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1장 9절부터 13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아멘.
감개가 무량한 말씀입니다. 저는 가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의 침공을 받고 예루살렘으로부터 흩어져서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이 정말 우리와 함께 계실까?’, ‘이제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나?’. ‘성전도 무너졌고 적국에 끌려가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절망의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갈 것이다!’
물론 그때 그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포로로 잡혀가는 그 순간에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구나’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포로 생활을 끝낸 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서 자기들의 백성들과 함께 그곳에서 주님을 예배했을 때, 그 감격은 또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저희가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팬데믹으로 인해 각 가정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간, 각 가정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심령 속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아는 우리가 이렇게 다시 함께 이 교회에 모여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서로의 눈을 맞추며 함께 찬송하고 주님을 예배하는 일은 역시나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인터넷에서 함께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도 동일한 마음으로 함께 이 예배에 참여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함께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것이 성도의 크나큰 기쁨이며, 또 주님의 영광임을 고백합니다.
창세기: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이야기
우리는 지금 창세기 1장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제가 창세기를 보면서 가장 놀라는 점은 이 말씀이 하나님이 직접 적어 놓으신 창조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창조의 이야기 속에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하며,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 창세기 말씀이 단지 천지창조의 객관적인 사실들을 우리에게 서술하여 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쉽게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 세상을 지으셨으니, 하나님의 그 마음이 그때부터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쯤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게 되셨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어느 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셨는지 우리는 이 창세기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들을 향한 관심이었습니다. 많은 신앙의 열조들이나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사랑과 관심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창세기의 이야기가 자신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임을 희미하게나마 알았기에, 그들은 ‘이 모든 우주와 우리가 사는 이 지구가 우리들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고 있다’ 라는 오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 주었으며 그들이 그것을 잘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 우주의 원리를 다 이해할 만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지구를 중심으로 별들이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 속에서 보여주신 우리가 창조의 중심이라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빛이 있으라”, 이 말씀은 빛이 이 땅이 어떻게 왔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바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낮과 밤을 구분해서 나누었을 때, 우리는 하루에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알게 된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드디어 이 땅에서 우리의 시간이 시작되었고, 궁창을 통하여 우리에게 공간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것도 살 수 없었던 그 혼돈과 공허 속에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도록 하신 그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내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비록 지금의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과는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모든 일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그리고 지구 안에서도 바로 우리를 중심으로 해서 이끌려 간다는 것을, 우리는 이 창세기를 통해서 능히 알게 됩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지구와 그 위에 살고 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창세기를 더 자세히 공부하다 보면, 하나님의 이 창조 역사 속에서 여러분의 이름들이 구석구석에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태양계는 우주로 보면 한 점보다도 작습니다. 지구는 말할 것도 없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 광대한 우주 속에서 다른 어떤 별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닌, 이 지구와 그 위에 사는 우리를 생각하십니다. 조금 미시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계 역사를 한번 해 보십시오. 이 방대하고 긴 세계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위치는 어디쯤일까요? 이 긴 역사의 시간 속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는 정말로 작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40년 동안 가나안 땅에서 헤매고 있을 때, 역사의 중심은 애굽, 바로 이집트였습니다. 또 그때는 그리스도의 미케네 문명이 발원하던 시기였으며, 중국에서는 갑골문자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주나라와 은나라의 시대가 시작되던 시기였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일 수가 없었으며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던 그런 민족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서 온 세상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사랑의 편지를 쓴다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일까요? 바로 “당신” 이나 “그대”, 이런 말일 것입니다. 물론 사랑한다는 말도 중요하지만 이 말은 가장 필요할 때 한 두 번 정도만 쓰지 않습니까? 특히 편지를 마무리할 때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직접 사랑한다는 표현은 하지 않더라도 편지 안에서 그 사랑이 듬뿍 담겨있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사랑의 편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인 “당신” 이나 “그대” 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사건 속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그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뚝뚝 넘쳐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힘이 있는 나라가 역사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역사의 중심이 될 만한 많은 강한 나라들 사이에, 이스라엘을 주인공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바벨론이 아니었습니다. 페르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이집트도 심지어는 로마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을 통하여 오리라 약속하셨던 “한 아들”, 그 “자손” 때문입니다. 한 분 이신 그 아들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그토록 강력하게 논증했던, 자손들이 아닌, 한 분 “자손”,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아담과 그 후손들을 위한 창조의 역사라고 말입니다.
셋째 날: 땅과 바다의 나뉨과 출애굽 사건
그래서 셋째 날이 그 사랑의 이야기로 계속되기 시작됩니다. 셋째 날 하나님은 아래의 물과 땅을 나뉘게 합니다. 우리가 보기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물과 땅이 생겨나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지구의 모습과 비슷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는 특이하게, 이제까지 쭉 사용했던 “나눈다” 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땅이 “드러났다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났다고 표현하십니다. 마른 땅이란 말은 사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물이 물러난 땅을 마른 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출애굽기에서 보면 홍해가 갈라 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무엇이 드러났다고 표현됩니까? 네, 마른 땅이 드러나서 그 길을 건넜다고 표현되지요? 이 말은 물이 물러난 그 땅이 뽀송뽀송하게 말라 있는 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물이 물러나서 드러난 땅을 마른 땅이라고 일컫는 말입니다. 당연히 질척거리는 땅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른 땅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물이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보시면 모세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여기서 중요한 묘사는 물을 물러가게 하여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때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요? 여러분은 모세가 처음으로 창세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모세가 나기도 전부터 여호와를 알고 불렀던 민족이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처럼 애굽의 노예 생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아들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들이 계속해서 자손들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당연히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습니다. 물론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의 모든 이야기가 전부 다 세세하게 전달될 수는 없었겠지만, 이렇게 입에서 입으로 부모로부터 자식들에게 말씀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전의 전승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말씀의 암송을 통해서 지식을 자식들에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이 그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비록 기록은 모세가 했으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셔서 오류가 없는 창세기의 기록을 가능하게 하셨으나, 이 창세기의 기록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창조의 이야기 중에 많은 부분은 이미 조상들과 부모로부터 듣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애굽에서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때도 창조의 신앙이 당연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애굽 군대에게 쫓기게 된 것입니다. 도망치는 길 앞에 바다가 나타났습니다. 자연스레 그들은 자기들이 다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죽게 내버려 두시냐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에게 행하시는 이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대목을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구절을 표현한 연극이나 예술 작품들에서는 자주 놓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중요한 바로 그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0절입니다.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무엇이 섰을까요? 바로 구름 기둥입니다. 지금 애굽 군대가 뒤에서 쫓아오고 있으며, 이스라엘 진 앞은 바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앞에서 이끌어 가던 구름 기둥이 뒤로 돌아가서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서 우뚝 섰습니다. 그리고 이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계속 살펴봅시다.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구름 기둥을 사이에 두고 애굽 군대 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때의 시간은 동풍이 계속해서 불고 있는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흑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진영에는 밤을 밝히어, 그래서 애굽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셨다고 표현합니다. 흑암이 등장하고 빛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다 위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적을 보면서도 그 의미를 완전히 깨닫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계시를 통해 완성된 창세기를 모세가 읽어 주었을 때, 자신들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출애굽의 기적들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았을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를 자신들은 몸으로 체험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바다가 벽처럼 둘러 쌓여서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을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분명하게 이야기해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자신들이 겪었던 일이 창조의 사건과 똑같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들은 죽을 줄 알았고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그 죽음의 바다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창조하셨음을 알았을 때, 자신들은 애굽에서 도망치는 노예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창조되었음을 알았을 때, 그들이 느꼈던, 그들이 알게 되었던 그 기쁨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창세기와 출애굽: 우리를 위한 복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마치 신약을 사는 우리들이 구약을 읽었을 때처럼, 너무나 신비로운 복음의 이야기였습니다. 회복과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에덴동산을 떠나 죄와 죽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야만 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 다른 민족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었던 그 고통의 자리에 있던 그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두운 죽음의 바다와 같은 인생의 길로 매일 들어가야만 합니다. 밤이 정말 깊은 시절도 있었고. 우리 모두는 그것 때문에 얼마나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까? 1년 동안의 이 팬데믹 기간 동안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의 수는 긴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보면 사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가 아는 바로는 이러한 팬데믹의 위기가 약 100년 정도의 주기를 두고 온다고 합니다. 일생에 한 번도 이런 시간을 겪지 않고 사셨던 분들이 아마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간을 겪어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혼란스러웠고 불안했습니까? 지금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너무나 불편하고 불안합니다. 만약 이 기간이 다 끝나게 되면 어떤 일들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또 불안합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근원적인 이유를 살펴본다면, 우리가 헤쳐왔거나 헤쳐 나가야 할 많은 인생의 문제들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에 속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창세기를 읽으면서 알게 되는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다 죽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매일이 불안이며, 절망적이고 두려움 밖에 줄 수 없는 그 인생의 모든 문제들 속에 우리는 갇혀서 살고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답답하고 속상하게 합니다. 어떤 때는 나 자신에게만 이러한 불행이 찾아오고 있다고 낙담하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위에 있는 교우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속 깊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양한 이유와 고통으로 의사조차 치료법은 물론이고, 그 병의 원인조차 찾을 수 없는 정신적인 질병을 겪으며 사는 분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에게는 그러한 질병들이 우리를 죽이는 일이 아님을 창세기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가 이 사실을 다시 확증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우리를 죽이지 못하더라는 사실을 요. 죽음인 줄 알았는데, 이 문제 때문에 정말 절망하고 아무런 소망이 없을 줄 알았으나, 이것만은 내가 정말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것만은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를 줄 알았는데, 그렇게 답답하고 힘들고 깜깜한데, 어디를 봐도 길이 없으나, 그런데 그것이 죽음이 아니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갈라져 버렸습니다. 마른 땅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을 새롭게 창조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바다의 상징: 심판과 구원, 그리고 성전
바다의 심판과 저주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창조를 경험합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그 약속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모세를 통해서 지키셨고,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통해서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키고 계십니다. 오늘 이 셋째 날 이야기는 다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머지 절반 정도의 내용은 다음 주에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다음 주에서 살펴볼 내용처럼, 흑암과 바다는 분명히 악하게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흑암과 바다가 결국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계시록에도 나오는 것처럼, 성경 많은 곳에서 이 바다는 용이 출몰하는 장소로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가 목도하였으며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느니라.” 즉, 바다를 이끌어서 애굽을 덮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바닷속에 있는 용을 애굽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애굽을 하나님이 덮으셨기 때문에, 이것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이것은 출애굽의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바로 애굽을 용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거죠.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물을 통하여 심판하시고 저주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다음 주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우리는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려 하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다를 가르신 것은 단순히 바다를 둘로 나누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 이후의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막과 성전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역대하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놋을 부어 바다를 만들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네, 바로 물두멍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막 안에 있는 그 물두멍 기억나시지요? 한번 같이 살펴보시죠. 성막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네, 떡상이 있습니다. 촛대도 있습니다. 그리고 분향단도 있습니다. 그럼 바다는 어떤 곳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졌을까요? 이는 단지 물로 씻어서 깨끗해지는 것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모세 안에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모세와 함께 그 물을 통과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바로 세례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이 바다를 건너면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저주를, 물의 저주, 그 심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가게 되었으며, 그 심판이 모세를 통하여 갈라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모세 안에서 이루어진 이 바다의 심판은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만 했던 길입니다. 그리고 물두멍을 지나야만 이스라엘은 성막과 성전으로 들어가듯이, 놋을 부어 만든 바다라는 물두멍을 통과함으로써 새롭게 함을 받고 비로소 그 저주가 끝나게 된 것입니다.
핵심 메시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걷는 길
그리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심판의 바다는 여러분이 혼자서만 건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나, 크나큰 경제적인 문제, 혹은 심각한 건강의 문제 그 자체일 수 있겠으나, 그보다 우리를 더 힘들고 불안하게 만드는 일은 아무도 그 고통과 문제를 대신 져 줄 수 없으며, 나 혼자 오롯이 그것을 지고 이 길을 걸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혼자가 아닙니다. 이것이 이 바다 이야기의 바로 정중앙에 있는 내용입니다. “너희는 홀로 이 길을 가지 않는다!” 누구 안에서 우리가 그 길을 갑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셋째 날 후반부: 생명의 공급
바다가 물러나고 마른 땅이 드러나면 다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창세기는 그래서 놀라운 책입니다. 다시 한번 성막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막의 물두멍을 지나, 성막 안으로 들어가면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떡상입니다. 우리를 먹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들어가니 만나를 주셨습니다. 지금의 이러한 은혜의 원리가 바로 창세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바다가 물러나고 뭍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제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궁창이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 보다 먼저 그 뭍 위에 우리를 먹이시는 씨를 맺는 채소, 열매를 맺는 과일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땅이 식물을 내는 이 이야기는 마치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게 바다만 갈라서 뭍이 드러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창조하시면 그들이 먹을 양식을 이 뭍에 먼저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둘째 날에 바다를 가르시고 뭍이 드러난 일을 보시고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궁창으로 아래 물과 윗물을 나누셨으나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좋았 노라고 하신 말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물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물의 이야기는 바로 셋째 날에서 끝이 나게 됩니다. 흑암으로부터 빛이 왔을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듯이, 물, 그 혼돈과 깊음의 물이 나누어지고 땅에 드러나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되었을 때에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되어 윗물과 아랫물이 나누어졌지만, 그것 만으로 좋을 수 있으셨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 수 있는 땅이 완성된 후에야만 좋아하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함 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준비하시는지 잘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육 일째 나온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둘째 날에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어졌을 때 우리가 쉴 수 있는 집과 식탁을 주님이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준비
시편 23편은 우리에게 아주 큰 위로를 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며,” 저는 이 구절의 뜻을 신학 대학에 들어간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원수 앞에서 우리들에게 상장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했어요, 잘했다고 칭찬해 주시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식탁을 베푸시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만약 이 시편 23편에서 가슴이 떨리셨다면, 오늘 이 창세기 말씀이야 말로 진짜로 가슴이 떨리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우리가 아직 창조되기 전입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집을 지으시고, 그리고 그 곳에 식탁을 마련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계시록의 말씀을 잠시 빌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십니다. 그런데 이 신랑이 신부를 위해서 결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집을 사서, 그냥 아파트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손수 집을 지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신부가 손을 위로 뻗으면 어디까지 닿을까 생각해서 선반의 위치를 맞추셨습니다. 사랑하는 신부가 아침에 일어나면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시며, 땅을 만드시고 그 땅 위에 식물을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을 최고의 것으로, 문고리 하나까지도 보석으로 반짝거리게 만드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레스토레이션 하드웨어(Restoration Hardware) 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구를 만드는 회사라고 합니다. 주님이 이 땅의 신랑이셨으면, 아마 그 곳에서 신혼 가구를 주문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집의 바닥은 이태리 대리석을 까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샹드리에는 스페인에서 만든 팔라벨라를 다셨을 것입니다. 주방은 톤첼리와 에거스만으로 인테리어를 하셨을 것입니다. 바로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가 이 물건만 챙겨서 도망을 갔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과 새 창조의 기쁨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모세와 함께 바다를 건넜던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 그 사건이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도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예수와 함께 우리가 바다를 건너게 됩니다. 그리고 건넜습니다. 우리 역시 그 바다를 지나갔습니다. 모든 저주의 바다가 사실 우리에게는 벽과 같습니다. 여러분을 저주할 수 있는 것, 여러분을 절망시켜 인생에서 실패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왜 우리는 창세기에서 읽어내지 못하는 것입니까! 바다가 물러가고 땅이 드러나는 이 사건은 다시 출애굽기에서 물을 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경계를 정하시어, 다시는 그 물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셨다고 성경이 선포합니다. 욥기와 시편은 여러 구절에서 “물을 물러나게 하셨다”, “경계를 정하셨다”, “다시는 땅으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셨다”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마른 땅을 걷습니다. 마른 땅을 걷는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이 세상이 다 무너지고, 모든 것이 불에 타서 없어지며, 펜데믹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고통과 어려움으로 지옥과 아픔 속에 있을지라도, 주님, 저희들은 그 자리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안전함을 느낍니다. “It is well with my soul, 나의 영혼은 안전할 수 있습니다!” 라고 외치며 오늘도 이 캄캄한 바다 속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안전의 벽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마른 땅을 걷고, 그 모든 죽음의 공포가 나에게는 벽과 같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새 창조를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변하여 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달라지고 있고, 내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사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돈이 없으면 답답합니다. 건강하지 못하고 늘 아프면 힘듭니다. 그것들이 물러나는 것도 너무나 기쁜 일입니다. 저도 항상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 가족들을 위해 항상 기도합니다. 이들이 이 땅에서 너무 많은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항상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우리가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 기도는 이런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를 이렇게 창조하고 계시니 감사합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보겠습니다. 내가 창조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길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과 동행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 시지 않고, 그가 나를 버리지 않으며, 나를 영원히 사랑한다는 바로 이 사실입니다. 우주는 사라져 없어지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래서 창조는 이스라엘에게 복음이었고, 우리에게도 복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어쩌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더욱 더 완성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바다를 건넜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에서 참된 평강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랑의 기쁨과 우리의 소망
여러분, 우리가 죽음 앞에 서서, 혹은 죽음과 같은 고통스러운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주님은 우리를 안으셨고, 저주와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를 덮을 때, 주님은 우리를 안고, 우리를 바라보셨으며, 우리를 생각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우리를 바라보셨고 우리를 위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마른 땅에 걸으셨습니다. 자신의 보석을 모두 들고 나가 버렸던 그 도망친 신부를 위해 주님께서는 새로운 집을 다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이렇게 부르십니다. 순결한 신부라고…. 여러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랑을 정말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혼인 잔치에 온 모든 하객들은 우리를 향해 빈정거릴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전부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랑에게서 도망쳤던 바로 그 신부가 아니냐?’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전에 신부를 알고 있었던 모든 하객들은 다 물어볼 것입니다. 도대체 저 신부의 신랑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랑이 정말로 아깝다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근데 그 혼인 잔칫날에 제일 기쁜 사람은 누구일까요? 물론 신부도 기쁠 것입니다. 신랑이 자신을 또 받아 주었으니, 생명을 다 바쳐서 자신을 구해주었으니 그 신부의 기쁨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더 즐거운 이가 있습니다. 바로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한 신랑입니다. 바보 같은 신랑입니다. 몇 번이나 배신하고 도망친 신부를 또 받아주면서도 그녀를 순결하다고 인정해 주는 신랑입니다.
결론
이 셋째 날의 창조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각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열매가 열리는 나무가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다음 주에 다시 한번 더 좀 더 깊이 살펴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명으로 살린 우리를 향해서 순결한 신부에게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 그 분이 저와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줄 것이며, 우리의 한숨을 그분의 품에서 다 받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도 그분은 나의 신랑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영원한 나의 사랑이 될 수 밖에 없는 분이십니다. 나를 다시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나를 가장 기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이름도 알지 못합니다. 다른 누구도 우리의 신랑으로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영원한 신랑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무엇인들 우리에게 다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세상이 알고, 우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렸던 신부였다는 것을 요. 하나님의 신부 자리에서 도망쳐 나와서 마음대로 살던 죄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몸인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며 우리가 새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오, 주님! 우리를 그 주님의 기쁨으로 채워 주셨사오니 저희도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하소서. 혼인 잔치에 부름을 받아 신부로서 서 있는 저희가 주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주와 함께 기뻐하며 주의 이름과 함께 가는 그 신부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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