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28-아담의 7대손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5장 1절과 2절, 그리고 24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아멘.
아담의 형상과 하나님의 형상
창세기 5장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야기로부터 다시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관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담을 지으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절을 보면 아담이 130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며, 그 이름을 셋이라 부릅니다.
이 대목에는 두 가지 중대한 영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그를 통해 태어난 셋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셋에게 아담의 형상 또한 고스란히 전해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왕이 되려 함으로써 이 땅에 죄를 끌어들인 장본인인 아담의 타락한 본성이 셋에게도 그대로 전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중적 형상의 긴장은 이후 계속되는 아담의 계보 속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아담의 계보와 그 의미
아담의 계보에는 수많은 인명이 등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 10명의 사람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아담의 계보는 창세기 전체에서 약 열 번가량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대체로 이 10명의 이름만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아담의 계보가 단순한 인구 조사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설계된 구조와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구조 속에 담긴 영적 의미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계보에는 각 인물이 몇 세에 자녀를 낳고 얼마나 살다가 죽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이 시간들을 산술적으로 합산하면 인류의 기원을 대략 기원전 4000년경으로 보게 되며, 이에 신약의 2000년을 더해 인류 역사를 약 6000년으로 계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담의 계보에는 기록된 이름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풍성한 세대들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보에 나타난 세대수만을 더해 인류의 물리적 역사를 단정 짓는 일은 신학적으로 그리 생산적인 일은 아닙니다.
성경의 다른 계보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명단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어가는 데 필수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편집된 경우가 많습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계보 역시 의도적으로 14대씩 세 시기로 나누어 기록되었으며, 다른 족보와 대조해 보면 상당수 인물의 이름이 생략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의 계보는 역사적 연대기라기보다 구속사적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적 편집’의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이 수치들을 근거로 인류 역사를 추측하기보다는,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를 읽어내는 것이 본문을 대하는 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계보의 패턴: ‘낳고, 살다가, 죽었더라’
죽음의 현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계보를 통해 매우 중요한 영적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낳고, 살다가, 죽었더라’는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이 문구는 아담의 후손이 직면한 가장 비극적인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이자 피할 수 없는 문제는 바로 죽음입니다. “정녕 죽으리라”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인간은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단순히 생물학적 생명이 끊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겪어야 하는 모든 비참한 상태를 총칭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기에 인간은 더 이상 자발적으로 선을 행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서로에게 악을 쓰며 경쟁하고 투쟁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힘으로만 살려다 보니 인생은 필연적으로 고독과 슬픔, 절망과 아픔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함께 찾아온 이 외로움과 고통이 바로 아담의 형상을 입은 모든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죽음 속의 소망: '낳았고' - 약속의 지속 그러나 성경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고 있음을 기록합니다. ‘죽었더라’는 종결 어미 앞에 항상 ‘낳았고’라는 동사가 선행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에 대한 기대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인간의 유한함과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낳았고, 죽었다’는 역설적인 반복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해결책: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왕 노릇
결국 하나님의 때가 차매 그 여인의 후손이 오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 한 구절은 인류 계보가 반복해 온 ‘낳고 죽는’ 저주의 사슬이 어떻게 끊어졌는지를 선포합니다. 로마서 5장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묘사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생명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의 영혼은 소멸하지 않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 왕 노릇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이 우리를 통치함으로써, 우리 인생이 참된 기쁨과 풍성함, 영광을 누리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담 후손의 비참한 결말 속에서도 하나님은 이 구원의 역사를 기어이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패턴의 예외: 에녹의 등장과 의미
마침내 24절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지루한 패턴을 깨뜨리는 경이로운 사건이 등장합니다. 바로 에녹에 관한 기록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아담의 7대 손인 에녹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는 저주의 원리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결과가 존재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에녹의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적인 신비 체험이나 우리에게 도덕적 권면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에녹처럼 동행하면 우리도 죽지 않고 승천할 수 있다’는 식의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에녹의 사건은 구원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구속사적 이정표입니다. 사실 에녹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미 성취된 일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에녹이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의 후손은 ‘낳고 낳음’을 통해 오시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죽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 쳇바퀴 같은 계보 속에서, 에녹은 마치 암흑 속의 한 줄기 빛처럼 등장했습니다. 진흙탕 속에 핀 장미처럼 나타난 에녹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의 의미 (에트 할렉)
에녹의 인생을 정의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에트 할렉’은 ‘함께’를 뜻하는 ‘에트’와 ‘걷는다’를 뜻하는 ‘할렉’이 결합한 형태입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 전체에서 똑같은 형태로 단 네 번만 등장하는데, 그중 두 번이 에녹의 이야기이며 나머지는 노아와 말라기의 제사장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동행’이라고 하면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나 뜨거운 영적 체험을 떠올립니다. 기도를 깊이 하거나 말씀 속에서 큰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본질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동행’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강렬하게 느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식이나 체험과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은 항상 곁에 계셨던 하나님을 내가 비로소 인식하고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이지,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오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도,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조차 우리를 떠난 적이 없으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동행’은 단순히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영적 고양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깊은 신뢰와 관계의 본질을 담고 있습니다.
동행의 본질: 믿음 (히브리서 11장)
구약에서는 다소 함축적으로 표현된 에녹의 동행을 신약의 히브리서 11장은 명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오늘 본문인 창세기만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 죽음을 면하고 승천한 것처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은 근거가 ‘믿음’에 있었음을 밝히며,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였다는 증거를 받았다고 덧붙입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입니까? 이어지는 히브리서 11장 6절이 이를 정의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의 동행을 특별한 영적 감흥이나 신비로운 상태에 몰입하는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 자체를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정의합니다. 그 믿음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믿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세상적인 보상이나 가시적인 성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이 상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늘의 도성을 기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자신과 항상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했습니다. 이 신뢰가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나라에 갇히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동행하는 삶의 모습
우리의 동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세운 ‘나의 나라’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기쁨을 나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하나님을 나의 기쁨으로 삼으며, 그분이 내 인생을 다스리시고 지키시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치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의 실체입니다.
이제 나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급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사랑하며 그분을 의지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걱정과 염려, 슬픔과 눈물조차도 내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너는 내 소유다”라고 말씀하실 때는, 우리의 성공이나 경건함만을 취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눈물, 아픔까지도 함께 소유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무거운 짐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인생을 재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인생을 내 눈으로 보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말씀하시는 그 시선으로 나의 인생을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을 믿고, 그곳을 푸른 초장과 다름없는 은혜의 자리로 고백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신뢰의 삶을 가리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즉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라 부릅니다.
동행의 또 다른 의미: 선지자적 삶 (유다서)
에녹의 동행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성경은 에녹을 ‘선지자’로 묘사합니다. 짧은 유다서 14절은 이를 명확히 기록합니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은 당시의 경건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아담의 7대 손인 에녹은 10대 손인 노아 시대에 임할 홍수 심판뿐만 아니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최후의 심판까지 내다보며 선포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인간의 실존을 깨닫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죄인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삶을 포함합니다.
동행과 죄의 고백, 그리고 돌이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고백하며 살았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지닌 또 하나의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주님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손이 그 동행 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죄가 불러올 심판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에녹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나타나는 참으로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부르셔서 돌이키게 하시고 은혜와 긍휼로 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면, 결국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끊임없이 돌이키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주님께서 나의 승리이시며 오직 그분만이 나의 모든 것 되심을 고백하는 삶, 나의 모든 아픔과 슬픔조차 주관하시는 주님께 인생의 전부를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히 알기에 우리는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갑니다. 여러분, 죄를 지었기 때문에 멸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멸망하는 진짜 이유는 주님께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우리들은 그 돌이킴을 좀처럼 하지 못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돌아보니 저조차도 이것을 참 못하는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님은 항상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용서해 주겠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사실대로 이야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후에 닥칠 일들을 미리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약속을 믿지 못해 절대로 속내를 털어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 사실대로 말씀드렸다면 꾸중을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는 모든 이에게 그들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며, 하나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그 쉬운 일을 하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또 다른 특징은 주님께로 끊임없이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자신의 죄를 깊이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과 이웃을 향해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가장 놀라운 방법 중 하나가 됩니다. 동행하는 삶 속에서 때로는 존경할 만한 탁월함이나 훌륭한 인격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거짓을 멀리하고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려 애쓰는 모습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나의 죄 됨을 고백해야 합니다. 나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며, 매일 주님께 돌이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증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돌이킴을 포함하는 일이며, 에녹의 삶에서 그것이 찬란하게 드러났습니다.
동행하는 삶의 증거: 믿음
에녹은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나의 잘난 것을 드러내는 인생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록 연약하여 쓰러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기에 끊임없이 주님께 돌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자가 되며, 말씀을 따라 걷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에녹의 마지막 특징: 죽음을 보지 않음 (vs. 라멕)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볼 에녹의 삶의 특징은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간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이제 영원한 동행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이 부분은 아담의 또 다른 7대 손인 라멕의 인생과 대조해 볼 때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아담의 두 명의 7대 손을 대조하여 기록합니다. 한 명은 가인을 통해 나온 라멕입니다. 가인의 계보에도 에녹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는 가인이 쌓은 성의 이름이자 가인 자신을 위해 바쳐진 이름이었습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은 ‘바친다’입니다. 가인의 에녹이 자신에게 바쳐진 이름이었다면, 오늘 본문의 에녹은 누구에게 바쳐진 인생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인생이었습니다.
이름은 같았지만 그 삶의 향방은 극명히 갈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인이며, 똑같이 좌절하고 절망하며 아픔 속에 거할 수 있습니다. 겉모습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똑같은 ‘에녹’입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바꾸고 운명을 결정짓는 차이는, 그 이름이 사람을 위하여 바쳐졌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하여 바쳐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에녹은 하나님을 위한 이름이 되었고,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되었습니다.
라멕의 자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든 초점을 세상에 맞추고 살았습니다. 물론 목축과 농사의 조상이 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일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음악이 필요하고 미술이 필요하며 생업을 위한 노동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것 자체를 죄라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가인의 계보가 가진 모든 관심이 오직 이 세상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에녹과 그 계보는 마지막 초점이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음의 의미: 동행의 연속성
믿음으로 에녹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고,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졌습니다. 성경에는 에녹 외에도 엘리야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듯 창공을 가르고 날아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이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은, 그들이 밟고 있던 세상의 땅이 하늘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단지 발을 딛고 있는 장소가 변화되었을 뿐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핵심은 에녹이 어디에 있다가 어디로 상승했느냐가 아닙니다. 에녹이 땅에 있을 때도 하나님과 함께 걸었고, 하늘에 올라갔을 때도 여전히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땅에서의 인생이나 하늘에서의 인생이나 에녹에게는 하나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에녹의 삶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놀라운 특징입니다.
우리의 현재적 하늘 경험 - 에베소서 2장
그렇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쉴 때, 믿지 않는 이들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저와 여러분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했던 그 걸음이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그대로 계속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히 동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에녹을 통해 보여주신 이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우리에게 실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5절과 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서 ‘앉히시니’라는 표현은 미래형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완료형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에 앉히심을 입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하늘을 맛보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 나라에 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에녹이 하늘로 옮겨진 사건은, 장차 신자가 누릴 구원의 영광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현재적인가를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앉히셨다는 이 장엄한 선언은, 신자의 삶이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천국을 이 땅에서 누림
우리의 안식이시며 사랑과 평강이 되시는 주님께서, 지금 내 곁에서 함께 걸어 주시고 훗날 하늘에서도 여전히 우리와 동행하신다면, 우리는 에녹이 누렸던 그 모든 영광과 기쁨을 이미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고 천국을 소망하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에서와 똑같이 바로 이곳에서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걸으시며, 여러분의 힘과 기쁨과 능력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우리를 수렁에서 건지시고 앞으로도 건져 내실 그 주님께서는, 쓰러져 있는 우리의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는 당신의 얼굴을 우리가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부끄러워서 숨고, 게을러서 숨고, 나태함에 도망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찾고 또 찾으십니다. 성령 하나님을 충만하게 부어 주시며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십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을 우리에게 한량없이 부으십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밑 빠진 독’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항아리 밑부분이 깨져 있으면 아무리 물을 부어도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밑 빠진 독에도 물을 가득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이 빠져나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부으면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혹시 깨진 독처럼 느껴지십니까? 어딘가에 구멍이 나 있어 무엇을 채워도 허망하게 빠져나가는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인생에 은혜를 한량없이 부어 주십니다. 물이 새나가는 양보다 훨씬 더 압도적으로, 차고 넘치도록 부으셔서 마침내 여러분의 인생을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주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으로 넘쳐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동행
그렇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않습니다. “살아서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겪는 환난과 고통, 아픔이 어떻게 우리를 아주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죽음을 보지 않는 우리는 환경에 흔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귀한 사실, 즉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알고 주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사실에 감격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주님의 이름, 주님이 아는 우리의 이름
우리는 이제 주님의 이름을 압니다. “여호와 로이”, 나의 목자이신 주님의 이름입니다. 나의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의 이름입니다. 단 한 번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춥고 배고픈 인생 속에서, 하나님은 나의 양식이 되어 주셨습니다. 갈증만이 가득했던 메마른 삶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생수보다 시원한 영혼의 생수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압니다. 나의 승리, 나의 반석, 그것이 우리 주님의 이름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무엇이라 부르실까요? 여러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여러분의 진짜 이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걷기에, 하나님의 길이 곧 여러분의 인생길이 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동행의 약속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며 걷다 보면, 말씀 그대로 어느 날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 장면을 참으로 아름답게 번역했습니다. “One day, you will be no more!” 우리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될까요? “For God will take you to Himself!” 주님께서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길 위에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우리는 영원히 그 길을 주님과 함께 걸을 것이며,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나의 주 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 주님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인생은 풍성해질 것이며,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쏟아질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게 된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다가 이 땅을 벗어나 하늘을 걸을 자들이요, 영원히 주님의 길을 걸어갈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놀라운 말씀 안에서 이 땅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주와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그 안에서 새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라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