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8장 22절부터 33절까지입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죽이심은 더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니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면 그 오 명이 부족하므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열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열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아멘.
여러분, 학교나 대학 강단, 심지어 교회에서도 가끔 질문할 시간이 부족할 때가 있죠. 교수님이 "학생, 끝나고 와서 질문하게"라고 말하면, 수업이 끝난 텅 빈 강의실에서 교수님 앞에 서서 질문할 준비를 합니다. 교수님이 정리를 하시다가 질문하러 온 학생을 물끄러미 보며 "그래, 이제 나한테 한번 질문을 해보게" 하는 얼굴을 보인 적 있을 거예요. 그런 경험이 있으신 분도 계시겠죠. 저도 학교에서 그런 상황이 생기면, 질문은 해 놓고 막상 교수님과 단둘이 마주 서면 너무 긴장해서 뭘 질문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정, 아브라함의 변론
지금 하나님께서는 함께 계시던 두 명의 사자를 보내시고, 아브라함과 단둘이 마주 서게 되셨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라고 기록하지만, 이 문장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 앞에 여전히 섰더니"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다리셨다는 의미죠. 이 번역이 더 마음에 와닿는 이유는 그 앞선 문맥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이제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러 내려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에, 아브라함이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 무언가를 묻거나 대화하는 순서가 자연스럽습니다.
이 상황은 마치 법정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이 모여 회의하는 '하나님의 회', 즉 천상의 회의 장소는 때로는 법정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지난번에 기억하시겠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 회의에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일이었고, 대단한 영광이었죠. 성도들이 누릴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지금 이 법정에는 기소자가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지은 수많은 죄로 인해 고통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과거에는 피해자가 직접 "이렇게 당했다"라며 기소했습니다. 기소자가 있고,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피고가 된 소돔과 고모라를 변호할 사람입니다. 그 변호사로서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부터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며, 이 법정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의 뻔뻔하지만 지혜로운 기도
아브라함은 여기서 하나님과 변론을 시작합니다. 이 변론은 단순히 변호사가 무언가를 옹호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 옳고 그름, 그리고 사실관계를 따지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맨 처음 "하나님,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려 합니까?"라고 묻죠. 이 질문은 아브라함의 변호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는데, 이는 훗날 죄인인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하늘 법정에서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피고일 때, 하나님께서는 이 피고인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변호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변호사는 조금 특이합니다. 보통 변호사들은 의뢰인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죄를 인정하더라도 형량을 줄이려 노력하죠. 하지만 아브라함도, 그리고 예수님도 처음부터 **"맞습니다. 이 모든 죄를 인정합니다"**를 전제로 합니다. 죄를 인정함으로써 형량을 깎아달라는 요구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저 모든 죄를 인정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의인과 악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소돔과 고모라가 악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소돔과 고모라가 악하다는 전제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미 창세기 13장에는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죠. 소돔과 고모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해 노예로 끌려가고 모든 것을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아브라함이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가서 다섯 연합군과 싸워 그들을 구출하는 기적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들은 노예에서 겨우 해방된 자유인이었죠.
우리의 모습과 닮은 소돔과 고모라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우리가 보기에 잠시 정신을 차린 듯했으나, 결국 그 순간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변하지 않았죠. 이 모습은 우리와도 닮아 우리를 찔리게 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어려운 일을 겪거나 병들었을 때 기적 같은 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때뿐이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나요? 하나님을 위해서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이야기하다가도, 금방 원망부터 시작해서 사는 게 지겹고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우리 모습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모든 것을 빼앗겼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좀 더 오래 변화가 지속될까 싶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죠.
그래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를 성경에서처럼 악의 상징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라며 놀라워하죠. 불이 떨어져 심판받은 데다, 그곳에서 일어났던 사건들 자체도 우리에게는 "도대체 소돔과 고모라가 어떤 동네였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고 생각할 만큼 정말 악한 곳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이로부터 2천 년이 지나 예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소돔과 고모라를 악하다고 하지만, 내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게 행했더라면 그 성은 오늘까지 있었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마태복음 11:23-24). 이는 당시 이스라엘, 즉 예루살렘이나 가버나움이 소돔보다 못하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2천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요? 오늘날 우리가 멸망한 예루살렘보다 나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경험하고, 심지어 기독교의 영향력이 유럽, 한국, 미국 등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요? 우리가 2천 년 전 주님께서 오셨을 때의 예루살렘보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 소돔과 고모라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죄에 빠져 있는 우리들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을까요? 어쩌면 소돔과 고모라는 우리에게 '새 발의 피'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의인에 대한 논증
사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그들이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수 있죠. 우리가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니까요. 우리가 지은 죄로 죽는 것은 너무나 공정한 결론이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악인이 아닌 의인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악인들이 멸망하는 중에 의인도 있지 않습니까? 그 의인들까지 함께 멸망한다면, 이것은 불공정하고 불의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 아니십니까?" 아브라함의 이 논증은 확실히 분명합니다. 어떻게 보아도 명확하죠. "아니, 의인은 살려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고 전혀 흠잡을 데 없는 논증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을 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의인이 있다면 처음에 50명부터 얘기합니다." 50명은 최소 단위이면서도 가장 큰 숫자입니다. 즉, 가장 적은 숫자를 말할 때 쓰이는 큰 단위이죠. "50명부터 시작합니다. 50명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50명의 의인을 구하는 것은 분명히 의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요청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50명의 의인을 보고 소돔과 고모라 전체를 용서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공정한 것이 아니죠. 의인은 구원하고 악인은 벌하는 것이 진정한 공의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고, 다시 45명, 그다음 40명, 30명, 20명, 그리고 10명까지 수를 줄여가며 총 여섯 번을 거듭 묻습니다. "이들이 있다면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뻔뻔한' 기도의 의미
여러분, 성경에는 중요한 **'전환점(break points)'**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창조 이야기 뒤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오는데, 이는 성경의 흑역사이자 결정적인 전환점이죠. 어떤 분들은 가인과 아벨 사건을, 또 어떤 분들은 모든 인류의 죄가 관영하여 대심판이 있었던 노아의 홍수 사건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봅니다. 바벨탑 역시 매우 중요한 사건이죠.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이변이 기록된 질문은 바로 여기, 아브라함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브라함의 말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 모두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사실 아브라함이 던지는 이 질문을 설명하기 위해 집중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세상에는 여러 의인이 등장했습니다. 에녹도 의인이었지만, 그 혼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도 의인이었지만, 노아 가족만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다릅니다. "아브라함아, 너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 즉, 천하 만민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들을 때, 흔히 주몽 신화처럼 이스라엘 건국 신화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택하셔서 그를 통해 자손이 늘어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기고, 하나님이 그 나라에 복을 주시고 율법을 주셔서 위대한 나라가 되는 이야기라고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의미가 조금 더 깊습니다. "너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 이 약속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오늘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됩니다. "너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구원을 얻고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에 근거한 기도가 실제로 처음 나온 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달라는 아브라함의 간구였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응답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약속인지 모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것은 불의한 일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보고 천하 만민을 다 구원해 주고, 의인 한 사람을 보고 악인들을 전부 살려준다는 이야기는 사실 말이 안 되죠. 그런데 이렇게 **'의롭지 않은 요청'**이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했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말을 통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여러 번 졸랐기에 "하나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 같지만, 사실 처음부터 이 말 자체가 터무니없었기에 그는 스스로를 **"티끌 같은 자, 재 같은 자"**라고 말했던 겁니다. 너무나 황당한 말이었죠. "주여, 그곳에 있는 의인을 구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 좀 이상합니다. "아니, 의인이 왜 그런 곳에서 살고 있어?"라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어떻게 답할까요? "네가 의인이라고 하면서 왜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살고 있느냐?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라고 하면서 왜 밤마다 나이트클럽에서 널 만나냐?"라고 물으시면요? 이상한 상황 아닌가요?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너무 심각했나요?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이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의인만 구해달라는 말도 좀 황송하고 이상한데,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의인이 있으니 악인들도 다 살려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건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조폭이 "나만 잡아가고 내 부하들은 다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답은 당연히 "아니지, 쟤들도 다 붙잡아가야지"가 아니라 **"알았다"**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그 기도를 정당하다고 보신 겁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브라함 기도의 특징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이 진짜 뻔뻔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의인이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있다면 당연히 살려 주셔야죠." 이런 기도는 할 수 있겠죠. "그들이 비록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먹고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그러고 있지만, 하나님, 그들의 마음은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기도해서 하나님이 들어주셨다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정말 뻔뻔한 기도 아닙니까?
지혜로운 뻔뻔함
아브라함의 기도는 막무가내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고집을 부리거나 무조건 밀어붙이는 어리석은 뻔뻔함이 아니었죠. 첫째,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나는 티끌과 재와 같은 자다. 내가 이것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기도는 무작정 조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알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또 하나, 그의 기도가 어리석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를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라는 그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기에, 저는 이 기도를 가장 지혜로운 뻔뻔한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바로 이 아브라함 기도의 표본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뻔뻔할 수밖에 없죠.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배 시간에 공동 회중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에 함께 아멘하며 참여하셨다면 모두 느끼셨을 거예요. '이건 말이 안 되는 기도다'라고요. 지난주에도 "하나님, 저희가 예배드리러 온 것 죄송합니다"라며 일주일 동안의 삶을 고백했었죠. 오늘은요? "그 일주일 동안 하나님, 저희가 이만큼 나아졌습니다"라는 기도는 나오지 않습니다. 여전히 "주님, 저희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죠. 그런데 우리가 그 기도에 왜 아멘 할 수 있을까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그 기도는 어리석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 자체가 뻔뻔한 기도죠. 물론 오늘 기도하신 재집사님이 보통 철면피가 아니라는 건 저도 잘 압니다. 수염 난 남자들은 다 철면피라고들 하죠, 얼굴에 철판을 뚫고 나오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가 다 뻔뻔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아브라함의 기도의 패턴과 유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한없이 죄인임을 알면서도, 한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놀라운 기도의 패턴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불의한 일이죠.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내용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올바르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대해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내가 그렇게 시행하겠다. 내가 용서해주겠다"라고 말이죠.
말이 안 되는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저희 세대에는 '수우미양가'라는 성적 제도가 있었죠. (요즘은 사라졌지만요.) '수'를 받으면 최고로 좋은 것이었지만, 만약 모든 과목에서 '가'를 받는다면 난리가 날 겁니다. '양'도 아닌 '가'를 받았다면 정말… 만약 성적표가 온통 '가가가가'로 도배되어 집에 가져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어머니가 "뭐야, 국어 '가', 산수 '가'… '가가가가'! 야, 너 나가!"라고 소리치셨겠죠.
여러분, 성적표 때문에 또는 잘못해서 부모님께 혼나본 경험 다 있으실 겁니다. 저도 물론 마찬가지였어요. 저희 어머니는 특히 박달나무를 좋아하셨는데, 빗자루에 달린 그 박달나무로 때리시면 정말 아팠습니다. 뼛속까지 시리고 멍이 들었죠. 그렇게 얻어터지는데 꼭 물어보시잖아요. 한참 화내며 훈계하고 또 때리고, 맞고 울고 방에 들어가 훌쩍거리다가, 한참 맞으니 배가 고파지죠. 그러면 저녁때쯤 되어 배고픈 얼굴로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으면 물어보십니다. "배고프냐?" "네." "이리 와."
여러분 아세요? 모든 부모에 대한 원망을 녹였던 유일한 의약품, 바로 안티푸라민! 그걸 발라주시면서 "아팠냐?"라고 물으시면 그 순간 마음이 사르르 녹잖아요. '아, 우리 어머니가 나를 미워하지는 않으시는구나.' 그렇게 약을 바른 다음에는 밥을 주셨죠. 여러분, 이게 말이 되나요? 실컷 얻어터지고 나가라고 했는데, 그러고도 배고프다면 밥을 준다니! 우리 모두는 왜 그런지 알고 있습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게 말이 되는 일이죠.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습, 그리고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기도의 방식은 정말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마지막 반전: 의인은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마지막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려 서서 기다리시고 질문에 '예스'라고 답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아 멸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흔히 "마지막에 10명 아니었냐? 10명만 있었으면 하나님이 살려주셨을 텐데, 10명이 없어서 망했다"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10명만 있었어도 살려줬을 거야'라고 여기죠. 때로는 "LA가 아무리 타락했어도 의인 10명만 있으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실 텐데..." 혹은 "우리 교회가 비록 문제가 많을지라도 10명만 있으면 한국 교회가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초점은 "10명만 있으면 하나님이 살려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명을 물어봤어도 아마 같은 결론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된다'고 말씀하셨을 것이고,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숫자를 줄여도 의인이 없었다는 거죠. '10'이라는 숫자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입니다. 그 이하, 골프에서 '싱글'이라고 부르듯이, 숫자가 하나로 나오는 것은 '개인'을 의미합니다. 10명을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것은 공동체로서의 마지막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1대1, 즉 개인이 되는 거죠. 소돔과 고모라 전체의 이야기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더 이상 묻지 않은 것이지, "10명부터 9명 되면 살려주십니까?" 하고 물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단 한 명의 의인조차 소용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다
이 세상에 의인이 없다는 것. 이것은 성경이 선언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자, 동시에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정말 나도 교회 다니고 믿고 싶은데 하나님이 안 믿어져요"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죠. 그래서 흔히 "하나님이 믿게 해주셔야 믿는 거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믿게 해주지 않아서 믿지 않는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믿지 않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결론적으로는 한 가지 사실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왜 "믿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거죠.
이것은 제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2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 뒤에는 이런 말씀도 이어집니다. "너희가 지금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내가 너희의 눈을 열어줄 텐데, 본다고 하니 그대로 있느니라."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본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며, 사실은 환자나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는 거죠.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놓고 "나는 의인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꼭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없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유죠.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정의
우리는 본성적으로 마지막 날에 인류가 이대로 끝나는 것이 억울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제가 히틀러와 똑같이 삶이 끝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이건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우리가 아는 불교는 이 문제를 인과론으로 해결합니다. 억겁의 시간을 거쳐 계속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하며, 잘못한 사람은 다음 생에서 사고(四苦)라는 고뇌에 빠져 살다가 거기서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 부처가 되는 길이라고 봅니다. 불교에는 신이 필요 없습니다. 해탈을 통해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죠. 해탈 후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고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방식이 나쁘지 않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억울하다는 감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대로 모두가 똑같이 끝나버리면 억울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죠.
성경 역시 한편으로는 이를 증명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죄나 행위와 상관없이 그저 삶이 끝나버린다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죠. "왜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아무런 답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동양 철학뿐만 아니라 서양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칸트 같은 철학자가 왜 순수 이성을 비판하며,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과 같은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해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다고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실천 이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내 머리로는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있는 양심과 하늘의 별이 없다면 이 세상과 나 자신은 설명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인 실천과 심판이 없다면 인간 존재와 세계는 해석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죠.
결국 성경은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며, 그 길에서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첫째, 인간은 자신이 믿는 것에 따라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자신이 의인이라고 믿는다면, 자신의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스스로 환자가 아니며 의롭고 건강하다고 믿는다면, 자신의 건강함으로 마지막 날에 서겠죠. 각자 믿는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함으로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건강함으로, 예수님의 의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겠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신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믿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그것에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이 공정하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믿는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맞이하게 될 마지막 순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너희가 의인이 없다"고 선언하며,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돌아가지 않은 아브라함, 돌아가지 않은 예수님
여러분, 오늘 우리가 발견하는 가장 놀라운 말씀은 33절에 있습니다. 이 구절이 바로 이야기의 마지막 반전을 설명해 줍니다.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여호와께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을 한번 같이 읽어 보세요.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한 말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께 "10명만 있어도 저 소돔과 고모라의 악한 자들을 다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저를 통해 이들을 모두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질문에 '예스'라고 응답하셨죠. "의인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는 살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소돔과 고모라로 가면 되는 것 아닌가요? 자신이 의인이니, 그곳에 가서 살면 소돔과 고모라는 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의 곳으로 돌아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참된 의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역시 심판이 두려운, 티끌 같고 재와 같은 존재였던 거죠.
완전한 의인, 예수 그리스도
저는 이 부분을 굳이 교리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 참 흥미로운 대목이라 여깁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여섯 번이나 간청하는데, 저는 속으로 '왜 일곱 번은 안 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보통 완전수로서 일곱 번을 채우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곱 번째는 바로 2천 년 후에 등장하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여, 이 죄인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 말입니다.
완전한 의인이셨던 그분, 예수님은 하늘로 돌아가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마지막에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해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의 길로 걸어 들어가셨죠. 아브라함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예수님은 소돔과 고모라 안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단 한 명의 의인이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즉 불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하는 자들, 그분을 붙드는 자들, 심지어 하나님께 간절히 질문했던 아브라함조차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그 불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헐벗은 모습 그대로 주께로 오라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였던 스펄전은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여, 헐벗은 모습 그대로 오라. 죄와 죄악이 가득한 모습 그대로 당신의 하늘 아버지께로 오라. 문둥병에 걸리고 더럽고 헐벗은 당신의 현재 모습 그대로,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당신 모습 그대로 예수께로 오라. 쓰레기에 불과한 당신이여, 오라. 감히 죽음 밖에는 소망이 없을지라도 오라. 절망이 당신을 뒤덮고 무시무시한 악몽처럼 당신 가슴을 짓누르고 있을지라도 오라. 주님께 와서 경건하지 못한 이 한 사람을 의롭게 해달라고 그렇게 주님 앞에 오라."
여러분, 자신의 자리로 돌아섰던 아브라함이 있었다면, 여기 돌아서지 않은 아브라함, 곧 돌아서지 않은 마지막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고 일어나 돌아서지 않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던 예수님이 바로 그분입니다.
그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여러분이 준비가 되어서 가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을 마음이 생겨서 가는 곳이야"도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조금 살아서 깨끗해져서 가는 곳이야"도 아닙니다. 그곳은 여러분이 "이제 좀 준비해서 하나님 앞에 그래도 얼굴을 세울 수 있어서 가는 곳"이 결코 아닙니다. 그곳은 소돔과 고모라 같은 바로 우리 모습 그대로 가는 곳입니다. 오로지 "주님, 제가 아픕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치료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필요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여러분의 죄를 그대로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주님께 그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짐을 지고 주님께 나아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여러분, 왜 그 짐을 내려놓고서야 주님을 따르려 하십니까? 왜 회개를 다 마치고, 주님께 완벽히 순종하거나 적어도 순종하는 척이라도 하거나, 아니면 무언가라도 손에 쥐고서야 주님 앞에 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대로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저희가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의미를 온전히 알지 못하면서도 '그러한가'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그럴까?', 혹은 '그렇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죽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를 저희는 사실 잘 모릅니다. 저희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입술로는 저희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말하지만, 저희는 사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끈질기고 무서운지를 모릅니다. 순간순간 우리를 덮쳐오는 죄의 무서움을 모르기에 우리는 스스로 정상인 줄 압니다. 주님 없이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그리스도 없이 '나도 의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신 주님, **"내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주님, 저희가 그 주님을 뵙기를 원하며 그 주님 앞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제가 지금 울고 있는 그대로, 저의 눈물 그대로, 저의 상처 그대로 주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주님, 그 주님으로 인해 저희가 산 자가 되었다는 것을, 소돔과 고모라로 걸어 들어가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제 인생 속으로 걸어 들어오신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알게 하셔서, 저희가 다시 일어서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I. 강해 설교집 > 창세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64-롯 (2) (1) | 2025.07.03 |
---|---|
창세기-63-롯 (1) (1) | 2025.07.03 |
창세기-61-하나님의 고민 (2) | 2025.07.03 |
창세기-60-사라는 어디 있느냐 (2) | 2025.07.02 |
창세기-59-그리고 나타나시다 (1) | 2025.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