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8장 52절로부터 59절 까지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아멘.
기쁨의 명령과 우리의 현실
"항상 기뻐하라"는 데살로니가서에서 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명령입니다. 누구나 기쁘게 살고 싶지만, 이 명령을 듣는 순간 우리는 문득 '우리 인생이 정말 그렇게 기쁘기만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이나 바울에 대해 잘 모른다면 바울을 순진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은 마냥 순진한 사람이 아니죠. 그는 우리만큼, 어쩌면 더 심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던 고통의 사람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는 어떠셨나요? 휴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바쁘게 달려오신 한 주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범사에 일복이 터졌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개 쉬지 않고 염려하는 스타일로 한 주를 보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일용할 양식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채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고 느낍니다. 과연 "일주일을 기뻤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대부분은 "참 곤고한 인생이구나"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어떠세요? 누가 지난 한 주가 어떠했느냐고 물으면 대개 "그저 그랬다," "아 뭐 별거는 없었지," "괜찮았다"라고 대답하지 않나요? "지난 주일은 너무 기뻤다. 기뻐서 그냥 막 살이 떨렸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마땅히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데도, 서로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 "너무 기뻤다"는 말을 듣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런 고생을 하고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을 기뻐하며 항상 기뻐하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쩌면 그를 정말 대단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때는 옛날이어서 그랬을 것이고, 지금 우리 삶에서 그렇게 기쁨에 가슴이 떨리는 일들이 많을까? 아니면 뭔가 기쁠 만한 일들이 좀 있어야 기뻐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산전수전뿐만 아니라 공중전까지 다 겪으신 분들 아닙니까? 그래서 오히려 여러분과 저는 이럴 때 위로를 받거나 기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년에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는데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좀 힘을 쓰셔서 내년에 너무 힘들지 않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어려운 일이 없다면 간증도 생기고 참 위로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죠. "기뻐하라"는 말씀이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말보다는, 가게에 손님이 가득 차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면 아마 여러분 생각에 '야, 하나님이 확실히 역사하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지 않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겠지만, 여러분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마음도 뿌듯하고 호주머니도 넉넉하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크나큰 것이 아닐지라도 사실은 더 큰 위로가 될 때가 많겠죠.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라, 심지어는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해도 우리는 어쩌면 무엇이 진정으로 우리를 위로할까 생각할 때, 호주머니 사정과 마음에 누릴 수 있는 평안이 전부가 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리아 산 이야기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정말 채워주신 인생이고 '여호와 이레'라는 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시고 채워주신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과 기적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이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양을 주셔서 대신 제사를 드릴 수 있었죠.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지만, 이집트에서 돌아올 때는 부자가 되어 있었고요. 100세가 넘어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복을 받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복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분명 이런 놀라운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단순히 "그냥 기뻐해라"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제 그의 인생에서 318명을 이끌고 올라가 모든 포로와 전리품을 되찾아오기도 했죠. 또 어떻습니까? 롯에게 "네가 먼저 이쪽을 택하면 내가 저쪽, 네가 저쪽이면 내가 이쪽"이라고 말하게 하고, 롯이 택한 곳이 소돔과 고모라였는데 쫄딱 망하고 본인은 별 어려움이 없지 않았습니까?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런 일이 생기면 우리는 당연히 간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시 내 편이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라고 말하며 감사와 위로를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역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많은 부분에 역사하셨구나."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아브라함은 그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기적을 아브라함은 수도 없이 겪었습니다. 저라도 그 정도 기적을 겪었다면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그런데 창세기를 잘 읽어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 중 아브라함이 기뻐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그의 생애에 기쁨이 전혀 없었겠습니까? 자식을 낳았을 때도 기뻤겠죠.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즐거워했다"는 말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일대기에 단 한마디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이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걸까요? 그는 복도 많이 받았지만 고생도 엄청 했습니다. 하란에서 나와 25년 동안이나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광야에서 헤매고 자기 땅 하나도 없이 살았으며, 얼마나 무서웠으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을까요? 언제 죽을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은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했고, 이웃들은 언제 적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겨우 우물을 찾아서 팠는데 다 빼앗겨 버렸고, 한마디도 못 하고 있다가 아비멜렉이 와서 이야기하자 그제서야 "약탈이 잘못된 거 아니냐? 그 우물을 우리에게 달라"고 했던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식도 없었고, 아내에게는 언제나 미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말해놓고 당당한 남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그가 기뻐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아브라함의 기쁨
여러분,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후,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에서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어디에 지어졌을까요? 시온산, 곧 모리아 산 위에 세워진 곳이죠. 모리아 산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에서 2000년 뒤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여기서 '즐거워하다가'라는 단어는 뒤의 '기뻐하였느니라'와 헬라어로는 다르지만, '극히 기뻐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대단히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는 걸까요? 아브라함은 분명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이야기가 창세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기뻐하고 즐거워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 부자가 되고, 그 모든 것을 받았을 때 그것이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는데도 성경은 그가 즐거워했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기뻐한 일이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과 자유의 진정한 의미
사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믿었다'는 표현은 우리가 흔히 아는, 예수를 의지하고 의로움을 얻는 신앙적 믿음이 아니라, 지적인 동의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기 전 흔히 겪는 것처럼,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지적으로 설득되어 동의한 것입니다. "이 사람 말이 맞다"고 생각한 거죠.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라는 구절에서 이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님을 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유명한 구절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했던 사람들이라면 "아멘, 주님 말씀해주십시오. 주님이 누구신지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우리가 아브라함 자손인데 한 번도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왜 우리가 자유자인데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얘기하느냐?" (예수님 말씀속의 진리는 궁극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즉, "너희가 나를 알면 그 아들로 인해 자유로워질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팩트 폭격'과 우리의 죄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촌철살인의 일침을 가하십니다. 요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팩트 폭격', 즉 '팩폭'과 같은 말씀이죠. 그 내용은 바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자유자이며 한 번도 종이 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모두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너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느냐? 나를 통해서만, 내 말을 듣고 내 안에 거해야 한다. 그리하면 너희가 자유를 얻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예수님께 그들은 "당신은 귀신 들렸거나,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죽여야 할 상황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 하거나,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에 응답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고? 아브라함이라면 내 말을 들었을 거다. 그런데 너희는 그런 말을 듣지 않는구나. 내 말 안에 거하면 죽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이죠.
여러분,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고 그 아들을 통해 자유자가 될 수 있는데, 그 아들을 통하지 않으면 너희는 죽을 수밖에 없다"며 죽음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당연할 텐데, 그들은 엉뚱한 질문을 던집니다.
"아니,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으니, 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자유가 없느냐? 그리고 당신이 죽는다고 하는데,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어떻게 당신을 따르면 죽지 않는다고 말하느냐?" 이 문제로 따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남자분들이 대개 (전부는 아니지만) 병원에 가는 것을 싫어하시잖아요? 병원에 가면 좋지 않은 말을 들을까 봐, 혹은 귀찮아서 싫어하기도 하지만, 의사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뇨 환자에게는 "선생님, 당뇨인데 그대로 두시면 죽습니다. 당뇨를 고쳐야 하니 이건 먹으면 안 됩니다"라고 꼭 일러주죠.
그런데 병원에서 나와서 아내와 함께 남자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요? "그거 다 안 먹고 어떻게 사나? 사람이 그거 안 먹고 이거 안 먹고 저거 안 먹고 그러면 그게 스트레스야. 그래서 내가 더 아픈 것 같아." 그리고는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지 않습니까? 방금 "그렇게 살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말입니다. 죽는다는 말을 듣고도 먹지 말라는 것을 먹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그러고는 교회에서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없다"는 말을 합니다. 마치 자신의 '기계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내가 하는 말을 그 안에 거하지 않으면 너희는 죽는다"라고 말하는데도, 그들은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냐?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네가 어떻게 산다고 하느냐?"라며 전혀 본질과 관계없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계속 붙잡고 늘어집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만 같습니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도 죽었는데 안 죽는다고? 너 누구냐? 너 뭐냐?" 이렇게 되묻는 것입니다.
모리아 산 사건과 죽음의 의미
여러분,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 8장의 배경은 모리아 산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고, 그가 기뻐했다는 언급,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라는 주제가 등장합니다.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레'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 핵심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때 이삭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 이야기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었죠. 그는 분명 죽어야 했지만, 살아나게 된 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한다는 이 이야기가 모리아 산 사건과 단순한 연관성을 넘어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어차피 다 죽는데, 아브라함도 죽었고 선지자도 죽었는데 어떻게 당신은 당신을 믿으면 영원히 살 거라고 이야기하느냐?" 이런 상황인 것이죠. 왜냐하면 진리이자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죽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나를 볼 것을 알았고 그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이 말씀에 그들은 깜짝 놀랍니다. '야, 너 보니까 한 50살도 안 돼 보이는데.' (예수님은 고생을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연세는 서른 살 혹은 서른한두 살이었습니다. 그런데 50쯤 되어 보인다고 하니, 성경에서 확실히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동안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네가 50살도 안 돼 보이는데 어떻게 아브라함과 이야기를 하고, 아브라함은 2000년 전 사람인데 지금 말이 되느냐?"라고 다시 따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진정한 기쁨의 근원: 약속과 그리스도
여러분, 성경과 예수님은 한 번도 기뻐했다는 기록이 없는 아브라함의 삶에 그가 사실은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뻐했다는 걸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기쁨과 여호와 이레 사건, 그리고 요한복음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본문을 읽으면 금방 알 수 있는 부분인데, 가장 핵심은 그가 무엇을 보고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내 날 보기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보기를 원했다고 말합니다.
혹자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 아브라함이 먼저 하늘에 올라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며 기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문장 전체에는 미래형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할 때 모두 과거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본 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 과거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모습이 아니라, 훨씬 전에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보고 기뻐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는 과거형입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있어 미래에 자신이 하늘에서 '와, 드디어 예수가 이 땅에 왔구나!' 하고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직 오지도 않았고 그가 자세히 몰랐으며 이름조차 몰랐던 그 메시아, 그분이 오실 것을 보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기뻐한 내용의 본질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약속 때문입니다.
그가 받은 것이라곤 약속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약속이 어떤 약속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약속을 할 때 약속의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맺은 약속의 내용을 보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큰 복을 받고 열방의 아비가 되며 믿음의 조상으로서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늘의 별보다 땅의 모래보다 더 많은 자손을 갖게 되고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다"라는 말에 아브라함은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안타깝게도 약속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가 받을 것들과 누릴 것들이 대단한 일이긴 하지만, 그를 기쁘게 한 것은 그 정도의 대단한 것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도 금방 아실 수 있듯, 그의 생애 동안 그 약속의 내용 중 받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조금이라도 받은 적이 있나요? 그가 큰 민족을 이룰 정도로 자식이 많았습니까? 그가 대단한 일을 이룬 적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받지도 못한 것 때문에 기뻐했다는 것인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가 받지도 못한 것들인데 무엇 때문에 기뻐했을까요? 약속한 내용 때문이 아니라 약속하신 분 때문에 기뻐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기에 그가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의 기쁨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 부자가 되었으며, 소돔과 고모라를 피하는 등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분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기뻐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나의 날을, 내 때를 볼 것을 기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들로 인해 그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기에 자신의 모든 기쁨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었던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왜 기쁨에 약할까요? 우리는 이토록 즐겁고 극히 기쁜 복음, 즉 복된 소식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믿고 알고 있는데, 왜 성경이 말하는 그 복되고 기쁜 소식의 기쁨을 여전히 많이 누리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받았으며 무엇 때문에 기쁠 수 있는가를 계속해서 놓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러분과 저는 여전히 이 땅에서 하나님을 믿었으니 하나님의 힘으로 잘 살기를 원합니다. 물론 잘 살지 못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목사인데, 우리 교인들이 모두 부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밥 얻어먹을 때도 기분 좋고, 밥 사달라고 하기도 쉽죠. '이번에 천만 불 버셨다면서요?' 이런 말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고요. 모두 부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돌아가실 때까지 감기조차 걸리지 않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만으로는 '즐거웠다'는 말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기록될까요? '내가 그분의 약속을 믿었는데 왜 믿었어요? 그 약속하신 이가 베푸심이라.'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허언이 없으시며,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내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목표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 목표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갖는 것입니까? 아니죠. 자녀들이 엄청나게 잘 되는 것이 전부인가요? 그것 또한 아닐 겁니다. 연세가 들어갈수록 인생의 목표나 꿈은 점점 소박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 그저 아프지 않고 예수 잘 믿다가 주님 앞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현실적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것이 진정한 꿈은 아니지 않습니까? 병에 걸리지 않고 신앙생활 조금 하다가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여러분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닙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인생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영광과 거룩, 그리고 놀라운 기쁨을 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목적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 엄청나고 놀라운 것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 때문에 매일 속상해하고 짜증 내고 힘들어하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계십니다.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허비할 시간에 기뻐하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이 땅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십시오. 기쁨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은 남은 인생을 매일 기뻐해도 모자랄 정도로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것이 그만큼 놀랍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과 베드로의 예
우리는 첫 번째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콘크리트처럼 끄떡없는 비인격적인 대상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바로잡아 주시며, 한순간도 쉬지 않고 우리와 함께 걸어가신다는 인격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드릴게요.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끊임없이 베드로를 유혹하고 흔들었다는 뜻이죠. 베드로가 얼마나 잘 흔들리는 사람이었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 외에도 그의 인생에는 수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었고, 심지어 사도가 된 후에도 바울에게 꾸중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삶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많은 유혹을 겪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내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베드로가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었는지 아시겠죠?
여러분, 자녀들을 보며 가끔 이런 말 하잖아요. '얘들이 지들이 혼자 큰 줄 알아요.' 우리도 비슷합니다. 조금만 예수님을 알고, 조금만 성경을 읽고, 조금만 기도하고, 조금만 교리를 배우거나 은혜를 받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세요? 자신이 대단하고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인 줄 착각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돌보시고, 사랑하시고, 안으시며, 함께 가시고, 심지어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 여러분과 함께 들어가셨다가 다시 나오시며, 여러분을 끊임없이 일으켜 주셨기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죽음 너머 예수를 본 아브라함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단순히 죽음만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날, 예수님의 때를 분명히 보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죽음을 본다는 것은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유가 아닌, 죄 때문에 죽는 존재죠.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이 더 이상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 사건의 핵심 아닙니까? 죽을 수밖에 없던 이삭을 대신해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죄 속에서 죄를 먹고 죄에 붙잡혀 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심지어 자신마저 잃어버리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버리는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합니다. 혹은 여전히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기도 합니다. 로마 시대의 많은 현자들조차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내 자신의 종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죠. 욕심의 종이 되고 세상에 붙잡혀 종노릇하며,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 속에서 예수를 본 것입니다. 근심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를 본 것이죠. 그는 인생에서 겪는 자신의 두려움만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를 보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만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내게 사는 것은 나만이 아니고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라는 것을 보게 된 것이죠.
여러분은 인생 속에서 얼마나 많은 우울하고 속상한 일을 경험하며, 얼마나 힘든 일들 때문에 때로는 자신에게 욕하고 화를 내며 실망합니까?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신 때문에도 속이 상할 때가 많죠.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나'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사실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날을 보았다는 이 놀라운 진실은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그래, 예수님만 바라보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경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고 함께하신다는 그 얘기 아니냐?'라고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은 지금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근심의 종이 아니며, 염려의 종이 아니며, 내 우울의 종이 아니고, 내 실패의 종이 아니다. 나는 자유자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자유한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다!"
허블 망원경과 시야의 확장
그렇다면 예수님만 바라보면 너무 좁아지는 것 아니냐고요? 그저 예수님만 알고, 교회만 알고, 신앙생활만 하다가 끝나는 것 아니냐고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예수 믿는 사람이 때로는 좁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 우리나라 속담에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있듯,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보면 하늘이 손바닥만 해 보여 생각과 마음이 좁아진다고들 합니다. 맞는 말 같죠.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만 바라보면 과연 우리의 시야도 그렇게 좁아지고 모든 것이 힘들어질까요?
옛날에는 우물 안 개구리였지만, 오늘날에는 유명한 허블 망원경이 있습니다. 요즘은 '허블 안 개구리'라는 말도 있죠. 허블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면 우리가 사는 이곳이 너무나 작고 하찮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허블 망원경은 지름이 2.4m 되는 렌즈를 인공위성에 달아 하늘로 쏘아 올린 것입니다. 보통 우물이 1.5m에서 2m 정도이니, 큰 우물 크기라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이 렌즈를 통해 온 우주를 볼 수 있습니다. 수억 광년 떨어진 별들을 보는데, 그 별들 하나하나가 우리가 사는 은하계와 같은 거대한 성운들입니다. 이 허블 망원경을 통해 수백 개의 성운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동그랗게 보이는 별 하나하나가 은하수나 은하계 같은 거죠. 다음 그림을 보시면, 이는 성운인데 별들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이런 별 구름들을 망원경을 통해 온 우주가 보입니다. 2.4m짜리 렌즈에서 말이죠.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 시대가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본다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좁은 곳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통해 보게 되면 이 세상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 나아가 모든 것을 보게 되며 그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은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거죠. 우리의 인생 자체가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우주를 보게 되고 모든 것이 바로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기쁨이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예수를 보는 기쁨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 속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과 거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심을 보지만, 이제 우리의 근심이 달리 보입니다. 예전에는 근심만 보였지만, 이제 예수를 봅니다. 그러면 근심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연약하고 병든 육신만을 보았는데, 내 육신마저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일주일에 단 하루만이라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고통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여러분, 고통만 보던 눈에서 아브라함처럼 그 고통 속에서 예수님까지 보인다면 그가 왜 기뻐했는지 아시겠죠? 영원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고통 속에서도 보인다면, 그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진짜 유업: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
마지막 기쁨은 바로 거기서부터 나오는 당연한 기쁨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거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너희는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어서 "그럼 아브라함이 한 일은 뭐냐?"라고 물으시고 이렇게 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무슨 말일까요?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면 아브라함이 행한 대로 했을 텐데, 아브라함이 행한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으신가요?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후 2000년 만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사랑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고, 골고다라는 말도, 십자가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알고 있었고, 그 죽음을 대신하는 메시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진정한 인생임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기쁨을 누리고 싶으신가요? 무엇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진짜 귀중하다고 생각하시나요? 무엇이 여러분의 시선을 사로잡나요? 오늘날 많은 설교는 내용보다 얼마나 재미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설교의 내용이 어디에 있는가보다 재미있게 들었으면 은혜로운 설교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약속의 내용에만 집중하고, 설교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 하는지에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하신 가장 소중하고 좋은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쁨은 여러분처럼 로마서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사복음서나 요한계시록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모든 기적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 그리스도 메시아와 함께 인생을 걷는 것. 그는 그 메시아와 함께 살았기에 이삭만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광야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광야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모리아 산만 본 것이 아니라 이루어질 십자가도 보았습니다. 그가 했던 수많은 실패와 거짓말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결국 승리하실 그 승리를 함께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기쁘게 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정말 나를 위해 오늘도 일하시는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기쁨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너무나 감사했고 기뻐했으며, 그 주님을 좋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이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의 기쁨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후 2000년이 지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성전에서 이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여러분, 그 성전 속에서 우리는 같은 내용을 말씀으로 듣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속에서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아십니까? 성막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오직 빛나는 촛대만이 있을 뿐이죠. 모든 것이 어두운 그곳에서 촛대는 빛나고, 성막의 모든 벽은 금으로 발라져 있어 그 금빛을 받아 성막 안은 오로지 촛대의 빛과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납니다. 여러분은 어디를 보시겠습니까? 창문도 없는 성막 속에서, 그 성전 속에서 여러분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볼 수도, 그것 없이는 걸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보십시오. 그분이 여러분 기쁨의 근원입니다. 여러분의 고난보다, 여러분의 어려움보다, 여러분의 모든 힘든 순간보다 주님은 분명히 크신 분입니다. 여러분의 눈물보다 그리스도의 한 번의 웃음이 훨씬 더 강력합니다. 여러분의 양심으로 인한 괴로움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고 더 높은 것입니다. 이 주님이 여러분의 기쁨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을 보지 말고 예수를 제발 보십시오. 내 외로움 속에서 외로움을 보지 말고 예수를 발견하십시오. 여러분이 보는 것은 여러분의 구멍 난 인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의 병든 몸을 보지 말고 예수를 보십시오. 여러분의 외로움과 아픔을 보지 말고 예수를 발견하고 예수를 보십시오. 여러분의 묵상하고 지쳐서 힘든 삶만을 보지 말고, 마음대로 되지 않아 실패로 얼룩진 그 인생만 보지 말고 예수를 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진짜 인생입니다. 그것으로 힘을 얻어 승리하십시오.
기도 합시다.
주님 앞에 나아가오니, 주님 저희의 눈을 밝혀 주시옵소서. 성전 안에는 촛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밖에 없는데, 저희는 도대체 무엇을 지금 구하고 있습니까? 창문을 기웃거리는 저희에게 말씀해 주옵소서. 더 이상 창문은 없다고, 밖을 기웃거리는 저희들의 눈을 빛 되신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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