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3-가라지의 비유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3장 24절에서 30절까지입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아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역사적 오해와 올바른 해석: 밭은 세상이다
말씀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오늘은 설교가 좀 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왜냐하면 오늘 다루어야 할 내용들이 굉장히 양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루고 싶은 주제도 많고 또 여러분이 꼭 아셔야 할 중요한 교훈들이 오늘 이 비유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오해를 굉장히 많이 받고 있는 비유 중 하나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 비유에는 신앙생활에 굉장히 중요한 많은 원리에 관한 이야기도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이 시간에는 그중에서도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것들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굉장히 유명한 예수님의 비유 중 하나인 만큼, 그 해석에 있어서도 역사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논쟁이란 단순히 이 비유의 정확한 의미를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보다 좀 더 역사적인 사건들과 연관된 논쟁이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했던 사건은 바로 도나투스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의 배경은 초대 기독교가 막 공인되기 직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그 박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포기하고 배교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 사람들 중에는 많은 성직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 일은 도나투스 논쟁으로 발전했으며 그 쟁점은 교회 안에서 배교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었고, 결국은 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더욱이 배교한 성직자가 시행한 세례조차도 문제를 삼게 되었고, 그런 문제까지 교회 내에 심각한 분열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 당시로 돌아가서 이 논쟁에 참석했더라면 충분히 정당성이 있어 보이는 논쟁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이 잘 아는 교부인 어거스틴은 이 논쟁에 대한 아주 유명하고 정확한 성경적인 해석을 내려 이 논쟁을 진정시켰는데, 그의 해석은 이러했습니다. ‘모든 세례와 성례는 그 세례를 베푸는 자의 능력이나 인품이나 선함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근거한 것이다’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던 시절에 순교도 불사하며 신앙을 지켰던 도나투스파 사람들은 이 어거스틴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배교자였던 사람들을 같은 성도로 여길 수 없다고 선언해 교회가 갈라지는 갈등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때 어거스틴이 도나투스 논쟁에 대한 해결을 위해 들었던 성경 구절 중 하나가 바로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였습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교회에 있을 수 있지만, 이 비유의 말씀에서처럼 그것들을 함께 그냥 두어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거스틴의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은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이 밭에 대하여 이를 세상을 의미한다고 해석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이 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거스틴이 과연 이 말씀을 정확히 몰랐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거스틴은 밭에 대한 해석을 이어 나오는 41절 ‘그 나라’ 라고 해석했으며, 이에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와 같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가 비록 이 비유에 대해서는 잘못된 해석을 내렸으나, 교회 내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는 결론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보면 크게 잘못되지 않았고, 교회 내에 그러한 가라지나 배교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성경의 가르침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다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러분에게 겁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등록을 하였거나 혹은 교회에서 어려서부터 출석하며 예배를 드렸다는 것만으로는 그 사람이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로 보면 어거스틴의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의 설명은 어느 정도는 의미가 생기게 됩니다. 즉, 교회 안에서도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바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버려 두고 지켜보신다고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온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말씀과는 분명히 조금은 거리가 있습니다.
비유의 배경: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공존
이 비유에 나오는 밭은 분명하게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 세상 속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그의 백성들이 거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그리고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같이 공존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 속에 있는 중요한 몇 가지 내용들을 살펴봄으로 신자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고 계신지를 잘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선 이 비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만약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사람이 농부라면 이 비유는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중요하고 늘상 하는 일이 김을 메는 것이고 이 김을 메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가라지를 뽑아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논에서도 벼농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은 ‘피’ 라는 가라지를 제거하는 일인데 이것이 처음에는 벼와 생김새가 똑같아서 그것을 잘 구별하기 힘들어 이로 인해 벼에서 알곡이 제대로 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알곡과 함께 자라고 있는 가라지를 뽑아내기 위해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이 농부 보여주는 행동은 농사일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보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이고, 그 농부를 게으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 농부 보여 주듯이 알곡과 가라지를 함께 두는 이 농사법은 농사를 망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비유가 나오게 된 배경을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조금 넓은 의미의 배경입니다. 이는 우리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살펴본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도 고치시고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이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그 분이 하셨던 일들에는 관계없이 그냥 예수님을 싫어하고 거부했던 것은 성경에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죽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 나타나 있고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계속하여 예수를 거부합니다. 이것이 오늘 이 비유가 나오게 된 첫 번째 배경입니다.
두 번째 배경은 이렇습니다. 오늘의 이 비유는 좁은 의미에서 보면 다른 두 개의 비유와 함께 묶일 수 있습니다. 그 두 개의 비유는 바로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겨자씨의 비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이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겨자씨와 누룩이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룩이 밀가루에 섞이게 되면 빵과 떡을 가득하게 부풀게 만듭니다. 겨자씨도 아주 작은 씨앗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서 나무가 되면 그곳에 새들이 깃들게 됩니다. 이 두 비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처음에는 보잘 것 없고 눈에 띄지도 않던 하나님의 나라가 나중에는 아주 큰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살펴볼 이 가라지의 비유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오늘의 비유를 이해할 때, 그냥 단순하게 알곡은 알곡대로,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나중에 거두실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지를 설명하는 내용이 숨겨진 비유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교훈: 세상은 하나님의 밭이다
앞에서 설명드렸듯이 씨를 뿌린 밭은 세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아들들로 성경에서 표현된 이 세상 속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렇다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아주 중요할 것입니다.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는 이처럼 아주 중요한 내용들이 들어 있지만 오늘 이 시간에 제가 조금 더 여러분이 이해하고 기억하기 쉽게 딱 세 가지의 내용만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비유에 나온 밭을 주인이 ‘나의 밭’ 이라고 표현을 한다는 점입니다. 방금 이 밭을 우리는 세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즉, 헬라어 단어로는 온 우주를 가리키는 ‘코스모스’를 사용했습니다. 즉 성경은 이 세상, 온 우주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밭이라는 것은 교회만을, 혹은 구원받은 신자들만 거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까지 포함하는 모든 하나님의 소유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하나님의 밭에 악한 자가 와서 씨를 뿌리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들은 수많은 어려움과 힘든 시간들을 보낼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조금 더 성경 전체에서 나타난 진리와 연관을 시켜 생각해 본다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 지으신 후에 그 지으신 세상을 보시고 ‘보기에 좋았더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하신 세상은 선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이 선하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분명히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유를 우리는 성경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담과 하와라는 우리 인류를 대표했던 그들이 지었던 죄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이들이 하나님을 떠난 순간부터 이 모든 세계 속에는 악한 것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주인의 밭, 즉 주님께서 직접 지으신 그 선한 밭에 선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놓아 두셨습니다. 최초의 자녀였던 아담과 하와도 선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리들이 이전의 설교에서 살폈듯이, 이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로 세상에는 죄가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 세상은 결국 악함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가라지: 구원의 신비
이런 의미로 보면 오늘 살펴볼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의 배경은 창세기 초반의 아담과 하와에 의해 세상에 죄가 들어왔던 그 내용과 상당한 연관성을 가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내용을 단순히 교회 공동체라든지, 혹은 잠깐 있다 뿔뿔이 흩어질 이스라엘 나라만을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함께 포함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이 비유를 처음부터 다시 한번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과연 우리 중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알곡이 있을까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어떠신 가요? 스스로를 알곡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창세기가 시작되자마자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대가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이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부터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간섭하지 않는 한,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두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안에 알곡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가라지 뿐입니다.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 계획을 시작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로마서 3장 1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다시 말하면 우리 전부는 모두 가라지입니다. 우리 중에는 아무도 알곡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알곡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놀라게 되는 점입니다. 여러분이 창세기에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읽을 때, 하나님은 왜 야곱만 선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셨는지 궁금해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스펄젼 목사님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하나님이 에서를 선택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 보다 야곱을 왜 구원해 주셨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며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의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놔두셨다면 우리는 모두 아무런 소망 없이 죽을 수 밖에 없었으나, 하나님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야곱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여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가라지임에 분명한데도 성경에서는 알곡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이것이 성경의 놀라운 사실입니다.
신자의 삶: 세상 속에서의 도전과 공격
그래서 오늘 우리가 나눌 첫 번째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오늘 이 비유에서는 밭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등장하시고, 세상 나라가 그 하나님의 나라인 그 밭으로 들어왔으나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 곳에 그대로 두셨고 그 두 개의 나라가 함께 존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세상의 나라를 그대로 두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모든 일을 진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공격하여 이들이 성장하지 못하게 하며, 또 열매를 맺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그것이 가라지의 역할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은 가라지가 아니라 알곡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이 신자의 삶은 이 비유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끊임없이 도전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열매들을 맺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도전하고 흔들어 대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는 환난과 고통과 풍파가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존재합니다.
믿음의 역설: 고난 속에서의 신앙
이러한 사실만 본다면 우리들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정말로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911 참사 사건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면 그 일이 일어났을 때, 그 건물 안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장소에는 많은 신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 빌딩에 있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만은 건져내어서 구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 분들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분들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만약 이 LA 땅에 지진이 일어난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오. 그 때에 만약 믿는 사람의 집은 하나도 흔들리지 않으며, 믿지 않는 사람들의 집들만 다 무너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은 역시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진정한 신자라면 그것과는 반대의 일이 일어나야지 맞습니다. 우리들은 죽어도 갈 곳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무너지더라도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집은 그래도 살려 두셔서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야 하는 것이 맞는 일이 아닐까요? 그러나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로 인한 특혜를 받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데도 우리가 세상의 그런 나쁜 일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고, 보호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바람들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는데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신앙생활 속에서 보여지는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됩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러한 질문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 세상의 기대와 다름
우리들의 삶 속에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모든 재난이 우리를 피해가지도 않고, 자식은 시험을 치기만 하면 공부를 안 해도 100점을 맞는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내가 산 집값이 갑자기 오르지도 않고, 흔한 5달러짜리 복권도 당첨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든 어려움을 똑같이 겪게 됩니다. 복음을 믿으며 하나님 나라에 속해 사는 일은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뿐이고, 우리가 원하는 화끈한 것을 상으로 주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을 설명해 주는 천국의 비유가 바로 겨자씨와 누룩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겨자씨와 누룩은 어떻게 보면 별 볼 일이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겨자씨는 겉보기에는 심기만 해도 엄청난 것이 나올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살게 되면 무언가 대단한 일이 생겨서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 땅에서 원하는 것을 다 이루고 부자로 살게 되는 그런 보장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러한 세상의 보장을 원해서 이 자리에 오셨다면 여러분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러한 것들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를 믿어서 좋은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바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정당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는 굉장히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종교와 모든 신들은 여러분에게 분명히 더 좋은 걸 약속합니다. 그것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좋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좇았던 이유입니다. 여호와는 그들을 위해서 바다를 가른 신이었습니다. 40년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나가 내리셨던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을 두고 어떻게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길 수가 있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때, 원하는 걸 들어주시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나만 먹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으며,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원했던 것은 고기가 없어서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러한 마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며 단지 눈에 보이는 그들의 필요만을 원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지 않으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요동치는 세상 속의 약속
우리에게도 이런 일들이 생기면 마찬가지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코비드에 감염이 되었다 하더라도 믿는 사람은 걸리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나쁜 일들이 우리에게 생기게 되면 우리는 그 이유를 우리의 행위에서 찾게 됩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를 않았더니, 혹은 요즘 성경 읽기를 소홀히 했으며, 혹은 주일 예배를 빠졌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잊지 않으시고 징계를 내리시는 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가라지가 어떤 때는 알곡보다 훨씬 더 화려해 보이고, 이처럼 세상이 훨씬 더 좋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약속을 주십니다. ‘이 세상이 너의 편이 아닌 것 같고, 너를 마구 흔들어 대고 있으며, 세상에서 환난과 어려움이 너의 삶 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을지라도, 네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는 곳은 바로 내 땅이다!’ 라는 약속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땅은 바로 하나님의 땅, 주님의 세계,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밭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무리 난리를 쳐서 우리를 괴롭히더라도, 원수가 여러분을 아무리 밀 까부르듯 흔들어 대더라도, 여러분이 하나님과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사탄이 별의별 방법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유혹하고 넘어뜨리려고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들을 우리의 인생 속에 던져 줄 그 순간에도 이 모든 세상과 나의 모든 인생을 다스리는 분은 바로 이 밭의 주인이시며 이 모든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시며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기도의 특권과 변치 않는 소망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인생은 요동치며, 우리에게는 우리를 흥분시킬 수 있는 일들이 생기지 않으며, 여느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대단한 일들을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구나 하고 감격하고 감사할 수 있을 텐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기도를 했을지라도 이런 기도는 잘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도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해도 들어주지 않을 때 지칠까 봐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왜냐하면 여러분이 뜻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세상은 전부 다 가라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출신은 알곡이 아니라 가라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가라지처럼 살 때가 편합니다. 미국에 오래 살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월스트리트 저널 보다는 한국 신문을 읽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옛날부터 우리가 가졌던 습관이나 살던 방식이 여전히 우리 몸에 베여 있는 것입니다. 물질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돈에 쪼들리며 사는 것보다는 풍부하게 가지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건강도 물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돈과 건강보다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 더욱 더 좋다는 그러한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대답이 나오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그것을 우리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나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답은 돈과 건강, 이 두 가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원하는 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느냐 그렇지 않으시냐 만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가 거하고 있고 그 나라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30년 동안을 기도했지만 아직도 응답이 되지 않는 기도가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치지도, 실망하지도 마십시오. 그까지 30년의 시간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에 비하면 눈 깜짝할 사이보다도 짧은 순간입니다. 여러분이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계시는 그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오히려 감사할 수 있으며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그 시절에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조병옥’ 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얼마나 유명했던지 어렸던 저도 그 사람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던 책받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루는 제가 살았던 마포구로 정치 유세를 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희 동네에서는 한바탕 야단 법석이 났습니다. 그 당시 우리 동네 사람들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동네 가운데에 마을 회관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이 정치인이 자신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로 아주 마음이 부풀어져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유세 현장에 어린 저도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갔는데, 그 때 제 주위의 사람들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드디어 우리 동네도 이 사람 덕분에 좋아지겠구나 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입니다. 결국 그 마을 회관이 그 사람으로 인해 지어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 저희 어머니 포함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대통령도 아닌 일개 정치인에게 마을의 필요를 큰 소리로 외치며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을 영광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여러분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상관없이 끊임없이 그 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여러분이 평생 놀라워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찾고 부르는 일을 매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매 순간 우리들이 하나님을 부르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여러분에게 응답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십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이 가지고 싶은 것을 받지 못해 속상하십니까?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 나라가 여러분을 흔들고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느끼는 분이 계시다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신 이 말씀을 들으십시오. 요한 계시록 11장 15절 말씀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이 세상의 주인이 우리가 아니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사탄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느껴 지십니까?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이 세상이 다 망해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드십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나라의 주인이시며,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이나 풍파에 있든지, 혹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우리에게 닥칠 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에 주인이시다!’
둘째 교훈: 가라지를 지금 뽑지 않는 이유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이 비유 속 종들의 대화입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밭을 차지하고 있는 이 가라지, 즉 이 세상 나라를 뽑아 버려도 될까요?’. 이것 보다도 더 간단한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의 질문은 정당하고 당연한 말입니다. 당연히 주인도 종들의 이야기대로 가라지 뽑아 버려서 이 알곡들이 잘 자라게 만들고 열매를 맺게 만드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대로 둔다는 이 주인의 말은 소극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언제나 정당하게 일을 행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당하게 원수도 갚고 싶고, 그리고 정당하게 내가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를 이 세상을 향해 보여 주고 싶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듯한 세상을 향해 나는 그렇게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내가 한 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 대지만 그렇게 당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나도 한 성격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두 개의 나라가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함께 존재하며, 이 세상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자기의 것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둔다는 이 주인의 말은 그저 우리가 세상에서 참고 견디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라지는 항상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마음: 알곡을 향한 사랑과 보호
그럼 좀 더 깊이 이 비유의 문장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주인이 이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고 한 말의 진정한 의미는 종들이 이 가라지를 뽑아서 한 곳으로 모으겠다고 한 것에 대한 거부의 표현입니다. 즉, 이 가라지들은 뽑아서 모아놓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알곡도 마찬가지로 지금 거두지 말고 가라지와 함께 가만히 두기를 명하시는 것입니다. 즉, 이 비유에서 중요한 사실은, 주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알곡뿐이고 이 알곡만을 위해 가라지는 그대로 두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처럼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데에 있으며, 그 하나님의 나라를 가득 채울 알곡에게만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말씀은 주인의 마음, 즉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낸 이야기입니다. 그 주인은 가라지를 골라내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알곡을 지키고 사랑하는데 그 모든 마음이 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라지는 물론 흑암의 나라를 상징하고 있다고 많은 성경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많은 이전 설교에서는 독보리의 일종인 이 가라지는 밀과 함께 심으면 처음에는 전혀 둘 사이를 구분할 수 없으며 그래서 혹시 가라지를 뽑다가 밀도 함께 뽑을까 염려하여 주인이 이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명령하셨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사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문 26절에서 분명히 ‘싹이 나고 결실할 때’ 라고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즉 새싹일 때가 아니라 결실을 맺기 시작할 때 이 가라지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이 밀과 가라지는 처음부터 분간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비유는 그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알곡과 가라지는 처음은 비슷하지만 나중에는 달라지듯이 우리가 이단도 이런 식으로 분간할 수 있다’ 라는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알곡과 가라지는 같이 성장해서 둘 다 비슷한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분하기가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경험이 있는 농부들은 쉽게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가라지를 골라내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이 이야기의 주제는 가라지를 구별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라지를 제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이 알곡들을 위해서 가라지를 그대로 두기를 원하신다는 데에 이 비유의 핵심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 죽음이 아닌 생명을 낳는 과정
이 세상은 알곡인 우리에게도 너무나 공격적이며, 어떤 때는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우리 인생에 닥치기도 하고, 세상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에 속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순간 순간이 언제나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겪는 환난과 고통을 통해서 죽음만을 경험합니다. 쓰디쓴 인생 속에서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사는 신자들은 다릅니다. 신자에게 닥치는 그 모든 환난과 고통은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을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생명을 경험합니다. 그 세상 속에서도 영혼이 죽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기대하며, 이 땅에서 버려지지 않는 그 살아있는 생명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존재가 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커가서 그 열매를 맺는 존재가 됩니다. 그것이 우리들입니다.
똑같은 세상의 모든 일들이 똑같은 해를 받고 똑같은 비를 맞더라도 그 씨가 살아 있지 못하고 죽었다면 땅속에서 그 씨는 썩어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씨앗 속에 생명이 남아 있다면, 똑같은 고난, 똑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 씨앗은 죽지 않고 싹을 태우고, 줄기가 자라고, 잎과 꽃이 만들어지며 결국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하나님은 이 씨앗을 아주 특별한 곳에 심어서 다른 씨앗들과는 전혀 다르게 온실 속에서 강한 비바람도 맞지 않고 언제나 일정한 빛을 맞으며 안전하게 잘 자라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것처럼, 이렇게 온실 속에서 좋은 환경 속에서만 자라난 화초는 밖에 내어 놓으면 바로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이 말씀하시려는 것이 이것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에게 닥치는 그 모든 환난과 어려움이야 말로 우리들에게 생명을 만들어낸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굉장히 ‘아멘’ 하기가 힘이 드시지요? 설교를 하고 있는 저 조차도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입니다.
우리의 간증: 고난을 통해 자라남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우리는 자주 깜짝 놀랄 일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가라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나중에 하나님께 앞으로 가기 전에 할 수 있는 간증은 대부분 이런 내용이 될 것입니다. ‘한 때는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는데 이 모든 순간들을 지나온 결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어 나로 하여금 내 욕심을 버리게 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길을 내셔 갖고 나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하게 하셨습니다.’ 혹은 ‘옛날에는 내가 나 밖에는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그 모든 일들을 겪고 나서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이러한 간증을 한 번씩은 다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 속에서는 죽음 밖에 보이지 않고 끊임없이 좌절하고 실망하며 인생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라고는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 밖에 없다는 그러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하나님의 세계이며 그리스도의 나라이고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으로 지금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수많은 어려움과 죽을 것 같은 아픔 속에서도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속에서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이고, 바로 그 예수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오늘 이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놀라운 점입니다.
셋째 교훈: 알곡 가운데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이 밭의 주인은 끝까지 그 알곡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주인은 가라지 가운데로 들어오셔서, 알곡을 지키시고, 열매를 맺게 하는 농부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셨고 그래서 그분 때문에 나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 가라지 밖에 없는 세상에 주님이 들어오시는 바로 그 순간 드디어 알곡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알곡들을 모았더니 오늘 여기 이 자리에 이렇게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바라보는 이들이 모였습니다.
우리의 의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여러분이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고 있다면, 내가 얼마만큼 잘 믿고 있는지, 예배를 잘하고 있는지, 열심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봉사하며, 선교하고 전도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비록 열심으로 예배하지 못했고, 봉사를 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했으며, 내 욕심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겼던 못난 사람일지라도 주님만은 놓을 수가 없고, 십자가를 부인할 수도 없으며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는 고백을 드릴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나의 그 모든 것들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나는 주의 십자가를 붙들고 있음을 고백하는 그 순간이 우리에게서 드디어 알곡이 드러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서 여전히 알곡인 열매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가라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은 내가 이렇게 힘들고 바쁜 중에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얼마만큼의 일을 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낸 나의 신앙생활을 내놓아서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육신이 연약하거나 믿음이 굳건하지 못해서 신앙생활에 소홀했던 것에 대한 변명을 늘어 놓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생이어야 합니다. 예수는 나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죄가 되기도 하시고, 나의 거룩이 되기도 하시며, 나의 사랑도 나의 기쁨도 되십니다. 나의 죄가 되셨을 때 나는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사함을 받았으며, 나의 사랑이 되셨을 때는 그 사랑이 나를 감싸 안아서 나를 자라나게 하셨고, 나의 겸손이 되었을 때는 나의 삶이 뭣하나 자랑할 것이 없어서 주님 앞에 드릴 수 있었으며, 나의 인내가 되었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나도 이 세상의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것을 이겨내는 같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현재적 심판과 최후 승리
마지막으로 살펴볼 이 가라지 비유의 내용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심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 속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날에만 존재하는 심판뿐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그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 가운데서는 십자가가 사탄의 머리를 밟는 심판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사탄은 완전히 소멸되어 지옥에 영원히 갇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이미 사탄은 실패하고 또 패배했습니다.
성도의 성장: 모든 순간 속 하나님의 손길
그 능력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살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속에서도 계속 싸움이 일어납니다. 주님 앞에 온전히 가는 그 날까지 우리는 여전히 죄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이 세상 나라가 우리를 감싸고 있으며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영광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할 때에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듯이, 오늘 나 자신은 그 영광을 시작하는 사람이며,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내가 내 신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작은 모든 부분을 은혜로 하게 된 것입니다.
아! 세상 속에서 우리가 겪는 사소한 일들을 포함한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순간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 사랑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하시는 순간들입니다. 아플 때도, 힘들 때도, 속상할 때도, 답답할 때도, 우리가 자고 일어나고 밥을 먹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을 알곡으로 키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단 1초의 짧은 순간도 신자에게는 헛되이 지나가는 순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이루어 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추수를 하는 그 시간까지, 하나님의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고, 견디게 되고, 자라나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선행’ 이라고 이렇게 이름을 붙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들이 드디어 맺게 되는 열매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영광: 해와 같이 빛날 약속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오신 것은 바로 가라지 가운데 오신 것이며, 그리스도가 오자마자 알곡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주님의 손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이제까지 증명할 수 있는 증거이며, 그리고 선한 농부는 우리를 지켜 내실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아들들, 모든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 이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이 세상의 빛인 빛의 아들들인 여러분은 이 땅에서 분명히 빛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빛은 고난을 받는 빛이고, 고난을 통하는 빛입니다. 죄와 나의 욕심과 싸우며 여러분은 빛이 날 것입니다. 외부의 수많은 고난과 풍파와 싸우며 여러분은 빛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빛을 보지 못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보십니다. 왜냐하면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우리의 시간들이 마칠 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해와 같이 빛날 것이며, 모든 죄가 사라질 것이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될 것입니다. 눈물과 슬픔도 그칠 것이고,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빛 되신 주님과 함께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이 괴로우십니까? 그렇다면 그때에 빛나게 될 여러분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지금은 빛이 나 보이지 않고, 여러분 얼굴에는 온통 시커먼 검정 때만 묻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거울을 봐도 여러분 얼굴이 별 볼 일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은 길어봤자 70-80년이지만, 여러분이 해와 같이 영원히 빛날 날은 영원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멘.
마무리 기도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영원하신 주님의 손길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알곡이며, 주님께서 이 세상의 나라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시고 보존하시어 그 나라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심을 저희가 잊지 않게 하여 하소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동원 받은 자도,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한 번 보기 위하여 애쓰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임을, 그리고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부르셨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빛나게 되도록 원하시는, 그리고 그 길을 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여 하소서. 주님, 저희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용서해 주신 그 죄 속에 묻혀, 그 죄를 내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자리에서 우리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게 해 주시며, 오직 십자가의 주님만을 의지하여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영광을 저희가 빛나도록 누리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