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24-에덴의 동쪽
하나님 말씀은 창세기 3장 22절부터 4장 1절까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아멘.
아담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여인의 후손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의 이름을 산 자의 어머니라 지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담의 고백을 듣고 가죽 옷을 지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셨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또렷하게 상상이 되시나요? 이 때에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분위기가 어땠을까요?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우선 가죽 옷을 지어서 입혀 주시고, 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 되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에덴 동산에 그냥 두시고 함께 살게 해 주시면 좋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이 날의 분위기가 아주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제 제기: 에덴에서의 추방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결말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이들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에 하나와 같이 되었고, 또 그러다 생명 나무의 실과도 먹고 영생을 누릴 지도 모르겠다.’고 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어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들을 추방하였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 날의 분위기상으로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그들을 동산에서 살도록 허락하실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두 가지 이유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와 더불어 특별히 아담과 하와를 내어 쫓으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도 세 가지 정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추방 이유 1: 선악 판단의 기준 변화
첫 번째로는 성경에서 설명하는 두 가지 이유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이미 앞서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들이 죄의 결과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나가야할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이 말이 이들이 하나님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보다는 이들이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모든 선과 악을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기준이 된 인간에게 그 때까지 그 들의 기준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그 기준으로 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기준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언제나 변할 수 있고, 불완전하며, 모든 면에서 부족한 인간을 기준으로 해서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판단하고 해결해 나가겠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나요?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아는 바처럼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비참해졌고, 그리 멀리 가지 않고 우리가 지난 몇 주간 뉴스를 통해 알게 된 내용처럼, 지구는 환경 파괴와 전쟁의 소식들로 가득하며, 모든 악의와 욕심으로 가득한 삶 속으로 우리는 던져졌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기준이 되어 살아 가는 삶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 결과로 인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도 심각한 균열이 생기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어떻게 거기서 겸손히 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섬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게는 먹을 것이나 심지어는 TV 채널을 가지고도 싸우기도 하고, 또 누군가 나를 조금이라도 무시하는 말을 하면 이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분노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인간들은 서로를 죽이며, 나라와 나라가 전쟁을 하는 그 모든 일들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많은 업적들도 물론 존재하지만, 그 위대한 업적들 조차도 사실은 결국 우리를 파괴하는 일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들의 지금 당면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에덴 동산, 우리가 성전 이라고 부르는 그 거룩한 나라,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임재 하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그 곳에,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버린, 심지어는 서로 간의 관계 조차 깨어져 버린 아담과 하와는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추방 이유 2: 생명나무와 영생의 문제
그러면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두 번째 살펴볼 이 내용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손을 뻗어 먹고 영생을 누리게 될까 두려워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지금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들을 내어 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과연 죄인 이어도 생명나무의 열매만 먹으면 영상을 하게 되는 건가요? 일단 본문 자체는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즉, 이 생명나무가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개념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인이시므로, 오늘 본문의 영생을 주는 생명나무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이러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왔던 창세기의 내용에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일관적인 라인과는 조금은 상이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첫 번째는 우선, 우리가 죄인이며 생명나무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죄를 지은 인간이 그 그리스도를 따 먹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게 허락해야 되는 것 아닐까요? 죄를 지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들을 살리시는 것이 맞아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 생명나무를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가 무엇인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을 수 있겠구나 라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도 이 생명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생명나무도 있지만, 예수님도 함께 등장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수님으로 계시다가 다시 생명나무로 되셨다가 이런 식으로 왔다 갔다 하시는 것일까요? 어떤 때는 열매가 되셔서 먹히기도 하셨다가, 그 다음엔 다시 예수님께서 되셔서 등장하시고, 그렇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므로 이러한 단순하고 직설적인 생명나무의 해석은 많은 오류의 여지를 가지는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이 생명나무가, 특히 이 창세기 내에서는, 우리가 먹고 구원을 얻도록 하는, 그래서 영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말씀을 오해는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생명나무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명나무를 이야기할 때, 생명나무와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할 것이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나무와 그 열매의 모든 혜택을 우리가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 집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나무와 생명나무 열매의 혜택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영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이 문장에서의 영생이라는 단어는 결국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살며,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모드 것을 풍성히 누리는 것, 그것을 우리는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를 가지고서는 하나님과의 그런 관계를 맺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의역을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좀 더 정확한 해석은, ‘저들이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다” 가 아니라, ‘저들이 그 실과를 먹음으로 인하여 영원히 살게 될까 두렵다’ 라는 식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생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저희들이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영원히 누리는 영생입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잘 알고 있는 성경 구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영생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른 영생도 존재합니다. 죄의 결과로 영원히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속에 있는 것도 이 영생이 포함하는 의미 중 하나입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는데 어떻게 그런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성찬과의 연결: 합당하지 않게 먹는 것의 의미
정말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생이 아닌, 심판과 형벌의 영생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하시려면 고린도서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1장 26절 입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 이니라.”.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찬에 대한 구절입니다. 왜 제가 성찬에 대한 이 구절을 오늘 본문과 연결시켜 보여 드렸을까요? 이전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우리들에게 성례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 성례라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우리는 세례를 통해 구원될 수 없지만, 그것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을 치시는 것입니다. 확증을 해주시고 인정을 해 주시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의 실과도 성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역할을 하는 고린도 전서의 성찬이 어떠한 내용으로 다음 구절과 연결이 되는 지를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7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 이니라.”. 주님의 몸인 떡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사람이 먹으면 당연히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생명의 떡이시고, 피가 되시니까요. 그런데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게 되면 주의 몸과 피에 대해서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밝히시며,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28에서 29장 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 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지니 주위에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 이니라”. 이 말씀은 성찬을 받을 때 우리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이제 아주 중요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성찬을 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먹고 마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오늘 본문에서의 생명 나무 와도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즉,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에도 우리는 죄를 먹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언제 그런 일이 발생할까요? 네, 그 실과를 합당하지 않게 먹었을 때죠. 그러면 그 합당하지 않을 때는 언제 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 피조물로서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포함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때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한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은 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은 사람은 합당한 자에 속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거룩해진 후에야만 우리는 비로소 의롭게 되며 그 합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만약 우리에게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거룩하거나 의로운 자가 아니라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합당한 사람,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만이 이 성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일주일 동안 한 번도 짓지 않았거나, 너무나 선하게 살았거나, 매일 아침마다 큐티를 하며, 하루 종일 예수님을 믿으면서 신이 났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합당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이 이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십자가 빠지면 그것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생명이 아니라 죄를 더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적용은 성례 로서의 생명나무에도 같은 효력이 있습니다. 즉, 죄인이 생명나무를 먹는 일은 자기의 죄를 먹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써 영원히 살아서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을 때마다 끊임없이 자기의 죄를 먹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의도 1: 첫 번째 은혜 - 죄의 고착 방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내어 쫓는다는 말은 그들이 이러한 상황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겠다는 뜻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구절 속에 숨어 있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감춰진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뜻입니다. 죄를 쌓았고 그 위에 또 죄를 쌓은 채로 살아가는 우리를 그 죄 속에서 영원히 살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뜻입니다. 우리를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다고 작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셨고, 그를 위해서 처음으로 하신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어 쫓는 일 이었으며,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인간에게 처음으로 베푸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 2: 구원의 유일한 길 - 여인의 후손
이 놀라우신 은혜를 깨닫는 동시에 우리는 굉장히 중요한 또 다른 사실을 함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인 인간의 구원이 이 생명나무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 길이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며, 동시에 아까 성찬의 내용에서 살폈듯이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에서는 아직까지 십자가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의미인 ‘여인의 후손’ 을 통하여 그 구원이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여인의 후손을 통하지 않고서 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면 마찬가지로 죄에 죄를 더할 뿐이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는 주어진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뿐이며, 창세기의 단어를 사용하면 ‘여인의 후손’ 을 통하는 길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구원의 방법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길 만이 우리가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분명히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의 새로운 이름, 하와를 그 여인에게 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죽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으면, 그들은 아마 그 에덴에서 계속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진정한 실체이자 근거는 여인의 후손의 등장입니다. 그 여인의 후손의 등장 이후에야 비로소 아담이 했던 믿음의 고백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이 와야 지만 그 가죽 옷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그 ‘여인의 후손’ 이 오게 되는 이 세상으로, 그들이 죽을 수 밖에 없는 광야로 그 거룩한 성전에는 살 수 없는 그들이 쫓겨남으로써 드디어 여인의 후손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과 역사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성
그러나 이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고백, 우리의 이러한 신앙은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게 됩니다. 아담은 분명히 믿음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와에게 산 자의 어머니라고 새로운 이름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실제의 사건이 있지 않고 서는 아담의 고백, 우리의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 속에 많은 상징들과 시적인 문학 표현들로 표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책인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책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기초로 한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을 기록한 책인 것이며, 이것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실제로 우리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모든 신앙의 고백들이 헛 것들일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아담과 하와를 그 죄의 자리에 그대로 두지 아니하시고 실제로 에덴 동산 밖으로 내어 쫓고 계십니다.
에덴과 성전 정결 의식의 연결
이 장면을 조금 더 자세히 이해하시려면 에덴이 어떤 곳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에덴은 우리들이 앞에서 살폈듯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 안으로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 성전을 정결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생명나무의 의미도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것도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성전은 정결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은 구약 성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패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전, 혹은 성막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속죄제는 여러 제사의 한 종류입니다. 이 제사는 문자 그대로 인간들의 죄를 속죄하는 대속하시는 그러한 제사입니다. 그럼 우리는 보통 그 속죄제 때, 피로 된 그 제사를 지내고, 짐승을 바치기 때문에 그 짐승이 나를 위해 죽었고, 그러므로 내 죄는 속함을 받았다고만 생각을 합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속죄제를 드릴 때, 그 제사를 위해 번제 제물로 드리는 그 양이나 소를 잡은 다음에 그 피를 들고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서 향단, 즉 향을 피우는 단 위에 그 피를 발라 주거나 뿌리게 됩니다. 이 향단 앞에는 보통 큰 커튼이 쳐져 있습니다. 그 커튼의 이름이 바로 지성소와 성소를 갈라서 나누어 놓은 휘장입니다. 이 휘장에는 그룹이 새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룹을 두셔서 에덴을 지키신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지성소의 내부는 지극히 거룩한 곳이며, 그 거룩한 장소 안에 있는 분향을 보면서 제사장이 피를 일곱 번 뿌리는 됩니다. 이때 제사장은 바로 그 커튼, 즉 휘장을 향해서 뿌리는 것입니다. 그 휘장은 서쪽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장의 등 뒤가 동쪽이 되겠지요. 이게 속죄제입니다. 왜 그렇게 하냐 하면, 내 죄가 이 짐승이 죽음으로써 다 사하여 진 것이 첫 번째이며, 그 피를 향단과 휘장을 바라보며 뿌림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죄를 성전을 향하여 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전이 대신 더러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워진 그 성전을 속죄하기 위해서 또 다시 속죄를 해야 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위하여 속죄일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가지고 가서 속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이 더러워진 것이지요. 여러분, 이 성전의 속죄의 모습이 아까 우리가 에덴이 죄로 더러워졌다는 구절과 연결이 되시나요?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깨끗 게 하는 것처럼 성전을 성결하게 해야 되었습니다. 이를 위한 날이 속죄 일 이었으며 그 날에는 그래서 속죄 제물로 두 마리의 수염소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을 그 한 마리를 잡아서 그 피를 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을 정결케 하는 피를 뿌리는 방향은 아까 살폈던 속죄 제사의 방법과는 반대입니다. 속죄 일의 제물의 피는 반대로 지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그 안에 있는 법궤, 즉 은혜의 보좌, 혹은 시은좌라고도 불리는 속죄소에서 휘장을 향해서 뿌리게 됩니다. 아까 살폈던 속제 제사의 피는 동쪽에서 서쪽에 있는 휘장을 향해서 뿌렸다면, 이 성전 정화의 피는 지성소 안에서 동쪽의 휘장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피는 동쪽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런 후에는 지성소 밖으로 나가서 이번에는 향단으로 가서 그 향단을 향해서 또 피를 뿌립니다. 이것도 역시 동쪽 방향으로 휘장을 등진 상태로 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지성소와 성소의 동쪽 바깥에 있는 번제단에 가서 모든 정결 의식을 마치게 됩니다. 이 제사의 마침은 번제단 위에서 그 제물의 기름을 태움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계속하여 동쪽으로 나아가며 진행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첫 번째 수 염소를 제물로 드립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모든 과정이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 첫 번째 제물로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예식을 치렀고, 그 피 뿌림으로 성전이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죄의 정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한 수 염소가 제물로 바쳐지게 됩니다. 이 속죄일에는 제사장이 한 손으로만 안수를 하여 모든 죄를 전가하지 않고, 반드시 두 손을 그 제물의 머리 위에 얹어서 안수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두 손으로 하는 안수를 통해서 전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이 염소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보입니다. 여러분, 이제 히브리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것이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뭘 지금 보여주는 거예요? 이것은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될 모든 죄의 상징을 미리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수 염소를 ‘아사셀 제물’ 이라 칭하며 성문 밖으로 멀리 내어보내게 됩니다.
히브리서를 통한 해석: 예수 그리스도의 영문 밖 고난
이 처럼 오늘 이 에덴 동산에서도 정결 의식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선 아담과 하와를 동쪽으로 가게 하십니다. 바로 오늘 설교 제목인 ‘에덴의 동쪽’ 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담과 하와를 그 죄로 인해 쫓아 내십니다. 여기까지는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은 내용에 대한 설명이 히브리서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0절에 13절 까지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여기 까지가 속죄일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죄 제물을 불사르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12절을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 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골고다 언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의 그 고난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도 3: 두 번째 은혜 - 예수 그리스도의 동행과 성육신
말씀 중에 나오는 그 영문 밖, 혹은 성문 밖으로 우리가 나아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죄 때문에 그 동산 밖으로, 동쪽으로 쫓겨나간 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만이 나간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인 우리들도 아담과 하와처럼 사실상 에덴에서 쫓겨나서 광야에서 살게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쫓겨난 자리에 우리뿐만 아닌 예수 그리스도도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와 함께 나오셨습니다. 여러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이 아담과 하와, 우리들뿐 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하나님 자신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에덴 동쪽을 뚫고 성문 밖까지 우리를 위해서 에덴 동산이 아닌 광야로 나오신 분이 계셨던 것입니다. 죄 속에도 죄가 더 쌓고 있던 우리를 영원한 형벌 속에 버려 두지 않으시기 위해 에덴에서 쫓아 내신 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은혜이셨다면, 우리들을 위해서 그 아들을 함께 내어보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두 번째 은혜입니다.
영원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실제로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나오셔서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냥 오신 것이 제물로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다 에덴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에덴의 그 놀라운 기쁨과 그 풍성함을 누리기를 바라고 살고 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아담과 하와는 더욱 더 그런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을 경험 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경험했고 그 땅에 살았던 아담과 하와는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을 평생의 꿈으로 품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단순히 에덴으로 우리를 다시 데리고 들어 가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나오신 것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이 직접 에덴이 되셔서, 그 몸이 성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으며 성경은 이것을 ‘그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에덴의 풍요로움과 모든 선함과 기쁨이 충만하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 자신이 길이셨고, 생명이셨고, 진리이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에덴 동산이 되어 주셨습니다. 에덴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 곳에서 나오신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통해 그룹이 새겨져 있던 우리를 에덴 동산으로부터 가로막고 있던 그 휘장을 위에서 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갈라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나 그 하나님의 보좌인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에덴으로 돌아갈 길을 마련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에덴 동산이 되셔서 성전이 되어 주셨고, 또한 우리는 그로 인해 성전으로 세워졌습니다.
세 번째 은혜: 그리스도 안의 현재적 영생과 풍성함
생명나무도, 그 열매도,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이제부터 따 먹을 것을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왔을 때, 우리 안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고, 영원한 생명나무의 열매를 그 즉시 먹을 수 있는 자가 되었고, 에덴의 영광과 기쁨과 즐거움을 오늘 경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모든 것을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은혜입니다.
적용과 권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응답
여러분, 그 그리스도께서 에덴을 가지고 오시는 방법은 십자가를 통한 것 이었기에, 그는 당신의 살을 찢어 주셨으며, 당신의 몸을 부수셨습니다. 당신의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은 에덴의 문을 여셨고, 에덴의 문 속에 우리를 같이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영문 밖의 길을 걸으셨던 분입니다. 쫓겨난 우리들을 위에서 바라보시며 다시 내려오실 계획을 세우셨던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 내실 그 순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걷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는 삼 남매 였습니다. 우리들이 야단을 맞아야 할 때면 어머니께서는 아주 공평하게 혼을 내셨지요. 무슨 일이 있건 간에 저희들은 함께 그 책임을 져야 했고 야단을 함께 맞았습니다. 제가 맏이이고 막내는 저와 아홉 살 차이가 났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똑같이 혼이 나니까 제가 별로 기분은 좋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가 잘못한 일도 많지 않았고요. 하지만 언제나 함께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막내가 저희 집에서 가장 믿음이 좋고 자유로운 성격을 가진 친구였어요. 지금은 뉴질랜드에서 목사로 있는 친구인데 저와는 달리 지금도 상당히 그 자유로운 성격의 배울 점이 아주 많은 목사입니다. 그런데 어릴 때도 비슷한 성격이었던 지라 무슨 일이든 겁나는 것이 없고, 일단 저지르고 보고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어머님 속이 많이 썩으셨겠지요. 물론 막내였기에 사랑도 듬뿍 받았 지만요. 하루는 이 막내 때문에 어머니로 우리 삼남내가 혼이 나기 시작했고 막내부터 매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이 막내는 잘못을 빌지 않고 어머니에게 끝까지 대어 들었습니다. 자기는 잘못이 하나도 없었다는 주장이었죠. 그러다 보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나신 어머니께서 이 막내를 집밖으로 쫓아 내셨습니다. 겁이 나게 해서 잘못을 뉘우치게 하시려던 것이었죠. 그런데 이 막내는 그 와중에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그 명령대로 진짜로 집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제가 그 동생의 나이가 초등학교 1 학년 때쯤 이었는데 진짜로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모든 어머님이 화와 속풀이가 저에 게로 집중이 되었지요. 도대체 동생을 어떻게 가르쳤기에 저렇게 되었냐는 호통이셨죠. 그런 다음에 어머니가 저에게 뭐라고 하셨을 것 같으셔요. “당장 나가서 찾아와!” 그래서 저는 당장 뛰어 가서 막내를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그냥 예화이며 비유이므로 제가 했던 그 역할을 이해를 위해서 인용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했던 저의 역할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역할할인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 막내만 집으로 데리고 오면 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나오신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나요? 우리를 위해서 였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의 옛말에 ‘버선발로 뛰어나온다’ 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나라의 모든 영광과 거룩, 모든 지혜와 의가 되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 이시자 에덴동산 자체이신, 스스로 성전이신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버선 발로 뛰어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죽기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 분을 의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분을 믿고 따라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은혜를 모른 척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그 주님께서 우리 깨끗하다고 하셨다면 도대체 그 무엇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는데 누가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그 분이 나를 건지셨 다면 어떻게 우리가 한숨만 쉬며 살 수 있겠습니까? 고백을 드리자면 제가 이 본문을 공부하면서 굉장히 많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 본문은 너무나 아름다운데, 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저 한숨 밖에는 나오지 않더라고요. 그러나 곧 마음을 추스리고 회개하며 외칠 수 있었습니다. 실망과 한숨, 그리고 심지어는 죽음이 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망아, 네가 승리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죄야, 네가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리라!”. 나를 위해 쪼개시고 찢기신 그리스도에게 로 달려 갈 뿐 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달려갈 뿐 입니다. 내 마음의 상처를 안고 달려갈 뿐 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서 우리는, 그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에게 나오신, 사정하시듯 우리들을 앉아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로 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르던 위대했던 믿음의 선진들은 이 사실을 기록하고 전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찬송으로 남겼습니다. ‘만세 반석 나를 위해 쪼개지시니, 나를 위해 열리시나, 그 안에 나를 숨겨 주소서. 주에 찢어진 몸에서는 피가 흐르며, 물을 쏟으셨으며, 그것으로 나의 죄를 온전히 고치시고, 나의 죄의 형벌과 모든 죄의 권세로 부터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내 손으로 한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그 명령을 만족시킬 수 없고, 쉼 없는 노력과 넘치는 눈물로도 나의 죄를 지울 수 없어, 오직 주의 십자가만이 나를 받으시며 구원해 주옵소서. 주의 은혜로 구원해 주옵소서. 십자가에 나를 담아 주옵소서.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십자가에 나를 담아 주옵소서. 이 손으로는 하나님께 가져올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나는 오직 십자가만 붙드 나이다. 나는 헐 벋었 사오니 나를 입혀 주옵소서. 나는 아무 능력이 없으니 주의 은혜를 바라볼 뿐 입니다. 나는 더럽고도 더러우니 샘물 되신 주님이시여, 나를 씻어 주소서. 내가 주께 도망 하나이다. 구주여, 나를 씻어 주소서. 그렇지 아니하시면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덧없는 인생, 그 숨을 쉬며 살아가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든지, 죽음에 다다라서 내 눈을 감을 때 든지, 저 나라를 향해 올라가 심판 보좌에 앉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내가 바라볼 그 순간에도, 그 심판의 저주의 순간이 올 지라도, 만세 반석 되신 주님 나를 위해 열리시니, 나를 위해 쪼개지시니, 나를 위해 찢어지시니, 반석이신 그 그리스도 안에 나를 숨겨 주옵소서.’
드디어 창세기 4장 1절에서 아담과 하와는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내가 아들을 낳았 도다!”. 여전히 여인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바로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우리는 우리가 쉴 수 있는 이 여인의 후손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여러분이 만나신 이 여인의 후손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을까요? 그 약속을 아신다면 사랑하는 형제들 이여. 이 일주일 동안 그 분에게 로 달려 가십시오. 그 분에게 숨으십시오. 그 곳에서 안식하십시오.
마침 기도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저희가 주님께로 달려가오니, 우리의 은혜이신 주님이시여,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이시여, 우리의 지혜이신 주님이시여, 우리의 의이신 주님이시여, 그 주님 안에 우리를 숨겨 주시고, 그 주님의 십자가 안에 나를 발견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 풍성한 에덴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고,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먹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