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 17절부터 21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해야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이니라하시니라.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멘.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 그리고 그 후의 반전: 아담의 믿음 (하와) 하나님의 인정 (가죽 )

저희가 지금 다루고 있는 3 부분은 하나님께서 , 여자, 아담에게 죄를 지은 것에 대한 결과, , 형벌과 심판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마지막 부분인 20절과 21절에 주목해야 합니다. 구절에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본문의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시려고 하신 말씀일까요? 말씀은 앞부분의 저주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특히 우리의 주의를 끌게 됩니다. 앞에 있는 내용은 읽으신 것처럼 아주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심판의 내용입니다. 땅이 저주를 받고, 남자는 평생 수고해야만 소산을 먹게 것이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고, 그리고 사람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죽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간단하게 이야기하려고 해도, 너무나 암울하고 어두운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이 끝난 다음에 바로 나오는 구절이 본문 20절입니다. 이런 참담한 저주의 내용 다음에 아담이 하는 이야기는 전혀 우리가 쉽게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담의 자연스러운 답변은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거나,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간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은 이러한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의 아내인 이브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며, 이름의 뜻은 앞에서 살폈던 대로 자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람이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 죽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로 이해하는 것처럼 그의 아내의 이름을 자의 어머니, 살아있는 사람의 어머니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지금 하나님께서 선언과는 다른 무언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말한 이야기가 맞음을 증명하는 내용으로 21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아담의 반응이 죄에 대한 저주의 내용을 아담이 바르게 이해하고 있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장면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아담이 지금 이야기는 아주 이치에 맞지 않는 엉뚱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아담은 지은 여자를 자의 어머니라고 칭합니다.

 

아담의 : 아내의 말을 들음 (잘못된 소통)

그래서 부분을 보면서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께서 감추어 놓으신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선 설교에서 감추어진 것을 차례로 살폈으며, 오늘은 하나님께서 감추어 놓으신 번째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번째는 해산과 고통의 문제를 살폈고, 번째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남편의 문제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바로 아담의 이야기입니다. 아담에 관한 번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 , 아담이 이브의 말을 듣고 아담이 실과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내용은 어찌 보면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이야기로 보이나, 우리로 하여금 굉장히 많을 것을 생각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오늘 구절은 아주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자세히 묵상해 보면 많은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음을 있습니다. 구절에는 아담이 아내인 이브의 말을 들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냥 단순히 아내가 주었고 아담은 받아서 먹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구절의 표현에 따르면, 아담은 아내가 실과를 그냥 받아서 먹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어떠한 대화를 했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먹었다는 것이죠. , 이미 그들 사이에서 어떠한 소통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소통의 핵심: 내용과

그러므로 대화 속에는 이브의 설득이 있었을 것이고, 그녀가 믿었던 신앙적 결단의 내용들이 들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들을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이야기가 앞에 있는 내용의 반복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화의 내용과 비슷한 이전 창세기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탄이라고도 있는 뱀과 여인인 이브가 했던 이야기 내용과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있습니다. 그리고 내용이 결국은 아담마저도 실과를 먹도록 설득하게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과 여인의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실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며, 지혜롭게 만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내용으로 아담과 하와가 서로 소통한 결과, 내용이 옳다는 결론이 도달하게 되었고, 마침내 실과를 먹기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소통을 결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것입니다. 아담이 생각하기에 하와가 실과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이것은 분명히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 것이며, 그래서 지식에 대한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킬 것으로 생각했고, 감정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만족스러운 즐거움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브와 함께 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통의 결정을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대화의 위험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소통 자체로는 우리가 당면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있습니다. 소통은 물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소통의 유무가 아니라, 소통의 내용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소통에는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소통 속에는 불행히도 하나님께서 없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대화에서 자신들은 분명히 지식적으로 서로 말이 통했습니다. 그래서 실과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맞으며, 분명히 실과는 먹을 만하며, 감정적으로도 아주 좋은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롭게 우리를 만들어 주어 결국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지혜를 갖게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과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소통에 하나님께서 없었다는 의미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의 말은 들었지만, 하나님의 말은 듣지 않았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사람의 대화에 하나님께서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사탄과 이브의 대화에서도 있듯이, 이들의 대화 속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바로하나님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끝에 나온 결과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성경 해석의 바른 자세: 하나님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분명히 수가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문제는 소통의 여부가 아니라, 무슨 내용을 소통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소통의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계셨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는 대화 속에서하나님을 거론했느냐혹은말씀을 인용했느냐 같은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거나 이웃과 소통할 ,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대화 속에 포함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까지 인용되지만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을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습니다. 그럴까요? 이유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우선적이었거나, 혹은 대화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을 가장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그들의 목적 자체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소통의 목적이 무엇 이었습니까?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높은 위치에 올라갈 있을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갈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많이 좋은 것들을 소유할 있을 , 자신의 욕망을 얼마나 충족시킬 있을 지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성경의 말씀으로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대로 해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대로 성경의 해석과 이해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들이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얼마나 아느냐가 아닙니다. 해박한 성경 지식의 유무도 아닙니다. 성경 내의 난해한 단어들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경 전체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을 수록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맞을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크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 만약 목적이 나를 증명하고 내가 옳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려 하거나, 혹은 나의 지적 만족감을 충족시키고자 한다면 결코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유명하고 특출 성경학자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존재할까요? 그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그러한 말들도 서슴치 않고 하게 될까요?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몰라서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은 자기의 지적인 만족을 위해서 성경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혹은 자신이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말씀조차 올바르게 해석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소통에서 있는 이러한 오류들을 신약 시대의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대화에서도 찾아볼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몰랐을까요? 아니지요. 그들을 성경을 줄줄 암송할 있었을 아니라, 언제 어디서 든지 필요한 내용을 인용할 있는 실력이 있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에게 말씀을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성경을 알지 못하는 라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을 대할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말씀을 읽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마음이 과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성경을 읽은 행위가 오직 나를 위해, 나를 증명하고 자신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인지에 따라서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의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기 때문입니다.

 

시골의 조그만 교회에 등록하여 성경을 읽기 위해 처음으로 한글을 배워서 한자 한자 말씀을 읽은 할머니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많은 책을 읽고 해박한 성경 지식을 가지고 오로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읽는 사람을 비교해 봅시다. 할머니는 어쩌면, 성경 문맥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히브리 단어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할 지라도, 성경학자보다도 훨씬 깊은 복음의 비밀을 성령 하나님 안에서 올바로 깨달을 있게 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깊은 성경 해석의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해석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열심을 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있지 않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쪽으로 향해 있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며, 모든 노력은 울리는 꽹과리일 뿐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경을 읽을 실수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지식이 부족하여 성경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이 성경을 읽을 , 해석에서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그들의 속에서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사랑하심이 드러나 보이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며,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다 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결핍된 말씀에 대한 이해는 자신을 찌를 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살피는 마음이 없이 성경을 읽을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이야기의 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통이라는 것은 우리가 서로 깊이 대화하고, 그래서 서로를 이해시키고, 결정을 내리며 그것을 따르려 하는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과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소통을 말할 , 서로 무엇인가를 놓고 이야기하고 그를 통해 결정을 이끌어 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통 속에서 함께 진리를 찾는 과정 까지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소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말씀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는 , 그리고 모든 진리를 함께 찾아가고 그것을 함께 알고 누리는 것이 바로 소통인 것입니다. 옳아 보이는 쪽의 의견을 따르는 만이 소통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기쁘신 안에서, 뜻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더욱 깎아내며, 상대방을 사랑하고, 함께 인내하며, 서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마음을 알아 가고,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뜻을 발견하고 따르려 하는 , 그것이 진정한 소통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여러분과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소통인 것입니다.

 

아담의 실패: 제사장과 언약의 머리로

그것이 되지 않을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똑바로 듣지 못할 것이고, 올바른 소통이 일어날 없습니다. 성경은 읽었지만 애석하게도 여러분의 삶은 말씀과는 관계가 없을 있습니다. 애석하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잘못이나 혹은 여러분의 주장이나, 혹은 여러분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우리는성경을 듣지 않는다’, 혹은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땅에 오셨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것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시는 장면에서 쉽게 우리가 발견할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오셨고, 당신께서 직접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손수 받으시는 일이며 하나님으로서는 도무지 하실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벌을 받아야 모든 인간이 지옥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올바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기뻐하시는 뜻에 당신 자신을 복종시키셨던 것입니다. 처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잔을 예수님에게서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생각 이었고 그것은 의로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로 하시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뜻은 버리시고 포기하셨으며, 대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소통 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좇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아담과 이브가 나누었던 대화, 소통의 결과를 아담은 수용했었고,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자신의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했었던 기본적인 사명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아담이 상황에서 마땅히 했어야 대처 방법은 무엇이었을 까요? 동산에 뱀이 들어온 것을 보았을 , 아담은 하나님께서 동산을 지키게 하신 명령을 우선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런 , 뱀과 싸워야 했습니다. 전쟁을 치러야 했었던 것이죠. 아담이 동산으로 들어오려는 뱀의 앞을 막아섰었어야 했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 자비와 긍휼을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언약의 머리 임에도 불구하고 동산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머리로서 제사장의 역할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사장으로서 역할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브가 뱀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 그리고 거짓에 속아 있을 , 아담은 이것을 올바르게 바로잡고, 이브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브가 먼저 꾀임을 받았고, 다음에 아담도 그렇게 했다 라고 우리가 이해하기 쉽고, 그래서 우리들은 쉽게 이브가 많은 잘못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내용을 살펴보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이해와는 정반대라는 것을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브가 꾀임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담은 가만히 있었으며, 심지어 일에 동참했고. 그러므로 언약의 머리인 아담이 모든 죄의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경에서는 아담의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대표 원리: 아담 안의 죄와 그리스도 안의

아담도 억울할 있습니다. 아내가 와서 먹으라 해서 먹었으므로, 우리들 이라면 정도의 변명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은 잘못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주어서 먹게 사람은 여자라는 사실은 틀린 말이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아담의 죄인 이유는 바로 자신의 당연한 사명을 모두 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조금 나아가자면 하나님께서 그와 여인을 찾았을 , 그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으로서 나아 갔었어야 했고, 그리고 자신과 이브의 죄를 회개하고, 수만 있다면 중의 살이요 중의 뼈인 아내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아야 했던 것이 마땅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창세기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을 알기 위해 신약으로 가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사실을 확실히 이해할 수가 있지요.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부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고 칭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비로서 사명을 이루신 것입니다. 첫째 아담이 언약의 머리로서 마땅히 해야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구원의 머리로서, 언약의 머리로서, 역할을 해야 했던 자였는데 그것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담은 언약의 머리로서 모든 자격을 잃게 되었으며 그도 역시 언약의 머리가 필요한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자녀들도 그로 인한 구원에 포함시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누려야 했던 영원한 영생 속에 그의 모든 후손들도 포함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아래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의 역할: 자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

여러분이 당신의 자녀들을 아무리 교육시키고, 힘을 다해서 사회에서 기여를 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지라도, 여러분은 자녀들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의지하여 당신의 자녀가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마지막 날에 여러분은 자녀를 구원하기 주님께 신원한다 하더라도 자녀는 여러분을 인해서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 우리의 자녀들은 모두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여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녀에게 알려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사실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교사들이 하여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책임이 교사로 임명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반드시 알려 주어야 것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구원을 책임질 수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적으로 때에도 우리들은 우리 자녀들의 인생을 책임질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은 그들의 영혼도 책임질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들이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없는 자라는 사실을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죄로 인하여 허위적거릴 있지만, 세상 속에서 주의 자녀로 모범을 보이며 살지 못하고 여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일 있지만, 그런 인생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찬송하며 감사하며 회개하며 있게 된다는 사실도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과 반드시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자녀뿐 아니라, 부부 간에도 사실을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사실을 서로 서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시며,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있으며 흔들리지 않을 있는 자라는 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알려 주고 이야기할 있어야 합니다. 부부간에는, 그리고 자녀와 부모 사이에서는 싸움이 있을 있고, 관계가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에서도 다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점은, 복음만이 상처를 치유할 있다는 것과, 우리가 복음을, 십자가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우리는 서로에게 이야기해주고 알게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인생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없으며, 아무리 인생을 준비하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들의 인생을 책임질 없으며, 자신들의 부모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완전하게 만들어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담(남자) 땅에 임한 저주: 수고와

사실은 우리 역시도 똑바로 알아야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홀로 없다는 ,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을 지라도 결코 우리는 홀로 없는 자라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아담도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남도 구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죽음의 선고와 아담의 생명

그래서 아담은 여인의 후손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런 아담은 이브를 하와, 자의 어머니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사실은 여인의 후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후손의 족보 안에는 교회도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인의 후손이 그리스도 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 이어야 할까요? 이유는 바로 교회 만으로는, 그리고 여인이라는 만으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와 만으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여인을 , 우리가 말하는 교회를 , 성도를 , 역시 곳에서도 구원이 일어날 없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 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거룩한 무리, 성도라고 부르고 있지만, ‘성도 만으로는 어떠한 새로운 생명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저주 속에 감추인 복음: 해산, 관계, 노동,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라디아서 4 27절과 28절입니다. “기록된 잉태하지 못하는 자여, 즐거워하라. 잉태하지 못하는 자요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우리에 대한 기록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말씀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여러분과 저가 약속의 자녀라는 말씀의 뜻은 결국 우리가 모든 것을 풍성하게 만들어 내는 자가 된다는 것을 약속하시는 의미 입니다. 우리는 잉태하지 못하는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메시아를 우리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잉태하지 못하는 라는 말씀은 우리가 아무것도 없는 자이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에는 부족한 자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우리들을 지키시고, 돌보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죄악 속에서 살고 있는, 닫는 대로 잘난 척하지만 가장 불쌍할 밖에 없는,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고 싶으나 약한 모습밖에는 보일 것이 없는, 그래서 오늘도 속에서 허위적거리며 어떻게 살아가야 몰라서 답답해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약 성경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떠한 나라였습니까? 하나님을 끊임없이 배반한 나라이며, 번도 스스로 돌이켜 정신을 차린 적이 없었던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조차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은 우리들 에게도 동일합니다. 예수를 믿으며 주님만을 따라간다고 다짐하면서도 수도 없이 죄를 짓고 방황하며 흔들리고 쓰러지는 우리들, 조금이라도 나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면 상대를 끝까지 잊지 않고 용서하지 않는 우리들, 세상이 나에게 상처들을 잊지 않고 세상을 향해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우리들, 답답한 현실 속에서 일해야 되고, 먹어야 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고 답답한, 그러한 현실 속에 사는 우리들, 소망조차 보이지 않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만들어 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교회를 우리들 마음속에 이루어 내실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저주를 담당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어 가고 계시며,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분인가를 정말 조금이라도 안다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 그리고 우리의 삶이 어떻게 지금과 같을 있겠습니까? 성경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 야곱과 요셉을 통해 그들의 인생에 메시아를 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자녀들의 수가 하늘의 별과 땅의 모래와 같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루어 내시는 놀라운 장면이 오늘 우리가 살피고 있는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통해서 바로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땅은 이상 복이 아니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 ‘너희가 수고를 하여야 먹는다속의수고라는 단어는 앞에서 나왔던 해산의 고통에서의고통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것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에게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피조 세계와 싸우게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자연은 이상 우리의 친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모든 들과 밭의 산물이 거저 생겨 났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경작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과정이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경작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수고가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루를 살기 위해서 월요일부터 매일 해야 하는 수고와 땀이 우리에게는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원래는 그것이 기쁨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사는 것이 기쁘십니까. 사는 자체가 고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사는 것이 너무 수고스럽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은 수고하지 않고 서는 먹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돈이 적거나 많은 것에 차이가 없이 누구나 고통과 수고를 짊어지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사는 자체에 고통과 수고가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세상도 이상 우리가 다스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피조물의 관계, 사람 간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피조물의 관계도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자연의 법칙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상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영화롭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인과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상 선한 것을 심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것을 거두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상 비와 바람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어느 곳은 비가 오지 않고 가물어서 고생을 하고 있는 반면 반대편의 주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물이 넘쳐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평화롭게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지구 반대편의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은 전쟁의 위험 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있기도 합니다. 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만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들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땅이 더럽게 되었다 라고 이야기 하고, 땅이 슬퍼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조차도 이것 때문에 근심하며 탄식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 세상에는 이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을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하나님의 지식은 온전히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고 분께 순종하며 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에서는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며 피가 피를 이음 이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더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껏 자연에서 멸종한 동물과 식물의 수가 어마 어마하게 많을 것이고, 앞으로도 많은 피조물들이 하루에 수십 수백 개씩 멸종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은 저주를 받아서 이상 생명을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생명이 나오지 않고 인간은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 은혜와 고난

참으로 현실적인 말이 아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수고와 고통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사실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를 갈구하며, 비록 그것이 우리의 죄로 기인한 것이라 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다 지라도, 속에서 행복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바꿀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바꿀 힘이 없습니다. 상황을 바꾸지 못합니다. 환경은 항상 그대로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꾸어 행복에 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 불교에서 사용하는일체 유심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시지요? 세상을 바꿀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만 돌이켜 바꾸게 되면 거기가 바로 피안의 세계가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이렇게만 우리가 있어도 어느 정도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문제는 환경에서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태어난 세상, 혹은 우리가 자란 환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었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세상은 우리 때문에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괴로워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담이 말하고 있습니다. ‘ 아내의 이름은 죽은 자의 어머니가 아니라 자의 어머니이다.’ 아담의 외침입니다. 그는 지금 흙으로 돌아갈 밖에 없는 죽음 속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말이 되지 않는 같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그와 그의 아내에게 무엇을 하시려고 하시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의 증명으로 하나님은 이들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죽 옷을 짓기 위해는 우선 무엇이 필요한가요? 죽은 짐승이 있어야 되겠지요? 성경에서 처음으로 짐승이 죽은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가죽 옷을 만들기 위해 짐승의 죽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죽을 죄를 지은 인간에게너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죽 옷을 지어서 입히셨습니다. 인간을 죽이실 계획이면 옷을 입히실 이유가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담이 이야기가 맞다고 확인시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렸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이후로 여인의 후손이 오게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후손은 죽음으로 끝날 후손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후손은 생명을 주실 후손 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저주를 담당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살리는 영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창세기 5장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모두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죽음이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을 이기는 후손이 온다고 성경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던 자리, 동산, 언덕 대신, 이번에는 골고다라고 하는 언덕에 죽음의 나무가 서게 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저주의 나무 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자리에 저주의 나무, 심판의 나무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위에 하나님의 아들, 여인의 후손이 달리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저주를 지고 죽게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반드시 받아야 했던 저주, 우리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일을 통하여 자신의 의를 증명하셨고, 결과로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우리도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떠한 것도 하나님 앞에서 검증받을 것이 없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가지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그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 그는 과연 무엇을 말할 있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로 끝이 납니다. 나의 아내는 죽은 자를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자를 잉태할 것이고, 자의 어머니가 것입니다.’

 

여러분, 여인의 후손들은 생명에 속한 자가 것이고, 아담은 구원자가 아니었지만, 피조물까지도 신음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고통과 수고 외에는 생산할 것이 없었던 곳에서, 모든 것을 삼키지 못하는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등장합니다. 물론 해산의 고통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해산을 통해서 분이 오실 것입니다. 관계의 고통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는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왔을 , 너와 나의 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왕이 되시고, 우리는 평화를 알게 것입니다. 우리의 소통도 고통이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야기하지만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아픔을 갖고, 서로 오해하며, 짜증을 내며, 상처를 주고받게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에야 주님의 진리를 향하게 것이고, 다툼과 오해가 아닌 이해를 있게 것입니다. 일의 모든 것들이 고통이 되며, 사는 자체가 수고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오실 것입니다. 그는 오셔서 수고하고 무거운 자들인 우리들에게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는 우리의 인생 전체를 어깨에 지실 것이며, 우리의 죄의 짐을 위해서 죽을 것이며, 우리의 기쁨을 위하여 부활하실 입니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분의 안식을 알게 것입니다. 물론 죽음이 우리를 덮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반드시 오실 입니다. 그는 죽음의 모든 사슬을 끊어 버릴 것이고, 죽어도 사는 영생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너희는 죽어도 것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그것이 창세기에서 아담이 그렇게 외칠 있었던 하나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참된 가치: 여인의 후손

그런데요, 그런데요, 그리스도가 결국 오셨습니다. 모든 것을 뚫고 오셨습니다. 율법도, 사탄도, 죽음도, 생명도, 성공도, 실패도, 우리의 짜증도, 우리의 상처도, 우리의 아픔도, 우리의 인생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막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인생을 뚫고서 그리스도를 땅에 오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자들의 인생을 뚫고, 모든 사탄의 유혹과 계략을 뚫고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생마저 뚫어 버리셨습니다. 멸시와 학대 속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위해 살아나셨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을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로소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게 되었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류의 역사보다 중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것이지요. 인류가 생성되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시간, 유산보다, 우리가 만들었고 깨닫게 모든 과학적 성취나 진리보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수십억 년의 세월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우주보다도 귀한 존재가 바로 여기에 예배의 처소에 앉아 계신 여러분이라는 것을 성경이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 것을 뚫고 예수가 여러분이 위해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향해서 살아야 되는 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무엇을 향해서 가고 있는 인생인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가 나이를 먹고 힘이 없어져서 결국은 모든 이들과 함께 죽어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루를 숨쉬는 것만큼 우주가 즐거워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자랑스러워하시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바로 그런 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가 되었으며, 길을 걸어가는 선택받은 자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비로소 깨닫게 것입니다. 인생의 가치를 우리가 알게 이상, 우리가 사는 것은 이상 수고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 기쁨이 되며, 내가 숨을 쉬는 순간, 나의 인생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없이는 우리는 누구도 죄와 싸우면서 땅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며 고통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시기에 누릴 있는 놀라운 안식을 여러분은 천국에서 조차도 절대 맛볼 없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조차도 맛볼 없는 기쁨을 땅에서 주님과 함께 누릴 있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위한 인생의 시간들을 그냥 무의미하게 흘려보낼 있겠습니까? 그럴 없습니다. 인생은 사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사는 것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것이요, 사는 것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는 것이고, 사는 것만큼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매일 매일 알아 가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경험하는

세상의 것들은 점차 우리의 손을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영원한 것이 더욱 뚜렷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어쩌면 세상 속에서 잊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손들 조차도 나중에는 우리의 이름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해 주겠습니까? 그러나 생명책에 있는 여러분의 이름은 더욱 뚜렷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잊지 않으실 것이며, 하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당신의 심장 속에 새기고 있을 것이며, 이름은 더욱 빛나게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영원한 것이 희미해 보일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주님은 결코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라면 여러분 속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며, 만약 일이 속에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내가 신자가 아닐 수도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진실로 믿고 있는 지를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생 속에 있는지, 아니면 나를 위한 인생, 행복을 위해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고, 그리스도의 손길이 마음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하십시오. ‘주님, 제가 잊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 지를 잊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 지를 잊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 지를 잊었습니다. 주님, 회개하고 돌아가겠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아니 당신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전에 했었던 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고백이 아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정말 안다면 하나님의 손길을 여러분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 오셨던 손길, 내가 쓰러졌을 나를 일으키셨던 손길, 나를 회개시키셨던 하나님의 손길,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 마음대로 살았을 , 나를 버려 두지 않으셨던 손길, 내가 교회에서 열심으로 교만했을 나를 다시 하나님 품으로 불러 주셨던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시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버려진 있습니다.

 

어둠 속의 : 절망 너머의 소망 (주기철 목사님 예화)

그렇다면 그것이 끝일까요? 결코 그럴 없습니다. 하나님은 버리운 자를 오늘 부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아오십시오. 주님의 위대하신 품으로 사랑의 품으로 다시 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를 살려주십시오, 예수께로 가겠습니다!’

 

건강이 사라지고, 재물이 사라지고, 여러분의 존재감이 사라진다고, 세상의 것들이 여러분의 손에서 빠져나간다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더욱 선명하게 부르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여러분의 힘든 수고 속에서 오늘도 지키실 것이고, 하늘의 놀라운 보화를 바라보게 하실 것이고, 예수로 걸어가는 인생이 참되다는 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쌓일 것이고, 영원한 생명이 여러분을 덮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 이여, 길을 함께 갑시다!

 

마무리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로 저희의 믿음의 놀라게 주십시오. 그리고 저희의 불신앙에 놀라게 주십시오. 저희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놀라게 주십시오. 저희로 저희의 불순종에 놀라게 주십시오. 저희로 연약한 우리의 삶에 놀라게 주시고, 그러나 우리를 대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손길에 놀라게 주십시오. 주님, 주님의 손길이 우리의 복임을 고백하 오니 내가 모든 것에 놀라 쓰러질 지라도,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나의 복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가오니, 우리와 함께 사는 인생 속에서 주의 이름이 빛나게 하시고 나의 이름은 사라지게 하여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