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강해 설교집/창세기 강해

창세기-29-라멕과 노아

lampchurch 2025. 4. 19. 03:30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 27절에서 32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아들이 안위하리라하였더라. 라멕은 노아를 낳은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노아는 오백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아멘.

 

라멕과 노아, 그리고

오늘 함께 살펴볼 본문은 아담의 족보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노아의 아버지인 라멕이 아들의 이름을 짓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름을 짓는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은 노아를 통해 창세기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안식의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땅의 저주와 수고로운

아들의 이름을 라멕이 지어줄 라멕이 이야기입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아들이 안위하리라하였더라’. 구절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수고롭게 노동을 하면서 살고 있었음을 있습니다. 수고롭게 일한다는 말에서 우리는 우선 힘든 노동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노동은 힘든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월요일에 일하러 나가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수고롭게 일한다 표현에는 이보다 심각한 의미를 포함합니다. 본문은 이유를 땅에 대한 저주라고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왜냐하면 땅이 저주를 받아서 우리가 일한 만큼의 소산을 땅이 내어 주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우리의 일하는 것을 거슬려서 사람들에게 대적 같이 역할을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상 땅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없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에덴에서의 모든 풍요를 인간은 잃어버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오직 자신들이 가진 것만으로 살아야만 하게 것입니다.

 

소유의 부족과 인간의 폭력

그러면 그렇게 소유가 부족한 인간들끼리 함께 살게 되면 무슨 일이 항상 벌어질까요? 인간은 자신이 가진 만으로는 만족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옆에도 자신들이 소유한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이웃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이웃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서 그것으로 만족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의 역사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수고롭게 일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노동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의 전체가 바뀐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의 역사에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풍요 속에 있을 때는 그러한 다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가진 것만으로 살아가야만 , 드디어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가 생기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뺏는 자와 빼앗기는 자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창세기 6장에서 아주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날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성경에서강포 표현된 포악함이라는 단어는 폭력이라는 뜻입니다. , 남의 것을 빼앗고, 남보다 가지려 하는 인간의 모습이 지금 세상에 강포함을 만들어 내게 것입니다.

 

타락의 심화: 동시대의 이야기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생소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성경을 읽다 보면, 아담과 가인 이야기, 가인의 족보, 그리고 나서는 아담의 아들 셋의 족보, 다음에 노아가 마지막으로 나오고 바로 홍수의 사건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린 이야기들이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나열되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노아 시대에 인간이 타락해서 홍수를 내리신 것은 모든 일들이 모두 같은 시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가인에서 시작해서 라멕까지 오는 자손들의 이야기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간의 이야기와 그렇게 다른 시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라멕의 이야기가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는지 기억나십니까? 라멕의 이야기는 아내가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혼인의 상황이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어서 6 1절과 2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혼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혼인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가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며, 그것은 라멕과 노아 시대에 걸쳐진 같은 시간대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 죄의 자랑과 하나님의 은혜

뿐만이 아닙니다. 라멕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라멕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가인에게는 벌이 7배이지만 나한테는 77배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가인은 7배의 벌을 받았으나, 나는 77배의 벌을 받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 이야기입니다. 말을 쉽게 설명하자면, ‘가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일곱 배로 갚아 주신다고 하였지만 죄를 지은 나를 해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77배로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나 라멕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해 보겠다고 오히려 죄를 짓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괘씸한 일이 아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으면 은혜에 감사해서 돌이킬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라멕은 자신의 죄가 커지면 하나님의 은혜와 복도 커지게 되므로 이제 자신은 죄를 짓고 살겠다고 선포합니다. 쉬운 말로 자신은 이제 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존: 자기 의존과 삐뚤어진

여러분, 설명을 들으시니 로마서 말씀이 생각나시지요? ‘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권하시는데, 라멕과 우리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시는 풍성함을 오히려 멸시하며 분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라멕은 세상을 택했으며, 속에서 자신이 겪어야 했던 많은 문제들, 불공평, 아픔, 눈물, 고통과 수고들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힘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내가 가짐으로 행복해질 있다고 생각을 하는게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나의 행복을 추구하게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라멕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을 드리니까 라멕만이 정말로 나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지금 시대에서도 범하기도, 겪고 당하기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가장 착하게 사는 사람이나 세상에서 가장 악하게 사는 사람이나 상관없이 모두 똑같은 원리로 살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어떤 원리입니까? 나의 행복과 나의 영광이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의 전부라는 원리입니다. 라멕이 찾은 모든 문제들의 해결책은 바로 힘이었고, 힘이 그에게 있어서 정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죄와 악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생각하고 계획해서 행동하고 있다는 점이 죄악의 무서운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과 계획의 모든 결론은 바로 힘을 사용하는 것이며 힘은 결국 폭력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로 삐뚤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평화의 길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죄로 삐뚤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정의의 길을 걸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우리가 해변으로 나가면 모래사장에서 게를 발견합니다. 게들은 모두 옆으로 걸어갑니다. 그런데 게들은 모두 자신들은 똑바로 걸어간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이 앞으로 걸어간다고 생각할 지라도, 실제로 게는 옆으로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게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인이므로 삐뚤어져 있을 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가는 같지만, 우리는 정의의 길을 똑바로 걸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평화를 외치기 위해서 힘과 폭력을 사용하는 역설을 행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면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힘이 없는 곳에서는 평화를 이야기할 수도 없다는 것이 우리가 동의하는 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 모습입니다. 이것이 거짓인지 혹은 참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러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비참한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의와 정의로운 판단이 없는 그러한 힘들은 결국 폭력이 밖에 없고,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대상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살펴보았던 로마서 말씀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너희는 그렇게 하나님의 풍성함을 멸시하면서 하나님의 기다리심과 인내하심, 사랑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너의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따라 진노의 ,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를 너에게 쌓고 있구나.’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렇게 고뇌와 아픔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우리의 고집으로 인해 우리는 절대로 회개하지 않는 모습이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의 머리에 그대로 쌓고 살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라멕도 그러했습니다. 라멕은 마치 자기가 저질렀던 일들을 자랑인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셋의 후손 라멕: 하나님의 구원

라멕의 이야기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시대가 어떠했는지를 보았다면, 이번에는 셋의 후손이며 똑같은 이름을 가진 라멕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라멕이 바로 노아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역시도 똑같이 죄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던 아담의 후손 가정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인류가 번성한 세상 가정의 이야기를 성경이 집중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까요? 그것은 라멕을 통해서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이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족보를 보여주기 위함 입니다.

 

숨겨진 이야기: 므두셀라와 년의

그리고 라멕의 인생 속에는 가지 특징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우리가 금방 발견할 있는 특징이나 다른 하나는 말씀 속에 숨어 있는 독특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숨어 있는 특징은 에녹과 라멕을 이어주는 라멕의 아버지였던 므두셀라로부터 발견됩니다. 여러분, 므두셀라가 살았던 햇수를 계산하려면 언제 그가 죽었는 지를 살펴보면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던, 홍수가 시작되었던 바로 해가 므두셀라가 죽은 해입니다.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았는데, 라멕은 므두셀라보다 5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므두셀라는 해를 살다가 홍수가 일어나던 해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은 므두셀라의 이름의 의미를 해석하여서 말씀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므두셀라(מְתוּשֶׁלַח, H4968) 므투’(מֹת, H4962) 라는 말은죽음혹은남자 뜻하는 히브리 단어입니다. 그리고셸라흐’(שֶׁלַח, H7973)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는 창을 던지는 남자로 해석할 있습니다. 그런데므투죽음이라는 의미로 해석하고셀라흐 모음 사용을 달리하여쉴라흐라고 읽으면 이는보낸다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있게 됩니다. , ‘죽음을 보낸다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 하나님께서 홍수를 보내시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해석 방법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지만 이런 해석 방법에 너무 현혹되시면 안됩니다. 히브리어나 헬라 원어를 사용하는 해석 방법이 전적으로 옳은 성경 해석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도 해석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확실하다는 증거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주 확실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므두셀라가 살았던 기간 내내 보여주었던 에녹의 삶의 모습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가 살았던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다녔습니다. 므두셀라가 살았던 기간 동안, 그리고 라멕과 노아가 살아 있을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 했을 것이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간이 천년이 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시기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복음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노아가 배를 만드는 정도 시간 동안만 홍수의 심판과 방주를 통한 구원을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녹과 셋의 후손을 통하여 천년 이상의 세월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그래도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천년 동안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증언: 오래 참으심과 회개의

여러분,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지요? 성경은 당시의 에녹과 므두셀라, 그리고 라멕과 노아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를 베드로전서와 후서에서 기록합니다. 베드로전서 3 19절입니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서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나오는데, 이렇게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지옥으로 내려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3 동안 지옥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구절을 보면 확실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으로 가셨다는 말은 20절에 설명이 나오는데, 그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이라는 사람들은 전에 노아의 날에 방주를 준비할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않았던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과로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겨우 여덟 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 성령 하나님께서 에녹과 므두셀라, 라멕과 노아 감동시키셔서 오랜 기간 동안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에서는 그들이 에녹과 자손들을 얼마나 멸시하였는지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말씀중의노아의 라는 것이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노아의 때와 내가 다시 임할 때가 같다라고 성경에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결코 쉽게 이해될 있는 본문이 아닙니다. , 그러면 베드로 후서에서 내용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3 3절부터 말씀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멸시하며, 주께서 오신다는 말이 이루어지기는 하느냐며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조롱하며 이야기할 , 주께서 강림하신다고 천년을 들어왔는데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달라진 이라고는 어느 하나도 찾지 못했다며 빈정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5 말씀에서는 저들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이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약속대로 예수께서 오셔서 이제 세상이 끝날 거라고 이야기하는 예언과 경고의 말씀을 일부러 잊어 버리려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 자들은 누구였을까요? 계속되는 6 말씀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 때는 바로 홍수 때였으며, 그들은 에녹과 자손들의 예언과 경고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자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홍수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를 예수님의 오심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이 되는지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 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같고 년이 하루 같다는 가지를 잊지 말라.”. 물론 여기서 년이라는 말이 기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본 대로 에녹에서 부터 노아에 이르기까지 기간이 년이 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기나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9 말씀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이 베드로 사도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고, 스스로 교만해 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어떤 일을 맞이하게 되는지를 사도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드러난 이야기: 노아, 안식의

라멕의 삶의 숨겨진 비밀은 바로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고 년의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번째로 살펴볼 라멕의 인생에서 명확하게 드러난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노아 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노아의 이름을 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하며 일을 해야 하는 우리들을 노아가 안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위라는 말은 위로라는 말로 바꿀 있습니다. 그런데 위로라는 단어와 노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발음의 유사함을 이용한 성경에 나타난 ‘Word play’ 입니다. 어떤 word play 들어 있는지 한번 들어보세요. 노아라는 말은 안식이라는 히브리 단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전 설교에서 살폈듯이 하나님의 성령을 의미하는루아흐바람 의미하는 히브리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노아와 안식이라는 단어는누아흐입니다. R 발음이 아니라 N 발음으로 시작하는 단어입니다. 안식을 의미하는누아흐 그러므로, 안식을 뜻하는샤바트와도 연결되는 말입니다.

 

기대와 현실: 안식 대신 심판이 왔는가?

이러한 이름 짓기에서도 있듯이 셋의 후손인 라멕은 시대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분명한 문제, 지금 세상이 얼마나 그들을 수고롭게 만들며, 그들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돼야 되는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문제의 핵심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요. 라멕은 할아버지인 에녹과 아버지인 므두셀라로부터 사람들의 불순종과 복음을 듣고 회개하지 않는 모든 죄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분명히 들었고, 그것을 세상에 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라멕은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라멕의 말들은 굉장히 재미있는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라멕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으며, 그의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며 안식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대신 세상에는 무엇이 왔나요? 심판이었습니다. 언뜻 듣게 되면 말이 맞지 않는 같습니다. 그래서 몇몇 신학자들은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라멕이 노아를 낳으면서 그로 인해서 위로와 안식을 소망하였지만 대홍수로 인해 모든 기대가 깨어졌고, 소망은 절망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은 제일 처음 가인 때에 이미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하와가 가인을 여인의 후손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를 자신이 낳았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여인의 후손이 아니라는 것이 후에 일어난 일들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가인은 악한 자가 되었고 하와는 절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과는 달리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이야기는 가인과는 전적으로 달랐습니다. 노아의 이야기는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반복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라멕이 굉장히 중요한 의도를 가지고 노아의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을 본문 전체의 문맥을 통해서도 수가 있습니다.

 

타락 이후의 안식: 대적을 이기는

왜냐하면 라멕은 창조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안식을 한다는 말은 창조의 언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들은 전부 창세기에서 나왔던 창조의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 6 동안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7일에 쉬셨으며, 쉼을 안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안식으로 지금 노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 라멕은 지금 창조 때에 있었던 안식의 완성이 노아로 말미암아 완성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식 대신에 물의 심판, 대홍수의 심판이 장면에서 나오게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노아를 보시고 사람에게 안식을 약속하시는 장면이 우리에게 떠오르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안식과 대홍수 사건 사이에는 가장 사건이 하나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가지 이야기는 부드럽게 이어지지 못하였고, 사이에는 인간의 ,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가 이야기 사이를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리하여 이제 이상 노아를 통해서는 우리가 창조의 안식을 회복할 없게 것입니다. 원래 창조의 안식이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고 완성하신 ,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통하여, 창조의 안식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모습 이었지요. 그것이 창조가 완성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뒤틀리게 되었습니다. 곳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죄를 이겨야 하는 안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넘어서야 하는 안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멕의 안식은 단순하게 조금 쉰다는 의미와는 다른 차이가 있음을 있습니다. 안식이라는 뜻의 오늘 본문의누아흐라는 히브리 단어는 성경에서 여러 등장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과 멀지 않은 부분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역대상에 나오는 이야기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들으시면 금방 아는 사람에 관한 내용입니다. 역대상 22 9 말씀입니다. “보라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것임이니라”. 솔로몬을 통해서 주변에 있는 모든 대적들로부터 평안과 안식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안식은 분명히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것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입니다. 그런데 같은 원리이긴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안식이 분명하지만, 지금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세상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이제는 모든 대적으로부터 평안으로 얻어야 되는 안식이어야 하는 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적들과 싸워서 이기는 승리를 통해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라멕은 노아의 때에 대홍수의 심판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수: 심판이자

여러분, 사건과 아주 유사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대적 했음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다. 유다도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왕이 여러 바뀌었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왕들은 너무나 적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앗수르에 끌려가고, 그리고 바벨론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을 우리는 바벨론 포로 시대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에 대해서 재미있는 표현을 합니다. 바벨론으로 저들이 끌려가서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은 분명한데,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것을 통해 가나안 땅은 안식을 경험하게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땅에 안식을 주리라.” 죄의 심판과 함께 안식이 온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어쩌면 대홍수라는 것이 심판이었으며, 그것이 모든 것을 쓸어 버렸던 때문에 여덟 명의 사람만 남기고 모든 사람들이 죽었던 사건이 어떻게 안식일 수가 있을까 라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겨우 여덟 만을 건져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 전파되고,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고 얘기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인지 아실 있을 것입니다. 비록 8명만이 하나님께 돌아왔지만 지금 라멕은 그것을 안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이루어 졌기 때문입니다.

 

라멕이 이야기하는 안식은 악에 대한 승리를 선언하는 안식이기도 합니다. 대적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악에 대하여 승리하는, 그래서 정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성취되는 그러한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안식은 때문에 고통받고 신음하는 땅과,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했던 하나님께 돌이켰던 그의 백성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그러한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은 단순히 위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정의가 땅에 선포되는 것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우리는 어쩌면 창조의 안식만을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땅에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과 아픔이 있냐고 원망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고통과 원망과 아픔을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끝내려고 하신다면 무슨 일이 벌어져야 될까요? 심판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정의가 서야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죽음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사 우리로 하여금 돌아오라고 하시는데, 돌아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지금 멸시한다면 여러분과 저에게 심판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창조의 안식만을 원할 때가 있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어떠한 엉뚱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분의 힘이 있는 자리에 우리도 함께 있고 싶고, 그런 자격을 얻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것입니다. 우리는 자리에 앉을 있는 자격이 없지만 끊임없이 안식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결과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경쟁에서 이겨서 라도, 심지어는 누구보다 믿어서라도 자리에 올라 가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이 가더라도 나는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요. 어떻게 본다면 그러한 신앙은 결국 나만의 영광과 나만의 안식만을 생각하는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분이 나의 영광과 안식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을 루터는영광의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자기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영광의 신학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과 능력을 보여 줘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부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것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내가 여전히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문제가 됩니다. 나는 계속해서 죄와 싸우는데, 여전히 죄에 지고 있으며, 나의 존재는 항상 이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가 하는 자책이 모두이며 모든 관심이 자신의 그러한 모습에 집중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심은 오직 나에게만 있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으며, 나의 구주, 나의 힘이 되시며, 나의 공의와 깨끗함이 되신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에 대한 관심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며. 이것을 루터는영광의 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나의 영광과 행복만이 중요합니다. 내가 되고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되는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대조되는 성경이 우리에게 원하는십자가의 신학 대해서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모든 고통과 죽음까지도 나를 위하여 모두 맞으시고 죽음까지 같이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것이 루터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십자가의 신학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가장 비참한 자리까지 내려가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안식이 하나님과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 나의 모든 힘을 쏟아 내어야하는 그러한 안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되어야 하는 안식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대적과 싸우셔서 승리하셨고, 우리의 안식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안식은 죄를 이긴 안식입니다.

 

안식의 전쟁 1: 이미 승리한 자의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죄를 이긴 안식을 가진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주 어떻게 하면 죄를 이길 있는가 하는 것으로 출발을 삼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를 이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어떻게 죄와 상대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비슷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이상 나아지고, 인정받고,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혹은 나은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 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쟁은 그런 싸움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어떻게 승리를 누리는 지를 보여주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싸움의 성격이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싸우는 것이지, 모든 것을 가지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탄은 여러분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 여러분은 사탄을 두려워하십니까? 여러분이 죄를 두려워하고 마귀를 두려워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놀라운 사실이 여러분이 죄와 싸우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죄와 여러분이 혼자서 싸우려고 하십니까? 여러분은 안식의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여러분은 투쟁을 하고, 전투를 하고, 이를 악물고 죄와 싸우려고만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안식의 전쟁을 하고 있기에 모든 것을 가진 자의 전쟁은 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빼앗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싸움은 주는 싸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속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면서 기쁨의 인생을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좋은 예가 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에게 천억 불의 재산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생각만해도 기쁘신가요? 그런데 어느 나의 실수로 정도 손해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손해본 때문에 울고 불고 난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웃긴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지금 천억 불을 가지고 살면서 때문에 난리를 치고 있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각박하게 될까요? 우리 마음은 이렇게 싸움을 정말 마치 분노와 그리고 뭐라고 할까요 절망감과 그리고 어쩔 없는데 마음에 드는 실망과 그런 것들과 싸워야 할까요? 우리는 그렇게 밖에 싸우지 못할까요?

 

안식의 전쟁 2: 서로 격려하며 함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안식의 전쟁은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며 싸우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싸우는 것입니다. 인상은 쓰지 말고 싸우는 것입니다. 죄가 왔는데 죄와 인상 쓰고 죄에 빠져서 최대의 짓지 않으려고 죄만 붙잡고 싸우는 아니라 여러분과 저는 죄를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으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의 전쟁입니다. 안식을 얻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여러분은 안식을 누릴 자격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것을 누리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상 죄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저는 죄에게서 이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죄와 싸울 있는 것이며,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모두를 함께 응원하는 것입니다. 서로 응원할 밖에 없습니다. 죄와 싸우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을 우리는 항상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사람들을 만나면서 겪는 힘든 일들, 교회 내에서 당하는 억울한 일들, 서로의 의견 차이로 화나고 짜증나는 모든 일들이 바로 죄와 싸우는 입니다. 아내와 남편분들도 싸우시지요? 역시 죄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부싸움의 시간에도 제발 서로를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남편이 지금 화를 내고 답답해 하며 나쁜 말을 쏟아 붇고 있는 이것도 죄와 싸우고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남편분에게 격려를 주시면 어떨까요? 남편은 지금 아내와 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싸우는 것이며, 그는 순간 부인의 응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미움과 싸워야 하고, 욕심과도 싸워야 하며, 매일 치솟는 우리의 분노 와도 싸워야 되고, 우리의 욕심과도 싸워야 합니다.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싸워야 하며, 절대 혼자서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기쁨으로 싸우지 못하는 이유: 회개의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 죄와 맞닥뜨려서 싸울 필요도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절망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죄와 똑같이 싸우고 있으며 죄와 우리가 똑같이 기쁨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짓지 않으려고 소리 지르는 ,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안식의 전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다음부터는 웃으면서 부부 싸움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부 싸움을 하다가 이것이 죄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웃으십시오. 우리는 없는 싸움을 하고 있고, 이것 때문에 우리가 무너질 이유가 없으며, 이것 때문에 우리가 쓰러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힘드신 분이 계신가요? 죄와 마주 보고 싸울 용기가 나지 않으신가요? 여러분이 기뻐하면서 싸우지 못하는 혹시 아시나요? 안식의 전쟁이 되는지 아시나요? 즐거움이 없거나 환경이 주는 평안함이 없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돌이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다시 찾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론: 참된 안식, 예수 그리스

우리가 이렇게 수고하며 싸우는 일을 결국 마지막으로 끝내실 분은 노아, 안식,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분이 우리의 안식입니다.

 

마무리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저희가 무엇으로 싸우는지, 싸우고 있는지, 무엇이 우리의 승리의 비결인지 저희는 어쩌면 겉에 묻어 있는 진흙만을 걷어 내다가,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보석은 발견하지도 못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희는 안식의 백성이며, 안식으로 위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서로가 함께 격려하며 싸우게 하여 하소서.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전쟁 속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도와 하소서. 그리고 전쟁을 당당하게 나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고, 즐거운 인지, 그리고 주와 함께 가는 길이 얼마나 평안한 일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여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