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장 8절부터 15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아멘.
가인과 아벨의 대화와 타락한 소통
오늘은 가인의 이야기에 이어서 아벨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가인의 이야기인 동시에, 거기에는 아벨의 이야기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처음 했던 말이 오늘 본문의 8절에서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 맛소라 사본 아니라 구약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바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는 이 표현이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들로 나가자’고 말하고’로 번역이 되어 있고, 이 문장이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맛소라 사본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으나, 히브리어를 번역한 70인역 보다는 맛소라 사본을 더 권위 있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 성경에는 오늘의 본문처럼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했다’ 라고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70인역의 번역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어투는 우리가 이미 함께 살펴보았던 아담과 하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성경에는 하와가 아담에게 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주어서 먹었다고 나와 있는데, 하지만 뒤에 보면 하와가 아담에게 말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간의 대화가 있었고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가인이 아벨을 무조건 들로 데리고 나가서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둘이 어떤 식으로 든지 대화를 했다는 의미를 성경에서는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대화도 그 결과가 결국은 죄로 끝이 난 것처럼, 성경에서 두 번째로 나타난 가인과 아벨과의 대화, 그 소통은 그때보다 더욱 더 타락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대화하고 서로 소통하는 것이 이제 옛날처럼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이라는 말에서 보여주었던 그 완전한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서로를 하나님의 뜻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또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심지어는 죽음으로까지 인도하는 그러한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혀의 위험성: 야고보서 3장
여러분, 이것이 바로 말세의 무서움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 작은 뿔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느냐?’고 이렇게 말하면서 야고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여러분, 이것은 혀 자체를 지금 야고보 사도는 불의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혀는 좋은 것이나, 우리가 잘못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혀 자체가 불의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우리의 언어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뒤틀려 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없는데 혀 조차도 선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도 온 몸을 가장 쉽게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고,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과 같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수긍이 가십니까? 진실이 아닌 것 같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언제 지옥과 같은 아픔과 고통을 경험하는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경우가 말로 인해 생기는 문제일 것입니다. 어떤 때는 오해를 받아서, 어떤 때는 실제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들을 들어서, 또 그런 식으로 우리가 남들을 그렇게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되었거든요. 혀가, 우리가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가 반드시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그래도 말을 실수가 적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우리는 심지어 옳은 말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지옥과 같이 만들 수 있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옳은 말을 하면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진실은 고통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옳은 말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정말 상하게 하는 그런 태도를 가질 때도 있습니다. 왜 인정해야 되냐고요? 왜냐하면 저의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혀를 능히 길 들일 사람이 없도다.”. 이것이 성경에 말씀하시는 우리의 혀에 대한 표현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앞으로 그럼 내가 좀 조심해서 내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혀를 완전히 길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길들이고 그것을 완전히 통제 속에 넣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혀를 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쉽게 불타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불을 지를 수 있고요, 누구나 불에 타오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혀 인 것입니다.
오해의 근원: 자기 중심성
왜냐하면 이것이 타락의 가장 중심되는 내용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중심에서 말하고 내 중심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서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잘 통하는 사이에서도 대화 중에서 그런 오해로 발생하는 일들이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사람의 대화나 관계 속에서 필수적으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100% 완전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같은 한국말을 쓰는데도 그 말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인해서 우리는 서로 오해를 하게 되고, 그리고 그 오해 때문에 우리의 상처를 입거나 또 힘든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별로 듣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아마도 남의 말을 가장 잘 듣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가장 무서운 부분입니다. 우리는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내 말만 하려고 하고 남의 말은 잘 듣지 않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같은 설교를 듣고서도 어떤 때는 엉뚱한 일들을 하거나 말을 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해서 드릴 때 만이 그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이지 여러분이 아무리 지적으로 뛰어나고, 그리고 양심이 훌륭하고, 그리고 여러 가지 경험과 경력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판인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 조차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말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중심이니까요. 내 중심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유일한 성령 하나님의 능력 밖에는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의 소통: 설교 듣기와 대화
그래서 여러분이 설교를 정말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설교 시간에 졸지 말고 열심히 경청하면 될까요? 아닙니다. 설교 시간에 졸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성령 하나님을 의지해서 듣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실력으로, 내 성경 지식으로, 내가 알고 있는 교리적 지식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성령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없으면 모두 배설물과 같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게 하실 수 있으니 그 주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성령 하나님의 능력, 복음의 능력이 없이는 정확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원래부터 없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은혜에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부부간이든 혹은 자녀와 부모 간이든 이렇게 상담을 꼭 하게 되거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으면 굉장히 놀라실 것입니다. 둘이서 한국말로 대화를 하십니다. 그리고 둘이 상대방의 말을 다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그런데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둘이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서로 자기 말만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본인의 말을 상대방이 이해할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본인도 상대방의 말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래서 가끔은 상담을 할 때 이러한 방식을 사용합니다. 즉, 상대방의 한 말을 다시 한번 정리해서 얘기하도록 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도 우리는 이해했다고 생각을 하니까, 그렇게 해 보면 얼마나 놀라운 지 몰라요. 정말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지 않습니다. 모두 다 내 입장에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르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대화: 진리와 성품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알고 진리를 쫓게 합니다. 그 말 속에는 사실을 알아 간다는 내용도 있지만, 동시에 사실은 그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대화를 할 때 그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쫓는 다는 말에 실질적인 의미입니다.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화에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내가 너와 이야기 할 때 항상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자’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 대화의 목적과 내용이 어디에 맞추어 주고 있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대화의 목적은 여러분이 서로에게 자신이 말하는 것을 관철시켜서 나와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혹은 내가 상대방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그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그 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타나게 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우리 대화의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화는 진리를 이야기하면서 그 진리를 통해서 사랑과 절제와 인내의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옳은 것 만을 이야기해서 그것을 관철시켜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얼마나 잘 난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을 상대로 전도를 할 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그 사람들을 상대로 설득하려는 유혹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는 것은 나쁜 의미의 설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 사람에게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설명을 하고, 그래서 논리적으로 이기려고 시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예수를 믿는 게 너무 당연하지 않느냐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러한 경우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그래, 너 잘났다!’ 보통의 경우는 이렇게 끝납니다. ‘당신 말이 옳습니다, 내가 항복하고 예수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설득이 논리적으로 옳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지는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모든 삶도 그러합니다.
복음의 능력과 회개
과연 우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가고 있을까요?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은 그래서 우리에게 회개할 수 있게 하며,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을 알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지만, 그때 복음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으며, 그리고 화평 을 누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을 깨닫고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가인의 살인과 죄의 심화
여러분, 소통이 타락을 하게 되니까 죄가 가인을 다스리고 삼키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성경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일어나서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그 전에 죄가 웅크리고 그 문에서 가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인은 그 죄가 자기를 다스리니까 죄를 가지고 일어나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쳐죽였다’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냥 그것만 읽으면 되게 심한 말처럼 들립니다. 원문의 뜻은 쳐죽인 것 보다는 ‘일어나서 죽였다’ 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근데 이 패턴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나온 패턴과 아주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보다 더 심각하고 무서워졌습니다. 한번 보세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도 이들이 처음에는 대화를 합니다. 그런데 그 대화를 통해서 죄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아니니까. 가인과 아벨도 대화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훨씬 더 심각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 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 죽음이 그들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은 어떻게 되었냐 하면 쳐서 아벨을 실제로 죽이게 되었습니다. 훨씬 더 심각해졌지요.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여러분은 아담과 하와의 첫 세대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부터 자세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똑같이 같은 패턴으로 하나님은 가인에게도 물으십니다. ‘내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 때 아담과 하와는 수치를 가리고 숨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가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아주 드러내어 놓고 하는 첫 번째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자나 깨나 변하지 않고 오늘날도 TV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똑같이 순환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무서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고,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결국은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비참한 것 인가를 아담과 하와의 죄와 비교를 통해서도 보여주고 이 구조 전체를 통해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벨의 특징: 믿음과 의로움
그렇다면 아벨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아벨의 특징을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고 지난 주에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말하느니라. 여러분, 그가 고난을 당했고 그가 죽임을 당한 이유를 성경은 그가 의로웠고 그의 행동이 의로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의로웠다는 말은 이 아벨이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은 죄인 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그를 의인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를 의롭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피를 의인의 피라고 부르고 그를 ‘의’ 라고 불렀습니다.
땅이 그 의인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땅이 더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억울한 피라는 뜻이죠. 그리고 가인은 그 저주를 받게 됩니다. 언어적인 표현으로만 본다면 성경에서 처음으로 사람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던 저주는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적으로 하신 저주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가인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로 향하는 저주를 땅으로부터 직접 받게 된 것입니다. 아벨의 죽음에 대한 심판, 혹은 형벌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있었던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인간이 죄를 짓게 되고, 그리고 그 죄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 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이야기 인 것입니다. 그 죄의 결과는 심판과 죽음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아벨의 피와 선지자들의 피 - 마태복음 23장
마태복음 23장 35절 말씀을 제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이 구절에는 예수님께서 아벨에 대해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 말씀을 보면 처음에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피가 어디까지 이어졌다고 하십니까? 사가랴의 피까지 입니다. 제가 그 모든 내용을 다 설명 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시작한 그 의로운 피가 결국에는 죄인의 심판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아벨의 피로 인한 심판 외에도 그 흘린 피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연관된 무엇인가를 함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방금 읽어드린 마태복음 23장 34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즉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보내신 여러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죽였다고 책망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박해를 받았고 죽음을 당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35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의인 아벨의 피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보내신 선지자나 지혜자, 혹은 서기관과 같이 핍박을 받고 죽어서 피를 흘렸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아벨을 형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가인의 동생이 아니라 선지자라고 저희들에게 밝혀 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아벨이 가인에게 말을 했을 때, 단순히 형의 화가 돋구어져서 동생을 우발적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아벨이 선지자로서 가인에게 그의 죄를 지적하는 역할을 했음을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이야기 하였고, 인간은 믿음으로 살아야 되며 분명하게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의로운 아벨의 행위였습니다.
선지자의 역할과 세상의 반응
그럼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로 아벨의 믿음은 가인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었습니다. 세상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선지자의 말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수많은 선지자가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선지자 중에 우리 식으로 판단해 봤을 때, 딱 한 명의 성공한 인물이 있습니다.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바로 선지자 요나입니다. 요나가 설교를 했을 때, 이스라엘이 아닌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요나보다 더 활동을 많이 했던 선지자로 누구를 떠올리시겠습니까? 이사야, 예레미야 혹은 에스겔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물론 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선지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전해서 회심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그들은 말씀을 전하다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한 실패한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아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순교를 당한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의 죄를 드러냈습니다. 세상이 심판에 처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고, 그래서 가인은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고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죄를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혀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혀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죽이는 일만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들을 때, 우리는 과연 그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의 죄를 순순히 회개할 수 있을 까요? 만약 제가 한 집사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집사님, 집사님의 혀는 불의의 혀입니다. 그러므로 그 혀를 잘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다닌다면 제가 과연 목회를 계속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말은 지금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면 그 분은 어떻게 반응하실 까요? ‘목사님의 말씀이야 말로 저를 죽이고 있습니다.’ 라고 그 집사님이 대답하지 않을 까요?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우리의 말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힘이 듭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 진리가 우리에게 정말 적용되었다면, 우리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겠구나 라고 느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빛은 우리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십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게 되면 그 어둠이 환해지며 그 빛을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온 아벨의 믿음에 대해 그러한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아벨의 믿음의 특징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아벨의 선지자 로서의 믿음이 과연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벨의 믿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큰 세 가지에 대해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특징 1: 하나님 의지 (주권 인정과 자기 부인)
아벨의 믿음의 첫 번째는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알고, 그 다스림을 내가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지요. 나는 왕이 아니라 왕의 자녀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그 하나님의 뜻을 저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께서 나의 주가 되시며, 그러므로 그 분이 언제나 나의 옳고 그름에 대한 주가 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부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나의 생각들이 우리 속에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임의대로 행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세상적으로 남들보다 열등하거나 눌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항상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살기 좋은 미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처음에 미국으로 유학을 왔을 때는 지금보다 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더 살기가 좋았습니다. 그래서 가끔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가난한 유학생의 모습이었지만 저를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저를 부러워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전 가난했지만 미국에서 미제 치즈를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 들으시면 참 웃기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때는 그 말이 가난했던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미국에서 공부하지만 그래도 나는 미제 치즈를 먹고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었지요.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니신 가요? 이 미국까지 건너오셔서 여기에서 살아남으신 분들 이잖아요. 보통 사람들 일 수가 없지요.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우리의 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모습을 죽이는 것이 단순히 우리를 비우고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비워서 높아지는 그런 단순한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모든 것들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이유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로 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들의 은행쯤 으로 생각하는 잘못을 범할 대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의 돈을 맡겨 놓고 마음대로 꺼내어 사용하려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주인이고 여러분이 은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것을 모두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하시면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살아 가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인이라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의 특징 2: 은혜로 삶 (자기 부인)
그러므로 믿음은 내가 가진 것, 내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며, 성경에서 이것을 은혜로 산다 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많은 분들은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예배의 설교에서 은혜를 받았다 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인가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거나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은혜 받았다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로 산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하나님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은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내가 좀 모자란 사람입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믿음을 가진 저와 여러분은 우리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특징 3: 본향을 사모함 (하늘 소망)
아벨의 믿음이 보여주는 세 번째 의미는 히브리서 11장 말씀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14절에서 16절 까지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에서 아벨의 믿음을 설명할 때, 그 뒤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이들은 이 땅의 것을 바랬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 그 하늘의 성이 있는 터를 바랬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고 살았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있으며, 그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 인생을 결정짓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세상은 절대로 우리의 인생을 결산하고 정의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힘이 있어 보이고, 여러분을 판단하며, 성공한 사람, 잘 살았던 사람, 괜찮은 사람, 멋진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레벨을 붙이고 우리 삶을 판단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의 마지막 결산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결산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될 지는 몰라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지막 결산의 순간에는 세상 사람들을 이기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생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실패가 여러분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이 세상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처럼 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요즘 TV에서 군대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가 아주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저도 한 번 보고 싶은데요. 대한민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그 병영의 단체 생활을 경험하지요. 남자들이 3년 가까운 시간을 그 밀폐된 공간에서 살아야 하니, 그 곳에서는 아주 많은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군 생활을 하는 이 젊은 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것은 바로 ‘말뚝 박기’ 란 말입니다. 이 속어의 뜻은 군대에서 평생 복무를 해야 된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즉 그 사람에게 사회로 나갈 수 없으며, 평생 군대에서 계속 살아가라는 명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직업 군인을 제외한 젊은 친구들이 군대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하는 생각은 하루 빨리 제대해서 사회에 돌아가 다시 학교도 다니고 직장도 다니며 자신의 꿈을 찾아 사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군대에서 말뚝을 박고 살 생각을 단 일초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말뚝 박기라는 말이 군대에서 제일 큰 욕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나요? 여러분과 제가 이 세상에 말뚝을 박을 것처럼 사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부 다 세상에 말뚝을 박고 사는 사람처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한다라는 말은 어찌 보면 말뚝 박기라는 말처럼 가장 큰 욕 일진 대, 우리는 그것이 욕인지도 모르고 그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큰 복을 받아서 오래 오래 부자로 살라는 말은, 이 땅에서 말뚝을 박고 영원히 살라는 말 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이 우리가 누리고 싶어하는 가장 큰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의 복은 우리에게는 가장 큰 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졸업해서 가장 멋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제일 멋진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군대에서는 그 사람의 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에 모든 청년들은 똑같이 취급되며, 그 청년들에게 군복을 입혀 놓으면 누구가 다 똑같아 보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군대 들어오면 어리 버리 해 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젊은이들의 인생의 끝은 아니잖아요. 그들의 일생이 군대에서 결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삶의 순간이 아니라 우리의 삶 이후에 것으로 결산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고, 우리의 인생이 이 순간 실패한 것으로, 우리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은, 의미 없는 세상의 가치와 판단에 우리 스스로가 유혹받고 흔들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벨의 믿음과 교회 생활의 적용
이러한 문제는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들과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도 지금까지 살폈던 그 아벨의 믿음의 특징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쉽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무시하고는 합니다. 우리의 이익이나 욕심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도 내 입맛에 맞추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런 뜻으로 이야기를 하셨을까?’. 이것이 우리가 받는 유혹의 시작입니다. 우리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하셨을까 라고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이러한 의심이 내 마음속에 들어서게 되면 그 때부터는 나의 상처와 자존심이 하나님보다 훨씬 더 중요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 일을 할 때도 동일하게 발생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수많은 어렵고 속상하고 답답한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 답답한 일도 생기고요. 교회 공동체를 섬기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자신의 실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 책임을 억울하게 떠맡기도 합니다.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당회원이 되기 위해 저렇게 열심을 부린다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말들을 우리는 교회 내에서도 아주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지요. 어떤 위로로도 그 아픔을 가시게 할 수 없습니다. 힘들지요.
그런데 과연 그러한 오해와 힘듦 때문에 낙망하여 쓰러지고 교회를 섬기는 일을 포기할 수 밖에는 없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성도를 섬기며 사랑하라고 하신 명령을 내 삶의 최우선으로 삼아서, 비록 우리가 상처투성이가 될 지 언정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라는 그 길로 가야할 까요? 두 말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우리가 상처투성이가 되더라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들은 서로를 목숨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힘들지만, 그리고 남들은 하지 않고 나만 손해를 보면서 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내가 해야 되는 일, 주님께서 나에게 시키신 그 일, 바로 주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이 길을 묵묵히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을 흔들어 대지만 그 아픔을 견디며 그 길을 걸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며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살기로 결정을 한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무시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내 개인적인 감정이 더 중요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까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 만이 은혜이며, 나 자신을 부인하게 만드는 모든 일들은 전혀 은혜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무엇인가가 채워질 때에만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게 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전혀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무익한 종이 아닐 때가 대부분입니다. 저희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쉽기 하나님께 맞서게 됩니다. ‘네 하나님, 저는 무익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부디 저를 찾지 말아 주세요’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이런 겸손의 표현은 우리에게 참으로 익숙한 표현입니다. ‘난 아무것도 못하는 무익한 사람이니 저를 귀찮게 하지 마세요’. 그러나 이 말에는 ‘종’ 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은 무익한 삶이 아니라, 무익한 종의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종’ 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렇습니다, 종은 묵인 몸입니다. 도망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에 진정한 주님의 종이 있습니까? 저를 포함한 여러분은 진정한 주님의 종이십니까? 기회만 되면, 우리는 내 손이나 발에 상처를 내어서 라도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는 무익한 사람으로 남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종이 되기 싫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종은 외롭고 힘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종은 교회의 종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종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희미 해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많은 것들로 인해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벨의 믿음의 궁극적 의미: 그리스도의 피 - 히브리서 12장
여러분, 이제 아벨의 믿음이 저희에게 말하고자 하는 마지막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벨의 믿음은 우리에게 아벨이 흘린 그 피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4절 말씀입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무슨 내용인지 난해한 구절입니다. 제가 오늘 이 구절을 이해하기 쉽게 자세히 풀어서 다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의 피에 가까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제 좀 명확해지셨지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앞으로 우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피는 아벨의 피보다 나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아벨의 피는 사실은 앞으로 오게 될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벨의 흘린 피는 결국은 심판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 의로운 피가, 억울한 피가 그 곳에 흘려졌기 때문에 가인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리스도의 피는 심판하는 피가 아니라 그 땅을 회복하는 피였습니다. 정결하게 하는 피였습니다. 깨끗하게 하는 피였습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와는 반대의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는 정죄의 자리가 아니라 용서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자리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자리가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회개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 속에서 여러분을 건져 주시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어떤 험난한 상황에 우리가 있더라도, 우리들의 신앙이 너무 약해지더라도, 우리들의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교제가 정말로 미약하더라도, 우리는 더 이상 정죄와 절망 앞에 서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과 사랑이 아무리 약해도, 우리 공동체 내에서 어떠한 인정할 만한 사랑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공동체 내에서 제대로 된 성경 지식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을 지라도, 심지어는 교회 내에 기도하는 사람이 너무나 적은 상황이 될 지라도, 그렇더라도 여러분과 저는 정죄의 자리와 그리고 실망과 절망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그 자리로부터 옮겨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자리에 이르게 하시는, 그래서 우리로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벨의 피와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그래서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놓치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 자신만을 깎아 내리다가 끝나는 인생, 혹은 영원히 나 만을 높이며 사는 인생으로 끝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변화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혹시나 이 설교를 듣고, 여러분이 성경을 잘 모르고, 기도를 게을리 하고, 공동체를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내지 않는 것이 괜찮은 일이구나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노파심이 생깁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하나님의 손으로 붙잡아서 내 연약한 신앙을 주님께서 보살펴 주신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여러분을 그 연약한 가운데 그냥 놓아 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자리까지 이끌어 가실 분이시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여전히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고 실망으로 가득 차 있는 분이 있으신 가요?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에 대해 토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시는 분이 계신 가요? 여러분께 제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에게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예수 믿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저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변할 수 있을 까요?’ 저는 그것이 참 좋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변하고 싶고, 더 주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변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틀렸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변합니다! 왜 인지 아세요? 여러분에게는 영원한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여러분의 편입니다. 80년 인생 동안에도 안 변한다고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천국에 가서도 변합니다. 여러분은 천국에만 들어가면 그 때부터 완벽한 존재로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닙니다. 그 곳에서도 우리는 영원이 하나님을 배워 갈 것입니다. 영원히 그 분과 사랑을 나눌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그 기쁨 때문에 몸이 떨림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으로 인해 우리는 너무나 행복할 것이며 그 행복이 영원히 커져가게 될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상상이 잘 안되세요?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은행 계좌의 잔고가 날마다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은행에 돈을 가만히 두었는데 그 액수가 점점 커지는 거예요. 이제 좀, 감이 오시나요?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의 그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우리의 편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그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절대 하나님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여러분을 향한 그 은혜를 우리가 절대 꺾을 수가 없습니다.
결론적 권면: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힘이 빠지고 지치고, 변하지 않는 나 때문에 속이 상한 모든 분들께 제가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에게 나아 가십시오.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여러분, 정말 너무 뻔해서 제가 드리기도 어색한 말이지만, 이 말이 유일한 해답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스스로 이렇게 설교를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불안의 사람이 아니고, 실망할 수 없는 사람이며, 정죄 받을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들은 다 내려 놓으시고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시라는 그 주권을 믿는, 그 주권 아래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불안하고 힘들며 지쳤다면, 그 주님에게 의지하십시오. 그 분과 함께 그 곳에서 여러분의 참 안식과 평안을 찾으십시오.
마무리 기도
기도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웃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도, 그리고 나의 믿음조차 나를 지키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을 때라도, 나는 주님을 의지하는 주님의 사람입니다. 주여, 우리를 도우사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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