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 13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날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규빗에 내고 문은 옆으로 내고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종류대로, 가축이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준행하였더라. 아멘.

 

노아의 은혜: 정체성과 방주

여러분과 저는 계속해서 창세기 6장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바로 8절의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구절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던 인간의 타락을 이전 구절에서 보여주셨고, 8절부터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선 노아라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노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로서의 노아도 함께 드러내고 있다고 지난 설교 시간에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게 노아의 정체성이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게 것이었습니다.

 

성경적 자존감: 죄인, 그러나 의인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선언을 우리가 창세기의 말씀에서 함께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으로 많은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자신은 괜찮은 존재이며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인정해 주려고 노력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우리들이 겪고 있는 많은 문제가 나의 존재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노력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세뇌시킬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우리의 존재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보기에는 놀라운 전제로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선언하십니다. ‘너는 죄인이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성경의 선포는 그래서 우리를 놀라게 하기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가치 없는 존재로 이야기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리를 지속적으로 죄인으로 정죄하시는가? 이러한 문제 때문에 우리는 자주 반발을 하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적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인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가장 자존감이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상 나의 존재의 가치나 의미를 스스로 증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세뇌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의인으로 불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자라 칭함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때마다 매일 화가 납니다. 우리 자신을 때마다 실망스럽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중에 빠져 있고, 인생을 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있을 같은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속이 상합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인생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은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선언한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바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노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실입니다.

 

방주 이야기의 구조: 심판 속의 구원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은혜를 입은 모습이 나타나는 다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방주입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방주를 이야기하고 있는 오늘 본문은 개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있습니다.

 

우선, 13절의 말씀은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라는 심판의 메시지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구절에서 바로 방주의 설계도를 주시고 있습니다. 방주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직접 설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다시 17절에서 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모든 사람의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여 땅에 있는 것들이 죽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반복되는 심판의 선언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선언 다음에는 다시 언약의 내용이 나옴을 우리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을 것이며, 방주 안으로 들어가서 피하는 모든 이들은 살게 것이라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의 구조는 하나님의 심판이 양쪽에서 선언되고, 사이에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동시에 설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의 산들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있는 같은 구조입니다. 이것이 방주를 설명하시는 성경의 방식입니다.

 

홍수 너머의 관심: 방주 자체의 의미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방주를 설명하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방주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우리의 관심은 홍수라는 단어에 많이 가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홍수는 히브리어로는마불 (Mabbul, מַבּוּל, H3999)’입니다. 외우시기가 쉬우시죠. 요즘 슈퍼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의 제목과 비슷한 발음의 단어입니다. 그러나 홍수라는 단어는 사실 성경에서 그렇게 자주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홍수가 굉장히 우리의 관심을 많이 끄는 것은 사실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홍수가 지구 전체를 물에 잠기게 했는지, 그리고 홍수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혹은 동안이나 물로 뒤덮였던 지구에 어떠한 일이 일어났던 것인지, 그리고 홍수 기간 동안 어떠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는지등과 같은 많은 의문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세상에는 홍수에 대한 수많은 설화나 신화들을 우리는 쉽게 접할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으로 미루고 오늘은 방주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눌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심판의 선언이 중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심판이 방주를 통해서 어떻게 극복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번째 방주 이야기는 은혜를 입은 자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방주를 짓는 내용 속에서 의미를 찾을 있어야 합니다. 홍수를 면하게 방주를 지어서 방주 속에 타는 것이 아니라, 방주가 제작된 모든 방법과 내용 속에서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방주 속에 들어간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보존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다른 은혜의 증거를 우리는 찾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는 가지 하나님 은혜의 일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방주 건축: 하나님의 계획과 동행

먼저는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방주를 짓기 시작할 ,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하나씩 계획을 세우게 하셨고, 자세한 내용과 순서를 자세하게 노아에게 일러 주시는 것을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제작 과정에 걸쳐서 노아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망설임 없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셔서 모든 시작과 마지막이 되어 주신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는 말이 가끔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너무 쉽게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깊은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 당연하고 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항상 그렇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모든 여정을 시작하시고 마치셨기 때문에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 죽음 앞의 구원

우리 인생에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분들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은행 잔고일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는 건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몸이 아프시고 힘드신 분들에게는 건강이 아주 절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남들을 지배할 있는 권력이나 혹은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쾌락을 좇고 계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각자내가 이것만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있을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 우리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 인생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일 것입니다. 자기의 생을 마무리하는 순간에 다다랐을 , 우리가 죽음을 당면한 그때 우리는 무슨 소원을 말할까요? 그것은 당연히 살려 달라는 소원일 것입니다. 저만 그런가요? 여러분들은 죽고 나면 주님 곁으로 가서 천국에서 영원히 것이기 때문에 그냥 담담히 땅에서의 마지막을 맞이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러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죽은 후에는 끝이 아니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다는 믿음을 여러분이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죽음이 끝이고,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정말 나의 모든 것이 소멸해 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모두 땅에서건 아니면 어떤 다른 방식으로든 조금 살고 싶은 바람을 가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는 우리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돈도 권력도 우리가 좋아하던 모든 것들도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우리를 살리실 있는 것은 바로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순간이 되면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살리는 방주: 예수 그리스도

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심판과 죽음에서 살리는 , 그것이 노아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주였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순간에 그들을 살릴 있었던 것이 방주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도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유사합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일진대 우리는 그분을 생각하며 하루를 사는 사람이 그리 많지가 않은 같습니다.

 

고난의 유익: 하나님을 찾게

물론 어떤 분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주님께 하루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를 드리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의 생명,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은 아마도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또다시 시작된 하루를 어떻게 살아낼 있을까, '오늘은 누구를 만나서 어떤 말들을 해야 하는가' 하는 일들을 떠올리게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아침 운동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하루에 번이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진심으로 생각할까요? 우리가 세상의 일들에 휩쓸려 살다 보면 그런 시간을 많이 가지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난과 환란이 가끔은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힘든 일이 닥치게 되면 그제야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고, 예수님께 간구하게 됩니다.

 

참된 : 예수 없이는 없는 인생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복을 받은 사람인가요? 세상의 모든 일들이 너무 풀리고, 물질적으로도 풍요할 뿐만 아니라 건강 문제도 자식들의 문제도 전혀 없어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번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인생이 진정으로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인생의 순간도 예수님의 도움이 없이는 없어서 매일매일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간구하며 사는 삶이 받은 삶일까요? 가장 좋은 것은 번째 인생과 번째 인생을 합친 삶을 살아가는 것이겠지요. 많은 분은 그러한 것이 하나로 합쳐진 그러한 삶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가지를 동시에 가지며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과연 어떤 인생이 진짜 복된 인생일지를 우리에게 물어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짝사랑: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리고 답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합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돈이 많은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돈을 사랑하는 만큼, 돈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건강을 사랑하며 제가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많은 것들이 모두 이러합니다. 우리들은 그것들을 사랑하나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지요.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자신밖에는 보지 못하고 살아갈 ,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 당신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나를 먼저 사랑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우리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방주: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

방주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먼저 시작하셨고 사랑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방주는 단순한 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주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는 손길과 하나님의 흔적들이 당연히 남을 수밖에 없고,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방주를 지은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홍수를 앞둔 노아 시대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으며 우리의 속에서 방주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은혜의 말씀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주를 생각하면 우선 배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생각할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멋진 선물로 떠올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방주 이야기에 대한 생각이 우리와는 조금 다른 같습니다. 성경은 방주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멋진 선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방주의 역할 (1): 세상을 정죄함

히브리서 11 7절에 있는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경고에 대한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준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로 말미암아, 방주를 짓고 홍수를 이겨낸 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방주는 세상을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방주는 노아를 구원한 것으로 먼저 생각이 되는데 성경은 노아를 구원해 방주가 사실은 세상을 정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시작은 바로 방주를 지을 때부터 입니다. 방주를 예비하고 있었다는 말은 세상을 정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방주 건축 기간: 120? 의미는?

노아가 언제부터 방주를 짓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12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만들었다는 말이 나오지만 이것에 대해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120년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까지 남은 기간이 백이십 년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노아가 방주를 120년에 걸쳐서 지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사실 계산상으로 맞지는 않습니다. 셈과 함과 야벳 형제들이 태어났을 때가 노아가 500세였을 때였고, 홍수가 일어난 것은 600 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따르면 노아의 형제가 모두 태어났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며느리 이야기도 같이 나오는 것을 보면 적어도 아들들이 성인이 후라는 것을 유추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주를 만드는 걸린 시간은 120년보다 훨씬 짧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의 해석은 홍수 년에 가까웠던 인간의 수명이었지만 후로는 120년으로 줄어들었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가지 120년에 대한 해석 방법은 어느 것이 정확하게 옳다고 확정할 있는 명백한 증거가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내리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있을 것입니다. 120년이란 시간의 해석이 홍수 이야기 전체의 의미를 움직일 정도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명백하지 않은 것들로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노아의 이야기에서 방주를 짓는데 걸린 기간인 120년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시면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서 배를 지었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있습니다. 당시의 기술을 생각할 , 나무를 가지고 배를 지어야 했으므로 방주를 짓는 모습을 생각하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수고로움을 통해 일이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것을 있고, 오랜 기간에 걸친 방주를 짓는 자체가 세상을 정죄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까? ‘너희가 이렇게 속에서 계속 산다면 심판이 임하게 것이다라고 노아의 방주 자체가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아의 방주 자체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 방주를 보고 돌아오너라, 내가 너희를 살릴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가 일만을 하며 자기 자신이 중심이 생활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세상은 정죄를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틀렸다, 너희는 옳지 않다, 너희는 죄를 짓고 있다라고 방주는 세상을 정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죄 없는 : 은혜, 회개, 용서

그렇다면 방주를 짓고 있는 노아의 입장에서 그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 세상은 정죄를 당하지만, 자신은 정죄를 받지 않는 하루하루를 살았던 것입니다. 매일의 속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이러한 정죄가 없는 그의 삶은 은혜 자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삶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 자주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같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회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이 그렇지 못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조금만 잘못에도 회개를 해야 하지만, 그것을 우리는 다음으로 미루고 시간이 지나면 이를 잊어버리거나, 혹은다음부터는 해야지하는 결심으로 끝을 내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 부부 싸움을 가장 바람직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 바람직한 부부 싸움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부부간에 다툼을 지혜롭게 하는 방법은 회개가 있는 다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용서할 있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게 노력하게 되며,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하는 기쁨을 함께 누릴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부 싸움은 보통 상대방을 용서하기보다는 '나도 어차피 잘못했으니까 그냥 묻고 넘어가는' 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을 용서하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인데 내가 감히 누구를 용서할 있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자들이며 다른 사람들도 용서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하게 용서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상대방을 용서하지 않고 그냥 대충 넘어가다 보면, 우리에게서 회개의 열매가 열리기보다는 그저 지나가는 시간만 남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똑같은 일이 생기면 우리는 상대방을 비난하게 됩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우리는 기억력이 뛰어납니다. 우리는 지나간 과거에 남으로부터 당했던 모든 잘못들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자연히 다툼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다툼이 있고 누구와 마찰이 있을 , 우리는 그것을 명확하게 해결하기보다는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편하니까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들에게 서로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으며, 회개하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위로를 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무 공식적인 법칙으로 삼아서, 이런 모든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가 회개의 시간을 가지고, 그다음에는 서로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 간의 관계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용서와 회개가 아주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귀한 진리를 너무나 소홀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가 정죄받지 않으면서, 땅에서 사람들을 용서할 있었고, 회개에 이를 있었으며, 결과로 주님께로 나아갈 있는 인생을 있었던 이유인 것입니다.

 

정죄함이 없는 삶의 능력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의인의 삶이었습니다. 노아는 말씀대로 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런 죄를 짓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비록 연약하여 쓰러질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며, 다시는 죄짓지 말고 돌이켜 회개하기를 촉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용서를 주실 알고 다시 죄를 짓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용서의 깊이를 알기에 우리는 더욱더 깊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하나님 앞으로 진실하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죄받지 않고 사는 사람의 삶인 것입니다. “너희를 다시는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를 다시는 죄인이라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너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되리라.” 이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정말로 살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대충 넘어가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좋으신 분이므로 죄도 용서해 주시겠지 얕은 생각으로 대충 넘기는 삶을 살지 마시고, ‘ 검은 죄를 눈과 같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상은 이전의 내가 아니라 정죄받지 않는 자다운 모습으로 또다시 일어나리라라는 마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또다시 내가 하얀 용서의 눈에 새까만 죄를 뿌릴지라도 다시 주님이 희게 하실 것을 믿고 또다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또다시 일어나서 다시 한번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정죄받지 않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길입니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짚고 헤엄치기: 은혜 안의 자유

제가 어렸을 , 물에 빠져서 호되게 죽을 뻔한 경험을 적이 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수영장에서 가슴보다 깊은 곳은 절대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의 가족들과 물놀이를 때도 변함이 없습니다. 일단 물에 들어가면 불안해지고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면 불안이 커지기 시작하니까요. 저의 이런 공포심을 이기게 하려고 어머니께서 어린이 회관으로 저를 데리고 가셔서 수영을 배우게 주셨습니다. 그때 수영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중에서 가장 기억하는 말씀은 힘을 빼라는 것이었습니다. 물속에서 힘을 빼면 몸이 떠오른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시겠지만, 진리는 물속에서 절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초보자들은 물속에서 힘을 주지 않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물을 먹게 되었습니다. 하나, 그때 배운 교훈은 땅을 짚고 헤엄치면 절대로 물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 정죄함이 결코 없다는 말씀이 땅을 짚고 헤엄치는 것과 어쩌면 비슷한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가 땅을 짚고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수영을 하게 되면 우리는 절대로 물에 빠져 죽을 일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에는 우리를 멸망시킬 있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절망시키고, 좌절시켜서 끝장낼 있는 어떠한 것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사탄도 우리를 어쩌지 못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보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땅을 짚고 물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속에서 물장구를 수도 있고, 멋있게 손도 한번 들어 올리며 수영을 즐길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빠져 죽지 않을 있는 수영보다 재미있는 것이 세상에 존재할까요? 물에 전혀 상처를 입지 않는 서핑처럼 재미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해 보이는 산악 절벽 타기와 같은 운동도 절대로 다치고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스릴은 세상에서 최고일 것입니다.

 

자유 안에서 마음껏 사랑하기

그런데 여러분이 이러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으시면서도 그렇게 망설이시나요? 여러분의 자유를 꽃피우지 못하시나요? 여러분은 많은 있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안에서 누릴 있는 많은 즐거움이 있으면서도, 마치 죄에 얽매인 사람처럼 살아가시나요?

 

여러분은 마음껏 사랑할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마음껏 베풀고도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이 없어져도 여전히 우리는 기쁘고 즐겁기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들과 이웃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눌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그것을 막으시려고 하시나요? 여러분은 모든 것을 퍼주고도 예수라는 우주의 가치가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두려워하시며 무엇을 남기고 싶으십니까? 땅에서는 여러분이 남겨야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여러분의 인생은 여전히 충만합니다. 그리스도로 영원히 충만합니다. 정죄 속에서 여러분은 정죄를 매일 이기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방주(테바): 모세와 연결된 '상자'

방주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한자로 () 자를 사용하므로 자연스레 배를 생각하게 됩니다. 맞습니다, 위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방주라는 단어는 속에 배라는 의미가 원래는 없습니다. 히브리어로는테바 (תֵּבָה, H8392)’라는 단어인데 이는 상자라는 뜻입니다. 테바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2 등장하는데, 그중 번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번은 과연 어디일까요? , 바로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아기였을 죽음을 면할 있었던 바로 그곳이 테바였습니다. 갈대상자에 들어가서 죽음을 면할 있었습니다. 혹시 옛날 영화 중에십계라는 영화를 보신 기억이 나시는지요. 그중에 아기 모세가 방긋방긋 웃으며 광주리를 타고 나일강을 따라 내려가고, 장면을 강가에서 미리암이 따라가며 보고 있고, 상자는 결국 이집트의 공주 품까지 도달해서 모세가 공주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과는 조금 다릅니다. 갈대상자는 광주리가 아니라 뚜껑이 있는 상자입니다. 마찬가지로 방주도 위가 막힌 상자입니다. 방주의 윗부분이 나무와 역청으로 채워지고 막혀 있는 이유는 방주 안에서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속에 있는 것들이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위가 뚫려 있으면 비가 들이치거나 뒤집히게 되면 모든 것이 물에 빠지게 되겠지만, 방주 속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하게 보호를 받을 있는 상자라는 것입니다. 물이 아무리 방주를 흔들고 때려도 방주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방주와 세례: 물로 말미암은 구원

절대 흔들리지도 물이 삼키지도 못할 방주를 두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베드로전서 3 20절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오늘 본문 이전 구절에 나왔던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노아를 통해서 복음을 전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겨우 여덟 명밖에는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냥 단순한 구절 같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굉장히 이상한 말씀이라는 것을 있습니다. 지금 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물로부터 8명을 구원해 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절에서 심판하는 물로 말미암아 이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 물에 의해서 물로 구원을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물은 하나님의 진노이며, 심판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쏟아지고 땅에서 차오른 물은 방주를 휩쓸고 마구 흔들며 무너지게 하려는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이지만 바로 물로 말미암아 노아와 여덟 명의 사람이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세례라.” 베드로 사도는 이제 물이 세례라고 밝혀 주십니다. 참으로 이상한 말씀입니다. 처음에 물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세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받으신 세례가 바로 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여러분들이 물로 세례를 받을 , 하나님의 진노가 여러분에게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맞는 말씀인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의 표로 세례를 받았지, 진노의 표로서 세례 받으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십자가와 세례: 심판의 물로 구원받음

누가 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생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였을까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십자가를 가리켜이것은 내가 받을 세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건지셔서 하늘로 데리고 가셨나요? 그리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께서는세례를 받았다라고 표현하십니다. 진노가 쏟아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로 죽으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세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물로 세례를 받을 , 물은 여러분들을 깨끗하게 하는 상징인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죽으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하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의 의미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는 물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주가 우리에게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받아야 심판과 정죄가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물을 방주가 우리를 대신하여 맞아 주신 것입니다. 모든 파도를 방주가 우리를 대신하여 맞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방주 안에서 우리의 생명이 살아난 것입니다. 세상이 정죄를 당할 , 우리는 정죄를 받지 않게 것입니다.

 

방주의 역할 (2): 구원의 과정을 보여줌

방주가 보여주는 숨겨진 하나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세상의 정죄에서 살아난 우리들은 믿음을 좇아서 사는 후사를 만들어 낸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좇아가는 모든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방주라고 말씀하시고, 방주가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 나무를 잘라서 골조를 세우고, 잘라진 나무를 다듬고 붙이며, 역청을 바르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모든 과정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이러면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 직접 멋있게 방주를 만들어 놓으신 후에, 노아와 짐승들을 방주 속으로 인도해서 들어가게 하셨으면 멋있고 근사한 그림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에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능한 하나님께서 방주를 계획하셨다면 당신께서 직접 방주를 만드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노아에게는 몇십 년이 걸렸지만 하나님은 말씀만으로도 방주를 만드실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연히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은혜의 과정: 구약 역사를 통한 계시

여러분, 진정한 은혜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에 곧바로 예수님이 오셨다면 상황이 자리에서 바로 정리가 되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고, 자리에서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셨더라면 모든 상황이 종결되지 않았을까요? 우리 생각에는 그것이 쉽고 간단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정한 은혜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도 번째 자식을 낳고 이를 여인의 후손으로 생각해서 이름까지 그렇게 지어서 불렀습니다. 노아의 이름도 여인의 후손으로서 사람들에게 안위와 안식을 것이라고 소망을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빨리 죄를 해결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를, 구원의 과정과 역사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직접 알게 하시고, 모든 과정에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오신 것이 아니라 노아가 있었고, 그다음에는 아브라함이 있었고, 이삭이, 야곱이 그리고 모세와 다윗이 있었고, 그리고 선지자들이 있었고, 성막이 있었고, 성전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우리가 누려야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가를 시간과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방주를 만드는 과정이 사실은 구원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고, 구원의 역사가 바로 여러분과 제가 누려야 진정한 은혜입니다.

 

참된 믿음: 비장함이 아닌 기쁨

예수님 믿는 순간, 예수를 믿었다고 고백하는 순간이 우리가 누릴 있는 구원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기쁨을 누리고 즐거운 순간이 구원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러한 기쁨은 오래 가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를 계속해서 닥달하게 만드는 기쁨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구원하셨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리라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가게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비장하게 예수를 믿게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여러분에게 원하는 믿음은 비장하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믿음입니다. “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비장하게 예수를 믿는 속에서는 기쁨을 찾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기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책임감과 예배를 빠지면 된다는 의무감과 맡은 직분에서 오는 책임감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많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뻐하기를 원하시며, 모든 일들이 기쁨에서 기인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좋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 오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성도들과 함께 예배하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즐거운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자의 삶일진대, 우리는 모든 기쁨은 놓쳐 버리고, 또다시 돌아온 주일을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으신지요?

 

우리는 이렇게 가장 소중한 것을 놓쳐버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과정이 우리의 복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방주 안의 : 임마누엘,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

그래서 방주에는 배를 조종하는 키도 방향타도 없습니다. 방주에서는 하나님 당신이 직접 모든 것의 항해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물결과 싸우시면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매일 해를 비추시고, 달을 뜨게 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노아의 삶이 어떠했을지 한번 생각해 볼까요? 안에서 1년을 사는 것이 어찌 보면 그렇게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밖을 쳐다보면 사방에 물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삶이 그렇게 재미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노아의 삶의 작은 단면만을 보신 것입니다. 방주 속에 노아의 식구들 이외에 누가 있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짐승들의 암수가 쌍씩 모두 들어갔습니다. 사자도 들어갔고, 양도 있었습니다. 사자가 양을 잡아먹지는 않았을까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방주 안이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에덴이 다시 한번 드러나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세상은 타락했고 심판 받는 중이었습니다. 세상은 타락해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으며, 모든 것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세상은 마지막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달려가고 있는 마지막 종착역이 과연 노아의 때보다 낫다고 얘기할 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심판과 비참함과 죽음을 역시 보고 있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에서, 하나님의 방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피조물들의 놀라운 은혜의 삶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예수 모신 곳이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가사를 아시지요. 주님 모신 그곳은 어디에서나 하늘나라라면,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짜증을 부리면서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 방주 안에서 노아와 모든 짐승들은 불편하고 힘든 동거를 하면서 서로 짜증도 내고 싸울 있는 환경 속에서 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아직은 천국이 아니었으니까요. 방주는 사실은 온전한 천국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 속에서 잠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맛만을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이들은 1년을 속에서 살았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고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아직은 천국에 들어가 살지는 않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방주가 되시고, 우리가 방주 속에서 살고,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시며, 주님의 임재, 성령 하나님이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노아 때보다 더욱더 또렷하고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포기하실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포기해서도 되는 은혜입니다.

 

교회: 방주 안의 공동체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듯이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비슷한 사람이 모인 교회에서 그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자주 짜증이 납니다. 사자와 양이 만나듯이 교회 내에서도 원수처럼 만날 수도 있습니다. 말을 섞기만 해도 화가 나는 사람이 생길 있습니다. 마음에도 거슬리고, 눈에도 거슬리는 일들이 교회 내에서도 너무나 많이 생길 있습니다. ‘교회라면 적어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느냐 불만이 생기십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노아의 이야기에서는 불편한 방주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방주 속에는 사람이 8명밖에 없었습니다. 짐승은 얼마나 있었을까요? 아마도 수천수만 마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8명의 사람이 많은 짐승들을 돌보아야 했던 척박한 환경에서 이들은 다툼과 원망이 아니라 서로의 약점과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교회

여러분,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교회는 모든 것이 완전해서 기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심으로 기쁜 곳입니다. 그러므로 포기하지 마시고, 만약 마음을 거스르는 일들을 만났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나로부터 성전과 성막과 방주를 지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고,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짚고 헤엄치기라는 것을 다시 기억하시며, 나를 정말로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마주치더라도 이것이 바로 방주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이며 속에서 내가 기뻐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십시오. 그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놓칠 있겠습니까? 이것을 개인적인 미움의 마음 때문에 뒤집어엎을 있겠습니까? 이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모두 뒤집어엎을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숙이고 엎드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나보다도 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정말로 행복하고 아름답고 온전한 교회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교회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는 부족하지만, 모자라지만,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고백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로 묶으신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인내하고, 사랑하며 다시 시작하십시오. 지난주까지도 실패하셨다면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만약 지난주까지 잊어버리고 사셨다면 오늘부터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타락한 인생 속에서 서로 죽이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것만을 지키려 하고, 가지려고 싸우는 세상 속에서 교회는 이것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나에게 이루어지는 구원을 우리들이 즐길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방주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방주가 되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씩 만들어질 때마다 우리 모두 같이 기뻐하고 격려했으면 좋겠습니다. 실패한 사람들을 만난다면 격려하고 함께 즐거워합시다. 그의 인생 속에서도 나의 인생 속에서도 예수님의 방주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마치는 기도

기도합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방주가 지어지는 자리에 저희가 있으며, 증인이며,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의미 있다는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일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 눈에 다른 사람의 약점이 보이는 것에 감사합니다. 속을 상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통하여 방주를 지어 가는 것을 저희가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 속에서 저희들이 그것을 지어 가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세상이 정죄를 받지만 우리는 정죄받지 않으며, 나도 이웃을 정죄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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