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31-노아 그리고 방주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9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아멘.
노아, 의인인가 은혜 입은 자인가?
오늘 읽은 본문의 첫 부분에 노아는 의인이며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우리들은 노아가 의인이고 완전한 자였으므로, 우리도 노아처럼 그렇게 의롭고 완전하게 되어야지만 대홍수와 같은 그런 하나님의 징벌로부터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던 바와 같이 이 구절의 말씀은 사실 8절 말씀에 대한 결과입니다. 8절에서 우리는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얻었다, 혹은 은혜를 받았다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창세기 6장 1절부터 8절까지는 노아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결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절의 제일 앞 문장에는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사용되어서, 이 구절이 앞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내용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즉, 그 시대의 인간들이 얼마나 타락했고 부패했으며 하나님을 거역했는가를 설명하였으며, 바로 이어서 6장 8절에서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그들과는 다르게 의로웠고, 그들과 다르게 완전했다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의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그 원인으로 붙어 있는 구절이 바로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로 노아는 의인이었고 완전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노아가 원래 의로웠고 완전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칭찬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8절에 근거하여 이러한 칭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는 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의 역설: 값없기에 받기 어려운 선물
은혜란 단어는 내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아무런 자격 없이 무엇인가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데 나에게 무엇인가가 생긴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이 은혜라는 개념이 우리 모두에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기가 아주 쉽기도 한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공짜를 좋아하는 경향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옛날 어르신들이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정말 그랬어요. 그때는 가난해서 정말로 먹을 게 너무 없었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런 시절에 공짜로 무엇인가가 주어진다면 그냥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 귀한 은혜를 공짜로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싫어하기까지 할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에 대해서 나에게서 그 원인을 찾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했으니까, 혹은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니까, 그리고 내가 이 땅에서 그래도 착하게 살았으니까,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들고 하나님의 선물을 받고 싶은 것이지요. 내가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을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고, 또 그를 위해서 나도 하나님께 얼마만큼은 해 드렸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죄의 근원: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고 있는 것, 우리가 가진 것, 그리고 그 어떤 조건으로도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런 은혜를 주시느냐는 질문이지요. 그리고 이와 더불어서 나도 하나님 앞에 이만큼은 했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우리를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죄의 근원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근원이 하나님일진대, 우리는 하나님께 신세 지고 산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에게는 신세를 질지라도 하나님께는 그러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하나님 앞에 들고 싶어 합니다. 우리 자신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죄의 가장 깊은 본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주 놓치며 살아갑니다.
방주: 또 다른 은혜의 증거
지난주 설교 시간에 노아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며, 그 은혜가 노아를 통해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함께 살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그 은혜의 내용들을 좀 더 깊이 다루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노아의 이야기에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은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뿐만 아니라 그가 짓고 있었던 그 방주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셔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아 이야기의 핵심: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는 노아가 은혜를 받아 의인으로 여겨졌고 그로 인해서 홍수에서 살았다는 그 사실뿐만이 아니라, 이 노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게 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그중의 하나는 수많은 사람이 죄를 범했지만 노아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방주를 짓게 하셔서 그의 가족들만 살아났다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노아 이야기의 결론으로 우리도 노아처럼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살아나야 된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제가 이렇게 질문을 드려볼 테니 한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는 홍수를 피해서 방주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끝까지 죽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노아도 결국은 죽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겠지요? 결국은 죽을 노아였지만 그는 방주를 타서 죽을 시간을 조금 연기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이 방주 이야기에서 홍수가 났었고 노아만 살아남았다는 쪽으로만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방주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주고자 하시는 진짜 핵심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되지 않는다면, 즉 노아가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어서 노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노아의 이야기는 단순히 방주로 홍수에서 죽음을 면한 한 가족이 결국은 죽음으로 삶을 마무리하게 된다는 이야기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그 중요한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노아 이야기는 어디서 어떻게 끝이 나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노아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로 끝이 나야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독자인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시는 그 핵심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두 번째 노아로, 그리고 마지막 노아로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는 바대로 마치 노아의 방주와 같이 우리를 그 방주 안에 품으사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그렇게 노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끝이 나는 것이며, 우리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하나가 됨으로써 예수께서 완성하신 그 노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 있는 노아로부터만 교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노아가 그림자로서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그 방주에 담아 주신 그 은혜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분이 이 구약을 읽으실 때, 노아의 이야기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의 이야기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오늘 본문의 ‘노아는 의인이요’라는 구절에 노아 대신 우리의 이름을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노아의 사건이 노아만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전부의 사건이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이 노아의 사건을 통해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란 무엇인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의인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됩니다. 의인이라는 말은 다시 말하면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의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스스로는 의롭지 않다는 것을 시인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왜 노아를 의인이라고 기록했을까요? 아담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떠나온 이후로 인간은 모두 죄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 아래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노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의롭다는 의미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고, 그 은혜라는 것이 드러나는 모습은 구약에서도 반복해서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모세를 통해서도 등장하지만, 신약에서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됩니다. 믿음 장이라고도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이 구절에서 나온 ‘믿음으로’라는 말은 노아도 처절한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하게 이 세상에는 의인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말씀하셨고 노아도 거기서 전혀 예외가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 로마서 말씀을 기록한 것은 시편 기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시편 53편을 함께 보시지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굽어 살피시는데, 지각이 있는 사람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도 도무지 찾으실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 구절을 사도 바울이 인용하여 그 유명한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말씀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이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의 믿음 때문이죠.
믿음: 하나님을 의지함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여러분과 제가 그저 하나님이 계신다고 스스로 의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고백을 하는 행위를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의지한다’, 혹은 ‘신뢰한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믿음: 세상 조건을 의지하지 않음
노아의 생애를 가만히 살펴보면 노아는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참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에녹이었습니다. 에녹은 참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이 땅에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옮겨지신 분이셨으니까요. 그분이 노아의 직계 조상입니다. 게다가 이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므두셀라는 그의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는 홍수를 맞이하기 전까지 살아 계셨으니 지금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인 라멕도 마찬가지로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부패하였고, 죄가 관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죽었습니다.
노아의 홍수로 모든 인류는 다 죽었습니다. 그들의 많은 자손들도 다 죽었습니다. 노아에게는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많은 친척이 홍수 전까지 함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홀로 외롭게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하면 하나님 앞에 할 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다른 친척들과 다릅니다. 저는 저의 형과 동생들과는 다릅니다’라고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경은 그가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당대’라는 말은 같은 시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방탄소년단 정도의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보다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일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 많은 사람이 노아를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혈통을 하나님 앞에 내세운 적도, 자기의 경건한 생활을 하나님 앞에 주장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전혀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인 에녹을 포함한 자기의 가족을 그의 조건으로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자기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그들보다 뛰어났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방주를 받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의를 전파함: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
성경은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다고 알려 주십니다. 즉, 노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는 말이고, 의를 전파한다는 말의 전제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죄 중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노아는 자신을 포함하여 이 온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 죄 중에 있는 것이고, 그가 지금 증거하는 것은 ‘그러나 너희가 그 죄를 알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하나님 앞에 완전하다는 말과, 그가 의인이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긴 것이며 그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많은 사람을 향해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외쳤었고, 자신의 의가 아니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할 때, 정작 자신들은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절대 자기가 교만하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여겼습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열심히 봉사를 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교회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
이런 모든 사실은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올 수 있는 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이 모든 나의 자랑들이 사실은 내가 죄인인 것을 증명합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 저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그 은혜로운 자리로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용서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무엇으로 살아야 합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게 되면 우리들의 신앙은 끝까지 그 영문 모를 죄책감 속에서 쫓겨 다니다가 끝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라는 것의 가장 중요한 기초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왔을 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죄를 다 깨닫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죄의 비참함과 무서움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필요하신 분인지를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완전한 자란 무엇인가? 흠 없는 제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노아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당대에 완전했다는 것입니다. ‘완전하다’라는 말의 사전적인 정의는 ‘모든 것을 갖추어서 모자람이 없는’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노아를 완전한 사람으로 칭합니다. 만약 완전한 신랑감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인격, 외모, 재산, 능력 등에 있어서 모든 것을 다 가지는 사람을 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이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눈앞에 완전하다는 말은 과연 이런 의미일까요? 이 말씀은 노아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이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이 ‘완전하다’는 히브리 단어는 다른 구절에서는 ‘흠이 없다’라는 뜻으로 많이 번역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대부분 제물과 연결되어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흠이 없는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완전하다’라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노아가 제물로 드려지기에 흠이 없다 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 여러분은 노아가 제사에 바쳐질 수 있다는 의미인가 하고 반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드린 말씀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이 말씀의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신약성경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부터 있는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좋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 제물: 세상을 본받지 않는 삶
이제 조금 이해가 되시지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적 제물로 드린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흠이 없는 제물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흠이 없어졌습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노아도 흠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 로마서 12장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이 세상을 본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 세상을 향해 흘러가고 돌아갈 때, 노아는 오히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완전한 자의 삶, 혹은 의인의 삶은 모든 것을 갖추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드리는 삶입니다.
참된 신앙: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드러냄
신자의 삶은 자신의 인격을 더 고상하고 고매하게 만들어서 지금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믿고 내가 예수님을 더 닮아 감으로써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정 부분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께 이렇게 한번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왜 여러분은 그렇게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조금은 궁색하지만, 그렇게 예수님을 닮음으로써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괜찮은 품성을 가진 성인과 닮은 그런 내가 되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진정으로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내 욕심을 추구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것이지요. 성경은 그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고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우리 위에 예수님의 모습을 덧붙여서 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어서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자랑하며 사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나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것을 우리 인생의 삶의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며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을 닮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자로 매일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노아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노아: 그리스도의 그림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또 다른 노아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노아는 신약의 로마서를 읽었던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노아는 구약시대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지만,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의미를 신약을 읽은 우리들처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아직 흠 없는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인이며 완전한 자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고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 구약과 신약의 만남
그리고 흠이 없고 의로우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 비로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까지도, 모세까지도, 아브라함까지도, 그때 비로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이에게 미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시대를 넘어선 은혜: 우리가 더 깊이 아는 것
여러분과 저는 아브라함을 부러워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우리는 예수님과 대화하고 함께 걸었던 베드로를 부러워합니다.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베드로도 심지어는 바울까지도 우리를 부러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보고 믿은 자보다 더 낫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리고 비록 우리가 베드로와 다른 모든 사도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시대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들과 구원의 역사는 보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성령님의 오심으로 이 시대에 어떠한 역사가 시작되는지를 알았고, 그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 속에서도 주님과 함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그 승리의 기쁨이 어떠한지에 대해 그때의 사도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동참한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이며 하나의 몸에 속해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완전해지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로 의의 옷을 입는다는 그 모든 것을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사도들보다도 더, 그리고 아브라함이나 노아보다도 더 깊이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우리는 더욱더 깊이 알아 가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에 더욱더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의 의미
이 말이 이해되셨으면 이제 우리는 노아의 이야기가 말하는 마지막 세 번째 삶의 모습을 알게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분과 동행하였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자는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우리 안에 살게 되면 성경은 그런 여러분을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라고 부르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를 완전하다고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합니다.
이미 우리는 이전 에녹에 대한 설교에서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해서 자세히 살폈듯이, 이것은 하나님이 내 옆에서 같이 걸으시고, 우리는 그분과 얘기하며 즐거워하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함께’라는 말은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 안에 같이 거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만약 여러분과 저에게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힘이고, 실재하는 기쁨이 있다면 이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이며, 사랑이 있다면 이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며, 영광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영광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방주가 전하는 메시지
그러므로 방주에 타서 홍수로부터 나만 살아남았다는 것이 노아의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노아의 이야기가 가지는 메시지도 아닙니다. 그는 믿음으로 이 땅의 방주가 아니라 하늘의 방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만든 방주가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방주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그에게 부어 주시는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방주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모든 것이 휩쓸려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도 일깨워 주며,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방주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가 죽는 것보다는 우리가 겪어야 되는 그 많은 고통과 아픔에 더 큰 원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은 어찌 보면 한 순간의 일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죽음 이후의 일들이 더 큰 두려움이 되고, 또 우리가 거기서 겪어야 할 많은 고통들이 더 큰 어려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불구덩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모습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의 비참함은 그러한 심판의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들과 영원히 함께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심판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내가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하나님이 거기 계시면 우리는 안전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그 음부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힘들어 아파할 이유가 사실은 없습니다. 이 다윗의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성경의 이 표현을 정말로 이해하고 있다면, 여러분과 저는 놀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그 모든 상황이 지옥과 같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나의 영혼은 평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 너머의 소망: 하나님의 새 창조
그래서 노아는 우리에게 이 죄의 비참함과 무서움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심판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가 살아남는 이유입니다. 심판이 마지막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가 세상의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이 세상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생각되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마지막 끝에 있다는 것을 노아는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마지막 소망
어두운 세상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팬데믹 상황도, 우리를 고통스럽고 힘들게 하는 모든 문제들도, 내가 지금도 겪고 있으며 해결하지 못해서 힘들어 하는 그 어떤 문제도 마지막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심판도 우리에게는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지막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아는 역사 속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노아의 그림자, 그리고 결국은 그 모든 것을 실질적으로 이루어 내고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주목받지 못한 왕: Scott Wesley Brown의 노래처럼
많은 사람이 노아로부터 등을 돌렸고,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누구도 그의 말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당대의 의인이었고 완전한 사람이었지만 노아는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의 주목도 받지 못한 것과 어쩌면 마찬가지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지금 우리가 예배하는 이 순간에도,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문제와 아픔과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이 순간에도 왕 중의 왕이십니다.
여러분, 혹시 Scott Wesley Brown이라는 가수를 기억하십니까? Plácido Domingo라는 성악가를 좋아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의 앨범 중에 ‘Perhaps love’라는 노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유명한 컨트리 가수인 John Denver와 함께 듀엣으로 부른 노래입니다. 그 노래가 수록된 앨범에 포함된 노래 중에서 다른 한 곡의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의 제목은 ‘My Treasure’입니다. 그 노래를 만든 사람이 바로 이 Scott Wesley Brown입니다. 목사님이셨는데, 그 곡의 가사를 직접 쓰셨습니다. ‘I don't need to follow any rainbow’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제가 처음 이 앨범에서 이 곡을 들었을 때, 너무나 하나님의 은혜를 잘 표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본 결과 역시나 복음 성가였습니다.
이 목사님이 만드신 또 다른 노래가 있습니다. ‘This little child’라는 제목의 1981년에 발표한 노래입니다. 이 곡의 가사를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멀고 먼 옛날, 어느 누가 한 아이가 태어나 구유에 누울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리고 한 목수의 아들일 뿐인 그 작은 아이가 왕 중의 왕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며 웃고 떠들던 그 아이가 바로 그들을 위해 어느 날 죽을 것이라고 누가 알았을까요? 오, 어느 누가 있어, 이 작은 아이가 눈먼 자를 뜨게 하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오, 어느 누가 있어 이 작은 아이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실 주님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주님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이 작은 아이가 바로 그 왕이며, 왕 중에 왕이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수많은 제국들이 섰다가 무너졌습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미워하고, 나라가 나라를, 형제가 형제를 대적했습니다. 세상의 절반은 매일 굶주리며 잠자리에 들지만, 그리고 태어나지도 못한 셀 수 없는 아이들이 지금도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군비를 감축하자는 회의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서로 자신이 옳다고 그렇게 싸우지만 사실은 서로 자신의 죄를 감추기에 바쁠 뿐입니다. 이 어둠 속에 여전한 소망의 불빛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바로 그 어린 아이, 왕 중에 왕이십니다. 그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의해 깃발은 반드시 세워질 것입니다. 그 멀고 먼 옛날, 그 어린 아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 시간에 이 땅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이유: 우리의 의와 완전함, 동행
주님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의 완전함이 되시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기 위해서, 그렇게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의가 되어 여러분의 이름이 의가 되기 위해서, 주님이 여러분의 완전함이 되어, 여러분이 당대에 완전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동행하는 자가 되어 여러분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믿음의 배: 방향키 없이 하나님만 의지함
여러분, 우리는 또 하나의 은혜인 방주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방주를 짓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그 청사진에서 이상한 점이 없으셨나요? 이 방주는 배인데 방향키와 방향타가 없습니다. 이 방주는 배이지만 돛이 없습니다. 이 방주에는 항해를 위한 조정 장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갈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음성만을 듣기를 원하고,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가기를 원하는 의인들의 배요, 그리고 완전한 자의 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배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마치는 기도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은혜 속에 있는 자인지를 자주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노아와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주님, 기억나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누구인지를, 우리가 받고 있는 이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사람인지를, 우리가 방주를 짓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그 방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았으며 행했다는 것을 주님, 기억하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완전한 자요, 의인이며, 하나님과 지금 동행하고 있는 자라는 것을, 이 세상이 이길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 속에서 그 무엇도 우리를 흔들 수도, 방해할 수도 없으며, 그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저희가 다시 고백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