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강해 설교집/창세기 강해

창세기-47-다시 가나안으로

lampchurch 2025. 4. 20. 07:12

하나님 말씀 창세기 13 1절부터 4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멘.

 

아브라함의 출애굽: 기근, 애굽행, 그리고 귀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던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닥친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곧바로 기근의 고통을 겪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간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세겜을 지나서 벧엘과 아이까지 내려갔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이 맞이한 것은 굶주림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떠했을 같으신가요? 제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조금은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열심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시는 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기근을 만나게 것입니다.

 

어려운 일에 직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쪽은 비옥한 애굽과 가까운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브람의 마음 가운데 애굽 땅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속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고자 했던 땅의 위치를 정확하게 모두 알려 주시지는 않았던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벧엘과 아이에 도착하였을 ,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손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세겜에서는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세겜도 역시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가서 땅도 마치 하나님의 약속의 , 에덴동산처럼 생각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롯과 아브라함이 땅을 나누는 이야기에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에덴과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앞에 땅이 애굽 같기도 하고 에덴 같기도 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브람의 마음속에 에덴과 같았던 애굽 땅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애굽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구하기 위해서 그곳 사람들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게 됩니다. 그런데 일이 그냥 그렇게 지나갔으면 좋았겠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일이 굉장히 커져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왕이었던 바로가 사레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는 재미있게도 일에 대한 재앙이 바로에게 흘러가게 되는 쪽으로 진행됩니다. 결국 바로는 재앙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크게 화를 내게 됩니다. ‘어찌하여 네가 거짓으로 일이 이렇게 일어나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을 꾸짖습니다. 그런 후에 바로 왕은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사레와 모두를 애굽에서 떠나가게 합니다.

 

애굽에서의 '성공'? : 부유함의 이면

애굽 사건은 지금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는 선명하게 보이는 의미나 교훈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구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던 같지만, 사실 보호하려고 하셨던 사람은 사례였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바로 여인의 후손, 약속의 자손인 메시아를 잉태할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으며, 성경을 공부한 지금 우리들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 사라와 약속의 후손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실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사레를 구하심으로 아브라함을 살리셨고 이유는 바로 약속의 후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 깨달아가는 여정

아브라함은 물론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약속의 자손을 주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사례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이해하거나 알고 있던 같지는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신이 받을 복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복의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 우리가 주목해야 점은 바로 아브라함이 복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신앙생활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이 신앙에서 내가 누리는 전부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가 기도한 만큼, 혹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 믿음만큼의 결과가 이루어지지는 않는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우리가 구한 것보다 나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말씀을 믿으시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이해하실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선언하셨고, 복은 온전히 아브라함의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인생은 날마다 새로운 복을 받아서 누리는 것이나 새로운 어떤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이 무엇인지를 매일매일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예수를 믿는데, '내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을 있을까?'라고 생각하실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복이 우리에게 있을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이와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가 땅에서 누릴 있는 모든 복을 벌써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받은 복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받은 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가 누리는 복을 알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복을 누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이라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땅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할 있으며, 자손의 복을 누려 그가 얼마나 많은 자식을 가지게 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영생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이 이런 것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복을 누리고 있지 않으신가요?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께 매일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가 진정한 하나님의 복을 모르고 부질없는 욕심을 부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아마도 이런 내용의 기도를 드리며 그렇게 여러분은 좌충우돌 여기까지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은 우리가 잠시 기뻐할 있는 것이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잡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복의 소중함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아가고 있는 모든 인생의 시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깨달은 : 하나님과 애굽

이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로가 벌을 대신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레가 낳을 자손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은 굉장히 단편적인 지식들이었습니다. 우선 그가 알고 있던 번째 것은 사레가 자신의 누이라고 속였던 것이 자기에게는 은혜를 입게 되는 계기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야기 후에 똑같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행했던 일을 통해서 우리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아브라함이 똑같은 일을 번이나 있었는지 의아해하실 것이지만,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복선이 되어서 똑같은 번째 사건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을 만났을 발생하게 됩니다. 아비멜렉이라는 왕을 만난 아브라함은하나님이 나를 아버지의 집에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애굽을 탈출한 다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르 땅을 떠나고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을 거쳐 애굽에서 나올 모든 시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살펴보시지요.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니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사레의 덕을 보려고 했고, 그래서 누이라고 사람들을 속이기로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에 나오는 마지막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이것이 사례 당신이 나에게 베풀 은혜라 나오는 은혜라는 단어가 영어 성경이나 다른 성경에는 사랑이라고도 번역됩니다. 왜냐하면 단어가 바로헤세드라는 히브리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단어는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을 얘기할 사용되는 단어인데,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이야기가 등장하는 20장에 가서 다루게 되겠지만, 이는 아주 흥미로운 부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것을 어떻게 깨닫고 이해하게 되는지를 추적하는 것도 굉장히 재밌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금 헤세드라는 단어가 등장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였을지, 혹은 그가 사건 전체를 하나님의 약속으로 생각하고 믿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우리가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오늘 본문의 순간에서는 아브라함이 모든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의 내용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한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은혜가 바로 메시아를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은혜이며,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복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외에도 그는 가지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집트의 왕인 바로보다 훨씬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해졌지요. 그가 가서 것이라고는 아내인 사레를 누이로 속인 것밖에는 없었는데 바로가 곧바로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처럼 그를 야단치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속여서 자신이 사레를 아내로 삼으려고 했던 잘못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사레를 돌려주고 아브라함을 애굽에서 무사히 나가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바로가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좋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는 그와 애굽에 미친 재앙의 원인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채고, 사레를 아브라함에게 다시 돌려주고 아브라함과 식구들을 애굽에서 돌려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애굽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회복: 다시 가나안으로

그래서 아브라함은 애굽을 나오자마자 이상은 남쪽으로 향해 가지 않고 이제는 다시 북쪽인 네게브 땅을 향해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올라가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는 땅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 다시 가나안으로 돌이켜서 들어가게 것입니다.

 

처음 제단으로 돌아감: 회개의 표징

여러분,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났던 12장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너는 가족과 친척과 아비를 떠나라라고 말씀하셨고 말씀에 순종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 하란을 나오게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행동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회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자기의 과거를 떠나 다른 나라로 옮겨지는 회개의 사건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주리라했던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12장에서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는 단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회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왔던 사건에서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이야기는 그가 다시 자기가 처음에 제단을 세웠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4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가 이전에 머물렀던 벧엘과 아이 사이에 이르렀고 장소는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처음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을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돌아감의 의미: 신앙 vs. 신앙의 본질

왜냐하면처음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믿음과 회개를 보여주었던 하란으로부터 떠남과는 다르게, 애굽으로부터 떠남에는 그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 그가 제단을 세웠던 장소에서 그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것입니다. 그는 지금 원래의 자기의 본질, 자기가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사실로 우리가 있는 것은 애굽을 떠났던 아브라함이 다시 가나안을 향해 벧엘과 아이로 올라오게 진정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처음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 돌아와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함입니다. 그의 신앙은 지금 회복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회복의 과정, 그의 신앙이 증진되고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아브라함의 변화에 있어서 제일 처음 일어난 일은 앞으로 나아가거나 새로운 것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첫사랑, 혹은 초심 등의 의미와는 조금은 다릅니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처음으로 주님을 뜨겁게 믿었던 때를 그리워합니다. 이런 감정은 연세가 드신 분일수록 같습니다. 저도 처음으로 제대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교회가 있는 건물 2층에서 밤을 새워 철야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친구가 기도를 하다가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간증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때 함께 있던 우리들은 함께 찬송하고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져서 울부짖으며 소리쳐서 통성 기도를 했었던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있던 건물의 3층에는 가정집이 있었는데 새벽에 중학생들 명이서 아래층에서 노래하고 고함을 지르며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참다못해서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우리는 경찰서까지 끌려갔던 것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신앙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지금 신앙은 너무 미지근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여러분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뜨겁게 주님을 사랑한 시간을 기억하고 시간을 그리워하기도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혹시 연애 결혼을 하신 분이 계십니까? 그런 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결혼 전에 연애 기간이 사랑이 뜨거웠나요, 아니면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아마도 대부분 분은 그때는 정말 뜨겁게 사랑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되었나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연애할 때처럼 그런 마음만 가지고 여러분들은 힘든 삶을 어떻게 헤쳐 나갈 있었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키웠겠습니까? 어떻게 여러분이 힘든 가정이라는 책임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돌보며 지켜가며 여기까지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사랑일까요? 사랑의 깊이와 내용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우리의 신앙생활이 처음에는 뜨겁고 신실해 보이다가도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이 미지근해지고 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적인 눈으로,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관습이나 상식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신앙을 보는 데서 기인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안에 여러분이 들어왔다면, 모든 사람은 속도의 차이가 있다고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어느 누구나 분명하게 하나님의 안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길이 좌충우돌 혼란스럽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지지리도 자신이 못나 보이기도 하며, 어떤 때는 말할 수도 없이 힘들고 눈물을 빠지도록 어려움에 처할지라도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분명히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 여러분의 신앙은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며, 넓이를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더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정신: '아드 폰테스' (근원으로)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의 참된 의미는 처음 믿었던 신앙으로 우리가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믿음의 주시며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하나님께로, 그의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저 처음에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 혹은 내가 처음에 깨달었던 신앙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서 알게 주신, 아브라함이 애굽 사건을 통해서 알게 하나님의 본질을 향해, 참된 신앙을 향해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우리는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개혁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나, 혹은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무엇인가를 뜯어고쳐서 좋은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개혁의 결과는 있겠지만, 개혁의 진정한 의미는 ‘reform’, , 다시 (Re) 원래의 형식과 근원 (Form)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개혁아드 폰테스(Ad Fontes)’라고 불렀습니다. 라틴어인 단어의 ‘Ad’ 영어의 ‘To’ 의미하여 ‘Fontes’ ‘Fountain’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원래 시작된 곳을 향해서 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Foundation’, 혹은 ‘Source’, 근원이나본질 향해 가는 것이라고 이해하셔도 됩니다.

 

개혁의 시작: 본질에서 멀어진 자신을 인식함

그러므로 진정한 개혁 신앙의 시작은 내가 현재 본질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들로부터 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개혁은 시작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바벨탑을 쌓는 일과 비슷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방법을 사용했으며, 그것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분의 뜻에 따라서 우르와 하란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마치 바벨탑을 쌓는 자들처럼 자신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근원을 잊어버리고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개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소유라고 분명히 고백했지만 어느새 그는 자신을 마음의 중심에 가지고 있었고, 믿음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자신을 가장 가운데에 놓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는 사레를 통해서 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통하여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브라함은 미처 깨닫지 못했고,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는 사실조차도 명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예배의 개혁: 우리의 현주소 점검

이러한 일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일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로부터 멀어져 있고, 그것과는 전혀 반대의 방향을 향해 우리가 가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가는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과 비슷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틀린 같지 않고, 우리의 신앙생활도 크게 달라진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이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본질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겪은 아브라함은 제일 처음 자기가 시작했던 본질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시작의 자리로 돌아가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나님과 맺었던 약속을 기억했다는 것을 우리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애굽에서 자신만의 바벨탑을 쌓으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애굽 땅에서 자기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이 두려웠고, 자신의 소유와 사랑하는 것을 잃는 것도 무서웠습니다. 그는 힘이 있는 바로가 두려웠습니다. 오늘날 우리로 말한다면 여러분과 저는 돈을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릴까 무서워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건강을 잃는 것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혹시 조금이라도 비참하게 끝이 나게 될까 우리의 마지막 때의 모습을 항상 두려워합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애굽에서 그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게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그의 삶에서 드러나게 되었습니까? 그는 곧바로 벧엘과 아이 땅으로 가서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가 다시 본질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장면에서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 지금 내가 본질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리고 나의 믿음 생활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제일 처음 나타나는 일은 바로 예배의 개혁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잘하고, 멋있고 알차게 드리며, 예배에 진심을 다한다는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빠져 있는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팬데믹 이후 우리는 온라인 예배와 대면 예배와 같은 예배 형식을 가지고 어떤 것이 옳은지 서로 논쟁을 벌입니다. 예배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물론 중요한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우리가 생각해야 것은 우리가 하는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리문답들이 얼마나 훌륭한 신앙의 모범인지도 알고 있습니다. 신앙고백이 발표되기 3 전에 내용을 만들기 위하여 모인 많은 개혁자들이 제일 처음에 했던 일은 바로 예배 모범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은 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예배 속에 있었던 수많은 미신과 우상숭배를 없애는 것이 신앙의 본질에 가까이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조금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때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당시 영국은 성공회라는 기독교 단체가 있었고, 이러한 종교 개혁 운동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종교 개혁에 맞추어서 39개의 개혁적인 조항들을 이미 만들었습니다. 물론 정치적인 영향도 있었지만 그것을 주도했던 종교 개혁파 사람들은 상당히 개혁적인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낙스(John Knox) 포함한 여러 종교 개혁자들이 번에 걸쳐서 공동 기도문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공동 기도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많은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 기도문이 가지고 있었던 심각한 문제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것이 형식화되면서 예배에서 공동 기도문을 형식적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고,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예배가 하나님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라는 취지의 서문입니다. 그들은 분명하게 그들의 현재 위치와 돌아가야 방향을 깨달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이 다시 나오게 것입니다.

 

이전에는 개혁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다시 개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의 노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 남포교회가 가디나와 토랜스 지역에 처음 세워지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올바른 개혁 정신을 가진 바른 교회, 개혁 교회를 함께 시작하자고 표방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개혁들을 시도했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개혁적인 것들이 교회 내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에게 많은 유익이 있었고, 하나님께 감사할 있는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저희는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 있을 있습니다. 우리가 개혁을 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과연 우리는 계속 개혁을 계속 이어 나가고 있는가, 우리가 예배에 대하여,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개혁의 기회: 팬데믹 이후의 선택

오늘날 우리는 굉장히 많은 두려움과 혼란 속에 있습니다. 팬데믹이 끝나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들어오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모두 괜찮아질까요? 우리 신앙이 앞을 향해 나아갈 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상황에 순응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믿으며 지나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팬데믹 시기를 거치면서 생겨난 많은 상황들에 맞추어 많은 것들이 변화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든 시기가 끝나가는 시점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바뀌는 모든 상황에 순응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시간을 신앙의 본질을 다시 찾는 기회로 삼을 것인가 하는 기로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 회복: 형식 너머의 하나님 만남

그래서 정말 우리들과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우리가 참다운 예배와 진정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있기를 원한다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나 교회로부터 받을 있는 많은 서비스들, 혹은 우리 자녀들을 위한 여러 가지 교회 프로그램 팬데믹 기간 중에 우리가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시 신앙의 본질을 생각해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편안하고 안정된 신앙생활을 향해서 것인지, 아니면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서, 우리가 처음 제단을 쌓았던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선택의 기로일 것입니다.

우리가 개혁을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예배의 본질을 살펴야 합니다. 예배하는 일이 우리 신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며, 신자의 삶에서 최우선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예배의 영광을 맛보고 있습니까? 과연 예배 속에서 우리는 거룩이라는 것이 체험되어지고 있는지, 하나님의 영광과 놀라운 사랑, 그분의 자비와 긍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구원의 역사를 얼마나 경험하고 있는지,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것입니다.

 

미신을 넘어선 참된

우리는 그저 우리가 만든 예배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원하는 것들만을 함으로써 우리를 기쁘게 만들어 주는 예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것입니다. 저는 팬데믹의 위기가 우리가 다시 한번 신앙의 본질과 예배의 본질 속으로 돌아갈 있는 정말로 소중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포함해서 모든 당회원, 집사, 성도 여러분들은 이제는 과연 나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으며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배에 참석하는 일은 너무나 복입니다.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면 만약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이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대단한 일로만 여기서 주일 성수만으로 만족한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여러분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속히 미신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이 전해주시는 참된 사랑과 복을 누려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건져 내시고야 마는, 어떤 속에서도 그것을 뚫고 나오시고 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여전히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배의 본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 속에 있을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자를 향한 가지 질문

그래서 우리가 미신에 속지 않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이 예배에 참석하기 전에 적어도 가지 질문을 여러분 자신을 향하여 하면 좋겠습니다.

 

1. 주님을 사랑하는가?

번째는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동일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 나타나셔서 하신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예배당에 무엇을 보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은혜로운 강연을 듣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일주일 동안 지친 몸과 마음에 쉼과 휴식을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우리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가?’

 

2. 하나님은 나의 왕이신가?

번째로 여러분이 예배의 처소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질문은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인가? 하나님은 진정 나의 왕이신가?’입니다. 우리가 자리에서 무릎을 꿇는 , 고개를 숙여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 소리 높여 찬송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는 것을 내가 인정하기 때문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나라 속에 살기 위해 힘쓰고 계시며,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귀한 자랑이 되십니까?

 

3. 나의 참된 위로는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요청드리는 여러분 자신에게 대한 번째 질문입니다. ‘나는 나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디에서 평안과 위로를 얻을 것인가?’ 그것이 돈이라면 여러분은 아까운 시간에 여기에 계시지 말고 돈을 벌러 나가셔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건강이라면 시간에 운동을 하셔서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평안과 위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면 여러분은 그분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맡겨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가치: 애굽 궁정이 아닌 하나님의 장막

개혁은 바로의 궁정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장막에서 시작되었고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애굽에서 겪은 일들로 인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금과 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보물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거의 왕과 같은 지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사람의 부를 그가 소유한 가축의 숫자로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가축이 아니라 금과 은을 소유하였다는 말은 마치 오늘날 달러를 기축 통화로 사용하는 시대의 미국처럼 돈을 원하는 대로 찍어내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에도 그는 애굽 왕이 주었던 전리품도 함께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치를 두었던 것은 애굽의 궁정이나 그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치를 두었던 것은 하나님의 장막이었고,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바로 순간이었습니다.

 

개혁의 시작과 완성: 아브라함에서 그리스도까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개혁입니다. 물론 개혁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비로소 시작하는 것입니다. 개혁의 시작은 하나님 앞에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때야말로 우리의 예배는 다시 한번 변화되게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태도와 마음뿐 아니라 우리가 예배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며, 어떤 것으로 바른 예배를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는 예배의 자리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본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를 깨달을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 있어 개혁의 시작은 물론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개혁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온 그에게 땅은 여전히 광야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일어나는 개혁은 21장에 묘사되는 이삭의 이야기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가 본질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가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 속에서 살아가는지, 어떻게 아브라함의 이야기 주인공이 아브라함 자신이 아니었고, 여인의 후손과 하나님이셨는지를 저희는 앞으로 펼쳐질 아브라함의 개혁의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게 것입니다. 시간까지 아브라함의 생애는 개혁의 연속입니다.

 

성도의 : 끊임없는 개혁 (Semper Reformanda)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을 아는 ,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 다시 돌아가서 말씀의 본질을 찾아내는 ,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며, 여러분과 저희 생애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회개와 성도의 기도 요청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역시 여러분 앞에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목사로서 철저하게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예배의 본질로부터 알게 모르게 조금씩 무너져서 점점 편한 것을 찾기 시작했고, 당연히 우리의 예배는 안전하다고 여겼으며, 계속해서 하나님의 개혁이 있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고 안일한 신앙생활을 했던 저부터 먼저 회개합니다. 철저하게 회개할 있도록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당회를 위해서도, 집사회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성도들을 섬기며, 성도들을 자라게 하며, 성도들 가운데서 해야 마땅한 일들이 어떤 것인가를 그들이 더욱더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여러분 분도 신앙의 본질에서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나의 신앙 현주소가 어디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아브라함과 함께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는 제단을 발견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기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다시 부를 , 우리가 다시 본질을 살필 우리에게 예배가 어디서부터 변해야 하며, 우리가 무엇을 다시 추구해야 하며, 어떤 것을 용기를 내어 다시 결단해야 되는지를 저희로 알게 하셔서 우리로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길로 가게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합니다.

 

저는 신앙의 모든 열조들과 함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Semper Ad Fontes, Semper Reformanda!’ 항상 본질로 돌아가십시오, 항상 개혁하십시오!’

 

마치는 기도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주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서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맡겨 주셨던 귀한 사명들을 저희가 잊어버리고 흔들리지 않고, 저희가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의 사역을 저희도 함께 동참하고 다시 믿음의 본질로, 다시 예배의 본질로, 그래서 다시 하나님을 바르게 바라보는 자리로 가기를 원합니다. 저희 안에 회개의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며, 저희가 저희들을 다시 발견하고 알게 주시고, 하나님의 크고 한량없는 은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셔서, 주님, 지치거나 포기하지 말고 주님이 퍼부어 주시는 은혜의 자리로 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저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