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20절로부터 23장 1절 까지 입니다.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아멘.
사라의 믿음과 삶의 시작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며 이삭의 탄생과 모리아 산에서의 헌신을 함께 보았습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사라 또한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히브리서 11장 11절은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처럼, 사라 역시 믿음으로 '인정'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라의 삶을 어떻게 인정하셨고, 그녀의 믿음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삶과 더불어 사라의 인생도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23장 1절에서 사라가 127세로 생을 마감하기 때문입니다.
자녀 없음: 약속의 시작점이자 핵심
사라의 인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첫 번째 특징은 바로 자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 29~30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사래의 삶에서 하란, 어쩌면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가장 큰 어려움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전혀 다른 말씀을 주십니다. "너의 자손을 통하여 내가 복을 줄 것이고 그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될 것이다."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은 자손을 통해 큰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이 약속을 믿었기에 그 믿음이 귀하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분명히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너의 자녀가 많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때,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으니 그의 의로 여겨졌더라"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도 믿었고 사라 역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보면, 약속을 믿은 것은 분명하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약속의 핵심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 곧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보여주는 구원 역사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사라와 아브라함에게는 이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분명히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믿었지만, 자신들에게 자식이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 약속의 핵심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들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것이죠.
문제의 원인: 자기 의지
여러분, 우리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주셨고, 그분을 믿으며,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라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삶을 살지 못하고 어려운 순간에 직면할 때가 많죠. 그럴 때 우리는 흔히 우리가 뭔가를 잘못했거나 실수했다고 생각하며, 그 원인을 주로 두 가지에서 찾습니다. 첫째는 '내 죄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생기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문제를 '내 방법과 내 생각', 즉 '우리 손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문제를 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둘 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나'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사실은 자기를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대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께 무엇으로 갚을까'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했거나 잘못한 것이 있어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여, 더 열심히 섬기고, 선교하며, 충성하고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은혜를 갚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죄가 완전히 갚아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께 더 충성하고 섬기며 순종하고 잘해야만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이죠.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뜻과 가장 맞지 않으며, 우리 인간이 가장 흔히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인과관계를 따집니다. '내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하나님께 더 충성하고 무언가 더 잘하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결국 이 문제는 '내가 얼마나 잘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문제 해결의 방식: 자기 방식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종종 문제를 '내 방식'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내 죄 때문'이라는 생각에 갇혀 문제를 키우는 대신,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이때 사용하는 방법이 결국 자기 뜻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금까지 내 힘과 내 방식으로 문제에 대응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모든 것을 집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는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며 선교나 봉사,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교회에 충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방식은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여기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며, 어떻게 기뻐하시는지를 따라 살고 행동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자신의 힘과 의지로 모든 것을 하는 사람보다 때로는 더 많이 수고하고, 더 많이 애쓰며, 더 많이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과 발을 주신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더 애쓰고 힘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하며,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비슷할지 몰라도,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완전히 다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죄인이 죄인을 돕는 것이 무엇인지 알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갚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며 그것을 율법처럼 지켜 나오는 것을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법을 지키지 못해 힘들고 어려워할지라도, 사랑하는 분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붙들고 있다는 고백과 함께, 내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힘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시지, 온 힘을 다해 여러분의 의지를 관철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와 사랑으로 나아가는 삶
하지만 우리는 결심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많은 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기에 이제껏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모든 길을 열어주셨고, 모든 일이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은혜라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누구보다 부지런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는 말씀대로 살아서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율법대로 살거나 우리의 의지와 생각대로 행동한다면, 결국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포기하게 되고, '이 정도면 하나님도 감동하실 것'이라거나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나를 봐주셔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끊임없이 자신이 무익한 종임을 느끼며, 자신이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자신을 받아주실 것이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며,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기에 이 일을 한다는 것을 고백할 때, 여러분은 지치거나 피곤하거나 흔들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얼마나 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열심은 끝날 수 있지만, 사랑은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라와 아브라함의 인생에서도 드러나야 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끄신 길이었습니다.
고난의 의미: 죄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우리는 흔히 '내 죄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사라의 경우를 본다면, '내가 뭔가 잘못했거나 하나님 앞에 부족해서 아이를 낳지 못하고 이 고통을 겪는구나'라고 생각했을 수 있죠.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진정한 신자는 죄 때문에 고난을 겪거나 죄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인생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9장에는 시각장애인이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두고 '그의 아버지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 '그 자신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죠.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약속에 대한 오해와 인간적 해결 노력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삶의 어려움을 죄나 자신의 잘못에서 찾는 대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한 가지 지점에서 실패하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 주시는 분임을 모두 믿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붙드신다는 것, 심지어 십자가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도 다 알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어떤 한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자손이 복을 받고 큰 민족을 이룬다'는 그 복을 얻으려면 자손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거나, 혹은 그것이 자기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복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인생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조건이 해결되어야만 그 복이 자신에게 온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있어야 한다', '가정이 평안해야 한다', '자식이 잘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 행복이 이루어진다'는 식이죠. 하나님의 복이 이루어지려면 여러 조건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의 성공이든, 배우자의 변화든, 그런 것만 있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그것들을 해결하려 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는 엘리에셀이, 사라에게는 하갈이 그러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사라가 하갈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면, 자신 또한 온 천하 만민의 어머니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의 해결이 가져온 고통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될까요? 우리는 약속을 주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갈과 엘리에셀 같은 인간적인 대안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죠. 성경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갈을 통한 방법은 당시로서는 기가 막힌 해결책처럼 보였습니다. 사라가 생각했고, 아브라함도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방식들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만들었고, 예상치 못한 고통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라는 하갈로 인해 멸시를 받았고,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가는 곳마다 아내가 아닌 누이로 행세해야 하는 수치와 고통을 겪었습니다.
고난 속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사라를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라를 보호하셨죠.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라의 입장이 되어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내일 애굽 왕의 아내가 되기 위해 옷단장을 하고 기다립니다. 이 밤만 지나면 애굽 왕의 아내가 될 텐데,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아브라함을 얼마나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서러워했을까요? 이 밤이 지나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마치 유행가 가사처럼 애달픕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저는 그날 사라가 평생 흘릴 눈물을 거의 다 흘렸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서러워서 울고, 화가 나서 울고, 속상해서 울고, 아브라함이 미워서 울었겠죠. 그런데 왜 성경에는 그 기록이 없을까요? 저는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라는 당시 그 고통 때문에 울 상황이 아니라, 훨씬 더 놀라운 일 때문에 놀라야 할 여인이었으나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라가 진정으로 놀라야 했던 것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겪었던 수많은 아픔들로부터 하나님이 그녀를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겪던 수많은 고난에서 구원받은 것 때문에 기뻐하거나 울 것이 아니라, 자식이 없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가장 큰 복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야 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자식이 없었기에 두 사람은 성장하고, 믿음을 알게 되었으며, 결국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지 깨닫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성취: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
신약의 사도들은, 특히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사라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졌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으니라." 사라가 바로 하늘의 예루살렘에 속한 자이며, 그를 통해 태어난 이삭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 뒤, 다시 사라에게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사라의 인생 속에서 이루어진 가장 큰 복이었고, 하나님의 손길이었으며,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은 사건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심을 증명해 내신 것이었습니다.
고난 속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
여러분, 사라의 인생에서 자녀가 없다는 사실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지만, 사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주려 하신 가장 큰 복이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흔히 "이것만 있다면", "이것만 해결된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내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늘 조건이 붙습니다. '남편이 변하면', '아내가 달라지면', '자식이 잘 되면', '사업이 잘 되면', '조금이라도 돈이 더 있으면', '내가 좀 더 편해진다면', '마음이 안정된다면', '우울하지 않다면'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약속을 믿지만, 그 약속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가장 약점이라 생각하거나 가장 문제라고 여기는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가장 강하게 역사하시는 복입니다. 성경이 여러분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해결된다면 내 인생이 가장 복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자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갈과 엘리에셀, 롯 같은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했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통해 '자식이 없는, 잉태하지 못한 자'라는 사실이 가장 큰 복임을 알려주셨던 것처럼, 여러분과 저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머리에 지금 떠오르는 가장 넘기 어려운 산, 가장 건너기 어려운 골짜기가 사실은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가장 큰 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사라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깊이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복되는 두려움과 불변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두 번째로, 사라는 아브라함처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죠. 그는 이 세상이 악하여 자신을 무너뜨리거나 죽일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말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분명히 믿었지만, 그의 인생 전체를 보면 매 순간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사라가 25년간의 인생을 살면서 하란을 떠나 가장 먼저 겪은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애굽에 내려가 누이로 불렸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낳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비멜렉에게 가서 또다시 자신을 누이라고 말했던 점입니다. 25년이 지났는데도 똑같은 일을 겪은 겁니다. 여러분, 사라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어땠을까요? '내가 나성 남포교회에 25년을 다녔는데, 처음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네. 똑같은 문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똑같은 시험을 받고 있다면, 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내가 제대로 믿은 걸까? 나는 진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내 신앙생활은 어땠을까?'
우리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을 믿습니다. 당연히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셨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변화가 없어 보이죠. 정말 그럴까요? 사라는 자신이 누이가 되는 것이 아브라함을 구하는 일이라고 분명히 알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의 아들을 통해 이 온 세상이 구원받을 씨앗이 올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도전
사라가 왕 앞에서 자신을 누이라고 속였던 사건은 단순히 목숨을 구하려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만약 사라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자손, 즉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완전히 무산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도전이었던 겁니다. 사탄의 도전이든 인간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든, 이 사건은 후손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고, 이삭의 탄생을 막으려는 시도이자 결국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고난의 본질: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면에서 사라나 아브라함과 매우 비슷할 때가 많습니다. 사라도 겪었고 우리도 겪는 일이죠. 신자는 자신이 겪는 일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을 너무나 자주 인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히 자신 혼자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하나님께서 가끔 나타나셔서 기도를 듣고 도와주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플 때 주님을 찾고, 어렵고 힘들 때 주님을 바라는 건 좋은 태도입니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프고 힘들고 인생이 어려울 때, 여러분은 그것이 '내가' 당하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가 그 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즉 이 세상이 그리스도를 공격하고 있다는 점을 놓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은 여러분이 붙들고 있으며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는 그 그리스도를 놓으라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놓아라. 그리고 당신의 문제에 집중하라'고 말이죠. '네 문제를 보아라, 너의 아픔을 보아라, 네가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어하는지,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그 속상한 감정에 집중하라'고 세상은 여러분에게 속삭일 겁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예수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수를 핍박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너무나 잘 아는 바울이 다메섹 산상에서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죠? 그때 예수님께서 사울(바울의 당시 이름)에게 나타나셔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당시 사울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으러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고통을 받고 계셨던 겁니다.
우리는 병상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는 잘하는 것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때로 개인적인 문제나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기도합니다. 이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매달리는 건 당연합니다.
천국의 평화: 그리스도의 고통과 짊어짐
우리가 아프고 힘든 삶을 살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면, 비로소 '병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에 안겼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서 너무 고통받으니 천국으로 미리 부르셨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물론 이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천국에는 왜 병이 없을까요? 왜 천국에는 아픔과 눈물이 없을까요? 우리는 흔히 '당연히 천국이니까'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겪는 고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국에 병이 없는 이유는 이 땅에서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아프셨고 그 병을 친히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눈물이 없는 이유는 여러분의 모든 눈물에 주님이 함께하셨고 그 눈물을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고통이 없는 이유는 주님이 그 모든 고통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천국이라서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이 받아야 할 모든 고통과 아픔, 이 땅에서 성도가 겪었던 모든 고통을 함께 당하시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만이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아픔과 눈물을 함께 겪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변호와 흔들리지 않는 사랑
하나님은 사라를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사라만을 보호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보셨기에 주님은 위대한 편견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됩니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기쁘다고 하시고 사랑스럽다고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덕분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자주 예수님을 놓칠 겁니다. 고통 때문에 놓치고, 힘들어서 놓칠 것이며, 때로는 병 때문에 놓칠 것입니다. 아무도 그런 병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때로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힘든 순간이 올 수 있고, 가족에게 큰 고통을 줄 수도 있으며,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생각만큼 간단하고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 우리가 과연 예수를 기억할 수 있을까요? 그때 우리가 주님을 부를 수나 있을까요? 고통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그 순간에도 여러분은 과연 예수를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오늘 우리는 사라와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놓아 기억조차 못 하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우리와 함께 서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아버지여, 내가 그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그는 아버지의 딸이며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일어서실 것이고,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실 것이며, 아버지께 여러분을 변호하실 것이고,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실 것이며,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실 겁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사라의 마지막: 복된 삶의 증거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과 가장 가까운, 사라의 마지막 순간을 살펴봅니다. 사라는 12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었죠. 데라는 205세, 아브라함도 175세나 살았으니까요. 하지만 사라는 12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때 이삭의 나이는 37세였고, 이 하나뿐인 아들은 아직 짝을 찾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하나님, 이렇게 주신 자식을 제가 손주는 못 볼지라도 짝은 찾아주고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사라의 인생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자식을 낳은 것은 기뻤겠지만, 이삭이 37세가 되도록 결혼하지 못했으니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겁니다. '그때는 원래 오래 살았으니 늦게 결혼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홍수 이후에는 대부분 30세쯤 첫 자식을 낳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그전에 이미 결혼했다는 의미죠. 아직도 이삭의 짝을 찾아주지 못했으니, 사라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라의 127년 인생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가 누린 햇수가 127년이라." 이 표현은 그녀의 인생이 아름다웠으며, 충분히 복된 삶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일찍 간 것도, 늦게 간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서 가장 복된 인생을 살았고 그 연수를 누렸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일이며, 사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복된 삶의 숨겨진 의미: 하나님의 예비하심
사라는 우리가 보기에 하나뿐인 아들을 홀로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꼬물거리는 손주를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하지만 볼 수 없었죠. 아들의 결혼식이라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것 또한 볼 수 없었습니다. 외아들로 태어난 아들을 홀로 두고 가는 상황임에도, 하나님은 그녀의 인생을 복된 인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때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설교를 준비하거나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깜짝 놀라는 지점이죠.
왜냐하면 사라가 죽은 23장 바로 앞인 22장에는 엉뚱한 족보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이 낳은 자식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당신의 형제 나홀이 많은 자녀를 낳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그 내용을 기록했는데, 12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12명! 우리는 다 알다시피 '큰 민족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야곱도 12명이었고, 이스마엘도 12명이었죠. 나홀의 집안이 크게 번성했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나홀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 12명의 아들 중에 한 여자가 등장합니다. 딸이 아니라 손녀딸인데, 그 손녀딸의 이름이 바로 리브가입니다. 리브가는 누구입니까? 바로 이삭의 아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전 인생이 복되다고 하시면서, 동시에 그녀에게 이삭의 아내를 준비하고 계셨음을 22장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여러분과 저의 인생이 왜 복된 인생이냐면,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이 눈앞에 다 펼쳐져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어떤 선한 것들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으니 하나님께서 이것 정도는 허락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이루어져서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죽을 때 평안하게, 모든 마음과 생각대로, 원하는 날에 멋있게 간증이 될 정도로 편안한 얼굴로 죽을 수 있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복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복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진 하란에서 하나님은 이삭의 아내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사라의 인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준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라의 인생이 왜 헤브론에서 끝났는지 알게 됩니다. 헤브론은 약속의 땅입니다. 성경은 그녀가 약속의 땅에서 인생을 충분히 누리고 죽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인생을 위해 하나님은 그녀의 아들의 며느리까지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손자도 없는 그 아들을 위해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믿음 안에서 죽게 됩니다.
월드컵과 신앙: 진정한 열정의 대상
우리 모두는 2002년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기억할 겁니다. 지난주에도 우리가 포르투갈을 이겼다는 소식에 모두 기뻐했죠. 축구를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이들이 환호했습니다. "어떻게 저런 일이!" 하며 감탄했고요. 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해 봅시다. 축구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어떨까요? 그저 넓은 벌판에 네모난 골대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공을 넣어야만 점수를 준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옆에 빈 공간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거기에 공을 차 넣는다고 왜 그렇게 기뻐하는 걸까요? 공을 넣는다고 떡이 나오거나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좋아서 거의 미칠 지경입니다.
저는 가끔 어떤 분이 제게 "목사님, 골프를 치시면 참 좋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골프가 좋은 운동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아니, 그 조그만 홀에 작은 공을 넣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들어가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다시 꺼낼 공인데!' 냉철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저는 지금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의 죽음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월드컵만도 못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인생이 바로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쳤습니다. 그것도 대단한 말이죠. 그러나 지금 성경은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절망 속 하나님의 일하심: 사라의 증거
25년 동안 사라는 잘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애굽 왕으로부터 그녀를 지키셨고, 아비멜렉을 두려움에 떨게 하셨습니다. 사라는 미처 몰랐어도 하나님은 이삭을 계속 준비해 오셨고, 이삭을 낳은 후 37년 동안도 그를 지키셨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받았다"고까지 기록합니다. 모리아산에 올라가 아들을 잃을 뻔했거든요.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이삭을 지켜주셨습니다. 사라는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온 민족에게 어떻게 복을 주시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리브가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도대체 무엇으로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가장 절망하는 그 순간과 그 일들, 나 자신에 대해 가장 절망하고 있는 그 부분을 통해 하나님은 가장 큰 영광과 복을 만들어 내십니다. 내가 가장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부분, 내 삶 속에서 가장 약하다고 생각하는 부분, 고쳐도 고쳐지지 않는 것들, 바꾸고 싶어도 바뀌지 않는 것들... 아이를 낳지 못했던 한 여인,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한 여인, 아무것도 소망할 수 없어 힘들어하는 한 남자.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 가시고 이루어 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정말 힘들어서 '내 인생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내가 가장 낮아졌다'고 생각했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비멜렉을 만나게 됩니다. 더 낮은 자리로 가야 하는 것이죠. 그러나 결국은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약속을 믿었지만 자신의 하루를 '내 것'처럼 살았던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을 부르지만 애절하게 부르지는 않았던 그들에게, 우리는 어떠합니까? '내 인생이 너무나 편안해져서 하나님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아지는' 우리 인생 속에 있습니다. 이 풍요로운 미국에서 팬데믹을 지나면서도, 오히려 팬데믹 때문에 고생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는 그 팬데믹이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신앙이 편해진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가 어떤지는 팬데믹을 겪으며 아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하나님의 자녀인지, 하나님을 정말로 섬기는 자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절실한 분인지를 팬데믹을 지나면서 너무나 분명하게 알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예배가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과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비하심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회를 안 나가도 벌을 안 받는 것 같고, 예배 시간에 화장실에 다녀와도 하나님이 잘 모르시는 듯합니다. 누워서 예배를 해도 편한 대로 참석해도 하나님은 그저 참석한 것만으로도 감격하시는지 아무 말씀이 없으시죠. 교회를 가지 않고 피곤하면 '오늘은 그냥 이렇게 해도 누가 벼락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떻게 우리가 예배해야 할까요? 아니, 어차피 천국에 갈 텐데 뭣하러 고생하며 예배해야 합니까? 여기까지 왜 오셨습니까? 집에서 편히 TV를 보시지 않았고요?
왜 오셨을까요? 여러분은 무엇이 신앙이라고 정말 생각하십니까?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조차 잊어버리고,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할 때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리브가를 어떻게 준비하고 계셨을까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흔들리는 신앙 속에서 하나님은 다시 여러분을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하시고 계실까요? 하나님은 도대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실까요? 어디까지 참고 계실까요?
여러분, 우리는 기대감마저 사라지고 하나님은 너무나 멀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앞으로 경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내년에는 더 어려워진다는데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은 정말 바보 같으신 하나님은 리브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실까요?
여러분, 답을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좋으신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진정으로 사랑하시기에, 여러분을 위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살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리브가를 준비하셨습니다. 사라의 인생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사라는 몰랐을 겁니다. 어쩌면 리브가 이름조차도 몰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잊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햇수를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믿음의 증인들, 우리의 응원단
사라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았기에 인정받았습니다. 히브리서는 사라가 바로 우리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녀가 믿음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우리의 증인으로 서 있고, 여러분은 지금 경기장에 서 있습니다. 그녀도,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세도 모두 그 경기장을 뛰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경기를 뛸 때, 관중석에는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앉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여러분이 뛰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뛰어보았기 때문에 다 압니다.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숨이 가쁜지, 얼마나 눕고 싶은지, 얼마나 이 경주를 빨리 끝내고 쉬면서 기쁨을 만끽하고 싶은지, 얼마나 이기고 싶은지,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들도 뛰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분을 위해 앉아서 노래를 불러주고 응원해 줍니다. 그들은 "힘을 내라, 더 열심히 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들의 구원은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으라고 응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들어야 할 응원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경주를 완주하며 그리스도를 붙들라
내가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내가 상상도 못 하는 그 인생 속에서도 주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시고 만들어 가시며 결국 이루어내시는 그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이 경주는 반드시 하나님의 승리로 끝난다고, 예수를 붙잡으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이 경주를 끝까지 달려가 주십시오. 사랑으로, 은혜로 달려가 주십시오.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이제 남은 여러분의 인생까지도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짊어지시는 인생임을 깨닫고 그렇게 나아가 주십시오.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핍박받는 것이 아니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혼자 병상에서 아파하는 것이 아니며, 여러분의 육신은 혼자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혼자 우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공격을 받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도전을 받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유로울 것이며,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이렇듯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정받은 사랑하는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과 함께 서 있습니다. 저희가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더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으니, 성경 말씀대로 그들은 우리가 없으면 온전함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이름을 알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을 주님 붙드시고 지키시며,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그들의 눈물 속에 주님의 눈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셔서, 그들이 누릴 위로와 기쁨을 오늘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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