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의 비유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13:24-30)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알곡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교회 안의 문제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도 매우 잘 알려진 말씀 중 하나입니다. 그만큼 이 비유의 해석을 둘러싸고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오해도 뒤따랐습니다. 이 논쟁이 어려웠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해석의 문제가 단순히 비유의 정확한 의미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건들과 깊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바로 도나투스 논쟁입니다. 이 논쟁의 배경은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되기 직전, 곧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박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였고 그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성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되자 이전에 배교했던 사람들을 교회가 다시 받아들일 것인가를 두고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도나투스파는 결국 그들을 다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았고 더 나아가 배교한 성직자가 집례한 세례까지 문제 삼으면서 교회 안에 심각한 분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시대 한가운데로 돌아가 이 논쟁의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그것은 충분히 정당성이 있어 보이는 논쟁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가 잘 아는 교부 어거스틴이 이 논쟁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명료한 해석을 제시하며 논란을 잠재우고자 했습니다. 그의 결론은 이러했습니다.
“모든 세례와 성례는 그것을 집례하는 자의 능력이나 인품, 혹은 선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근거한다.”
그러나 박해의 시대에 순교까지 각오하며 신앙을 지켰던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어거스틴의 이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배교자들을 참된 성도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으며 결국 교회는 분열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도나투스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했던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였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교회 안에 함께 있을 수 있으며, 이 비유의 말씀처럼 그것들을 그대로 두고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대목에서의 어거스틴의 해석은 본문 자체에는 꼭 들어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 안에서 분명히 “밭은 세상”이라고 직접 해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곧 이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몰랐던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밭’을, 이어지는 41절의 ‘그 나라’와 연결하여 해석했고 그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또 하나님의 나라를 곧 교회와 연결해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이 비유에 대해서는 다소 부적절한 해석을 내렸을지라도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 자체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받은 사람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두렵게 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에 등록해 놓았다거나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하며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참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거스틴의 해석은 교회를 오가며 머무는 많은 사람들을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는 면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본문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고자 하신 핵심과는 분명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밭은 분명히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세상 가운데에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과 악한 자의 자녀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의 중요한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신자들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시는지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능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 가운데 알곡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창세 전에 계획하신 그 뜻, 곧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우리 안에 넘쳐흘러 우리로 하여금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곡인 우리가 이 땅에서 가라지로 인한 갈등과 고난 앞에 불평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능력 없고 변덕스러운 우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하는 자로 세워 가시는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알곡과 가라지가 심겨진 그 밭은 세상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 속에 함께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알곡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담대히 알곡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눈에 보이는 승리를 주는 메시아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와 섬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대한 메시아
이제 먼저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만일 이 비유를 듣는 사람이 농부였다면 이 말씀은 쉽게 납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농부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일상적인 일 가운데 하나는 김을 매는 일이며 그 핵심은 가라지를 뽑아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벼농사에서도 ‘피’라고 부르는 잡초를 제거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벼와 생김새가 거의 같아서 구별하기가 어렵고 또 제때 제거하지 않으면 벼에 알곡이 제대로 맺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가라지를 뽑아내기 위해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 속 농부의 행동은 농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함께 내버려 둔다는 것은 농사를 망치는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이 비유가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보다 넓은 의미의 배경입니다. 이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이미 살펴본 내용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6-19)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공격했습니다. 주님께서 실제로 무슨 일을 하셨는가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예수님을 싫어했고 거부했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사람들이 거절할 뿐 아니라 죽이기까지 했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를 거부합니다.
이것이 이 비유가 나오게 된 첫 번째 배경입니다. 회개를 선포한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신 예수님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무관심과 비난으로 반응했습니다. 자신들은 의인이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면 이것은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처럼 예배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철저하게 신앙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자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고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무엇이 우리와 닮아 있습니까? 올바른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았다는 우리의 신분도 그저 하나의 이론처럼 여겨 버립니다.
세상에 속해 있었고 마귀의 자녀였던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대해 본래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보듯, 그들은 복음을 자신들과 상관없는 일처럼 흘려보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왜 그분을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분명한 것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의 모습이 예수님과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원한 메시아는 자신들이 무시하고 외면하던 연약한 자들을 상대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이루지 못하는 것을 대신 이루어 주고, 강한 자들을 굴복시키며, 세상의 부와 권세를 되찾아 다윗의 영광을 회복시켜 줄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신들이니 메시아가 오시면 부와 권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행복하게 살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나타나 병든 자와 부족한 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 사랑과 용서를 전하고 계시니 그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기대가 이스라엘에게만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우리 역시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바로 그런 능력의 주님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누구나 선택 없이 이 땅에 태어나 자라면서 세상의 원리와 가치관에 익숙해져 갑니다. 그리고 그 원리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가도 끝내 힘겨워 지치고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어디를 향합니까? 이스라엘이 바랐던 것처럼 그 싸움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매달립니다. 적어도 부당한 대우와 억울한 일만큼은 당할 수 없다고 여기며 주님을 다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승리를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와 억울함을 겪게 하시기도 합니다. 바로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같은 상황 속에서도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고백을 하게 만드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어떠한 형편 속에서도 감격과 감사로, 또 주님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가슴 저린 눈물로 남은 길을 담대히 걸어가게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배경은 이렇습니다. 보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이 비유는 다른 두 비유와 함께 묶어서 볼 수 있습니다. 곧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입니다. 이 두 비유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처음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룩이 밀가루 속에 섞이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고, 작은 겨자씨도 싹이 나고 자라 큰 나무가 되면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게 됩니다.
이 두 비유의 핵심은 처음에는 보잘것없고 눈에 띄지 않던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 눈에 보이는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사역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늘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여러 비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곧 권력과 힘으로 자신들이 꿈꾸던 세상 속의 나라가 아니라 겨자씨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런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주님은 그를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주님께서 반드시 하셔야 하는 일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던 예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메시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보잘것없고 눈에 띄지 않던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라면 우리의 인생에서 마땅히 드러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백성
그렇다면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차이는 무엇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죽으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무엇보다 이 세상 나라는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정치력과 경제력, 군사력을 두루 갖추어야 인정받고 다른 나라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보잘것없고 귀히 여겨지지 않는 아주 힘없는 모습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그 나라는 힘없는 아기 예수께서 구유에 누우신 모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비유의 말씀처럼 그 나라는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아들들인 알곡과 악한 자의 아들들인 가라지가 함께 살아가는 가운데 드러나는 나라로 묘사됩니다. 우리의 상상만으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한다면 어쩌면 결코 들어가 살고 싶지 않은 나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능력을 갖춘 강대국의 시민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 형편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죄의 삯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어떤 것으로도 참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삶의 끝자락에서 “헛되고 헛되다”는 고백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힘겹게 달려왔는가 하는 후회와 안타까움만이 우리의 현실을 대변합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에덴에서 쫓겨난 뒤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세워 온 나라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나라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어느 날 말씀이 내 마음을 뜨겁게 하고 삶에 지쳤던 마음이 위로를 받아 드디어 내가 살 길을 찾았다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믿게 되고 교회를 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 개인이 성도가 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회복된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 된 우리의 신분과 더불어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 생명을 얻어 이 땅에서 참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를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1-14)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그러므로”라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하나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막힌 담이 허물어졌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함께 지어져 간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서로 원수 되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십자가로 말미암아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이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백성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반대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정반대되는 영적인 무지의 상태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영적 무지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는 고난 가운데서도 악을 쓰며 견뎌 냅니다. 생명이 없는 세상에는 참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참된 안식과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여전히 바라고 원하는 나라와도 닮아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것에 따라 선택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이 힘든 여정에서 승리하게 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세상의 삶의 원리에 따라 법과 정의를 위해 나름대로 양보도 하고 원칙도 지키며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대우와 판단이 결국 나를 맞아 주기를 기대합니다. 적어도 나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한 일과 내가 쌓아 온 의 때문입니다. 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쉽게 세상의 원리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성육신의 삶의 여정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신분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끊임없는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 어떤 대우도 요구하지 않셨습니다. 원망도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아버지 앞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이 힘든 상황과 일들이 어서 바뀌어서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구합니다. 혹여 부당한 일로 내게 해를 입힌 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기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결코 잘못된 기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주님의 기도와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변화나 세상적인 것들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건강이나 부, 내가 이루어 놓은 것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 하나만큼은 끝까지 지키고 싶어 합니다. 적어도 그것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을 건드리는 자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화가 납니다. 분노가 차올라 일상생활에까지 지장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것들과는 다른 것들로 자기 영혼을 지치게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들로, 적어도 붙잡고 싶은 것들로 자신을 채워 가며 살아가는 우리와 달리, 예수님은 세상의 것들을 하나도 두르지 않으신 채 영혼의 충만함 가운데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셔서 그 영혼의 충만함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이제 보이십니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 가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방식의 메시아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던 심판의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없어질 가라지와 세상 것들로 우리의 가치를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름, 그리고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자녀들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도록 그 완성을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도 우리를 이 세상 가운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우리의 분열과 시기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의 이익을 바라는 이기적인 욕심입니다. 자기만이 옳다고 인정받아야 하고, 잘한다고 칭찬받아야 하며, 무시당하면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하여 남은 제자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 누구도 자기 자존심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섬김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귀하심, 의로우심과 영광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저주의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십자가가 되어 우리에게 복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예수의 몸으로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처소로서 그 충만하심으로 우리를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생각해봅시다
*세상 나라의 삶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성육신의 삶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고백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알곡과 가라지의 차이는 결국 생명의 차이이며, 그 생명은 사랑과 용서의 삶으로 드러납니다’
생명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알곡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얼마나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구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알곡과 가라지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생명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자와 떨어져 있는 자의 차이입니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안에 차고 넘치게 하시니 우리는 그것으로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그들은 사망의 권세 아래서 아무리 악을 쓰며 살아도 결국 헛되고 헛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주장하며 이루어 낸 것들이 아무 쓸데도, 아무 가치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풍속을 전혀 무시하고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우리는 마태복음 5장 13절과 14절의 말씀처럼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그 영광을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소금과 빛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 속에서 피조물과의 모든 관계 가운데 자기 우상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라 모든 것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다스림’의 참된 의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으로 더럽고 추악한 우리 가운데 오셔서 그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 안에 충만히 채우시기 위해 우리와 연합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야 할 것은 미움도, 시기도, 복수도, 자랑도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인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용서여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세상의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생명을 얻어 알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3-15)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우리가 살아가지만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그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가득하니 우리는 그것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셨다면 우리도 그 가라지들과 같은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성공하는 것, 안심하고 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넓은 길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내 안에 그분이 계시므로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이 땅의 삶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에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면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알곡이라는 이름을 단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한 대가로 주어지는 정당한 대우나 보상 정도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본래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었던 이름입니다. 그것을 참으로 알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의지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가라지들처럼 결국 영원한 하나님과의 단절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회복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사모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들을 먼저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을 말씀 앞에서 바꾸십시오. 그래야 내 안에 있는 그 생명이 역사하십니다. 상처가 많으시다고요? 무슨 상처를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탐욕으로, 우리의 자랑으로, 우리의 의로 말미암아 더 깊어지고 굳어져 온 상처는 아닙니까?
성경은 상처만 바라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직도 죄 가운데 살아가는 나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무엇을 받은 자들인지를 보라고 말합니다. 곧 사랑의 열매로 충만한 하나님의 속성이 내 안에서 역사한다면 우리는 결국 상처 때문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엎드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너 자신을 바라보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너희는 지체 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의 상처와 나의 눈물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와 자매, 곧 그들의 상처와 눈물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지니셨던 아픔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향한 끝없는 사랑의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 사랑과 용서만이, 하나님의 영광의 충만함만이 우리 안에 가득 차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 완성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세상은 핑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심판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표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생각해봅시다
*생명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랑과 용서는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아직도 나보다 더 힘든 삶 가운데서도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십시오. 그들은 단지 이 힘든 시간을 끝내고 싶어서만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너무도 오묘하여 우리의 지혜와 생각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기에, 그 주님을 더 보고 싶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말이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지, 연이어 찾아오는 불편함 속에서도 왜 그토록 사랑하고 싶은지, 왜 주님이 더 알고 싶고, 또 그 주님의 자녀들이 더 알고 싶은지, 바로 그것으로 우리의 기쁨은 넘쳐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이루어야 할 편안함과 부와 명예와 권력만이 우리의 목표라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것들은 결국 사라지고 말 찰나의 단맛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끊임없이 목마르게 하지 않고 오히려 설렘을 주며 가슴 벅차게 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과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에 취해 보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직도 이 땅에 알곡과 가라지를 함께 남겨 두신 이유입니다.
가라지는 가라지일 뿐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빼앗거나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서 친히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를 주관하시며, 그분의 계획 가운데 추수의 때를 기다리시고, 여전히 그분의 열심과 의지와 간섭으로 우리를 아버지의 처소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자라가게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내용이 우리의 시간 속에 가득 채워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복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우리만이 누릴 수 있는 평안이 아니겠습니까? 세상도, 그 가라지들도 맛볼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복을 누리는 자들이 어찌 썩어 없어질 보이는 세상의 가치와 편견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풍속은 우리를 속입니다. 손해 보지 말라고, 네 것을 챙기라고, 남보다 앞서가야 한다고, 그래도 사는 동안 이것만은 가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부추깁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의 화려함과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것들 속에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 앞에 순간순간 닥쳐오는 모든 상황과 형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로 기쁨을 삼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 성공을 기쁨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더욱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리고 비록 힘에 겨운 시간들을 지나게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라 가는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과 용서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억울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상처 때문에 죽겠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공평하다고만 외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신 “괜찮다, 너를 위해 내가 질 수 있다, 손해 볼 수 있다, 어차피 내 것은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입으로, 내가 가진 손으로, 내가 가진 다리로, 내가 가진 물질로, 내가 가진 명예로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네가 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질 수도 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억울함에 사로잡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협박당하며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와 욕심 때문에 새 생명을 가진 자로서 누려야 할 그 나라와 그 생명과 그 사랑과 그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더욱 애가 타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너희는 그런 자들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세우십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부름받은 특권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는 어떠합니까? 내 옆에 있는 아내와 남편과 자녀와 이웃 그리고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 곁에 주신 그 사람들을 위하여 하루가 벅찰 만큼 마음을 쓰고 계십니까? 사랑과 용서로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계십니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데도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그들을 위하여 애타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알곡인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랑과 용서를 배우게 됩니다.
사랑과 용서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보여 주신 실제적인 삶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으로 이 신앙의 여정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삶 속에 마땅히 채워져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와 감정까지도 감수하시며 드러내신 그 사랑과 용서가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런 경험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라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무엇이 달라져야 하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 나라의 삶의 원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 곧 새 생명을 얻어 죄를 미워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와 사망 아래에 있는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사는 자들은 자기 영혼을 갉아먹으면서도 자기 영광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20-22)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였다면,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교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어떠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 속에서 감사와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육체의 고난도 마땅한 것으로 여기며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들은 바니라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1:29-2:5)
여기서 “품으라”는 말은 단지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나타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의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삶 가운데 순종하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은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는다”는 말씀은, 곧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에 항복하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삶의 실제에서는 가라지들처럼 아버지와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생각해봅시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내용이 알곡인 우리에게 채워지려면 지금과는 무엇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본래 가라지였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알곡이 되어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밭과 타락한 세상
그러므로 이 비유는 알곡은 알곡대로,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나중에 거두신다는 단순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를 설명하는 깊은 뜻이 담긴 비유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앞에서 설명드렸듯이 씨를 뿌린 밭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지, 또 성경이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이 세상 속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비유에 나오는 밭을 주인이 “내 밭”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이 밭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곧 헬라어로는 온 세상을 가리키는 ‘코스모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 곧 온 우주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밭이라는 말은 교회만을, 혹은 구원받은 신자들만 거하는 좁은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소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하나님의 밭에 악한 자가 와서 씨를 뿌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과 힘든 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진리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 지으신 후, 그 지으신 세상을 보시고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은 선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이 선하기만 한 세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우리는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류를 대표하던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가운데 악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주인의 밭, 곧 주님께서 친히 지으신 그 선한 밭에 선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두셨습니다.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도 선하게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전 설교에서 살폈듯이 이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세상에는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세상은 결국 악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의 배경은 창세기 초반,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온 사건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단순히 교회 공동체만을, 혹은 잠시 있다가 흩어질 이스라엘 나라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 역사 전체를 배경으로 두고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이 비유를 처음부터 다시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과연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알곡이 있습니까?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스스로를 알곡이라고 여기십니까? 창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이 이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간섭하지 않으신다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알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가라지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계획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
다시 말하면 우리 모두는 가라지입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알곡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알곡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놀라게 되는 지점입니다. 여러분은 창세기에서 에서와 야겁의 이야기를 읽을 때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셨는가 하고 궁금해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스펄전 목사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택하지 않으신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 야곱을 구원하셨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며, 그것이야말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말씀이 이해되시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대로 두셨다면 우리는 모두 아무 소망 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 없이 야곱을 사랑하사 구원하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여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도무지 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의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라지임은 분명한데 성경은 알곡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죽음에는 육체적 죽음과 영적 죽음 그리고 영원한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죽은 자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곧 생명이 끊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을 지나 마침내 영원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난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로 다시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잠시 살다 지나가는 이곳에서조차 우리는 이제 새 생명을 가진 자로서 이 세상 나라의 통치 아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비유는 알곡과 가라지의 삶의 원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인정받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통치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생각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가 가라지라는 말씀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자격이 없는 자에서 자격이 주어진 자의 특권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알곡의 성장은 좋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지키시며 자라게 하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상한 심령으로 사는 자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가라지와 함께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 반대되는 이 땅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라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교육받고 사람들과 어우러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가운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어쩌면 지배를 받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흐름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에게 소외되기도 하고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삶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회의감이 현실 속에서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4장 26절 이하를 보면 우리가 이 땅에 심겨 자라고 열매 맺는 일이 결국 우리 스스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열매 맺고 자라 가는 것은 세상의 교육과 가치관과 기준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자라나게 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막 4:26-29)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막 4:27)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씨를 뿌리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처음에는 싹이 나고, 그다음에는 이삭이 생기며, 마침내 충실한 곡식으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자라감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의 삶을 따라 제자로서 그 길을 걸어가는 일입니다. 싹과 이삭은 장차 충실한 곡식으로 열매 맺게 될 현재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매우 작은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완성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희미하게 보이고, 세상의 삶의 원리가 더 강하게 우리를 붙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추수의 때가 이르면 그 나라는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입니다.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듯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따라 수고할 때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우리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자들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따라 수고하는 자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보다 더 철저하게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 것을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생명까지 내어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아무 소용 없다. 당신이 아무리 사랑하며 살아도 결국 헛되다”라고 비아냥대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질투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정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사랑과 용서라는 마음과 행위 그 자체만이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7)
시편 51편은 나단을 통하여 비로소 밧세바와의 일이 죄였음을 깨닫게 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자인지를 통회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전능하시다고 고백하고 그분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바로 이 상한 심령으로 아버지를 찾는 것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제사이며, 곧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야 할 인생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진정 아버지의 긍휼이 잠시라도 없으면 살 수 없는 자들입니까?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상한 심령의 관계입니다. 세상은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정할 수 있습니다. 생명이 내 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라고 선포하신 것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작용합니다. 바로 내 안에서, 또 내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사이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죄에 쉽게 무뎌집니다. 우리는 죄를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그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감수하셔야 했던 것이라면, 우리는 죄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우리 스스로 이겨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나단을 통해서 비로소 마음속에서 품었던 것과 행동으로 범했던 죄가 자기 영혼을 얼마나 파멸시키고 있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전까지 그는 주위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죄에 무뎌져 있었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나단을 통해 그는 비로소 죄의 유혹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였음을 깨닫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날마다 상한 심령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그분만을 의지하여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길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세워 놓은 왕궁 안에서 자신이 가진 힘으로 악을 쓰며 자기 영광을 위해 무너져 갈 뿐입니다. 혹시 우리도 자신이 세워 놓은 가치관과 신념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용서가 아니라 세상의 이론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면 과연 우리가 하는 일이 누구에게 영광이 되는지를 주님께 묻고 회개해야 합니다.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세상이 결코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에 따라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고백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재창조입니까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여 자라지 못하게 하고 열매 맺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것이 가라지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은 가라지에 속한 삶이 아니라 알곡에 속한 삶입니다. 그럼에도 동시에 신자의 삶은 이 비유의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끊임없이 도전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흔들고 공격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는 환난과 고통과 풍파가 언제나 함께합니다.
이 사실만 놓고 본다면 우리는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외형상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또렷이 기억하는 9·11 참사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에서 가장 높던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건물 안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신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만이라도 건져 내어 구해 주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만일 이 LA 땅에 지진이 일어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믿는 사람의 집은 하나도 흔들리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의 집만 다 무너진다면 우리는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 계시는구나” 하며 감격하고 감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가 진정한 신자라면 어쩌면 그 반대의 마음을 가져야 맞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죽어도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이 무너지더라도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집은 남겨 두셔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기회를 얻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더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로 인한 특혜를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데도 세상의 나쁜 일들을 피하게 해 주시지 않고 보호조차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런 하나님은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이 세상의 어려움을 함께 겪습니다. 복음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에 속해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어떤 화끈한 보상을 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로 그것을 설명해 주는 천국 비유가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겨자씨는 심기만 하면 엄청난 것이 나올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일이 생겨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 땅에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고 부자로 살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적은 하나님께서 그런 바람을 들어주시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바로 그것이 신자의 삶에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모든 재난이 우리를 피해 가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늘 거뜬히 회복되어 인생이 순탄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를 믿어서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야말로 우리가 정직하게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어쩌면 예수 믿는 우리는 상당히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종교와 모든 신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것을 약속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따랐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는 그들을 위하여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사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를 내려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그 하나님을 두고 다른 신을 섬길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때에, 그들이 원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나를 먹으면서도 고기를 원했고 고기를 먹으면서도 애굽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그런 마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단지 눈에 보이는 자신의 필요만을 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지 않으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면 마찬가지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코로나에 감염되더라도 믿는 사람만큼은 걸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좋지 않은 일이 우리에게 생기면 그 이유를 우리의 행위에서 찾으려 합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아서, 요즘 성경 읽기를 소홀히 해서, 혹은 주일 예배를 빠졌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잊지 않으시고 징계하시는구나 하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따라 그 결과로 보상이나 벌을 받는다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만한 벌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재창조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는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일을 단순히 행위에 따른 보상과 처벌의 틀로만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정죄함이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의 유혹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욥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경은 욥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큰 고난을 받게 됩니다. 그때 친구들이 찾아와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네가 잘못했으니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께 회개하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욥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그런 자가 아닌데, 왜 하나님께서 이러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찾아온 엘리후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때 욥이 그의 말을 곧바로 알아들었겠습니까? 아니었을 것입니다. 욥은 여전히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친구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네가 잘못했으니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욥도 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납니까? 주님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따져 묻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여기가 참 놀라운 지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창조 세계 앞에 다시 세우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발전해 가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내 자녀로 다시 빚어 가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제야 욥은 그 말씀을 알아듣고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아직도 알곡들을 살게 하시며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를 이런 자로 다시 빚어 가시기 위함입니다. 이 알곡들의 인생을 말입니다. 결국에는 그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귀로만 듣던 아버지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통하여 눈으로 뵙는 창조주의 자녀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재창조입니까. 결국 아버지의 자녀로서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이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인생의 형통이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그 고통조차도 아버지의 사랑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그 고통조차도 아버지께서 자기 삶 속에 개입하셔서, 자신을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가는 자로 빚어 가시기 위한 것임을 진심으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욥은, 하나님의 뜻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혜로는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가슴 속에 지혜를 준 자가 누구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욥 38:36)
욥은 고난 가운데서도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자신은 틀리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는지를 말씀해 보시라고 따집니다. 바로 그런 욥의 어리석은 질문 앞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 하나님의 이 대답을, 욥은 어떻게 깨닫고 결국 주님 안에서 복된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을까요?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욥 40:8)
욥은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결코 자신이 다 이해할 수 없는 신실한 뜻임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께 지음받은 존재라는 사실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 곧바로 벌을 내리시기보다 오히려 욥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해야 할 일은 싸움도 아니고, 미움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과 기도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사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심판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긍휼을 구하는 것이 자녀 된 도리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에게 오는 유익이 세상이 주는 것들과 다르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가라지에서 알곡으로, 진정한 신자가 되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이 세계의 주인이십니다
가라지가 어떤 때는 알곡보다 훨씬 더 화려해 보이고, 세상이 훨씬 더 좋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주십니다.
“이 세상이 너의 편이 아닌 것 같고, 너를 밀 까부르듯 마구 흔들어 대며, 세상에서 환난과 어려움이 네 삶 속에 계속 일어나고 있을지라도 네가 뿌리내리고 자라고 있는 곳은 바로 내 땅이다.”
우리가 서 있는 땅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주님의 세계이며 주님의 것입니다. 곧 주님의 밭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난리를 치고 우리를 괴롭히며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우리의 인생 속에 던져 놓는다 해도 이 모든 세상과 나의 모든 인생을 다스리는 분은 바로 이 밭의 주인이시며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인생은 요동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흥분시키고 단번에 납득하게 만들 만한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고 여느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대단한 일을 행하게 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 하며 감격하고 감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기도하였어도 그 기도가 쉽게 응답되지 않는 것 같고 그래서 우리는 낙심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뜻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세상이 여전히 가라지의 질서에 익숙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출신 역시 본래는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가라지처럼 사는 편이 더 편하게 느껴집니다.
미국에 오래 살아도 우리는 여전히 월스트리트 저널보다 한국 신문을 읽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과 살아오던 방식이 여전히 우리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돈에 쪼들리며 사는 것보다 풍족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건강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돈과 건강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더 좋습니다”라는 대답이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로 그런 대답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답은 돈과 건강, 이 두 가지뿐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는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느냐, 그렇지 않으시느냐가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 온 우주는 누구의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세상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 안에 우리가 거하고 있으며, 그 나라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랜 시간 기도했지만 아직도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있습니까? 그러나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응답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기도는 결국 세상에서 내 몸과 마음의 편안을 위한 복을 구하는 기도일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는 반드시 들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는데 왜 주님께서 그것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그 사랑의 마음을 구하는데 왜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겠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 13:4-8)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이 가지고 싶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해서 속상해하십니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 나라가 여러분을 흔들고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느끼는 분이 계시다면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 말씀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계 11:15)
이 세상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라고 느껴지십니까?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이 세상이 다 망해 버릴 것만 같습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과 풍파 가운데 있든지, 혹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 닥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의 주인이시다!”
생각해봅시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힘으로 우리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으로 우리를 통치하십니까?
‘하나님은 가라지를 당장 뽑아 버리지 않으시지만, 끝까지 알곡을 지키시고 마침내 공의로운 심판과 영광의 완성을 이루십니다.’
가라지 가운데서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
이제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이 비유 속 종들의 대화입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밭을 차지하고 있는 이 가라지, 곧 이 세상 나라를 뽑아 버릴까요?” 어쩌면 이것보다 더 간단한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의 질문은 정당하고도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당연히 주인도 종들의 말대로 가라지를 뽑아 버려 알곡들이 잘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두어라.” 이 “그대로 두어라”라는 주인의 말씀은 얼핏 매우 소극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정당하게 일을 행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정당하게 원수도 갚고 싶고 정당하게 내가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를 세상을 향해 보여 주고 싶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듯한 세상을 향해 내가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두 나라가 함께 존재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공존하고 있고,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두어라”라는 주인의 말씀은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고 견디며 그저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라지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문장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주인이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고 한 말씀의 뜻은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 한곳에 모아 두겠다고 한 것에 대한 거절입니다. 곧 이 가라지들을 지금 뽑아 모아 놓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알곡 역시 지금 거두지 말고 가라지와 함께 두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주인의 관심이 우선적으로 알곡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처리하는 일보다 알곡을 지키고 자라게 하는 일에 먼저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주인은 알곡을 위해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자기 힘으로도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여기며 하나님을 떠나 버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를 이 비유를 통해 알게 하십니다. 알곡뿐 아니라 가라지 위에서도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가라지들이 자기 힘으로 이룬 것들을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포악해지고 교만해지며 결국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알곡인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것이 틀렸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삼으셔서 그분의 성품이 얼마나 풍성하고 감사로 가득한지를 바로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7-19)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세상살이에서의 만사형통은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것을 잃었을 때, 그것을 빼앗겼을 때, 도저히 혼자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때 바로 그 고난 속에서 기도하며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힘든 고난 가운데서 하박국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의지하며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서의 만사형통이 무엇인지를 고백합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
하나님의 마음은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데 있고, 그 나라를 가득 채울 알곡에게 향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말씀은 주인의 마음, 곧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지금 이 순간 가라지를 골라내는 데 관심을 두기보다 오직 알곡을 지키고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여기서 가라지는 물론 흑암의 나라를 상징한다고 많은 성경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리고 이전의 많은 설교에서는 독보리의 일종인 이 가라지가 밀과 함께 심기면 처음에는 둘을 전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혹시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까 염려하여 주인이 그대로 두라고 명령하신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거기에만 있지 않습니다. 본문 26절은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가 보였다고 말합니다. 곧 아주 어린 새싹일 때라기보다 어느 정도 자라 열매가 드러나기 시작할 때 그 존재가 분명해졌다는 뜻입니다. 물론 밀과 가라지가 처음에는 분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비유가 말하려는 핵심은 바로 그것이 아닙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처음에는 비슷하지만 나중에는 달라지니 우리가 이단도 이런 식으로 분별할 수 있다”라는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가고 있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나란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숙련된 사람이라면 아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가라지를 골라내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명하십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의 주제는 가라지를 구별해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단지 열매 맺지 못하는 가라지를 제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알곡을 위하여 가라지를 그대로 두기를 원하시며 바로 여기에 이 비유의 핵심이 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가라지들과 함께 하는 인생 속에서 우리에게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똑같은 고난 속에서도 알곡은 자랍니다
이 세상은 알곡인 우리에게도 너무나 공격적입니다. 때로는 감당하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우리 인생에 닥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에 속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순간순간이 언제나 죽음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환난과 고통을 통하여 죽음만을 경험합니다. 쓰디쓴 인생 속에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조금씩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해 사는 신자들은 다릅니다. 신자에게 닥치는 환난과 고통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아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생명을 경험합니다. 그 세상 속에서도 영혼이 죽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결코 버려지지 않는 살아 있는 생명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존재로 빚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으로 자라 가며 열매 맺는 존재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똑같은 해를 받고 똑같은 비를 맞아도, 그 씨가 이미 죽어 있다면 땅속에서 썩어 사라질 뿐입니다. 그러나 그 씨앗 속에 생명이 살아 있다면 똑같은 고난과 똑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 씨앗은 죽지 않습니다.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잎과 꽃이 나며,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하나님은, 종종 이 씨앗을 아주 특별한 곳에 심어 다른 씨앗들과는 전혀 다르게 온실 속에서 강한 비바람도 맞지 않게 하시고 언제나 일정한 빛을 받으며 안전하게만 자라게 하시는 분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렇게 온실 속 좋은 환경에서만 자란 화초는 밖에 내놓으면 금세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환난과 어려움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안의 생명을 드러내고 자라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인생 속에서 우리는 자주 깜짝 놀랄 만한 일을 겪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속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더 이상 가라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간증이 됩니다. 우리가 훗날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남길 수 있는 간증은 아마 대부분 이런 내용일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며 겪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나를 택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 사함을 받게 하셨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새 생명을 주셔서 아버지의 자녀 된 신분으로 자라가게 하셨습니다. 비록 이 세상살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는 욕심을 부릴 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우리 주님께서 나를 다시 세우시고 아버지만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저는 아버지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나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속에서는 죽음밖에 보이지 않고, 끊임없이 좌절하고 실망하며, 인생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밖에 없다는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살아가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하나님의 세계이며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으로 지금 자라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수많은 어려움과 죽을 것 같은 아픔 속에서도 끝내 죽지 않는 이유는 우리 안에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이며 곧 그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늘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 밭의 주인은 끝까지 알곡들과 함께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주인은 가라지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알곡을 지키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농부이십니다!”
생각해봅시다
*가라지 가운데 들어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의 고백이 어떠합니까?
마침내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고, 그분 때문에 우리가 이 길을 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가라지밖에 없는 세상에 주님께서 들어오시는 바로 그 순간, 마침내 알곡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알곡들을 모으셨더니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이들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고 있다면 내가 얼마나 잘 믿고 있는지, 예배는 얼마나 잘 참석하고 있는지, 얼마나 열심히 순종하고 봉사하며 선교하고 전도하는지, 또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가 더 이상 본질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내가 열심으로 예배하지 못했고,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내 욕심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던 못난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주님만은 놓을 수 없고 십자가를 부인할 수도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나는 주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고 고백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서 드디어 알곡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서 아직 알곡의 열매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가라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힘들고 바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위해 얼마만큼 일을 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낸 나의 신앙생활 자체를 내어놓아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육신이 연약했다거나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여 신앙생활에 소홀했다는 변명을 늘어놓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여러분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생이 되셔야 합니다. 예수는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나의 죄를 대신 지신 분이시며, 나의 거룩이 되시고, 나의 사랑이 되시며, 나의 기쁨이 되십니다. 그분이 나의 죄를 담당하셨을 때 나는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나의 사랑이 되셨을 때 그 사랑이 나를 감싸 안아 나를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나의 겸손이 되셨을 때 내 삶에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어서 오직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나의 인내가 되셨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나 또한 이 세상의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거짓과 유혹을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기쁨과 자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싸우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고백이 정말 나의 것이 되었습니까?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심판은 마지막 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십자가가 사탄의 머리를 밟는 심판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사탄이 완전히 패하여 지옥에 영원히 갇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십자가에서 사탄은 실패하였고 패배하였습니다. 그 능력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합니다. 물론 우리 안에서도 계속 싸움이 일어납니다. 주님 앞에 온전히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 나라가 여전히 우리를 감싸고 붙들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장차 그 영광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처럼, 오늘 우리는 이미 그 영광의 시작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고, 내가 내 신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아주 작은 부분들까지도 은혜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겪는 사소한 일을 포함한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계십니다. 아무리 작은 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시간들입니다. 아플 때도, 힘들 때도, 속상할 때도, 답답할 때도, 우리가 자고 일어나고 밥을 먹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알곡으로 길러 가고 계십니다. 신자에게는 단 1초도 헛되이 지나가는 순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루어 가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추수의 때까지 곧 하나님의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견디고, 자라가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선한 열매’라고 말합니다. 곧 여러분이 마침내 맺게 될 열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바로 가라지 가운데 오신 것이었고,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알곡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드러내는 증거들이며, 결국 선한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 내실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 곧 모든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이들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이 세상의 빛이며 빛의 아들들인 우리는 이 땅에서도 분명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빛은 고난을 통과하는 빛입니다. 고난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빛입니다. 죄악된 나의 욕심과 싸우며 우리는 빛날 것입니다. 밖에서 밀려오는 수많은 고난과 풍파와 싸우며 우리는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는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주님께서 맺게 하신 그 열매도 비로소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시간이 다 마치는 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모든 죄는 사라질 것이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눈물과 슬픔도 그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빛이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대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이김, 곧 그 승리가 우리 것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 우리의 가치가 정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니 우리의 가치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날에는 아버지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녀로서의 품위와 영광이 우리를 온전히 덮을 것입니다. 그러니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는 담대히 외쳐야 합니다. 세상이여, 당신들이 붙들고 있는 이 땅의 시간은 찰나와 같지만 우리가 믿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며, 해와 같이 빛날 그날 또한 영원하다고 말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주님의 손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드러내는 증거들이 우리라면, 가라지들과의 관계 속에 만들어가는 열매가 어떠하겠습니까?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영원하신 주님의 손길 아래 자라고 있는 알곡들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주님께서 이 세상 나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시고 보존하시며 그 나라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잠시 쓰임받는 자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부름받은 자들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이미 주님께서 저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부르셨고, 저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저희가 주님께서 십자가로 용서하신 그 죄에 다시 묶여, 그 죄를 내 힘으로 해결해 보려 애쓰는 자리에서 귀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을 의지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광 안에서 저희가 빛나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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