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3 14절부터 19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울여 함께 듣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며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며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머리를 상하게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이니라하시고,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이니라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이니라하시니라.” 아멘.

 

언약 파기와

저희가 계속해서 창세기의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11 까지는 아브라함의 족장 시대가 있기 전인 선사 시대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2 부터는 본격적으로 아브라함과 족장들의 이야기가 50 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사 시대의 이야기 중에서 1 장부터 3장까지는 창조가 어떻게 진행되었고, 과정 속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으며,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타락했으며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분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있겠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은 언약이 깨진 결과 뱀과 여자와 남자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저주: 정당한 원인과 하나님의

우선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굉장히 싫어하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을 있습니다. ‘뱀은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 다니며 살아있는 동안 흙을 먹을 것이다 문장인데 여기서저주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저주라는 단어는 어떻게 해석을 하든지 관계없이 기분이 좋은 단어는 아닙니다. 성경에서 저주라는 단어는 반드시 정당한 원인이 있을 나타나고 결과로 시행되는 일로 기록됩니다. 잠언서의 말씀입니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처럼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렇지요? 아무런 이유가 없는 저주는 마치 참새와 제비가 앉지 않고 계속해서 떠돌며 날아다니는 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저주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목사에게 잘못을 저질렀기에 목사가 기도 중에 사람에 대해 저주를 하게 되면 가정이 대에 걸쳐서 하는 일이 풀리지 않게 된다고 믿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건 마치 목사를 무당 수준으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떠한 저주가 혹시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약 정당한 원인이 없었다면 성경이 보증하듯이, 일은 절대 일어날 없습니다. 그러한 저주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일에 이런 저주를 들었거나 행해졌다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 것은 저주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혹은 나빠졌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정당한 이유가 있었느냐 라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저주의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정당하다는 있습니다. 그래서 드러나 보이는 사실에는 저주를 받는 같지만, 사실은 속에서 공의가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입은 닫히고 아무런 말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의 내용: 죽음의 다각적

오늘 본문에서 저희가 알아야 것은 내용들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조를 끝내신 아담과 맺은 언약을 통해, 언약이 깨어졌을 우리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다시 아담과 이브에게 죄로 인해 치러야 징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것일까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다시 죽음의 이외에 인간이 치러야 다른 죄의 대가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창세기에서 말하고 있는 죽음을 생각할 때는 흔히 사람의 호흡이 끊어지고 이제 세상을 떠나 주님의 품에 안기는 죽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그렇게 좁은 뜻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죽음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숨이 멈추어 서고 뇌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죄로 인한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상관없이, 우리 인생의 부분에서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삶의 부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육적인 죽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바로 죽음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에서는 죽음의 내용들이 아주 심각하게 그려집니다. 여인들에게는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주어졌고,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가 무너졌으며, 그리고 남성들에게는 노동이 고통이 되는 저주를 받았고, 땅도 저주를 받아 고통스럽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인간이 흙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대로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허무한 인생?: "사의 찬미" 흙으로 돌아

참으로 허무한 결과입니다. 만약에 모든 인간의 마지막이 흙으로 끝나 버린다면, 이처럼 허망한 일이 있을까요? 1926,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초기 대중가요 중에는 윤심덕 씨가 불렀던사의 찬미라는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허무한 감정이 밀려옵니다. 노래는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들이여라고 하면서 시작합니다. 노래의 가사도 분이 직접 썼습니다. 이분이 크리스천이었는지 모르지만 가사에 광야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노래 가사 중간에 가련한 인생 위에 서서 춤을 추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노래의 후렴 가사는 이렇습니다. ‘눈물로 세상이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찾는 , 허무.’ 분은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일본에 유학을 해서 성악을 전공했으며 소프라노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금의환향해서 가수와 배우로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사의 찬미라는 노래가 수록된 음반을 내어서 아주 인기인이 되었지요. 당시로는 한국 여성들 중에 제일 가는 엘리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이 깨달은 인생의 결론은 바로 후렴구의 가사였습니다. 누구나 행복을 갈망하지만 끝은 언제나 허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래의 가사와 비슷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흙에서 나온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생각한다면 정말로 인생이 허무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결박된 존재: 저주의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저주인 것입니다. 처럼 오늘 말씀의 저주라는 단어는 참으로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느낌을 안겨 줍니다. 단어의 히브리어로아라르’(אָרַר, H779)입니다. 단어가 사용된 원래 뜻은 무엇인가를 결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관계가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에는 남녀 관계를 포함한 모든 인간 사이의 관계가 결박된다는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성한 노동, 우리가 쌓아 올린 힘과 , 그리고 죽음까지도 모두 결박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노예가 되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돈을 소유한다면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고, 우리가 만약에 시간을 가지게 되면 시간이 우리를 노예처럼 결박한다는 뜻이며, 우리의 힘은 우리를 힘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우리는 죽음의 노예가 되어, 결국은 죽음에 굴복할 밖에 없는 신세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저주는 정말 어둡기 그지없으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주가 정당하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기가 막히게 만듭니다. 이런 저주를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드는 것이죠. 만약 이것이 부당하고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저항할 수도 있을 것이며 우리 스스로를 변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너무나 아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되었고 성경은 그런 상황에 빠지게 우리의 잘못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하기 때문에 더욱 기가 막힐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끝날 같고, 저주로 끝날 같은 오늘 본문이 어두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절망 반전: 아담의 고백 "하와"(생명)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19 까지 입니다. 그런데 3 20절에 가면 어떠한 내용이 나오는지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20 말씀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자의 어머니가 되었더라.”. 어떠십니까? 너무 당황스럽고 놀라운 말씀이 갑자기 나오므로, 살갗에 닭살이 돋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0장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같아서는 자포자기한 아담이 자기의 잘못을 하나님께 시인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벌을 달게 받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올 같습니다. 아니면, 하나님 밑에 꿇어 엎드려 용서를 간청하는 그런 장면을 기대하기 쉽습니다. 그게 아니면 너무 놀라 자리에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몸이 굳어 버리든지 곳으로 도망을 가서 숨는 장면도 예상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에 나온 반응은 우리에게는 실로 너무나 놀라운 일이 아닐 없습니다. 계속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들은 아담이 뜬금없이 이브에게 다른 이름,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하와는 히브리어로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마치 집에서 어머니께 떨어진 성적 때문에 호되게 야단을 맞고 있는 아이가, 어머니의 질책이 끝나자 마자, ‘엄마, 밥은 언제 먹어요라고 말하는 것에 버금가는 상황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아담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과 심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의 이름을 생명이라고 바꾸어 주었습니다.

 

감추인 생명: 저주 속에 숨겨진

그랬을까요? 아담은 지금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과 저주가 환히 드러난 상황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 아담은 지금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생명이라는 단어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고, 심판하시고, 형벌을 이야기했으나, 곳에서 아담은 생명을 것입니다. 감추어진 생명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탄) 대한 저주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 지에 대해 지금부터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4 말씀에뱀이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며, 살아있는 동안에 흙을 먹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미 뱀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앞에서 상세히 살펴보았습니다. , 창세기의 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기어 다니는 뱀과는 다른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뱀들은 흙을 먹고 살지는 않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설치류나 작은 생물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뱀은 계속해서 흙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존재가 되었으므로, 뱀과 우리가 아는 짐승과는 다르다는 것을 수가 있지요. 우리가 살펴본 대로 뱀은 사탄의 이름들 하나입니다. 계시록의 표현인이는 , 사탄이라고도 마귀라고도 한다라는 말씀에서도 우리는 뱀이 사탄과 마귀를 뜻하고 있다는 것을 있습니다. 이렇게 뱀의 이름이 나왔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로 오늘 사건에서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오늘 구절을 근거로 때는 다리가 있었던 뱀이 저주를 받은 , 다리가 없어진 것으로 이해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물론 이렇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틀렸다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면, 흙을 먹고 살지도 않은 뱀이 저주를 받아 다리 없어졌다 라고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보다는 속에 숨겨진 다른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같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뱀이 일을 인하여 뱀을 저주를 하셨으며, 저주로 인해 우리 인류 전체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벌이 고작 다리가 없어지고 기어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세요? 여기에 무엇인가 다른 의미가 있을 있다는 것이 이해되시죠? 오늘 본문의 말씀은 뱀이 다리가 없어지고 기어 다닐 밖에 없었던 기원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의 본문은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쓰여 졌을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에서 이와 비슷한 표현들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 혹은 티끌을 먹는 다는 , 그리고 땅을 기어 다닌 다는 것은 가장 비참하고 낮아진 상태를 설명하기 위하여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표현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들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미가서 7 17 내용입니다.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 이다.”. 본문의 그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괴롭혔던 열방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읽으신 대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땅을 기는 벌레처럼 되고, 뱀처럼 티끌을 핥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단어들을 사용하는 방식이며 이런 표현은 다른 부분에서도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서 있는 것은 분명히 뱀이 가축이나 들짐승보다 낮은 자가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짐승들보다도 낮은 자리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의 자리에 있었던 사탄인 뱀이 어디까지 떨어지나요? 계시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무저갱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여기서 무저갱은 밑의 끝이 없는 깊은 터널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뱀이 받은 흙을 먹고 배로 기는 저주는 사탄이 무저갱까지 떨어지는 심각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표현을 통해서 사탄이 지은 죄가 얼마나 무거웠던 것인지도 같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와의 원수됨: 씨의 전쟁 (원시복음)

그리고 다른 저주는 바로 뱀이 여인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과도 원수가 되지요. 그래서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을 직역하면 뱀과 여자 사이에 하나님께서 적대감을 두시겠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흔히 하게 되는 생각은 이제 드디어 뱀과 인간은 적이 되고,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겠구나 라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누구인가?

그리고 여인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후손이라는 단어를 단수로 받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여러 명을 의미하는 복수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이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구절의 여인은 이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따진다면 여인의 후손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인류, 사람이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대비하여 사탄의 후손은 무엇이 되는 것일까요? 마귀와 사탄이 혹시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나요? 그게 아니면 그들의 후손은 과연 무엇일까요? 귀신이나 그와 비슷한 유령 같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속에서 여인의 후손과 대비되어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뱀의 후손도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유추할 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생각할 있었다면 오늘 내용은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에서 아주 커다란 반전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뱀의 원수가 생긴다는 말은, 뱀과는 전혀 다른 어떤 존재를 하나님께서 땅에 두셔서 뱀에 대적할 존재로 삼으시겠다는 뜻입니다. 땅에는 이제 종류의 후손이 생긴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 여자의

여자의 후손은 사람입니다. 더욱이 여자가 이름이 조금 후에생명이라는 이름이 되게 됩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지닌 사람이 바로 여자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러면 뱀의 후손은 무엇일까요? 후손이 뱀의 새끼가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사탄에게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 사탄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겠지요. 그러면 모든 인간은 육체적으로만 본다면 사실상 누구의 후손이어야 하나요? 이브의 후손일 것입니다. 사람이 이브 외에 다른 존재로부터 태어나지는 못할 테니까요. 모두 이브의 후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성경에서는 이브의 후손, 여자의 후손을 말하며 동시에 여자의 후손이 아닌 사탄의 후손이 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많은 분들이 이번엔 조금 생각 깊이 나머지, 사탄의 후손을 가인의 후손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탄의 후손은 바로 조금 후에 나오게 가인의 후손이며 이와 대비하여 여인의 후손은 가인의 동생인 셋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 진리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으로 설명할 없는 사실은 가인의 후손은 노아의 홍수 없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아무도 남지 않고 홍수 죽었습니다. 오직 셋의 후손인 노아의 자손만 살아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사탄의 후손이 가인의 후손도 아님을 결론 내릴 있습니다.

 

그러면 사탄의 후손은 누구 일까요? 이를 살펴보기 전에 일단 여인의 후손이 말하고 있는 바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인의 후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인류를 지칭하지 않는 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의 후손일까요? 여인의 후손은 우선 사탄을 비롯한 그의 후손들과 대적할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있는 세상과 지금 대적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모든 죄악, 속에 있는 것들과 지금 세상에서 싸우고 있고 계속해서 전쟁을 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일까요? , 존재는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있겠지요.

 

사실은 성경 마지막의 요한 계시록에서 다시 증명되고 있습니다. 계시록 12장을 보시면, 여인이 아들을 낳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들이 나중에 누가 됩니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여인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 이었나요? 아니죠. 여기서 여인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신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 오시기 까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후손들을 여인의 후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말하게 되면, 구약의 이스라엘이며 신약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 말하자면 누가 될까요? 바로 여러분, 우리들을 가리키는 말씀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이 바로 여러분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구절에서 예수님을 찾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입니다. 그리고 맞는 것이고요. 구절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은 단수로 해석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만약 후손을 복수로 보았을 때는 바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어가 경우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체성: 사탄의 후손에서 여자의 후손으

이에 대한 설명이 로마서 16 20절에 나와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말씀을 유대인이나 구약 성경을 아는 사람이 일었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떠올리겠습니까? 바로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창세기 3 내용일 것입니다.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너희 누구일까요? 예수님을 가리킬까요? 아닙니다. 바로 로마에 있는 성도들, 교회가 되겠지요. 성도들도 이렇게 사탄을 아래 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가능해졌을까요? 자기들의 힘이나 능력으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발아래에서 밟으셨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제는 사탄을 아래 밟는 자로, 그것들을 상하게 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가 어떠한 사람인지 너무나 분명하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성도는 사탄의 머리를 밟는 자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후손은 사탄에게 미혹되어서 세상에 끌려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탄을 좇아가는 사람들의 무리인 것입니다.

 

, 그럼 이러한 결론까지 도달하였다면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은 우리를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저의 설명을 따라오셨다면, 많은 분들이 이제 교회가 창세기 3장의 여자의 후손을 가리킨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당연히 우리가 여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여자의 후손으로 생각하셨다면 죄송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브의 자손은 누구였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래서 구절에서는 계속해서 이브의 후손이라는 말만 등장하고 아담의 후손이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사탄의 후손에 가까운 아담의 자손인 것입니다.

 

아담의 믿음과 구원의

속상하신 가요? 그런데, 아까는 제가 우리를 교회라고 했는데 지금은 사탄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왜냐하면 지금 본문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의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 쪽이 아니라 사탄이 쪽에 가깝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당연히 나타날 없는 자손, 종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성경에서 나올 없는 종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떠나서, 사탄의 말을 듣고 그의 편을 들고,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되어 보겠다고 나온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성경이 지금 말하고 있는 여인의 후손에 포함될 수가 없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인 것인데, 지금 하나님께서 직접 여인의 후손을 만들어 내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을 들은 아담이 비로소 여인의 후손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여인이 살아있는 자요,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이며, 지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이 바로 당신이다 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아담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여인의 후손이 수가 있게 것입니다. 자의 후손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우리가 바로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둠에 있던 우리를 빛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장 은혜: 구원 계획 우리의

어떤 방식으로 하셨나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사탄의 머리를 밟음으로써 우리를 여인의 후손으로 삼아 주신 방법으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러한 일을 통하여 여인의 후손이 되고, 교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기쁨들이 많습니다. 감동받을 일도 아주 많이 일어나지요. 지난 일주일 짧은 시간 동안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일어날 없는 이라고 느껴졌던 일들을 여러분의 생활 속에서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몸속에서 뭉쳐 있는 조그만 것이 종양이 아니라 수술로 제거만 하면 되는 작은 혹이라는 것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나님께 감사하신 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썽을 피우던 자식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있었는데, 자녀가 마음을 돌이켜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깊은 감사를 드리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처음 여러분이 미국으로 이민 오셨을 때가 떠오르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빈손으로 은행 잔고 하나 없이 힘든 가운데서 가족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적적으로 힘든 이민 생활을 버텨내고 지금까지 지내오신 기억이 있으시지요. 또한 더할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무한한 감사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이러한 기억들을 지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은혜 받은 많은 증거를 간증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합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은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닌 은혜의 간증과는 비교도 없는 큰일이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깨달어 지시나요?

 

우주 삼라만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피조물 보잘 없는 하나인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 마음대로 살고자 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독생자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시간 속에서 역사를 살게 하셔서 역사를 시작하시고 완성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 인해 불가능했던 우리들이 하나님 앞으로 있게 하시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있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습니다. 너무나 거대하고 엄청난 이야기이지만 내용이 여러분에게 크게 감동스럽게 다가오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위하여 우주의 역사가 동원된 기적보다는 우리의 건강이 조금 나아지거나, 좋은 직장이 생긴 일에 감사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작은 것에 기뻐하는 어리석

그러나 이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창세기의 여인의 후손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내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 모든 일을 계획하셨고 계획 속에 여러분의 이름을 두셨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의 여인의 후손의 명단에 여러분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래도 아직 감동이 여러분께 전해지지가 않으신 가요?

 

만약 어떤 사람이 아주 높고 난간을 오르다 발을 잘못 딛어서 아래로 한참을 굴러 떨어져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께로 달려가서 어떻게 되었는 살펴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굴러 떨어진 사람이 한참을 바닥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아무 곳도 다치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자기가 떨어진 장소에서 25센트짜리 동전 2개를 주었다고 기뻐하며 작은 소득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장면을 사람들은 살아난 사람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요? 만약 여러분이 광경을 목격하였다면 어떤 이야기를 사람에게 해주고 싶겠습니까? 우리가 살아난 사람과 똑같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 정신없이 자신이 죽었다가 겨우 다시 살아났나는 사실도 모른 눈앞의 작은 것으로만 기뻐하는 인생 말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근거: 하나님의 영원한

너무나도 이쁘게 키웠던 자녀가 좋은 일이 생기면 당연히 기쁘시겠죠. 여러분에게 심한 병이 찾아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낳게 되면 그것도 물론 기쁜 일이죠. 모두다 기쁘고 감사할 것은 너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서 보이는 것들은 여러분을 쓰러뜨릴 수도 있는 것들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만약 기도를 해도 여러분의 병이 낮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도를 했는데도 필요한 물질이 채워지지 않고, 자식들은 속을 썩이고 제대로 인생을 살아가지 않는 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때는 여러분이 무엇을 붙잡으시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여러분을 자족할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진짜 근거가 어디에 있냐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선언하신 , 창세 때에 여러분의 이름을 여인의 후손으로 삼아 주신 하나님께서 결국 오늘 시간, 우리들을 예배의 처소로 모으셔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이 바로 우리들을 어느 누구도 흔들 없으며, 어떤 것으로도 우리들을 넘어뜨리지 못한다는 근거입니다. 크신 하나님의 사랑, 사랑의 깊이를 우리가 안다면 어느 누구도 저와 여러분과 흔들 없습니다. 꼬이고 꼬여서 꼬일 수도 없어 보이는 우리의 인생이라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인생이 어떻게 불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여인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의 시작으로부터 나를 위해 계획하시고 일을 이루신 하나님 때문에, 여러분은 단지 영원하신 작정 속에 나를 택하셨다는 말만이 아니라, 말을 끝내 이루어 내셔서 기이하고도 오묘한 방법으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하신 주님 때문에, 생각할수록 인생이 깊을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달라질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정' 참된 의미: 주권적

여러분, 우리는 가끔 내가 선택받았다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속에서 여러분은 여자의 후손이 되어 교회로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작정하고 선택하셨기 대문에 결국 구원받기로 선택된 사람만이 하나님께로 있는 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어디에도 그런 표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동원되는 예정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아주 중요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예정이라는 뜻의 “Predestination” 이라는 말을 단순히 어원에 따라이미 목적지가 정해진 상태로만 이해하셨다면,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정이라는 단어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신 것입니다. 예정이라는 속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인 밖에 없는 우리의 조건으로써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우리를 전격적으로 어둠 속에서 건져 내셔서 우리를 구원의 자리로 옮겨 주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의 주인이시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바로은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은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표현할 없는 의미를 궁여지책으로 표현한 단어가 바로예정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할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되며,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의 경험: 믿음으로의 부르

이처럼 예정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하며, 만약 우리가 의미를 오해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자리잡는데 걸림돌이 것입니다. 예정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항상영원이라는 말이 함께 사용되는 것을 있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소관이 아니며 전혀 이해할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은 있습니다. ‘이는 영원하다, 혹은영원 속에서 정하셨다이런 표현들을 사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할 수은 없는 영역에 속한 개념이라는 뜻입니다.

 

전에 저는 애벌레가 고치가 되어서 나비로 변해 날아가는 것을 직접 적이 있습니다. 애벌레를 자세히 들여보고 있자면 징그럽기만 하지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이것이 고치가 되고 나비가 된다는 생각을 도저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애벌레가 세포 속에 나비가 있는 유전 인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나비가 되어서 날아갑니다. 하지만 애벌레들에게는 사실을 아무리 설명을 한들 자신이 나비로 변해 날아가리라는 사실일 이해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애벌레에게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예정도 영원도 우리가 경험할 있는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을 우리 속에서 이루어 내는 순간에는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믿었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내가 예수님께로 갔다 거나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바이며 우리가 표현할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표현하는 정확해 보입니다. ‘내가 나를 믿어서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믿도록 만드셨다’. 그렇지만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이해를 돕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너무나 신기하게도 영원 속에서 일을 경험한 사람들 입니다. 영원을 우리가 설명할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지금 소유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후손 : 싸움과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둠에서 건지셨고, 빛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있었고, 시간 있었고, 기억 있습니다. 설령 그것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러한 일들을 우리는 말하고 고백할 있습니다. 모든 역사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의 구원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포함될 밖에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끊임없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구원을 경험합니다. 내가 여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끊임없이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속에 내가 여인의 후손이라는 표식을 두셨고, 그로 인해 무엇도 나를 흔들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게, 세상에서 지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대표하는 사탄을 밟는 자로 나아올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발꿈치를 물리는 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발꿈치를 물리는 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여인의 후손이며 뱀이 그의 발꿈치를 무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을 말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 공부 시간에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건이 언제나 예수님 만의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교리를 배우고도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하고 우리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능력이 우리들에게는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여인의 후손 속에는 여러분이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사탄의 머리를 밟는 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박힌 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자로, 여인의 후손의 이름에 들어 있는 자로 성경이 말씀해 주십니다. 말씀은 죽어 있는 교리가 아니라, 정말로 여러분의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과 함께 우리에게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한 입니다.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었다면, 우리도 역시 물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분과 함께 십자가에 박히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죄와 욕심을 박아 보신 분은, 그리고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박아 보신 분은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아픈 지를 아실 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무엇인가를 남을 위해 양보하고 인내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그런 우리의 마음을 박아 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은 일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는 길인 것입니다. 사탄의 머리를 밟으며 승리하는 , 그리스도로 인해서 받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고난에도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붙잡는 믿

그런 사람들은 세상이 약속하는 것들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 약속은 한편으로는 뜬구름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설교를 듣고 말씀을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을 하고 싶어 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의 어느 부분에 구체적인 적용의 말씀이 있나요? 성경에는 술과 담배를 즐기는 것을 금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잡고 인터넷을 들락 날락 하는 것에 우리들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구체적인 적용이 들어있는 책이 아닙니다. 단지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어떻게요? 글쎄요, 어떻게 이루실까요? 너무 구름을 잡는 듯한 추상적인 약속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그것을 잡는 사람이라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질 것이며, 그리스도의 영광과 능력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비록 그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뜬구름 같은 약속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길을 걸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분을 보고 좇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 같이 사는 사람이 되어 길을 함께 가기를 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자고 우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나와 함께 있자, 나를 붙잡고 나와 함께 살자, 나로부터 마시고, 내가 주는 것으로 살고 나로부터 오는 생명을 함께 누리자, 그리고 나와 함께 힘들어하고, 나로 인해 즐거워하며, 안에서 기뻐하여라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비록 돈이 생기지고, 떡이 나오지도 않겠지만 우리는 약속을 바라보는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함을 풀고 싶은 마음도, 원수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도, 모든 것을 뒤집어 엎고 싶은 마음까지도 모두 하나님 앞에 내려 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못난 마음을 주님의 성품 안에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성질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나의 실패가 아니라 크리스도의 성공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주님, 나를 건지 소서, 나로 일어나 살게 하시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게 하소서’. 그때에 우리는 예수의 인내가 나의 지혜이자 인내라고 고백할 있게 됩니다.

 

숨겨진 기쁨과 생명 찾기 (주기철 목사님 예화)

우리는 매일 사탄을 우리 발아래에 두는 동시에, 매일 우리의 십자가를 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둠이 아니라 빛에 거하는 자라는 것이 숨겨진 비밀 하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어둠 속에서, 저주 속에서 생명을 이야기할 있었던 것입니다. 어둠과 저주 속에 숨어있는 생명을 보았던 것입니다. 제가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던 윤심덕 씨의 사의 찬미라는 노래는 굉장히 슬프고 비장한 노래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노래의 원곡은 루마니아의 이바노비치라는 작곡자가 다뉴브강의 물결이라는 왈츠풍의 군악대용 곡입니다. 원곡은 슬프지 않고 밝고 신나는 곡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노래에 한글로 작사를 하신 분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주 아시는 목사님 이십니다. 바로 주기철 목사님 이십니다. 노래의 곡조가 슬프고 애절하게 들리지만, 속에는 숨겨진 왈츠풍의 기쁨이 있었고, 숨겨진 기쁨을 알았던 주기철 목사님은영문 밖의 이라는 자신의 시를 노래에 붙여서 찬송가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곡이 찬송가에서 빠진 지는 오래 됩니다. 지금 있는 찬송가에는 주기철 목사님의 시에 김남수 목사님이 작곡한 곡을 붙여서서쪽 하늘 붉은 노을이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원곡이 대중가요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뒤에 다른 곡으로 바뀌었나 봅니다. 그런데 찬송가 원곡에서는 대중가요로서 드러났고 곡조는 참으로 허무하였지만, 사실 노래 속에는 기쁨의 왈츠가 있었고, 노랫말에는 주기철 목사님의영문밖의 이라는 찬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에 찬송가야 말로 어둠 속에도 한줄기 빛을 보았던 아담처럼, 말씀을 들은 우리들이 함께 나눌 가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는 노랫말을 읽는 것으로 마칠까 합니다.

 

아픈 다리 싸매 주고 저는 다리 고쳐 주사,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 길을 보여주니, 칠전팔기 지라도 십자가 바로 지고, 골고다의 높은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십자가에 고개 턱이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 가신 길이 오니 내가 어찌 가오리, 주님 제자 베드로는 거꾸로도 사오니, 고생이라 가오며 죽임이라 가오리

 

마무리

기도하겠습니다. 죽음 속에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죽음을 노래할 밖에 없는 세상에서, 사실은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하나님의 백성들 처럼, 아담처럼, 모든 것이 어두우며, 모든 것이 절망처럼 보이며, 답답하며, 어두운 세상이 속에서,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저희들이 생명을 보고 붙잡을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그것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여인의 후손에 자리에 오셨던 그리스도를 붙잡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여인의 후손의 이름에 우리의 이름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어둠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빛의 세상에 있다는 것을 깨달어 다시 한번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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