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 1절부터 7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아멘.

 

하와의 외침과 의미

저희가 지금까지 다루었던 창세기 3장까지 내용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한 사건이었으며, 그로 인해 우리가 심판을 받았고, 후에 우리에게 오게 죽음과 그로 인한 고통들을 당하게 됨을 알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이야기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인의 후손에 관한 약속과, 그리고 아담의 중요한 고백 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을 이브에게 지어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일에서 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하는 현장도 우리가 살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모든 일이복음의 시작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도 있을 같습니다. 아울러, 모든 일련의 일들을 통하여 우리들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또한 우리가 있습니다.

 

오늘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쫓겨나간 후에 일어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하와의 외침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4 1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번역된 간단해 보이는 문장이 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분들에게는 여전히 아주 난해한 구절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구절은 그냥 쉽게 아들을 낳았구나 라고 이해하면 합니다. 하지만득남에서의이라는 글자는 아들이 아닌 성인 남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와가 하는 이야기는 어린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 아니라 성인 남성을 낳았다 라고 의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를 낳았다는 안에는 창세기 3 장으로부터 흘러내려오고 있는, 하와가 굉장히 깊이 생각하고 있었던 중요한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여인의 후손이 나올 것이며, 자신이 하와, 자의 어머니다 라는 선언인 것입니다. 자신이 이제 아이를 가졌으며, 처음으로 남자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아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는 여인의 후손일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아이라는 표현 대신 남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장을 제가 조금 이해하기 쉽게 직역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문장이 얼마나 이해하기가 난해한 것인지를 쉽게 아실 있을 것입니다. 문장을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있습니다. ‘내가 남자, 여호와를 얻었다.’ 최대한 원문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한 문장입니다. 그러므로여호와로 말미암아 내가 득남하였다라고 번역한 것은 의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문장의 뜻은내가 남자, 여호와를 얻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에 가깝습니다. 루터는 이것을 그대로 번역해서 그의 들에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문장이 하와가 진짜 여호와를 낳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아는 사실입니다. 대신, 하와는 지금 우리를 구원할 여호와, 자신들의 구원자를 자신이 낳았다 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는 지금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드디어 여인의 후손을 낳은 자의 어머니로서 자신들을 모두 살리고 회복할 아들을 낳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와의 고백과 마리아의 고백

그래서 편으로는 표현이 굉장히 신앙 고백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굉장히 깊은 함정을 가지고 있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 성경학자들이 얘기하듯이 문장에서는 구원자이신 여인의 후손에 대한 인간의 소망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 동시에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와의 선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여인의 후손이 아니라 바로 구원자를 낳은 자신 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했다 라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 교수는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I have done this!” , 하와 자신이 일을 이루었다 라는 함의가 들어있는 구절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죄의 성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스토리가 하와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임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하와는 자신이 가인을 낳을 , 이제는 자신을 통해서 모든 것이 회복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구원자를 낳았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와의 이야기는 언제 비로소 완성이 되었습니까? 진짜 여인의 후손이 태어난 때는 언제 였나요? 바로 아기 예수가 태어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일이 일어난 시기는 보다 훨씬 전인 창세기 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성모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고백을 들으면, 우리는 하와가 얼마나 곁길로 있었는 지를 수가 있게 됩니다. 마리아가 천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태 고지를 들었을 , 마리아의 대답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주에 여종이 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 지이다.’ 이것이 마리아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유명한 마리아의 찬가를 부릅니다. “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마음이 하나님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 로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능하신 이가 일을 내게 행하셨 나니.”. 마리아는 일이 자신이 일이 아니라, 능하신 이가 일을 행하셨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마리아의 고백이었습니다. 하와와 비교하여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아벨의 이름과

그리고 후에 하와가 아들을 낳았으며, 아들의 이름은 아벨이며 가인의 동생이 됩니다. 그런데 아벨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이름을 지어준 것을 보면 하와가 이미 자기가 말한 내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것입니다. 아벨의 이름의 뜻은헛됨입니다. 가인을 낳고 기대했던 것들이 결국은 헛된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헛됨 이라는 단어는 여러분이 아시는 전도서의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헤벨 헤벨림 아말 코헬레트 하벨 하발림 하콜 하벨이라는 문장에서 6 반복해서 사용된헤벨이라는 히브리 말은아벨 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 전도서의 말씀은아벨이라는 단어를 6 반복해서 사용된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가인이 아니라 아벨 창세기에서는 나타난였다고 밝혀 줍니다. 하와가 것이라고 생각했던 가인이 아니라, 아벨 창세기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셋이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다른 주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셋을 다른 씨라고 말한다는 자체는 아벨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죠. , 성경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여인의 후손이 바로 아벨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죽음은 형의 시기로 인한 단순한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의 죽음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수밖에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배경과

가인과 아벨이 시간이 흘러 성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세월이 흐른 후에라고 얘기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말씀이 단순히 가인과 아벨이 태어 나고 자라서 어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상상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실은 그런 의미보다는 세월이 흐른 후에 라는 말은 어떠한 특별한 시간이 지난 후에 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뜻이죠, 때는 추수가 끝난 , 혹은 파종을 마친 , 혹은 어떤 특별한 시즌을 마친 후에 라는 의미를 지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당시 아담과 하와가 있던 시대에는 그러한 의미를 지닐 있는 시기는 하나 밖에 없었다 라고 주장합니다. , 7일째 되는 안식일이 끝난 직후였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알고 있던 안식일처럼 가인과 아벨도 같이 안식일에 제사를 드렸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일이 지난 시간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장 자체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 드디어 가인과 아벨이 성인이 되었고 이후에야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라는 뜻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가인과 아벨은 이미 제사를 경험했을 것이며 제사를 드리는 안식일이 지난 후를 나타내는 내용인 것입니다. 생전 처음 갑자기 가인이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함께 제사를 드렸고, 날은 추수를 끝낸 어떤 시기의 안식 이었고, 날에도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던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가서 제물로 드렸으니까요. 물론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명확하게 얘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질문할 밖에 없겠지요.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짓궂어 보이는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창세기 4장에서는 답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창세기 4장을 열심히 드려다 보아도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것만 받으셨는지에 대한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반응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제물 거부 이유 해석 1: 제물의 종류 ( 제사 vs. 곡물 제사)

우리는 우선 이들이 가지고 제물이 달랐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을 있을 것입니다. 가인은 곡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땅의 소산인 식물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치는 자였으므로 양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해석이 가능해졌습니다. 아마도 아벨은 죽여서 피를 내야 되는 동물을 가지고 것이고, 가인은 식물인 곡물만을 가져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 아벨이 피를 흘릴 메시아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고 해석할 있습니다. 아주 훌륭한 해석입니다. 해석이 가지고 있는 뜻과 의미는 제가 보기에는 전혀 틀리지 않는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에서 어떤 문제가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의 규례를 설명하실 , 피가 있는 동물의 제사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곡물을 이용한 피가 없는 제사도 똑같이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제사의 이름이 바로소제입니다. ‘소제라는 말은 바로 곡물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외에도 포도주를 붓는전제라는 제사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는 짐승만 제물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제는 히브리어로 ‘Minha’ (מִנְחָה , H4503) 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제사라는 단어가 바로 ‘Minha’’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것들을 살펴보았을 , 제물이 어떤 것인가로 인해 하나님께서 제물을 선택해서 받으셨다는 것은 조금은 억지스러운 해석이 수밖에 없습니다.

 

제물 거부 이유 해석 2: 제물의 질과 드리는

그렇지만 해석은 신학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의미 있는 해석임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이나 다른 유명한 신학자들도 그들의 설교에서 이러한 해석을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이 지금 부터 살펴볼 번째 해석을 따릅니다. 번째 해석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존재하므로 우리가 이러한 해석에서 주의해야 점은 어떤 종류의 제물이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부터 살펴볼 내용이지만, 이것은믿음이라는 단어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살펴볼 내용이지만, 우선 아벨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을 , 그는 양의 새끼와 기름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굉장히 중요한 개념 하나임이 틀림없습니다. 단순히 만을 끌고 것이 아니라 모세 율법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기록되어 있었던 새끼와 기름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저 땅의 소산 만을 가지고 왔으며, 이를 통하여 가인과 아벨 사람의 믿음에 대한 태도, 그리고 제사에 대한 정성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드러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벨은 선하다고 받아 주셨고, 가인은 받지 않으셨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굉장히 좋은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서 부딪히는 문제는 본문 자체가,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사건을 두고서, 제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을 받았다는 설명이나 암시를 주는 구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는 양의 새끼를 드린 제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말이 기록되어져 있지 않습니다. 단지 율법의 조문에 새끼와 기름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짐승과 곡물의 제물을 대조하는 구절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가인은 아들이지만 것을 드리지 않았던 반면, 둘째인 아벨은 번째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이 성경이 보여 주는 대조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할 말씀들을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가인이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렸을 , 그것이 열매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 열매를 드렸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실만 가지고 가인의 제사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은 개혁주의나 복음주의 목사님들을 포함하는 많은 유명한 성경학자들이 선택하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앞부분에서 언급해 드린 것처럼 성경에 있지 않는 것을 추측하여 이해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없는 사실을 일부러 사건에 대입하여 의미를 이해하려 , 우리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을 기울여야 하며, 오히려 그것보다는 성경이 말하는 까지만 이해하는 것이 나을 때가 많습니다.

 

제물 거부 이유 해석 3: 성경적 근거 - 믿음의 유무 (히브리서 11)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이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바를 한번 자세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4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께서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주 분명하게 밝혀 주시고 계시지요?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의 다른 점이 무엇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십니까?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고,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는 제사는 어떤 제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지도 못하였고,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6 내용도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는 제사의 의미에 대해 이제 명확해지셨습니까? 가인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가인이 제사를 드리러 하나님께로 나아갔고, 그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도 물론 믿었습니다. 때는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사람들을 만나 주셨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는 가인처럼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 계십니까? 어떤 분들은 성경책을 읽으면서 들었을 수도 있고, 어떤 분들은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꿈이나 어떠한 특별한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음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직접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든지 틀릴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흔들릴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가인은 확실하게 우리보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6절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는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보다는 가인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초점을 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계시는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되는 지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다스리고, 가인의 주님이셔야 했지만, 가인에게 자신의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주님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자기의 상급이라고 여기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없었던 것이었지요. 그것을 믿음이 없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인의 제사에서는 충분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는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은 단지 종교적인 행위가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사는 자신의 의를 위한 자신을 위한 행위일 뿐인 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는 있지만, 결국은 자신만을 위한 제사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성을 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선이 아닌, 자신이 하나님 자리에 있는 종교 행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가인에게서 하나님은 자신을 인정해 주고 자신의 자리들을 채워 주어야 하는 여호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워 주는 여호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인에게 서는 하나님의 생각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받았는 지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신학의 실패와 삶의 실패: 올바른 신앙의 중요

그래서 가인에게 있어서 제사의 실패는 결국은 들판에서의 실패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들판은 바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Walter K 목사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제사의 실패는 들판의 실패로 이어진다. 이는 신학의 실패는 도덕과 삶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학은 단순한 이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 나무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인 게할더스 보스 (Geerhardus Vos)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 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Theological Tree of life’, 신학적 생명나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하였으며, 이는 이러한 성경 해석을 마치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만들어 주어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우리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올바로 보는가, 그리고 성경의 내용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들이 여러분이 제대로 신앙적인 삶을 살며, 하나님은 올바르게 믿는다는 것에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올바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가 잘못되었다는 말은 예배 신학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원리를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단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열심으로 우리는 예배를 드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신앙을 생각할 때도 좋은 신앙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도 잘하고, 성경 말씀 많이 알고, 성경 말씀에 따라서 많은 교회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좋은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적으로 굉장히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사실은 신앙이 약한 사람일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대해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도 우리의 삶이 신앙적이지 않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이 약한 것입니다. 성경을 줄줄 외우고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도 그의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인 되심과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며 겸손한 삶이 나오지 않을 있습니다. 신앙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비록 사람이 성경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부족하고 약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겸손하게 주님 앞에서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의 신앙은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면 그가 아무리 많은 성경 지식을 이야기하고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지라도 신앙이 약하고 어린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도와주어야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서 신학 혹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분은 성경을 배워야 하고 바르게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덕과 삶은 결국은 실패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반응: 분노와 죄의

결국 이러한 믿음 없음은, 가인의 제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국은 당연한 결과를 내어놓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무서움 입니다. 죄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결국 그렇게 가인이 올바른 믿음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서 아니라 자신을 주인으로 만드는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는 반드시 죄의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가인의 반응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아니 하신 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은 이로 인해 안색이 변하고 분노가 생겼습니다. 안색이 변했다는 히브리 성경의 뜻은 자기의 얼굴을 땅에 떨어뜨렸다 입니다. 그것은 물론 죄책감 때문에 그런 같아 보이지만 보다는 하나님을 내가 보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대한 분노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 믿음이 없다는 말은 그가 죄인이라는 뜻이고, 죄인이라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없기 때문에 수반되는 당연한 결과이며, 그로 인해 분노와 하나님의 대한 실망이 반드시 동반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있습니다. 열심히 예배할 있고, 교회 생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분노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분노가 해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아벨과 자신을 비교하는 가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남보다 나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는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자신이 남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낫다 라고 생각하기 들기 시작하면 그에 대해 크고 작은 분노가 생기기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과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이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자신의 성취가 사람에 비교하여 낫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마음속에 분노심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노가 생기는 것보다, 생긴 분노를 해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분노를 우리는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경쟁하고 비교하느라, 자신이 선을 행하며 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 믿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른 악순환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만큼 세상에서 하나님과 떨어져서 마음대로 살고 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내가 어떤 손해를 입고 살며,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번번히 실패의 연속인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자책과 자괴감 속에 갇혀서 곳에서 빠져 나올 없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어떤 때는 자기 최면을 통해 잠시나마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안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을 느낄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분노가 옳지 못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정당한 분노가 있을 있습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는 항상 압제 당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압제하는 세력에 우리는 분노합니다. 가난하고 착취 당하는 이들의 아픔과 동정심 조차도 가지지 않는, 그들이 가진 마저도 빼앗아 가는 그러한 사회 구조와 체제에는 우리는 당연히 분노할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 속에는 하나님의 분노 와도 일치하는 거룩한 분노도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이는 가인의 분노는 이런 분노와는 다른 자신의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분노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반복해서 보는 것이 바로, 인간들이 어떠한 대의 명분을 세워 놓은 다음에 그것을 이용하여 결국은 자기 배를 채웠던 이야기들 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대동법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세금을 백성들에게 걷어들일 때의 많은 폐단을 바로 잡고자 실시한 법령이었지만, 실제로는 사대부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땅과 재산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고자 실시한 법령이었습니다. 자기 것은 손해를 보기가 싫었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죄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자기의 것을 빼앗기게 되면 분노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정당한 분노처럼 보이는 것들도 결국에는 깊은 속마음에는 자기의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가 항상 내재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지금 가지고 있는 분노도 바로 그러한 분노입니다. 가인은 죄책감으로 고개를 숙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분노였고, 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마음에서 야기된 분노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소유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학창 시절에 시험을 쳤던 기억을 한번 떠올려 보기로 하지요. 만약 선생님께서 어떤 시험 범위를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문제는 범위에 걸쳐서 골고루 출제하겠다고 말씀하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진짜로 시험 문제는 범위에 걸쳐서 출제되었습니다. 이때 범위를 공부하지 못한 학생들이 시험을 망쳤을 , 학생들은 절대 자신이 공부를 100% 끝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오직 시험 문제를 그렇게 출제한 선생님을 비난합니다. 자신의 어떻게 했는 지는 중요하지 않고, 단지 자기의 이익과 반하는 만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면과 죄의

하나님께서 바로 가인에게 다가 가셔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6절에서 7 까지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았을 , 가인이 마땅히 해야 것은 내가 시험 문제를 잘못 풀었구나 라며 자신에게서 원인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내어 드린 것이 아니라 욕심대로 행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돌이켜서 회개해야 했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분노하고, 세상에 분노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놓치고 있다고 오해하여 자신과 하나님을 부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노하는 가인을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를 향해서 손을 뻗고 계십니다. ‘너의 분함이 어찌된 일이냐, 안색이 변하였느냐, 너의 분냄은 지금 네가 선을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일러주고 계십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들이 살펴본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한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제 이해되시지요? 선이라는 것은 세상적으로 가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착하게 대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그런 선행을 했다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이제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믿음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사는 모든 그의 생이 선을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지만, 그가 일은 엄청 많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인의 보여지는 모습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가요?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은 가인보다 나은가요? 어쩌면 오늘 본문의 가인은 저희들의 모습일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온전한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여전히 중심으로 살면서, 나의 이익과 생각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가인의 죄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죄와 싸워야 되고 이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권면하십니다. ‘죄가 앞에 엎드려 있고, 너를 원할 것이다.’ 이는 이런 뜻입니다. 죄가 맹수가 먹이를 먹기 위해서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처럼 우리를 기다리다가, 우리가 문만 열면 즉시 잡아먹으려고 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렇게 엎드려 있으면서 우리를 먹으려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죄가 우리들을 다스리려고 것이고, 우리를 먹으려고, 우리를 완전히 죄의 것을 만들려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보다는 자신을 옳게 생각하며,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죄라는 사실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조차도 나를 찬양하고 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삶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이루어 지지 않을 우리는 분노합니다.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해결

그리고 그러한 삶의 결국은 어떠할까요? 우리가 다음 주에 살펴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다루겠지만, 결국은 끝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돌이키라!’ 돌이켜서 하나님을 다시 바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보라라는 말처럼 애매한 말은 없을 듯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해서 당장에 먹을 떡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생기지도 않고, 뜻이 이루어 지지도 않습니다. 그럴 때가 대부분이지요. 여러분이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에는, 잠시 동안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대로 많은 것들을 척척 들어 주실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여러분이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병도 고쳐 주시기도 하고, 사업도 열어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누구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가끔 그런 일들을 행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께서 누구인지를 알기 시작하면 여러분의 기도가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럴 우리는 신앙이 잠시 떨어졌다고 엉뚱한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기도하면 들어주셨는데 이제는 들어주시지 않으시니까 내가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엉뚱한 곳에서 돌파구를 찾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내가 3 금식을 했지만 지금은 10일을 금식해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려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아 고민이시라면 바로 때가 여러분의 신앙이 그럴듯해 지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언뜻보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마치 밀고 당기는 관계를 함께 하시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실 까요? 왜냐하면 우리들의 기도의 응답이 믿음에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그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하루 빨리 기도 응답이 왔으면 좋겠지요? 그렇지만 하나님에게는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십니다. 우리 인생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과는 방향과 다르게 흘러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우리의 바닥까지 모두 아시지만, 우리를 우리보다 아시지만,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도, 버리시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를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을 드디어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가장 선한 길을 함께 가시고,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마음껏 주시는 분을 드디어 알게 되고 만나게 됩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 같습니다. 세상은 그리고 주위의 모든 문제들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녀의 문제, 가정의 문제, 안의 많은 속상한 일들이 계속해서 주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쳐다보면 모든 것이 변하게 됩니다. 문제들은 항상 그대로 있는 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괴롭히던 세상도 우리들 두렵게 하던 죽음도 이상 우리의 원수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우리들을 어떻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픈 것도, 꿈을 잃어버리는 것도 이상은 나에게 죽음이나 고통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자신조차도 어떻게 없었던 못난 나의 모습이 이제 이상 나의 적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상 분노와 미움에 휘둘리는 죄의 노리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죄는 웅크리고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며 나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넣으려고 합니다. 죄는 우리를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드디어 말이 생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죄가 우리의 다스릴 것처럼 우리를 삼길 것처럼 다가올 , 우리는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나의 주인, 나를 다스리는 이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비록 내가 지금은 죄와 싸우고 있으며, 죄가 나를 삼길 처럼 나를 휘두르며 나를 부수고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나의 상황과 환경이 나를 무너뜨릴 처럼 덮쳐 오지만 오직 나를 다스리실 분은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며 나의 예수 그리스도시다 라고 외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외침입니다.

 

아벨의 피와 그리스도의 : 헛됨 속의

가인의 이름을 지으면서 하와는 메시아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와의 구원자는 헛됨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헛되다 라고 여겼던 아벨의 피는 오히려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자리에 새로운 씨가 들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씨를 통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 여인의 후손이 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해서하나님만을 바라라라는 말은 어쩌면 가장 연약한 말처럼 들릴 있습니다. 모든 힘듦을 바꿔 주고, 해결해 주고, 모든 것이 맘대로 되며,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던 모습을 가지게 되는 , 병도 낫고, 주변의 모든 문제도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아벨, 헛됨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강한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며, 높은 것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내산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며, 모든 이들이 두려워 때에 거기에 하나님께서 계신 알았지만, 하나님은 모세가 두려워 떨던 시내산에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가장 헛되어 보이고, 가장 약해 보이며, 가장 낮아 보였던 자리, 말구유, 십자가 곳에서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두려운 시내산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산으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지금 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 개정 성경이 아니라 명확하게 이해할 있는 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히브리서 12 22절에서 24 까지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시온산에 이르렀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곳은 수많은 천사들이 기뻐하며 함께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시내산에 대조되는 문장임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시내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는 시온산에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문장의 시제는 현재형 입니다. , 여러분이 예배하는 순간, 우리는 땅에 있는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모든 존재의 진정한 근거는 바로 하늘의 예루살렘에 속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읽겠습니다. “ 하늘의 이름이 기록된 맏아들의 모임이 열리는 것이며 모든 사람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의인들의 영원히 거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가져다주시려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왔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있는 곳에 왔습니다. 여러분은 아벨의 피보다 나은 소식을 전해준 그리스도의 피에 가까이 나온 것입니다.”. 아벨의 피보다 나은 , 예수 그리스도의 앞에 여러분이 왔다고 말합니다.

 

가인의 길을 피하고 그리스도를 따르

여러분, 가인의 죄의 무서움에 대해 다음 시간에 걸쳐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그는 믿음이 없었기에 그의 제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없었고,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기가 자신의 인생의 핸들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결국 분노와 저주와 실망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죄가 가인을 삼키려고 때에, 죄에 다스림을 받지 말고 가인 자신이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의 무서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고, 그와 그의 모든 인생을 파멸시키는 살인과 죽음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믿음의 인생을 살려고 하지 않을 ,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 속에 시달릴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하게 것이며, 우리는 다른 이들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죽이게 것입니다. 자신도 죽이게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다스릴 있는 것은 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승리하십시오!

 

마무리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가인의 이야기는 저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저희를 소름 끼치게 만드는 죄의 무서움을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하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있는 무서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주여, 저희로 하여금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죄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다스린다는 놀라운 은혜를 저희가 잊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 더욱 다가서며 십자가를 의지하는 귀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저희로 배우게 하여 하소서. 알게 하여 하소서. 저희가 믿음의 삶을 살게 하여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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