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8-십자가를 지신 어린양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34까지 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아멘.
자기를 높이는 의와 자기를 낮추는 사명
세례 요한에게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이 찾아와 묻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당신이 엘리야입니까?” 요한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도 아니요, 메시아도 아닙니다.” 이 질문을 던진 이들과 대답하는 세례 요한 사이에 그 말들이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이 바라보는 엘리야와 그리스도이며, 다른 하나는 요한이 바라보는 그리스도와 엘리야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했기에 그 의로움에 또 다른 의로움을 덧입기 위해 엘리야를 찾았으나, 요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밟고 지나가시는 것뿐이라고 고백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일에 너무나 많은 신경을 쓰곤 합니다. 때로는 금으로, 때로는 은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그 길 위에 가게를 세워 이익을 남기려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세례 요한이 선포한 그 길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닦인 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밟고 지나가시기 위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기꺼이 밟히고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우리는 더욱 약하여지고 강하신 주님만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셔야 합니다. 이러한 대화가 오간 바로 다음 날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자기 기대를 넘어 하나님의 약속으로 바라보는 눈
그런 대화가 있었던 바로 그 이튿날, 드디어 요한이 말했던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요한에게 나아옵니다. 여러분, 요한은 나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은 분명히 아는 사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며 다시 한번 깊이 놀라게 되는데, 그것은 세례 요한이 견지했던 관점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분명 예수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기다리는 이가 결코 자기가 알아보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알아보는 사람이 내가 기다리는 이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머무시는 바로 그 사람이 내가 기다리는 분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요한에게도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의 형상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타락한 이스라엘을 완전히 뒤집어엎고, 로마의 압제를 무너뜨리며,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폭포같이 흘려보낼 메시아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의 입장에서도, 그리고 당시 로마의 압제 아래 있던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도 지극히 당연한 열망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일이란 마땅히 로마인들을 쫓아내고 정치적·종교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뒤엎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의 기대나 모든 생각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호에 따라 메시아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하여 그 위에 머무는 분을 메시아라고 선언합니다.
절망의 상황 속에 임하는 동행의 약속
여러분에게도 그러한 눈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그 상황을 보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각자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상황이 어려우면 앞길이 열리고, 일이 안 되면 어디선가 딱 풀려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이토록 힘들게 하십니까? 정말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라고 항변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나 당연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그토록 당연한 감정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상황을 바라보며 순종하실 수 있겠습니까? 홀로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며 가슴을 뜯고 “하나님, 저는 혼자입니다”라고 고백할 때, 오히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신을 보실 수 있겠습니까?
미국이나 한국이나 상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상처는 대개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에게서 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가장 아프게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입다가 나중에는 교회에까지 실망하여 오랜 시간 신앙의 방학을 보내는 분들을 가끔 만납니다. “교회에 가봤자 사람들끼리 모여 다투기만 하고, 말로는 사랑이라면서 속으로는 싸울 준비만 하고 있는 것 아니냐”라며 교회로부터 등을 돌린 분들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약속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실 수 있겠습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그때,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이 왜 이 일을 주셨는지, 왜 나를 이 자리에 서게 하셨는지를 살피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주장하실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날의 신호탄: 예수께 임한 성령 세례
세례 요한은 바로 그 약속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붙들었던 그 약속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성령이 임하신다는 그 약속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요엘서 2장 28절 이하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엘서의 성령 강림 예언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설교의 근거로 삼았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이 일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일어날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오순절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이후에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곧바로 도래했습니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여기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란 마지막 날, 즉 종말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이제 메시아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드디어 끝을 맺게 됩니다. 요한은 그 메시아를 준비하는 마지막 사람입니다. 그런 요한에게 있어 성령이 부어지는 사건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곧 마지막 날이 오고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비록 요한이 오순절 사건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그는 오순절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지는 성령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아에게 임할 기름 부으심, 곧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는 자가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마지막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이 부어지는 자를 기다렸고, 마침내 그분이 나타나셨습니다.
연합과 대속: 우리와 하나 되기 위해 받으신 세례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참으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29절에 기록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고백은, 사실 세례 요한이 일련의 사건을 모두 겪은 후 가장 마지막에 선포한 말입니다. 시간적 순서로 보자면 예수께서 먼저 세례를 받으시고, 그 위에 성령이 임하신 뒤에야 비로소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한 사건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예수께서 굳이 세례를 받으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텐데, 죄 없으신 주님께서 왜 다시 물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수께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은 요한복음 전체가 품고 있는 ‘창조의 7일 구조’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것처럼, 이 본문의 언어들은 창조의 언어인 동시에 출애굽의 언어를 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던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또한 그와 궤를 같이합니다. 즉, 이스라엘 온 민족이 홍해를 건너며 세례를 받았듯, 예수님께서도 지금 영적인 홍해를 건너며 세례를 받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이 세례를 통해 “내가 지금 이스라엘과 함께 홍해를 건너고 있다”라는 사실을 공포하신 셈입니다. 주님께서 곧 이스라엘이 되시어, 하나님의 백성을 온전히 대표하고 계심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량없는 성령: 메마른 심령을 채우는 생수
주님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그 홍해를 지나고 계십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반드시 물세례를 받으시고 사역을 시작하신 가장 큰 이유는, 주님이 철저히 율법 아래 오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본래 하나님이신 주께서 권능으로 모든 것을 종결하고 우리를 건져내셨다면,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금세 알아보았을 것이고 혼란스러울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물세례를 받으며 율법 아래로 들어오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와 내 백성은 하나다”라는 선언이 바로 물세례 사건입니다. 주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하신 것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과 하나이시기에, 예수님 홀로 성령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속한 모든 백성 또한 함께 성령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례에 동참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다윗의 간절한 호소가 담긴 시편 51편을 기억하십니까?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이것이 다윗의 처절한 기도였으며, 우리가 찬양으로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 임한 성령은 어떤 모습입니까? 요한복음 3장 34절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기록합니다. 성령이 떠날까 봐 두려워하며 간구했던 다윗과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 한량없이 부어 주시는 세례입니다. 만약 시편 51편이 단순히 다윗의 고백을 넘어 메시아를 바라보는 기도였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우리는 비로소 다윗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응답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참된 성령께서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께 한량없이 부어지며, 부족함 없이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충만함은 주님 한 분께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 모두에게 흘러넘칩니다. 시편 23편에서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고 고백했던 다윗의 노래는 이제 우리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를 아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딸이라, 너는 내 것이라”고 확증하시는 장면이 바로 성령의 강림입니다. 비둘기같이 임하신 성령을 보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포하셨던 그 음성처럼,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충만한 성령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포하시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축복이자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잔이 차고 넘치도록 성령이 한량없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의 것들을 쫓다가 교회에 오면, 우리의 심령이 참으로 메말라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막과 같은 지대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신앙이 좋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마치 쩍쩍 갈라진 논바닥을 걷는 듯한 메마름을 느낄 때 그 영혼을 과연 누가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여기 한량없이 주시는 성령을 마시십시오. 이것이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지칠 줄 모르는 샘이시며, 세상의 모든 물이 마를지라도 그치지 않는 영원한 샘물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시편 기자와 같이 기쁘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현재에 임한 마지막 심판: 그리스도 안의 영원한 위로
요한은 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바로 저 성령이 임하여 한량없는 성령이 부어진 바로 저 사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여러분,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굉장히 중요한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이자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지금 성령이 그분의 머리에 임하시고 성령의 세례가 예수에게 베풀어짐으로써, 바로 이분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이 되셨습니다. 물론 마지막이라는 말은 미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 곧 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단어를 한번 주목해 봅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죄에 대한 심판은 본래 언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까? 세상 죄에 대한 심판은 당연히 먼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그동안 지은 모든 죄의 목록을 낱낱이 적고 당신은 이런 죄, 저런 죄를 지었다고 판결하며 마지막에 결산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입니다. 따라서 세상 죄에 대한 심판은 마지막 날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에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세상 죄를 지금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냈다고 합니다. 마지막이 예수님께 지금 임했고, 마지막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금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심판을 직접 받으시는 중입니다. 세상 죄를 진다는 말은 여러분 한 명 한 명의 개인적인 죄를 진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공의롭고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그 최후의 심판, 마지막 심판을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 심판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그 심판을 받아 죽으실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쭉 살펴본 것처럼, 처음부터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여러분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었다면, 여러분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 심판을 통과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여러분이 흔히 이야기하는 종말을 뜻합니다. 우리가 천국이라 말하고 하나님의 나라라 부르며 이제 마지막에 오실 나라가 있다고 믿는 그 마지막, 그곳에서는 눈물도 슬픔도 없고 오직 기쁨 속에 하나님과 영원히 산다고 믿는 그 마지막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그 천국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성도들이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밖에 없는지 아십니까? 이 땅에서 당면한 문제가 풀리거나 일이 잘 해결되어 받는 위로는 정말 너무나 작은 것입니다. 그것은 잠시 왔다가 금세 가버리는 것들입니다. 신랑이 잘해줄 때가 있어 기분이 좋다가도, 어떤 때는 속을 썩여 마음이 아플 때도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항상 좋은 신랑이나 항상 좋은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 것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평안에는 한계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도를 닦습니까? 다 같이 도를 닦아서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든지 관계없이 “나는 바위다”라고 다짐하며 살아야 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평화는 여러분이 도를 닦거나 세상의 풍파를 부정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평안이 지금 여러분과 함께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평안하라, 평안하라.” 그렇기에 아까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이 세례 요한의 시각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신다면, 내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나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여러분 자신을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천국을 지금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늘나라 천국의 그 모든 영광을 맛보고 있으며 미리 앞당겨 조금씩 보고 있지만, 이 땅에서의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 하늘의 영광을 영원히 만끽하며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돌아가신 분들이 계신다면 너무 슬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육체적으로 떨어져 있기에 슬퍼할 순 있으나, 그 외의 모든 면에서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심판을 받았기에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표와 성취: 이삭의 질문에 답이 되신 어린 양
요한은 예수를 일컬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 부릅니다. 수많은 표현 중에 왜 하필 ‘어린 양’이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린 양이라는 말을 들을 때, 단순히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 양이신가 보다’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어린 양에 얽힌 역사는 그보다 훨씬 깊고 깁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마지막 어린 양’이십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순으로 맨 마지막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온전히 머금은 ‘최후의 어린 양’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구약 창세기로 돌아가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이 이야기는 주일 학교 시절부터 교회를 다니신 분들이라면 거의 외우다시피 할 정도로 익숙한 내용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왜 하필 그 아들이어야 했을까요? 아들이 많은 집도 아니요, 오직 하나 남겨 놓으신 그 귀한 아들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브라함의 처지였다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이 장면은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문학 작품으로 보더라도 우리 모두를 경악하게 할 만큼 극적인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밤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침에 짐을 싸면서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3일 동안 모리아 산을 향해 걸어가며 아들과는 과연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떠났다고 기록합니다. 이삭의 이야기를 유심히 읽다 보면, 우리는 그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삭은 별다른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아들이 있다면 참 좋겠지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고, 가자면 가고, 손발을 묶어도 가만히 있는 아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온전히 순종하는 아들의 전형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참된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구약에서는 그 대표성이 다윗이나 아브라함, 이삭, 혹은 야곱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 나타납니다.
본문 속의 이삭은 바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로 서 있습니다. 그는 번제에 쓸 나무를 등에 지고 산을 오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본래 자기가 짊어진 그 나무 위에서 불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지고 간 나무로 불을 피워 그 위에서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었습니다. 그 나무는 곧 죽음이며 절망일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끝까지 움켜쥐고 있는 탐욕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바로 우리의 ‘죄’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죄의 짐을 지고 올라가 번제단 위에 쌓고 그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삭의 질문은 너무나도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아버지,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고백대로, 하나님이 어린 숫양을 친히 준비하셔서 그것으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승리: 우리와 하나 된 어린 양의 축복
이삭이 던졌던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진정한 응답은 사실 창세기 22장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장 29절에 있습니다. 바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라는 선포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산을 오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이삭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그 아들을 묶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이삭을 묶고 계셨습니다. 모리아 산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아낸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찾아오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죽어야 할 이삭을 오히려 풀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번제물로 각을 떠서 죽어야만 했던 그를 자유하게 하시고, 아브라함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이삭’을 놓으셨습니다. 번제할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모리아 산과 시온 산, 그리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시온 산에, 모리아 산에,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짊어지고 가던 그 번제할 나무들의 실체를 그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가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나의 절망과 죽음, 그리고 내가 움켜쥐었던 모든 탐욕과 죄를 그때서야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 무거운 짐에 깔려 고통과 절망 속에 신음해야 했던 그 자리가, 바로 위로와 기쁨과 감사의 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때서야 알게 됩니다.
이 어린 양은 유월절에 다시금 등장합니다. 유월절 양은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나흘 동안 한 집에 거하게 됩니다. 제물이 될 양을 즉시 잡지 않고 4일간 함께 먹고 자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양이 곧 이스라엘 민족 자신이며, 이 양의 운명이 곧 이스라엘의 운명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린 양은 대신 죽고, 죽어야 할 이스라엘은 오히려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요한복음에 이르러 하나님의 ‘마지막 어린 양’을 목격합니다. 우리와 하나가 되신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셨고,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몸소 누우심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와 온전히 하나가 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목마르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 갈증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생수를 마시게 하시고, 정작 자신은 목말라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생명을 주시려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대장정의 끝에서 만나는 이 어린 양은, 우리와 하나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혼인 잔치를 열고 우리에게 모든 축복을 베푸실 바로 그 어린 양이십니다. 다윗의 어린 양도, 아브라함의 어린 양도, 모세의 어린 양도 아닌, 바로 여러분과 저의 어린 양이십니다. 여러분, 그 어린 양과 함께 이 목마른 세상 속에서 생수를 맛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며, 하늘의 위로를 충만히 누리는 삶을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높이려던 교만한 의를 버리고, 오직 주님이 밟고 지나가실 길을 닦는 겸손한 사명자로 서게 하옵소서. 세상의 상처와 절망 속에서도 인간적인 기대를 내려놓고,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짊어지고 죽어야 할 죄의 나무를 대신 지고 골고다에 오르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주님이 대신 심판받으심으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위로가 임하였음을 믿습니다.
이제 메마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에게 한량없는 성령을 부어 주시어, 날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승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