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탕자 한 아들, 다함 없는 아버지
탕자의 비유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11-32)
잊혀진 아버지
오늘 본문은 탕자와 그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 중에서 오늘 이 비유만큼 유명한 비유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이야기가 시작된 상당히 중요한 배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이 비유를 여전히 돌아온 탕자의 비유라고만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이 비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의 주권이 무엇을 의미하며, 자녀 된 우리가 그 신분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영광을 누리는가에 대해 더 깊게 알게 될 것입니다. 함께 이 비유의 진정한 이름을 찾아가 봅시다.
이 비유의 발단은 본문 앞의 15장 1절과 2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눅 15:1-3)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시작하신 직접적 동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 가운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라는 분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며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우리가 잘 아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 즉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동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본문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세리와 죄인을 가까이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비유의 특징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애쓰는 주인과 그 잃어버린 것을 찾은 후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주인의 기쁨이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잃어버린 소유를 찾는 기쁨’을 들려주십니다.
‘잃어버린 소유’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우리를 당연히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사람은 나름의 기준과 원칙을 세우고 자기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려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의 목적을 잊은 채 살다 보면 언젠가 결국 삶의 허무와 공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이루어 보기도 했고 실패도 겪었는데, 왜 만족이 없을까? 답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는 하나님 없이 만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그분을 즐거워할 수 없으니 참된 만족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는 자기 소견대로 살게 되고 그 결과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합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우리의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길을 여셨습니다.
세 번째 비유는 앞선 두 이야기와 연결되며 결론을 이룹니다. 이번에는 잃어버린 아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지요. 이 비유는 ‘잃어버린 아들’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니라, 두 아들과 아버지가 빚어내는 드라마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 그 구조를 생각해 봅시다.
• 둘째 아들(탕자):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나서야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 아버지: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가 끌어안고 그를 회복시켜 받아 들이고 잔치를 엽니다. 사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앞의 두 비유와 더 잘 어울립니다.
• 맏아들: 그러나 예수님은 맏아들을 등장시킵니다. 그는 동생의 귀환을 못마땅해하며 분노합니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마지막을 장식하지요.
그럼 이 비유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앞선 비유의 주인공이 잃어버린 양이나 드라크마가 아니라 목자와 여인인 것처럼 이 비유 역시 탕자가 아니라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맏아들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상인 바리새인과 서기관인 것입니다. 탕자와는 대조되는 성실해 보이는 아들이지요.
그리고 그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이 잔치를 완성시키시는 아버지가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은 목자와 여인의 기쁨이 바로 비유의 꽃이듯이 탕자의 비유 역시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바로 그 중심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생명을 내어주신 아버지
이러한 구조를 기억하며 이제 둘째 아들의 이야기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상당히 긴 비유에 속하고 주인공들의 캐릭터도 아주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 갈래 주제로 나누어 자세히 살펴봐도 좋겠지만 이 비유는 무엇보다 주인, 곧 아버지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아버지의 비유로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비유에 ‘탕자’로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든 유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분배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들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행위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근동 지방,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아버지, 유산을 어떻게 나눌까요?” 하고 묻는 일은 흔했으며 그 분배에 대한 율례도 존재했습니다.
장자는 차남보다 두 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유산의 ⅔를 장자가 , 나머지 ⅓을 차남이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배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도, 며칠 사이에 아버지가 둘째 아들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자 그 아들은 모든 재산을 팔아서 먼 지방으로 떠나 버립니다. 이건 근동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였습니다.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저게 말이 돼?” 하고 수군댔겠죠. 요약하면, 이 말과 같습니다. ‘아버지, 오늘부터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상속분을 미리 돈으로 바꿔 간다는 것은 ‘아버지는 이미 죽었다’란 뜻입니다. 요즘은 자녀의 사업자금을 미리 증여하기도 하지만 그 시절 근동 사회에선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요구를 허락해 준 아버지입니다. 유산을 ‘미리 준다’는 건, 곧 내 생명을 주겠다는 말이었으니까요. 큰아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남은 게 있었지, 만약 둘째 아들 탕자가 외아들이었다면 아버지는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줄 살림바닥까지 내어 준 꼴이 됩니다.
이 엄청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하나님이신 아버지가 내어 주신 분깃은 그에게 베푼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결국 아버지의 생명, 곧 생명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십니다. 그분 안에서만 끝없이 솟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탕자는 그것을 모른 채 생명이신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리고 생명을 떠나자 그에게 주어진 그 은혜를 그는 보이는 욕심과 바꾸어 버립니다. 모든 것을 탕진합니다. 결국 아무것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그제야 아버지를 그리워합니다.
굶주림과 영혼의 갈급함 ― 바로 거기서 탕자는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깨닫는 그 자리에서 그분을 갈망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회개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다시 초대하셨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는 그분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혹 우리 마음이 오늘 이런 갈급함조차 느끼지 못한다면, 나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무엇이라 여기고 있는지,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 나라를 살아가는지를 회개해야 합니다.
자, 다시 비유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아버지가 아들의 그 무리한 요구를 허락했다는 사실은 유대 청중에게는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저 아버지, 정말 제정신인가?”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죠. 둘째 아들이 떠난 곳은 먼 나라입니다. 돼지를 치는 걸 보면 이스라엘 땅 밖 이방 나라이며 아마도 돼지를 주식으로 삼던 블레셋쯤 됐겠죠. 그곳엔 헬라계 해양 민족이 살았고 할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 하면 블레셋을 떠올리게 된 이유입니다.
아브라함 시절에도 가나안 족속은 모여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갈대아 우르 출신으로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할례의 언약을 주셨으며 그를 통해 모든 민족을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구원할 그 첫번째 하나님의 백성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해 제사장으로 나아가는 역할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선택을 특권으로만 여겼습니다. 다른 민족을 멸시하며 자신들만은 다르고 뛰어나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잊거나 무시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신 것도 이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은 ‘잊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오해를 바로잡고 계십니다. 잊어버린 언약의 말씀이 오늘 이 비유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만약 오늘날 이 탕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아들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자유를 추구하는 신세대 청년일 겁니다. 집안의 규율과 전통 따위는 답답하다고 느끼죠. 세상으로 나가 내 생각대로, 내 방식대로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받은 그 분깃은 세상이 추구하는 쾌락과 욕심을 좇는 동력이 되었으며 결국 그는 가진 것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 돈과 욕망의 종, 곧 죄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반면에 맏 아들은 바로 자신은 남과 다르다는 특권만을 생각하고 있는 바리새인입니다. 아마도 겉으로는 바른 생활 사나이 같으면서도 속은 교만과 비교의식 그리고 불만으로 가득찬 청년이겠지요.
이 두 아들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봅니까? 두 아들 모두 아버지와의 관계,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안에서 배우고 자라갈 때 풍성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스스로도 아버지없이도 재산만 있으면 아버지처럼 살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아버지없이 주어진 재산만 가지고 나와 ‘잘 살 줄’ 알았지만, 현실이 던져 준 것은 비참한 신분과 무능함 그리고 절망조차 감당 못하는 초라한 자신이었습니다.
같은 재산이 아버지의 손에 있을 때와 탕자의 손에 있을 때 무엇이 달랐을까요? 한 가지입니다. “생명이신 아버지 안에 있었느냐 그 선하신 목적을 따라 살았느냐”입니다. 그럼에도 성령님께서는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탕자의 마음을 두드려 잘못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시며, 결국 오직 아버지 안에서만 만족할 수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쌓은 이름, 물질, 관계 속에서 정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눈에 옳은 대로’ 내가 가진 것을 의지하며 하루를 버티고 있습니까?
큰아들은 또 어떻습니까? 아버지 곁에 있었고 아버지 말씀을 어기지 않았지만 정작 아버지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져 있었습니다. 집 안에 있던 탕자인 셈입니다.
아버지의 집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둘째 아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에 있었던 세리와 죄인들만을 이야기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훨씬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본 모습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 당시 세리라는 사람들은 동족인 이스라엘조차 인정하기 싫어 그들을 멸시하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 심지어는 “개”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멸시받는 죄인이었던 세리들이 대표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모은 재물을 의지하고 이를 힘으로 삼아 다른 이들을 핍박하며 자기 왕국 속에서 하나님처럼 왕 노릇하며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첫 주자는 누구였습니까? 바로 아담이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것으로 살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이 가진 것들을 다 소진하고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그 수많은 고통과 눈물과 아픔과 외로움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아담의 후손- 우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세상 속에서 주인이 되어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스스로 판단하며 살면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되었습니까? 아담이 쫓겨난 이후로 그와 그의자손은 포악을 향했습니다. 죽이고 죽는 것은 세상에서 힘을 갖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얼마나 혹독한 지를 뼈저리게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고 피조물들도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다 알지 못한 것입니다.
책임질 수 없는 그 선택으로 혼돈 속에 빠진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그 주권이 얼마나 우리를 보호하고 따스하게 품으시는 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없이는 참 안식과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그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모든 것이 선이었습니다.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악을 알게 되었고 수치와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아담이라는 존재가 이제는 비틀려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심히 좋다” 하신 세계를 자꾸만 평가하고, 옷을 입히고, 힘으로 다스리려 듭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힘과 지식과 욕망을 선이라 믿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만 갑니다.
이 얼마나 무지한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그 나라를 누리게 하시려고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구원을 계획하시고 직접 행동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다운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방식을 쫓으면서 이를 행복하고 안전하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여전히 탕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담을 찾으신 주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숨어 있는 곳을 모르고 하신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만드셨던 자리,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에 그가 있지 않았기에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잘못이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과 존재에 관련돼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에 그는 수치심을 느낍니다. 이제 하나님을 대적했기에 그 결과가 두렵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은 직접 구원자가 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새 피조물이 된 우리가 받은 특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선으로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 다스림은 정욕·안목·자랑이 아니라, 영광·기쁨·순종으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으심 그리고 그 부활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나라를 살게 된 우리들이 과연 성도 된 우리의 신분을 얼마나 누리고 있습니까?
탕자는 집 잃은 자가 되었지만 그는 성령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집에서만 자신이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선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합니다. 억울함에 휘둘리고, “해 볼 수 있다”는 교만에 흔들리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절망 앞에 서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절망과 사망 한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분은 성령의 임재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시며 하나님의 집으로 이끌어 동행하게 하십니다. 잃었던 집을 찾은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가슴 벅찬 하루를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물으십니다.
“너는 나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리, 그 자리에 있느냐?”
이 질문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당신은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기다리는 아버지
오늘 본문의 비유에는 아담의 자손들을 대표하는 죄인들의 그룹과,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불러내신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또 다른 그룹이 함께 등장합니다. 후반부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하나님의 백성, 즉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신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하려 하신 그뜻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의 모습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나의 힘으로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유혹 속에 살아갑니다. 마치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양 모든 것을 감당하려 애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이러한 모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 보겠습니다. 그는 굶주림 가운데서 돼지를 먹이는 쥐엄열매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지만 그조차 얻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절망 속에서 그가 취한 태도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돌이켜서."
어떤 번역에서는 이것을 "제정신이 들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집을 떠올립니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풍족하여 종들조차도 풍성히 누리고 있는데 자신은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하는 순간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미리 연습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재산을 낭비한 것이 죄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버지를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드디어 돌이킨 것일까요? 분명하게 그는 아버지의 집을 기억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자신을 보며 기억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분명 겸손해 보이는 탕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을 봅시다.
“그러므로 나를 품꾼으로 여겨 주옵소서.”
이 말 역시 둘째 아들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봅시다. 이와같은 아들에게 성경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할까요? 신명기 21장입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 21:18-21)
온 성읍의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는 자식을 돌로 쳐서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10대 시절 한 두번쯤 부모님께 반항해 보지 않은 분이 계신가요? 이 율법에 따르면 자식이 완악하여 부모의 징계를 듣지 않으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합니다. 탕자가 바로 이 아들이 아닌가요? 품꾼으로 여기고,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이 죄를 갚겠다는 말이지요. 과연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죄인가요? 탕자는 여전히 자신의 죄값은 자신이 갚으려 하며,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께로 돌이키면서도 그는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지려고 합니다. “아버지 저를 살려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라기 보다는, 아버지의 자비를 구하면서도 그 은혜를 갚겠다는 시도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들 역시 이 탕자와 너무나 비슷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봉사도 하고 선교도 하는 이 열심들이 어찌하든 은혜를 갚으려는 노력일 때가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죄와 죄책감을 지워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진 빚을 갚아 그 짐을 덜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여전히 “내가 써버린 재산”을 다시 갚으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기의 힘과 공로를 앞세우게 되니까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팀 켈러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 사람이 선하게 살려고 하는 목적은 사실은 값없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서운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저 양심에 따라 남보다 착하게 살려고 했는데, 성령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이렇게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봉사하려고 합니까?
왜 착하게 살려고 합니까?
왜 남보다 선한 인생을 살려고 그토록 매달립니까?
왜 다른 이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까?
심지어 왜 다른 사람보다 더 좋은 신앙을 가지려고 합니까?
만일 당신이 대답을 주저한다면 당신은 결국 하나님이 아닌 나를 치장하고 싶은 것일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값싸게 만들고, 그 은혜를 실제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그러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돌이켰으니 자신을 아버지가 받아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돈을 받아 일하는 품꾼으로 살며 자신이 탕진한 재산을 갚아나갈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갚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는 그의 죄를 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품꾼이 되어 살려고 합니다. 사실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아버지가 달려간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먼저 발견 했다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내어놓습니다. 적어도 이 일의 심각성을 잘 말해줍니다. 사실 이 비유에서 가장 율법에 맞지 않는 행동중 하나가 바로 아버지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단 한가지 사실만 보았습니다.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내 아들이다.”
아버지를 배반하고, 마음을 찢고, 아프게 만들고 떠난 아들이 아니라, 죽었던 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의 품에 다시 살아난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달려 나가 그를 끌어안습니다. 어떤 유대의 관습에도 어긋나고 어떤 율법에도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모든 것되신 아버지
그렇다면 둘째 아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이 맏아들은 누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까요? 그는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고,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아들입니다. 이는 율법을 지키며 살았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상징합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아들이 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죄인의 모습이라면, 후반부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제사장 나라로 삼아 세상을 향한 복의 통로로 사용하시려던 이스라엘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의 빛이 아니라, 자신들만이 율법을 가졌고, 그 율법을 지키며 살아온 선택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큰아들은 모범적인 아들의 전형입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3분의 2에 해당하는 유산을 이미 상속받았지만 그것을 팔지도 않고 아버지와 함께 살며 성실히 일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뜻을 잘 따랐다고 믿었기에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는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불공평하고 인색한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는 억울함을 느끼며 이렇게 항의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15:29-30)
언뜻 보면 큰아들의 불만은 말이 됩니다. 억울한 감정도 공감이 되지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이제 더 이상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자세로 아버지를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정하며 아버지와의 관계를 거래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아들이었지만 스스로 품꾼이 되겠다고 했고, 첫째 아들은 아들이면서도 품꾼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두 아들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두 아들 모두, 아버지와의 관계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이 비유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여기, 큰아들에게 있습니다. 둘째 아들을 통해 죄인인 우리가 드러난다면, 큰아들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만의 공정함과 도덕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올바로 살았다고 믿을 때, 인정받지 못하면 억울함과 분노를 느낍니다. 때로는 자신보다 부족해 보이는 이들이 앞서는 상황을 참을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 자신이 실수하거나 실패했을 때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자기 혐오'입니다. 항상 나는 제대로 된 신앙인인가 하는 의심 속으로 깊이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올바른 자기 성찰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욕심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그러니 입으로는 평화를 찬송하면서 마음 속은 들끓는 냄비가 되고 맙니다. 내 모든 짐을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지만 나는 여전히 내 짐을 붙잡고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광과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의 기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너는 행복자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다. 너는 나의 자녀다.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더냐."
그런데 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삶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을까요? 성경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성경의 교훈을 지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문제에 별로 거리낌이 없고 갈등이 없다면 우리는 타협의 천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성도답게 살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어쨌든 우리를 위해 살아갈 길을 주시리라는 막연한 기대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이조차 은혜라고 부를 수 있지만, 계속 이 자리에 머문다면 이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신자와는 거리가 먼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어떤 풍파와 험난한 골짜기를 만나도 이를 잠잠케 하시고 평탄하게 하시며 오히려 찬양하게 하시는 주님이 나의 만족이요 나의 기업이시라면, 이를 거의 누리지 못하고 염려와 슬픔 속에서 가난한 신앙을 이어가는 것은 분명 다시 확인해야 하는 신앙 생활입니다.
맏아들 역시 겉으로는 성실하고 착한 아들로서 산 것같지만 그의 마음은 아버지를 알고 사랑한 것이 아니었으며 결국 동생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신앙일 뿐이니까요. 이것으로 끊임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려고 하기에 교만에 빠지거나 절망으로 자포자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회개와 용서대신 불만과 두려움이 지배합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만 찾습니다. 반대로 내가 이걸 잘 했더니 평탄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 속에 함께 하사 조그만 일 하나라도 내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막상 현실에서는 모두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짊어지고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찌 고통과 불안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인생을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손해, 내 감정, 내 이익만 자꾸 보이니 말입니다.
바로 나와 세상으로 만족하려 하기에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내가 만든 것과 세상이 주는 것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에게 고난은 고생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이끄시고 나를 구원하시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자녀 만들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롬 12:11) 주를 섬기라고 하신 말씀은 자신을 불태워 신에게 바치라는 말이 아니라, 이 영광스런 시간들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기쁨, 나의 영광, 나의 성품을 모두 누려라.”
우리는 고난이라 적지만 영광이라고 읽게 됩니다. 순종이라 적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인내라 적고 기쁨이라고 읽습니다. 이것이 바로 누리는 삶입니다.
두 아들 한 문제
이 비유에서 두 아들은 분명히 다르게 행동했고 그들의 상황도 달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의 아버지에 대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 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버지의 재산을 돈으로 바꾸어 마음대로 살려고 아버지를 떠난 자였으며, 또 다른 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버지에게 순종하며 보상을 찾던 아들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눈에 큰아들은 얌전하고 착하고 효자인 도덕적인 아들이고, 또 다른 한 아들은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떠나 방탕하게 살아간 나쁜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두 아들이 모두 다 똑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두 죄인을 부르십니다.
첫째 아들의 이야기는, 집을 나가서 다시 돌아온 둘째 아들의 이야기처럼 극적이지는 않을 뿐, 이 맏아들도 역시 집 밖에서 일을 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에게, 둘째 아들에게 허락한 새 옷과 새 신발과 가락지 대신,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너에게 주었다’고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지칭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지적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른 자리에 돌아올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으로 불렀던 바리새인만이 아니라, 주님을 거부했지만,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졌으나 하나도 누리지 못했던 맏아들을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오늘 이 비유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 해당할까요? 큰아들에 가까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노력했었고, 만약에 조그만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괴로워 하며 그것으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게 될까 걱정하고 가슴 떨려 하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에게 잘 보여서 그분께 가까이 갈까를 항상 고민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의 선하고 인자하심을 핑계 삼아 우리 마음대로 살면서 끊임없이 게으르고 끊임없이 아버지와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두 아들 모두 자기가 중심이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이들을 자신의 품으로 부르십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에게 달려와서 그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기뻐하시는 아버지, 모든 것을 다 주시려는 그 아버지 앞에 우리는 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아들이었건 작은아들이었건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두 아들을 모두 맞으시는 동일한 아버지 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지푸라기 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에서 모두 누리라고 팔을 펴신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그 마음을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열려진 비유
그러나 여전히 두 가지의 질문이 남습니다. 첫째는 왜 아무도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을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앞서 등장한 두 비유, 잃은 양과 드라크마의 이야기에서는 주인이 그것들을 찾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가장 중심이 되는 세 번째 비유에서는 아들을 찾기 위해 먼 나라까지 나아가는 장면이 없습니다.
둘째는 맏아들의 이야기가 결론 없이 끝났다는 점입니다.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서 회복되었지만 맏아들은 아버지의 권면을 듣고 난 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도 마음을 돌이켜 잔치에 참여하였다”는 짧은 한 줄만 있어도 이야기는 아름답게 마무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선택을 독자에게 남겨둡니다. 맏아들의 결말은 열려 있는 채로 끝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기막힌 포인트입니다. 이 비유는 사실, 본문 속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또 다른 한 아들의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처럼 아버지를 떠나 자신의 것을 챙겨 떠난 아들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을 찾기 위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종이 되시고, 노예가 되시고, 품꾼처럼 이 땅에 오신 참 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순종과 사랑으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칭호를 받으셨습니다. 그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첫 아담이 실패했던 자리를 온전히 회복하시며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신 아들이 되셨습니다. 하늘에서 울려 퍼진 음성처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패한 맏아들의 자리를 대신하시고 참 이스라엘로서 모든 것을 완성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비유의 결말이 열려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 이야기를 완성하시는 참된 맏아들이시며, 마지막 결론이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잔치에 두 아들—탕자와 맏아들—모두를 초대하셨습니다. 자신은 잔치의 주인공이 되시고, 아버지의 품으로 우리 모두를 품으십니다. 마땅히 죽어야 했던 둘째 아들을 위해 자신이 하늘을 떠나 탕자의 자리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공로만을 따지던 맏아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주사 함께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품으시는 참 맏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바 아버지시다. 이제 너희도 이분을 아버지라 부르며, 함께 이 잔치에 참여하여 기뻐하라.”
본문 속의 두 아들은 모두 은혜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을까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이 의도하시는 방향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혹시 은혜를 강조하다 보니 정작 삶에서는 순종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20년, 30년을 신앙생활했음에도 여전히 복음적이지 못하거나, 바른 신앙인의 모습을 잃고 실망하게 되는 일이 반복되면 우리는 흔히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곤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진실하게 알고 있는가?
“나는 이제 복음도 알고, 은혜도 알고, 율법이나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그 고백마저도 율법처럼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은혜가 율법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가장 선한 것을 가지고도 그것을 가장 악한 도구로 변질시키는 존재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이유로 교만해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은혜를 받았는데, 너는 왜 아직 못 받았느냐?”고 타인을 정죄하며, 은혜를 칼처럼 휘두르기도 합니다. 마치 그것이 우리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라도 되는 양 말이지요. 진정 은혜를 받은 자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심지도 않았지만 열매를 따먹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칭찬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안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예수를 믿어 겨우 천국만 가면 된다는 듯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은혜를 안다면 어찌 인내가 없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어떻게 맞아주셨는지 아십니까? 새 옷을 입히고, 새 신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시며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저를 품꾼으로 써 주십시오”라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쏟아내며 천둥 벌거숭이처럼 아버지께 나아갔을 때 그분은 달려와 우리를 안아 주셨습니다. 죽었던 자식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잔치를 열어 주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우리에게 부어진 복음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율법처럼 사용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렇게 은혜도 믿음도 남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언제 이 구원을 참으로 누릴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를 안다면, 이 자리에 우리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찬양 한 곡, 짧은 기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이름만으로도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안다면 말입니다.
이 잔치를 진정한 잔치로 만드신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하여 기뻐하시며 잔치를 베푸신 분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여전히 땅만 파고 열심히 무언가를 하며 아버지께 불평을 늘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저는 명을 어김 없이 지켰는데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시지 않습니까?”
이러한 삶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은혜를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일로 인해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지를 다시금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탕자까지도 받아들이신 그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되새기며 그로부터 솟아나는 참된 기쁨과 감사로 하루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우리 때문에 기뻐하십니다.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가셨던 아버지의 기쁨,
옷을 입혀 주고, 가락지를 끼워 주고,
우리를 안아 주셨던 그 아버지의 기쁨,
발에 새 신발을 신기시며 그 발을 만지시고 좋아하셨던 그 아버지의 기쁨,
우리 때문에 잔치를 벌이시며 그것을 즐기셨던 그 아버지의 기쁨.
주님, 주님 안에서 우리도 이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그 아버지의 기쁨을 알게 하옵소서.
그 아버지의 기쁜 얼굴을 보게 하옵소서.
그 아버지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라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1.“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선언은 내 삶에 어떤 울림을 주고 있습니까?
2.두 아들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사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3.“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도록” 우리를 지으셨다는 하나님의 주권은, 오늘 나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4.집 잃은 탕자가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서야 아버지의 존재를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5.탕자의 죄는 재산을 낭비한 것보다 자신의 신분과 본성의 악함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죄가 여전히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지 않습니까?
6.아버지는 탕자가 모든 것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허락하셨고, 그가 다시 돌아올 것도 아셨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에도 이런 상황은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까?
7.모범적인 아들의 삶을 살았던 큰아들이, 죽었던 동생이 살아왔다고 잔치를 여는 아버지께 화를 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8.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더냐”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 말씀이 주는 자유와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까?
9.자격 없는 우리가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초대받고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은 오늘 우리의 삶에 얼마나 충만히 임하고 있습니까?
'I. 강해 설교집 > 예수님의 비유-출판버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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