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런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의 입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님이 오신 것 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손과 입술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것을 잘라내어 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정말로 우리가 그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면 우리 중 누가 이 예배당에 앉아서 찬송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하는 손과 입이 다 잘려 나갔을 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한 잘못을 죄로 시인하지도 않고 또 용서도 하기 힘들어 할까요? 그러므로 우리의 시작은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라는 것을 시작하시는 분은 우리의 왕이시라는 점에서 이 모든 용서가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용서의 시작은 이 왕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은혜가 얼마나 깊고 넓은 가를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정당하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도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에서 우리의 모든 용서를 시작하게 되면, 그 말은 내가 왕으로부터 받은 그 모든 은혜가 너무나 크고, 그것은 내가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보상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나 크고 아름답고 내 인생에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조그만 보상보다는 우리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로 남을 용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됩니다.
용서는 과정이다: 결단 너머 십자가 의지
용서는 단번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정말로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웃을 용서하였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마음속 한 켠에서 다시 그 아팠던 기억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이것이 용서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용서라는 것이 우리의 의지나 결단으로 되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용서라는 것이 마음의 문제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용서라는 것은 우리가 진 빚을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 갚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서 그 사람을 용서해야겠다고 결심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얻는 연민과 사랑
용서란 우리들의 결심에서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 해결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서로 용서하겠다는 결심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위해서 죽으셨으며, 그래서 그 용서를 회복하시고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객관적인 진리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로 인하여 우리의 용서의 마음을 그 분께 의뢰할 수 있고, 우리는 흔들리기 쉽고 우리 마음속의 용서와 사과들은 부족하기 이를 데 없으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용서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야 말로 우리가 용서를 시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많은 기독교 상담가들이 말하는 ‘정당한 복수’ 에 대한 의심스러운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복수의 마음이나 그 빚을 모두 받아 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이 들며, 만약 이것이 정당하다면 예수님은 왜 나에게 오셨나 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에 미치게 되면, 자연적으로 그 상대방도 절대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구덩이에 빠져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그도 갚을 능력이 없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들 사이에서 생겨난 많은 아픈 기억과 고통들을 함께 아파하고 서로를 위해서 울어주고 용서하고 싶으나 우리들은 그러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아픈 것 만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보게 되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드디어 상대방에 대한 연민, 혹은 사랑이 생겨나게 되고 서로를 향한 불쌍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용서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고 그 곳에서 참다운 용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죄의 고통과 그리스도의 평안
죄는 여러분과 저를 너무나도 끈질기게 괴롭히고 우리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이 죄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주고 지옥 같은 고통 속으로 충분히 우리들을 끌어 들일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죄로 인해 너무나 끔찍한 지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아픔들과 상처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죄는 그 만큼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러분과 저는 그 모든 것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우리의 죄가 되어 죽어 주시어, 그 죄를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분노와 고통이 아니라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여러분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시며, 우리의 기쁨과 모든 것이 되어 주십니다.
복음 안에서의 참된 용서와 사랑
이와 같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들 사이를 가로막는 많은 문제들과 그것들을 용서하기 힘든 모든 이유가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로 인해 다시 한번 십자가를 붙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분노와 원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지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게 되며, 서로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게 되고, 죄의 무서움 속에서 고통을 받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 이런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나를 살리는 진정한 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 알면 우리들 마음속에 드디어 복음이 허락하는 진정한 용서와 사랑으로 올 한 해를 시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우리는 반드시 이 일을 시작하고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된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서로가 주님이 없이는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의 감정을 해결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가 참된 화목과 참된 해결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떠한 기쁨인가를 알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로서는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 일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알고 그래서 우리가 그 주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저희에게 진정 영원한 기쁨과 소망이고 진리와 능력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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