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6장 7절로부터 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내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레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아멘.
아브라함, 사래, 하갈의 이야기
창세기 16장은 아브라함, 사래, 그리고 하갈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사래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갈을 통해 자손을 얻으려 했고, 그 결과 하갈이 쫓겨났으며,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로 그를 불러주신 이야기로 이해해왔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본문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시의 점진성을 고려하여 이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본 하갈과 사래
신약에 이르러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하갈과 사래를 해석할 때, 단순히 하갈을 이방인, 사래를 약속의 자녀의 조상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시내산과 예루살렘에 비유합니다. 이는 이방인이 아닌, 바로 이스라엘 자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대조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육적인 이스라엘이 하갈과 이스마엘이라면, 영적인 이스라엘은 사래와 이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래와 이삭의 후손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사실이 신약의 핵심 해석입니다.
계시의 점진성과 구속사의 흐름
구약을 기록한 모세나 아브라함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의 계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한꺼번에 드러내지 않고,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창세기 초반에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다"라는 약속이 먼저 주어지고, 이후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에 이르러 하나님은 점차 구원의 계획을 구체화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후손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직접 증언하신 바입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아브라함이 모든 구속사의 계획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신약에서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의미를 훨씬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갈의 태도와 사래의 반응
하갈은 자신이 임신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실제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힘으로 여겼고, 이로 인해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결국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고 핍박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갈이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이 시점에서 마무리되어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입니다. 겉으로 보면 사래의 복수극입니다. 사래는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사래에게 모든 것을 맡겼으며, 하갈은 스스로 도망쳤기 때문에 사래 입장에서는 완전히 해결된 일입니다.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바로 그 하갈을 하나님께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 이야기는 단순한 인간의 갈등이나 복수의 서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 개입이 시작되면서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하갈과 육적인 이스라엘
하갈이 육적인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면, 이 본문은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하신 일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의 뜻 밖으로 나가는 이스라엘을 다시 찾아가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성경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육적인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부르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도 하갈을 찾았습니다.
하갈의 도망과 우리의 유혹
그런데 왜 굳이 하갈을 다시 돌아오게 했을까요? 그냥 놔두어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건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하갈이 왜 도망쳤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 그녀를 왜 돌이키려 했는지, 그녀가 돌아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갈이 도망친 이 사건은 단지 하갈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하갈이 육적인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면, 이 사건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빠지기 쉬운 유혹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신약에서 육적인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모습은 바리새인들에게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장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 가장 많은 핍박을 받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바리새인들과 가장 유사한 실수와 유혹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이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우리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갈의 이야기를 단순히 남의 이야기로 보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유혹
비록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는 이들이지만, 신약 전체의 가르침 중 많은 부분은 "너희가 가장 흔들리기 쉽고 가장 빠지기 쉬운 실수는 무엇이냐? 그것은 율법 아래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은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자유자인데 왜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려고 하느냐?" 오늘 우리는 이 가르침이 신앙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주는지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하갈의 마음과 행위 중심의 신앙
표면적으로 본다면, 하갈이 도망친 이유는 사래의 학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그 안에는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힘'으로 여겼고, 그 '힘'을 의지했습니다. 이 점에서, 하갈은 율법과 행위를 상징하는 존재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갈은 자기 힘으로 이 집안에서 사래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고,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손까지 자기가 대신할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율법과 행위를 대표하는 존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기 의지와 교만에 빠진 신앙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깊은 죄의 모습과 사실은 아주 비슷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빠지는 실수들이죠. 우리는 대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우리의 삶에서 자주 부닥치는 문제들은 그럼에도 끊임없이 나 자신을 의지하거나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내 힘과 능력으로 삼는 것입니다. 1970~80년대 한국 교회는 큰 부흥을 경험했고 그 과정 속에서 '능력'이라는 단어를 신앙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능력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자"는 말은 결국 '내가 능력자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는 위험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능력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능력 있으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나의 신념이 아니라, 끝없이 하나님께 기대는 관계입니다. 내가 믿음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탈선: 교만과 자기 합리화
결국 믿음을 도구 삼아 나 자신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이게 바로 하갈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도망가고 있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하갈의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순간,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 마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그 지점을 사탄은 당연히 파고듭니다. 그것은 곧 자기에 대한 우월감, 비교 의식, 그리고 '내가 잘하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고, 내가 그 능력을 잘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고 있고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겉으로는 굉장히 열심히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회도, 자기 영혼도 점점 메말라갑니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점점 메말라지는 것입니다. 하갈의 모습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도망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도망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으로부터 도망가서, 결국은 '나 자신만을 위한 왕국'으로 도망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은 사실 나를 위한 하나님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조차 잘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하갈은 애굽으로 가고 있는데,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는 일, 성경이 하는 일, 그리고 목회자나 설교자의 역할이 여기에서 매우 중요해집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알려주는 것, 말해주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보는 건 너무나 어렵고,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는 너무나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지금 들보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은, "나는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 이거 김 집사님 말씀인데... 이 집사님이 꼭 들어야 해'라고 생각하셨다면, 바로 그 순간, 이 말씀이 여러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갈의 모습은 또 다른 중요한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회개가 아니라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나는 내 역할을 다 했다. 아브라함과 사래가 나에게 원하는 건 아이를 가지는 것이었고, 나는 분명히 아이를 가졌다. 그러면 내 할 일은 다 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는 내 잘못이 아니라 사래의 잘못이고, 아브라함의 잘못이고,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 아닌가?" 이런 태도도 결국,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 의를 붙드는 태도입니다. 나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봉사하고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평가하면서, 그 일하고 있는 '나'를 의지하게 됩니다. "나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일을 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나는 흔들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사실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일보다, 지금 섬기고 있는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결국 내 눈에 들보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사래가 하갈을 학대했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사실 그 단어는 '고통을 주었다'라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학대'와 '고통'은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 가장 많은 고통과 학대와 꾸짖음을 받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 사두개인들, 그리고 이스라엘입니다. 그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거기에 이 말씀의 무서운 본질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들보를 보라고, 회개하라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겐 들보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 일이 바로 그만큼 무서운 일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성령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한없이 겸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이제 이만큼은 안다", "이렇게 믿는 것이 가장 바른 신앙이다"라고 스스로 여기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 지금 다시 한 번 내 믿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들보가 보이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결국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속에, 여러분의 삶 속에 참된 회개의 기도와 삶이 없다면, 돌이킴 없이 "나는 지금 잘하고 있어"라고 여긴다면, 그저 "오늘도 예배했고, 찬양했고, 은혜 받았고, 설교도 들었고, 그 설교가 성경적이라고 느꼈으니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상태에서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지금 하갈의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일이 왜 무서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는데도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자기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래가 하갈에게 준 고통조차도, 하갈을 돌아오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만일 하갈이 그 고통을 통해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지?", "아, 내가 교만했구나. 내가 자식을 가졌다고 스스로 자랑하고, 주인을 멸시했던 내 마음이 잘못되었구나"라고 깨달았다면,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래와 더 좋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고, 더 아름다운 가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갈은 자기의 교만을 깨닫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어 도망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고, 이런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며, 내가 한 일은 그렇게 크게 잘못된 일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진리의 말씀은 아니지만 우리끼리 나누는 말이 있죠. "너무 착한 사람은 예수 믿기가 참 힘들다." 왜 그럴까요? 자기 의를 깨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특별히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깨끗하게 살려고 애썼고, 지금도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삶을 누구보다도 싫어하며, 그래서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삶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은 어쩌면 꽤 깨끗하고,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놓아버리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우리를 가장 무섭고, 가장 위험한 상태, 즉 참된 신앙이 아닌 거짓된 신앙에 빠지게 만들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그래서 여기에 성도가 회개를 멈추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왜 회개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복음을 어느 정도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은 알고 있다." "나는 적어도 바른 믿음의 길에 한 발은 딛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 여깁니다. 하지만 아니요. 우리 중 그 누구도, 진정한 바른 믿음을 완전히 소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그 '바른 믿음'이 조금이라도 진짜로 바르다면, 이 세상은 이미 바뀌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능력이란,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해 온 세상이 뒤집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 제발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여전히 부족하고, 내 생각이 어리석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여전히 미련하다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내 지식 때문이 아닙니다. 내 믿음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나는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부터, 그 자유로부터 떠나, 자기 자신만을 위한 나라, 자기 의로 도망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피해야 할 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율법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다." 혹시 여러분 중에 "저는 율법을 잘 지키지도 않고, 사실은 별로 생각하지도 않는데요."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 말씀, 우리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 보니까 우리가 대개 '육체의 소욕' 그러면 그건 육체의 욕심이죠. '소욕'이니까 욕심, 내 자만심, 내 이기심, 나의 악한 마음—이런 것들이 성령의 마음, 곧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는 마음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결국 내가 원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느냐? 바로 이 육체에 가까운 마음인데, 성령은 그걸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우리가 우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육체의 소욕은 시기심, 이기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 더 정확히는 바울이 이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자, 18절을 보세요.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삶을 뭐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율법 아래로 자꾸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육체의 소욕인데 왜 율법 아래로 들어가느냐?" 조금 더 풀어서 말씀드릴게요. 나 자신을 의지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내 실력과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 우리는 율법 아래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율법 아래로 들어가게 되면 뭐가 필요 없게 되느냐 하면, 나를 의지하니까, 근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게 율법을 좇는 삶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율법을 지키려는 게 나쁜 게 아니거든요. 십계명을 지키는 게 왜 나빠요? 우리가 곧 고백하게 되겠지만, 십계명은 하나님이 주신 너무나 귀한 계명입니다. 그걸 지키는 게 왜 나쁘겠어요? 바리새인들이 십계명을 지켜서 벌 받은 게 아니거든요. 비난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계명을 지키는 '나'가 너무 괜찮아 보이는 거예요. 그런 말을 하진 않지만, 자기 자신이 그 계명 지킴에 의지하기 시작하는 거죠.
여러분, 그래서 교회에서 배우는 모든 것들이 양면의 칼날 같아요. Q.T.를 배우면 하나님 말씀 앞에 꿇어 엎드려 겸손해지는 게 아니라, "나는 Q.T.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되는 거죠. 제자훈련을 시켜주잖아요? 그러면 제자훈련을 통해 내가 부족하고 "하나님, 하나님의 십자가가 매일 필요합니다"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초급, 중급, 이번엔 고급 과정까지 수료했다", "나는 남들이 하지 않은 훈련을 받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되는 거예요. "성경을 나는 그래도 열 번 읽었다, 다섯 번 읽었다, 스무 번 읽었다" 그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성경을 이렇게 많이 읽은 사람이니까 남들과는 다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성경을 많이 읽은 게 뭐가 잘못이에요? 많이 읽은 건 정말 좋은 일이죠. 그런데 그걸 통해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되면, 그게 바로 율법 아래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럼 뭐가 생기겠어요? 당연히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겠죠. 다른 사람을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다"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왜요? 율법 아래로 들어가니까. 그렇지 않고 은혜 아래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 제가 성경 구절 하나 생각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찬송 하나 부르다가 눈물을 흘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될 텐데, 사람은 그렇게 안 가게 되는 거죠. 그걸 성경은 뭐라고 하냐면, '율법 아래 들어갔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 제가 읽어드릴게요. 육체의 일이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이게 바로 율법 아래 들어가면 나오는 결과들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제가 보기엔 여기에 웬만한 죄는 다 들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 말이 맞다는 게, 이 앞에 있는 걸 다 읽고도 "그래도 나는 해당 안 되네? 나는 여기에 속하지 않네?"라고 생각하실까봐, 바울이 뒤에 뭐라고 썼냐면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그래서 결국 전부 다 포함된다는 겁니다. 여러분과 제가 매일 "나는 왜 이렇게 신앙이 부족할까?" "나는 왜 오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을까?" "나는 왜 여전히 사람을 미워하나?" 성경은 이렇게 진단합니다. "너희가 지금도 육체 가운데 들어가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는다." "너는 지금 너만 사랑하고 있다." 참 신기하죠? 내가 잘못했다고 깨닫고, "그래도 나는 잘하고 있다"라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은 자기 죄도 몰라. 나는 그래도 내 죄는 알아." 라고 말하잖아요?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너의 죄를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너의 그 모든 죄는 율법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 율법 아래 들어가서 너는 그 모든 것들 속에서도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저 사람은 죄를 깨닫지 못하는데, 나는 죄를 깨닫는다. 그러니까 나는 조금 낫다"는 것은, 다시 말해 율법 아래로 들어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신앙에서 무엇이, 그리고 얼마나 무서운 것들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하갈의 도피와 하나님의 개입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오늘 본문은 거의 다 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는 하갈의 또 하나의 문제는, 그녀가 도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쉽게 도피하잖아요. 문제가 생기면 일단 잊어버리고 싶고, 도망가고 싶어지죠. 물론, 그만큼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점에서 우리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그 문제를 자기 손에 쥐고만 있고, 하나님께 내어놓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잖아요? 그녀는 그 문제를 들고 도망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 제가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힘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힘드니까 도망가겠다는 건데, 결국 그 말은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뜻 아닙니까? 여전히 자기 손에 그 문제를 붙들고 있는 거죠. 하나님은 곁에 계신데도 하나님을 향해 손을 내밀지 않습니다. 문제의 주인이 여전히 자기 자신입니다. 이처럼 하갈은 율법을 의지하는 자,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가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녀는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가정, 그 안정을 모두 잃게 됩니다. 자신을 의지했기에 하나님의 손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도망갈 힘은 있었지만, 하나님을 붙잡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갈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한 여인이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집을 도망쳐 애굽으로 향하고 있어요. 그 길에는 수많은 들짐승이 있고, 언제 강도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아이를 가진 채로 도망가고 있는 그녀가, 설사 애굽에 도착해 아이를 낳는다 해도, 아버지 없는 아이를 키워야 합니다. 여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세요.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내가 문제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부르심과 회개
그래서 모든 이야기의 반전은 하갈로부터, 사래로부터,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반전은 어디서 나올까요? 하갈이 그렇게 혼자 도망가고 있다고 느끼던 그 순간, 하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는 데서 반전이 시작됩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아, 이 한마디만 가지고도 우리는 이 구절의 무게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어찌 잊겠느냐.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 불붙듯 하도다"—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이, 이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녀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이, 우리 모두가 멈춰 서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느냐?" 살아온 인생 속에서, 이 질문만큼 위대한 질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디서 왔습니까? "목사님, 집에서 왔죠." 이런 질문이 아니잖아요. 여러분은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복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디서부터 구원받은 자인지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어디서부터 나온 사람인가, 나의 출발이 어디였던가. 그리고 그다음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성경은 묻습니다. 하갈은 "지금 나는 도망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정답을 주시죠. 정답은 지난주에 이미 살펴본 내용입니다. "내 여주인에게 돌아가라." 즉,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손 아래에 복종하라." '수하에 복종하라'는 말은 '손 아래에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즉, 사래의 길로 돌아가서 그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본 것처럼, 은혜를 상징하는 사라와 율법을 상징하는 하갈— 율법 아래 있던 자가 은혜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죠.
여러분과 제가 이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내가 율법 안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또 그 사실을 때로는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도,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뭔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구나." 이걸 느끼지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내가 어떤 확신을 갖고 있든, 내가 선교를 얼마나 열심히 하든, 하나님을 얼마나 섬기고 있든, 성경을 얼마나 읽고 있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하갈의 길로 들어가기 쉬운 사람이니까요. 끊임없이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십자가 없는 율법이 얼마나 자기 자랑과 자기 의로 가득한지. 반대로, 십자가가 함께 있는 율법은 얼마나 아름답게 하나님의 백성을 세워가는지를.
두 개의 이름: 이스마엘과 엘로이
여러분, 이제 제가 오늘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부분은 '두 개의 이름'입니다. 이 두 이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단지 정답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정답을 설득하고 설명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돌아가라, 복종하라" 이것만 하면 될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녀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그 이야기 자체가 너무 풍요로워서 이 짧은 시간 안에 다 나눌 수 없겠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은 두 개의 이름 속에 담겨 나타납니다.
첫 번째 이름은 하나님께서 하갈을 보며 주신 이름,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내가 너를 들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엘'이라는 단어는 보통 이름 뒤에 붙을 때 하나님을 뜻합니다. '엘'이나 '야'로 끝나는 이름은 대부분 그렇죠. 그런데 앞부분, '이스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이 들으셨다." 무엇을 들으셨냐고요? "내가 너의 고통을 들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이름을 통해 그가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갈을 설득하시는 방식입니다. "하갈아, 네가 누구냐? 너는 무엇을 가진 자냐?"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이것은 원래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죠. 그런데 지금 그 말씀을 하갈에게 하시는 겁니다. 즉, 하갈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가 아브라함의 집에 있을 때, 너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라."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누구라고 말하는 줄 아십니까?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읽으셨다면 보셨을 겁니다. 바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불립니다. 이는 그가 아브라함의 약속 속에 있으며, 아브라함이 받은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이처럼 우리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가 누구신지를 알게 됩니다. 또한 그들이 고통과 신음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게 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 하갈과 이스마엘을 그의 은혜 가운데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들은 그동안 자기 세계 속에 빠져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특히 하갈은, 왜냐하면 이스마엘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까요. 하갈은 자신이 아기를 가졌다는 이유로, 마땅히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분노와 억울함, 고통과 눈물에 갇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이 다 그렇죠,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굉장히 힘들어합니다. 자존감이라는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는 괜찮은 사람이야. 너는 괜찮아." "너는 괜찮아." 하나님께서는 이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하갈에 대해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근거를 가지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왜 네가 소중하냐? 너는 어느 정도냐?" "이 우주를 만들고 세상을 존재하게 한 내가 네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할 만큼 너는 소중하다." 여러분, 하나님이 지금 하갈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하시는 고백입니다. "너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너는 지금 네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정말 모른다." "정말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우주의 창조자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요. 더 놀라운 점은, 하갈이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사랑하는 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녀가 그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갈은 교만해져서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하갈에게 오신 하나님께서, "그래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것이 더욱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하갈은 아직 돌이키지 않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표현은 참으로 정확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뜻입니다. 하갈에게도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위대한 일을 위해 생명을 내놓는 사람들을 우리는 가끔 발견합니다. 심지어 말도 안 되고 틀린 일에도 생명을 바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싹수가 있어 보이는 일에는 투자를 하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 중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애쓰면, "아, 저 사람은 우리 식으로 말해서 싹수가 있어. 성경을 가르칠 만한 사람이다." "더 많이 가르쳐 줘야겠다." "더 많이 돌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일에 얼굴 보기조차 힘든 분들도 있고, 예배 중에도 눈을 마주칠 기회가 전혀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내 생애를 저 사람에게 투자하겠다"는 생각이 쉽게 들까요? 인간적으로야 그래야 하지만, 사실 인간적으로 잘 안 되는 게 현실입니다. 우리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에게조차, 당신의 모든 것을 들여서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게 참 놀라운 겁니다.
오늘 본문, 16장을 다시 한번 보시면 좋겠습니다. 16장 13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이게 하갈에게 주어진 두 번째 이름입니다.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가?" 하는 뜻인데, 번역이 아주 미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하갈이 놀랐다는 표현이에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다니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이 나를 찾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그런 감탄과 놀라움이 담긴 말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이름으로 '나를 살피시는 자'라는 의미가 등장하는 겁니다. '엘로이'라는 단어에서 '엘'은 '하나님'을 뜻하고, '로이'는 '보다, 살피다'라는 뜻입니다. '엘로이'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를 직역하면, "내가 여기서도 나를 지켜보시는 이의 등을 보았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번역에선 좀 빠져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등을, 즉 그 분의 존재와 보호하심을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놀라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외로운 도망자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회개하기보다 자기 처지를 비관했고, 모든 것을 잃었으며, 태어날 자식의 앞날도 캄캄했습니다. 사방이 꽉 막히고, 하늘마저 막힌 상황이었죠. 게다가 그녀는 종이었고, 그 시대에 종이 도망가면 죽음이란 걸 알았습니다. 발각되면 즉시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녀를 살피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녀를 주목하셨다는 의미로 '라해로이'라 불렀습니다. '엘로이'가 아니라 '라해로이'라는 말은 '살아있는 하나님이 나를 살피셨다'는 뜻입니다. 또 그 앞에 '브엘'이라는 단어가 붙었는데, '브엘'은 '샘' 또는 '우물'을 뜻합니다. 그래서 '브엘라해로이'라는 지명이 된 겁니다. 하갈이 하나님을 만나 느낀 놀라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엘로이', 즉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큰 기대 없이 오늘 이 자리에 왔을 수도 있습니다. "예배는 해야 하니까,"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니까"라는 마음으로 왔을 수도 있죠.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아마 많은 분에게 공감을 줄 거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과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절망 속에서도 우리를 찾아 사랑하시며 붙드십니다.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담대히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제, 이 마음을 담아 어떤 분이 쓴 짧은 시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도 아무 기대 없이
예배당 구석에 앉는다
오늘도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 눈도, 내 손도,
거칠어진 마음도
실망도, 아픔도
예배 속에서 나는 도망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어떻게, 여기서도
도망가는 발 아래서
내 발을 잡는 분을 만날 수 있을까
그분은 내 발을 잡는다
내 상처를 붙잡는다
그리고 나의 이름을 부른다
"너는 나의 사랑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사랑이다.
나의 이름은 엘로이,
너를 살피는 자."
"너의 이름은,
여기서도 방황하며
예배 속에서도 도망쳐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쓸쓸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어도"
"여기서도
나의 사랑하는 자,
나의 아들, 나의 딸,
너는 나의 사랑이고,
너는 나의 사랑이다."
기도합시다.
브엘라해로이,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엘로이,
이 자리, 이 순간에도 불평과 무기력함 속에,
껍데기 같은 신앙으로 남아 있을지라도
당신은 나를 살피시고 내 이름을 부르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주님, 이 진리 앞에 나를 돌이키게 하시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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