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25장 24절에서 34절까지입니다.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아멘.
야곱과 에서, 그리고 예언의 의미
우리는 지금 이삭의 족보를 깊이 탐구하고 있으며, 오늘 드디어 야곱과 에서 이야기의 첫 부분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대개 예언을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나, 예언이라는 단어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우리에게 전한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선지자나 예언자들은 단지 앞날을 예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때로는 백성을 책망하고 꾸짖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성경에서 '예언(預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미리 예(預)' 자뿐만 아니라 '맡을 예(預)' 자를 쓰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즉, 하나님의 주신 뜻을 말하는 것이 바로 예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이해
이 '예언'의 참된 의미가 중요한 까닭은, 우리가 만약 예언을 그저 미래를 미리 알려주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도 그 미리 정해진 길을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가 아는 과거, 현재, 미래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예정이나 미리 정해짐, 혹은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이 사실상 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고 시간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영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이라는 분명한 미래가 있으나, 하나님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단지 그분의 영원한 시간 속에 존재할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하나님의 영원이라는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우리가 '무한'이라는 단어의 뜻은 알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온전히 설명하거나 경험할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무한을 경험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속성 중에도 전지하심이나 전능하심처럼, 우리가 어렴풋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아는 듯하지만 명확하게는 알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항상 유한한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운명론과 하나님의 주권
우리가 이 점을 미리 말씀드리는 까닭은, 많은 이가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하셨다면 하나님도 그 정해진 길을 따라가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운명론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해진 길을 따라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예정이란 그분의 마음속에 이미 이루어진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창조와 종말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 전이든 종말 후이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영원이라는 개념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우리를 위해 유한한 시간을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에 얽매이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운명론을 믿는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운명론은 여러분이 흔히 아는 토정비결처럼, 개인의 운명이 정해져 있고 그 정해진 길을 걸어갈 뿐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운명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믿음의 본질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고, 그분의 행동이 역사를 만들어 가시며, 그분의 행동이 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운명론에 갇혀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무엇이 이미 정해졌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이 얽매인 듯 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주에서 가장 자유로우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를 이루어 오셨고, 지금도 이루고 계시며, 앞으로도 이루어 나가실 것을 알고 믿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믿는 것이지,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 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아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대한민국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믿지만, 대한민국 전체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도 사진을 통해 알지만, 우주 밖에서 직접 확인한 사람은 드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믿습니다. 심지어 아폴로가 달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미국인들 중 30%가량이 여전히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는 말은 이해가 가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고 확인하고 경험했기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삶의 위로와 확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과 삶을 매일 이끌어 가신다는 충분한 증거와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가 비인격적인 운명에 의해 움직이는 인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인격 없는 운명이 아닌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하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까요? 바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인생을 창조하고 계시니, 오늘도 우리와 함께 내일을 예비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 가시는 그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이며, 우리가 가진 확신이고,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자의 고백입니다. 그 어떤 운명이나 예정, 혹은 미래를 점치는 것보다도 이것이 가장 안전하고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선택과 조건 없는 은혜
여러분은 그 무엇보다도 이 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의 가장 어려운 부분, 즉 "왜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여 섬김을 받게 하고, 에서는 큰 자인데도 불구하고 섬기는 자로 말씀하셨는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선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 역사이며,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는 이미 이루어졌고, 앞으로 이루실 것이며, 지금도 이루고 계시는 역사라는 뜻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야곱이 에서보다 무언가 나은 점이 있어서, 혹은 하나님께서 야곱이 나중에 신앙이 더 좋아질 것을 미리 보시고 그를 택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러하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외로 그렇게 표현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가 미리 아신 것을 보고 택하셨다면,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논증하는 바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논증은 이렇습니다. 야곱을 택했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버린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야곱을 들어 말하려는 의도는,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실 때 그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고, 선이나 악을 행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앞으로 믿음이 있을 것을 미리 아셔서 그를 택하셨다면, 그것은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이렇게 될 것에 대해 하나님이 마치 운명처럼 결정된 것을 받아들이셔야 한다면, 하나님도 그것을 어떻게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명확한 지식을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그를 택하신 것이 아니라, 이 택함은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제가 로마서 9장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하나님이 부르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에서와 야곱이 택함을 받은 것이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생각을 하고 싶어 합니다. '만약 야곱이 뭔가 선하거나 악한 행동을 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다면, 우리가 이해하기 더 편했을 텐데. 하나님이 아무나 무작위로 선택해서 한 사람은 이렇게 해주고, 다른 사람은 안 뽑으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계속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이 태어나서 하는 행동을 보시고 그때 선택하지 않으셨을까? 그랬다면 우리도 불만이 없을 텐데. 착한 사람을 택하셨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여기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이 택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서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하나님이 택하시려 한다면, 아무도 택할 수 없을 겁니다. 택함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곧 구원도 일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이 내세울 만한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에서와 야곱은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도 서로 다투었습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이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렇게 천사 같던 아이들도 자라서 십 대가 되면 '아이가 저렇게 달라졌다'고들 말합니다. 미국에서는 두 살 때 말 안 듣고 문제를 일으킨다고 '테러블 투(Terrible Two)'라고 하는데, 전 그게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여섯 달만 돼도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한다고 '식스 먼스 이디엇(Six-month Idiot)'이라고도 합니다. 아마 앞으로는 더 짧아질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이 영악해지니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놀라게 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죠. 여러분이 인간이 누구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모두 똑같은 죄인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과 중립 없는 세상
여러분, 인간이 누구인지 안다면, 우리 모두가 똑같은 죄인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중립이란 없습니다. 간혹 '돈이 무슨 죄냐, 쓰는 사람 때문에 문제지'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합니다. 돈은 그저 종이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돈을 쓰는 존재는 개도, 호랑이도, 개미도, 베짱이도 아닙니다. 오직 사람만이 돈을 씁니다. 과거에는 금을 돈으로 여겼습니다. 금의 가치만큼 돈을 찍어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미국이 가진 금의 양만큼 달러를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신뢰할 수 있을 만큼 돈을 찍어냅니다. 그래서 무한정 찍어내는 것입니다. '미국이 믿을 만하다'는 전제 아래서 말입니다. 정말 그럴지는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 모든 것이 이제 사람에게만 통용됩니다. 돈은 결코 중립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것을 맘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돈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탄식과 우리의 유일한 조건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마치 그랜드 캐년도, 요세미티도, 로키 마운틴도 모두 탄식하며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날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래야 그들도 진정한 의미를 찾고 살게 됩니다. 그것들을 사용하는 존재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을까요? 우리를 위해 만드셨습니다.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를 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것이 강아지일까요? 집에 있는 누가 그렇게 할까요? 온 우주의 아름답고 반짝이는 별을 보고 그것을 즐기고 기뻐하는 존재는, 우리가 아는 한 이 우주에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우리의 눈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젠가 영광스러운 상태에 이르러 주님의 은혜로 영화롭게 될 때, 그 별들을 본다면 그때 느끼는 감격과 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온 만물이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중립이 없다는 말은 바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는 유일한 조건은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깊이
여러분, 영화에서 자주 보셨듯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얼마나 많은 유대인을 죽였습니까? 수많은 유대인이 희생되었는데, 한 독일군이 전쟁 막바지에 적군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게 됩니다. 심하게 다쳐 마을을 기어가다 어느 카페에 숨어들었는데, 그곳에서는 독일의 패망 소식 때문에 유대인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독일군 제복을 입은 그가 상처를 입고 겨우 숨을 쉬며 들어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를 잡아서 매달아도 됩니다. 그는 원수 중의 원수였습니다. 이미 수백 명의 유대인을 죽인 사람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그를 죽인다고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데 한 아이가 아픈 독일군의 신음 소리를 듣고 가서 울면서 물을 떠다 주고, 부모님께 치료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부모님은 아이 때문에 그 독일군을 데려다가 치료해 줍니다.
자, 독일군은 치료를 받을 자격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죽어도 마땅했습니까? 마땅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유대인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 부모가 그 독일군에게 베푼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자비, 사랑, 혹은 은혜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내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데도 상대방이 긍휼을 베풀어 주었음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왜 나에게 이만큼만 주느냐', '왜 더 주지 않느냐'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이것이 바로 바울의 중요한 논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셨으므로, 긍휼을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한 자유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푸신 것이지, 우리가 요구할 수도, 더 달라고 할 수도, '왜 이것밖에 안 주냐'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 곧 선을 베푸는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질문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상대방이 우리에게 빚을 졌을 때뿐입니다. '내가 예전에 너 살려줬잖아, 넌 왜 안 해주냐?'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적으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을 받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할 수가 없습니다. '왜 에서는 안 구해줬어요? 에서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이런 말을 할 자격도 없으며, 그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그 감격스러운 은혜
여러분, 우리가 이 '택하심'의 의미를 깊이 알아갈수록,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택'이나 '예정'은 우리가 생각하듯 '왜 이 사람은 안 되고 저 사람은 되고', '왜 이런 것은 이렇게 정하고 저런 것은 저렇게 정했는가' 하는 불평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가 지금 함께 나눈 이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셨다면, 이런 감격이 밀려올 것입니다.
'나는 아무런 사랑도 받을 수 없고, 사실은 원수이며, 그의 가족을 죽였는데도 지금 그의 가족에게 숨어든 나를 그가 오히려 나에게 선을 베풀고 있다면, 나는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이것이 그저 나를 살리기 위함만이 아니라, 나를 먹이고 입히고 건강하게 회복될 때까지 돌봐주고 있다면, 우리는 오히려 질문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왜 나에게, 왜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이것이 맞는 반응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울 수밖에 없을 것이며, 감동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과 그렇게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는 것을 사실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노래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다고는 사실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단다, 그것만으로도 어딘가'라는 생각으로 우리의 신앙을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놀라운 복음을 듣고도 성경이 말하는 기쁨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오랜만에 봅니다." 편지를 쓰는 것이지만, 오랜만에 보는 듯한 마음으로 인사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주님의 백성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감사하려는 순간, '우리 같은 자들을 택하신 하나님'이 생각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사하다 말고 갑자기 이렇게 외칩니다. 에베소서 1장 1절, 2절에 인사가 나오는데, 그 뒤에 갑자기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바울에게는 이것이 너무나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정'이나 '선택'이라는 말을 들으면, '왜 나는 저 사람은 아니고 나를 택했으니 하나님 마음대로고, 하나님이 다 해주셨고'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예정을 정말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나온 이야기인지 여러분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불평과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 깊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 왜 에서는 안 구해 주셨을까? 왜 야곱을 구원해 주셨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히 죽음 속에 있는 죄인이라는 것은 말로는 하지만, 사실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정과 기쁨의 관계
만약 그 진리가 우리에게 온전히 임한다면, 우리는 바울처럼 외쳤을 것입니다.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이 고백은 기쁨으로 터져 나오는 찬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놀랍구나, 놀랍구나!"
하지만 현실로 돌아와 보면, 우리는 여전히 억울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에서가 억울하든 야곱이 억울하든, 우리는 불만을 느낍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에서는 잘 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야곱은 복을 받고 에서는 복을 받지 못하는 것 아닌가? 에서가 아무리 애써도 안 된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첫 번째로, 우리의 선택과 예정은 사실 '은혜'이며, 은혜를 설명하기 위한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제가 생각하기에 더 중요한 부분은, 이 은혜는 단순한 은혜가 아니라 주권적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점을 여러분과 함께 좀 더 깊이 살펴보려 합니다.
아무도 억울하지 않다: 죄인 된 우리의 실상
그것은 어떤 내용이냐면, 우선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많은 이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합니다. 에서가 억울하든, 야곱이 억울하든, 혹은 자신이 억울하든 말입니다. 하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억울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죄의 결과로 죽는 것이므로, 억울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을 먼저 명확히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억울할 일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내가 살아났다면, 그것은 "땡큐 베리 머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가 죽을 운명인데 나 혼자 살아남았다면, '감사합니다'가 먼저 나와야 합니다. 이 지점까지는 여러분이 어느 정도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도 이해합니다.
다음으로, 이 선택, 곧 '은혜'라는 것이 '주권적 은혜'라는 말은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누가 더 고생했는가: 야곱과 요셉의 삶
여러분이 택함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을 택했습니까? 에서를 택했습니까? 야곱입니다. 확실합니까?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까? 여러분 모두 동의하시는 것입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야곱과 에서 중에 누가 더 고생했습니까? 아까는 '왜 에서는 복도 못 받고 야곱만 복을 받느냐'고 했는데, 그렇다면 누가 더 고생했습니까? 이것도 확실합니까? 다들 선뜻 대답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말려드는 기분일 겁니다. 야곱이 훨씬 더 고생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대해 야곱이 120세에 바로 앞에서 말하기를, "내가 백이십 년을 살았는데 참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험난합니다. 속고 속이며, 형과 아버지에게 속았고, 마음 편히 고향에 가본 적도 없으며, 외삼촌에게 속아 종살이를 한 뒤 돌아와서도 에서를 만날까 봐 불안에 떨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누구의 삶이었습니까? 야곱의 삶이었습니다. 에서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에서는 아들들이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12아들 모두 잘 되었고, 민족들을 이루어 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복을 받은 것일까요? 우리는 야곱이 복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성경에 기록된 야곱의 인생은 결코 복 받은 인생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선택을 받은 것입니까? 에서가 받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압니다. 야곱이 택함 받았다는 것임을 압니다. 야곱의 인생은 그래서 굉장히 이상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아는 대로 야곱의 인생이 복됩니다. 물론 그 야곱의 인생을 통해 우리는 여인의 후손이 등장하게 되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점을 이해하더라도, 에서의 인생은 야곱의 인생과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고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에서와 이스마엘, 곧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생은 야곱이 하고, 복은 우리와 모든 이방인이 받았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만약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요셉을 예로 들어볼까요? 요셉과 요셉의 형제들 중에 누가 고생을 했습니까? 이제야 감이 오는 듯한데, 대답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을 보니 그렇네요. 요셉이 편했습니까, 형제들이 편했습니까? 요셉이 편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감옥에서 한번 살아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구를 택하셨습니까? 요셉과 함께하시고 요셉을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의 인생이 형제들의 인생에 비해 무엇이 그리 대단했습니까? 무엇이 괜찮았습니까? 우리는 늘 '총리가 되었다'는 것만 압니다. 남의 나라에 가서 총리가 된 것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자기 형제와 부모를 다시는 볼 수 없었고, 배신당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이야기를 짧게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팔아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요셉을 배신하고 요셉을 팔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택은 고난의 자리, 하지만 진정한 복
여러분, 도대체 누가 모든 유익과 이익을 누리며,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복을 받은 것일까요?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여러분이 '예정' 혹은 '선택'이라는 개념을 성경이 말하는 '복'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의미와 다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하다', '왜 저 사람에게는 주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여러분은 다 그것이 속상한 것 아닙니까? '왜 저 사람에게는 주지 않느냐?' 아닙니다. 에서를 위해 야곱이 그 모든 고생을 한 것입니다. 에서의 자손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유대인만 구원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구원이 임하도록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왜 여러분은 이 예정과 선택을 마치 '로열 패밀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생 보따리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의 역사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칭찬하고, 그분들의 믿음에 감사하며, 그분들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생각처럼 무언가 나아서 그들에게 더 나은 것을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억울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말하면 누가 더 억울합니까? 야곱과 요셉이 더 억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정작 유익은 형제들과 다른 사람들이 얻는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신앙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는 신자의 모든 생애의 모습이자 색깔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선택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와 함께 걸을 것이며, 그의 인생에 함께 들어갈 것이며, 그와 함께 울 것이며, 그와 함께 기뻐할 것이며, 내가 그의 모든 것이 될 것이다"라는 것을 이 선택을 통해 친히 증명해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이해가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감격으로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부르심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너희 같은 질그릇을 만드셨는가? 그런데 그 질그릇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여러분과 저를 주님께서 택하셔서 이곳에 두신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요함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망의 자리에서 건져내어 지금 어떤 은혜를 부어주시는지, 또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잃고 사라진다 해도 '나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 사실이 우리의 인생 전체를 얼마나 의미 있고 아름답게 만드는지를 하나님이 친히 증명해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며 우리에게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택함 받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문제와 아픔, 눈물과 고난이 닥쳐오는 듯 보여도, 그 안에서 여러분이 어떻게 다르게 살아가며, 무엇으로 안심하고, 무엇으로 안식하며, 어떤 삶을 보여주는가를 통해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이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넘어질 때 우리는 그저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넘어짐을 알기에 다시 일어섭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일을 겪고도 저럴 수 있을까?'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신자들이 듣게 되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는 저렇게 실수하고 잘못했음에도 금방 우리 앞에 와서 잘못을 인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달라지려고 노력하는가?' 완전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그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삶을 향한 부르심
여러분은 이웃과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저는 범퍼 스티커도 안 붙이고 물고기 모양도 못 해요. 저 때문에 괜히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봐요." 여러분, 제발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까? 우리가 그럴 만한 능력이 되나요?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인데 우리가 그것을 가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은 사실 "나 회개하기 싫어요"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나 잘못하고 실수합니다. 죄를 짓는 일이 많습니다. 남이 볼까 봐 창피해요. 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돌이켜 살기는 싫습니다. 그러니 그냥 몰래 신앙생활 할래요. 마치 FBI나 CIA 요원처럼 '비밀 크리스천'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좀 솔직해집시다.
만일 우리가 세상 앞에서 잘못했을 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통회와 자복을 하고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교회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것이 다 우리의 죄입니다. 앞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생각하며 살도록 다시 한번 애쓰겠습니다"라고 돌아섰다면, 어느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우리는 감추기에만 급급하고 체면을 더 생각하며, '교회에 해가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그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그 우주를 뒤덮은 영광을 가릴 수 있단 말입니까? 오히려 우리가 '영광을 가린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나는 회개하기 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귀찮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내 뜻대로 살고 싶어요. 하나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이거 다 한 다음에 돌아가서 잘 해드릴게요." 여러분, 이렇게 좋게 말할 때 회개하십시오. 우리가 이러한 진실들을 이해한다면, 비로소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의 참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믿음, 칭의, 그리고 은혜의 역사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많은 분이 '믿음이 곧 구원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믿음'이 '구원'과 동일할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성경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는 '칭의'를 받습니다. 즉,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칭의는 구원의 일부분일 뿐, 구원의 전체가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역사가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구원의 서정' 과목을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믿음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행위'라는 단어를 슬며시 끼워 넣고 싶어 합니다. '그냥 믿기만 하면 되겠느냐? 벼룩도 낯이 있지, 하나님이 그렇게 공짜로 주셨는데 그래도 우리가 뭔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예배라도 빠지지 말고 가자.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가지 말고 뭔가 갖다 드리자.'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선교도 좀 가고, 전도도 좀 하고, 뭔가 얼굴 낯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 이러다 천국 가면 하나님 앞에 뵐 낯이 없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우리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이것을 축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행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행위를 빼면 구원이 안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행위가 있어야만 구원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가르침이 됩니다. 이는 그럴듯하고 나빠 보이지 않지만, 만약 우리가 이 행위를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서 평생 올바른 행동을 하면서 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생각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까요? 바로 은혜입니다. 믿음과 은혜. 여러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의 믿음에도 역사하고, 거룩함에도 역사하며, 영화로움에도 역사하고, 부르심에도 역사하며, 거듭남에도 역사합니다. 이렇게 은혜가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바로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선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로 받는 구원, 믿음으로 행하는 선행
혹시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성경 구절을 함께 살펴보시죠. 에베소서 2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분명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거의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항상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마치 차나 배와 같습니다. 그것을 타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은혜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구원하시는 걸까요? 같은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이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받은 여러분의 삶에서 비로소 선한 행동과 선한 일을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의 믿음을 알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의 삶에서 은혜의 행동이 나타나야 합니다. '나는 부족하고 어리석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매일 실패하지만,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이 선행을 포기할 수 없으며 계속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겨 그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는 작을 수도, 클 수도 있으며, 노랗거나 빨갛거나, 배나 사과, 수박, 혹은 토마토 등 다양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열매의 모양이 찌그러질 수도 있습니다. (요즘 캘리포니아 날씨가 추워 농작물들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고 농장에서 들었어요.) 모양은 예쁘지 않아도, 그 맛은 같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 노력해도 회개할 것이 더 많은 때가 있습니다. 남을 한 번 도와주려면 그 사람을 열 번쯤은 속으로 욕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쟤는 왜 저래?' 하면서도 '그래도 주님이 도와주라고 하셨으니 도와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행하기에, 우리의 토마토는 찌그러지는 것입니다. 늘 회개하고 또 회개하는 과정 속에서 예쁜 모양은 잘 안 나오지만, 그래도 그것은 토마토이고, 그래도 맛있습니다. 그렇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의 삶과 열매
그런데 그러한 회개도, 믿음의 마음도 없이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심각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신자인가? 내가 정말 은혜를 알고 있는가? 내가 정말 믿음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삶 속에서 주님을 따라가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다 내게로 오라." 그리고 주님의 멍에는 어떻다고 하십니까? 가볍고 쉽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아, 너무 어려워서 못 하겠어요'라고 말합니까? 제발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과 저는 그저 핑곗거리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조금 삐뚤어지고 심지어 '이걸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하는 마음이 들더라도, 주님의 은혜를 입어 어떻게든 하겠다는 그 길을 가고 있는 한, 여러분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고 그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열매는 가지에 맺힌다
그러므로 더 놀라운 마지막 말씀을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이 신자이기에 우리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를 잘 알 것입니다. 가지가 제 힘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붙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을 우리가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집에서 토마토를 심든, 아무리 작은 열매를 심어도 나무에 직접 열매가 달리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일은 나무가 다 합니다. 그런데 열매는 어디에 맺힙니까? 바로 가지, 곧 여러분에게 맺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박수를 쳐 주시는 것입니다. 열매가 스스로를 자랑할 수는 없지만, 여러분은 그 열매를 보셔야 합니다. 즐기셔야 합니다. 기뻐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열매는 줄기인 여러분에게 맺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게으름으로 일관하며 핑계를 늘어놓는 저희를 꾸짖어 주시옵소서. 성령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을 다시금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이미 받은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은 자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임을 이 땅에서 고백하고 증거하며, 주님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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