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30-하나님의 근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6장 1절부터 8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아멘.
하나님의 근심과 홍수의 원인
오늘 본문 바로 다음 구절부터는 노아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족보에 관한 설명과 함께 드디어 대홍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읽은 본문은 이제 앞으로 펼쳐질 하나님의 대홍수의 심판이 왜 일어나야 했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 인해 이 홍수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하나님의 근심과 그로 인한 심판과 진노에 대해 알아보고, 이 모든 것의 원인이 된 사람들의 죄와 그 죄의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홍수의 기이한 이유: 결혼?
우선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에 대해 한탄하셨고 마음으로 근심을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근심하게 할 일들이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가 여러 번 읽으면서 마음에 크게 부딪치는 그러한 말씀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 2절 말씀입니다.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같이 한번 살펴볼까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것이 전부 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홍수가 생긴 유일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설명도 없으니까요. 이 일은 사람들이 땅에서 번성하기 시작할 때 생겼던 일이며, 그것은 바로 좋아하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대홍수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나요? 너무 황당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으시나요? 인간이 죄를 많이 저질러서 하나님께서 대홍수를 내리셨다고 성경은 묘사하는데, 그 주된 죄가 바로 결혼 때문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것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이고 홍수의 이유라면 저도 여러분도 아마 그 벌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난해한 구절을 접했을 때는, 이 내용 속에는 평범하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해석 1: 타락한 천사 또는 지배자들
오늘 본문은 평범하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이 구절은 굉장히 이해하기가 힘이 드는 구절인데, 가장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본문에 나온 하나님의 아들들이 과연 누구인가 라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여기에는 많은 해석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타락한 천사이며, 이들이 인간의 딸들을 좋아하였고, 그래서 천사와 사람 사이에 잘못된 결혼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결혼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타락하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들을 타락한 천사들로 표현하는 기록들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오기 때문에 이 첫 번째 해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특별히 칠십인 역 성경이나, 외경 중의 하나인 에녹서에서는 이 하나님의 아들을 ‘Angel’ 즉 ‘천사’ 로 번역을 했기 때문에 이 첫 번째 견해가 많은 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해석은 많은 유대인들도 동의하는 해석 방법입니다. 그것은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당시의 유명하거나 혹은 굉장히 뛰어났던 왕들이나 지배자들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음대로 그들의 백성들이었던 사람들의 딸들을 강제로 취한 것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 큰 진노의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해석 방법은 상당히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해석 방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이나 혹은 지배자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구절은 없을 지라도, 간접적으로 그런 식으로 설명한 구절들은 흔히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다윗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자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해석 2: 어거스틴과 셋의 후손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초대 기독교 교부인 어거스틴은 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해석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부터는 루터를 제외한 많은 후배 종교 개혁자들이 이 어거스틴의 세 번째 해석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에만 집중하지 않고, 이 창세기의 전체 문맥을 살펴봄으로써 이 구절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어떤 이야기가 나왔나요? 창세기 4장, 5장, 그리고 6장을 통해 가인의 후손의 이야기가 나오며, 그 다음으로는 아담으로 시작된 셋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잘 아시는 바 대로 가인의 후손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 이었으며, 아담과 셋의 후손들은 경건한 자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맥상의 이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바로 아담과 셋으로 이어지는 셋의 후손들이며, 이 경건한 후손들이 경건치 않은 가인의 후손들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혼합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심각한 타락이 초래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기에 진노하셨다 라는 것이 바로 세 번째 해석 방법이었습니다. 특히 어거스틴의 이 해석 방법은 성경의 난제들을 해결하는데 많은 영향을 준 새로운 해석이었지요. 그리고 특별히 성경의 문맥과도 자연스럽게 연관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분들이 이 어거스틴의 세 번째 해석을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해석의 실마리 1: 심판의 대상은 사람
어떤 해석 방법을 따라야 하는 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이 본문 자체의 문맥으로부터 오늘 구절을 추적을 해 보는 것이 오늘 본문을 제대로 해석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확실한 것부터 우선 살펴보자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금 이 말씀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문인 셈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영원히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연수가 120년으로 줄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판결문의 직접적인 당사자는 누구였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판결을 내리셨나요? 네, 바로 사람입니다. 천사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였다면 천사들이 죄를 지었으니까 천사들이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받았다면 천사도 최소한 그 벌을 같이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 벌한 이야기는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는 대상은 오직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는 이 구절은 천사라 기 보다는 분명히 사람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 문맥을 통해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살펴야 할 단서는 이것입니다. 신약에 나온 내용 중에 예수님께서 천국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우리가 천사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천국에서는 장가나 시집을 가는 일도 전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나요? 네, 천사들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을 이야기 할 때, 이는 인간을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제 우리는 합의가 되었습니다.
해석의 실마리 2: '모든 여자'와 라멕의 경우
그러면 이제 아 본문에서 좀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고 표현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일부다처제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셋의 후손이었다면 우리가 살펴보았던 5장 셋의 후손의 족보에서는 분명히 아내가 여러 명인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은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하와 밖에는 모르는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노아도 분명히 아내가 한 명 이었습니다. 그 외 사람들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되어있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아내를 두 명 이상 두었다고 언급된 셋의 후손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에녹은 아주 경건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기본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고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렸다고 보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처럼 셋의 족보 인물들은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셋의 후손이 하나님의 아들들 이었으며, 그래서 그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얻었다는 주장은 최소한 셋의 족보에 언급된 사람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셋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창세기 본문의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인 후손의 특징: 힘, 부, 지배
조금 더 가보겠습니다. 지금부터 살필 주장이 사실은 조금 더 중요한 내용입니다. 성경에서는 셋의 가문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여러 명의 아내를 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가인의 족보에 나오는 라멕입니다. 라멕은 여러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고, 따라서 가인의 후손에게 나타난 현상이 지금 이 본문에서도 언급된 하나님의 아들들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도 저희가 살펴 본 것처럼 6장에 나오는 내용들은 노아 때 갑자기 생겨난 일이 아니며, 그 첫 시작, 즉 사람들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이러한 일들은 계속 발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번성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 였을까요. 아담 이후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라멕도 포함이 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라멕에게는 아내가 여러 명이었습니다. 그럼 문맥상으로 볼 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러 아내를 취한 하나님의 아들들 중 한 명이 라멕일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졌습니다.
더욱이 가인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았던 사실 중 하나로, 그들로 부터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이 나왔으며, 재력과 문화를 지배했던 사람들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읍을 세워서 성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만든 성에서 스스로가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우선 힘과 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배자의 계층도 속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죄의 본질 1: '보기에 좋았더라' - 자기 중심적 판단
이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근심하신 그 이유에 대해 우리가 좀 더 명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단지 좋아하는 여인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근심의 이유를 깨닫기 위해 본문 2절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어떤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진노하셨을까요? 이 본문에서 떠오르는 것이 있으신 가요? 우선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라는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람의 딸들이란 인류가 번성할 때부터 태어났던 모든 사람들의 딸들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름다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성분들에게는 복음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런데 이 구절의 ‘아름다웠다’ 라는 단어의 번역이 앞에서 나왔던 말씀의 문맥과는 정확한 연관성을 찾기가 조금은 힘이 듭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앞에서 여러 번 살폈던 ‘토브’ 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 지으신 다음에, 그 지으신 모든 세계를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을 때 사용된 ‘좋다’ 라는 뜻의 히브리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하다’ 라고 이야기할 때 사용한 단어도 역시 ‘토브’ 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토브라는 말이 이 본문에서도 사용된 것을 보면 이것이 단순히 미적인 것을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그 보다는 누가 그렇게 판단을 하였는 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았더라’ 라고 하셨을 때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좋아하셨던 것인데 반해서, 하와가 그 단어를 사용하였을 때는 자신의 의지대로 주인이 자기가 느끼기에 좋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먹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좋다고 하와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토브라는 단어는 ‘미’ 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누가 이야기를 한 주인이냐, 즉 주인이 누구이냐 라는 것이 이 단어가 오늘 이 본문에서 사용된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에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다시 살펴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근심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게 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지금 세상 힘 만을 좇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고 있으며,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그 세상을 따라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만 판단하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그러한 삶의 모습이 가인의 자손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의 가능성과 비극
우리는 어떤 가요? 우리도 혹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내가 생각하기에 옳고 좋아 보이는 것을 따라 내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고 계획하며 살아가지는 않으십니까? 그러한 삶 속에서는 결코 하나님께서 함께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삶 속에서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없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다면, 예수 없는 사람들은 분명히 무언가 큰 문제를 일으키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 잘 살며, 심지어는 훨씬 더 영화로운 삶을 사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사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나는 예수를 잘 믿고 살고 있는데, 믿음도 없는 저 사람은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사는 것 같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없이 사는 인생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을 따라 자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그러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근심의 이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근심은 단순히 어떤 여자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자기의 중심으로 판단하고, 모든 생각과 계획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죄의 본질 2: '모든 여자' - 힘과 욕망에 따른 착취
두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할 구절은 이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표현입니다. 그냥 읽으면 일부다처제를 이야기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 아내를 거느렸다는 이유 때문에 노아의 홍수가 왔다고 생각한다면, 나중에 나오는 여러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잘 이해가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가 한 명 이었나요?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떻습니까? 아내가 한 명 이었나요? 야곱은 아내가 4명이나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보시면 아내가 하나인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대홍수가 왔으면 지금 세상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옳은 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명백히 창조의 질서와 상충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문제로 인해서 그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고, 평화가 무너지며, 많은 문제와 어려움에 직면하는 경우를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대홍수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으며, 불심판이나 다른 형태의 하나님의 심판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즉, 여러 아내를 소유했다는 것 때문에 이 대홍수의 심판이 초래되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조금은 과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이건 분명히 잘못된 행동임에 분명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성경이 말하려는 핵심은 조금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는 바는 힘과 권력, 그리고 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욕심과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하고 있다는 것, 즉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모두 다 가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라는 말의 뜻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사람이라도 모두 다 가졌다는 뜻입니다. 부러우셔요? 이런 사람들은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최근에 자주 회자되는 소위 갑질을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누리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웃의 고통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자기만 행복하면 끝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게 되면, 자기가 차지할 수 있는 부분이 작아질 수 있으니까요.
결과: 부패와 폭력의 만연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경향이 우리들 속에 없을까요? 물론 우리는 가진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처럼 살지도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어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를 아주 아프게 하는 것은 힘들거나 어려운 일들이 아니라, 내가 이유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때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내가 당하는 이유는 상대방보다 훨씬 더 못 가진 나의 소유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내가 가난하게 산다고 저들이 나를 이렇게 불공평하게 대접하고 우습게 본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런 경우를 만나면 우리들은 참기가 힘이 들어지게 됩니다. 참 어려운 문제이지요. 저는 이것이 실질적으로 성경의 표현하는 폭력이라고 생각하고, 또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11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성경은 폭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라진 결과입니까? 이웃은 사라지고 이제는 나라는 존재 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바로 폭력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6장 11절 말씀에서는 그 결과로 이 땅에서 사라졌던 두 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 앞에 부패하였다는 말은 즉,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쓰레기와 같았으며, 모두 썩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는 여전히 이 세상은 보기에 좋았던 것이었죠. 내가 소유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다 아름답게 보였으며, 이 모두를 소유하는 것이 너무 즐거운 일 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의 끝은 공허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은 가지고 싶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그렇게 사는 것이 자신들의 눈에는 여전히 좋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썩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포악함이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폭력이 넘쳐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이익이 상충될 때면 그것을 먼저 차지해야 했고, 양보할 수가 없게 되었고, 그것을 쟁취하지 못했을 때는 자신을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겪고 한국은 아주 가난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 시대에 자신의 먹을 것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으로 치부되고는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끼니를 먹지 못하면 다음 끼니 때까지 굶어야 했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에는 여전히 한국이 넉넉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 부터 항상 학교에서 줄을 서서 급식을 받게 되면, 빵 하나를 제공받을 때 만약 줄을 늦게 서서 그 빵이 다 떨어져서 받지 못하게 되면 그것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던 학교에 불평을 하는 대신에 제가 받았어야 할 빵 하나 제대로 차지하지 못한 저에게 모든 비난이 쏟아졌었습니다.
제가 아마존에 선교를 갔을 때 일입니다, 그 곳에서는 용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용서를 절대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는, 반드시 복수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복수를 해야 그 사회 내에서 존재감을 증명 받고, 심지어는 이웃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복수를 해야 하는데, 선교사님들이 와서 용서를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들은 그 용서라는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사회에서도 이러한 정서적, 문화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대로 우리가 살지 않았기 때문에 가질 수 밖에 없는 그 많은 눈물과 아픔과 한숨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노아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서는 하나님도, 이웃도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네피림과 용사: 명성을 추구하는 자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 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본문의 문장을 직역하게 되면 아주 탁월하고 뛰어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을 자식들이 낳았고 그들이 전부 용사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하나님의 아들들은 왠지 초월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렸을 때, 재미있게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오르게 하는 구절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 보면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은 신과 인간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성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은 성경이 쓰여진 방식을 오해한 결과로 생긴 잘못된 해석입니다. 오늘 살폈듯이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용사나 명성이 있는 사람들도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 그런 신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신화의 내용에서 일반적으로 나오는 신과 인간의 혼인은 주로 신이 인간을 강제로 탐하는 경우라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자식의 스토리가 나오게 됩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으며 결국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지를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런데 만약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그 용사들의 이야기가 이러한 신화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 다음은 그 자손들이 살았던 이야기와 그 족보가 나와야 할 것 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해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초점이 완전히 다르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그러한 일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신화적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네피림 (Nephilim) 이라는 것도 더 연구를 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아직은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히브리 말로 네피림 ( נְפִיל H5303) 이라는 단어는 ‘타락한 자’, 혹은 ‘타락을 시키는 자’ 라는 뜻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이 조차도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해석에 따라서 이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단어가 사용된 문맥을 근거로 하여 네피림은 아마도 거인이나 용사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렵습니다. 민수기에서는 아낙 자손이라는 부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들을 묘사할 때 이들을 네피림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좀 이해가 안 되시지요? 왜냐하면 네피림은 홍수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므로, 홍수 때 다 죽어버린 네피림이 아낙 자손의 조상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떤 때는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이 본문도 마찬가지 이고요. 나중에 또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오늘은 시간 관계상 이 점은 깊게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판결의 내용보다는 그 판결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이 네피림이 누구인지를 살피기 보다는 우리가 이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점 만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구절에 대한 우리나라 성경의 번역은 조금은 모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지막 부분에 ‘명성을 가진 자’, 혹은 ‘명성이 있는 사람들’ 이라는 표현은 영어로는 ‘men of name’ 입니다. 직역하면 ‘이름의 사람’ 이 되지요. 다른 표현으로는 ‘명성의 사람’, 즉 ‘men of renown’ 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이 구절이 소유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성을 추구하고 이름을 내려는 사람’. 즉, 그냥 명성을 얻은 사람이 아니라, 명성을 내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사람을 뜻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는 지금까지 살폈던 창세기 말씀의 문맥과도 굉장히 잘 어울리는 해석입니다. 가인 자손들의 삶이 어떠했나요? 성을 짓고 그것에 자기 아들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라멕도 비슷합니다. 자신이 가인보다 더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했던 사실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명성을 추구하는 것은 가인 자손들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입니다.
시편 82편: 스스로 신이 되려는 자들
만약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번역된 이 구절을 우리가 신들의 아들들이라고 번역하였다면, 이와 그 신들의 아들들에 관한 아주 비슷한 말씀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 82 편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재판관들을 다 모아서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관들이 모두 불의한 악덕 재판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과부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배를 채우려 하고 공평한 재판을 하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계속해서 거들먹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스스로를 신 또는 지존자의 아들이라 자칭하면서, 스스로를 왕처럼 여기고 있구나.’ 실제로도 그 당시 많은 이방 나라의 왕들은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기록들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 절에서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들을 사람처럼 죽을 것이며, 자신을 스스로 신이라 높이지만 여느 군주들처럼 넘어지게 될 것이다’.
통합적 이해: 가인의 후손, 뱀의 후손
여러분, 아담의 범죄의 시작이 무엇이었나요? 아담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이 바로 그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같은 문제가 반복하여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던 잘못을 저질렀던 것을 우리가 살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자칭 신들의 아들인 것처럼 행동하려고 하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을 대표로 하여 성경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우리들의 타락은 그러므로 뱀의 후손이 가지는 특징들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가인의 후손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가 뱀의 후손이며 우리 인간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뱀의 후손을 풀어 말하자면 타락한 천사의 후손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타락한 천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가인의 후손으로서 타락한 천사인 뱀의 후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마치 왕이나 지배자들처럼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이름을 내며, 왕과 지배자들처럼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해석의 방법으로는 오늘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힘들었지만, 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가인의 후손으로 보게 됨으로써, 이 모든 본문의 말씀들이 이전 창세기의 문맥과 거의 일치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며, 그 안에서 타락한 천사의 모습, 즉 뱀의 후손의 모습, 그리고 왕과 지배자의 모습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표현된 이 구절은 셋의 후손이 아니라, 사실은 가인의 후손으로 대표되는 뱀의 후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들은 단지 아내를 여러 명 거느린 잘못만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모든 판단의 주인이 되어서 자신의 힘과 권력으로 다른 이들을 폭력적으로 착취였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갈래 길: 자기 이름 추구 vs. 약속된 메시아 소망
이것이 성경이 오늘 우리들에게 말하려고 하는 하나님께서 근심하셨던 이유였습니다. 이 뱀의 후손들의 이름들은 노아의 이름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알았으며, 그들의 삶도 노아의 삶과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살폈습니다. 라멕이 노아의 이름을 지을 때, 그 특징이 잘 보여졌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죄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수고하고 있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해 줄 것이다, 안위하게 하리라’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을 받고 있지만 노아가 바로 그 여인의 후손으로 와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도 역시 그 여인의 후손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 역시도 진정한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하나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 노아를 통해서 여인의 후손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된 신들의 아들이라 자칭한 가인의 후손들은 자기의 이름만을 높입니다. 자기의 힘과 자기의 부를 추구하고, 폭력적으로 자기의 원하는 것을 탐했으며, 더욱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인들을 취해서 용사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을 내려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네피림도 그 무리들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낳은 용사들이 메시야 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 아니라, 자기들이 낳고 만든 자기들의 후손을 메시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낳은 후손이 이 세상을 구할 용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모습: 힘과 인정의 추구
이것이 주님께서 마지막 세대를 말씀하실 때 노아의 세대를 그토록 많이 인용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우리의 사는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우리들의 현재의 모습과 노아 시대의 모습은 너무나 흡사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돈을 추구하며 삽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우리들은 여전히 힘의 싸움을 합니다. 누구든지 힘을 가지려고 하고, 심지어는 그 힘으로 남보다 앞서려고 하고 남보다 위에 서려고 노력합니다. 교회에서 한 때는,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힘의 상징으로 가지려고 할 때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직분들이 남보다 위에 서있고 더 많은 힘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봉사하고 섬기는 일이 아니라 남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직분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힘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는 힘, 남을 자기보다 아래에 두려고 하는 힘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또 다른 것도 힘이 되었습니다. 바로 정보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교회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남들보다 먼저, 그리고 더 많이 가지고 싶어합니다. 예를 들면, 새롭게 편성된 구역들에 포함된 사람들의 정보를 남들보다 먼저 알려고 그렇게 노력합니다. 조금 지나면 모두 알게 될 일인데, 이것을 남들보다 먼저 아는 것이 좀 더 교회의 중심에 가까이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더 힘을 가진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목사와 개인적 친분을 힘으로 여길 때도 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 입니까? 우스운 이야기이기는 한데, 실제로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힘을 추구하려는 죄의 경향성을 잘 보여줍니다.
거짓 메시아를 섬기는 교회
그래서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진정한 우리의 메시야가 예수님께서 아닐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낳은 것이 바로 메시야가 되는 것입니다. 말할 때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으로 나아간다고 하면서도 교회 내에서 회의만 해보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무슨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돈이 그 중심에 있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가 다시 살리고 공동체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모든 회의의 결론이 돈으로 귀결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돈이 메시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우겨봐도, 결국 끝까지 가보면 필요한 만큼의 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초대 교회에서의 진정한 교회다운 모습을 볼 때, 모든 것이 부족하고 누구나 가난했던 그 당시의 교회에서 어떻게 그러한 위대한 일을 했는 지에 대해서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우리의 생명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일을 지금 우리의 교회에서 해야 한다는 그 사명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단지 돈으로 쉽게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미 돈이 메시야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봉사가 우리의 메시야가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좀 더 크게 부흥시키려면 우리가 전부가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더욱 더 힘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런 마음 자체가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교회를 살리는 일에는 봉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 만으로 교회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결국 그것이 메시야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남포교회에게 우리들이 자주 가지는 바램이 무엇인가요? 우리 교회에 좀 더 많은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하고 또 듣기도 하시지요? 우리 교회는 건물도 좋고, 목사님도 좋고 교인들도 다 괜찮지만 여기에 사랑만 조금 더 있으면 남포교회가 살아날 것이라고 많이들 생각하시지요? 만약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 사랑이 메시야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우리들의 사랑이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리가 우리의 메시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리만 제대로 알면 교회가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교리가 메시야 입니다. 마찬가지고 우리의 거룩조차도 메시야가 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살리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교회를 살리는 단 한 분의 메시야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살리는 것입니다. 다른 어떠한 것으로 우리의 구원의 출발로 삼으시려 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다른 것으로 메시야를 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살리기 위해 들었던 모든 것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무너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유다서에서 이것을 아주 멋있게 표현해 주셨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이단들이 교회로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장 4절 말씀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이 이단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로서 이미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들이며, 교회 내의 성도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들어온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은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더 좋아하는 것으로 교회를 섬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슷한 모습들이 많은 이전의 한국 교회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 자체가 메시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 교회에 제자 훈련이 유행일 때가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많은 교회에서 따라 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자 훈련이 실패하게 되는 경우는 이 훈련이 교회를 살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자 훈련이 메시야가 된 것이었죠.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홀로 하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 죄의 고통을 아시는 아픔
이것이 하나님을 한탄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피하지 못할 종말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한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한탄한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는 ‘후회한다’, 혹은 ‘회개한다’ 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시는 분이신 가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하나님은 후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일로 놀라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의 결과를 이미,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죄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 지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이 땅에 오신 인간 중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한 비참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과 고통을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에도 그 고통과 슬픔을 담으실 수 밖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니까요. 하나님의 마음은 바로 우리의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본문의 ‘근심’ 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하셨던 말씀 중에 사용되었습니다. 하와가 임신하고 자녀를 낳는 고통이 더해질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된 ‘고통’ 이라는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의 ‘근심’ 과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그 고통을 당하신다는 뜻이지요. 여러분이 세상에서 고치기 힘들고 고통스러운 병을 앓고 있다가 낮게 되었다면, 그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지인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위로가 나오고 어떻게 그 병을 이기게 되었는 지를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실 것입니다. 왜 지요? 그 고통을 잘 아니까요. 하나님께서 이 죄의 고통을 잘 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고통의 무한한 깊이를 직접 이 땅에서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고 계신 그 하나님의 마음이 심히 아프고 심란하신 것입니다. 고통스러우셨습니다. 의로운 심판 앞에 서 있는 인간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인간 문제의 핵심과 참된 필요
우리가 하나님 자리에 앉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더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면서 살 수 없는 우리가 너무 아프셨던 것입니다. 자기가 중심이 된 인간들은 항상 결핍을 느낍니다. 항상 더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돈도 모아 보고, 자식 교육에 집중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 자식에게 모든 부담과 짐을 지울 때도 있습니다. 자랑도 하고 싶고, 더 많이 소유하고 좋은 집에서 살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올바른 자리에 두지 않는 모든 인생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 함께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고통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겪어야 할 가장 큰 고통은 바로 그 멸망의 고통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고통입니다. 자기의 길이 옳은 줄로 착각하면서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아는 것이며, 내 자리가 어디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필요한 자리입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
노아의 표현대로 한다면, 그 하나님 앞에서 받은 은혜 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내가 보는 은혜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은혜, 내가 생각하는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려야 하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인생을 위해서 내가 갈망하는 그 은혜는 버려야 합니다. 혹시 내 인생에서 이것만 해결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있으신 가요? 이러한 내 눈에 보이는 은혜를 포기하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그 은혜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노아에게는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께서 나를 붙잡고 있는 그 사탄의 머리를 부술 것이고, 나를 자유하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실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 그 메시야,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홍수의 참된 의미
그러면, 이 노아의 홍수는 무엇일까요? 노아의 홍수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답은 물이 얼마나 찼었고, 얼마 동안 계속되었는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노아의 홍수의 답은 바로 여인의 후손, 그 은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홍수였습니다. 우리가 이제 배우게 될 그 대홍수 사건의 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른 데서 답을 찾으시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답입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답이 되셔서, 그 예수를 답으로 여기는 인생을 깨달아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오늘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길이 어떠한 것인지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가 이 대홍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유일한 답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그 길을 겸손과 말씀에 대한 갈망으로 나아가게 하사, 저희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누리며 기뻐할 것인가를 알게 해 주시고, 오늘 저희가 깨달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예수 한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하여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