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19 1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아멘.

 

심판과 구원의 모형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여러분께 너무나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의 본문입니다. 이는 창세기 19 1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롯이 거주하는 소돔 마을에 두 천사가 찾아옵니다. 마침 성문 곁에 앉아 있던 롯은 그들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영접하며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하룻밤 묵어가며, 다음 날 일찍 길을 떠나라고 간청합니다. 처음에는 거리에서 밤을 보내려던 천사들은 롯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그의 집으로 들어섭니다. 롯은 그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무교병을 구워 대접합니다.

 

천사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소돔 성의 주민들, 곧 노소를 불문하고 원근에서 몰려와 롯의 집을 에워쌉니다. 그들은 롯을 불러내어 "오늘 밤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고 외칩니다. 롯은 문밖의 무리에게로 나아가 뒤로 문을 닫고 간절히 호소합니다. "청하오니 내 형제들아, 이러한 악을 행하지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으니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그러나 소돔 백성들은 "물러나라!"고 소리치며,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고 위협합니다. 그들은 롯을 밀치며 문을 부수려 합니다. 그때 천사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문 밖에 있던 무리들의 눈을 대소를 막론하고 어둡게 만듭니다. 결국 그들은 문을 찾느라 헤매다가 지쳐 버립니다. 아멘.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한 도시가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사건으로,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그러한 의미가 본문 안에 분명히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본문은 단지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무엇인지, 즉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완성될 것인지 작은 모형으로, 혹은 미니어처로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안에는 당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만이 아니라, 앞으로 인류 역사의 마지막까지 일어날 일들이 예고편처럼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노아의 사건 때도 그러했고, 소돔의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냐고요? 물론 이 사건만을 떼어놓고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신약에서 이 구절들을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노아와 롯에 대한 말씀을 보십시오. 26절에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때가 인자의 때, 곧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와 유사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8절에 덧붙여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롯의 이야기가 단순히 롯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까? 바로 마지막 때입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올 마지막 때를 설명하시면서 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그 사건 자체로만 보신 것이 아니라, 인자의 날과 연관시켜 해석하신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롯의 아내 이야기는 추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롯의 소돔 정착과 위상

오늘은 롯과 소돔의 이야기 중 소돔에 대한 부분을 먼저 다루고자 합니다. 앞서 롯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으나 시간상 충분히 다루지 못했기에, 롯에 대한 이야기는 추후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소돔에 집중하겠습니다.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진 후 소돔에 정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북방 왕국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던 롯을 구출해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거주지에 적군이 침입하여 포로로 잡히고 재산을 빼앗겼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경우, 만약 그곳이 본래 고향이 아니라 이주하여 살던 곳이라면 대부분 그곳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이 동네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겠네" 하며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흥미롭게도 소돔에 계속 머뭅니다.

 

롯이 소돔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지 살펴보면, 오늘 본문 1절에 "롯이 성문 곁에 앉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문 곁에 앉아 있다는 것은 대개 그 도시의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성문은 주로 장로나 지도자들이 모여서 문제가 발생하거나 송사할 일이 있을 때 재판을 하는 장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구원해낸 사건 이후,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의 위상이 자연스럽게 높아졌을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을 설득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사실입니다. 롯은 소돔에서 상당히 확고한 입지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소돔을 떠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입니다.

 

사실 롯이 처음 소돔으로 간 이유도 그곳이 신앙적으로 훌륭한 동네여서가 아니라, 성경에 묘사된 바와 같이 물이 풍부하여 마치 에덴동산처럼 살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롯이 그렇게 정착했던 소돔에 두 천사가 내려오게 되고, 이제 곧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소돔의 죄악: 동성애와 교만

소돔의 죄악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는 이러한 표현이 나옵니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상관하리라' 단어는 여러분께도 익숙할 만한 단어입니다. 설교 중에 자주 듣는 '할렐루야', '아멘' 같이 히브리어에서 단어 하나인 '야다( יָדַע , H3045)'입니다. '안다' 뜻을 가지고 있죠. 단어는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넘어 부부 관계와 같이 친밀하게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알려고 하노라" 직역은 성적인 관계를 맺으려 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를 통해 소돔 백성들이 남자 천사를 끌어내어 동성애적 행위를 하려 했음을 있으며, 이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가장 하나로 이해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여러 증거가 있습니다. 가장 명확한 증거는 바로 다음 절에 나오는 롯의 반응입니다. 롯은 자신의 두 딸을 내어주면서까지 천사들을 보호하려 합니다. "저들을 그만 놔두고 나에게 시집을 가지 않은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슨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고 말하는 롯의 행동은 상상하기 힘든 극단적인 선택이지만, 당시 소돔의 상황과 그 단어의 의미를 고려할 때 성적인 문제가 명확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상 이 구절에 대한 다른 해석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분명합니다. 또한, 신구약 성경에서 소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간음, 음행, 호색과 같은 단어들이 자주 함께 등장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성애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는 것입니다.

 

교만과 하나님의 망각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공평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성적 죄악을 명확히 지적하지만, 성경의 다른 구절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에 대해 더 넓은 관점을 제시합니다. 소돔의 죄악을 다루는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는 에스겔서 16장입니다. 에스겔서 16 49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예루살렘의 죄를 소돔의 죄와 비교하며 소돔의 죄악을 설명합니다. 실제로 에스겔서는 그 앞 구절에서 "예루살렘아, 너의 죄가 소돔 죄보다 더 중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소돔의 죄를 처음으로 언급하는 것이 음란이나 성적 타락이 아니라는 점이 놀랍지 않습니까? 가장 먼저 언급된 것은 바로 교만함, 음식물의 풍족함, 그리고 태평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돔이 심판받은 이유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소돔의 죄와는 다른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높아졌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소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묘사합니다. "그들의 얼굴이 (이것도 역시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이 소돔 백성처럼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놓고 말하며 감추지를 않는다. 오호라 그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죄가 교만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고 감추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교만해져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소돔의 죄악을 엄청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우리 자신도 이와 비슷한 태도를 종종 보입니다. 어떤 사람이 속아서 손해를 보면 ", 안 됐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속는 게 바보지" 혹은 "속이지 못하는 게 바보지"와 같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는 사실상 방금 언급한 소돔의 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자기의 죄를 드러내고 그것이 죄라고 알면서도 행하며 전혀 양심의 떨림이 없는 모습은 마치 양심에 화인 맞은 것과 같습니다.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죠. "세상이 다 그렇게 악한데 거기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바보스러운 거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홍수 심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이 자신들과는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찾지도 않으면서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먹을 것이 있고, 큰 병에 걸리지 않고, 사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을 필요를 얼마나 느끼겠습니까? 자녀들이 속을 썩이거나, 자신이 아프거나, 뭔가 문제가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을 때가 있지만,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으면 우리는 마음이 높아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인플레이션이 심각하고, 어떤 이들은 대공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플레이션만큼이나 두려워합니까? 대공황이 온다고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합니까? 물가가 오르고 살기 힘들다고 모두가 아우성치며 신문마다 난리입니다. 사랑하는 신자 여러분, 우리는 혹시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봐 정말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때문에 염려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진정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을 두려워하랴 하나님을 두려워하랴, 나는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이 통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누가 뭐라고 한들 뭐 어때,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라는 태도가 만연합니다. 우리 모두 극도의 개인주의에 빠져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너무 형식에 얽매이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제는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 마치 옳은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한 고의적인 망각

 

우리 마음이 선하다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겠습니까마는, 우리의 마음은 선한 것보다 악한 것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산다"는 말은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을 솔직하다고 여기며 괜찮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고기, , 쌀이 있어서 먹고살 수 있다면 세상에 걱정할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기후 변화로 지구가 온난화되어 문제가 심각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다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시장에 쌀이 떨어져야 비로소 두려워하지, 온도가 올라가고 지구가 문제에 직면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잘 와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비단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2000년 전에도 그러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쓴 글을 제가 조금 의역하여 읽어드리겠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과연 어디 있냐? 조상들이 다 지금 돌아가셨고 우리 앞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지금 무덤에 있다. 그런데도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한 그때로부터 하나도 변화가 없는데 (우리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산은 계속 산이고 물은 계속 물인데 뭐가 달라졌느냐? 근데 무슨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고? 주님이 가신 지가 2000년이 지났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던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 너희들이 보기에 산은 그대로 있고 물도 그대로 있고 천하 만물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들도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이 다음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여러분과 제가 하루를 사는 동안 하나님을 잊고 사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대개 바빠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살다가 ', , 이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깨달을 때마다 말씀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판단과 진단은 다릅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일부러 잊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을 잊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급이나 월급이 얼마 들어오는지 모르시나요? 지난주에 얼마 들어왔는지 모르시나요? 지난달에 월급을 얼마 받았는지 모르시는 분 계십니까? 조금 어려운 질문일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은행 잔고를 모르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도 들여다봐서 뚫어질까 봐 걱정이지, 대부분 정확히는 몰라도 대충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잊어버리시나요? 병이 들기 전까지는 잊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 잊어버린다고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왜 주님을 쉽게 잊어버립니까?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적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관심이 많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에게, 특히 돈에는 관심이 많아 잊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말합니다. "일부러 잊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너희들이 사실은 일부러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 바쁘다거나 다른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니다." 아마 이 말에 충분히 공감하실 것입니다.

 

교만과 하나님의 대한 경외심 부족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태도를 교만하다고 표현합니다. 에스겔서에서는 그들이 교만하기 때문에 태평한 것이라고 말하며,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를 말씀하실 때, 그들이 성적으로 타락했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시기보다 매일 먹고 마시고 평소처럼 두려움 없이 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두렵다', '무섭다'는 것은 공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이 얼마나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며 그대로 행하시는 분인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값싼 은혜와 죄의 무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삶에서 너무나 쉽게 일어나고, 교회는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저 또한 때때로 신문 지상이나 기독교 신문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보며, 과연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인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을 정말로 믿고 있다면, 나중에 심판이 있어 하나님 앞에 설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살고 말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그러한 의문이 자주 듭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그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을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나는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일부의 진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진리이기는 하나, 진리를 말할 때는 전체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은 내가 무슨 죄를 지어도 다 용서해 주시니 나는 무슨 죄를 지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세탁기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의 세탁기일 뿐입니다. (처음에는 '쓰레기통'이라고 표현하려 했으나 너무 불경한 것 같아 '세탁기'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여겨, 자신의 죄를 갖다 던지면 하나님이 그것을 깨끗하게 해 주어야 하는 존재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할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무서운 죄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슬퍼하며 우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왜 근심하며 우십니까? 우리들의 죄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하나님만 마음 아파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죄를 다룰 때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바르게 다룰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의 무서움과 그 무게,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슬퍼하며 아파할 수 있는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고,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계속해서 가벼운 용서, 값싼 은혜로만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죄에 대한 설교를 듣고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 많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일어서겠습니다'로 나아가는 대신,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져 '나는 안 돼', '역시 나는 죄인이야',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어', '인간은 이렇게 약한 거야' 하며 좌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것 또한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성경은 두 가지를 함께 가르칩니다. 우리의 죄는 무섭고 끈질기며,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힘든 것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침내 자유함을 얻었고, 결코 정죄함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날마다 새롭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쁘다고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죄에 지지 않고 오히려 선으로써 그 죄와 악을 이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 없는 죄와 폭력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회개 없는 죄악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그 죄가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소돔 땅에 회개의 모습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이킴이 없었습니다. 죄는 분명 무서운 것이지만, 진정으로 무서운 것은 죄를 짓는 것 자체보다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고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죄를 그대로 고백하고 "나는 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를 인정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정에서 자신의 죄를 그대로 아뢰고 인정한다고 해서 판사가 기특하다고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고, 죄에 대하여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죄를 고백했다고 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고백하는 것을 넘어 그 죄를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그분의 의를 나에게 입혀 주셨다는 것, 내가 이제 예수의 옷을 입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를 지은 것도 잘못이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 돌이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돌이킴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를 "소돔은 악을 행하는 손을 오히려 강하게 하고 돌이키지 않았느니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가장 무서운 점 중 하나입니다. 소돔은 교만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교만으로 인해 돌이킴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죄악이 음행과 음란, 호색, 그리고 성적인 타락으로 이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성적인 타락을 넘어 성경이 이 모든 것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폭력으로 이끄는 죄악

여기서 말하는 호색(色慾)이라는 단어는 성적인 욕망을 전혀 제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동성애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간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는 동성 간의 성적인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사실 성경은 이성 간의 성적인 타락에 대해 10배 이상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간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까, 남색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나옵니까? 당연히 간음이라는 단어가 훨씬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죄나 자신이 저지르지 않는 죄를 빗대어 자신의 죄를 약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훨씬 더 많이 우리의 죄를 추적하고 지적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동성 간의 성적인 타락에 대해 죄로서 경고합니다. 레위기는 너무나 명확하며, 오늘 본문 또한 그것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만약 롯이 자신의 딸을 내어놓으려 했다는 것을 다른 식으로 설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그러한 내용이 없다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해석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해석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는 솔직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베드로후서나 유다서를 보아도 소돔의 죄를 간음, 음행, 호색이라고 분명히 표현합니다. 특별히 유다서에서는 "다른 육체"라고 표현하여, 소돔의 문제가 분명히 성적인 죄악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나아가 소돔의 더 무서운 문제는 그러한 성적인 타락이 폭력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그들을 내어 놓으라 우리가 상관하겠다"는 말은 단순히 동성애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이는 서로 간의 합의에 의한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폭력이 함께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죄의 깊이가 엄청난 것입니다. 소돔이 보여주는 그러한 폭력은 절대 축소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우리는 소돔에 있었던 모든 죄들에 대해서도 함께 솔직해져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와 성도의 책임

여러분, 좀 더 공평하고 사실대로 이야기한다면, 동성이건 이성이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여러분이 남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영원히 남성인 것이 아니고,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영원히 여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그곳에서는 장가가는 일도 자식을 낳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 이제는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여성인데 천국에 가면 중성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남성은 여성이 필요하고 여성은 남성이 필요합니다. 비단 자식을 낳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두 개의 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창조 원리입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의 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그러한 성적인 구별이 사라지고 소위 말하는 차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적인 불균형이나 차별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며, 우리가 마지막에 누릴 영광 속에서는 그러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서의 중요성과 정부에 대한 태도

그렇다면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니 이 땅에서도 마음대로 해도 되느냐?"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땅에 속해 있는 동안 하나님은 혼란과 혼돈보다는 질서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정부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은 정부를 허락하셨습니다. 무정부 상태는 성경을 믿는 모든 신자들이 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비록 그 정부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고 그 자체에 문제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질서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부에 대해 대항할 수 없거나, 정부가 잘못하고 있음에도 침묵만을 지킨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는 다릅니다. 성경은 위에 있는 권위와 권세에 순복하고 그들을 존중해야 함과 동시에,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과 거룩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항상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거짓되고 잘못된 일들에 대하여 여러분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하여 정부에 항의하며, 고쳐야 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성도의 본분입니다. 단지 그것은 교회가 교리로서 만들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는 어떤 특정 정부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따라, 성도 각자가 하나님 앞에 양심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정부와,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행사해야 할 권리와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는 공동으로 무언가를 만들어서 그것들을 우리의 뜻인 것처럼 강요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교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귀한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할 책임을 항상 기억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교회 질서와 권력의 위험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러한 교회와 가정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교회에도 그러하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가 우리의 악한 본성 때문인지, 혹은 사회적 영향이나 사탄의 유혹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선하고 유익한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질서가 주는 유익보다는 우리는 권력과 힘에 쉽게 빠지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에서 잘못된 공권력을 볼 때가 있습니다. 공권력은 분명히 이 사회를 유지하고 우리가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민들을 억압하고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러한 일을 많이 보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권력과 힘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현상이 비단 세상에만 국한될까요?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교회적인 차원에서 전혀 없지 않습니다. 교회에도 자칫 잘못하면 권력 다툼이 일어납니다.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하고, 자기의 권력을 행사하려 합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직분이라는 것을 통해 나타나는 잘못된 권력이 될 때가 많다고 봅니다. 목사는 목사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권력을 자기도 모르게 잘못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장로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존경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교회의 질서를 위해 세우신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누구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거나 더 높이 있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고 교회 문제를 다루는 방법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정부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겸손함을 잃지 않고, 교회에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에 대해서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만일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때, 여러분이 마치 남의 일처럼 '교회는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 것이지, 이것까지 얘기해서 교회를 시끄럽게 할 필요가 있겠나'라고 도피하지 마십시오. 교회가 자신의 신앙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된다면, 성경적인 원리를 따라서 먼저 교회 내의 당사자와 이야기해 보십시오. 그 당사자와 이야기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여러 번의 권면을 통하여 결국은 당회에 보고를 하고, 당회로 하여금 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요청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점, 혹은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그냥 내 마음대로 혼자 신앙생활하다가 끝나겠다'는 생각은 여러분의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주님의 마음은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교회를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여러분의 선택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프고 힘이 듭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고집이 센데 어떻게 일이 잘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번 마주 앉아 이야기하고 함께 고민하며 눈물을 흘리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는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사랑과 회개를 통해 교회를 세우다

 

하나님의 교회에 있는 성도 한 분 한 분이 하나님의 교회의 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와 힘든 순간들을 겪을 것입니다. 잘 되지 않기 때문에 발버둥을 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울기도 하며, 어떤 때는 화가 나서 분노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리라는 믿음 안에서 행해지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이 단순히 소속감을 느끼는 클럽처럼, 혹은 교양 생활을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겁내지도 마십시오. 교회와 성도에게 말하십시오. 성도들이 서로에게 권면하되, 진정 겸손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십시오. 제발 남을 가르치려 하거나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이 아니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높이 여기면서 겸손하게 서로를 주님 안에서 새롭게 다듬고 세워 주십시오. 잘 되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목사도 말을 듣지 않는데 여러분이라고 오죽하겠습니까? 그럴 때는 신앙의 선배들이나 믿을 수 있는 신앙인과 함께 의논하여 그 일을 잘 처리하십시오.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안 된다면 그래서 당회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해도 잘 안 됩니다.' 압니다. 회개하고 또 회개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모든 일들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기뻐하는 대로,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대로 잘 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하여 담임 목사가 제일 죄인이고 괴수입니다. 잘 안 되는 것, 그러나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합시다. 하나님의 교회가 소중하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잘 안 된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우리들이 비록 조금 피를 흘리고 힘들더라도 함께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프더라도 힘들더라도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이렇게 비난받는 이 상황에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한다면, 여러분 어디에 소망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 왜 일주일마다 모여서 이렇게 서로 얼굴 한 번 보려고 온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항상 깨어서 싸워야 할 이 부분에 가정 또한 포함됩니다. 가정은 남성의 힘이 성경에 의해 보장된다는 이유로 잘못 사용될 수 있는 곳이며,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대로 하려 하고,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관철하고 싶어 하는 곳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기에 가지고 있는 욕심들을 가정을 통해서 이루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은 너무나 착하고 어리고 순진하여 여러분 생각처럼 모든 일에 있어서 착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이 소돔과 고모라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어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다시 일어서시도록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구원과 교회의 회복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그곳에 구원의 빛을 비추셨다는 것입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 모두 멸망시키지 않으셨을까? 어떻게 살리셨을까? 왜 살리셨을까? 우리는 이것이 은혜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이여, 여러분과 저는 두려움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단순히 "내가 정말 죄인이구나"라고 깨달은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 맞아, 교회가 썩었지" 하며 함께 비난하기 위함도 아니고, "우리 교회도 너무나 많은 부분이 썩어 있지"라고 해서 그 썩은 것을 드러내 무조건 욕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진리를 세우고 싶기 때문에 함께 교회를 세워야 하며, 우리가 바로 그 교회라는 것을 함께 기억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회개와 교회의 사명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지난주 여름 성경학교를 진행하면서 아이들 앞에 서서 기도를 부탁받아 서게 되었을 때, 아이들의 눈을 보니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아이들의 그 반짝이는 눈에 비해 저 자신은 너무나 죄 덩어리였습니다. 아이들을 보니 모두 계산만 하고 있고,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는데, 이 아이들은 와서 하나님 안에서 기쁘게 뛰놀고 찬송하며 말씀 배우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는 얼굴들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과연 언제 그랬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하느라 늘 말씀을 본다고 하면서도, 성도들을 섬긴다고 속으로 불평하면서, 제가 정말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하며 많이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까지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 분명한, 여러분에게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분명한 그 길로 돌아갑시다. 함께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교회를, 여러분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우리의 고민이요 슬픔이며 동시에 우리의 기쁨인 이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다움으로 함께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바로 그 교회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이 불러주신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저희의 모습 속에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저희는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죄의 본질과 본성을 잊어버리기에 저희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그저 남보다 내가 조금 더 의로운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교회를 다시 깊이 생각하게 하여 주시고, 제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부름 받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주님 앞에서 묵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땅에서 우리의 높아진 마음을 낮추어 주시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며 십자가를 굳건히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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