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15장 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아멘.
하나님의 나라: 믿음에 대한 더 깊은 이해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방패가 되고 큰 상급이 되어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얼마나 큰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은 후에, 아브라함은 곧바로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주님, 저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그의 관심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자손,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씨에 있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그때에 그 씨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가 그를 통해서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바라본 것은 아닙니다. 아마 그가 이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는 그의 전 생애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에게 밤하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한밤의 하늘 위에서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을 보여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모든 별의 개수를 셀 수 있느냐?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 쉬우시겠지만, 사실은 아브라함이 고백하는 ‘믿음’이라는 단어는 이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에게 이 ‘믿음’이라는 단어에는 그가 우르로부터 나와 하란을 거쳐 가나안까지 인도하셨던 하나님과 함께 한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을 수 있고, 또한 그가 애굽에 내려가서 겪었던 수없이 힘들었던 일들, 그리고 가나안으로 돌아와서 전쟁 소식을 듣고 참전하여 승리했던 그 모든 일들 속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입을 통해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사실은 그 믿음의 고백 속에 여러분의 전 인생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끄시고, 붙드시고,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우리를 향하셨던 그 주님의 손길이 그 ‘믿음’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지 못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그 모든 섭리를 너무나 쉽게 표피적으로만 바라볼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셨을 때,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인생 전체를 항상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도 우리의 인생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아브라함의 믿음이 자손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볼 그의 믿음은 모두 땅에 관한 것입니다. 자손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땅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어찌 보면 좀 이상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땅 이야기에는 여러분이 조금 더 깊이 생각하셔야 할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그들이 거주할 땅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어떤 것이 연상되시나요? 하나님의 나라를 떠올리신 분이 계신가요? 하나님의 나라는 물론 여러 가지 더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그 나라를 통치하는 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이며, 마지막으로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하는 점은 이 창세기가 아브라함이라는 한 걸출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인생을 화려하게 꽃피게 하셨는가 하는 영웅적인 서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창세기는 아브라함이라는 한 믿음의 선진이 어떻게 복을 받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이 어떻게 세워 나가시느냐를 보여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전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하심의 목적입니다.
신앙의 목적 재정의: 세상의 축복에서 신성한 뜻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땅에서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신이라는 존재가 내가 사는 동안 얼마나 나의 인생을 도와주실 것인가에 모든 관심을 두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생각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사실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향하는 그 방향성을 알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과연 어떤 곳을 향해서 가고 있을까요?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방향성에 따라서 신자가 사는 목적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신앙생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들자면 바로 부흥회였습니다. 그리고 부흥회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신자가 어떻게 복을 받을 것인가’였습니다. 신자의 구원과 함께 받고자 하는 복이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여기에는 잘못된 것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우리나라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가 막 성장을 시작하려는 시기였고, 그래서 우리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던 때였습니다. 산의 나무에서 껍질을 벗겨내어 그것으로 죽을 끓여 먹었을 만큼 정말로 가난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도 그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고통과 아픔을 아시고,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기셨으며 경제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허락해 주셔서 나라가 잘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던 것은 정말로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가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 무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죄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하나님께 받을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들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훨씬 더 크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도 우리의 믿음으로 하는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응답받을 것이냐에 쏠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씩 자연스럽게 우리의 신앙에 좋지 않은 결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과 사랑을 해서 결혼할 때, 그 사람의 조건이나 그와 결혼해서 내가 얻게 될 유익만을 따지는 것과 같아진 것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될 사람이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더 이상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으며, 내가 그 땅에서 누릴 것만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내가 건강해지고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소유할 것인가’가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이해하기: 자손과 땅을 통해 나라를 세우심
그런 우리이기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복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자꾸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무슨 믿음의 행위를 했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복을 허락하셨을까’의 문제로 귀결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바는 오늘 본문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진실로 말하려고 하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그 자손과 그 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루어 가시느냐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로마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여기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대로 ‘성령 하나님의 열매’를 일컫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궁극적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려고 하는 목적은 우리가 먹고 마시며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표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인생에서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에 대한 통념적인 사고를 완전히 바꾸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이 땅에서 우리가 자랑할 것만을 우리가 만약 추구한다면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기도와 인내의 본질: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인내의 열매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으며 달려오셨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곳을 향해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을 때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을 때, 나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들로 여전히 속상하고 힘들어할 때, 마음속의 불안으로 절망스러움이 몰려올 때,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우리의 처지를 아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자녀가 지금 세상의 온갖 문제로 이렇게 고생하고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이 비유를 말한다.” 이 말씀은 기도를 하다 보면 낙심할 일이 굉장히 많이 생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기도가 속히 응답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믿고 기도를 하면 다 이루어 주실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인생 속에서는 그렇지 않은 때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우리의 기도가 신속히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기도가 잘못되었거나 충분하지 않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하여 기도할 때, 그 기도가 속히 응답받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우리는 많은 갈등과 아픔을 겪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놀라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끈질기게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래도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크신 뜻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는 드디어 ‘기다림’이라는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인내는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지만 쉽게 응답이 되지 않을 때에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여러분과 저는 그런 기도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경험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과정 속에서 인내를 배워가며 그 열매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기도는 인내의 열매만을 맺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열매와 희락의 열매, 그리고 사랑의 열매도 함께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행위 언약
혹시 여러분의 간증이 기도가 응답받아서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그친다면, 우리의 신앙의 삶은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신을 이용하여 이 땅에서 자신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정말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기억하시고 항상 생각해 주셔서 이처럼 나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주는 나의 목자시며,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우리가 병이 들거나 심하게 아플 때는 우리의 기도가 단순해지게 됩니다. ‘저를 덜 아프게 해주시고, 빨리 낫게 해 주세요!’ 그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단순해지든지, 혹은 복잡하고 신중한 기도를 하든지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울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며 사랑하시는지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인생에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자인 우리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일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깨달았다면 우리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하나님 나라를 깨달은 아브라함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살펴보는 일은 아주 귀중한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역시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 나라를 경험하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했던 것과 동일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땅과 하나님 나라를 약속으로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땅을 주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신다고요?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작아서 이 약속을 믿지 못해 증거를 보여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고 그것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질문의 뜻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자신과 자신의 자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그 약속의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어떤 내용의 계약서에 서명을 하실지를 하나님께 묻고 있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약속의 보이는 인: 성례와 십자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우선 우리에게 말씀으로 약속하신 후에 그것을 언약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인을 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확증을 시켜주시는 것이지요. 이 개념은 정확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제가 좀 더 쉬운 예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회심을 하게 되면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이제 당신은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여러분에게 세례를 준 것이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인을 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내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면 교회에서는 우리들에게 물로 세례를 받기를 권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왜 다시 물로 세례를 받아야 할까요? 이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은 이러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처럼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세례라는 언약의 양식을 통해서 여러분이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눈으로 보이도록 인을 치시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말씀을 인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영원히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약속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예배 시간에 하는 성찬입니다. 이 성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의 몸이 너의 양식이 되는 것이며, 내가 흘리는 피를 내가 잔으로 너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예수를 믿는 우리가 함께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성찬 예식을 통하여 당신께서 우리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예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하신 그 약속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와 영원히 함께하신다’라는 말이 그저 상징적으로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있음을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는 밥과 물처럼 양식과 피가 되셔서 항상 우리 몸속에, 그리고 우리의 혈관 속에 우리와 한 몸을 이루고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찬을 성례라고 부르는 것이며, 우리는 이 성례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인을 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인을 보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너를 구원했다’라는 약속을 인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성례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예식이 되는 것이고 올바른 교회의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올바르게 성례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표지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주님께서 단순히 멋있는 종교적 행위로 우리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그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직접 인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치시는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그 소중한 약속의 말씀을 동일하게 인치시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유일한 희생: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심
그러면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삼 년 된 송아지와 염소와 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와 같은 정결한 짐승들을 모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그것들을 반으로 쪼개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성경 본문만 읽어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실제로 그날에 있었던 일은 너무나도 처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짐승을 죽여서 반으로 쪼개었습니다. 그리고 비둘기를 제외한 쪼갠 소와 염소와 양들의 양쪽을 서로 마주 보도록 놓았습니다. 주위는 온통 짐승들의 피로 흥건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지금 아브라함 앞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일을 마친 아브라함은 그 짐승들의 사체 앞에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광경이 얼마나 처참한 죽음이라는 것은 그 사체 위를 노리며 그 위를 날아다니는 솔개 떼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솔개는 성경에서는 독수리와 수리를 포함하는 부정한 날짐승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욥기에도 나오는 말씀처럼 이 독수리는 시체가 있는 곳에 항상 출몰하며, 그래서 죽음을 상징하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죽은 시체를 뜯어먹으며 살아가는 짐승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이 솔개 떼들은 죽음을 상징하고 있는 장치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시작되고 있는데 죽음의 이야기가 먼저 등장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오늘 이 본문을 이스라엘이 앞으로 애굽으로 가서 종살이를 하면서 고생을 하게 될 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애굽을 솔개로 비유한 것이며, 아브라함은 이 쪼개진 고기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치려고 내려오는 솔개와 같은 애굽을 아브라함이 막고 있는 것을 상징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이 사건이 앞으로 있을 출애굽 사건만이 아니라, 그 전에 있었던 어떤 사건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솔개를 아브라함이 쫓아낸 사건 후에 해가 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깊은 잠’이라는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딱 일곱 번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항상 꿈이나 환상을 보는 선지자들과 관계되어 나오거나,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이 왔다가 간 사실을 모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사울을 깊은 잠에 빠뜨리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유명한 사건은 오늘 본문 전에 나왔던 창조 기사에서 등장하였습니다. 하와를 만드시기 위해 아담을 깊은 잠에 빠뜨린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창세기에서의 ‘깊은 잠’은 확실하게 창조의 뉘앙스를 분명히 풍기는 말임이 분명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조금 더 확실한 창조적 언어로서의 ‘큰 흑암’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단어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도 똑같이 등장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같은 ‘흑암’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될 때에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이 ‘흑암’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이루어진 시간은 해 질 녘이었습니다. 이제 곧 어두워질 때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어둠을 ‘흑암’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15장 5절에서도 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밤은 ‘흑암’이라는 단어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혀 나쁜 뉘앙스의 단어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5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한밤중에 끌고 나가셔서 밝게 빛나는 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수많은 별들이 빛나는 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어두운 밤은 별이 없었고, 순수한 흑암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어둠을 뜻하는 ‘흑암’을 창조의 언어로 사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깊은 잠’과 ‘흑암’과 같은 창조의 단어들을 사용하여 아브라함과 함께 창조의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창조와는 전혀 관계없는 단어도 함께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는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보시기에 좋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두려움이란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쪼갠 고기’, 즉 ‘죽음’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죽음과 두려움이 창조의 배경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시작된 창조를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죽음으로부터 새롭게 창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에게 구원의 창조를 일으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새롭게 만드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 속에 있는,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께서 창조의 역사가 진행됨을 보여주고 계신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어둠의 절정에서 그리스도와 구원의 본질
자, 그렇다면 이 흑암의 이야기가 오늘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끝이 날까요? 사실은 우리는 이 흑암의 끝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보여주시는 이 어둠의 이야기의 끝은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때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어둠이 있었습니다. 흑암이 온 세상을 감쌌습니다. 그리고 그 흑암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9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게 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실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며, 그리고 흑암 속에 있는 백성에 대한 창조의 선언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그에게 있을 4백 년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너의 자손이 400년 동안 한 나라를 섬기게 될 것이고, 그들의 종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 겪게 될 흑암과 두려움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섬기고 있는 나라를 직접 벌하시고 그들을 많은 재물들과 함께 끌어내어 나오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바로 구원의 이야기이지요. 그리고는 이 구원이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로 아직 아모리 족속들을 멸망시키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안전하게 가나안으로 구원해낼 만큼 아모리 족속의 죄가 중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가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이야기에는 중요한 세 가지의 요건들이 모두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죄로 인한 어둠이 나온 것이며,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해 주신다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것뿐만 아니라 의로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 심판 앞에 섰을 때 아무도 억울한 이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누구도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모두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 준비하신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유일한 희생: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심
그럼 이 구원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고 지금부터는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께 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그 언약을 맺으시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의 내용들을 아주 특별한 의식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어두움이 임했습니다. 여러분,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별빛조차 없는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어둠을 흑암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빛이 비춥니다. 불타는 횃불이 등장한 것입니다.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르는 밝은 빛이 갑자기 이 어둠 속을 비춥니다. 얼마나 환했을지 상상해 보세요. 칠흑같이 깜깜한 밤, 비어있는 화로 위에 갑자기 확 타오르는 횃불이 등장한 것입니다. 온 주위를 갑자기 환하게 비춥니다. 이 장면에서 여러분은 무슨 광경이 떠오르시나요? 흑암 중에 빛이 비치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렇지요, 지금 성경은 창조의 사건이 재현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흑암 속에서 하나님 빛이 비춰지고, 그리고 거기서 연기가 올라옵니다. 성경에서 연기와 불은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됨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셨음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 혹은 임재하실 때에는 언제나 연기와 불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연기와 불 속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빛을 비추시는데 그 앞에는 바로 쪼갠 고기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흔치 않은 의식이며, 성경에서도 고기를 쪼개어 놓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알기가 쉽지 않지만, 처음 모세가 쓴 창세기를 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예식에 대한 설명은 예레미야서에서도 잘 나와 있고, 그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흔히 있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제사를 하는 행위가 아니라 쌍방 간에 계약을 맺을 때 행해지던 것이었습니다. 요즈음에는 만약 양쪽이 서로 어떤 일을 약속하게 되면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로 서명합니다. 그리고 계약서에 있는 약속들을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서에 명시된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시대에는 계약 당사자들이 짐승들을 자신들 앞에 놓고 쪼개었습니다. 그리고 그 쪼갠 고기 사이를 계약 당사자들이 함께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의식의 의미는 누구든 그 약속을 어기게 되면 저 쪼개진 짐승처럼 자신도 쪼개져서 죽겠다는 약속을 서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동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짐승들을 자기 앞에 쪼개 놓았습니다. 그다음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은 그 사이를 걸어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언약을 맺고 그 맺은 언약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는 것이고, 만약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쪼개진 짐승처럼 죽는 것이지요. 약속의 내용을 지키면 살고 지키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과 비슷해 보입니까? 네, 바로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켜내면 살고 지키지 못하면 죽는 언약을 선대의 신학자들은 성경에서는 표현된 적이 없는 ‘행위 언약’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이 언약은 결국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아브라함 앞에 있는 이 언약을 맺는 방식은 ‘행위 언약’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함께 이 쪼개진 고기 사이를 지나갈 것이고, 이후에 이대로 그 언약의 내용이 지켜지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지켜져야 할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번성하게 해줄 것을, 그리고 이 땅들을 줄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충분히 이루어 내실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아브라함이 지켜야 할 약속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지금 창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 명령입니다. 기억하시나요? “너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아브라함이 지켜내야 할 약속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 생육하고 번성하고 싶지만 후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싶은데 자기 머리 하나 눕힐 땅 하나도 소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죽었을 때 그녀의 장례를 위해 구입한 막벨라 동굴 이외에는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손바닥만 한 땅도 소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의 결과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의 능력으로는 이 언약을 이루어 낼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조그마한 땅도, 한 명의 자식도 없는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이라는, 행위 언약으로는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언약의 정신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 불성취의 책임을 아브라함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연기와 횃불이 되셔서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십니다. 그 빛은 아브라함이 없이 홀로 쪼개어진 고기, 그 죽음 사이를 지나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죽음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언약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자손들은 그 가나안 땅에서 계속해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으로 들여보내 주면 다시 쫓겨나는 그 일들을 역사를 통해서 무수히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의 불성취에 대한 그 책임을 홀로 지심으로써 반복해서 쫓겨나는 그들을 홀로 두지 않고 직접 찾아서 쫓아 가십니다. 그들과 언제나 함께 가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그 땅을 잊어버리지 않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다시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쪼개진 고기가 되어야 하는 그 책임을 홀로 감당하십니다. 깨어질 것이 분명한 그 약속을 생각해서, 당신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약속이 지켜지지 못한 책임을 죽음으로 갚아주시겠다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죄를 쫓아서 이 땅에 오신 것이고, 그로 인해 그분께서는 상하고, 찢어지고 피를 흘리셨고, 결국 죽으셨습니다. 스스로 쪼개진 고기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의 비전과 우리의 선택: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 반응하기
아브라함이 걸어가야만 했던 그 죽음으로 향하는 그 길을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을 대신해서 걸어가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이 그 모든 사실들을 다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아브라함은 이 어린 양의 죽음의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 언약의 내용들을 그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그가 죽은 이후에도 하나씩 성취되는 것을 바라보았고 깨달았으며 그 언약의 성취를 고대하였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어디서 보고 있는 것인가요? 네, 하늘에서 그것을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의 ‘내가 있느니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번역하면 ‘ἐγώ εἰμι (에고 에이미)’입니다. 직역하면 ‘나는 있다’가 됩니다. 이 ‘에고 에이미’라는 문장이 구약에서도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70인역이라는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바꾼 성경이 있는데, 이 ‘에고 에이미’라는 문장이 똑같이 사용된 구약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이셔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하신 말씀의 헬라어와 똑같은 문장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금방 알아차렸고, 그래서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있는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살아생전에도 예수님을 바라보았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그분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려는 주님께서 그 나라를 위해서 당신께서 스스로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면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겠다고 하십니다. 그 주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반응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돌을 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는 미친 자다.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뿐이야!’라고 소리치며 돌을 들고 그 예수를 향하여 던지는 선택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도 예수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성인 중의 한 명 정도로 인정해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거나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분을 성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 즉 죽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분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본받고 따를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그들을 위하여 죽을 것이며, 그 후에 부활하실 것을 비로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을 훌륭한 선생님으로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바르게 표현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성경의 바리새인들의 표현처럼 귀신 들린 자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그분의 생애를 정확히 이해하고 어떻게 아무런 죄도 잘못도 없는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말하셨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사람들은 두 번째의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당신을 설명하며 우리 모두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는 그분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고,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까지 그를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시는 그분을 바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홀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 앞으로 나와서 머리를 숙이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나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겠다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홀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께 나오시겠습니까? 아니면 돌을 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며, 여전히 당신의 문제를 안고 쓸쓸히 다시 죄와 죽음의 길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
기도합시다!
그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이 예수를 믿는 자라고, 그래서 우리는 잘 믿고 있지만, 좀 더 잘 믿으려고 열심을 내는 자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주님, 고백합니다, 저희는 정말 죄인 중에 괴수들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순간에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며, 죄 속에 허우적거리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복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조차도 알지 못할 정도로 교만하며 우리의 잘난 맛에 살아가는 큰 죄인들입니다. 주님, 고백합니다. 저희는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저희들을 다시 부르시는 주님의 그 음성이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달콤합니다. 주님께서는 쓰디쓴 잔을 마실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다시 불러주시고,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우리를 위하여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시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며, 우리를 놓지 않고 끝까지 추적하여 붙잡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 그 사랑을 좇아 저희도 눈을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여 주시고, 그 나라를 위하여 부름받은 자로 살게 하여 주시고, 다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고, 다시 우리의 구원을 새롭게 하사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구원의 놀라운 능력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로 구원의 기쁨을 빼앗기지 말게 하시고, 구원의 능력 속에서 걷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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