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3절부터 12절까지 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멘.
아브라함의 시험: 믿음의 시작점인가, 완성점인가?
이삭은 나무를 짐으로 지고 산을 오를 수 있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대개 15세에서 20세 사이로 추정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응답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였습니다. 우리는 이 응답이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님을 살펴보았고,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고 있는 이 시험이 결코 간단하거나 평범한 사건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시험의 본질: 연단 그 이상
일반적으로 시험은 사람을 연단하여 마치 금처럼 귀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 역시 이번 시험을 통해 변화하고, 신앙이 더욱 성숙해지며, 믿음이 자라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아담의 행동과는 대조적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피해 숨었던 것과 달리, 아브라함은 정반대의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이미 믿음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시험은 우리의 부족함이나 잘못을 고치거나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이미 굳건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시험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바로 직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을 얻었음을, 즉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
또한 아브라함은 마지막에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우리가 이전에 살펴보았듯이,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서 어떤 상황에서든 항상 함께하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아브라함이 어떤 영적인 상태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인생의 답, 이삭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의문이 많았으며, 그로 인해 깊이 고민했던 문제의 답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다른 모든 것은 괜찮습니다. 다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제게 후사가 없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약속을 이을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오랜 고민이었고, 그는 이미 그 답을 얻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이미 인생의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도록 시험하신 주된 목적이 아들을 바칠 만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거나, 아들까지도 바칠 수 있는 신앙을 주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게 해석하더라도 이것이 주된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이미 인생의 답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한 존재, 이삭에게 걸린 하나님의 약속
그런데 이 이삭이라는 존재는 매우 특별합니다. 그래서 이 시험 문제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단지 아브라함이라는 한 가문의 대를 잇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래와 같이 네가 번성하고, 그렇게 많은 이들이 너에게서 나게 될 것이다. 너는 열방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바로 이삭에게 걸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이토록 중요한 인물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즉 이미 인생의 답을 얻었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십여 년을 살았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 문제를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아브라함이 이 시험에 어떻게 답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답을 알고 있는 시험
이 시험의 또 다른 특징은 아브라함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답을 몰랐다가 나중에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삭이 물어볼 때도, 아브라함은 그의 질문에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위하여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이 답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질문들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 질문 속에 담긴 답을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 한국에서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거친 분들이라면 시험이라는 말만 들어도 지겨울 정도로 많은 시험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시험이 얼마나 힘들고 지긋지긋한지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2교시만 보고 집에 갈 수 있어서 시험을 좋아했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시험은 대개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시험 문제를 받아본 대부분의 사람은 알 것입니다. 조금만 공부한 사람에게 시험 문제는 대개 문제 안에 답이 많이 들어있다는 것을요. 문제를 잘 읽으면 어느 정도 답을 유추할 수 있도록 출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내신 문제를 우리가 깊이 이해할 때,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 답했으며 그 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더욱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문제를 내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 문제 속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다층적인 질문입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고, 둘째는 모리아 땅에 있는 지정된 산으로 가라는 것이며, 셋째는 그곳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문제를 내셨을까요? 여러분은 이 질문이 다소 뜬금없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그 약속의 결실인 이삭이 마침내 태어났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삭과 행복하게 살고, 손주도 보고, 그 손주를 통해 약속의 자손이 번성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그의 당연한 생애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이 세 가지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 '독자 이삭'의 특별한 의미
첫 번째 질문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노년에 얻은 이 아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을 "네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독자'라는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이삭이 아브라함의 독자였나요? 이삭에게는 형, 이스마엘이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분명히 이스마엘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었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냈으니 이제 이삭만이 남은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아브라함에게는 나중에 여섯 아들이 더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삭을 계속해서 '독자'라고 표현합니다.
왜 독자일까요? 이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이삭 한 명뿐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뿐이라는 강조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할까요? 바로 사라를 통해 태어난, 그 사라의 몸에서 나온 자식이, 그 후손이, 여인의 후손이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독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한다면, 이 아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아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 아브라함 인생의 전부
아브라함은 왜 그토록 고생했습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아무도 모르는 가나안까지 와서, 자기 땅도 없이 긴 세월을 유리하며 방황했습니다. 그 모든 고생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자손인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이삭을 데리고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이삭이 없다면 아브라함에게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왜 여기까지 살아왔는지, 무엇을 위해 이 긴 여정을 걸어왔는지, 왜 그토록 자식을 얻으려 애썼는지, 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의 인생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국에 이민 오신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이민을 오셨지만,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우리 자식을 위해 미국에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녀를 돌볼 시간도 없이 일만 하셨다면, 사실상 이민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 아닙니까? 힘들게 고생만 했는데 자녀가 기대만큼 자라주지 않았을 때 얼마나 허무하고 힘이 드나요?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뭘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간혹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본인이 아무리 힘들었어도 자녀가 잘 되면 거기서 모든 보상을 받으려 하기도 합니다. 이민 사회의 부모님들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보려 하기 때문인데, 이는 결코 올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였습니다. 이삭이 없다면 아브라함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살아온 모든 의미와 노력은 이삭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데리고 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자, 이제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의 인생이 통째로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무너지는 인생 앞에서 아브라함의 답은 바로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과연 어떻게 그런 대답이 나올 수 있었는지, 이제 함께 찾아봅시다.
'여호와 이레'의 진정한 의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호와 이레'를 "여호와께서 예비하셨다"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고 마련해 두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며,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 같은 찬양을 부를 때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이레'의 '이레'라는 단어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의미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예비'나 '준비'는 "미리 마련하거나 갖추어 놓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께서 내 길 예비하시네"라는 말을,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고 마련하셔서 그것을 누리며 살게 하신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아쉽게도 그 의미는 아닙니다. '여호와 이레'의 '이레'는 본래 '부른다', '말한다', '나타난다'는 의미를 기본으로 가지고 있으며, '미리'라는 뜻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비'라는 말에 '미리 예(豫)' 자가 들어가기에 '미리'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 단어는 그러한 방식의 예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레'의 뜻은 매우 복잡하지만, 제가 네 가지 중요한 의미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나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세세하고 꼼꼼하게 살피신다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 이레의 첫 번째 의미는 '살피신다'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살피시는데, 이는 하나님이 나를 깊이 이해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내 속마음까지, 가장 깊은 곳까지 이해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를 이해하신다고 말할 때 우리는 '여호와 이레'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마음이 어디서 상처를 입었는지, 그로 인해 얼마나 아픈지를 이해하십니다.
두 번째 의미는 하나님이 나를 쉬지 않고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이레'라고 고백할 때, 그 말은 곧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신다, 끊임없이 나를 생각하신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세 가지를 말씀드렸죠? 살피신다. 나의 모든 삶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살피십니다. 그리고 그 살피심을 통해 나의 아픔과 슬픔, 눈물까지도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십니다. 또한 나를 항상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생각 속에 내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복음 찬양에도 있지 않습니까? "그때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머리를 떨구시며 죽으실 때, 나를 생각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의 대부분은 여러분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왜 그런지 아시죠? 여러분은 주변 사람을 언제 그렇게 끊임없이 생각하시나요? 연애를 해본 분이라면 아실 겁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그 생각밖에 없죠.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생각하신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생각에서 단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감동받아야 할 때 아닙니까? 여러분은 평생토록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이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데 하나님은 평생을 그렇게 하십니다. 여러분에 대한 생각이 한 번도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의미에 하나를 더 덧붙인다면, 그것은 바로 '돌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돌보신다'는 의미에서 '준비한다(prepare)'라는 단어가 파생된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어떤 영어 성경도 하나님이 'prepare'한다고 번역하지 않습니다. 모두 'provide(공급하신다, 채우신다)'라고 번역합니다. "하나님이 너의 필요를 채우신다, 너를 돌보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죠. 이 의미를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수양을 '미리' 준비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수양을 '공급하신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리 다 아시고 준비해두셨다가 척척 주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바로 그 귀한 것을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의미가 훨씬 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 사정을 깊이 아실 뿐만 아니라, 그 아심을 바탕으로 나에게 가장 선한 것을 항상 허락해 주시고, 나를 끊임없이 생각하시며, 한없이 살피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요.
무너지는 삶, 흔들리는 믿음 속의 답
'여호와 이레'. 이처럼 훌륭한 답이 또 있을까요? "너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 이삭이 사라지면 너의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씀은 비단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완벽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고, 많은 것을 잃어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진다고 상상해 보세요. 지금까지 살아왔고, 믿었으며, 알았던 모든 것이 흔들리는 순간 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께 아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절규할 때, 심지어 여러분의 믿음마저 흔들릴 때, "나는 교회, 예수님, 하나님을 결코 놓지 않을 거야!"라고 자신했던 삶에서 그 확신마저 흔들리고, 신앙생활의 중심이라 여겼던 나 자신조차 의심이 들며, "과연 내게 무엇이 남아 있을까?"라는 무너짐 앞에서, 여러분의 신앙마저 흔들릴 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흔들림 없는 응답: 여호와 이레
아브라함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모든 것이 무너질 때 내가 찾은 대답은 여호와 이레." "나는 잊을지라도 나를 잊지 아니하시는 그 하나님. 나는 포기하고 도망갈지라도 끝까지 추적하여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 '여호와 이레', 그것이 아브라함의 첫 번째 답이었고, 그가 찾은 유일한 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우리의 답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지금 이 자리에 앉게 한 것이 여러분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혹시 계신가요? 오늘 여러분이 "예배 빠지지 말아야지. 주일인데 주일은 지켜야지" 하고 오셨기에, 여러분의 결정과 힘으로 여기까지 오셨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는 것 외에도, 여러분의 일주일 삶 속에서 순간순간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에 함께하셨고, 큰 시험과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신 그 순간들을 혹시 깨달은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종종 그 하나님의 손길을 모르고 지나치기에, 감사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교회에 오다가 큰 사고가 날 뻔했는데, 여러분이 바로 앞에서 사고를 피해 교회에 도착했다면 모두가 "하나님이 나를 지키셨습니다!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외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52주 동안 교회를 오지만, 그런 일이 단 한 주 발생하면 너무 기뻐 찬양하고 "할렐루야!"를 외치며 대단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51주는 어떻게 오신 건가요? 어느 쪽이 더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과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진정한 손길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는 마음 아픈 현실 아니겠습니까? 사실을 마주할 때의 아픔이죠. 우리는 과연 무엇을 감사하며 살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있나요? 작은 문제 하나 때문에 우리는 마치 인생 전체가 무너진 것처럼 속상해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호히 말합니다. "아니, 너의 인생 전체가 무너지더라도 우리의 대답은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 단 한 순간도 나를 생각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신 그분이 나를 지키신다."
두 번째 질문: '지정된 산', 모리아
두 번째 질문은 모리아산에 관한 것입니다. 이 모리아산은 겉으로는 쉬워 보이지만 사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리아산을 "내가 지정한 그 산"이라고 말씀하셨죠. 이 산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단 한 번만 언급됩니다. 그 구절을 한번 볼까요?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역대하 3:1)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모리아산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당시 모리아산이 예루살렘인 줄 알았을까요? 당연히 몰랐을 겁니다. 성경 인물이나 구절에 대한 질문이라면 여러분이 침묵해야 하지만, 이런 질문에는 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직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한참 전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모리아산이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예루살렘은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성읍입니다. 여러분도 새 예루살렘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에 나타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산이 있고, 새 예루살렘, 즉 새 하늘과 새 땅에도 요한이 항상 올라가는 하늘의 성산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산'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지형적인 의미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그런데 이 '산'은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도 등장합니다. 방주가 산에 머물렀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또 다른 산이 나오는데, 바로 에덴에 있는 산입니다. 여러분, 에덴을 '에덴동산'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왜 '정원'이 아니라 '동산'이라고 할까요? 바로 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이라는 번역 자체도 그러하지만, 실제로 에스겔서에서 에덴동산을 묘사하며 산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가 읽어 드릴게요. 에스겔서에 옛적 에덴동산을 설명하면서 보석들이 언급되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에덴동산을 지키는 그룹들이 있는데, '내가 너를 세우매 내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었다.'" (에스겔 28:14, 의역)
에덴동산에 하나님의 성산이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에덴의 산과 성산의 의미
이러한 '산'의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두 개의 산을 대조시키십니다. 때로는 바벨탑처럼 '탑'의 형태로, 때로는 느부갓네살의 신상처럼 '신상'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께서 대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 곧 성산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올라가 스스로 모든 것을 통치하려 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첫 시도이자 사탄의 등장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인간 또한 이와 같이 하나님 위에,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앉아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루려 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볼까요? 에덴에도 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후에도 방주는 산에 머물렀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으로 가는데, 이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에덴의 산은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회복될 영원하고 완전한 에덴과 연결됩니다. 갑자기 눈이 커지시는 걸 보니 이해가 안 되시는 건가요? 어렵지 않죠? 에덴동산의 산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마지막 새 하늘과 새 땅까지도 이 산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아브라함은 그 중 하나인 모리아산에 올라갔습니다. 뒷부분은 잠시 접어두고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 올라갔다는 의미는 마치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걸린 것과 유사하며, 더 중요하게는 에덴동산의 산에 올라간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내가 지정한 그 산에서 번제를 드리라"는 의미 속에 이러한 깊은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단순히 모리아산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사실상 창세기의 모든 내용이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을 오르는 장면에서 다시금 펼쳐지며, 동일한 성격의 질문이 던져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문: '누가 빛을 낼 것인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직면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었나요? 바로 "내가 하나님과 같아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모리아산으로 부르신 근원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제물을 네가 준비한 것으로 바칠 것이냐, 아니면 이 제물은 내가 준 것으로 바칠 것이냐?" 또한, "너는 네 능력과 힘으로 너 자신을 태워 빛을 낼 것이냐, 아니면 나로 인해 빛을 낼 것이냐? 너의 영광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들은 매우 유사한 맥락을 가집니다.
"내가 준비한 제물을 죽이고 그것을 태워 하나님께 바칠 것이냐?" 이 질문은 사실 여러분과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의외로 자주 마주하는 고민입니다. 신앙인 대부분의 문제 중 하나죠. 우리 모두는 나를 태워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자주 빠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 내 힘으로 하면 안 되지. 내 욕심으로 하면 안 되지." 이 점을 이해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하셔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헷갈려서 가만히 있으려 합니다. "가만히 있어야 해. 그래야 하나님이 하셔."
이것이 바로 워치만 니라는 분이 쓴 책에 나오는 '좌행참(坐行참)'이라는 개념입니다. 워치만 니는 복음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고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지만, 그가 가진 가장 큰 약점 중 하나가 이 '좌행참'이었습니다. "움직이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멋진 말 아닙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게 하라." 얼마나 웅장한 말인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가르침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무언가 빠져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게 하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이렇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태우는 행위와 같습니다. 가만히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가장 이해하기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불의를 목격했을 때 가만히 있는 것은 사실상 불의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의를 행하지 않고, 불의를 보면서 그저 참고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결국 불의에 참여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죠.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해서 나를 태우지 않는 것이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가만히 있는 것 또한 자신을 태우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인생으로 고백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곧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 주님의 말씀이 나의 인생이 되는 것을 걸어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나를 태우지 않는 방법'입니다.
이는 내 생각,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 내가 배운 상식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인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보는 눈,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방식,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는 방식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상식에 따라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지난주에 (만약 우리가 한국에 살았더라면) 전화통이 불이 나고 모두가 밤을 새웠을 만한 비극적인 사건이 한국에서 있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를 보며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이고, 할로윈 그거 진짜… 그것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할로윈을 왜 갔어? 거기 갔으니 당했지." 여러분은 모르실지 모르겠지만, 그곳에는 신자들, 특히 청년들도 꽤 많았을 겁니다. "할로윈 파티엔 왜 갔어?"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의 상식과 일반적인 양심이 주는 답입니다. (이 부분이 얼마나 중요하면 영화처럼 배경음악이 나올 정도겠어요?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이 나오면 배경음악이 깔리듯, 지금 이 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보세요.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여깁니다. "하나님도 그러실 거야. 하나님의 뜻대로 안 하고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있어야지 왜 그런 곳에 가서 그런 것을 하고 있느냐?" 이렇게 말하며 "그래서 당한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반적인 생각과 상식대로 행동하면서도 그것을 마치 신자다운 생각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저 일반적인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에 있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제자들에게 물었죠. "예수님, 사람들이 이렇게 죽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너희보다 더 죄가 많아서 죽은 줄 아느냐?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똑같이 망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적인 답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해야 할까요? 바로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회개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열심을 다해 배우고 알아야 하는지가 너무나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 지식, 그 이상의 의미
"성경 많이 알고 공부 많이 한 게 무슨 소용이야? 아는 대로 살지도 못할 바엔 차라리 아는 것만 행하는 게 낫지 않아?" 많은 분이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일리 있는 말처럼 들리죠.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깊이 알아도 그 정도밖에 안 되는데, 조금 아는 것으로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까요? 하루 10시간씩 성경만 읽어도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게 버겁다면, 하루 10분도 성경을 읽지 않고 '아는 것만 지키겠다'는 말이 과연 가능할까요? 우리가 하루 종일 말씀의 지배를 받아도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말씀을 배우는 일에 게으를 수 있겠습니까?
"아, 나도 이 정도면 알 만큼 알았다." 제가 좀 잘난 척을 해볼게요. (바울도 가끔 잘난 척할 때가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해 주십시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제가 성경을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제가 인격적으로는 여러분보다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성경은 제가 제일 잘 알죠. 그래서 이 자리에서 설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은 저보다 성경을 덜 아실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많이 알고 열심히 노력해도, 주님의 뜻대로 사는 일은 정말 길고 험한 여정입니다. 매일 회개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말씀에 대한 열정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깨닫고 알아가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전율해야 합니다. 단순히 "이 정도면 알고 이만큼 알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를 능가하지 않는 이상, 여러분은 성경 공부에 빠지면 안 됩니다. 저보다 더 나아지지 않는 한, 기도생활과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 일에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저보다 더 성장하셨다면, 그때 저에게 오십시오. 제가 기꺼이 휴가를 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저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며 "아, 저렇게 성경을 아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구경하라고 세운 것이 아닙니다. 저 목사를 밟고, 디디고 올라서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라고 목사를 주신 것입니다. 이 일을 반드시 하십시오!
세 번째 질문: '번제'의 의미와 죽음
마지막 세 번째 질문, 바로 번제에 대한 답 역시 여호와 이레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며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여호와 이레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시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라는 고백처럼, 번제에 대한 답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쉽게 말해, 번제는 '죽음'에 대한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삭, 즉 우리 인생 전체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무엇에 걸고 있는가? 그것이 무너지면 어떻게 되는가?" 두 번째 모리아산에 대한 질문은 에덴, 즉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었죠. 그리고 세 번째는 죽음에 대한 질문입니다.
당시 다른 문화권에서 드리는 제사나 심지어 오늘날 우리도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이 와서 음식을 받고 자손에게 복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합니다. 즉, 내가 무언가를 바치면 그 제물을 받은 존재가 기뻐하고, 그 제물만큼 나에게 되돌려줄 것이라는 생각이죠.
이러사는 제사 개념이 심지어 기독교 안에도 스며들어, 아브라함 시대는 물론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제사조차도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고, 심지어 예배에 대해서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는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깝게 느껴지죠. "하나님께 바치는 내 돈"이라고요.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에게 정말 '여러분의 돈'이 어디 있습니까? 주일학교 아이들이나 자녀들에게 물어보세요. "넌 누구 거냐?" 그러면 "하나님이 주셨지!"라고 답할 겁니다. 우리만 이 진리를 잊고 "내 돈이고 내 통장에 있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헌금'이라고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겠어요? 헌금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의 것이라면 죽을 때도 가져가야 할 텐데, 가져갈 수 없으니 애초에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번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무언가 제물을 바쳐서,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뭔가를 주시는 개념이 번제에는 없습니다. 번제의 진정한 개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 죽음 대신 제물이 대신 죽고, 그 제물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번제, 즉 제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삭과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죽음
그러니 무언가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삭이 죽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만약 이삭이라는 인물이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표상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였다면 그는 그날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죽음을 위해 오셨으니까요. 그러나 이삭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사람이었을 뿐, 그리스도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양이 등장한 것입니다. 언젠가 그 양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양이 나타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올라가 이삭을 바치려던 그 순간, 아브라함은 무엇을 고백하고 있었을까요? "죽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기에 양이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산으로 올라갈 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지금 올라간다. 내 아들과 우리가 함께 내려올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도 이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 (히브리서 11:17-19)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를 '죽은 자'로 여긴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이삭을 통해 이루실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때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마련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이죠.
우리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이 '죽음'을 보았다면, 이삭이 죽어야 했던 그 자리가 바로 우리 모두가 죽어야 할 자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모두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삭에게 꽂으려 했던 그 칼은 사실 우리의 심장에도 꽂힐 칼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삶을 쪼개고 번제로 태워져야 할 존재가 바로 우리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진리를 알았습니다. 우리도 물론 이것을 고백하게 되겠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순간에,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완전히 무너지고 이삭이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에도, 심지어 이삭이 그 자리에서 죽는 순간이 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구원의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과 부활
우리는 대개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내가 죽을 죄인인데 예수님이 나 대신 죽으셨다. 그러니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지 않고 영원히 부활할 것이다." 여러분, 죽지 않고 부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죽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함께 죽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침내 고백하게 된 그 하나님, 즉 영원하신 하나님, 영원한 그리스도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심지어 죽음의 한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거나 누군가에게 맞아 죽더라도, 그 모든 순간에도 나와 함께하시며 나와 함께 죽으시고, 나와 함께 죽으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부활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이 번제가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줍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그 자리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리가 아닙니다. 나도 함께 죽은 자리입니다. 이삭은 실제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났습니다. 죽음의 제단 앞에서 아브라함의 대답은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결국 그를 위해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이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후일에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나를 생각하셨습니다. 나를 기억하셨고, 내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분이 죽어야 했던 단 한 가지 이유, 그것은 바로 나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여호와 이레':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마련하셨을까요? 바로 그날, 우리를 뼛속까지 이해하시고, 우리의 상처와 아픔까지도 함께하셨으며, 죄와 욕심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날들을 돌보신 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이 여호와 이레였지만, 하나님의 대답이야말로 진정한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영원한 것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설령 인생이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올지라도 여호와 이레를 붙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에덴동산에서 타락했던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서 죄악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무너질 것 같고 때로는 쓰러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손을 들어 "하나님, 저를 잊으셨습니까? 주여,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주님을 부를 수 있는 이유 또한, 우리를 생각하시고 또 생각하시며, 우리를 아시고 또 아시는 바로 '여호와 이레'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답이 여러분의 답이며, 하나님의 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깊이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며, 끊임없이 생각하시고, 나를 눈동자같이 살피시며, 오늘도 돌보시사 죽음까지도 함께 가셨습니다. 그리고 부활까지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받은 은혜를 다시 고백합니다. 저희가 누리게 된 이 사랑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왜 우리에게 답일 수밖에 없는지를 나의 인생 속에서 지금 바로 이 순간, 나를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의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그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무너질 수 없는 우리의 인생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 감사합니다. 나의 눈물이 되어 주신 주님, 나의 한숨이 되어 주신 주님, 나의 상처가 되어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나의 부활이 되어 주옵소서. 나의 힘이 되시는 주님, 제가 주를 사모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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