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44-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2장 1절에서 4절까지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멘.
아브라함 언약: 우리를 위한 복음
오늘 읽은 본문에는 그 본문이 보여주는 아브라함에 대한 복만큼이나 중요한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는 지금 몇 주에 걸쳐서 이 복음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 부분은 단지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전한 복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복음을 믿고,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복음으로 인해 이 예배의 자리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구약에 있는 이 놀라운 복음을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된 사람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발견하는 것은 옳은 일이며 마땅한 일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 떠남 (고향, 친족, 아비 집)
지난 시간부터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구조를 살펴보고 있으며, 복음의 시작 부분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우선 복음은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땅을 떠났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떠난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나라가 변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바뀐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여러분이 예배당에 와서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러분들의 속에 있는 그 나라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친족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여러분과 제가 복음을 믿는 순간부터 우리가 맺고 살아왔던 모든 관계가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은 아버지의 집을 향해 떠난다고 말을 합니다. 즉 자신 안에 존재하는 모든 우상을 떠나는 과정을 저희가 지난 주일에 함께 살펴보았으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예배가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의 도착지: 하나님이 주체가 되심 ("내가 ... 하리니")
그렇게 우리가 떠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자리를 떠나 도착한 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From’이 있으면 ‘To’가 있는 법입니다. 과연 복음으로 기인한 우리의 도착지는 어떤 곳일까 하는 것을 오늘 이 시간에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복음의 도착지가 어떤 곳인지를 성경의 문맥에서 찾기 전에 이 도착지를 설명하는 성경 구절에서 보이는 굉장히 중요하고 선명한 문장적인 특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제까지 나왔던 문장들의 특징과는 아주 다른 특별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문장에서 무려 7번이나 반복되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 문장은 바로 ‘I will (내가 하리라)’ 입니다. 즉, 그 전까지의 문장과는 달리 그 주어가 2인칭에서 1인칭으로 바뀐 사실입니다.
‘너는 떠나라, 너는 가라’라는 형식으로 2인칭 주어가 이전 장에 사용되었다면 오늘 본문부터는 그 문장의 주어가 바로 하나님 당신을 직접 지칭하는 1인칭의 문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있어서 복음이라는 것도 우리 인생의 실질적인 주어가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의 주어가 나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종 관계를 넘어선 하나님과의 관계 (아버지, 친구)
주어가 바뀐 즉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은 쉽게 여겨질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칫 우리는 이 대목에서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므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정해 우리들에게 명령하시고 우리들은 그것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그런 관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우리는 그냥 순순히 따르고 복종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노예 계약과도 비슷한 개념일 것입니다. 아니면 갑과 을의 관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이러한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봉건적인 주종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묘사하고 있고, 우리가 외롭고 슬프고 힘들 때 다가와서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시는 친구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봉건적인 주종 관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종 관계라는 것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을 더 이상 종이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이기 때문에 종이 아니고 그렇기에 우리를 친구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주종 관계와는 다른 그 이상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뜻하는 ‘주’라는 단어를 영어 성경에서는 ‘Lord’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 자체가 사라가 아브라함을 지칭할 때도 사용되었으나, 여러분이 옛날 영화를 보시면 이 단어가 주로 한 나라의 왕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여러분들이 즐겨 보시는 사극에서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왕과 백성들의 관계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왕의 자녀들조차 왕을 주상 전하라고 부르는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그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칭호에는 우리는 그 왕의 자녀인 왕자와 공주라는 의미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어가 되는 인생의 의미는 그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명령하시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그것을 따르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녀들로서 왕자와 공주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목적: 가나안 땅이 아닌 아브라함 자신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도 땅이 아닌 것입니다. 왕자를 대한 왕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 왕자가 왕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그에 걸맞은 교육을 통해 제왕의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아브라함을 단지 하인이나 노예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은 가나안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아브라함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 = 우리의 복 (믿음으로)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은 아브라함 개인의 복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향한 복이었다고 성경은 밝혀 주십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으리라.”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바로 여러분과 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위나 조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우리들이 바로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갈라디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복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내가 아니라 예수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동일한 복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약속 (1): 큰 민족을 이루리라 (가달 - 중요함)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의 그 복음의 도착지가 우리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그 종착지로서 나오는 약속은 ‘큰 민족을 이루리라’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내용과 형식은 앞에서 주어가 아브라함에서 하나님으로 바뀐 것만큼 중요한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복음의 내용과 그와 함께 따라오는 결과를 우리에게 말하여 주시고 우리가 어떠한 존재가 될 것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큰 민족이란 말은 아브람에게는 아주 잘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한 나라를 떠난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커다란 민족과 나라를 이루어 내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아주 가슴 벅찬 복음의 종착지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과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종착지가 우리에게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조금 더 이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민족’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영어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tribe’나 ‘people’이 아니라, ‘nation’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큰 민족’이라고 할 때 이 ‘크다’라는 단어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굉장히 어려운 단어에 속하는데요, 이는 사이즈를 이야기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big nation’이 아닙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항상 ‘great nation’으로 번역됩니다. 위대하다는 뜻입니다. 즉 단순한 사이즈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 사용된 단어 역시 '가달 (גָּדוֹל, H1419)’이며 이 단어 역시 실질적인 크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고 중요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6장 24절에 이 단어가 사용된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이 이야기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다윗과 사울의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쫓겨 다니던 다윗이 사울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는데 그가 기름 부으신 왕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사울을 놓아두고 떠나 건너편에서 사울에게 불러 외치는 다윗의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중히’라는 히브리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에 사용된 ‘가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큰 나라라는 말도 그 사이즈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귀중히 여기시는 나라와 민족으로 만드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그 의미에 가깝다고 봅니다.
크기의 개념: 없음에서 있게 하심 (창조)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이 약속은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무엇보다도 더 귀한 존재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어떤 분들은 이러한 의문이 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주고받으실 때 아브라함의 자손이 바닷가 모래처럼, 그리고 밤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주시겠다고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달’이 단순히 그 크기나 양의 많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의 인구는 약 600만 정도이며,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유대인 수를 다 합친다 하더라도, 중국이나 인도의 인구와는 비교가 되지도 않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본문의 큰 민족은 단순히 인구의 숫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보다 좀 더 궁극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것을 숫자로 표현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대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이야기하고 있는 그 순간에 아브라함에게는 자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0’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었던 그 아브라함에게 대조의 의미로 허다하게 많은 바다의 모래와 밤하늘의 별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없는 것에서 있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로마서 4장: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이렇게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다른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4장의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심이라.” 여기서 ‘너’는 물론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일으키듯,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이것은 창조의 언어입니다. 단지 아브라함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창세기의 처음 부분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자손이 번성해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것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시작점: 빈손으로 나아감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해서 아브라함을 통해 위대하고 귀중한 나라를 만드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위대한 나라, 하나님의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나라를 바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늘 본문이 보여주시는 정말 눈물이 나는 감동적이고 감사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께 무엇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잘했다고 생각 드는 것들이나, 우리의 순종들, 우리가 지킨 율법의 행위를 가져다가 그것들 위에서 이러한 복을 완성하시며, 우리들을 큰 민족과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헷갈려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시작함에 있어 무엇을 하나님께 먼저 구할까요? 어떤 분들은 보다 나은 믿음이나, 누군가를 사랑하며, 미워하지 않는 그런 신앙을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 혹은 마음이 풍성하고 평강이 있는 신앙을 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앙은 순서가 잘못된 것입니다. 올바른 순서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4장: 잉태치 못하는 자의 기쁨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자로 나와서 그 빈손으로 하나님을 잡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그 나머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서가 뒤바뀌게 되면 우리는 다른 것들을 추구하다 사실은 십자가와 그리스도를 잊어버리는 쪽으로 가고 맙니다. 설령 그것을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하나, 그것은 사실 자신을 꾸미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에게는 지금 자손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러한 상황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27절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이 말씀 바로 위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사라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나, 하갈은 율법을 받은 시내산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늘의 예루살렘인 사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겨나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참된 신앙의 자세: 전적인 의존 ("천부여 의지 없어서")
그리고 나서 나오는 말씀이 바로 이 27절입니다. 굉장히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바로 잉태하지 못한 자가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자가 소리를 지르며 기쁘게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잉태하지 못한 자의 자손이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놀랍고 은혜로운 장면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며 그 능력으로 하나님께 감사도 하고, 봉사도 하며, 남을 미워하지 않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겠다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갈라디아서 말씀은 잉태하지 못한 자가 오히려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손인 자이고, 그래서 하나님 외에는 매달릴 수 있는 것이 없는 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붙잡는 자, 그런 사람이 되는 것에서 복음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시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이 찬송 곡은 찰스 웨슬리 목사님이 그 가사를 쓰셨습니다. 이 영어가사를 한국어로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내 손을 길게 하나님께로 뻗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아무런 다른 도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봉사를 손에 쥐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배에 출석한 횟수, 아니면 하나님께 했던 기도들이 여러분의 손에 들려져 있습니까?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께 손을 뻗치지 않고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잘 갈고 닦아서 하나님 앞으로 가실 계획을 가지고 있으신가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그 순서가 바뀌어서 무엇인가를 우선 쥐려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리 앞으로 나아가려고 발버둥쳐도 항상 그 자리일 수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행복이나 재산, 나의 공로나 봉사, 나의 실패와 슬픔, 심지어는 나의 예배를 잡았던 그 손을 모두 비우고 그 빈손으로 앞으로 뻗으며 오직 나의 도움은 십자가 예수님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만 붙잡으면 되는가? : 사랑의 역동성
오직 주님만이 나의 도움이시고,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힘이시며 나는 그런 주님만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이 당연히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 단지 주님만을 붙잡으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만 붙잡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까요? 여러분, 주님을 붙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 일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열심히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이며, 세상 모든 것 위에 주님을 두는 것이며 나의 모든 것을 다 하여 주님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식: 아버지께 대한 순종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음성 듣기를 갈구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것만을 가지셨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만을 들으셨으며, 오직 아버지께서 명하신 것들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는지 우리는 복음서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알아가는 삶
그러나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삶을 직접 살아보지 못했기에 그 예수님의 삶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주님을 붙잡기만 하면 모든 일들이 쉽게 풀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님만을 붙잡으면 모든 것이 다 괜찮은 것일까요? 제가 여러분께 정답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주님만 붙잡기만 하시면 됩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주님만을 붙잡으신다면, 정말로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래서 여러분이 더욱더 깊이 주님을 알아가고, 그분이 진정으로 나에게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의 인생에서 어떤 분이신지를 안다면 여러분은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힘이 어떠한지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이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도 알게 될 것이고, 그런 우리의 인생은 주님을 위하여 살 수밖에 없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서가 자주 바뀌어진 삶을 살기에 자주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게을러지게 되고, 이로 인해 우리의 삶도 함께 게을러지게 됩니다. 열심이 사라지고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 그 주님의 사랑을 아는 일에 한없이 게으르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할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여러분과 저는 얼마큼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승리하신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약속 (2):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바벨탑의 역전)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큰 나라, 귀중한 나라가 된다는 바른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이 일이 바벨탑의 사건을 뒤집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에서 이 ‘탑’은 ‘미그달 ( מִגְדָּל, H4026)’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그런데 아까 살펴본 ‘크다’라는 히브리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가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같은 어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즉 탑을 세운다는 말은 높은 것을 만든다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탑을 세운다는 말에는 큰 민족을 이룬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크게 만들고 싶었던 탑을 인간이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며 ‘가달’의 나라, 큰 나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아브라함에게만 그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완성하신 진정한 ‘가달의 나라’, 혹은 ‘큰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계시록 3장: 새 이름의 약속 (성도, 삼위 하나님의 이름)
계시록 7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오는데, 같이 한번 살펴볼까요? 9절 말씀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여기서 ‘아무도 셀 수 없는’도 단순히 굉장히 많은 숫자라는 의미만 담긴 말씀은 아닙니다. 이제 아시겠지요? 이 표현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 없음으로부터 하나님이 창조하신 숫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하나하나 만드신 숫자이고, 지으신 숫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숫자이며 지금도 세우고 있는 숫자인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가리키고 있는 말씀입니다.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그리고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니,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며,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시는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이것이 큰 무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일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그 무리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고, 먹이시고 생명수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별처럼 많은 숫자로 만들어서 거대한 제국을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대단한 나라를 만들어서 그 어떤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힘과 높이를 가지게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이 장막이 되어서 하나님의 보호를 기뻐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열매를 먹는 그런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힘의 나라, 어떤 것보다 더욱더 강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장막이 되어 주시는 나라, 목자가 되시는 그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개 자체가 복이다
우리는 교회 내에 만연해 있는 기복 신앙이라는 말 때문에 이 ‘복’에 대해 약간은 거부 반응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책입니다. 시편의 주제가 무엇인가요? ‘복 있는 자는 누구인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도 역시 이 하나님의 복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는 그 복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바로 그 복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은 우리가 받아서 단순히 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복덩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일 놀라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전에는 ‘죄덩어리’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복덩어리’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창대케 되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하신 또 다른 약속은 우리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약속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자칫하면 우리는 이 말씀에서 쉽게 함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창대하다’라는 말도 앞에서 설명드렸던 ‘가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을 크게 하고 높게 만드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귀하게 만드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계속되어 온 내용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 이름에 관한 내용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싶어 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실패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높이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름을 창대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고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이 되고,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귀한 자로 만들고 참다운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높은 이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는 어떠합니까? 이것도 맞습니다. 또 무엇일까요? 그것은 망설일 필요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그 이름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셨지요? 우리의 이름을 창대케 하신다는 약속을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이루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3장 12절 말씀입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세례를 받으실 때 여러분이 받은 이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지금도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 세례명을 함께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개신교회에서는 세례명을 주지는 않지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가장 존귀한 이름: 성도,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
이 말씀은 사실 성령의 이름을 의지해서 받는 세례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이름만으로 인 치신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이름보다 더 높은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례를 받을 때, 더 이상 사도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가질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름을 갖고 계신가요? 이 계시록 말씀처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인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중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진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이마에 새겨진 이름인 것입니다.
창조의 완성: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뜻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여인의 후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여러분은 창조의 완성을 지금 이 시간 여러분 개개인의 삶 속에서 경험하며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부터 창조가 시작되며 하나님의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을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어디서도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그 뜻이 땅에서 누구에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네,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창조의 그 완성이 우리에게 바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창대케 하신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만약 예수님의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이 있다면 저에게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의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은 없는 것입니다.
약속 (4): 축복/저주의 중보자적 역할 (교회)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창대케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너에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할 것이다’라는 이 말씀이 이해되시지요?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함부로 이야기하여 저주를 받지 말고 아부하고 좋은 말만 골라서 해서 복을 받으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서 이루어진 약속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이스라엘은 ‘교회’이며, 아브라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약속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한 신학 교수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즉, 아브람에게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이 구절은 사실 기도문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문장 구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하나님의 복’ 자체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사람들은 복을 받게 될 것이고, 또 그와 동시에 아브라함 자체가 그 모든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꾸어서 이야기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중보자적인 위치에 서 있게 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복과 심판이 아브라함을 통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누가 되는 것입니까? 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16장: 천국 열쇠와 교회의 특권
예수님의 그림자로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되어지는 순간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마태복음 16장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며,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 위에 교회를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자주 놓치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천국의 열쇠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고 풀면 하늘에서도 똑같이 매고 풀리리라 약속을 주셨습니다.
교회의 역할: 세상에 복을 전하는 통로
이것은 바로 베드로를 통해서 세워지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이 땅에 임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우리들이 어떤 신분과 특권을 가진 존재인지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로서 우리의 복이 되어 주셨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교회인 우리들은 이 땅의 모든 복이 우리들을 통해서 오게 된다는 놀라운 약속인 것입니다. 다들 놀라지 않으시는 표정을 하고 계시네요. 만약 이 땅에 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인 여러분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여러분이 잠그어 버리면 하늘에서도 닫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지막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 땅은 복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복이고, 그 복으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살아 숨 쉬는 복덩어리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이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숨을 쉬지 않으면 이 지구도 호흡을 멈출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놀랍지요?
자기중심적 교회의 위험성 (썩어가는 복)
여러분, 이제 아브라함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떠나온 우르 땅을 동경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무너질 것이 뻔한 바벨탑을 쌓으려고 노력했더라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복의 근원인 그가 피폐해져서 말라 가고 그에 따라 세상도 함께 말라 갔을 것입니다. 좀 더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를 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면 그 은혜는 어떻게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밤에 잠을 자고 있다가 갑자기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여러분 중에 있습니까?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에서 선포된 말씀, 설교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교회로서 살지 않는다면,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복이 사라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내 인생의 주어를 ‘하나님’이 아니라, ‘나’로 혼동하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생기게 될까요? 세상이 난리가 나고, 교회도 난리가 나게 됩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는 신자들이 많은 교회라면 그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신들은 교회에서 무시를 받는다고 오해하기 쉽게 될 것입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서로를 비난하고 누가 더 잘하고 못하느냐의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지식으로도, 기도를 누가 더 많이 하였느냐로 싸우게 될 것입니다.
훌륭하고 위대해서 존경을 받았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 중에서 자신이 기도를 많이 했고 성경 지식이 풍성하다고 자랑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한국에서 기도로 말씀드리자면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아현 교회의 김현봉 목사님 이십니다. 그분은 하루에 최소한 8시간 이상을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가 여러 분 계신데, 그중 한 분이 이화여대 앞에 있는 신촌 예배당 교회의 안병모 목사님 이십니다. 머리를 짧게 미시고 검은 저고리를 즐겨 입으셨습니다. 안 목사님 김현봉 목사님처럼 매일 8시간을 기도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하신 설교 중에 제가 가장 많이 감동해서 울었던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꾸준히 기도하신 분도 그 기도의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하시는 것입니다. 기도가 너무 하기 싫어서 오늘 하루는 쉬고 싶다는 그 유혹이 너무나 심해, 기도 시간에 기도처로 올라가는 그 순간이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하시는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데, 저처럼 기도를 게을리하는 교만한 사람은 감히 어떤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목사님들도 자신들이 기도를 많이 하는 것에 대해서 일절 자랑하시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무엇을 자랑하셨을까요? 예수만을 자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서 그런 기도의 열심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해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나 큰 오해입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그리스도께 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기도하시는 사람입니다. 결코 내가 한 기도의 열심으로 주님께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자존심, 나의 공력, 나의 열심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만을 의지해서 그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냄새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노력들이 쌓여서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자들로 인한 복들도 쌓여서 썩어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복들은 사람들이 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너무나 큰 복이 우리에게서 멈춰서 나아가지 못합니다. 복을 받은 우리는 복을 더 달라고 애원하며 울고,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복에 굶주려 죽고 있는 것입니다.
복으로 살아가기: 세상으로 나아가 복 나누기
말이 되지 않지요? 여러분과 저는 복이 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부름 받아 나선 우리들은 이제 복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이라는 사실을 모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가는 곳마다 여러분이 하는 말들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만큼 여러분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이 복을 받고 그 하나님의 복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교회 밖으로 나가 보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을 우리는 더 잘 알고 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 예배당 안에서만 모여서 어떻게 하면 신앙이 자라고 조금 더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하고 매일 머리를 맞대고 궁리만 말고, 밖으로 나가서 한 사람에게라도 여러분이 가진 복을 이야기를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다른 교우들과 만날 때에도 여러분들이 받은 그 복을 나누어 보십시오. 어떻게 예수 믿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분이 오늘 나에게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를 서로 이야기해 보십시오. 예수님보다 더 큰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뛰게 하고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예수님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 때문에 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복입니다.
마치는 기도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그 주님 앞에 왔으니 그 십자가 때문에 저희 마음이 뛰게 하여 주옵소서. 그 십자가를 붙잡은 것 때문에 저희 눈에 눈물이 있게 하여 주시고, 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저희 마음이 녹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주님으로 인해 살게 하여 주시고, 그 복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곳들과 사람들마다 그 예수의 복이 흐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부족한 저희들을 자꾸 보게 하지 마시고, 이 쓸모없는 저희들로 인해 하나님의 복이 흐르는 것이 막히게 되지 않도록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때문에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부족하고 연약하며 힘이 없으나, 주님만을 따라가오니 그 부르심을 따라 어디든지 가며 주님을 전하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복으로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